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저드 베이커리 - 제2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창비 / 2009년 3월
절판


나는 언젠가 스스로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무언가를 두 손에 쥐게 되면, 그대로 떠나버릴 사람이야. 그때까지만 나를 참아주면 안 될까, 당신. 그냥 좀 무거운 공기가 옆에 있다고 생각해주면 안 될까. 당신이 필사적으로 그리고 싶었던 가족사진, 그것이 영원한 화석이 될 때까지, 거기서 나 좀 빼주면 안 될까.-33쪽

그렇게 뜯어먹는 사이에 무언가 손에 미끈거리는 게 묻었다. 손가락을 빨아보니 땅콩 맛이 났다. 둥근 대보름빵이 4분의 1 깊이나 먹었을 때 비로소 땅콩버터 크림이 처음 나온 것이었다. 최소 비용과 최대 효율 같은 경제 원칙이라곤 전혀 모를 나이였지만, 나는 크림이 이제야 나온 것이 매우 부당한 일이라는 걸 직감했다.-1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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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 매그놀리아의 살인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7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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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와카타케 나나미는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이라는 놀라운 데뷔작 이래, 다양한 시리즈로 독자를 공략하고 있다. 그 동안은 <다이도지 케이의 사건 수첩>, 탐정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인 <네 탓이야>, <의뢰인은 죽었다> 등의 연작소설들이 국내 출간되었다. 그리고 이번 작품은 500페이지에 육박하는 장편소설.

하자키라는 가공의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은 '하자키 일상 미스터리'의 첫 권이다. 다음 편으로 <헌책방 어제일리어의 사체>가 출간되어 있다. 하자키는 고급 별장지인 가루이지와 옆에 있는 수수한 해변 마을로 그려진다. 여름이면 관광객들이 들어닥쳤다가 사라지는. 이 나름 평화로운 마을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매그놀리아라는 빌라에 사는 주민들이 모두 살인 용의자 선상에 오른다. 그리고 근처 고급주택에 이사온 하드보일드 소설 작가 고다이 부부, 부동산업자인 고다마 부부도 모두 주인공이다. 이 수십 명의 주인공들을 다루는 데 어설프면 소설이 성립될 리 없겠지만, 참으로 인물을 스케치하는 솜씨가 능수능란하다.   

이 작가는 늘 '어떤 사람도 감추고 싶은 비밀(과거, 흠)이 있다'라는 전제하에 작품을 쓰는 것 같다. 이것이 진리이기에 소설 내용은 더욱 공감을 얻는 것 같다. 사건을 추적하는 수사반장 고마지와 신참형사 히토쓰바시 콤비도 제법 그린 듯 자연스럽다. 황금수프정이라는 매력적인 레스토랑의 묘사도 그렇고, 하드보일드 작가 고다이의 하드보일드스러운(?) 행동도 퍽 흥미로와서 소설을 더욱 재미있게 만드는 것 같다. 

살인은 일어나지만 그 또한 일상적인 사건 속에 버무려지는 그런 구역, 하자키에 우리는 발을 들여놓았다. 웰컴 투 더 하자키!

   
 

난폭한 운전으로 주차장에 차를 집어넣은 쓰노다 고다이는 술 냄새를 풀풀 뿜어내며 차에서 내렸다. 그는 주차장 바로 앞에 떨어져 있는 커버 시트를 집어 벤츠에 정성껏 덮으려 하다가 그만뒀다. 내가 왜 이런 시시한 짓을 해야 하는 거야? 나는 당대 최고의 하드보일드 작가야. 그런데 어째서 이런 범부나 할 일을. 범부라고? 차에 시트를 덮는 것이 범부나 할 일인지 어떤지, 하드보일적 행동인지 어떤지, 그는 머릿속으로 고민하면서 흔들흔들 언덕길을 올라갔다. -3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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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탐정 쇼타로의 모험 4 - 고양이는 이사할 때 세수한다 고양이 탐정 쇼타로의 모험 4
시바타 요시키 지음, 권일영 옮김 / 시작 / 2010년 6월
절판


하지만 심술 사나운 동거인은 남자가 애써 고양이를 기를 수 있는 아파트를 얻어 함께 살자고 했는데도 그걸 딱 잘라 거절해버렸다. 왜 그런 어처구니없는 짓을 했느냐고 내가 심하게 항의했건만 동거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야옹야옹 하며 내 의견을 이야기했더니 무슨 오해를 했는지 통조림 하나를 따주었다. 나는 그 통조림을 먹다 보니 그만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잊어버리고 말았다.-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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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피 민음 경장편 1
김이설 지음 / 민음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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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을 읽고 나서 골라든 김이설 작가의 책. 200쪽 안 되는 얇은 장편소설. 여기서도 주인공은 가난과 폭력에 노출되어 있으며, 짧은 키에 뭉툭한 손발을 가진 못생긴 여성이다. 30대가 된 주인공은 작은 오락실을 경영하지만 큰 돈은 안 벌리고, 그녀의 인생은 장애인이었던 어머니로 인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그 삶은 아무리 애써도 나아지지 않는다. 다행히 그녀에게는 '밥 줘'라고 마음대로 부를 만한 할머니가 있고 그녀가 유일한 가족이다. 가족, 그 지긋지긋하지만 다시 손 벌릴 수밖에 없는 관계. 큰 고물상을 하는 외삼촌은 폭력적이기 그지없고, 그 딸(주인공의 사촌)을 괴롭히는 낙으로 주인공은 성장해왔다. 그 뒤틀린 관계들을 작가는 묵묵히 그려낸다. 그런 삶을 한 부분 도려내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얼마나 살기 만만하지 않은지 오래오래 되새기게 된다. 

다음은 2010. 8. 31 김이설 작가님께 작품 관련하여 트위터로 질문했는데, 솔직하고 친절하게 답변해 주셔서 감동받았던 걸 그대로 옮김.

Q. 김이설 작가님, 저는 베쯔라고 합니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과 '나쁜 피' 잘 읽었고 다음 작품 기대하고 있습니다. 책 읽는 내내 왜, 그렇게 소외계층에 관심을 갖게 되셨는지 많이 궁금했습니다. 혹 대답해 주실 수 있나요? 

A. 안녕하세요, 베쯔님. 관심있게 읽어주시고, 이렇게 먼저 말을 걸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보내주신 질문의 대답은- 매번 같은 답을 하곤 합니다만, 저는 제 소설이 '내가 사는 세상이 살만한 세상인지,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지' 의문하기 위해서 읽히고, 또한 씌여지길 바랍니다. 배부르고 예쁜 사람들은, 착하고, 좋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제가 아니어도 이미 다른 장르나, 다른 소설에서 만날 수 있으니 굳이 제까지 그렇게 쓰고 싶진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소설 속 인물들은 '문제적인물'이어야 할 것이고, 그들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의 시선이, 이 지옥같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더 수월히 다가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작가 개인적 경험의 문제, 혹은 성장과정 속에서 만난 어떤 사건, 은 없습니다. 저는 제가 바라보는 이들이 내 이웃이고, 또 나의 친구고, 그래서 결국 나의 현실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이렇게 답변을 드려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140자로 나누어서 문장을 끊다보니 영, 어색하지만 색다른 기분도 드네요. 제가 사는 도시는 비가 그치고 두꺼운 구름이 가득입니다. 그래도 오늘 하루 건강하겠습니다. 베쯔님도 건재하시길! ('개인적 경험의 - 어떤 사건은 없습니다.'라고 말하고나니, 정말 없는걸까, 하고 자문을 하기 시작합니다. 정말 없을까? 없다, 라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답했던 건 아닐까? 라는 자기 검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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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피 민음 경장편 1
김이설 지음 / 민음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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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밥은 뜨겁게 데워 파와 마늘을 수북이 올리니 누린내가 덜 났다. 할머니도 상 앞으로 다가와 앉았다. 국물을 덜어 고춧가루를 풀었다. 남은 소주를 마저 마실 모양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살아야 얼마 산다고. 마음대로 마시다 죽어. 할머니 복에 그거면 감지덕지지. 할머니는 남은 술을 입맛 다시며 마신 다음에 바닥에 쪼그려 누웠다.
나에게 매운 걸 먹게 한 사람이 바로 할머니였다. 엄마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챌 무렵이었으니 혜주 나이 정도 되었을 것이다. 할머니가 입을 벌리라 하고 고추 끝을 들이밀었다. 매큼한 첫맛에 진저리를 쳤지만, 할머니는 지치지도 않고 끼니때마다 고추를 먹였다. 고추장도 찍어 주고, 된장도 찍어 줬다. 생양파도, 생마늘도 먹였다. 세끼 밥과 매운 반찬, 그것이 할머니가 나를 키운 방법이었다. -114쪽

나는 세게 문을 닫고 집을 나섰다. 속이 헛헛했다. 생각해 보니 밥이나 줘, 라는 말이 내가 할머니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이었다. 안 간다. 안 가! 멀찍이 할머니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156쪽

무엇보다도, 가슴에 돌덩이 하나 묻고 살았던 당신에게. 그 돌덩이의 무게를 내가 감히 이해하고 있었다는 고백을. 부디, 이제는 그 돌덩이를 내팽개치라는 터무니없는 기원을.

사실, 나에게 허락된 말은 단 한마디여야 한다.
부끄러워 죄송하다.

작가 후기 중에서-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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