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피 민음 경장편 1
김이설 지음 / 민음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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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밥은 뜨겁게 데워 파와 마늘을 수북이 올리니 누린내가 덜 났다. 할머니도 상 앞으로 다가와 앉았다. 국물을 덜어 고춧가루를 풀었다. 남은 소주를 마저 마실 모양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살아야 얼마 산다고. 마음대로 마시다 죽어. 할머니 복에 그거면 감지덕지지. 할머니는 남은 술을 입맛 다시며 마신 다음에 바닥에 쪼그려 누웠다.
나에게 매운 걸 먹게 한 사람이 바로 할머니였다. 엄마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챌 무렵이었으니 혜주 나이 정도 되었을 것이다. 할머니가 입을 벌리라 하고 고추 끝을 들이밀었다. 매큼한 첫맛에 진저리를 쳤지만, 할머니는 지치지도 않고 끼니때마다 고추를 먹였다. 고추장도 찍어 주고, 된장도 찍어 줬다. 생양파도, 생마늘도 먹였다. 세끼 밥과 매운 반찬, 그것이 할머니가 나를 키운 방법이었다. -114쪽

나는 세게 문을 닫고 집을 나섰다. 속이 헛헛했다. 생각해 보니 밥이나 줘, 라는 말이 내가 할머니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이었다. 안 간다. 안 가! 멀찍이 할머니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156쪽

무엇보다도, 가슴에 돌덩이 하나 묻고 살았던 당신에게. 그 돌덩이의 무게를 내가 감히 이해하고 있었다는 고백을. 부디, 이제는 그 돌덩이를 내팽개치라는 터무니없는 기원을.

사실, 나에게 허락된 말은 단 한마디여야 한다.
부끄러워 죄송하다.

작가 후기 중에서-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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