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르발 남작의 성
최제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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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문학계를 그렇게 잘 아는 편은 않으나, 확실히 조금씩 변해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문학소설을 읽으면 기존 한국소설계는 뭔가 모르는 엄숙주의 내지 장편으로 전개되는 유형이 많았다. 물론 소설 중에 단편적인 부분도 많으나, 대부분 단편을 모아 하나의 책으로 꾸려진 경우는 드물지 않은 것 같다. 소재나 이야기의 주제성도 거대한 서사에서 점차 작은 이야기로 넘어가고, 예전에 읽은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처럼 한국의 소설도 왠지 모르게 일본의 게임,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등과 같은 서브컬처적인 요소가 반영되어가는 게 아닌가도 싶었다.

 

이번에 읽은 최제훈 소실모음집 <퀴르발 남자의 성>을 읽을 때 생각이 드는 것은 2가지였다. 하나는 몽타주의 편집적 요소가 보인다는 점, 또 다른 하나는 일본 만화애니메이션 같은 요소가 조금 느껴진다는 점이다. 이야기의 전개가 시간과 공간의 일치성보단 시간전개가 뒤죽박죽인 “퀴르발 남자의 성”, 추리 소설 <셜록 홈즈> 작가인 코난 도일을 최제훈 소설문집에서 셜록 홈즈가 발견한 피해자로 등장시키거나, 또는 정신적 해리증세를 가진 어느 한 남자의 이야기, 가면 뒤에 숨겨진 인간의 추악함 등을 작품에 반영시킨다.

 

최제훈 소설모음집은 이른바 추의 미학을 찾아갈 수 있는 것이고, 기존의 도덕적 가치관에 대해 반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반영한다. 인간의 추악함을 드러내는 것이란 바로 오늘 현대사회의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인간의 추악함은 원래부터 시작하는 것인가? 아니라면 만들어져 가는 것인가? 여러 가지 모습이 드러나겠지만, 점차 인간이 부패하가는 모습을 작가는 잘 맞춘 것 같다. 물론 이 소설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의견과 평이 있으며, 심지어 뒤에 보면 문학평론가의 심사평이 따른다.

 

나는 문학도가 아니고, 문학평론가는 전혀 관계없으니 굳이 그렇게 정리할 필요 없다. 단지 나대로 생각하여 그것이 타인들로 하여금 합리적인 객관성을 추구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찍어볼 것이란 문제다. 이 소설에 재미있기도 하나,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일본 서브컬처의 느낌이 나는 이유는 이미 이 이야기들이 한국사회에서 새로운 이야기로 등장할지 모르나, 서브컬처 내에서 그렇게 드물지 않은 이야기다. 영웅의 시대가 서사를 풍미하는 게 아니라 반영웅, 혹은 얼간이라도 주인공이 나오고, 별에 별 기막힌 이야기가 나오는 곳이 서브컬처이다.

 

마녀에 대한 이야기라면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메데이아라는 마녀의 이름이 이미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라는 게임 및 애니메이션에 등장한다. 단지 사람들은 마녀가 처음 가진 의미, 마녀의 시작과 그 변이과정을 잘 모를 뿐이다. 작가 최제훈은 마녀의 이야기에서 고증적인 연구를 많이 했다. 마녀사녕은 문명이 존재하는 인간세계에 얼마나 추악한 일들이 벌여졌는지 보여주는 역사적 존재이다. 문제는 그것은 되풀이되는 하나의 세계이고, 이제는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공동체사회만이 아니라 사이버세계까지 이어진다.

 

그렇지 않을까? “그녀의 매듭”에서 고교동창생이 학원비를 벌기 위해 조건만남을 한 것을 알았던 주인공은 친구의 성공과 자신의 실패에 대한 분노로 뒤에서 공작을 펼친다. 그런 공작은 대학에서 끝나지 않고, 사회에 나와 예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남자사람친구 주변 여자까지 견제에 들어간다. 마녀는 사실 물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마녀 같은 인간은 물리적으로 존재하나, 형이상학적인 사이버세계에서 난무하고 있다. 자신이 아닌 타인에 대한 배타적 의식이 개인의 영역이 아닌 집단적 광기로 변화하여 한 개인을 괴물로 만든다. 그래서 이 소설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선한 존재인가? 아니면 악한 존재인가보다는 왜 악하게 되어 가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자신의 아이를 죽여 괴물의 성에서 같이 향연을 열던 부모와 삼촌내외의 모습에서 우리 인간은 자기도 모르는 욕망에 이성과 도덕관을 잃어간다. 아니 처음부터 도덕이란 무엇인가? 개인에게 가해진 물리적, 사회적 폭력은 어느 한 개인을 자신도 모르게 괴물로 키워낸다. 그리고 자신을 한 일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거나, 자신의 정체성마저 흔들리기도 한다. 상대방과의 대화에서 2사람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기 보단 다른 사람의 이름을 꺼내어 그 주제에 맞추어 간다. “마리아, 그런데 말이야.”

 

물론 나와 상대가 잘 아는 사람이라면 모르지만, 상대만 조금 알고 나는 잘 모르는데, 그 사람을 하나의 가십거리를 삼아버리는 것은 현대사회 인간이 본인 자신을 타자로 취급하는 것과 같다. 타자에 대한 욕망, 그것이 자신의 욕망으로 대체한 것이다. 사실 다른 책에서 흡혈귀와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글을 보면서 기억나는 게 미국대공황 이후 경제적 문제에서 흡혈귀는 질서와 안정을 추구하고, 프랑켄슈타인은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것을 하나로 모우는 것, 즉 현실에 대한 도전에 대한 의미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이 책에서 보인 흡혈귀 아니 퀴르발 남작에서 그는 보통 사람마저 식인귀로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처음부터 미국에서 살던 가족들이 시집보낸 딸집에 간 이유는 경제적인 조건이 어려워서이다. 경제적 상황에 인간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을 보여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효율성만 따지기에 효율성에서 개인과 개인의 집합에선 윤리적 가치를 따질 이유는 없다. 그런 모순은 “셜록 홈즈의 숨겨진 사건”처럼 코난 도일이 추리소설 <셜록 홈즈>의 작가이고, 홈즈라는 인물을 만들었다. 그가 죽었는데, 홈즈는 추리과정에서 혼선을 빚는다.

 

창조자가 코난 도일이고, 코난 도일을 찾아가는 홈즈는 그 과정에서 오류를 범한다. 오리지널보다 카피 내지 만들어진 존재가 오히려 죽어버린 자신을 찾아가지만, 헛수고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그녀의 매듭”처럼 자신의 소꿉친구의 얼굴사진을 도려, 이현정의 사진과 합성시킨 연화의 모습에서 잘 볼 수 있다. 본질은 수동적이고, 본질이 아닌 가상, 허구, 복사, 잉여적 존재가 우리 일상을 움직이고 있다. 아마 소설의 제목을 여러 작품에서 “퀴르발 남자의 성”이라 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분명 저 남자의 성 안에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욕망에 삼켜지거나 그 욕망에 의해 만들어진 괴물이 활보하는 세상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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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29 11: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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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1 20: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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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97
오스카 와일드 지음, 임종기 옮김 / 문예출판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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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란 작품은 아주 유명한 소설이다. 이번에 처음 읽었던 나라도, 그 소설에서 나오는 줄거리는 이미 많이 알려진 내용이다. 어느 사람이 세월이 흘러도 나이를 먹지 않고, 대신 그의 나이를 초상화가 대신 늙어간다는 것이다. 인간이란 영원히 살 수 없는 존재이다. 영원성을 가질 수 없기에 그 자신의 아름다움을 계속 원하는 것이다. 흔히들 나이 먹은 어르신 혹은 어르신이 아니라도 주변에 보이는 아직까지 늙지 않은 어른들도 가끔 이런 말을 한다.

 

내가 어릴 적에 말이야, 옛날에 내가 좀 이랬는데 말이야. 물론 그런 말을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말을 그들은 왜 하는 것인가? 가끔 내가 종종 이해하기 싫은 부류가 70년대 이야기를 하는 부류다. 그 당시의 현실적 조건과 상황은 분명 지금과 다르다. 그런데 그 상황적 배경으로 현실을 바라보는 이들을 보면 어리석기 짝이 없다. 만일 그들에게 70년대 딱 마치 나이가 80 정도의 어르신이 조선왕조 시대의 사대부로서의 자질을 이야기하면 그들의 반응은 어떨 것인가?

 

인간이란 늘 자기가 보고 듣고 자라온 환경 속에서 모든 것을 판단한다. 어차피 개인이 세계일주를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경제적, 시간적, 문화적 조건이 가능하기 때문에 여행을 한 것이지 그 자신 자체가 하나의 기준점은 아니다. 기준점의 가치에서 보편성을 말하기란 어렵다. 단지 보편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은 언제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늙어가는 점이고, 어느 일정 시간이 되면 죽는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죽음의 세계는 어쩔 수 없더라도, 늙어가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인간은 지금 당장 죽는다는 생각보단 지금 당장 내 모습에 신경을 기울인다. 내 외모가 어떻게 되는지 내 의상이 어떻게 되는지, 오늘 가방을 무엇을 들고 가고, 구두는 무엇을 신을지 말이다. 인간의 외적인 아름다움은 결국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늙고 병드는 자신에게 무한한 아쉬움을 느낀다.

 

TV를 잘 보지 않은 내가 어느 날 저녁시간에 어느 방송을 보았다. 화장품에 대한 전문지식을 갖춘 사람인데, 그 사람이 말하긴 모든 여성의 이상적인 나이는 24세라고 했다. 여성의 화장은 항상 24살처럼 보이려 하는 것이다. 아직 나이가 어린 소녀들은 성인여성의 성숙함을 추구하고, 25살 이후의 여성은 젊고 예쁜 모습을 찾기 위해 화장을 한다. 24세라는 기준은 여자가 아마 가장 외모가 절정에 이르고, 신체적으로 성숙되었으며, 사회적으로 대학을 졸업하여 취직을 하는 나이다.

 

화장의 목적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조건에서도 완벽한 시점을 노릴 수 있다. 그러나 나이를 먹으며, 얼굴의 윤기가 사라지고 주름살이 늘어가며 예전에 늘 바라보던 미모는 사라진다. 인간의 죽음보다 무서운 게 늙어가는 이유는 자신의 모습을 늘 거울로 통해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기 때문이다. 젊고 아름다운 모습, 흔히들 청춘이란 이름을 그리워하는 것과 같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만든 오스카 와일드는 그런 유미주의적인 요소를 작품에 반영했다.

 

소설을 읽다보면 유미주의적 요소가 잘 보이는 게 일본의 공예품들이 종종 등장하는 점이다. 일본의 유미주의적 요소는 가장 아름다울 때 사라지는 것이다. 일본에서 자주 등장하는 행사에서 불꽃놀이가 매우 중요하다. 불꽃이 공중으로 올라 일정높이에 다다르면, 불꽃의 화약이 터지면서 아름다운 불꽃을 연출한다. 하지만 불꽃이 보이는 것은 불꽃이 사라지면서부터다. 일본인이 좋아하는 벚꽃, 흔히 사쿠라라고 불리는 이 꽃잎들은 일본의 입학시절이 다가오는 4월부터 흩날리기 시작한다.

 

벚꽃이 상쾌하고 시원한 봄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벚나무 꽃잎들은 마치 하양 눈처럼 퍼져 흩날린다. 일본인들은 벚나무 아래 벚꽃이 떨어져 흩날리는 것을 구경하면서 정취를 맛을 본다. 가장 아름다울 때가 바로 사라지는 것, 어떻게 보면 인간에게 가장 아름다운 시기는 청춘이 머무는 자리다. 10대 후반에 20대 초반은 인간에게 가장 열정이 넘치고 아름다운 시기다. 세상의 때도 아직까지 묻지 않았음에도 어른의 매력까지 담고 있다. 육체적으로 가장 빛나는 시기인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성인남성들은 아름다운 소년들을 자신의 애인으로 삼았다. 그리고 플라톤의 <향연>을 읽으면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자 중에 하나였다. 알키비아데스는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흠모하였으며, 그의 애인이 되기를 자청했다. 알키비아데스가 가장 아름다움을 뽐낼 때가 바로 20대 청년이었던 시기다.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화가 바질이 가장 좋아했던 도리언의 나이가 20대 초반이었을 때이다. 도리언의 모습은 너무 아름답고, 빛이 났으며 세상 그 모든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우아함이 숨어 있었다.

 

도리언은 바질의 친구 헨리 경을 만나고, 헨리 경의 댄디한 모습과 재치는 넘치는 비관적인 말투를 듣고, 그에게 빠진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진정한 인생이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라 듣는다. 지금은 젊고 아름다워도 언젠가는 주름지고 늙으며 머리숱도 빠져 흉측한 모습이 될 것이란 공포감으로 괴로워한다. 이때 바질의 초상화를 두고, 자신의 모습이 영원히 멈추었으면 좋겠다고 여기고, 결국 그것은 현실화되었으며, 도리언은 늙지 않은 영원한 꽃미남이 되었다.

 

도리언의 고민은 사라진 것처럼 보이나,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그것은 자신의 아름다움 모습에 자신의 미적 감각에 어울리지 않으면 거부하게 된 것이다. 아름다운 연극인 소녀 시빌에게 사랑을 처음 느꼈지만, 어느새 그녀를 거부하게 된다. 그녀는 여태까지 연극인으로 살아왔다. 자신의 인생에 주인공이지 못한 그녀는 오로지 연극 안에서만 비극의 히로인이 되었다. 그러나 도리언의 만날 후 그녀는 자신의 인생이 도리언에게 모든 것이라는 망상에 빠져, 그녀가 죽기 전날 연극을 망쳐버린다.

 

도리언은 그런 시빌에게 실망하여 시빌에게 이별을 고한다. 시빌의 자살로 도리언은 죄책감을 느껴야 하나, 오히려 그러지 못하게 되었다. 대신 도리언의 죄를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이 대신 받아들인다. 얼굴 입가 주변에 교모하고 잔인한 미소는 그의 오만과 죄를 그대로 담아내었다. 초상화의 변신과 도리언의 부동은 도리언 스스로에게 쾌락과 지적인 열망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 어느 주제에 대해 세상 모든 것을 입수하고, 어떤 학문에 대해 깊이 파며, 그런 과정에서 수많은 인간을 만난다.

 

문제는 도리언이 만난 자들은 모두 인생이 잘못된 길로 빠진 것이다. 누구는 파산하고 누구는 자살하고, 어떤 여자는 부두가의 창녀로 살아간다. 도리언의 피할 수 없는 매력은 쾌락과 아름다운 감각을 주지만, 그것은 지울 수 없는 치명타가 된 것이다. 도리언이 저지른 탐욕과 향락의 죄악은 처음에 자신과 세상의 분리되었다는 오만에 빠지나, 점차 자신의 뒤를 쫓아오는 두려움과 죄책감은 그를 괴롭게 만들었다. 누가 자신의 초상을 보면 어떻게 될 것인가?

 

아무도 올라갈 수 없는 다락방, 그곳의 열쇠는 도리언만 가지고 있다. 그 방은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가 자신에게 준 방이나, 외할아버지는 도리언의 아버지를 미워했고, 도리언의 아버지를 어느 청부인의 고용하여 대결시켜 죽게 만든 인물이다. 도리언에게 외할아버지란 잊고 싶은 과거이고, 그 과거를 만든 외할아버지는 거부의 귀족이었기 때문에 유일한 혈손인 자신에게 유산과 명예가 돌아갔다. 도리언의 외모는 어머니로부터 시작하여 어머니의 조상에게 이어받은 유산이다.

 

아름다운 외모는 가졌지만, 외적인 미가 변하지 않을수록 초상화의 표정은 마치 괴물처럼 변해갔다. 손 주변에 묻은 자주색, 마치 피가 스며든 것처럼 도리언의 어두운 모습을 내비추었다. 도리언의 초상화가 도리언의 어린 시절에 머문 방에 있는 이유는 그곳은 도리언이 그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공간이었다. 자신의 어두운 기억, 슬픈 과거, 감추고 싶은 비밀이 바로 옥상방에 있었던 것이다. 겉으로 화려하고 빛나 보이나, 가려진 모습 뒤에는 잔인하고 어두운 악취가 숨겨져 있었다.

 

그런 가운데 도리언은 점차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으로 마지막 장면에는 최악의 선택을 결정한다. 마지막 모습은 추하게 변해버린 도리언의 시체와 아름다운 도리언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만이 남았다. 진정 아름다운 것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오히려 존재하지 않기에 우리는 그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자신의 인간적인 타락에 다른 자의 눈을 속여도 자신의 불안은 속일 수 없다. 아름다운 모습은 한 때이나, 아름다운 삶은 지속적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 설사 지금 당장 사라져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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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시게마츠 기요시 지음, 이선희 옮김 / 예담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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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게마츠 기요시의 <십자가>란 작품은 모두에게 공감이 가면서도 한편으로 다른 생각들을 만들게 하던 작품이었다. 책을 읽으면 난이가 높지 않으며, 일반적으로 우리가 늘 주변에서 접할 수 있는 문제다. 하지만 문제의 관건은 우리는 항상 주변에 있는 문제들이 익숙해지면 그것에 대해 제대로 인지할 수 없게 된다. 즉, 사람의 감수성이나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감능력이 저하된다는 의미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우리 일상의 문제와 모순을 제대로 바라보기 보다는 오히려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지나치려는 기만성으로 가득 차게 된다.

 

남의 일은 엄청난 사고라도 그냥 별반 의미 없이 지나가겠지만, 그 남의 남인 내가 그 상황에 닥칠 경우 자신의 이성과 판단력을 제대로 펼칠 수 없다. 이번에 읽어봤던 <십자가>란 소설 역시 그렇다. 무너진 교권이 최근 뉴스로 접하게 되었다. 학교 교사들이 예전에는 정규직이 되다가 비정규직 내지 임시직으로 되면서 반영구적으로 근무하는 게 아니라 일시적으로 근무하게 되었고, 그들은 언제라도 학부모의 클레임에 의해 자리에서 나가야 할 사태가 올 수 있다. 언제나 사회적으로 뭔가를 희생시키는 대상이 이제는 어디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도 된 것이다.

 

그런 학교 교권이 무너진 상황에서 왜 교권이 무너지게 되었는지를 생각하면, 바로 인간이 인간으로 대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기분과 상황에 따라 도구화된 것이다. <십자가>에서 처음 시작은 후지슌이라는 중학생이 자살하면서부터다. 유서에는 4명의 이름, 2명은 자신을 괴롭히던 불량청소년, 1명은 자기의 절친한 친구이고, 또 다른 1명은 그가 짝사랑하던 여학생이다. 자신을 괴롭힌 2명은 원래 불만이 있었다고 하나, 친한 친구와 좋아하던 여학생은 아무 죄도 없는데도 가슴에 크나큰 상처를 가지고 살아야 했다.

 

그들은 자살한 중학생에게 아무런 해를 가하지 않았으나, 죽은 학생의 부모, 그리고 후지슌의 남동생은 달랐다. 왜 도와주지 못했나? 왜 알아주지 못했나?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위로했었다면 이런 불상사가 일어날 리가 없지 않았는가? 라고 말이다. 솔직히 어떤 문제를 두고 그런 엄청난 일들을 중학생에게 책임여부 자체를 묻는 게 잘못된 일이고, 그런다고 그들을 방치하거나 억지로 잡아두는 것도 문제다. 결국 어느 중학생의 자살은 그 학교와 사회, 더 나아가 일본이란 나라조차 넘어선다.

 

학교란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한다. 후지슌을 괴롭히던 2인방 중에 하나가 오토바이를 타던 중에 사고로 죽었다. 살아남은 학생의 부모는 죽은 아들의 어머니에게 심한 불평과 원망을 듣는다. 얼마 전에는 자신의 아들이 그렇게 만들었는데 말이다. 자신의 아이가 저지른 죄는 생각하지 않고, 남의 아이는 문제라고 말하는 어른들의 이중성이 사회적으로 하나의 의식이 되고, 그 의식이 공동체들의 하나의 가치가 되는 순간, 그 세상은 점점 망해가는 징조인 것이다. 후지슌의 편지에 적힌 친구와 소녀에게 끊임없이 따라는 신문기자, 그는 계속 그 사건들을 잊지 않고 상기시키려 한다.

 

중학생들이 무슨 깊은 생각이 있겠는가? 그때는 오로지 무섭고 두렵고 도망치고 싶을 것이다. 인간에게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문제가 오면 현실에서 눈을 돌릴 뿐이다. 그러나 더 심한 문제가 있었다. 눈을 돌려도 그 문제는 자신이 바라보지 않았을 뿐이지 자신의 앞에 언제나 마주하고 있고, 길을 떠나 도망쳐도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것이다. 지나간 역사는 흘러간 시간이지만, 인간에게 지나간 역사와 시간은 결국 자신이란 존재를 형성하게 해준 하나의 토대다. 그 토대가 어느 한 부분이라도 부정하는 순간 그것은 자신의 현실을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든 자신의 장점이든 단점이든 안고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다.

 

소설 제목처럼 <십자가>란 자신의 등에 평생 업고 다녀야 하는 숙명의 속죄의식이다. 칼은 상처를 내고 끝나고, 찔리면 아프지만, 그것은 자신에게 피해의식이 되어 상대방에 대해 원망을 할 것인가 아니면 용서할 것인가 라는 선택지가 존재하나, 십자가란 그런 선택지는 없다. 단지 자신의 마음에 담고 살아갈지 아니면 눈을 돌리는 것이다. 눈을 돌려도 왜 다시 그것은 자신을 돌아오는 것일까? 후지슌은 매우 어린 나이에 죽었다. 어린 나이에 죽었기 때문에 옛 친구로 둔 유군의 경우 어릴 때는 몰랐다.

 

하지만 시간은 흘러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겼다. 우리 형의 말이 생각난다. 만약 결혼에 대해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다면 하지 말라는 것이다. 결혼이 단순히 연애의 의미로 둔다면 그 순간 결혼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결혼에서 가치관이 없어지는 경우 그 가치관을 유일하게 맺어주는 것은 자신의 자녀다. 결혼하면 처음에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다가, 어느 순간 눈을 돌리게 된다. 인간은 간사하게도 지루함과 한가한 심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그 집안의 모든 관심사는 아이에게 간다. 아이가 어떤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고, 자신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는지 말이다.

 

유군의 아이가 어린이집의 친구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누군가는 좋고 누군가는 싫다고 한다. 유군은 왜냐고 묻자, 유군의 아이는 그냥이라고 대답한다. 그때 유군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온다. 이때까지 마음속에서 억지로 잡아둔 눈물이 이제야 터진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왜 친구가 좋은지 물어보면 그냥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조건이나 이익의 목적이 아니라 그 자체로 친구가 생각한다는 것이다. 후지슌의 죽음에서 그가 남긴 이름에서 유군은 상처를 받고, 원망을 했지만, 그런 자신에 대한 후회와 원망이 따라오는 것이다.

 

자신의 친구조차 자신이 나온 중학교에서 교사를 하고 있다. 언젠가는 자신의 아이도 과거의 자신처럼 혹은 후지슌처럼 살아가는 날이 올 것이다. 소설은 죽은 가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게 아니라 유군의 눈을 통해 가족들을 바라본다. 관계는 있지만, 마치 관계가 없는 것처럼 살아가고 싶은 삶처럼 말이다. 유군의 모습에서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할 수 있는가? 그가 비겁할까? 아니면 너무 개인주의적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럴지도 모르나, 그는 일반적으로 우리의 얼굴과 생각을 한 인간이다.

 

너무 특별하거나 잘난 것도 아니라, 그저 그런 인간 중에 하나이다. 현실에 무력한 인간이었고, 그저 도망치는 것만 생각했다. 학교도 자신이 사는 작은 도시가 아니라 왜 도쿄로 가는 것인가? 거기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무게는 벗어날수록 그 공백 기간을 채웠다. 신문기자가 그렇게 자신들을 향하여 비난을 했지만, 사실 그 비난조차도 하나의 위로였다. 그런 비난조차 듣지 못하고 성장하면 더 심한 죄의식이 자신을 눌러버린다는 점이다. 뭐든지 처음에 맞는 매가 편하다고 한다. 처음에 맞는 매는 때리는 사람의 완력이 있기에 맞는 사람에게 불편하나, 저 뒤에서 자신의 차례가 늦어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 눈치를 보는 것보다 훨씬 속이 편할 것이다.

 

단지 속죄해야 하는 깊이가 너무 깊으면 생각을 할 수 없다. 죽음이란 단어는 너무 무겁고, 입에 내놓기가 힘들다.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해야 한다. 만약 십자가란 죄의식이 없고, 그 고통의 무게를 망각하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라 그저 숨만 쉬고 있는 움직이는 인형이다. 자신의 양심과 의지도 없이 그저 기계처럼 살아가는 존재에게 삶의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 물론 편한 게 좋다. 그러나 최근에 생각나는 게 있다. 유럽의 고전주의 시대 "Memento mori"이란 단어가 있다. 인간에게 “죽음을 기억해라!”란 의미를 담은 말이다.

 

고전주의 시대는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인간은 신에 의해 운명이 결정지어진다는 구시대적 사고방식이다. 그런 점에서 Memento mori를 구시대적인 종교관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점에서 인간의 죽음은 언제 올지 모르는 불청객이다. 그런 점에서 죽음 그 자체를 생각하고 살아가야 하는 점은 인간의 이성과 판단력을 마비하고, 절대적 신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는 수동적인 삶을 살게 만든다. 그것보단 차라리 기만하지 말자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 같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것은 단순히 삶의 마지막보단, 삶이 마지막이 도래할 때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우리 마지막 모습을 우리가 경험할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생각하면서 깊은 후회를 할 것이다. 물론 그런 후회조차 하지 않을 단순한 인간들도 많을 것이다. 마지막에 후회하는 인간과 후회하는 것조차 모르는 인간, 어느 누가 행복할까? 제일 행복한 것은 마지막에 후회할 일을 하지 않았다고 스스로 맹세할 수 있는 인간이다. 죽음에 대해 인간들은 죽음 그 자체보단 죽어가는 그 순간, 죽음 이후의 세계가 두렵다. 삶과 죽음은 분리된 게 아니라 항상 일치한다는 실존적인 관념만큼 우리 삶이 자기 자신에게 기만적인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그것을 느끼는 우리는 어떻게든 십자가를 안고 가야 한다. 십자가를 안고 고통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진정 인간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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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광금지, 에바로드 - 2014 제2회 수림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연합뉴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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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광금지 에바 로드>를 읽는 순간, 전에도 지금도 <에반게리온>에 빠져있는 내 모습을 생각했다. 물론 소설에서 박종현이란 인물은 현실에 존재하던 에바 로드 완수자 2명을 합친 가상의 존재이나, 기본적으로 그 현실의 2사람을 토대로 만든 인물이다. 에바로서 가는 세계와 그리고 나의 현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먼저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보지 않고서는 절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등장한 파일럿 이카리 신지군을 보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다시금 보게 된다.

 

언제나 로봇이 나오는 전쟁 애니메이션에서 주인공은 항상 강한 정신과 불굴의 의지로 적과 마주한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에 우리로 대체된다면 우리는 그렇게 강한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언제나 현실의 벽이란 보이지 않은 투명한 유리 앞에 부딪힌다. 하늘을 날아가는 새가 건물의 유리창이 막힌 곳도 모른 채 부딪히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부딪히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에게 선택은 정해져 있다. 그런 벽에 부딪혀서 몸이 박살나는 것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벽을 피해 영원히 그 사선을 넘지 못할 것인가.

 

우리에게 벽을 둘러갈 수 없는 현실이다. 사실 벽의 높이가 얼마나 되는지 그리고 유리 너머의 세계가 정말 존재하는 것인지 모른다. 처음부터 유리의 장갑수준도 알 수 없다. 미지의 세계라도 어느 정도 각오를 다지고, 준비성을 갖춘 채 한 발씩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런 판단조차 잴 수 없다. 그렇다고 그 길을 포기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열광금지 에바 로드>는 바로 그런 시대에 살아가는 젊은 청춘들의 또 다른 이야기다. 최근 한국 소설계에서 새로이 등장하고 있는 작가 장강명 씨의 소설에서 그런 현실을 다룬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다.

 

전에 읽은 <한국이 싫어서>는 평균 정도의 학교를 나온 20대 중반여성이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질 모습이 없는 자신에게 지쳐, 결국 호주로 유학가고 거기서 정착하는 일대기를 보여준다. 호주라고 하여도 별 수 없는 낯선 곳이오, 온갖 모순과 부조리가 존재하는 곳이다. 단지 그 정도가 한국보다 덜한 것밖에 없었다. 적어도 노력해서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이 유학 간 남학생은 요리 실력이 좋아도 한국에서 인정받지 못했으나, 호주에서는 나름 인정받는 요리사로 된다.

 

자신에게 꿈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꿈이란 자신의 성공이나 출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이 싫어서>란 책은 자신의 성공이 가로막힌 한국을 떠난다면, <열광금지 에바 로드>는 자신의 성공을 출세로 여기지 않고, 대신 다른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취미생활이나 취향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할 게 없다. 가령 내가 가장 듣기 싫은 말 중에 이런 것이 있다. 내가 어느 사람에게 “당신은 무엇을 좋아합니까?” 라고 질문한다면 대부분 “저는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해요.”, “저는 음악을 좋아해요.”, 혹은 “TV 드라마를 보는 것을 좋아해요.”, “여행을 가는 것을 좋아해요.” 등등 식상한 말만 나온다.

 

영화라도 장르가 매우 세분화되어 나누어지고, 영화감독에 따라 관람해보는 감독주의 혹은 작가주의적인 요소도 찾을 수 있다. 음악이라면 재즈를 좋아하는지 아니면 그저 댄스를 좋아하는지, 그리고 그 뮤지션에서 누구를 좋아하고, 어떤 부분에서 와 닿는지가 없다. 즉 타인들의 이야기에만 집중하지 자신만의 스토리텔링이 존재하지 않는다. 스토리텔링이 없다는 것은 자신만의 개성과 표현성이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신의 존재를 자신의 느낌으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타인의 시선에 맞추어 수동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인간들에게 진정한 삶의 가치를 어떻게 찾아야 옳은 것인가? 가족 안의 행복, 사회생활에서의 안정 등이란 너무 속보이는 답이다. 그 이상으로 자신의 삶에 아무런 목표의식이 없는가? 주변에서 들으면 집이 어느 동네 35평 내외, 차는 2000CC 이상, 돈은 얼마정도 있으면 좋겠다는 말만 들린다. 물론 부의 재력이 있으면 좋다. 자본주의시장경제구조에서 돈의 이동이 없다면 무역이나 교역, 심지어 일상생활에 필요한 필수품조차 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본 그 자체로 하나의 가치가 고착되는 순간, 인간은 자신의 가치를 자본으로 매기고, 자신의 존재는 돈에 의해서만 말할 밖에 없는 인간이 된다.

 

자신이 그렇게 되는 순간, 그는 평생 외적인 삶이 아니라 내적인 인생에서도 돈의 지배를 받게 된다. 열심히 뛰고 뛰어 마지막에 그의 삶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열광금지 에바 로드>는 바로 그런 시대에 젊은 청춘이 과연 자신의 원하는 삶이란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단지 그 여정은 <한국이 싫어서>와 다르게 진행된다. 벽이 높고 높지만, 그 벽이라도 여러 가지 벽이 있다. 자신이 둘러싼 벽 사이에 유일하게 자신에게 주어지는 선택권이란 말도 안 되는 벽을 선택할 것이다. 단지 벽을 넘어갈 수 있는 기회는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는다.

 

<열광금지 에바 로드>는 책제목만 보듯이 에바, 즉 EVA라는 <신세가 에반게리온>을 좋아하는 사람의 이야기다. 이때까지 좋아하는 것을 찾지 못하다, 어느 순간 일본애니메이션을 접하고, 그때 에반게리온을 만났다. 에바에서 보는 주인공은 처음에 못났고 겁쟁이에 아무 짝에도 쓸모없을 것만 같은 아이였다. 하지만 그 주인공 파일럿은 어느 누구도 아닌 우리의 모습이고, 우리가 늘 외면해오던 익숙한 자신이었다. 너무 익숙하기에 그것을 인정하기 싫은 점도 많았다. 늘 도망치고 싶었고,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은 가혹했다. 거기에 맞선다고 뭔가 새로운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늘 우리는 강요받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고, 그 인생을 강요하던 어른들 역시 과거에 그런 부조리에 굴복했다. 인간의 부조리한 모습에서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면 결국 소설에서 등장하는 주인공 박종현처럼 전혀 있지 않을 벽을 찾아서 그 벽을 넘어 가는 것이다. 박종현은 어릴 때부터 불우한 삶을 산다. 가난한 집안, 무능한 아버지, 가출하는 어머니, 형과의 불화, 학교생활의 마찰, 어느 곳이든 그가 벗어날 구멍이란 없다. 사람에게 가끔 미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한 이유는 자신이 사는 세계는 언제나 자신을 속박하는 사슬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박종현은 버림받은 인생처럼 살다, 시장에서 일하고, 학교에 다녀보고, 컴퓨터를 배워 늘 야근과 잔업에 시달렸다. 그리고 섬광처럼 드러난 에바 로드, 일본과 미국, 중국과 프랑스를 경유하여 마지막에 일본에서 가이낙스(카라)의 선물을 받는 것, 어찌 보면 소설 속에 등장하는 박종현이나 혹은 실제 현실 속의 2명의 남자들이 보여준 결실은 일반인에게 본다면 정말 무단한 일일 것이다. 왜 쓸데없이 열을 올리는지, 그 먼 곳까지 시간과 돈은 얼마나 걸리는가? 게다가 말은 어째 할지 말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면 나 같이 제대로 일어를 공부하지 않아도, 간단한 회화정도는 구사할 수 있다. 한자도 조금 읽으면 혼자 간신히 목적지까지 찾을 수 있다. 불어와 중국어의 경우 조금 다르다. 중국어는 우리가 아는 한자와 다르다. 한국, 일본, 중국 모두 한자어를 사용하는 것은 맞으나 한자의 표기와 사용방식이 조금씩은 다른 것이다. 낯선 땅에 아무런 지식이나 도움 없이 꿈을 향하여 달려간 젊은 친구들의 무모함에 분명 모두가 비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녕 비웃는 자들은 이때까지 자신이 어떤 허황된 꿈일지라도 거기에 목숨까지 아니더라도 자신에게 스스로 떳떳하게 설 수 있을 때까지 그 길을 찾아갔는가?

 

아마 대부분 없을 것이다. 그 열정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자 한 길도 아니고, 오로지 자신과의 외로움 싸움이다. 그 외로움 싸움에서 얻은 것은 물질적으로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그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었다. 돈은 많이 들어갔지만, 돈으로 따질 수 없는 황금보다 더한 보물을 얻었다. 우리에게 황금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보물은 있는가? 88만원 세대가 나오고, 경제적으로 소외된 청춘이 늘어나는 현실에서 그 공간에서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가?

 

성공의 꿈이란 이룰 수도 없이 너무 머나먼 곳에서 나를 비웃고, 그 꿈이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을 향하여 걸어가야 하는가? 성공의 꿈은 현실세계에 있어도 비현실적 영역이고, 에바 로드는 비현실적인 세계에 대해 현실의 인간이 그 꿈을 향하여 걸어가는 것이다. 어떻게 보자면 진정한 진실은 현실이 아닌 환상의 세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환상에서만 오로지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 나갈 수 있으니 말이다. 에바를 향한 그 머나먼 로드가 끝이 났다면 또 다른 여정이 박종현을 아니 현실의 2남자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그 허무하고도 엉뚱한 에바 로드를 완주한 그들에게 현실의 어려움이 있더라도 자신은 언제나 스스로 살아있는 인간이라고 솔직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과연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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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텔.간계와 사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7
프리드리히 실러 지음, 홍성광 옮김 / 민음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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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유럽의 중심은 프랑스였다면, 19세기는 독일이라고 과언이 아니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19세기를 풍미하고, 철학자 중에 헤겔과 니체, 사회경제학자로는 카를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등장했다. 물론 프랑스에서는 토크빌이 등장하고, 영국에서는 존 스튜어트 밀과 벤담이 존재했다. 그러나 문학, 철학, 경제학 전반의 인문학에서 19세기는 분명 독일이 강력했다. 이때 독일의 문화사조는 다소 프랑스보다 늦게 시작한 감이 들지만, 그 효과를 충분히 보여주었다. 이번에 읽은 도서는 괴테와 더불어 19세기 낭만주의 문학에서 큰 활약을 보여준 프리드리히 실러의 작품 <빌헬름 텔, 간계와 사랑>이다.

 

실러라는 이름은 솔직히 처음 들으면 낯설다. 실러라는 이름은 미학 관련 도서를 볼 때 종종 본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의 저서는 사실 이번에 처음 봤다. 하지만 실러의 작품은 낯설지 않고 우리 일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작품이다. 영화 <빌헬름 텔>은 매우 유명한 작품이며, 빌헬름 텔이 자신의 아들인 발터와 보여준 장면은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빌헬름 텔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영주가 벌인 악독한 함정에 빠진다. 광장에 걸린 영주의 모자에 인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경죄에 걸린 셈이다. 한국이라면 예전에 오후 5시가 되면 음악이 나오면 모든 사람이 길에서 멈추어 차렷 자체를 취해야 했던 것과 같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처벌을 받던지 혹은 비난을 받아야 했던 불이익이 있었다. 그런 불이익은 빌헬름에게도 닥친 것이다. 영주는 자신에게 반항적인 빌헬름을 함정에 빠지도록 했으며, 그의 아들 머리 위에 사과를 올려 만약 빌헬름이 사과를 맞추지 못할 경우 부자 모두가 죽임을 당하고, 만약 성공 하면 풀어준다는 것이다. 거리는 100걸음 정도 떨어진 곳이니, 얼마나 놀라운가? 그런 장면은 수 없이 패러디와 페스티쉬 되어 광고나 엔터테인먼트에서 종종 보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이 작품을 읽으면 희곡으로 만들어진 작품이고, 연극과 영화로 만들기 좋은 작품이다.

 

작품에 대한 감상에서 권력에 집착하는 영주와 예전에 거기를 다스리는 영주의 차이점을 보여준다. 괴테와 더불어 실러가 루소의 낭만주의 문학관을 이어받은 것을 잘 보여주는데, 루소는 <에밀>로 통해 인간은 도시로 가면 타락하게 되고 비참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도시의 타락에서 현대사회의 도시는 환경오염과 경제적 갈등, 공적 인프라(교통, 상하수도, 병원, 교육시설 등) 분배에서 님비현상과 핌비현상이 오고간다. 인간이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고 주변의 영향에 의해 중심을 잡지 못한 채 계속 표류하는 삶으로 이어지고 있다. <에밀>은 바로 인간 그 자신에 대한 자연성을 찾으라는 것이다.

 

루소는 분명 (볼테르가 비아냥거린 것처럼) 인간은 숲에서 곰과 같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자연성을 찾아가는 것이다. 즉 자신의 인생관에서 자신의 선택지점으로 가는 것이 옳은 것이다.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교육과 사회적 기능을 담당하는 것은 인간에게 지식의 전수와 사회적 인간이기보단 그 시스템에 종속되는 인간으로 만들어버린다. <빌헬름 텔>에서 마을주민들은 그런 수동적 삶이 아니라 능동적 삶을 추구한다. 자신의 왕을 믿고 따르는 것은 자신들이 자유민으로서 명예와 자유를 보장해주기 때문이고, 자신들과 자신들의 왕이 위험에 빠지면 언제라도 무기를 들고 적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나 혼자의 자유가 아니라 모두의 자유를 지키는 것부터 가능했다. 빌헬름은 그런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사나이로 등장한다. 처음 장면부터 부패한 권력자는 남의 아내를 강제로 추행하려 했고, 그 아내의 남편은 성폭행 미수범을 도끼로 내려찍어 두개골을 부수어 버린다. 그러나 정당방위라고 할지라도, 계급의 차이는 도덕과 제도의 타당성을 훼손한다. 왕의 명령이라면 군주의 의무를 대리 수행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군주라는 입장에서 정치적 통치는 자유민을 보호하고, 그들로 하여금 생업에 종사하게 하여 국가를 이어갈 수 있게 하는 후손을 남기고, 그들이 바치는 세금으로 국정을 운행하는 것이 옳다.

 

이 점에서 빌헬름 텔은 낭만주의적인 가치관이 반영되어 있고, 브루노라는 처녀가 말하듯이 민중이란 자유민들과 함께 해야 올바른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권력에 의지하고 않고, 오로지 합당한 가치관으로 쇠사슬을 풀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루소와 달리 실러의 서적은 낭만주의라고 해도 군주정치에 대하여 부정하지 않았다. 군주는 분명 올바른 정치를 하려고 했기에 자신들은 군주를 믿는 점이고, 군주를 대신한 영주의 문제점과 그의 죽음이 단순히 폭력이 아니라 군주의 자유민으로 존재하기 위해 행동한 것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국가가 아닌 다른 국가에 충성할 수 없다는 점에서 민족성을 중시한 낭만주의 문학인 점이다. 괴테는 루소가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루소는 자신이 플라톤주의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플라톤주의에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물길을 열어놓은 인물이다. 사실 루소도 애국심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단지 그 애국심의 조건은 얼마나 나라가 올바르게 움직이는가이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참주가 통치하면 시민들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대할 수 있는지를 다룬다면 플라톤의 <국가론>은 참주가 통치하면 나라가 어떻게 망해 가는가를 보여준다.

 

플라톤과 루소의 차이는 국가라는 대상이 플라톤에게 형이상학적 미를 갖춘 철인군주라면, 루소는 일반 민중에 대해 시선을 돌린 셈이다. 실러의 작품을 보면 플라톤의 <국가>에서 보여주는 국가적 의미에 루소가 제시하는 자유민들의 의지를 묘하게 줄 달리기를 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 줄 달리기는 <간계와 사랑>에서 보여준다. 실러의 소개를 보니 그는 루소 이전의 대문호, 셰익스피어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간계와 사랑>은 정치적 갈등과 연애갈등이 묘하게 섞인 작품이다. 영주의 아들 소령은 악사 밀러의 딸을 사랑했다. 하지만 밀러는 평민의 집안이고, 자신은 귀족의 집안이다.

 

아버지는 시종장과 사이가 좋으며, 밀포드 부인에게 자신의 아들을 장가보내어 더 좋은 권력을 잡으려 했다. 사랑과 권력의 이중 모순에서 소령은 간계에 스스로 걸려 마지막에 모든 것이 파멸된다는 비극으로 이어진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대치할 만한 것으로 <로미오와 줄리엣>이 좋을 것이다. 단지 <로미오와 줄리엣>은 귀족의 아들과 딸이 서로 적대하는 집안인 점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소령과 밀러의 딸에게 적용했고, 그 사랑을 방해하는 것이 집안의 원한이 아닌 권력과 계급인 점에서 낭만주의적인 요소도 반영했다.

 

계급과 권력을 틀에서 벗어나 사랑을 원하는 소령에게 자신의 아버지와 주변인물은 아무 의미가 되지 못한 것이다. 작품의 시대적인 배경과 문화적 요소를 본다면 아직까지 로코코양식이 반영된 것 같았다. 밀포드 부인의 의상을 보면 가슴이 다소 강조된다는 점에서 로코코의상에서 여성의상이 가슴을 강조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슴 윗부분의 형태가 드레스 사이로 드러나게 보이는 것은 전형적인 로코코시대의 귀족부인 의상이다. 또한 결혼한 부부가 서로 다른 애인을 찾아 즐긴다는 점도 그렇다. 루소의 <신 엘로이즈>를 보면 파리에서 많은 귀부인들은 젊은 남자들의 애정을 받고 있었고, 파리의 사교계에서 귀부인을 통하지 않으면 남자들은 출세하기 어렵다고 말할 정도다.

 

로코코시대 말기에 보여준 고전주의 작가 셰익스피어의 비극이야기가 더해지고, 소령과 밀러의 딸이 사랑과 배신에게 파괴되어가는 모습에서 귀족사회의 모순을 보여준다. 실러의 2작품을 보면서 실러는 낭만주의적인 요소를 사회 그 자체를 바꾸자는 것(프랑스대혁명)이 아니라 그 사회에 있는 모순과 부조리를 개선하자는 수정주의적인 요소가 보인다. 사회의 모순은 인간의 이성과 의지로 충분히 바꿀 수 있는 점에서 낭만주의적인 문학관이 보인다. 그러나 사실 그런 모순과 부조리는 현명한 군주가 존재하지 않으면 실행이 어렵다.

 

책에서는 인과응보의 관계를 잘 배치했지만, 실제 현실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은 어렵다. 실러의 작품을 본다면 확실한 길을 찾아가는 것보단 은근슬쩍 비켜간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추후에 등장하는 사실주의 희극작가 뷔히너가 저술한 <당통의 죽음>은 사실주의 미학으로 보여준다. 프랑스 영화 <당통>의 원래 작품이던 <당통의 죽음>은 프랑스대혁명의 지도자 로베스피에르와 생 쥐스트에 대한 당통의 비극적 관계를 보여준다. 자신의 친구이며 동지인 당통을 단두대로 보내야 했던 로베스피에르의 비극과 모순, 부르봉왕가에 대한 절대주의를 부정하던 그가 오히려 그런 절대적인 존재가 되어야 했던 현실에서 <당통의 죽음>에서 보여준 사실주의적인 허무는 보는 이로 하여금 역사에 대한 교훈을 남기게 된다.

 

Strum und Drang이라는 독일의 질풍노도의 문학은 괴테와 실러에게 큰 바람을 불어준다. 그래서 실러의 작품을 읽게 되면 등장인물의 대사가 부드럽지 못하다. 상당히 딱딱하게 끊어지고, 열정적인 대사를 퍼붓는다. 때로는 사랑의 노예가 된 자가 간계로 속아 배신의 충격 때문에 자신의 연인을 독약으로 죽게 만든다. 이 모든 게 간계라는 사실을 알고서는 자신의 칼을 뽑아 이승이 아닌 무덤 속에서 영원의 사랑으로 이어지게 만든다. 삶이 아닌 죽음이란 새로운 세계에서 찾을 수 있다는 부분은 분명히 낭만주의적이라고 볼 수 있다.

 

낭만주의 문학은 현실에 살아가는 인간 군상에서 찾기 어려울 것 같으나 은근히 현실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현실에 도래하지 않은 자신만의 이상적 세계, 사실 프랑스혁명처럼 모든 것을 뒤집는 것만이 아니라 현실의 모순만 제거하는 것에도 좋은 가치관이 될 수 있지만, 실러가 은근히 비켜가면서도 거기에 동조하는 쇠사슬이란 단어처럼, 쇠사슬로 타인이 묶고자하는 이는 오히려 더 강한 쇠사슬에 묶여 그 자신조차 망각하게 된다. 실러의 쇠사슬은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 자체가 쇠사슬에 묶였다는 것보다 단지 일정하게 어디에만 쇠사슬이 묶여 있다고 믿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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