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침부터 안좋은 일이 있어서 마음이 싱숭생숭 했는데, 오후에 도서관 다녀오고 괜찮아졌다. 작은 동네 도서관인데 갈 때마다 사람은 왜 그렇게 많은지. 그런데 사람 많은 게 싫지 않다. 나처럼 책 좋아하는 사람이 이 동네에 이렇게 많이들 사는구나, 생각하면 참 좋다. 외롭지 않다.

 

 

2. 도서관 신간 코너를 둘러보는데 이름이 낯익어서 꺼내보니 중학교 때 친구가 쓴 책이었다. 여행에 관한 책이었다. 하긴, 이십대 중반이니까 여행 에세이를 써도 무리는 아니다. (몇 년 전에는 다른 친구가 명문대 합격생 수기집 같은 책에 이름을 올린 걸 봤다. 나이대별로 쓸 수 있는 책이 이렇게 달라지는 것도 재미있다) 그나저나 벌써 우리가 이렇게 책을 내도 되는 나이가 되다니. 작가가 되는 게 꿈은 아니지만, 만약 언젠가 내가 어떤 식으로라도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는 데 기여하게 된다면 언제쯤이 될까? 어떤 책일까? 

 

 

3. 오늘 빌린 책 두 권. 소설을 빌리고 싶었는데 마땅히 눈에 들어오는 책이 없어서 이 두 권을 골라봤다. 나이도 한 살 더 먹었으니 공부하는 분야에 좀 더 책임감을 가지고 전문성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4. 요즘 밤마다 틈틈이 장하준 교수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읽고 있는데 매우 재밌다. 경제경영 분야 신간평가단 하면서 주류 경제학을 비판하는 책을 여러권 읽었는데, 그 내용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고, 거기에 플러스 알파까지 있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장하준이 말하지 않은 23가지>를 빌리려고 했는데 못 빌렸다. 다음번을 기약하며...

 

 

5. 돌아오는 길은 유난히 추웠다. 집에서 도서관까지 걸어서 40분 정도인데, 갈 때는 별로 힘든 줄 몰랐는데 오는 길이 어찌나 춥던지.

 

게다가 눈까지 왔다. 새해 처음 맞는 눈. 첫 5분 정도는 로맨틱하다고 좋다고 걸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눈발이 점점 거세져서 혼났다. 결국 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뜨거운 캔커피 한 잔을 사서 손을 녹였다. 캔커피가 몸에 안 좋다고 해서 안 마시려고 하는데 겨울에는 어쩔 수가 없다. 겨울의 캔커피는 그냥 커피가 아니라 보온용으로도 굿. 손도 녹이고 커피로 뱃속도 달래고, 그런 다음에 다시 걷는 눈길은 전보다 괜찮았다.

 

 

6. 오는 길에 통장 다 쓴 게 생각나서 은행에도 들렀다. 은행은 갈 때마다 기분이 안 좋다. 치과와 동급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바로 아래 레벨 정도는 된다. (아마도 백수라는 사회적 지위?에서 비롯된 자괴감 + 새로운 상품을 권유당하는 데에서 오는 스트레스 때문이 아닐런지...) 번호표 뽑고 번호 불리자마자 통장 교체 받았다. 그래도 오늘은 은행 직원이 통장 케이스를 바꿔줘서 호감도 1상승ㅋㅋ 아, 내가 고객이고 내 돈 맡기는데 왜 내가 '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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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 동안 읽은 책들을 대강 세어보니, 외국어, 학습서, 실용서는 제외하고 139권 정도 되네요. 그 중에서 가장 마음에 남는 책들을 골라서 정리해보았습니다. 순서는 가나다순입니다.

 

 

내 인생이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에 종사하다가 인생 후반에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일에 눈을 떠서 과감히 전직을 하신 분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입니다. 올해 최고로 hot한 소설 중 하나인 <7년의 밤>의 저자 정유정 작가님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아마 의료계통에 종사하시다가 작가가 되셨다고 하죠. 대부분의 자기계발서가 개인의 적성이나 능력보다 돈이나 명예 등 물질적인 결과만 중시하고, 20대, 30대, 1년, 3년, 10년... 이렇게 단기적으로 실천과제를 제시하고 무조건 달성할 것을 강요하는 반면, 이 책은 여러 인물들의 인터뷰를 통해 일과 인생이라는 화두에 대해 다각도로 생각해보게끔 하고, 일이 한 사람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전반적으로 조명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지금 무엇을 하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할지 스스로 고민하게끔 한 점이 좋았습니다. 이직, 전직이 점점 보편화되고 있고, 일에 대한 가치관도 변해가는 요즘 시의적절한 주제를 다룬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노 임팩트맨 저자가 실제로 1년 동안 지구에 영향을 끼치지 않고 살아보는 프로젝트에 도전한 일을 수기 형식으로 기록한 책. 지구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쉽지, 생활 필수품이나 전기, 수도 같은 에너지 자원까지 쓰지 않고 스스로 자급자족하면서 사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았습니다. 수기 형식이라서 읽기 쉽고 재미있어요. 환경운동, 환경 문제에 대해 관심이 있지만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을지 모르시는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입니다.

 

 

닥치고 정치 사실 베스트셀러를 바로바로 챙겨서 읽는 편은 아니고, 읽더라도 일부러 한참 뒤에 읽는 편인데요, 이 책은 워낙 화제라서 읽어봤는데 예상 외로 좋았어요. 한국 정치의 문제의 원인을 정치인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문제에서 찾는 점이 인상적이었고, 책부터도 어려운 정치학적 개념을 최대한 배제하고 일반 독자들이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문제의 핵심을 제시한 점이 이 책의 최대 장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꼼수'의 인기에 힘입은 덕도 있지만, 이런 책이 베스트셀러로 사랑받는 것을 보면 우리 국민들이 정치에 관심도 많고, 좋은 책이 있으면 기꺼이 읽어볼 의향도 있는 것이겠지요. 이 책의 인기가 한 번의 열풍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 이어져서 한국 정치에도 좋은 영향으로 작용했으면 좋겠습니다.

 

 

방랑식객 자연 그대로의 재료로 한국인의 입맛에 맛는 건강한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님이 우리나라 방방곡곡부터 일본, 중국 등을 누비며 요리를 만드는 내용입니다. 읽는 것만으로도 풀 냄새가 나는 것 같고 푸근하고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읽으면서 음식에 대한 마음가짐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고, 건강을 생각해서 먹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빅 픽처 이 책을 쓴 더글라스 케네디는 본국인 미국보다도 유럽에서 더 인기가 많다고 하죠. 스토리 전개가 정말 흥미롭고, 그러면서도 인생의 교훈을 잘 담고 있어서 '재미'와 '의미'라는ㅡ 소설이 갖춰야 할 두 가지 축을 모두 갖춘 소설이었습니다. 요즘 이분의 다른 작품 <위험한 관계>를 원서로 읽고 있는데 이 책도 참 재밌네요.

 

 

 

3096일 최근에 읽은 책이기도 하지만, 워낙 충격적인 내용이라서 올해 읽은 책 중에 이 책만큼 깊은 인상을 남긴 책이 없었어요. 1988년에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소녀 나타샤 캄푸쉬가 실제로 10살 때 한 남자에 의해 납치되어 8년에 이르는 시간을 지하 감옥에 감금되어 폭력과 성폭행 등을 견디고 탈출하기까지의 과정이 담긴 내용입니다. 사실 에세이라는 장르가 자칫 작가의 소소한 감상이나 소회 같은 것 주가 되어 신변잡기적인 정도로 그치기 쉬운데, 이 책을 읽으면서 에세이가 그 어떤 소설보다도 강렬할 수 있고, 사회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세상의 끝에 내가 있다 CNN 앵커 앤더슨 쿠퍼의 어린 시절과 청년기, 언론인이 되고나서의 생활 등에 대해 직접 고백한 자서전. 외가가 미국에서 손꼽히는 재벌가이고 어머니가 유명 디자이너여서 어릴 때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았는데, 아버지와 형의 잇단 죽음으로 부나 명예, 그리고 인생이라는 것에 회의를 느끼고 죽음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전쟁터에서 보도를 하는 저널리스트가 되었다고 합니다. 본인의 목소리로 담담하게 쓰여있어서 더욱 마음에 와닿았고, 이 책 읽고 이 분 팬 되어서 뉴스도 챙겨보고 인터넷에서 이 분이 진행하는 토크쇼도 찾아보고 있네요 ㅎㅎ

 

 

소셜 애니멀 가상의 두 인물의 일생을 통해 성공을 결정하는 요인은 무엇인지에 대해 분석한 내용인데요, 저는 성공 보다도 인간의 일생을 관찰하는 데 있어 교육학, 인류학, 사회학, 심리학, 경영학, 정치학 등 무수히 많은 학문이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이 더욱 인상적이었어요. 여러 학문에 두루두루 관심이 많고, 사람의 인생뿐 아니라 사회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눈을 가지고 싶은 분들한테 추천하고 싶은 책입니다.

 

 

 

언어의 감옥에서 지난해 내내 생각했고, 앞으로 살아가면서 고민할 문제를 제시한 책입니다. 재일교포인 저자가 일본어를 쓰고 일본어로 생각하면서 재일동포의 주체성, 독자성을 주장하는 것에 대한 자기모순과 한일문제의 접근법에 대한 내용입니다. 언어는 학문은 물론 사회문제에 접근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데요, 이 책을 읽으면서 한국인과 일본인이 사용하는 언어의 차이가 곧 인식의 차이를 야기하고, 인식의 차이가 상호 간의 깊은 감정의 골을 낳는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지한 주제라서 다소 어렵게 느껴지는 감이 없지 않지만 반드시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연인들을 위한 외국어사전 언어, 외국, 그리고 연애 ^^ 이렇게 제가 좋아하는 모티프가 많이 들어있어서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중국인 여성이 영국으로 어학 연수를 가서 지내면서 사람도 만나고 연애도 하면서 문화차이도 겪고, 그러면서 인간적으로 성숙해지는 그런 내용이에요. 이 책의 원서를 꼭 구해서 읽고 싶은데 아쉽게도 구하기가 참 어렵네요ㅠ

 

 

 

 

6인의 용의자 비카스 스와루프의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읽고 곧이어 읽은 책인데요, 같은 작가의 작품 답게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나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비슷합니다. 비카스 스와루프는 문학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프로 작가도 아닌데 이야기 구성을 참 매끄럽게 잘 하고, 다양한 인물상을 통해 인도의 정치, 사회, 종교 문제나 사회적 분위기를 전하는 점이 멋지고 마음에 듭니다. 제가 존경하는 작가 중에 한 분이에요. <슬럼독>과 같이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유명 웹툰 작가이자 카피라이터인 '루나파크' 홍인혜 님이 쓰신 여행 에세이입니다. 제목 그대로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회사일을 놓고 장기간 영국 런던에 체류하며 겪은 일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여행 에세이지만 2,30대 여성들이 살면서 느끼는 소소한 재미나 행복, 어처구니 없는 실수부터 나란 존재에 대한 고민, 미래에 대한 불안감 같은 것이 잘 녹아있는 책이에요. 여행 에세이를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이 책은 정말 너무나도 마음에 들어서 읽고나서 주변 사람들한테 계속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있어요 ㅎㅎ

 

 

크리티컬 매스 저자 백지연이 진행하는 방송 <피플 인사이드>에서 인터뷰한 인물들의 삶을 토대로 성공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성과 다른 사람들과의 차별점 등을 분석한 내용이 담겨있는 책입니다. 나오는 인물들도 멋지고, 분석도 참 좋았지만, 무엇보다도 이런 모든 인터뷰를 지휘하고 그것을 책으로 구성한 저자의 능력과 감각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프로이트의 환자들 지난해에는 심리학 서적을 여러권 읽었습니다. 전에는 좀 더 대중적인 에세이 형식의 책을 주로 읽었는데, 작년에는 비교적 전문적인 내용이 많이 나오는 책에도 도전해보았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책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프로이트의 이론에 등장하는 개념들에 대해서도 더욱 자세히 알게되었고, 프로이트가 생전에 치료했던 사례들과 개인사까지 두루두루 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제법 두꺼운데 사례가 대부분이라서 읽을만 합니다.

 

 

 

허삼관 매혈기 현대 중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위화의 대표작 중 하나인데 제가 너무 늦게 읽은 감이 없지 않죠... 사회적 혼란 속에서도 자식을 지키려는 아버지의 사랑이 잘 표현되어 있어서 눈물 펑펑 흘리면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중국문학을 많이 접해보지 않은 분들도 공감하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eat pray love 작가가 일년 동안 이탈리아, 인도, 인도네시아 발리섬에서 각각 4개월씩 살아보면서 이혼의 상처를 씻고 지난 인생을 돌아보면서 앞으로의 삶과 사랑에 대한 희망을 찾아가는 내용인데, 영화화된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 싶을만큼 전개가 재미있고, 일과 사랑, 친구 등 여성으로서 고민하는 문제들이 많이 나와서 마치 인생 선배나 멘토와 대화를 나누듯 곰곰 생각해보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영화로도 나왔는데 영화는 책만큼 재밌지는 않다고 하더군요.

 

 

 

the help 1960년대 말 미국 남부 미시시피를 배경으로 한 젊은 백인 여성이 흑인 가정부들의 인권문제를 다룬 책을 쓰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 소설로, 어둡고 무거운 주제인데도 따뜻하고 감동적이고, 가끔은 유머러스한 부분도 있어서 전혀 어렵지 않게 읽었습니다. 마침 이 책을 읽을 때 흑인 인권 문제을 다룬 책을 여러 권 읽고 있어서 더욱 공감하면서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지난해 읽은 소설 중에 가장 마음에 남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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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6년 전인 스무살에 내 인생은 한번 바뀌었다. 그전까지 내 삶은 학교와 집, 친구가 전부였는데, 대학에 입학하고 나니 하루 아침에 그 모든 것이 사라졌다. 학교가 다르니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해도, 이제까지 학교 안에서 모범생, 1등, 반장으로 지내며 얻었던 캐릭터, 위치 같은 것이 사라졌다. 비슷한 성적, 비슷한 관심사와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있는 대학교, 학과 안에서는 나 같은 아이들이 태반이었다. 전처럼 모두의 관심을 받고 많은 사람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새롭게 나만의 개성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동아리든, 학과 활동이든 뭐라도 해보려고 애썼는데, 한 학기도 안 되어서 단념했다. 관심을 받고 사람을 사귀는 게 뭐가 중요할까 싶었다.

 

 

그 때부터 방황의 시작이었다. 모범생 근성이 남아서 학교에는 꼬박꼬박 나갔지만, 친구를 사귀거나 동아리 활동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넘쳐흐르는 공강 시간과 방과후 시간을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영화를 보았다. 남들이 보면 따분하고 재미 없는 대학생활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나는 안정적이어서 좋았다. 이따금 지루해질 때면 학교 밖에서 재미를 찾았다. 봉사활동도 하고 여러 단체에서 자원활동도 해봤다. 아르바이트는 꾸준히 했다. 대학교 3학년 때에는 블로그를 시작했다. 내 스스로 뭔가를 만들고 다른 사람들과 공유한다는 게 참 좋았다. 내친김에 휴학까지 하고 많은 활동을 해봤다. 영화제 취재도 해보고, 대학생 기자랍시고 웹진에 기사도 쓰고... 재밌었다. 

 

 

하지만 활동들이 장기적으로 이어지지 않고 단기에 끝나버려서 늘 아쉬웠다. 겨우 정들었던 사람들과도 얼마 안 되어 헤어지는 게 너무나도 섭섭했다. 그래서 오랫동안 몰두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오래 할 수 있는 것이 뭘까. 그 고민을 하다가 답을 얻지 못한 채로 졸업을 맞이했다. 입학할 때 누가 우스갯소리로 '졸업할 때 취직도 하고 남친도 있으면 금메달, 취직만 하면 은메달, 남친만 있으면 동메달, 둘 다 못되면 목메(매)달'이라는 말을 했는데 내 상황이 딱 목 매달 상황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아닌데) 막연히 취직은 하기 싫어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소일했다.

 

 

그 때 내 눈에 뜨인 것이 일본의 오와라이, 즉 일본의 코미디 프로그램이었다. 일본음악, 일본드라마는 국내에도 이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코미디 프로그램은 특성상 일본어와 일본 문화를 어느 정도 이해하지 못하면 보기가 힘들다. 중학교 때부터 일본 드라마도 보고 일본음악도 계속 들어왔지만 코미디 프로그램만큼은 볼 엄두가 안 났는데, 2010년 2, 3월에 우연히 보기 시작한 것이 일년 내내 이어졌다(물론 지금도). 일본 각 지역의 독특한 방언은 물론 일본색이 진하게 배인 이야기도 무리없이 이해하는 내가 너무나도 신기했다. 불과 십 여 년 전, 처음 우연히 일본가수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히라가나도 몰랐던 내가 이런 얘기들을 알아듣고 이해하다니...  

 

 

돌아보니 중, 고등학교, 대학교 때까지도 친구들한테 나는 늘 '일본통'으로 통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일본문화를 좋아하고, 친구들한테 일본통으로 통하는 것이 나 스스로에게 있어 어떤 의미인지는 몰랐다. 나 말고도 일본문화에 관심 있는 사람은 많고, 나보다 많이 아는 사람도 많은데 내가 뭐 그렇게 특별한가 싶었다. 오히려 대중적인 인지도도 낮고,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안 좋은 문제가 많은 일본의 문화를 좋아하는 아이로 인식된다는 게 부끄럽고 싫었다.

 

 

하지만 직업도 구하지 못한채 대학 졸업을 하고 보니 이제까지 살면서 그것만큼 나를 남들과 구별해주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 고등학교 때 성실하고 공부 잘하는 아이라는 이미지도 대학에 가보니 별것 아니었고, 나보다 잘난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내가 그토록 잘하고 싶어하는 영어. 고등학교에서는 곧잘 한다는 소리도 들었지만, 대학에 가보니 외고 출신도 많고, 영미권에서 살다온 애들도 많아서 나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일본문화는, 내가 바쁜 수험생활 속에서도 시간을 쪼개 노래를 듣고 드라마를 보고 책을 찾아 읽으면서 접했던 것들은 오직 나만의 것이었다. 그것만이 날 특이하고 재미있는 아이로 기억하게 해주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스무살 무렵에 찾지 못해 좌절했던 나만의 개성이라는 것은 별 것이 아니었다. 학교, 직업, 위치... 그런 것 다 빼고 남들이 나를 기억하는 모습. 내가 무엇에 열중하고 열렬히 좋아하는지. 그것이 남들로부터 나를 구분해주는 나의 모습, 나만의 개성이었다. 그걸 알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남들이 잘 읽지 않는 책을 좋아하는 것,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실내에서 글쓰고 생각하는 걸 좋아하는 것, 독특한 것, 새로운 것, 남들이 잘 찾지 않는 것에 열광하는 내 특이한 취향이야 말로 나다. 누구와도 대체될 수 없는 나.

 

 

1986년부터 2005년까지 나는 그런 생각조차 없이 살았고,

2005년부터 2010년까지 나는 그런 생각을 시작했고, 답을 찾느라 방황했고,

2010년 말에 답을 찾아서 2011년에 처음으로 그 생각대로, 내 생각대로 살았다.

앞으로의 내 인생은 세상이 정한 답이 무엇이든 간에 내 답도 맞다는 걸 증명하기 위한 삶이 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올 한 해 서툴지만 처음으로 나의 삶을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았다.

내년에는 '진짜 내 인생 2년차' 로서 좀 더 강도를 높여서 진지하고 성실하게 살아봐야지!!!

 

(그리고 성과도 좀 내자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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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1-12-31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조용한 듯 하지만 멋진 인생이에요.
저도 그런 20대를 꿈꾸고 있지 말입니다 ㅎㅎ
게다가 저도 일본 무지무지 좋아하는데,
일본 애니에 나오는 개그는 빵빵터지는데 아직 사람들의 개그는 영 별로인거 있죠.
게다가 아직 기초단어만 남발중이랍니다.

블랫라빗님 2012년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ㅎㅎ

키치 2012-01-01 15:4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소이진님^^
소이진님도 멋진 학창시절 보내고 계시는 것 같은걸요 ㅎㅎ
하루하루를 내 방식대로 멋지게 살면 나중에 돌아봤을 때 나름 뿌듯하지 않을까... 뭐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ㅎㅎ
제가 딱 소이진님 나이 때 일본문화에 눈을 떠서 지금까지 봐온 것 같아요.
제 동생도 비슷하고요.(제 동생은 만화,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아이라서 소이진님과 잘 통할 것 같네요 ㅎㅎ)

소이진님도 2012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하는 일들 모두 성취하시길 바랍니다.
 

 

 

 

숫자는 참 적나라하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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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한 번씩은 도서관에 다녀온다. 전에 살던 곳은 집에서부터 걸어서 10분 거리에 도서관이 있어서 하루에도 두번씩 갈 정도로 자주 다녔는데, 이사오고부터는 가장 가까운 도서관이 버스로 10분, 지하철로 15분, 걸어서 40분 거리라서 일주일에 한 번 가는 것도 큰맘을 먹어야 가능하다. (내가 그만큼 게을러진 탓도 있겠지만)

 

그래도 좋은 점이 있다면, 이 도서관은 규모가 아주 작아서 아늑하고, 이용자수가 대형 도서관만큼 많지 않은 탓인지 책의 보존 상태가 좋다. 전에 다니던 도서관은 폐지에 가까운 책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는데, 여기는 웬만해서는 책들이 신간처럼 깨끗하다. 마을 도서관이고, 동네 주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것이니 그만큼 깨끗하게 보는걸까? 게다가 신간도 잘 들어온다. 어쩌면 그렇게 내가 읽고 싶은 책들만 쏙쏙 잘 들어오는지. (물론 인기 많은 신간은 여기도 예약이 꽉 차 있다...) 주로 걸어서 가기 때문에 왕복 80분(갈 때 40분, 올 때 40분)을 걸으려면 책을 많이 안 빌려야 하는데도 신간을 보면 욕심이 나서 주섬주섬 빌리게 된다. 한 번에 빌릴 수 있는 책 권수도 여섯권이나 되어서, 정말이지 도서관 다녀올 때마다 하루 종일 팔이 욱신욱신 쑤신다. (그런데도 이렇게 서재에 글 남기는 건 뭘까...)

 

오늘 빌린 책들.

 

 

 

 

사실, 용기내어 고백하건대,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일본문화도 좋아하고, 일본작가도 좋아하고, 남들이 별로라고 말하는 작가도 굳이 좋은 점을 찾아내서 좋아하려고 애쓰는 편이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만은 좋아지지가 않는다. 정을 붙이려고, 무려 중1 때부터 꾸준히 그의 작품을 읽어왔음에도. 

 

하지만 '잡문집'이라면 소설보다는 그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는 데 더 낫지 않을까 싶어 빌려봤다. 게다가 책 표지의 하얀 동그라미 속에 그려진 검은색 토끼(블랙 래빗)가 귀엽다. (아, 참 사소한 이유다) 이번에는 그의 좋은 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해본다.

 

 

 

 

 

 

<3096일>은 어제 서점 갔을 때 표지 보고 읽어보려고 생각했는데 마침 신간 코너에 있길래 냉큼 빌렸다. 지난 여름에 미국에서도 한 여자아이가 유괴되어 수년간 감금살이를 하고 성폭행으로 범인의 아이까지 낳은 사실이 알려져 충격을 주었는데, 이 책에 나오는 소녀도 비슷한 일을 겪은 것이 아닐까 싶다. 오늘 아침에 TV를 보니 '큰아빠'라고 부르며 따른 이웃집 할아버지가 두 자매를 성폭행해온 것이 밝혀졌다고 하는데, 참 무서운 세상이다.

 

<어쨌든, 잇태리>도 빌렸다. 아까 오는 길에 까페에서 잠깐 앞부분만 읽었는데 저자의 글솜씨가 보통이 아니였다. 가볍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하버드대 까칠교수님의 글쓰기 수업>과 <김탁환의 쉐이크>는 요즘 마침 글쓰기 때문에 고민이 많아서 빌려봤다. 글은 참, 쓰면 쓸수록 어려운 것 같다. 어릴 때부터 '글 참 못 쓴다'고 늘 자학했으면서도, 아직까지도 글 잘 쓰는 사람이 최고로 부럽고 글에 대한 미련이 있는 것을 보면 나한테 글은 평생 지고 가야 할 짐, 풀지 못할 숙제 같은 것이 아닌가 싶다. (못 풀 숙제를 하고 있으니 진짜 미련한 걸까...) 이 책들을 읽고 엄청난 글재주가 생긴다거나... 하는 기대는 없지만, 우직하게 연습하는 길에 좋은 조언 정도는 되어주지 않을까 바라본다.

 

 

 

 

그나저나 책은 사서 읽어야 하는데(게다가 여긴 인터넷 서'점店'!) 빌린 책들 소개글을 쓰고 있자니 민망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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