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6년 전인 스무살에 내 인생은 한번 바뀌었다. 그전까지 내 삶은 학교와 집, 친구가 전부였는데, 대학에 입학하고 나니 하루 아침에 그 모든 것이 사라졌다. 학교가 다르니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해도, 이제까지 학교 안에서 모범생, 1등, 반장으로 지내며 얻었던 캐릭터, 위치 같은 것이 사라졌다. 비슷한 성적, 비슷한 관심사와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있는 대학교, 학과 안에서는 나 같은 아이들이 태반이었다. 전처럼 모두의 관심을 받고 많은 사람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새롭게 나만의 개성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동아리든, 학과 활동이든 뭐라도 해보려고 애썼는데, 한 학기도 안 되어서 단념했다. 관심을 받고 사람을 사귀는 게 뭐가 중요할까 싶었다.

 

 

그 때부터 방황의 시작이었다. 모범생 근성이 남아서 학교에는 꼬박꼬박 나갔지만, 친구를 사귀거나 동아리 활동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넘쳐흐르는 공강 시간과 방과후 시간을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영화를 보았다. 남들이 보면 따분하고 재미 없는 대학생활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나는 안정적이어서 좋았다. 이따금 지루해질 때면 학교 밖에서 재미를 찾았다. 봉사활동도 하고 여러 단체에서 자원활동도 해봤다. 아르바이트는 꾸준히 했다. 대학교 3학년 때에는 블로그를 시작했다. 내 스스로 뭔가를 만들고 다른 사람들과 공유한다는 게 참 좋았다. 내친김에 휴학까지 하고 많은 활동을 해봤다. 영화제 취재도 해보고, 대학생 기자랍시고 웹진에 기사도 쓰고... 재밌었다. 

 

 

하지만 활동들이 장기적으로 이어지지 않고 단기에 끝나버려서 늘 아쉬웠다. 겨우 정들었던 사람들과도 얼마 안 되어 헤어지는 게 너무나도 섭섭했다. 그래서 오랫동안 몰두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오래 할 수 있는 것이 뭘까. 그 고민을 하다가 답을 얻지 못한 채로 졸업을 맞이했다. 입학할 때 누가 우스갯소리로 '졸업할 때 취직도 하고 남친도 있으면 금메달, 취직만 하면 은메달, 남친만 있으면 동메달, 둘 다 못되면 목메(매)달'이라는 말을 했는데 내 상황이 딱 목 매달 상황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아닌데) 막연히 취직은 하기 싫어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소일했다.

 

 

그 때 내 눈에 뜨인 것이 일본의 오와라이, 즉 일본의 코미디 프로그램이었다. 일본음악, 일본드라마는 국내에도 이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코미디 프로그램은 특성상 일본어와 일본 문화를 어느 정도 이해하지 못하면 보기가 힘들다. 중학교 때부터 일본 드라마도 보고 일본음악도 계속 들어왔지만 코미디 프로그램만큼은 볼 엄두가 안 났는데, 2010년 2, 3월에 우연히 보기 시작한 것이 일년 내내 이어졌다(물론 지금도). 일본 각 지역의 독특한 방언은 물론 일본색이 진하게 배인 이야기도 무리없이 이해하는 내가 너무나도 신기했다. 불과 십 여 년 전, 처음 우연히 일본가수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히라가나도 몰랐던 내가 이런 얘기들을 알아듣고 이해하다니...  

 

 

돌아보니 중, 고등학교, 대학교 때까지도 친구들한테 나는 늘 '일본통'으로 통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일본문화를 좋아하고, 친구들한테 일본통으로 통하는 것이 나 스스로에게 있어 어떤 의미인지는 몰랐다. 나 말고도 일본문화에 관심 있는 사람은 많고, 나보다 많이 아는 사람도 많은데 내가 뭐 그렇게 특별한가 싶었다. 오히려 대중적인 인지도도 낮고,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안 좋은 문제가 많은 일본의 문화를 좋아하는 아이로 인식된다는 게 부끄럽고 싫었다.

 

 

하지만 직업도 구하지 못한채 대학 졸업을 하고 보니 이제까지 살면서 그것만큼 나를 남들과 구별해주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 고등학교 때 성실하고 공부 잘하는 아이라는 이미지도 대학에 가보니 별것 아니었고, 나보다 잘난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내가 그토록 잘하고 싶어하는 영어. 고등학교에서는 곧잘 한다는 소리도 들었지만, 대학에 가보니 외고 출신도 많고, 영미권에서 살다온 애들도 많아서 나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일본문화는, 내가 바쁜 수험생활 속에서도 시간을 쪼개 노래를 듣고 드라마를 보고 책을 찾아 읽으면서 접했던 것들은 오직 나만의 것이었다. 그것만이 날 특이하고 재미있는 아이로 기억하게 해주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스무살 무렵에 찾지 못해 좌절했던 나만의 개성이라는 것은 별 것이 아니었다. 학교, 직업, 위치... 그런 것 다 빼고 남들이 나를 기억하는 모습. 내가 무엇에 열중하고 열렬히 좋아하는지. 그것이 남들로부터 나를 구분해주는 나의 모습, 나만의 개성이었다. 그걸 알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남들이 잘 읽지 않는 책을 좋아하는 것,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실내에서 글쓰고 생각하는 걸 좋아하는 것, 독특한 것, 새로운 것, 남들이 잘 찾지 않는 것에 열광하는 내 특이한 취향이야 말로 나다. 누구와도 대체될 수 없는 나.

 

 

1986년부터 2005년까지 나는 그런 생각조차 없이 살았고,

2005년부터 2010년까지 나는 그런 생각을 시작했고, 답을 찾느라 방황했고,

2010년 말에 답을 찾아서 2011년에 처음으로 그 생각대로, 내 생각대로 살았다.

앞으로의 내 인생은 세상이 정한 답이 무엇이든 간에 내 답도 맞다는 걸 증명하기 위한 삶이 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올 한 해 서툴지만 처음으로 나의 삶을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았다.

내년에는 '진짜 내 인생 2년차' 로서 좀 더 강도를 높여서 진지하고 성실하게 살아봐야지!!!

 

(그리고 성과도 좀 내자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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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1-12-31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조용한 듯 하지만 멋진 인생이에요.
저도 그런 20대를 꿈꾸고 있지 말입니다 ㅎㅎ
게다가 저도 일본 무지무지 좋아하는데,
일본 애니에 나오는 개그는 빵빵터지는데 아직 사람들의 개그는 영 별로인거 있죠.
게다가 아직 기초단어만 남발중이랍니다.

블랫라빗님 2012년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ㅎㅎ

키치 2012-01-01 15:4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소이진님^^
소이진님도 멋진 학창시절 보내고 계시는 것 같은걸요 ㅎㅎ
하루하루를 내 방식대로 멋지게 살면 나중에 돌아봤을 때 나름 뿌듯하지 않을까... 뭐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ㅎㅎ
제가 딱 소이진님 나이 때 일본문화에 눈을 떠서 지금까지 봐온 것 같아요.
제 동생도 비슷하고요.(제 동생은 만화,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아이라서 소이진님과 잘 통할 것 같네요 ㅎㅎ)

소이진님도 2012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하는 일들 모두 성취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