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백과사전을 읽는다 - 오래된 지식의 숲, 이수광의 지봉유설
이철 지음 / 알마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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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성리학자, 즉 유학자들은 정치를 하고 철학을 하며, 문화와 문물을 연구하고 널리 알리는 자들이다. 양반 사대부들의 문화와 역사가 대한민국의 역사가 된 점에서 그들을 연구하는 것은 한국학을 연구하는 원류라고 볼 수 있다. 조선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 참으로 기구하다. 한국학을 들여다보면 조상들의 슬기로운 모습도 보나, 주로 마지막 순간을 놓칠 수 없다. 그것이 좋았는지 아니면 나쁜지를 평가하기란 참으로 난해하다. 무조건 좋다면 어리석은 역사를 되풀이하고, 무조건 나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과연 어디서 시작된 부류란 말인가?

 

양반이 중심이 된 사족사회, 그러나 양반 그 자체를 연구하지 않으면 조선은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조선의 주요한 기록은 대부분 양반 중심 지식계층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대부분 한자어로 되어 있고, 한글로 된 기록은 드물다. 한자를 사용하기란 어렵다. 일반 백성은 한자어를 몰라 지식에 대한 권리를 누릴 수가 없다. 언어의 기능에서 문자를 아는 것, 즉 지식을 독점하는 것은 권력을 독점하는 것과 같다. 사대부의 독과점한 지식이 결국 우리가 아는 조선의 모습을 복원한다.

 

양반 중심이던 기록문화라고 해도, 그 중에서도 일반적인 사회상을 담은 자들도 더러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이며,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같은 경우 해양문학으로 가치가 높다. 게다가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기록한 내용들은 조선후기 민중의 현실을 잘 알려주는 사료가 되어주었다. 양반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 혹은 어떤 이야기들을 모은 것을 사설(僿說) 내지 유설(類說)이라 한다.

 

조선의 백과사전이라고 불릴 수 있는 대표서적으로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도 있으나, 그 이전에 이수광의 <지봉유설>이 있다. 이수광이란 이름을 사람은 들은 것 같기도 하고, 혹은 모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지봉유설>이란 책은 교과서 어느 한 단락에 있을 법한 책이므로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이수광은 전주이씨로 태종대왕 아들 경녕군 비의 후손이다. 본래 왕 내지 왕자의 후손은 일정한 직위를 주고, 과거를 보지 못하나, 그 세대가 지나면 다시금 볼 수 있다. 이수광은 명재이나, 다른 인물에 의해 그 명성이 상당히 가려진 인물이다.

 

이수광은 명종 후반에 태어나 인조가 집권 후 정묘호란을 맞이한 해에 사망했다. 명종은 중종부터 대윤과 소윤으로 갈라져 당파싸움이 심했고, 특히나 명종의 어머니 문정황후는 정사에 깊이 관여하여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선조에 이르자 기축옥사가 일어나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까지 겹친다. 조선의 명유들이 가장 많이 집결한 시기는 아마 중종 기묘사화 전후와 선조 임진왜란 전후일 것이다. 조광조와 신진사림들이 화를 당한 기묘사화 이후로 훈구세력이 집권하다 중종 말부터 사림이 기용되나 여전히 외척이 강한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선조가 보위에 오르자, 사림조차 동서 양당으로 나누어지고, 기축옥사 이후로 동인이 북인과 남인이 갈려졌다. 이수광의 이름이 가려진 이유는 우선 동고 이준경이 동인의 거두였고, 이준경의 뜻을 이은 오리 이원익은 남인의 명재상이었으며, 남인 신료에 서애 유성룡, 학봉 김성일 같은 인물이 있었다. 이수광 역시 시와 문학에 능했고, 글을 잘 적어 중국에서도 인정받는다. 이런 이수광이 한국역사 즉 조선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오른 것은 바로 <지봉유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실학자를 떠오른다면 먼저 다산 정약용, 홍대용, 박제가, 이덕무 등이 있으며, 그 이전에 성호 이익이 있을 것이다. 성호 이익은 남인에 속하며, 그의 형 옥동 이서는 동국진체를 만들어내던 서예가이고, 이익과 이서의 친구로 공재 윤두서가 있었다. 공재 윤두서의 아내는 이수광의 증손녀이다. 당파에서 신권을 중시하는 서인과 달리 왕권을 중시하는 남인이기에 전주이씨 사대부들은 남인계열 사족과 혼인관계를 맺은 것은 당연하다. 대표적인 사건은 숙종 시기 김우명의 무고이다. 김우명은 서인계열이고, 김우명이 제거하고자 한 사람은 복창군, 복평군, 복성군으로 인평대군의 아들, 인조의 손자이다.

 

이들은 숙종에게 종숙(5촌 당숙)이며, 학문이 높은 왕족이고, 청렴하고 업무도 잘 보고 하여 큰일을 잘 맡았다. 문제는 이들은 남인과 친했고,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는 아버지 김우명의 무고를 덮고 싶어, 신하와 회의하고 있던 숙종에게 찾아가서 아버지를 살려달라 하여 결국 숙종은 아버지의 사촌들을 귀양 보내고 사약까지 내렸다. 이 일로 남인과 소론계열 유학자들은 그 당시는 물론이고, 숙종 사후까지 손가락질을 하였다. 조선의 정치역사에서 이수광의 <지봉유설>이 남인으로 연결되는 이유는 바로 이로하다.

 

물론 <지봉유설>에서도 과거의 문제를 지적했다. <성호사설>에서도 가장 필요한 인간 중에 하나가 과거로 소일거리를 하는 양반이고, 이들은 옳은 정신으로 벼슬을 하는 게 아니라 대필 내지 뇌물로 자리를 얻고, 자신이 투자한 것만큼 이상으로 백성의 피와 눈물을 흘리게 한다는 점이다. 이수광은 매우 청빈한 선비였고, 국가를 걱정하는 관료였다. 임진왜란 당시 대부분 이순신과 유성룡만 기억하나, 이수광도 외교문제로 명나라에 가고, 왜적과 싸우기 위해 지방으로 내려갔다.

 

게다가 과거 억울한 일이 있던 자들의 한을 기록도 했다. 예전에 어떤 귀여운 여자아이가 주인 배게 속에 시체의 손을 넣게 하여 주인을 병에 걸리게 하게 했다. 조선시대 무고로 상대 진영의 관료를 반역죄로 죽이면, 그 집안의 남자들은 귀양지로 가거나 혹은 참수되었고, 여자들은 모두 노비가 되어 공신의 재산이 되었다. 명종 을사사화로 화를 당한 유관은 평소 밑에 사람에게 자애롭고, 부정부패 고관에게 비판적으로 대했다. 그것이 화가 되어 죽음을 면치 못했다. 이때 유관의 식솔이 억울하게 종살이 하게 되자, 유관의 여종이 주인을 위해 복수하여 원수 집안의 식솔 8명을 죽게 만들었다.

 

물론 발각되어 죽음을 당했지만, 그 기상을 고귀하게 여겼다. 책에서는 1970년대 아파트 재건축 여종의 무덤을 이장하여 유관의 묘와 같이 합장했다고 한다. 21세기는 민주주의 국가이나, 조상에 대한 예의는 조선의 얼이 남아있다. 피를 나누지 않으나, 의를 보여준 그 어린 여종은 문화유씨 문중에서 500년 동안 제사상을 받은 것이다. 인간의 귀천을 다루는 것은 태어난 신분보다는 그()가 보여준 인생의 관록이라 볼 것이다. <지봉유설>에 이런 야사만 아니라 임진왜란 시기에 고난을 겪은 백성의 고통을 기록했다.

 

외국인의 모습과 복장, 그리고 그들의 언어도 기록하고, 식물과 동물, 지리까지 다양하게 기록했다. 다소 유학자란 신분이 있기에 한계성은 있지만, 남들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까지 기록하여 전수한 것이다. 그런 업적이 있기에 녹우당 공재 윤두서에게 그 영향이 미쳤고, 실학자 대부분이 권력에서 박탈된 남인계열인 점에서 그 의미가 깊다. 향촌 사족들은 그 지역의 주인이 되어 호령을 하고, 지방에 내려온 현감이나 현령조차 감히 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방의 향반들은 권력에 물러나 향촌에서 성리학만 잡는 게 아니라 의학, 복서, 천문, 수학 등 다양한 학문을 연구했다.

 

실학을 연구하면 벼슬자리를 노리는 게 아니라 실생활을 풍족하게 만든다. 윤두서의 조상인 윤선도 역시 의학을 잘 알아 집안에 약방을 따로 만들어 약을 처방해준 점에서 그 의미가 깊다. 잡학(雜學)이란 언제나 천대받고 무시당하기 마련이다. 지금도 직업에 따라 사람들이 업신여기는 일들이 종종 보이는 세상이다. 사농공상(士農工商), 위에서 펜이나 잡고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을 무시하는 실태는 여전하다. 공자가 말한 선비 사족들은 농사를 짓는 자를 위해 그 소임을 당하는 자들이다.

 

물론 지금은 상사농공(商士農工)이다. 정경유착이 있기에 많은 국민들이 매일 땀 흘리며 살아가도 삶이 힘들 수밖에 없다. <지봉유설>의 중요한 점은 한국천주교회사와 연계성이다. 한국은 외국의 신부가 들어오지 않고 자생적으로 천주교의 문화유산이 뿌리내린 곳이다. 자연스레 들어올 수 있던 이유는 천주교가 서학으로 불리며, 과학기술적 요소 즉 실학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면서부터이다.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중국에 들어온 마테오 리치가 저술한 <천주실의>가 그 발원점이다. 최초로 천주실의를 연구한 학자는 성호 이익이고, 그가 남인의 정신적 지주인 점에서 남인 성호학파 급진파는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최초로 조선에서 <천주실의>란 책이 소개된 것은 어디인가? 바로 <지봉유설>이다. 천주실의에 대한 자세한 검토내용은 없으나. 천주실의란 도서가 있고, 그것이 서구에서 왔다는 점을 알리는 것으로 <지봉유설>은 신문물에 대한 안내도서가 되었다. 세상은 변화하고, 인간 역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변화한다. 자신의 삶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는 게 아니나, 권력을 가진 자에게 현상유지가 목표인 점에서 새로운 문물을 도입하는 것은 기존 체계의 근원을 흔들 수 있는 위협이 된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은 국가정치 기반을 흔들지는 않으나, 조선 지식인에게 새로운 파장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우물이 자신의 세계이나, 우물을 벗어나면 이 우물의 수원이 저 산에서 내려온 지하수인 점을 깨닫고, 더 나아가 저 산에서 내려온 물은 자기 우물만 아니라 여러 우물에 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성리학은 자기 안의 세계를 넓게 확장하여 찾아갔지만, 막상 현실의 세계는 한계였다. 그래도 적어도 우리가 그 시절의 이야기를 알 수 있는 것은 이런 자료들이다.

 

21세기 한국은 조선은 아니나, 여전히 조선의 역사는 지리적으로 남아있다. 서울이 수도인 것은 한양이 수도였고, 지리에서도 지하철명 역시 조선의 지리에서 그대로 이어간다. 경부고속도로가 추풍령을 넘어가나, 사실 추풍령 고개는 영남선비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걸어가던 자리이다. 지리도 그러하고 음식은 더욱 그렇다. 한국인이 즐겨먹는 술로 소주와 막걸리가 있다. 이 역시 오래된 우리의 문화에서 비록 되었고 조선의 음식이다. 그 기원과 흐름을 안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단절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이어져 가고 있는 것을 말한다.

 

세계화와 탈근대시대의 세계문화에서 더 이상 우리는 서양의 것에 의존할 수 없다. 이야기 거리와 전통적인 가치는 결국 새로운 상품과 문화자산이 된다. 유네스코에서 정한 문화유산을 보면 우리가 그동안 눈을 돌린 것들이 참 많다. 그런 것들을 지키는 것은 당연하나, 거기에 모든 가치를 부여하기 보다는 그저 이런 것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여전히 한국은 유교가 오면 조선의 유교가 아니라, 공자의 유학이 되고, 불교가 오면 조선의 불교가 아니라 석가의 조선이 된다. <지봉유설>은 단순히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거기에 대한 저자의 관점과 생각이 들어있다. 똑같은 이야기를 들고 와서 다시 보여주면 의미가 없다. 거기서 새롭게 각색해야 새로운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걸 위해서는 우리가 스스로 돌아보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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