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100일 정진,  14일차

<一種不通 /일종부통 /한 가지를 통하지 못하면

兩處失功 /양처실공/양쪽 다 공덕을 얻지 못하니


일종(一種)이란 ‘한 가지’ 를 지칭하는 데, 과연 그 ‘한 가지, 일종’은 중도(中道)에 해당할 까?

양 극단의 중간 지점이 아니라면 과연 중도는 무엇일까?

승찬스님은 이미 분별심, 간택심, 취사심을 버리라고 했다.

마음은 늘 양 극단 중 하나에 집착하거나 편향되기 때문에 그 마음을 놓아 버려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양 극단이 본래 떨어 질래야 뗄 수 없는 구조를 가졌다고 살펴보았다.

자석의 양극을 분리해도 자석은 여전히 양극의 성질을 버릴 수 없다.

빨대의 관을 아무리 양끝에서 잘라내도 여전히 처음과 끝이라 이름 짓는 구조를 바뀌게 할 순 없다.

우리가 아무리 양 변을 떼어버리고자 해도 결국 양 변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니 취사심이니 분별심이니 간택심이니 하는 것도 우리는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벗어나고자 하는 그 마음까지도 놓아버려야 한다.

즉, 얻고자 하는 것은 사실 집착이요, 간택이고, 분별이다.

따라서 그 얻고자 하는 마음마저도 놓아야만 우리는 걸림없이 다시 간택하고 분별할 수 있다.

그 한 가지 ‘일종’ 이 중도라면 그 중도는 그 어느 것에도 걸림없는 자리여야 한다.


일종평회(一種平懷) 한 가지를 바로 지니면

민연자진(泯然自津) 사라져 저절로 다 하리다

유체양변(唯滯兩邊)오직 양변에 머물러 있으니

영지일종(寧知一種)어찌 한 가지를 알 수 있으랴


따라서 중도는 어렵다 했지만, 중도가 어려운 것은 자리를 찾으려 하니 어려운 것이다.

그 양끝에 서지 않으려고, 치우치지 않으려고 하는 그 마음을 억누르고자 하니 어려운 것이다.

본래 양 극단이 구조적으로 이루어 진 것인데 애써 중도를 찾는다면서 위치만을 찾으려 하니 찾을 수가 없는 것이 아니였을까?

일종부통(一種不通) 한 가지를 통하지 못하면

양처실공(兩處失功) 양쪽 다 공덕을 얻지 못하니


중도는 위치, 좌표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중도의 치우침이 없는 자리란 바로 '양 극단에서 자유로운 것'이다.

음료수에 빨대를 꽂아 마시듯 우리는 앞 뒤없는 빨대를 꽂아야 한다.

양 극단이란 바로 빨대와 같다.

양 극단을 의지해야 한다. 

양 극단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양극단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양 극단을 저버리면서 중도를 찾는 것은 계란에서 뼈를 찾는 것과 같은 셈이다.

음과 양이 나뉘어 태극이 되어 처음이자 끝이요, 끝이자 처음으로 돌아가는 도리는 모두 조화로움을 뜻한다.

중도란 바로 이 조화롭게 돌아가는 도리를 뜻하는 것이다. 

일종은 결국 그 하나로 돌아가는 조화로움을 말한다.

결국 중도는 일종의 다른 이름이 아니였을까?


푸른 하늘의 흰 구름은 여여히 떠 있다.

 

주:一種:한 일, 씨 종:  한 가지 근본, 즉 본래 성품 혹은 근본자리를 뜻함.

不通:아닐 불, 통할 통 :  통하지 않는다.

兩處: 둘 양, 곳 처: 두 곳, 여기서는 양 극단을 뜻하기도 하지만 그 어떤 곳이든 양 극으로 나뉘는 것은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어느 곳’이라 해도 무방해 보인다.

失功:잃을 실, 공덕 공:  공덕을 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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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13일차

<唯滯兩邊/유체양변 /오직 양변에 머물러 있으니

寧知一種 /영지일종/어찌  가지를 있으랴>

 

중도(中道) 함은 가운데   뜻하지 않는다.

이쪽 혹은 저쪽이라는 선택을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 중도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

특히 정치에서 중도를 표방하면 바로 양비론자(两非论者) 몰리기 쉽다.

중도를 삶의 지표로 삼는 것도 쉽지 않다.

동양의 많은 현자들이 중도中道  중용中庸 말했어도 우리는 중간 어느 지점으로만 인식할 뿐이다.

과연 중도란 무엇인가?

이쪽 저쪽 끝의 중간 값이 중도인가?

 

일종평회(一種平懷)  가지를 바로 지니면

민연자진(泯然自津) 사라져 저절로 하리다

 

동양에서 음양(陰陽사상은 서양의 이분법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중도라 하면 중간 어딘가 쯤으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동양 사상에서 음양은 본래 무극(無極)에서 극도로 혼란함이 점차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나왔다.

음과 양은 고정된 것인가? 아니다.

낮과 밤이 구분이 되어 있어도 낮만 존재하고 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변한다. 음양의 이치는 고정됨을 말하지 않는다.

서양의 이분법과는 결이 다르다.  

음양은 조화로움을 우선 시 한다.

낮과 , 남자와 여자, 선과 악 등등 나누어진 음양은 극단으로 치우치는 것을 경계한다.

조화로움이야 말로 음양 사상에서 추구하는 구조를 지녔다.

중용이나 중도 또한 이러한 조화로움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를 해야 한다.

단순히 양변에 치우친 것을 경계해서 가운데 지점을 택하라는 뜻이 아니다.

극단을 모두 포함한 조화로움이 바로 중용이자 중도라 봐야 한다.

, 양비론이 아닌 양불비론(两不非论)이라고 해야 할까?

선에서는 이를 두고 불이(不二), 둘이 아니다 라고 말한다.

 

음료수를 먹을 빨대를 꼽아 먹는다고 치자.

빨대에 앞과 뒤가 있는가? 뾰족한 부분을 앞이라고 부르 건 뒤라고 부르건, 사실 빨대의 양 끝은 앞뒤가 따로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변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빨대의 중간 부분을 잘라내도 끝이 생기고야 만다.

극단을 거부하려 해도 끝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정치적으로 당을 서로 대립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러나 중도는 사이에 가운데 끼는 존재가 아니다.

현재 한국 정치에서 중도는 양쪽 당으로 부터 소외되고 있다.

그래서 중도를 지킨다는 것은 정말 어렵다.

도의 길에서도 마찬 가지다.

극단에 치우치지 않으면 중도라고 하는데 그게 어디 쉬운 길인가.

 

유체양변(唯滯兩邊)오직 양변에 머물러 있으니

영지일종(寧知一種)어찌  가지를 있으랴

 

신심명에서는 가지 (一種) 지니라고 했다.

일종이 무엇이길래 모든 분별과 알음알이 저절로 사라진다고 했을까?

설마 가지가 바로 중도일까?

우리에게 중도(中道)를 추구하고 일종(一種) 얻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제부터는 중도  무엇 인지를 살펴봐야 단계로 접어 들었다.

 

 

:唯滯: 오직 , 막힐 체 :  막힐 체는 속이 체했다, 교통 체증이 심하다  막혀 있는 형국을 표현할 쓰는데, 막혀서 옴짝달싹 하여 답답한 심정을 뜻한다.

兩邊:  , 가 변: 양쪽 두 가장자리에, 즉 이쪽 과 저쪽 양극단에 있는 상황을 뜻함.

寧知: 편안할 , 알 지: 여기서 영은 형용사로 어찌 ~ 을 으로 쓰임. 즉 어찌~ 을 알겠는가?

一種: , 씨 종:  한 가지 근본, 즉 본래 성품 혹은 근본 자리를 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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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1-11 0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빨대의 비유가 참 적절합니다. 어디나 양 끝단은 존재하는데 결국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옳다는 의식이 가장 큰 걸림돌인 것 같습니다.

마힐 2026-01-11 12:30   좋아요 1 | URL
맞아요. 잉크냄새님.
우리는 사실 빨대를 엄마 뱃속 부터 빨아 왔어요.
탯줄이 바로 빨대 역할을 한 셈이죠.
그런데 우리는 항상 양 극단을 꺼리죠.
탯 줄을 끊고 나온 이의 숙명인가 보죠. ^^
 

- 다시, 100일 정진,  12일차


<止動歸止/지동귀지 /움직임을 그치고 그침에 돌아가면

止更彌動 /지갱미진/그침이 다시 움직임이 되나니>

 

<이솝우화>에 여우는 포도나무에 매달린 포도를 보고 따먹으려고 했다

하지만 여우는 어떤 방법으로도 포도를 없었다.

그러자 여우는 포도 나무를 향해 마디 뱉는다.

포도는 분명히 아주 실꺼야.

 

<삼국지>의 조조는 행군 중에 물이 떨어져 병사들의 갈증은 극에 달했다.

그때 조조는 꾀를 내었다.

바로 앞에 매실 나무 숲이 보인다.

매실은 아주 시고도 달아 우리 목을 축이기에 충분하니 모두 참고 힘내라.

말에 병사들은 매실의 신맛을 생각하니 안에 침이 돌아 갈증을 잊었다.

 

포도와 매실

생각만 해도 입안에 신맛이 돌아 침이 생긴다.

여우는 포도를 먹지도 못했고, 조조의 병사들은 매실을 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신맛을 느꼈다.

포도와 매실은 단지 이름일 뿐인데 그들은 신맛 이라는 관념에 빠지게 되었다.

관념이  우리의 의식에 굳어지게 되는 것이 습관이 되면 이제부터는 쉽게 떼어 버릴 수가 없게 된다.

이처럼 우리는 고정관념과 습에 자유롭지 못한 상태로 살아간다.

 

일종평회(一種平懷)  가지를 바로 지니면

민연자진(泯然自津) 사라져 저절로 하리다

분별심, 간택심, 취사심이란 것도 사실은 이름에 지나지 않는가.

우리는 본체는 얻지 못하고 단지 이름에 걸려서 관념과 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다.

깨달음이나  역시 하나의 이름에 지나지 않는데 우리는 이름 걸렸다.

진정한 깨달음과 도는 이름에 있지 않다.

이름에 걸리지 않고 그저 본질을 바로 인식하는 것이 여여함이라.

여여한 마음 앞에 어떤 관습과 관념도 저절로 사라지게 된다.

 

지동귀지(止動歸止) 움직임을 그치고 그침에 돌아가면

지갱미진(止更彌動) 그침이 다시 움직임이 되나니

 

관념과 습이 사라진 자리에 모든 움직임은 그친다.

그러나 정지(停止) 끝이 아니다.

다시 움직인다. 그러나 움직이는 것도 사실 시작은 아니다.

움직이거나 정지하거나 하는 현상일 뿐 시작도 아니고 끝도 아니다.

움직이는 자리이든, 그치는 자리이든 중요한 것은 거기에 관여하지 않는 것은 오직 근본 마음 뿐이다.

성품은 보이는 형상에, 들리는 소리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이다.

깨달음이 신맛이진 짠맛인지, 단맛인지는 맛을 봐야 함에도 남의 말이나 글에도 걸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아직 이름과 습관 같은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어떤 관습과 관념 그리고 이름에 걸리지도 말고, 바라보는 대상에 대해 올라오는 생각들을 잠시 내려 놓자.

이제부터는 어떤 것에도 걸리지 말고, 관여하지 말고, 올라오는 그 자리에 다시 되돌릴 뿐이다.  

 

 

:止動: 그칠 , 움직일 동 : 움직임을 그쳐

歸止: 돌아갈 , 그칠 지: 그침으로 돌아가다

止更: 그칠 , 다시 갱: 다시 그치는 것이

彌動:두루 , 움직일 동:  두루 움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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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100일 정진,  11일차

<一種平懷/일종평회 /한가지를 바로 지니면

泯然自津 /민연자진/사라져 저절로 하리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간단하지 않다.

세간이냐, 출세간이냐, 본성이냐, 본능이냐, 창조이냐, 진화냐, 돈오냐, 돈수냐 같은 질문 구조로 우리는 구분을 단순화시킨다.

보다 빠르고 쉽게 판단하고 선택하기 위해서 이다.

그것이 우리가 여태 살아왔던 생각의 패턴이며 그것이 우리의 삶을 주도해왔다.

복잡한 것은 싫다. 단순한 게 좋다.

그래서 대상에 대한 질문을 최대한 단순하게 구별했다.

그러나 실제 삶은 단순한 구조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질문의 구조는 단순하지만 선택하는 결정은 결코 쉽지 않다.

취하고 버린다는 문제는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여여하지 못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셈이다.

양유취사(良由取捨) 취하고 버림을 말미암아

소이불여(所以不如) 그래서 여여치 못하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신심명을 통해 여여함에 이르는 길을 발견했다.

그건 오직 간택하고 분별하고, 취하고 버리는 것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행위에 걸리지 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본성과 본능이 따로 구분 되어진 것이 아니며

창조와 진화가 따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돈오와 돈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모순이 모순이 아니라 우리의 어떤 선택에도 걸리지 말라는 것이다.

본능은 본능대로 인정하고

본성은 본성대로 인정하며

창조와 진화가 둘이 아님을 들여다 보고

돈오와 돈수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님을 알라는 것이다.

구분이란 방편이고, 분별 또한 과정이다.

우리는 과정을 결론으로 오해하며 살아간다. 그러니 세상의 실체를 여전히 잘못 보는 것이 아닐까?

 

일종평회(一種平懷)  가지를 바로 지니면

민연자진(泯然自津) 사라져 저절로 하리다

 

가지란 여여(如如)한 마음자리를 뜻한다.

여여함에 이르면 구속 되는 것이 사라지는데 어찌 걸릴 것이 있을까?

분별함에도 걸리지 말고, 아는 것 모르다는 것에도 걸리지 않는 마음.

그것이 여여함이다

여여함이 전부가 되는데 그 외에는 전부 저절로 사라지게 된다.

이제 승찬스님이 본래 그물을 치지도 않았음을 알기에 이르렀다.

 

:一種:  , 씨 종 : 한 가지 씨

平懷: 평평할 , 품을 회: 평등하게 품다. 평등한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담담한 마음을 내는 것이 아닐까?

泯然: 망할 , 그러할 연: ~ 그러하게 없어진다.

自津:스스로 , 다할 진:  스스로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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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08 2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1-09 0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 다시, 100일 정진,  10일차

<莫逐有緣/막출유연 /세간의 인연도 따라가지 말고

勿住空忍 /물주공인/출세간의 법에도 머물지 말라>

 

어제 인간의 진화는 본능이 주도했는지, 아니면 본성이 주도 했는지 질문을 삼았다.

이제 그럼 과연 세상은 창조가 먼저 일까 아니면 진화가 먼저 일까?

이것은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와 같은 구조의 문제가 아닐까?

또한 *돈오(頓悟) 점수(漸修) 논쟁도 이와 같다.

심신명은 이러한 구조에 대해 취하고 버리는 취사심과 간택심, 분별심으로 답하고 있다.

창조론과 진화론 어느 것이 맞냐, 틀리냐의 문제가 아니란 것이다.

 

양유취사(良由取捨) 취하고 버림을 말미암아

소이불여(所以不如) 그래서 여여치 못하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할 것인가?

여여(如如) 마음을 얻기 위해서 취하고 버리는 간택심, 취사심, 분별심이 옳은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이 망설여진다면 결국 여여하지 못한 것이다.

옳다, 그르다  메여서는 마디도 놓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막출유연(莫逐有緣)세간의 인연도 따라가지 말고

물주공인(勿住空忍) 출세간의 법에도 머물지 말라

 

모든 생명의 시작은 창조이면서 진화가 아닐까?

0과 1이 인공지능의 시작이며 진화인 것과 같은 도리다.

단박에 얻는 깨달음과 점진적 깨달음이 서로 다른 것인가?

무상하고 덧없는 , 깨달음을 통해 구원을 얻어야 겠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깨닫기 위해 속세를 벗어 나는 것이 바른 것인가?

깨달음이나 도를 얻기 위해서 세속의 모든 것을 버려야만 하는 것인가?

반대로 먹고 살기도 팍팍한데 무슨 도며 깨달음을 추구해야 하는가?

그럼 물질적인 부의 축척과 명예를 얻는 것만이 세속의 성공인가?

*세간(世間) 출세간(出世間) 서로 다른 것인가?

신심명은 여전히 분별심, 간택심, 취사심의 변주(變奏) 들려주고 있다.

어느 것이 맞다고 하는 순간, 이미 우리는 또 다른 그릇된 견해를 가지게 된다.

옴짝 달싹 못하게 하는 그물을 다신 , 승찬대사는 우리를 옭아매고 있다.

과연 어떻게 해야 빠져 나올까?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면 답은 과연 있기나 건가?

 

:莫逐: 없을 , 쫓을 축 : ~말미 암아

有緣: 있을 , 인연 연: 취하고 버림을 .

勿住:  , 머무를 주: ~ 에 머무르지 말라

空忍: , 참을 인:  공한 상태에 머물고자 안간 힘을 쓰며 참는 것. 즉 공함에 집착하는 것을 뜻함.

*頓悟: 단번에 , 깨달을 오, 漸修: 서서히 , 닦을 수: 깨달음에 대한 논쟁에 쓰이는 방식, 단박에 깨닫는가? 점차적으로 수행을 통해 깨닫는냐에 대한 논쟁에 빠지지 않는다.

*世間:세상 , 사이 간, 出世間: 나갈 , 세상 세, 사이 : 세간은 유위법 혹은 물직적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 세상을 뜻하고, 출세간은 물질계가 아닌 무위법 즉 정신세계를 살아가는 세상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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