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 재기 외 을유세계문학전집 33
히구치 이치요 지음, 임경화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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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에 태어나 25세에 생을 마감한 여류작가 히구치 이치요. 가끔 을유세계문학전집을 한 권씩 사곤 하는데 참 단정하게 책 잘 만들었다는 느낌이다. 번역이나 해설, 각주, 연보가 충실해서 소장할 가치가 높은 을유문학전집.거기서 고른 일본작가 작품. 총 6편의 단편이 실려 있어 부담없이 접근할 수 있다. 좀 고리타분한 분위기가 아닐까 하며 책장을 넘겼는데, 문투는 약간 그랬지만 스토리 전개는 무척 현대적이었다. 일본 근대의 가난하고 봉건적인 분위기를 잘 느낄 수 있으며,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주인의 눈치를 보며 가난한 저희 집에도 잘 못 들르는 하녀의 슬픔을 드라마틱하게 그린 '섣달 그믐', 유곽을 배경으로 예비 유녀 미도리와 그 주변 아이들의 발랄한 놀이와 갑작스러운 소녀의 성장을 그려낸 '키 재기', 부잣집으로 시집 갔지만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한 여자의 친정 방문기, 그리고 밝혀지는 첫사랑 '십삼야', 우산가게 종업원인 키 작은 소년 기치조의 짝사랑을 그린 '갈림길', 귀하게 자란 부인이 남편의 바람 때문에 갈등하다 놀랍게도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는 내용을 담은 '나 때문에'.  작품마다 개성이 살아있고 마치 근대 단편소설의 전형을 보는 듯 '놀라운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표제작이면서 분량이 가장 긴 편인 '키 재기'는 약간 지루하기도 했지만.  

히구치 이치요는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생계를 책임지는 소녀 가장이었다. 그녀가 택한 길을 소설 쓰기였다. 근대의 여성으로 소설로 돈을 벌고자 결심했다는 부분이 내겐 참 신기하게 느껴졌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16세의 나이에 호주가 되어 빚에 시달리는 일가의 생계를 이끌어 가야 했던 그녀에게, 같은 가숙의 선배인 미야케 가호가 쓴 <덤불 속의 꾀꼬리>(1988)의 성공과 가호가 받은 고약의 원고료는 '소설가 이치요'의 탄생을 재촉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그녀는 당시의 '여류 소설가'를 대표했던 고등여학교 졸업생이나 현역 여학생들과는 달리 생활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소설 창작에 발을 들여 놓았다. 그녀는 빚더미 속에서 신문을 열심히 구독하고 도서관에 다니며서 소설 창작에 몰두했고, 그녀의 어머니와 여동생도 호주의 이 '사업'의 조력자가 되었다. 이치요는 소설이 득세해 가는 시대의 흐름에 뜻하지 않게 조우했던 것이다. -261쪽(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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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도의 비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추지나 옮김 / 북스피어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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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미유키의 현대 배경 단편집. 미미 여사 책 중에는 에도시대 배경 소설들도 많은 까닭에, 책을 사기 전에 시대 배경을 확인하는 건 꼭 필요하다. 북스피어에서 내고 추지나 편집자가 번역했다.  

7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작품의 분위기가 편마다 많이 다르고 그래서인지 호오가 분명히 엇갈린다, 나의 경우에는. 표제작인 '지하도의 비'는 미스터리를 차용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아련한 느낌을 주는 연애 스토리여서 흥미로웠다. 돌발적인 범죄에 의해 피폐해진 한 남자와 그를 상대해야 하는 형사반장의 고뇌를 그린 '무쿠로바라'는 전편 중에 가장 뛰어났다. (그런데 결말을 읽고도 이해가 잘 안 된다는 점을 고백하겠다. 묘한 여운을 남기면서 끝나 버린다.) 50대의 나이에 독신으로 죽어간 완벽한 이모의 장례식, 그 와중에 발견되는 남자의 편지 한 통.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를 여러 사람의 눈으로 보여주는 따뜻한 미스터리 '영원한 승리'.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으스스한 괴담 '결코 보이지 않는다'도 읽고 나면 찡하다.  

나머지 세 편에 대해서는 그다지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음-. '불문율'은 왠지 미완성 같고 '혼선'과 '안녕, 기리하라씨'는 좀 너무 농담 같았달까. 아무튼 미미 여사의 색깔이 잘 드러나는 읽을 만한 단편집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현대 배경 장편이 난 너무 기다려진다.) 

 

 

 

중년에 적당한 몸집, 중키. 하느님이 진흙을 빚어 인간을 만드는 작업에 질렸을 무렵 한 손으로 꾸깃꾸깃 둥그스름하게 만들었음이 분명한 이목구비다. – 178쪽

 

 

 

 

   
  반장이나 아내는 전선에 너무 가까워서는 안 된다. 작은딸은 금세 한쪽에 붙어 버린다. 큰딸은 전선을 둘러보는 눈과 전선에서 날아오는 불똥을 정면으로 받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유지하는 현명함을 겸비했다. – 203쪽  
   

 

 

 

 

좀 더 젊고 에너지가 있는 남자, 아직 세상에 바닥이란 없고 설령 있더라도 바닥에 돌을 쌓아 올려 어둠의 깊이를 낮출 수 있다고 믿는 남자, 긍겅적인 신념을 지닌 남자만이 하시바를 도울 수 있는 게 아닐까. 반장처럼, 세상에서 가장 희망이 없는 부분을 자꾸만 봐야 하는 업무에 시달리고 거기에서 뿜어져 나온 방사능에 오랫동안 노출되어 뼛속까지 서서히 병들기 시작한 남자가 아니라. – 210쪽

 
   

북스피어 책답게(?) 책날개가 넓어서 사진을 찍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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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도의 비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추지나 옮김 / 북스피어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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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에 적당한 몸집, 중키. 하느님이 진흙을 빚어 인간을 만드는 작업에 질렸을 무렵 한 손으로 꾸깃꾸깃 둥그스름하게 만들었음이 분명한 이목구비다.-178쪽

반장이나 아내는 전선에 너무 가까워서는 안 된다. 작은딸은 금세 한쪽에 붙어 버린다. 큰딸은 전선을 둘러보는 눈과 전선에서 날아오는 불똥을 정면으로 받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유지하는 현명함을 겸비했다.-203쪽

좀 더 젊고 에너지가 있는 남자, 아직 세상에 바닥이란 없고 설령 있더라도 바닥에 돌을 쌓아 올려 어둠의 깊이를 낮출 수 있다고 믿는 남자, 긍겅적인 신념을 지닌 남자만이 하시바를 도울 수 있는 게 아닐까. 반장처럼, 세상에서 가장 희망이 없는 부분을 자꾸만 봐야 하는 업무에 시달리고 거기에서 뿜어져 나온 방사능에 오랫동안 노출되어 뼛속까지 서서히 병들기 시작한 남자가 아니라.-2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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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처럼
김경욱 지음 / 민음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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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 작가의 변신,이라고 표현해도 될까. 한 권의 단편집을 읽었고 다른 책들은 살짝 들추어 보기만 했지만, 김경욱 소설의 인상은 '현대적이고, 지적이고, 난삽한' 어느 지점에 있었다. 그런데 연애소설을 쓰자 작정한 듯 보이는 이번 작품은 말랑말랑하고 직설적이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리고 나는 이 변신에 꽤 만족한다. 

대학 시절 노래패에서 만났다가, 사회인이 되어 재회한 백장미와 김명제. 그들이 재회할 확률은 김명제의 계산에 의하면 몇만분의 1이었던가. 아무튼 둘은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고, 사이가 틀어져 이혼을 하고, 다시 만나고, 또...... 두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얼마나 우연에 의존하며 찰나적인가. 대학 시절 엠티에서 밤에 손을 잡은 '그, 혹은 그녀'는 누구인가-라는 에피소드는 참 공감 가는 이야기다. 또 백장미가 김명제를 소개시키려고 아빠의 치킨집에 데려가 하는 3가지 테스트도 흥미롭기 그지없다. 뼈를 끝까지 발라 먹는가, 양념 반 후라이드 반을 시키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들을 통과하는 데 작용했던(후에 밝혀지는) 우연의 겹침.  

그들의 연애 이야기지만, 나는 자꾸 나의 이야기들과 겹쳐 보여서 때론 눈 앞이 흐려졌다가 슬며시 웃었다가 했다. 작가가 1971년생이어서 그런지, 비슷한 세대를 살아온 나로서는 여러가지 에피소드나 문화적 장치들이 너무나 익숙해서 편안했다.

결말이 해피엔딩이라 더 마음에 드는 소설 <동화처럼>은 쉽게 읽히지만 따뜻함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연애소설이다. 대중성을 갖추고 있기도 하다. '얼음 공주'와 '개구리 왕자'라는 동화를 차용하여 영리하게 유치해지는 면을 피해간 측면도 있다.

민음사 발간인데, 양장본 치고 판형은 좀 기름한 듯 크고, 겉표지는 속과 좀 잘 분리되는 느낌이 있지만, 속표지는 깔끔한 흰 색으로 재질이 마음에 든다.  

   
 

라이프니츠는 말했다. 이 우주는 선택 가능한 모든 세계 중에서 신이 고른 최선의 세계다. 라이프니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순간을 명제는 이제 하나 더 갖게 되었다. 라이프니츠는 연인과 키스를 하고 나서 그 말을 했는지도 모른다.  -126쪽

 

 

 

   
 

비와 눈과 별에게는 죄가 없다. 죄는 비와 눈과 별을 핑계 삼는 인간들에게 있는 법. 비가 와서 그립다고, 눈이 내려 심란하다고, 볕이 좋아 쓸쓸하다는 인간들에게. 기별은 잊을 만하면 날아왔다.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거나 볕이 좋은 날. 읽은 메일을 지우지는 않았다. 메일 보관함에는 비와 눈과 볕이 쌓여 갔다.  -182쪽 

 
   

 

 

 

명제는 한서영을 들쳐 업고 바에서 나왔다. 온 세상의 라일락 향을 짊어진 것처럼 가슴이 벌렁거렸다. 명제가 짊어진 것은 가 보지 못한 세상의 모든 길일지도 몰랐다.  -2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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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저드 베이커리 - 제2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창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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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소설이 많이 변했구나, 라는 것이 책의 초반부를 읽은 소감이었다. 문장은 짧고 발랄해졌으며 문투는 거침없고 환상과 현실은 넘나든다.  

이 소설의 초반부는 꽤 성공적으로 보인다. 호기심 유발에 성공했다고나 할까, (그러고 보니 소설 속에서 단 한 번도 이름이 불리는 적 없는) 한 소년의 불행한 운명을 지켜보는 심정은 조마조마하다.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계모의 구박, 그러나 너무 정교하교 교묘하여 구박이라 부르기에도 애매한, 학교 교사이기도 한 계모와 소년의 감정 싸움을 지켜보는 독자는 불편하고 아슬아슬한 심정이 된다. 

그런 소년의 탈출구는 동네의 작은 빵집, 위저드 베이커리. 아침도 저녁도 빵으로 때우는 소년에게, 수상한 재료로 만든 마법의 빵을 온라인사이트에서 판매하기도 하는 이상한 빵집, 이상한 아저씨. 그는 소년에게 어떤 존재가 될까, 그는 정말 수상한 마법사일까? 소설이 중반부를 넘어가면, 이야기가 좀 황당해지는데 환타지를 가미했다 생각하면 큰 문제는 없다. 

다만, 마지막에 작가는 소년의 선택에 의해 결정된 2가지 운명을 다른 모습으로 제시하는데, "인간의 노력으로 뭔가 이룰 수 있다"고 조언하는 게 아니라 상당히 결정론적인 입장이라서 그건 좀 아쉽다. 소년의 아빠는 그런 사람일 뿐이고, 소년은 아무 영향도 미칠 수 없는 걸까? 그리고 현실의 어른들은 모두 문제 투성이고, 환상의 어른은 좋은 사람이라는 이분법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무튼 성장소설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그런 작품이었다. 읽으면서 싸구려 대보름크림빵이 어떤 맛일지, 새삼 궁금해졌다.

   
 

나는 언젠가 스스로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무언가를 두 손에 쥐게 되면, 그대로 떠나버릴 사람이야. 그때까지만 나를 참아주면 안 될까, 당신. 그냥 좀 무거운 공기가 옆에 있다고 생각해주면 안 될까. 당신이 필사적으로 그리고 싶었던 가족사진, 그것이 영원한 화석이 될 때까지, 거기서 나 좀 빼주면 안 될까. – 33쪽

 

 

 

 

 

 

그렇게 뜯어먹는 사이에 무언가 손에 미끈거리는 게 묻었다. 손가락을 빨아보니 땅콩 맛이 났다. 둥근 대보름빵이 4분의 1 깊이나 먹었을 때 비로소 땅콩버터 크림이 처음 나온 것이었다. 최소 비용과 최대 효율 같은 경제 원칙이라곤 전혀 모를 나이였지만, 나는 크림이 이제야 나온 것이 매우 부당한 일이라는 걸 직감했다. – 1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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