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적 : 나를 변화시키는 조용한 기적 배철현 인문에세이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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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치 안에 있는 애벌레는 죽은 것이 아니다. 나비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움직이지 않기로 작정한 것이다." 고전문헌학자 배철현의 신작 <정적>은 저자의 전작인 <심연>, <수련>으로부터 이어지는 세 번째 책이다.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필요한 삶의 지혜를 선조들이 남긴 고전에서 찾는 작업을 하는 저자는, 이 책에서 마음의 평안을 찾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찾을 수 있는 태도로 '정적'을 제안한다.


정적이란 무엇일까. 책에 따르면 정적은 '잠잠한 호수와도 같은 마음의 상태'다. 하루 동안에도 수많은 말과 글이 만들어지고, 그렇게 만들어진 말과 글은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들어와 나의 내부를 어지럽히고 혼란스럽게 만든다. 저자는 이렇게 어지럽혀지고 혼란스러운 상태로 하루를 보내고 인생을 영위하면 결국 자기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뭔지 알 수 없게 된다고 말한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뭔지를 알려면 자신의 눈과 귀로 흘러들어오는 타인들의 생각을 차단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상태에서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사는 게 힘들고 어려운 이유는 뭘까. 저자는 자신의 운명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인생이 불평과 불만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여기서 자신의 운명이란 타고난 팔자나 부모 또는 교사가 정해준 진로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운명이란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살고 싶은 삶의 모습을 뜻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살고 싶은 삶의 모습이 따로 있는데, 그걸 이루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정해준 일을 하거나 남들이 바라는 대로 사는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만약 당신이 지금 불행하다면 자신의 운명을 따르지 않고 남들의 말을 따르고 있기 때문일 수 있다.


삶에서 중요한 건 의외로 아주 작고 사소한 일일 수 있다. 아무리 좋은 옷도 바느질이 엉망이라면 제대로 입을 수 없다. 아무리 멋진 신발도 물이 샐 정도의 틈이 생기면 신을 수 없다.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멋진 스펙을 갖추고 대단한 부와 명예를 가졌어도, 하루 세 끼를 제때 챙겨 먹지 못한다거나 충분히 잠을 못 자는 등 필수적인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다. 지금 내 삶에 무엇이 넘치거나 부족한지, 넘치는 걸 비우고 부족한 걸 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싶다면 자기 자신과 마주 보고 대화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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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여행 - 이별과 이별하기 위한
주형 지음 / 제페토하우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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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왜 이런 얼굴을 하고 있을까?' 7년 차 직장인이던 시절, 저자는 우연히 버스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기 넘치는 젊은이의 얼굴이었는데, 오랜만에 유심히 본 자신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슬프고 우울해 보였다. 저자는 깊은 한숨을 내쉬다 모든 게 이별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이 되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곁을 떠나갔다. 먹고살아야 한다는 부담은 이별의 슬픔을 있는 그대로 느끼지 못하고 미뤄놓게 만들었다. 저자는 그때 모든 걸 멈추고 여행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별여행>은 작가 주형의 첫 에세이집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이별과 이별하기 위한 이별 여행'의 매력과 가치를 소개한다. 버스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문득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는 저자는, 얼마 후 스페인으로 향하는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낯선 땅에 가면 기분도 전환되고 생각도 정리될 줄 알았는데, 저자는 도착하자마자 시차 적응에 실패하고 잠을 설쳤다. 수면 부족은 심한 두통과 스트레스를 야기했고, 여행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저자를 점점 신경질적으로 만들었다.


저자를 힘들게 한 건 여행이었지만, 저자를 위로한 것 역시 여행이었다. 저자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건축가인 가우디의 작품 둥 하나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보면서 큰 위로를 받았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벌써 100년째 공사 중인 미완성 성당이다.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성당을 짓는 데 힘을 썼고, 결국 완공을 보지 못한 채 눈 감았다. 결국 삶이란 그런 것이다. 사람들은 사는 동안 뭔가를 완성하거나 완수하기를 바라고, 그럴 수 있다고 믿지만, 그러지 못한 채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겸허하게 살 일이다.


저자는 스페인 여행을 마친 후 포르투갈로 떠났다.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서 왔으니 서쪽 끝을 보고 싶다는 단순한 생각에서였다.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은 호카곶이다. 대륙의 끝인 그곳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저자는 왠지 모를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그곳에 그동안 쌓아두었던 마음속 모든 절망과 걱정과 비겁함을 버리고 왔다. 여행을 마친 후 저자는 직장을 그만두고 제페토하우스라는 출판사를 차렸다. 저자의 다음 행보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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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버 보이 - 당신의 혀를 매혹시키는 바람난 맛[風味]에 관하여
장준우 지음 / 어바웃어북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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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을 여행하면 좋은 점 중 하나는 그 나라 고유의 음식을 먹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자국에는 없는 식재료로 만든 음식이나 자국에서는 하지 않는 방식으로 만든 음식을 먹어보는 것은 색다른 자극을 주고 신선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음식 칼럼니스트 장준우의 <플레이버 보이>에는 저자가 그동안 여행 또는 취재차 찾은 나라에서 직접 먹어본 식재료와 음식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저자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대학에서 신문방송을 전공하고 신문기자로 일하던 중, 우연히 음식과 요리의 세계에 매혹되어 이탈리아로 요리 유학을 떠났다. 이탈리아 요리학교와 시칠리아 주방, 프랑스 식당을 거쳐서 현재는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음식에 관한 글을 쓰는 작가로 활동 중이다. 저자의 유학 시절 일화가 이 책 곳곳에 등장해 호기심을 유발하고 재미를 선사한다.


책에는 이탈리아, 프랑스, 체코, 일본 등 다양한 나라의 식재료 이야기, 음식 이야기가 펼쳐진다. 유럽에서 양파와 셀러리, 당근은 요리할 때 반드시 사용하는 재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자주 쓰인다. 양파는 어디서든 잘 자라고 쉽게 수확할 수 있어서 예부터 많이 사용되었다. 반면 셀러리는 19세기 이전까지 아주 귀한 식재료였다. 당근은 11세기경 중동에서 유럽으로 건너왔고, 원래는 주황색이 아니라 자주색, 검은색이었다. 오랫동안 개량을 거쳐서 현재의 색깔이 되었다.


한국인들이 냉면 국물에 식초를 넣는 것처럼 유럽 사람들은 요리할 때 식초를 자주 넣는다. 유럽 사람들이 사용하는 식초는 한국이나 일본, 중국 사람들이 사용하는 식초와 약간 다르다. 동양에서는 쌀이나 곡물을 발효한 식초를 주로 사용하는 반면(한국에선 사과 식초, 레몬 식초를 주로 사용한다), 서양에서는 레드 와인 식초, 화이트 와인 식초, 발사믹, 셰리 와인, 애플 사이더 식초 등을 사용한다. 이렇게 음식에 식초를 넣는 것은 음식에 감칠맛과 단맛을 더하여 생동감을 높이기 위함이다.


서양 사람들이 문어를 싫어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이는 북유럽에 해당하는 말이고 남유럽은 다르다고 한다. 대서양과 지중해에 인접한 남유럽에서는 예부터 문어가 많이 잡혔고 문어 요리가 발달했다. 한국에서 문어 요리 하면 문어숙회가 일반적인 반면, 이탈리아에서는 문어를 1시간 남짓 끓여 양념한 후 와인에 곁들여 먹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문어를 1시간 남짓 끓이면 질겨서 잘 끊어지지도 않을 것 같은데, 저자가 직접 먹어본 바로는 무척 연하고 부드럽다고 한다. 정말 그런지 나도 언젠가 꼭 먹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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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설득
메그 월리처 지음, 김지원 옮김 / 걷는나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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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삶에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메그 월리처의 장편소설 <여성의 설득>은 대학 신입생 그리어가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60대 페미니스트 페이스를 만나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성장하는 과정을 통해 여성의 삶에 꼭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질문하고 보여준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그리어는 페미니즘의 '페'자도 모르는 학생이었다. 그리어는 전교에서 가장 똑똑한 학생으로 꼽힐 만큼 학업 성적이 우수했고, 남자친구 코리와는 '쌍둥이 로켓선'이라고 불릴 만큼 사이가 좋았다. 앞으로 밝은 미래가 펼쳐질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리어에게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대학 신입생으로서 맞은 첫 주말. 캠퍼스 내에서 열린 파티에 갔다가 처음 보는 남학생에게 성추행을 당한 것이다. 남자친구 코리는 하나뿐인 여자친구가 성추행을 당했다는 데도 미지근한 반응을 보인 반면, 같은 기숙사에 살게 된 동기 지는 이건 명백한 폭행이므로 학교 당국에 신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리어는 자신이 성추행을 당했다는 사실이 남들에게 알려지는 게 두려워서 고발을 꺼린다.


몇 주 후, 그리어뿐만 아니라 여러 여학생들이 그 남학생으로부터 비슷한 일을 당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학교 당국도 이 일을 알게 되지만, 학교 당국은 그 남학생에게 가벼운 처분을 내리고 피해자인 여학생들은 "이건 사실상 여성 혐오야."라며 분노한다. 그제야 자신이 당한 일의 심각성을 깨달은 그리어는 얼마 후 학교를 찾은 유명 페미니스트 페이스 프랭크의 강연을 보러 간다. 강연을 통해 그리어는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힘든 상황에 처해 있는지 깨닫고, 자신도 페이스처럼 수많은 여성들에게 현실을 일깨우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용기를 내서 페이스 프랭크와 직접 대화하는 데 성공한 그리어는 그렇게 페이스와의 오랜 인연을 시작한다.


이 소설은 크게 세 가지 축으로 구성된다. 첫째는 그리어와 페이스의 관계다. 그리어와 페이스는 전형적인 멘티 - 멘토 관계다. 그리어는 페이스로부터 자신에게 필요한 힘과 지식을 흡수하며 성장하고, 페이스는 그리어에게 자신이 쌓은 힘과 지식을 교육하고 나누어 주면서 성숙한다. 그리어와 페이스가 항상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건 아니다. 그리어는 페이스의 지성과 카리스마에 압도된 나머지 진정한 자신을 숨기고 사람들을 속이기도 한다. 프랭크 역시 그리어가 기대하지 않은 불완전한 모습을 보여서 그리어를 실망시키기도 한다. 그리어와 페이스는 각각 자신들이 속한 세대의 페미니즘 운동을 대표하며, 둘 사이의 연대와 갈등은 곧 각 세대의 연대와 갈등을 상징한다. 소설의 마지막에 등장한 케이는 새로운 시대의 페미니즘 운동을 표상하며, 선배 세대인 그리어와 또 다른 연대와 갈등 관계를 맺을 것을 암시한다.


둘째는 그리어와 지의 관계다. 그리어와 지는 대학 신입생 때 처음 만나 오랫동안 사귀게 되는 친구 사이다. 그리어와 지는 여러 면에서 정반대다. 그리어는 가난하고 교육을 못 받은 부모 슬하에서 태어나 모범생으로 성실하게 자란 반면, 지는 판사인 부모 슬하에서 태어나 문제아 취급을 받으며 힘들게 자랐다. 그리어는 대학에 들어오기 전부터 사귄 남자친구 코리와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한 이성애자인 반면, 지는 일찍이 레즈비언 정체성을 깨달았으며 대학에 다니는 동안에는 안정된 관계를 가진 적이 없다. 학교 공부와 남자친구 외에는 관심이 없었던 그리어와 달리, 지는 일찍부터 페미니즘은 물론 LGBT, 채식주의, 환경 등 다양한 정체성 및 정치적 이슈에 눈을 떴다. 여러모로 다른 두 사람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하고, 크고 작은 갈등을 극복하며 진정한 우정을 깨달아가는 과정도 흥미롭다.


셋째는 그리어와 코리의 관계다. 페미니즘 소설인 이 작품에서 이성애자 남성인 코리의 존재는 낯설면서도 흥미롭다. 좋은 집안과 학벌, 알아주는 직장에 높은 연봉까지 갖춘 코리는 이성애자 남성 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하는 알파남이다. 이때만 해도 코리는 여자친구인 그리어가 페미니즘에 관한 이야기를 해도 상냥하게 들어주기만 할 뿐, 이해하지도 공감하지도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코리네 가족에게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이로 인해 코리는 모든 걸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망가진 가족들을 돌보며 코리는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편안한 생활을 했으며, 이 모든 건 어머니의 희생 덕분임을 알게 된다. 나아가 코리는 과거에 어머니가 했던 집안 살림과 청소 일을 하면서 사회가 여성의 몫으로 분류하는 노동이 얼마나 힘들고 평가절하 되는지를 깨닫는다.


이 글을 쓰면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여성의 삶에 꼭 필요한 게 무엇인지 곰곰 생각해 보았다. 그리어는 이성애자인 자신의 성적 욕구를 채워줄 남자친구를 원했고, 자신의 부모가 가지지 못한 안정적인 직장과 재정 상태를 갈망했다. 하지만 대학에서 성추행을 당했을 때 남자친구는 자신을 지켜주지도, 위로해주지도 못했다.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고 보니 자아실현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커졌다. 운 좋게 페이스를 만나서, 페이스의 곁에서 페이스의 가르침을 받고, 페이스와 함께 일하는 기회를 얻게 되지만, 누군가의 그늘 안에만 머무르면 지나가는 바람은 피할 수 있어도 더 큰 나무는 될 수 없는 법. 결국 페이스는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서야 할 때가 왔음을 깨닫고, 이때를 위해 수많은 여성들의 도움과 지지가 필요했음을 인식한다.


다시 말해서 저자는 여성들이 각자 자신의 삶을 잘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여성들 간의 협력과 연대라고 강조한다. 남자들이 서로 돕는 건 다들 잘나고 완벽해서가 아니다. 서로 도와야 그중에 가장 잘나고 완벽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이끌어줄 수 있기 때문에 돕는다. 남자들이 서로 돕는 건 서로 너무 좋아하고 존경해서가 아니다. 인간적으로 도저히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 나에게 도움이 될 때가 있고, 도움을 받고 나면 좋아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여성들이 각자의 삶의 문제를 각자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서로 도움 주고 도움받아야 하는 이유다.


여러모로 흥미로운 이 소설은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피플지 선정 최고의 책, 커커스 리뷰 선정 최고의 책 등의 타이틀을 얻었으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할리우드의 배우 니콜 키드먼이 영화로 제작할 예정이다.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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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김종관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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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자들이 창작을 하지 않는 동안 주로 뭘 하는지 아는 것은 의외로 즐거운 일이다. 그런 정보는 주로 창작자들이 직접 자신의 일상에 관해 쓴 에세이집에 나오기 마련인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에는 그가 평소에 두부를 즐겨 먹고 달리기를 습관처럼 한다는 정보가 나오고, 김연수의 에세이에는 틈만 나면 여행을 한다는 정보가 나온다. 별로 대단한 정보는 아닐지 몰라도 이런 정보가 있으면 창작자가 더 가깝게 느껴지고, 창작자의 작품을 이해하거나 분석하는 데에도 약간의 힌트가 된다.


<더 테이블>, <최악의 하루>, <조금만 더 가까이> 등을 만든 영화감독 김종관이 궁금한 독자에게는 이 책 <나는 당신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가 유용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은 2012년에 출간된 저자의 첫 책 <사라지고 있습니까>의 개정증보판이다. 1부부터 4부까지는 초판에 실린 글이 실렸고, 5부에는 그동안 저자가 새로 쓴 글이 실렸다. 책이 바뀌는 동안 저자의 삶도 많이 바뀌었다. 초판이 나왔을 때만 해도 저자가 이만큼 영화를 찍기 전이었고 지금만큼 유명하지도 않았다. 당시만 해도 저자는 이문동에 살고 있었지만 지금은 효자동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유효한 건, 저자가 지나온 시간들의 기억이 저자의 영화 곳곳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결코 유복하다고 말할 수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공중변소를 쓰는 산동네 판잣집에 사는 것을 들킬까 봐 학교 친구들을 절대 집으로 데려가지 않았다. 보따리에 이런저런 생필품을 담아 전국의 장터를 떠돌며 팔러 다니는 아버지를 따라다닌 적도 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주말이나 방학이 되면 아버지가 지방에 차린 속옷가게 장사를 도우러 서울과 지방을 오갔다. 혼자 놀기에 익숙하고 어릴 때부터 여기저기를 떠돌았던 경험은 훗날 영화감독이 되고 나서도 이어졌다. 집에는 제대로 된 비디오 한 대 없었지만 동네 만화방과 친구네 집, 동네 동시 상영관 등을 오가며 수많은 영화를 봤고, 그렇게 영화감독의 꿈을 키웠다.


저자가 영화를 만들길 잘했다고 느끼는 순간은 언제일까. 영화가 좋은 평가를 받고 많은 대중들의 호응을 얻는 순간도 소중하지만, 저자는 자신의 '허비되고 실패하고 아깝게도 다시 올 수 없는 지난날'이 영화를 통해 재현되고 쓸모 있는 경험으로 바뀔 때라고 말한다. 외롭고 힘들었던 유년 시절의 기억, 영화감독의 꿈을 키우며 치열하게 살았던 청년 시절의 기억 모두 영화로 만들면 아름다워지고 특별해진다. 어쩌면 영화뿐 아니라 모든 창작의 매력이 결국 이것이 아닐까. 쓸모없어 보이는 추억을 쓸모 있게 만드는 것. 추억의 쓸모를 만드는 것. 나의 추억 중엔 어떤 추억이 쓸모 있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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