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새벽부터 동네 아주머니들과 등산을 가셨다. 어머니 마중을 해드린 뒤 멍하니 누워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아침을 대충 챙겨먹었다. 아침 9시 땡 치자마자 도서관으로 갔다. 도서관까지 가는 길은 제법 멀다. 걸어서 45분.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간 뒤 공원을 따라 한참 걷다가 횡단보도를 건너고 주택가 사이를 요리조리 다니다보면 4층짜리 마을 도서관이 나온다. 오늘은 도서관 근처 편의점에서 나는 두유, 동생은 바나나 우유 하나를 사느라 5분이 더 추가되어서 50분이 걸렸다.
도서관에서 한참동안 책을 빌리고 빌린 책을 읽다가 다시 50분, 아니 45분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너무 더워서 그저께 홈쇼핑으로 산 냉면을 먹을까 했는데, 찬 밥이 많이 있길래 남은 반찬을 섞어서 제법 그럴듯한 - 그래봤자 잡탕(?) 볶음 같았지만 -반찬을 만들어 먹었다. 점심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TV 재방송을 봤다. 요즘은 TV가 하도 좋아서 쿡 채널인가 하는 걸로 보고 싶은 프로그램의 재방송을 웬만하면 다, 그것도 무료로 볼 수가 있더라. 그걸로 고소영이 나온 힐링캠프도 보고, 얼마전에 보고 푹 빠진 정글의 법칙도 봤다.
설거지를 하고난 뒤에는 웬일인지 운동화를 빨고 싶어져서 운동화를 빨았다. 욕조 안에 쪼그려 앉아서 운동화를 문지르고 또 문지르고... 한참을 빨았더니 제법 깨끗해지기는 했는데, 하늘색 운동화라서 그런가, 아무리 비비고 문질러도 색깔이 흐리멍덩해서 때가 묻은 것 같기도 하고, 안 묻은 것 같기도 해서 찝찝했다. 그래도 대야 가득 나온 땟물을 보니 속이 좀 시원해지는 것 같기도 했고...
백수인 듯 아닌 듯, 일하다 말다 하며 지낸지도 어느덧 삼 년 째. 일하는 친구들 보면 부럽다. 대기업 다니는 친구들 보면 대단하다. 부모님이 누구네 집 누구는 연봉이 얼마라더라, 회사에서 벌써 승진을 했다더라 하는 얘길 들으면 주눅이 들기도 한다. 취업 대신 대학원에 다니는 친구들을 보면 나도 일찌감치 학위부터 딸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든다. 벌써 시집 간 친구도 있다. 곧 시집 가는 친구도 있다. 주변 사람뿐만 아니라 하다못해 TV를 봐도 벌써 내 또래의 연예인들은 연예계에서 선배급, 주연급 대우를 받는다. 이제 내 나이에 신인, 초보는 없다.
나는 내가 앞서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언젠가부터 한참 뒤떨어지고 있는 걸 느낀다. 하지만 내 삶이 싫은가, 부끄러운가 하면 그건 아니다. 오히려 내 삶이 더욱 충만해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예전 같으면 왕복 한 시간 반이나 걸어서 도서관에 간다는 건 상상도 못했고, 점심은 당연히 사먹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 그것도 1인분에 만원 정도 하는 파스타나 일식으로 - 운동화를 빨아서 신느니 새로 사서 신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봤자 그렇게 지낸 시절은 아주 잠깐이었지만...) 하지만 이제는 돈을 들이지 않아도 풍요롭게 지낼 수 있다. 걸어가면서 들가에 핀 풀꽃을 보며 기뻐하고, 같은 반찬이라도 어떻게 맛있게 먹어볼까 궁리하고, 운동화를 빠느라 몸무게가 몇 백 그램은 빠진 것 같다는 착각을 하며 즐거워하기도 한다.
그러고보니 얼마 전에 읽은 책에 돈이야 있으면 당연히 좋고, 성공도 안 하는 것보다야 하는 게 좋지만, 돈을 벌고 성공하기 위해서 너무 많은 비용을 치를 필요는 없다는 구절을 보았다. 그 전까지 나는 백수라서 돈도 못 벌고, 남들보다 승진도 늦어져서 남들보다 손해를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면 돈을 버는 사람도, 성공한 사람도 그 나름대로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인생에는 완전한 손해도 이익도 없는 거니까.
그러고보면 진작 배워야 했던 것을 백수 시절에, 아주 비싼 값을 치르며 배우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