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톡카톡 - 읽다 떠들다 가지다
김성신.남정미 지음 / 나무발전소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수다 서평'이라는 기발한 형식의 서평집이 나왔다. 제목은 <북톡카톡>. 공저자 두 사람이 모바일 메신저 서비스 카카오톡(카톡) 상에서 나눈 책에 대한 수다를 신조어, 비속어, 줄임말 등을 빼지 않고 백 퍼센트 그대로 책으로 담았다. 저자는 인기 코미디 프로그램 <웃찾사>, <개그야>에 출연한 바 있으며 현재는 대한민국 최초의 코미디언 서평가로 활약하고 있는 남정미와 15년 넘게 방송과 신문을 통해 출판평론가로 책을 소개하고 있는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편집위원 김성신. 두 사람이 전부터 방송을 통해 호흡을 맞춰서인지 대화 내용이 오랜 친구 사이처럼 가깝고 친근해 읽는 내내 유쾌했다.

 


그렇다고 유쾌하기만 한 책은 아니다. 서평이라고 하면 전문적으로 평론을 공부했거나 출판계에 종사하거나 글쓰기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만이 도전할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 책은 누구나 서평을 할 수 있고 어떤 형식이든 책[書]에 대한 평(評)이기만 하면 서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100명 중 98명이 틀리는 한글 맞춤법>의 경우 전문 서평가라면 내용상 오류가 없는지, 형식상 특징이 무엇인지, 현 사회에 이 책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지 등을 학문적인 관점에서 분석하겠지만, 이 책은 카페에서 본 젊은 여성들이 아리따운 외모가 무색하게 입이 걸져서 당황했다는 일상적인 화제로 시작해 후배가 보낸 문자에서 발견한 오타, 네티즌이 만든 영화 자막파일에서 본 맞춤법 오류 등 많은 사람들이 경험해봤을 법한 이야기로 책 소개를 갈음한다. 그런데도 책이 궁금하고 직접 읽어보고 싶다. 이렇게 이 책은 머리가 아닌 마음에 어필하는 서평의 가치를 일깨워준다.



형식만 기발한 것이 아니라 내용에도 깊이가 있다. <장서의 괴로움>에 대해서는 책을 읽지 않으면서 수집만 하는 사람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책을 읽기만 하고 '배설'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비판 의식이 엿보이는 대목이 나온다. '성신 : 인간은 나약한 존재라 지식을 필요 이상으로 많이 쌓으면 쉽게 오만해져서 결국 신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할 수 있어요. 세상을 크게 어지럽힐 수도 있다는 겁니다. 나폴레옹도 히틀러도 스탈린도 모두 독서가였어요. 지식이 머리에 고여 썩게 만든 다음, 한꺼번에 잘못 배설한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어요.' (p.120) 서평집이라고 해서 무조건 책을 예찬하고 책 읽기를 권하지 않고 잘못된 책 읽기를 경계하는 내용도 나오니 좋다. 책이란 저자가 무수한 독자에게 던진 말이기도 하기에 대답이 필요하다. 대답하는 방법으로는 서평이 있고 창작도 있고 이 책에 나온 것처럼 또 다른 독자와의 대화도 있다. 어떤 방법으로든 좋으니 저자에게 닿든 닿지 않든 읽었으면 쌓아두지 말고 배설하자.



독서의 효용에 관한 대목도 나온다. '정미 : 저는 이 책에서 "이제 우리는 'expert'가 아닌, 'professional'을 추구해야 한다."고 했던 부분도 인상 깊었어요. 전기드릴이 잘 팔리는 상황을 보고 '더욱 성능이 뛰어난 드릴을 팔자.' 라고 생각하는 자가 엑스퍼트라면, '고객이 원하는 것은 드릴이 아니라 구멍을 뚫는 일이구나.'를 생각하는 자는 프로페셔널인 것이라고 설명하는데... 정말 머리에 쏙쏙 박히던데요. 성신 : 그러한 진정한 프로페셔널이 되기 위해서는 책을 통해 인문학적 교양부터 쌓아야 한다는 설명이었지요. 정미 : 맞아요. 주어진 상황에, 주어진 정보만 보고도 즉각적으로 최적의 판단을 내릴 수 있으려면 통찰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통찰력은 책을 읽으면 반드시 생긴다는 이야기였지요.' (<마흔 이후, 인생길> p.264) 인터넷과 스마트폰은 확실히 편리하고 유용하지만 수천 년 전의 사람들 또는 세계 각국의 사람들로부터 지혜의 정수를 전해받거나 혼자서 오롯이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데에는 책을 따라잡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스마트폰을 이용해 책 이야기를 나누는 이 책이야말로 디지털과 아날로그, 현대와 고전의 만남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훌륭한 예가 아닐까. 이러한 기발한 시도가 이 책 한 권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5-06-20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제는 페이스북에서 파워포인트 발표 자료처럼 이미지와 간략한 줄거리를 소개하는 서평을 본 적이 있었어요. 생각보다 허접하게 만들지 않았어요. 책 속의 핵심 내용을 길지 않게 잘 정리했고, 책에 대한 느낌도 명확하게 썼더라고요. 이러한 서평 형식은 카카오페이지에 올려도 통할 것 같습니다. 스마트폰에 익숙해지지는 시대가 이어질수록 텍스트만 가득한 자료를 몇 분 이상 동안 읽을 수 없을 겁니다. 사람들은 짧은 글을 읽는 것이 편하게 느껴져서 간략하게 쓴 글을 선호할 것입니다. 조금은 섣부른 생각이지만 서평을 개인방송을 통해서 낭독하는 방식도 나올 것으로 예측해봅니다.

키치 2015-06-20 23:18   좋아요 0 | URL
유튜브 보면 이미 외국 독자들은 영상으로 서평을 공유하거나 자기가 산 책을 소개하고 있더라구요. 국내 유튜버 중엔 아직 없는 것 같은데 조만간 나올 수도 있겠지요 ^^
 
책은 도끼다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 외모를 가꾸고, 내면을 채우고, 소개를 받고, 새로운 곳을 찾아 다녀도 운명의 그 남자, 그 여자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책도 비슷하다. 좋은 책을 읽고 싶어서 인터넷서점을 들락날락 하고, 이웃 블로거의 추천을 받고, 책 관련 팟캐스트를 찾아듣고, 대형서점을 찾아 다녀도 '인생의 책'을 만나기란 어렵다. 세상에 좋은 책이 별로 없는 걸까, 내가 보는 눈이 없는 걸까. 나보다 먼저 인생의 책을 만난 사람들은 어떻게 그 책을 '발견'했을까. 답을 찾기 위해 애서가로 유명한 광고인 박웅현의 <책은 도끼다>를 읽었다.




박웅현이 2011년에 진행한 강독회의 강연록을 엮은 이 책에는 김훈, 알랭 드 보통, 고은, 알베르 카뮈, 밀란 쿤데라, 톨스토이 등 장르와 국적, 시대를 불문하고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널리 읽히고 사랑받는 작가들의 작품이 다수 나온다. 여덟 번의 강의를 통해 소개된 작가만 총 18명, 책은 42권에 이른다. 인생의 책을 벌써 이만큼 만난 것도 대단하지만, 이만큼의 작가와 책을 추려내기 위해 몇십 배, 몇백 배의 책을 읽었을 저자의 노고를 생각하니 머리가 숙여진다. 저자는 "책 읽기에 있어 '다독 콤플렉스'를 버려야 한다." 라고 말했지만, 많이 읽지 않으면 어떤 책이 좋은지, 자신이 어떤 책을 좋아하고 필요로 하는 지 알 수 없다. 일단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많이 읽을 것. 단, 쉽게 빨리 읽히는 얇은 책들만 읽지는 말 것. 이는 연애 경험이 많을 수록 자신의 이상형과 연애 패턴을 알게 되어 좋은 사랑을 할 가능성이 높아지지만, 그렇다고 이 사람 저 사람을 마구잡이로 만나다보면 진짜 내 사랑을 못 알아보거나 알아보고도 놓칠 수 있는 것과 같다.




더 놀라운 건 저자가 '다독'하는 동시에 '정독'하고 '숙독'하는 점이다. 


_ 한번 읽은 책들을 메모해놓는데, 통계를 내보면 일 년에 읽는 책이 서른 권에서 마흔 권 사이입니다. 한 달에 세 권 정도 읽는 건데 독서량이 많은 건 절대 아니죠. 대신 저는 책을 깊이 읽는 편입니다. 한 문장 한 문장을 꼭꼭 눌러 읽습니다. 여기 제가 써놓은 것들을 프린트해왔습니다. 우선 저는 이렇게 책을 읽으면서 좋은 부분들, 감동받은 부분들에 줄을 치고, 한 권의 책 읽기가 끝나면 따로 옮겨놓는 작업을 합니다. 이 강의의 목표는 이런 방식의 책 읽기를 통해 제가 느낀 '울림'을 여러분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강의의 또 다른 목표가 있다면, 여러분이 제게 '울림'을 준 책을 사고 싶게 만드는 겁니다. 결국 저는 광고하는 사람이니까요. (웃음) (p.14)




한 번 읽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 반복해 읽는 것도 대단한데 문장 한 줄 한 줄을 눌러 읽고, 줄을 긋고, 메모하고, 따로 옮겨쓰기까지 한다니 굉장하다. 똑같은 책을 읽고도 저자만큼 느끼고 깨닫지 못한 건 문장을 입에 들어가는 대로 삼키기만 했지, 저자처럼 천천히 꼭꼭 씹고 음미하지 않은 까닭일까. 저자가 김훈의 글을 읽고 김소월의 <산유화>라는 시를 다시 보게 되고,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읽고 피카소의 위대함을 새삼 깨달은 것처럼, 나 또한 이 책을 통해 김훈, 밀란 쿤데라 같은 작가를 다시 보게 되었고 작품을 더 꼭꼭 씹어 먹으리라 결심했다. 아, 내가 그토록 찾아다닌 '인생의 책'은 이미 읽은 책들 중에 있었구나. 혹시 사랑도 그럴까? 설마... 그건 아니겠지.



댓글(4)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5-06-19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같은 스마트폰 전성시대에 책을 읽으려면 집중력과 인내심이 많이 있어야 될 것 같습니다. ^^;;

키치 2015-06-20 16:42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책보다 쉽고 재미있는 읽을 거리, 볼 거리가 많아졌죠... ^^

간서치 2015-06-20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나서 부터 필사 방식이 아니면 책을 제대로 읽었는지 기억이 잘 안나요.. 몇번을 계속 반복해서 꼭꼭 씹어 내책을 만든다는 것도 어렵고요.. ㅜㅜ

키치 2015-06-20 16:43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쉽고 재미있는 게 엄청 많은데
일부러 어렵고 불편한 책을 몇 번이나 반복해 읽는다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죠.
그래서 저자의 책 읽기가 더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6 - 시오리코 씨와 운명의 수레바퀴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1부 6
미카미 엔 지음, 최고은 옮김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 방에 가장 많은 건 옷도 화장품도 아닌 책이다. 정기적으로 안 읽는 책을 중고서점에 내다 팔고, 지인들한테 나눠주고, 간간히 블로그를 통해 책나눔을 하는 데도 여전히 많다. 문제는 이렇게 책이 많고 태반이 읽지 않은 책인데도 끊임없이 사들인다는 것이다(실은 그저께도, 어제도, 오늘도 질렀다. 몇 권을 질렀는지는 말하지 않겠다). 책이 뭐길래, 물욕 없다 자부하는 나조차도 탐을 내는 것일까.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대표작 <만년>의 초판본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그린 미카미 엔의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시리즈 신작 제6권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6 - 시오리코 씨와 운명의 수레바퀴>를 읽으면서 눈에 들어온 것 역시 책보다 '탐욕'이었다. 이 시리즈를 2013년부터 올해로 3년째 읽고 있는데, 이번 6권에 이르러서야 이 시리즈가 고서가 아닌 책에 대한 탐욕을 다룬다는 사실을 발견하다니, 나도 참 느리고 둔하다.



맨처음 눈에 띄는 탐욕은 다나카의 탐욕이다. 1권에서 다자이 오사무의 대표작 <만년>의 초판본을 가지기 위해 비블리아 고서당의 주인인 시오리코를 계단에서 밀어 중상을 입히기까지 했던 다나카가 또다시 등장해 이번에는 시오리코가 가지고 있는 언컷본 <만년>이 아닌 다자이 오사무의 친필이 적힌 <만년>을 구한다고 의뢰를 한다. <만년>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고 형까지 살았으면서 출옥 후에도 변함없이 <만년>을 찾아다니는 그의 집착이 보통(?)의 독자인 나로서는 무섭기 그지 없었다.



그 다음으로 눈에 띄는 탐욕은 로마네스크 회원들의 탐욕이다. 오래 전 다자이 오사무의 팬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로마네스크'라는 모임을 결성했고 친형제처럼 가깝게 지냈으나 책 한 권 때문에 사이가 틀어진 이후로 평생을 보지 않았다. 책 한 권 때문에 친구가 되는 건 이해하지만 책 한 권 때문에 형제보다 더 가깝던 사람들이 원수가 되다니. 로마네스크 회원은 아니지만, 이들의 관계를 이용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 한 사람이나, 이 모든 걸 알면서도 역시 제 뜻만 이루려고 했던 사람의 비뚤어진 책탐도 이해하기 어렵다.



가장 무서운 건 시오리코의 탐욕이다. 1권에서만 해도 가마쿠라역 부근의 고즈넉한 헌책방 '비블리아 고서당'을 운영하는 미인 사장에 불과했던 시오리코는 고서에 관한 지식만 넘치는 것이 아니라 그걸 이용해 미스터리한 사건을 해결하고 심지어는 자신을 협박하는 사람과의 대결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 모든 건 인간으로서의 도리나 여자로서의 자존심이나 사장으로서의 야망 같은 것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책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만년>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이 보지 못한 <만년>의 또다른 판본을 보기 위해서만 그녀는 머리를 쓰고 말하고 행동한다. 책만이 추동할 수 있는 인간, 시오리코. 그녀가 가장 무섭다.



이 시리즈가 작가가 아닌 독자에 관한 소설이라는 생각도 처음으로 들었다. 이전까지 이 시리즈가 고서와 해당 작품을 쓴 작가를 소개하는 줄만 알았고 마찬가지로 이번 6권도 다자이 오사무의 대표작과 그의 생애가 상세히 나오지만, 적어도 6권만큼은 다자이 오사무라는 작가를 흠모하고 동경한 독자들이 중심이다.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을 읽고 비평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모임을 만들고 그의 생애를 추적하고 그에 관한 자료와 정보를 수집하며 평생을 보낸 독자들... 어떤 독자의 삶은 작가의 그것만큼이나 기구하고 극적일 수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 나는 과연 어떤 독자일까. 그저 책을 탐하기만 한 독자로 남고 싶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재는재로 2015-06-12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확실히공감가는말이네요책은사고싶고막상사고나서읽지도않고기냥두는사놓고1년지나서겨우다읽은책도있고몇년채읽지못하는살때는읽고싶었는데막상사고나니책장에책이차는것도좋지만맋~ㅇ책이많야책넣어둘때없으까걱정해야하는판국이라
 
말하다 - 김영하에게 듣는 삶, 문학, 글쓰기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얼마전 소설가 김영하의 TED 강연 영상 '예술가가 되자, 지금 당장!'을 보았다. 소설가라고 하면 과묵하거나 눌변이리라는 편견이 있던 내겐 그야말로 신선한 발견이었다. 물론 김영하가 소설가 말고도 교수, 라디오 DJ, 팟캐스트 진행자 등으로 활약하며 다양한 재능을 보여줘 왔다는 사실은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긴 시간 강단 위에 서서 때로는 웃기고 때로는 가슴을 울리며 청중을 휘어잡는 모습을 보며 그가 물건을 팔았다면 내 살림은 거덜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다행히 그는 소설가이고, 현재 내 인터넷서점 장바구니엔 그의 책이 가득하다). 



김영하가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강연, 대담 또는 인터뷰를 모은 책 <말하다>를 읽었다. 말 잘하는 작가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좋았다. 말만 좋은 것이 아니다. 강연, 대담 또는 인터뷰를 그냥 엮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저자가 직접 주제를 정하고 주제에 맞는 말을 갈무리해 엮은 책이라서 생각외로 깊이가 있고 내용이 깔끔하게 연결된다. 이십 년 가까이 한 강연, 대담, 인터뷰를 정리한 수고도 대단하지만, 이십 년 가까이 소설과 문학, 창작 같은 심오한 주제를 최전선에서 고민하며 자신만의 답을 내기 위해 노력해온 노고도 굉장하다. 



문학은 성공하는 방법은 가르쳐줄 수 없지만 실패가 그렇게 끔찍하지만은 않다는 것, 때로 위엄 있고 심지어 존엄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그러니 인생의 보험이라 생각하고 소설을 읽어라. (p.21)



저자는 먼저 오늘날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말한다. 사인회 같은 자리에서 저자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몇 년째 취업 준비를 하는 상황 속에서도 책을 놓지 않는 젊은 독자들을 보면서 '그들이 자기의 존엄성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고백한다. 결코 낙관할 수 없는 현실을 살면서도 자기다움을 잃지 않으려는 정신이 사람들을 책으로 이끈다. 나 역시 대학교를 졸업할 즈음부터 취업 준비를 하는,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맹렬히 책을 읽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다움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던 것 같다.



글쓰기란 무슨 의미일까. 저자는 건강한 개인주의란 '타인의 삶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독립적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그 안에서 최대한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며 '이때의 즐거움은 소비에 의존하지 않는 즐거움이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남의 이야기를 그저 소비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고 글을 쓸 때 인간은 즐거움을 느끼고 사는 보람을 느낀다.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매체가 디지털로 바뀌고 140자의 제한이 생겨도 사람들이 끊임없이 텍스트를 쓰고 이야깃거리를 찾는 이유다.



우리 마음속의 예술적 충동은 억눌렸을 뿐,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라지지 않을 뿐 아니라 이 억눌린 충동은 부정적인 방향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 (중략) ... 연기가 저게 뭐냐, 발연기다, 노래도 못하는 게 무슨 가수냐, 댄스가 아니라 에어로빅이다. 이런 말을 하면서 채널을 돌립니다. 우리 마음속의 시기심은 우리가 사악해서가 아니라 우리 내면의 어린 예술가가 마음 저 깊은 곳에 갇혀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p.74)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행위는 세상과 거리를 두는 행위이기도 하다. 오늘날 사람들은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어하고 주목받고 싶어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사람에게 필요한 건 어둠이'다. '친구들 만나서 낄낄거리고 웃고 떠들면서 세월을 보내면 당시에는 그 어둠이 사라진 것 같지만 실은 그냥 빚으로 남'을 뿐이다. 글쓰기는 '한 인간이 자기의 과거라는 어두운 지하실의 문을 열어젖히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씀으로써 사람은 강해지고 부조리한 세상과 맞서는 힘을 가진다. 이걸 억압당하거나 스스로 억누를 때 인간은 타인을 비방하고 세상을 원망하고 악에 기울어지기 쉽다.



그렇다면 김영하가 생각하는 최고의 소설이란 무엇일까. 



"다 읽었는데 밑줄을 친 데가 하나도 없고, 그럼에도 사랑하게 되는 소설, 읽으면서 한 번도 멈춰 서지 않았다는 거잖아요? 걸린 데가 없었다는 거죠. 그런데도 왠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아름다운 것을 보았다는 느낌을 받는 거예요. 남에게 요약하거나 발췌하여 전달할 수 없다고 느낄 때, 그런 소설이 최고의 소설이라고 생각해요." (p.92) 



소설은 아니지만, 내겐 이 책이 꼭 그렇다. 김영하라는 작가가 키워온 아름다운 것을 몰래 훔쳐본 느낌, 그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어떤 책을 읽고 어떤 글을 쓰며 그 속에서 어떤 세상을 보았고 꿈꾸었는지를 알게 된 느낌이다. 소설이라는 광활한 우주에 비해 자기 자신이 얼마나 작고 초라한 지를 느끼는 일이 쓸쓸하고 비참하기는커녕 오히려 행복하고 황홀하다는 고백도 아름답다. 



아마도 칼 세이건의 말일 텐데,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런 말이었어요.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내 생애에 우주를 전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밤하늘의 별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낀다. 저와 소설의 관계도 그와 비슷한 것 같아요. 전 세계의 소설에 역사가 있잖아요.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소설들이 있고, 제가 쓰는 건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하죠. 앞으로 남은 생애 안에 제가 아무리 잘 쓴다고 해도 밤하늘의 어떤 흔적도 되지 못할 수도 있는데, 그러나 그 세계의 일부라는 것, 내가 그 작가들 중 한 명이라는 것, 그게 어떤 기쁨을 줄 때가 있어요. (pp.89-90)



그 누구와도 완벽하게 합일되었다고 느낀 적 없고, 그 어떤 조직이나 사회에도 완전히 물들어본 적이 없는 나 역시 누군가에게 일체감을 느끼고 어딘가에 푹 빠졌다 나오는 듯한 느낌을 받은 건 소설(을 비롯한 책)이 전부다. 이런 말을 하고 글을 쓸 수 있다니, 대체 그는 여태껏 어떻게 읽어온 것일까.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 지, <보다>, <말하다>에 이은 김영하의 산문집 삼부작의 마지막권은 <읽다>라고 한다. 어떤 책일지 벌써부터 궁금하고 기대가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산 자와 죽은 자 스토리콜렉터 32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스포일러 주의 ***


베스트셀러 <백설공주에게 죽음을>, <깊은 상처>, <상어의 도시> 등을 쓴 독일을 대표하는 미스터리 스릴러 작가 넬레 노이하우스의 '타우누스 시리즈'가 돌아왔다. 신작이자 시리즈의 제 7권인 <산 자와 죽은 자>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축제 분위기에 젖어있는 중소 도시 타우누스에서 개를 산책시키던 노인, 손녀와 요리를 하던 부인, 빵집 종업원 등 순박하고 무고해 보이는 사람들이 살해당하는 연쇄 살인사건이 일어나면서 혼란에 빠지는 과정을 흥미롭게 그린다. 이 과정에서 장기 이식의 어두운 이면과 사적 제재의 문제가 드러난다.


장기 이식과 사적 제재는 배우자나 가족 등 소중한 사람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고 남은 '산 자의 포효'라는 점이 비슷하다. <산 자와 죽은 자>에서는 뇌사 상태에 놓여 겉보기엔 멀쩡하지만 머지 않아 죽을 사람의 장기를 이식하는 문제를 두고 가족들과 병원측이 대립하고, 이 과정에서 병원측의 처사에 불만을 품은 자가 스스로 사적 제재를 감행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평소 장기 이식과 사적 제재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소설을 읽으면서 만약 내 가족이 뇌사 상태에 빠져 내가 장기 이식을 결정할 상황에 놓인다면, 그 과정에서 병원측이 함부로 내 가족의 신체를 훼손하고 장기를 처리한 사실을 알게 된다면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말하며 장기 이식을 감행하는 병원 측의 입장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 막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자라면 나 때문에 그리 되었다고 자책하거나 복수할 마음을 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전작들과는 달리 이번 소설의 범인은 마냥 나쁘게만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인 범인의 죄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사랑받지 못한 여자>부터 <사악한 늑대>까지 타우누스 시리즈 전권을 읽은 독자로서 이번 <산 자와 죽은 자>는 기다린 보람이 있다. 사건 해결이 코앞인 듯 하면 또다시 사건이 터지고, 가장 유력해보이는 용의자가 연이어 교체되고, 심지어는 경찰 동료의 방해로 잘못된 정보와 단서를 가지고 수사하는 등 전에 없던 난항을 겪으며 피아와 보덴슈타인 반장은 시리즈 사상 최악의 상황에 몰린다. 읽는 내내 잡다하게 느껴질 만큼 엄청난 양의 단서들이 언제쯤 정리될까 싶었는데 마지막에 이르러 깔끔하게 정리되는 것을 보며 역시 넬레 노이하우스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크리스토프와의 사랑이 깊어지는 피아, 전 부인 코지마의 어머니로부터 매력적인 제안을 받고 행복한 고민에 빠진 보덴슈타인 반장의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두 사람 모두 일과 사랑을 계속 양립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두고 고민하는 것 같은데 다음 시리즈에서는 어떻게 될까? 타우누스 시리즈 팬이라면 어서 읽어보시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