영원의 아이 - 상 영원의 아이
덴도 아라타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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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읽은지 얼추 한 달이 되어 간다. 덴도 아라타의 <가족 사냥> 같은 책을 읽어 봤는데 소재에 비해 재미가 적었다. 그 이유는 설교적이기도 하고 작가의 소설 서술방식이 '아이의 인권 보호' 등 가치관에 따라 소재를 고르고, 사건을 묵묵히 적어내려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기교 같은 것은 부족한 작가에 속한다.  

상,하권 합쳐 총 1500쪽에 이르는 이 대작 역시 설교를 길게 늘어놓은 것이라 생각된다. 결국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짧게 압축된다. "부모라고 해서 아이의 인권을 함부로 유린할 권리는 없다". 이 한마디를 위해 세 명의 아이는 기나긴 인생 여정을 살아간다. 작가가 툭-하고 생기를 불어넣은 더미 인형처럼. 부모에게 (다양한 형태로) 학대당하고, 어린 시절 정신병동에 갇혀 생활하고, 그런 과거로부터의 탈출을 꿈꾸고, 결국 성인이 되어 나름의 인생을 살고, 셋이 재회를 하고, 다시 여러가지 사건에 휘말린다.  그 성인이 되어 발생하는 사건들의 인과관계나 추리과정 등이 조금은 부자연스럽다. 인물들이 좀 작위적이다.  

어떤 장면에서는 뭉클하기도 하고 감동도 받았다. 안타까움도 느꼈다. 그건 확실히 주제의식이 훌륭하기 때문일 것이다. 적절한 부분을 지적한다. 부모의, 아이에 대한 권리는 어디까지인다. 실제로 이 세상에는 자기 아이라고 굶겨 죽이거나 때리거나 지속적인 언어 폭력은 일삼거나 하는 부모들도 있는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면 누구나 부모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묵묵히 그냥 읽어내려갔다. 재미있고 즐거운 작업이라기보다는 조금은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책읽기였다. 하지만 그의 문제 제기에는 공감한다. 사족이지만 흔히 사회파 미스테리라고 부르는, 무거운 사회의식에 바탕한 글쓰기라면 덴도 아라타가 아닌 미야베 미유키 스타일이 더 마음에 든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더 재미있기 때문이다. 인물들이 더 손에 잡힐 듯 가깝기 때문이다.   

이번에 재발간된 이 책은 공들여 참 잘 만들었다. 흠이 있다면 겉표지가 얇은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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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 진화론 - 세상을 바꿀 엄청난 변화가 시작됐다
우메다 모치오 지음, 이우광 옮김 / 재인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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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법칙 : 신의 시점에서 세계를 이해한다
제2법칙 : 인터넷상에 만든 인간의 분신이 돈을 벌어주는 새로운 경제권의 탄생
제3법칙 : (≒무한대) × (≒無) = Something(의미 있는 존재), 또는 사라졌어야 할 가치의 집적-44쪽

제1법칙에서 신의 시점이란 '위에서 전체를 내려다보는 시점'을 말한다. (중략) 일반인은, 그러나, 검색 엔진 운영자가 전세계 웹사이트에서 어떤 질문과 답변이 오가는지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검색 엔진 운영자는 세계의 불특정 다수 무한대 사람들이 지금 무엇을 알고 싶어하는지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방대한 양의 정보가 전체로서 어떤 통일성을 갖고,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자세히 파악하는 것이 '신의 시점에서의 세계 이해'이다.-44쪽

"인터넷상에 만든 인간의 분신이 돈을 벌어주는 새로운 경제권의 탄생"이라는 내용의 제2법칙은 '인터넷 경제권'에서 사람들이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인터넷에 자신의 분신(=웹사이트)을 만들어두면, 자신을 일을 하든 놀든 간에 자신의 분신이 인터넷에서 돈을 벌어주는 세계, 그런 삶의 방식이 가능해진 것이다.-46쪽

제3법칙은 (≒무한대) × (≒無) = Something(의미 있는 존재), 또는 사라졌어야 할 가치의 집적이다. 다소 복잡해 보인다. 이 제3의 법칙은 서문에서 소개했던 '무한대의 사람에게 매우 짧은 시간을 구걸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즉, 1억 명에게서 약 3초씩 시간을 얻어내면 1만 명이 하루 풀타임으로 일하는 것과 동등한 가치를 창출한다는 사고방식이다. 돈이라면 1원 이하, 시간이라면 몇 초 등 사람들이 전혀 신경도 쓰지 않을 정도의 그저 사라져버리는 하찮은 가치를 '불특정 다수 무한대'만큼 끌어모은다는 것이다. -47쪽

일반적으로 박사학위를 가진 인재는 기업에서 오퍼레이션 관련 업무를 맡지 않는다. 특히 일본 IT기업의 간부들에게 "구글은 박사학위를 가진 최고의 엔지니어가 매일같이 목숨을 걸고 오퍼레이션이라는 '막일'을 하는 회사"라고 설명하면 모두들 낙담한다. -77쪽

구글은 우수한 기술자만 채용한다. 우수함의 기준은 창조적이자 경쟁적인 사람이다. 평균적인 사람이라면 허덕댈 정도로 노동 강도가 높은 근무 환경을 좋아하는 사람을 채용하는 것이다. 여기에 기술, 즉 자신 있는 IT와 검색 기술을 구사해 조직 매니지먼트를 해나간다면 창조성과 생산성을 동시에 높일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중략)
이들은 미국사회에 면면히 흐르는 '베스트 앤드 브라이티스트(best and brightest)'를 신봉한다.-87쪽

야후나 구글 모두 스탠퍼드 대학 컴퓨터 사이언스학과 출신 두 명이 창업했다. 거기까지는 흡사하다. 하지만 인터넷 버블 붕괴 이후 야후는 회사의 위상을 '미디어 기업'으로 정리했고, 일반적인 경영을 지향했다. (중략) 그래서 그들은 뉴스를 편집할 때는 우수한 인간의 인간적 시점이 필수적이라고 본다. '인간의 개입'을 부가가치 창출의 원천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구글은 광고 영업의 프로를 데려올지언정 미디어 산업의 프로를 경영진에 영입하지는 않았다. 기술을 통해 미디어 산업을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혁신하겠다는 '파괴적 의도'를 갖고 있게 때문에 인간이 개입할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
기술자들이 만든 정보발전소가 일단 가동을 시작하기만 하면 인간의 간섭 없이 자동적으로 일이 추진되는 세계, 그것이 구글이 추구하는 모습이다.-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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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기억들 Medusa Collection 4
토머스 H. 쿡 지음, 남명성 옮김 / 시작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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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선의와 악의가 있다. 악의는 끝도 없이 선의를 덮치려고 꿈틀거린다. 사람 속에 어떻게 그런 끔찍한 악의가 자리잡아 자라날 수 있을까? 사람이 사람한테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밤의 기억들>은 그런 종류의 이야기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걸작이다-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요네하라 마리 여사의 <대단한 책>에서 친구가 추천한 책이라며 언급한 걸 보고 이 작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심문>을 먼저 읽었다. 그리고 이제야 손에 든 바로 그 <밤의 기억들>의 첫 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나는 작가가 구축해놓은 마치 인셉션 같은 가상세계 속으로 빠져들었다.  

책의 주인공은 소설가다. 그=폴 그레이브스는 케슬러라는 악당을 뒤쫓는 슬로백 형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시리즈 소설을 쓴다. 첫 장면에서 그는 소설 속 슬로백을 죽이는 엔딩으로 처리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한다. 시리즈는 반복되고 악당은 강해지고 형사는 점점 노쇠해진다. 그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현실에서 그는 혼자 생활한다. 철저히. 그 이유는 책을 읽다보면 드러난다. 과거의 아픔. 무덤처럼 묻어둔 기억. 그런 그에게 리버우드의 어떤 부유한 여성이 50년 전 살인사건의 해결을 의뢰한다. 단, 진짜 사건 해결이 아닌 '소설가로서 그럴 듯한 범인을 창작해 내라'는 주문사항. 탐정이 아닌 소설가에게 사건을 의뢰한 이유는 그것이다. 이 주문이 참으로 흥미롭다. 그는 짐을 싸서 리버우드의 오두막으로 들어가고, 과거 사건의 퍼즐 맞추기에 몰두한다.  

나중에 알게 된 50년 전 살인사건의 진실은 참으로 추악하다. 그 작업은 그의 과거의 기억을 자꾸만 건드리고- 그는 엘리너라는 다른 여성과 사건을 추적하면서 점점 껍질을 깨고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밝혀지는 그의 과거의 진실. 왜 그는 자신의 누나의 죽음에 대해 침묵했는가? 라는 부분이 밝혀지는 대단원. 정말이지, 놀라운 반전이다. 너무나 끔찍한 진실을 담고 있는 그 반전은 인간의 악의에 대해 끝도 없이 반추하게 만든다.  

소설적인 재미도 풍부해서 밤마다 이 책을 조금씩 읽었던 시간은 참 행복했다. 토머스 H. 쿡은 정말 최고의 작가다.

   

 

그러나 그레이브스가 생각해도 슬로백은 이제 중년의 나이였고, 아이도 없이 혼자였다. 무거워져 자꾸 땅으로마 가라앉는 몸뚱이는 살과 피가 그득한 자루에 불과했으며, 정신은 소름 끼치는 장면과 섬뜩한 비명으로 녹초가 된 상태였다. -74쪽

 

 

 

   
  밤이 되면 그레이브스는 이웃 사람들이 집에 드나들며 내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가까이 산다는 데 평온함을 느꼈다. (중략)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그들이 가까이 있다는 데 의미가 있다. 그가 느끼고 싶은 것은 단지 누군가 가까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사람들이 불침번을 서듯 그를 지켜보고 귀를 기울여주는 것이 필요했다. 끔찍한 악마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 바로 고립된 존재라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91쪽  
   

 

 

 

"수용소에 있을 때 실험을 한다는 말을 들었어요. 어느 방에 가면 탁자가 하나만 있다더군요. 엄마와 딸을 서로 마주 보고 앉게 한대요. 각각 의자에 묶은 다음 몸에 전선을 연결하는 거죠. 딸은 한쪽 손을 놀릴 수 있어요. 전기 스위치를 만질 수 있죠. 명령을 내리면 딸은 스위치를 당겨야 해요. 그러면 엄마한테 전기가 흐르죠. 만일 딸이 명령을 거부하면 대신 딸의 몸에 전기가 흘러요. 이게 실험이에요.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딸로 하여금 친엄마에게 어떤 짓을 하게 하는지 보는 거죠." -4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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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3 - 10月-12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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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솔직히 말하면 나는 1Q84가 2권으로 끝나는 줄 알았다. 읽었던 기억이 희미해서일까. 그래서 3권도 나오고 4권도 나올 예정이라니 무척 반가왔다. 죽은 줄 알았던 자식이 살아난 것처럼-까지는 아니지만. 하루키의 장편소설을 읽는 쾌감은 '다른 어떤 작가의 작품으로도 대체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총 31개의 장으로 구성된 3권은 역시는 소제목들의 대단히 멋지다. '다들 짐승이 옷을 차려입고 / 엄지의 욱신거림으로 알게 되는 것 / 세계의 룰이 느슨해지기 시작한다 / 차가워도, 차갑지 않아도 신은 이곳에 있다'와 같은 제목들은 하루키만이 쓸 수 있는 문장 아닐까. 

이번 권에 등장하는 우시카와라는 인물은 아오마메를 추적하는 역할로, 주인공인 덴고와 아오마메와 동등한 비중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 남자 참 흥미롭다.머리 크고 못생긴 외모 탓에 어두운 성격을 갖게 되었으나 머리회전 빠르고 명민한 남자.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고 어둠의 거래를 하며 사는 남자. 그의 불행은 과거로부터 기인하며 그것은 덴고, 아오마메 케이스와 유사하다. 그리하여 나쁜 인물로도 볼 수 있으나, 자꾸만 연민이 간다. 만약 저번 권들처럼 계속 아오마메-덴고 시점으로만 보여줬다면 좀 덜 흥미로운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덴고의 아버지-NHK의 수금원이었던-가 문 앞을 돌며 애타게 수금하는 모습은 어찌나 집요한지(그 대사는 얼마나 리얼한지 우리집 앞에 그런 사람이 오면 납부 안할 도리가 없을 것 같다.), 어릴 적 일요일마다 그 손에 끌려 따라다녔을 덴고가 더욱 안타깝다. 어른들은 왜 아이들에게 무엇인가를 강요하는 걸까?  

이번 편에서는 신비한 소녀 후카에리의 비중은 좀 약해졌다. 아오마메와 덴고가 만날 수 있을 것인가, 달이 두 개 뜬 세계에서. 이것이 가장 큰 주제였으며 마지막에 가면 그 궁금증은 풀린다.  

재미있었다. 문장을 읽는 내내 긴장감이 감도는, 그런 종류의 재미였다. 

   
 

단지 희망은 수가 적고 대부분 추상적이지만, 시련은 지긋지긋할 만큼 많고 대부분 구체적이지. 그것도 내가 내 돈 들여가며 배운 것 중 하나야. – 57쪽

 

 

 

   
  잔디 깎는 전동기의 취급설명서가 우연히 손밑에 있었다면 그걸 읽어주었을 것이다. 덴고는 가능한 한 명료한 목소리로 상대가 알아듣기 쉽게 천천히 문장을 읽었다. 그것이 유일하게 그가 유의하는 점이었다. – 70쪽  
   
   
  덴고는 다시 아버지가 남기고 간 침대의 우묵한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닳도록 신은 수많은 구두를 생각했다. 날마다 수금 루트를 답파하면서 아버지는 오랜 세월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구두를 매장해왔다. 모두 비슷한 모양의 구두. 검고 바닥이 두툼하고 지극히 실용적인 값싼 가죽구두. 그것들은 너덜너덜 닳고 해지고, 뒤꿈치가 비뚤어질 때까지 혹사당했다. 거칠게 변형된 그런 구두를 볼 때마다 소년시절의 덴고는 가슴이 몹시 아팠다. 그가 가엾게 생각한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오히려 구두였다. 그 구두들은 이용당할 만큼 이용당하고 이제는 죽음이 임박한 가엾은 사역동물들을 연상시켰다. – 82쪽  
   
   
  가정을 해보자, 하고 우시카와는 생각했다. 여기서는 잠시 고명하신 '오컴의 면도날'의 법칙에 따라 되도록 심플하게 가설을 쌓아나가는 게 좋다. 쓸데없는 요인은 배제하고 논리의 라인을 하나로 줄여서 상황을 바라보자. – 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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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 김이설 소설집
김이설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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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한 인생을 들여다보는 일은, 행복한 인생을 들여다보는 일보다 더 흥미롭다. 불구경이나 남의 싸움구경이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과 비슷한 걸까. 톨스토이의 말처럼 행복한 가족은 다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족은 다 나름의 이유가 있기 때문일까. 불행의 다채로운 모양을 들여다보는 일은, 남은 어떻게 불행할까 하는 호기심을 채워주고, 나의 불행을 어루만져주는 효과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 TV다큐 '동행'을 보면서 가끔 나는 그런 나의 위선을 인식하고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에게 속삭인다. 

김이설의 이 소설집이 불행으로 채워져 있으며, 아주 쎈 내용일 거라는 건 서평과 리뷰를 읽으며 짐작했다. 그래서 사지 않고 버텼다. 그냥 소재로만 활용한 거 아닐까, 하는 의심을 했었다. 책을 사서 다 읽고 다니 그런 우려는 사라졌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진정성이 있었다. 실제로 작가가 불행한 경험을 한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이 뭉게뭉게 피어오를 정도로. 

열세 살
엄마들
순애보
환상통
오늘처럼 고요히


하루

8편의 단편 중에서도 '순애보', '오늘처럼 고요히', '막'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이 여자들이 정말 정상일까 싶을 정도로 김이설이 창조한 주인공들은 핍박과 폭력에 시달리며, 그걸 묵묵히 감내한다. 세상이 폭력 투성이라고 포기해 버리고 나면 그렇게 잔잔해질 수 있는 걸까. 태생과 환경이 그렇게 만드는 걸까. 그녀들은 고속도로 갓길에서 서성대며 낯선 트럭에 올라타고(순애보), 노래방 도우미로 뛰다가 집으로 돌아와 갓난아기를 어루만지고(오늘처럼 고요히), 기회가 생길 때마다 연극단 팀장의 성기를 입 안에 넣으며(막) 살아간다. 그것이 일상이고 그 일상은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 종양처럼 점점 악화될 뿐.

불행한 인생이 각기 다른 모습이라면, 그 디테일한 모습을 잡아내는 건 작가의 역량일 것이다. 취재를 탄탄히 한 것인지 주위에 그런 인생들이 있는 것인지 나는 모르지만, 이 소설집은 그걸 아주 잘 잡아냈다. 그리고 불행이 조금은 해소되기를, 이 사회가 조금은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절로 생겨나게 만든다. 작가가 던지고 싶은 메시지가 정작 무엇이든간에.  

이런 소재를 다룬다는 점에서는 내가 편애하는 강지영 작가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강지영의 책은 스릴러, 추리 요소가 가미되어 있지만 김이설 작가의 책은 정통에 가깝다. 당장 좋아하는 작가에 추가하고 <나쁜 피>를 사볼 생각이다.

양장본을 둘러싸고 있는 겉표지를 벗기면, 진주황의 속표지가 드러난다. 표지의 느낌을 잘 살리고 있으며 문학동네 책 치고는 디자인의 파격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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