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무사 이성계 - 운명을 바꾼 단 하루의 전쟁
서권 지음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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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시작된 시기는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을 정해놓으면서 된 일이다. 조선이란 역사를 보면 참 난감한 점들이 많다. 조선이 세워진 시기를 놓고 다시 생각한다면, 광해군 시기와 뭔가 상당히 많이 중첩되는 느낌이 있다는 점이다. 광해군 시기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시기라면 조선이 막 개국한 시기에는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올라오던 시기이다. 이성계는 불교와 성리학의 중간에 놓인 고려를 대신하여 유교를 중심인 조선의 시조가 되었다. 생각하면 조선의 이성계와 고려의 왕건 모두 무인에서 시작된 인물이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조차 무인의 기질이 뛰어난 인물이다.

 

무관이 왕이 되어 문관을 등용하면 다시 문관이 무관을 우습게보고, 문관이 병무의 실제 업무를 모르면서 병권을 잡게 되면 난이 생기는 일이 다분하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초반에 문관도 많았지만 무관들도 많았다. 공자의 유학자에서 선비들은 원래 춘추전국시대에는 문예를 기르는 자보단 무예를 익히는 자들이 강했다. 무예를 익히는 이유는 현실에서 일어난 일들을 직접 마주하기 위해서라면 각 임지를 나돌아 다녀야 하며, 더구나 전쟁이 계속 일어난 시기에 선비들의 본분은 어지러운 정국을 바로잡는 일이다. 그러나 고려를 지나 조선을 오면서 선비는 무관보다 문관에 이르게 되고, 나라의 위기에 처해질 시기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선비들의 나라, 조선은 이성계와 무관 그리고 신진 사대부들이 함께 일으킨 국가이다. 조선이란 국가는 고려를 멸망했지만, 고려가 멸망한 이유는 다름 아닌 국가권력의 부패와 백성들의 빈곤이었다.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면서 가장 먼저 정리해야할 것들이 기존 권력을 청산하는 것이다. 왕족과 봉건귀족은 막대한 이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에 읽은 <시골무사 이성계>에서 신돈이란 승려가 정치를 하면서 가장 먼저 한 것은 노비의 신분해방과 농민의 억울한 처사를 풀어주는 일이다. 권력자들에게 가장 돈이 되는 것은 땅을 많이 차지하고, 땅에서 나온 소출을 더 많이 가져가는 것이다.

 

조선이 세워진 이유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바로 토지에 대한 문제다. 농민이 농사를 짓고 먹고살아야하는데 이게 제대로 되지 않은 점이다. 땅을 빼앗고, 빚을 갚지 못해 평생 노비로 살아가는 일들이 발생한다. 노비도 인간인데, 이상하게 소와 말보다 더 못한 대우를 받는 게 노비들이다. 권력자들의 비리는 곧 국가의 멸망으로 이어지는 것은 세계 어디를 돌아봐도 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고 사실이다. 고려의 무능한 정치는 백성들의 고혈을 짜고, 백성들이 힘드니 군역과 세금문제가 제대로 되지 못했다.

 

전쟁이 나면 어떻게 되는가? 우선 군량을 마련해야 하는데, 군사들에게 먹일 쌀이 모두 중간에서 착복되고, 군사들의 징병해야 하는데 모두 어디론가 도망친다. 게다가 군사들이 모여도 그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해 싸움을 제대로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지 못한다. 겁쟁이가 되는 것은 기본이고, 무기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한다. 고려 말기, 홍건적이 조선을 침범하고, 왜구가 계속 남해안을 노략질을 한다. 이성계가 성공한 이유 그것은 무엇인가? 그가 궁술이 뛰어난 강한 무장이라 그런가? 아니면 천하의 문장가 정도전이 있었기 때문인가?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성계는 처음에 고려의 무관이고, 40대 중반까지 반역할 생각조차 없었을 것이다.

 

소설 <시골무사 이성계>를 보면 우리가 아는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아니라 그냥 변방에서 떠도는 무관 이성계를 마주한다. 이성계는 변방을 전전하면서 여진족 같은 오랑캐 부족을 의형제를 맺으며 같이 동고동락을 한다. 이성계는 명궁이지만, 한편으로 활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중앙관직이 아닌 변방을 누비며, 그가 찬란한 업적을 보여준 것은 바로 황산대첩이다. 일본 왜구 만여명이 침범하나, 고려의 군사력은 천 명 정도이다. 게다가 지휘내부의 갈등까지 겹치고, 이민족으로 구성된 이성계의 사군들은 모두 형제이고 삼촌조카이었다.

 

이성계에 대한 일화를 보면 그는 순수 조선인 즉 고려인이 아니라 여진족과 어느 정도 인연이 있는 자로 나온다. 변방에 살아간 우리 선조들은 다 부족과 싸우기도 했지만 때로는 같이 살기도 했다. 변방의 부족을 국내로 귀화하여 살게 한 경우도 있고, 임진왜란 당시 항왜들을 조선인으로 살게 해주었다. 민족의 단일성보단 민족이 가진 문화적 정체성으로 계속 유지된 셈이다. 고려는 원나라의 종속국이었고, 원나라 본국의 신료와 고려 중앙신료들이 권력자였다. 변방의 장수는 그저 벌거숭이에 불과했고, 이 책에서 이성계는 병법서조차 읽지 않은 그저 한미한 출신의 무관이었다.

 

황산대첩 당시 종2품 도순찰사 직급을 가졌지만, 오랜 기간 변방을 누비면 생사를 오고간 그에게 너무 한미한 벼슬이다. 권력자들이 병권을 잡으면 도순찰사 이상의 벼슬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배우는 전쟁에서 1:10의 전쟁은 마치 지나가는 소설책처럼 지나가고, 우리 역시 소설책 읽듯이 스쳐간다. 하지만 진짜 소설에서 오히려 역사책보다 더 리얼한 상황을 느낄 수 있다. 활이 가르고, 칼을 베고, 창으로 찌르며, 도끼로 가른다. 말 한 마리의 숨소리와 비명, 대낮의 전투부터 야간의 전투까지 죽음의 그림자는 언제나 숨을 또 숨을 쉰다.

 

소설이지만, 소설이 현실같이 느껴지는 이유는 역사책에서 전쟁을 일어나면 그 전투장면 하나하나를 묘사하지 않는다. 누가 어떻게 죽고 다치고, 또한 죽이는지 말이다. 드라마에서 이성계를 다루는 모습은 그가 보여준 조선의 창업정신에 대한 영웅성을 보여줄 뿐이다. 그가 위기의 현실을 보여줘도 그의 비참한 모습까지 잘 보이려 하지 않는다. <시골무사 이성계>는 비참한 모습의 이성계를 보여준다. 책 표지에 있는 말을 타고 이성계의 모습은 40대 중반이라 하나, 백발이 무성한 외모는 마치 60대에 가까운 모습이다. 책 내용에서 전장을 누비면서 제대로 쉬지도 먹지도 못하고, 늘 죽음을 맞이하기에 괭한 모습만 드러낸다.

 

갑주와 투구조차 낡고 누추하고, 그의 목에는 늑대 가죽을 두르고 있어서 고려국의 종2품의 장수인지 야인인지 알 수 없다. 황산대첩에서 그가 보여준 모습은 그저 활을 들고 있는 필부의 모습이다. 그는 필부로 살아갔기에 조선의 임금이 될 수 있었다. 전장에 나가면 가장 비참한 사람은 죽음 앞에서 칼을 잡는 장병이 아니다. 그저 힘없이 적의 칼에 도륙당하는 백성들이다. 왜장 아지발도가 침범할 때 왜구는 특이한 풍습을 보여준다. 전쟁을 참전하기 전 제사를 지내는데 반드시 사람을 죽인다는 점이다.

 

인신공양은 참으로 끔찍하다. 사실 동물을 그냥 죽이는 것도 끔찍하나 같은 인간, 그것도 어린 아이에게 죽음의 칼을 대는 것조차 상상할 수 없다. 아지발도는 고려 땅을 침공할 때 그 지역의 어린 소녀의 가슴에서 성기까지 칼을 베어 내장을 모조리 꺼냈다. 소설에서 만삭한 자신의 아내의 배를 갈라 뱃속의 아이를 죽였다고 하니 정말 끔찍한 일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적은 백성의 죽인 것도 모자라 살아있는 자의 코와 귀를 베어가기도 했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다. 하지만 전쟁 나는 이유는 단순히 외적의 침입만이 아니다. 외적이 침범해도 그것을 방비할 수 없는 국가의 무능함이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게 된 계기는 황산대첩에서 왜구를 격퇴했고, 거기에 민심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성계의 과업이 결국 전쟁에서 시작되었고, 그런 이성계의 가르침을 조선의 후대 왕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선조 당시 임진왜란이나 명종 당시 을묘왜변을 봐도 그렇다. 을묘왜변 때 이준경이 있었고, 임진왜란에는 이순신이 있었다. 그들은 조선을 배반하지 않았지만, 이성계는 배반할 수밖에 없었다. 이성계는 원과 명의 교체이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사이는 명과 청의 교체시기이다.

 

나라의 지도자인 군주가 이성계가 밟아온 삶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그렇게 처신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자꾸 들었다. <시골무사 이성계>를 보면서 문득 나는 예전에 읽은 책 1권이 생각났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이다. <일리아스>를 보면 트로이전쟁에서 전투를 펼치는 모습이 상기되었기 때문이다. 창이 상대방의 머리를 박히고, 도끼가 머리를 박살되며, 뜨거운 피가 용솟음 치고, 내장이 쏟아진다. 단지 <일리아스>는 영웅주의적인 요소지만, <시골무사 이성계>는 영웅을 필부처럼 묘사했다. <일리아스>는 전장을 영웅의 서사시로 그리지만, <시골무사 이성계>는 전장을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야생의 짐승들처럼 표현했다.

 

작품에서 또한 인상적인 모습은 간인(間人)들의 모습이다. 간인들은 아주 다양하고 특이한 존재도 많았다. 살기 위해 활동하는 간인도 있다면, 죽을 줄 알면서도 활동하는 간인도 있다. 어제 죽은 왜구의 갑옷을 입고 적의 진영에 침투한 간인도 있고, 고려군 작전회의 자리 인근에서 구걸하거나 엿보는 간인도 있다. 간인들이 정보를 조작하여 적을 몰살시킬 수 있는 기회로 만들었다. 전투는 단순히 칼과 창으로 부딪혀 일기당천으로 해결되는 환상의 세계가 아니다. 철저히 현실적이고 냉소적인 공간이다.

 

삶이란 그 하나의 공간은 어째 보면 전쟁이다. 진정한 지옥은 전쟁터이도 있지만, 치열하게 살아가는 인간세계에도 전쟁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곳에 내몰린 인간과 그 인간들 위에서 군림하거나 말로만 그들을 대하는 자는 분명히 느끼는 바가 다르다. 내모는 자들의 내몰린 자들의 치열함을 알 수 없다. 그곳이 죽음의 사선이 이어지는 공간이라면 더욱 그렇다. 냉소적인 세계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은 자신의 칼과 활 그리고 같이 죽음을 맞대고 있었던 전우들뿐이다. 동료애와 의리는 단순히 그 감정만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다. 살아남는 것도 중요하고, 자신이 살아갈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시골무사 이성계>를 소개하는 글에서 이 책은 남자의 소설이라 한다. 하지만 보통남자라도 그런 공간에 있기 싫을 것이다. 필부(匹夫)로 등장하는 이성계처럼 나 역시 그저 필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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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사랑
정찬주 지음 / 봄아필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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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다도(茶道)동아리를 활동할 때 배운 것들 중 하나가 일반적으로 차()를 지칭하는 말은 녹차(綠茶)이다. 녹차란 찻잎을 잘라 가마솥에 덖은 다음 볏짚에 차 잎을 비벼주고, 다시 가마솥과 볏짚에서 덖고 비벼, 차의 맛과 향을 내는 방법이다. 일반적으로 차를 마시는 것에서 차라 결국 찻잎을 덖고 비빈 후에 만들어진 수제품이다. 그러나 보통 차를 마시는 녹차만 있는 것으로 알지, 그 찻잎을 따는 시기에 따라 다른 칭호가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124절기 중에 곡우(穀雨) 전후로 따는 차 잎을 우전(雨前), 입하 이전에 딴 찻잎을 세작(細雀), 입하 이후로 중작(中雀), 한 여름에 이르러 따는 찻잎은 대작(大雀)이라 한다.

 

보통 찻잎은 세작과 중작을 많이 마시고, 대작은 잎이 너무 커서 맛이 없고, 우전은 찻잎이 너무 작고 일손이 많이 필요하며, 찻잎의 기운이 세기 때문에 가격이 비싸다. 그래서 보통 세작과 중작이 시중에 많이 나온다. 처음 찻잎을 따서 만드는 우전이 나오는 시기가 2018420일 곡우를 전후로 다가온다. 24절기는 보통 양력으로 하는 법이나, 본래 우리 민족은 양력이 아닌 음력으로 날짜 계산을 많이 했다. 우전인 날은 차와 관련된 인물하고 깊은 관계가 있는 날이다. 음력 222일은 올해 47일이다

 

음력 222일은 1836년 경기도 남양주에 위치한 능내리 여유당(與猶堂)에서 다산 정약용 선생이 서거한 날이다. 그분이 태어난 해는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원통하게 죽을 때이고, 그분이 돌아가신 것은 182년이 되어간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서거일은 특이하게도 회혼일이다. 병마절도사 홍화보의 외동딸은 가난한 선비의 집안에 시집가서 다산 선생의 마지막 가던 날까지 함께 있었다. 물론 귀양의 고통은 그 가족 모두에게 절망이었지만, 다산 선생의 마지막은 행복이었을까? 아니면 절망이었을까

 

다산 선생에 대한 책을 읽다보면 희망과 절망, 슬픔과 기쁨이 너무 교차한다. 2017년 추석, 나는 이때 정민 교수님의 <다산 증업첩><다산의 재발견>을 읽었다. 페이지 수가 700에 이르는 두꺼운 도서에 책 크기도 매우 커서 읽는 시간이 아주 길었던 책이었다. 다산 선생이 직접 쓴 편지와 다산 선생에게 보내는 편지들을 모우 번역하고, 당시 상황과 일반적으로 우리가 몰랐던 다산 선생의 모습을 잘 보여준 책이었다. 전에 강진 다산초당에 갔는데, 어느 누군가 아주 한심한 이야기를 한 것을 들었다.

 

강진은 바다가 접해진 남해권 지역이나, 한편으로 탐진강을 중심으로 논밭이 형성되어 있어 농촌과 어촌의 장점을 고루 갖춘 동네이다. 다산초당 정자에서 보이는 강진만을 넓은 바다로 이어지고, 강진의 백형인 정약전 선생을 그리는 마음을 그 자리에 서서 달랬다고 한다. 경치는 좋고, 동백나무 숲이 어울려져 있는 백련사도 옆에 있다. 초당에 오르는 산길은 약간 험하나 숲은 아름다리 나무가 우뚝 서 있고, 차나무가 산길 옆 경사에 비뚤하게 자라있다. 지금에서 보면 경치가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귀양을 온 입장에서는 답답하고도 편안한 곳이다. 그런데 어느 다산초당 방문객 한 사람이 초당 동암에 앉으면서 다산 선생이 여기서 귀양한 것을 두고 마치 휴양하러 왔다는 식으로 이야기 한 것이다. 순간적으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런다고 화를 낼 수는 없었다. 다산의 일생을 알고, 그가 겪은 풍파를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그런 발언이 나올 수 없다. 1800년 정조대왕이 붕어하고, 18012차례의 옥고를 치루면서 막내형인 정약종과 매형인 이승훈의 목을 저잣거리에서 베어졌다. 1791년 신해사옥으로 외사촌형인 윤지충과 윤지충의 이종사촌인 권상연 역시 참수되어 효수되었다.

 

신유사옥 이후 윤지충의 동생 윤지헌도 죽고, 훗날 천주교 탄압에서 정약종의 아들과 딸 역시 참수되었다. 가족들이 모조리 도륙되고, 큰형의 조카사위 황사영은 능지처참을 당하고, 자신의 사촌동생은 제주의 관노로 팔려가고, 황사영의 아이는 어느 작은 섬에 몸을 숨겼다. 도륙난 집안을 두고 멀리 귀양을 온 그에게 휴양이란 말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이미 나는 할 말은 잃은 셈이다. 다산은 우리가 알기에 위대한 유학자, 정치가, 경세가, 법학자, 의학자, 교육자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인자한 아버지이면서 스승이기도 하다. 다산이 한국위인 중에서 항상 존경되는 분으로 선정되는 이유는 괜한 이유는 아니다.

 

이번에 읽은 <다산의 사랑>을 읽었다. 다산의 큰 모습을 보지만, 사람들은 작은 모습을 알 수 없었다. 다산의 따님이 친구에게 시집가고, 강진에서 과부를 만나 사랑을 하고 또 다른 딸을 가졌고, 다신에게 찾아온 제자들은 누구고 그들은 스승하고 어떤 교감을 지녔는지 말이다. 책을 보면서 마음이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로 다행인 점은 다산 선생이 해배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때 다산초당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고, 다산 선생과 18제자가 맺은 다신계(茶信契)가 무신계(無信契)로 되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다산 선생의 다신계가 해배 이후 서거하시자 거의 절명했지만, 20세기 다시 부활했다는 점이다.

 

국내 다산 선생의 연구자로서 위당 정인보 선생이 계신다. 그분은 잃어버린 조선에서 다산이란 존재란 조선의 마지막 등불이고, 우리 민족이 언제나 기억해야 할 인물이라 평했다. 다산의 제자 중에 귤동마을 윤씨들이 많았다. 귤동마을의 윤씨는 정약용 선생의 어머니와 같은 성씨이다. 그러나 촌수가 제법 먼 외척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다산을 받아주고, 다산을 위해 다산초당을 내어주었다. 다산초당에서 다산에게 찾아온 애제자들은 다산의 노년에 찾아와 스승에게 안부를 나누고, 다산 선생이 서거하고 그들조차 세상에서 사라질 때 누군가는 계속 다산의 영혼을 지켜줘야 했다

 

귤동마을의 윤씨 후손들은 다산초당을 보존했고, 다산 선생이 남긴 기록을 다시 찾아내어 세상의 빛을 보게 했다. 그러나 처음 다산 선생이 강진에 오실 적에 강진에 작은 주막의 노파만이 받아주었고, 아무도 그를 가까이 보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항촌마을의 윤광택은 친구의 아들이 곤란해 하자 사람을 보내 위로했고, 다산 선생을 위해 몸과 마음을 위로해준다. 윤광택은 다산 선생이 귀양 온지 몇 년 지나자 세상을 등지고, 그분의 아들인 윤서유가 다산 선생을 친구로서 대해준다

 

그런 인연일까? 다신계의 정신은 아직도 이어져 가는 것이 참 대단한 것 같다. 올해 2018년 다신계 절목이 결성된 지 200주년이 된 해이다. 다산 선생이 1818년 강진에서 해배된 시기에 결성된 것이 다신계이기 때문이다. 친구 윤서유는 다산 선생의 외동딸을 며느리로 받아들이고, 윤서유에게 방산 윤정기라는 다산학의 계승자인 아들을 얻는다. 그리고 21세기에 이르러 다산의 따님의 5대손이 경기도 남양주에 위치한 정약용 선생의 묘에 찾아와 다례(茶禮)를 올린 것이다

 

다산 선생은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그분이 남긴 정신이 현대 한국에 남아있고, 특히 다도 문화와 조선 성리학 중 실학에 대해 연구하는 분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세계유교학회에서 한국 조선유학에서 정약용 선생은 빼놓을 수 없는 분이다. 이렇게 위대한 분이라도 그도 역시 한 사람의 인간이고 싶었던 것이다. <다산의 사랑>에서 주인공은 다산이나, 오히려 다산을 중심으로 돌아가기보단 다산의 옆에 붙어 있던 혜장 스님과 다산의 몸과 마음을 추스르게 해준 홍임 모녀가 인상이 깊다. 홍임 모녀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얼마 되지 않고, 그나마 문서와 편지가 나오면서 우리에게 깊은 감명을 준다. 사람이 배고프고, 차향이 좋고, 술맛을 느끼는 것은 남녀노소 차이가 없는데, 왜 우린 그것에 얽매여야 했는가?

 

사실 다산의 사랑은 이 책의 제목인 <다산의 사랑>보다 <다산 증언첩>이 훨씬 나은 것 같다. 다산의 편지에서 묻어나는 글귀에서 그가 가진 애정, 특히나 배고프고 헐벗은 농민들을 바라보는 애민정신은 정말 감동이 밀려온다. 그런 다산이기에 그가 제자로 받아들인 사람은 양반문중만 아니라 농민이나 중인 부류도 있었고, 천민이던 사의재의 거처인 주막주인인 늙은 노파 역시 사람으로 대했다. 단지 그가 처해진 현실이 너무 안타깝고 비참했을 뿐이다. 권력의 자리에서 부당한 세력에게 좌절했고, 그 부당한 세력에 가족까지 빼앗겼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강진에서 책을 읽고 더더욱 학문에 정진하는 것이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때 얼마나 적적하고, 이제 찾아오려니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다산은 본처의 눈치 대문에 홍임 모녀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본처이든 유배지에서 만든 첩(다산은 또 하나의 아내로 대해주나)이든 다산에게 모두 소중한 사람이다. 그러나 여유당에서 노년을 보내면서 강진 백련사에 머물고 있는 홍임 모녀에 대한 그리움을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는 그의 심정을 어떠하랴? 조선시대 양반들은 본처가 있지만 대부분 첩을 두고 살았다. 그게 좋은 제도는 아니지만 당시 상황에서 유배지에서 홀아비처럼 살아가는 것은 너무 괴롭다. 밤에 혼자 심신이 피폐해져 잠 못 이루는 날이며, 서럽기가 그지없다.

 

홍임 모녀 역시 그렇다 홍임의 어머니는 30대 초반에 다산 선생을 만났지만, 그녀는 이미 1번 결혼 후 사별로 인해 혼자 사는 과부댁이었다. 조선시대 과부들의 삶은 비참했다. 아무도 받아주지 않은 여자라는 사회적 덫도 있자만, 과부이기 때문에 아무나 대할 수 있다는 비인격적 시선이 은근히 잠재하기 때문이다. 과부라도 사람이고 여성이다. 과부도 사랑을 하고 싶고, 그 사랑하는 사람이 다산 선생처럼 고귀한 학자일 수 있다. 귀양 이후 제법 시간이 지난 후에 만났지만, 천주학쟁이로 귀양 온 사람에게 다가가는 일이란 쉽지 않다. 정분을 나눈 후에 계속 옆에 지키며 서로를 의지하는 일도 쉽지 않다.

 

다산은 해배된 후 제자들이 올라오면 홍임 모녀를 잘 돌봐줄 것을 은밀히 전하나, 그것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사실조차 역사의 흐름에서 사라졌을지 모르는 운명이었다. 20세기로 오면서 한국에서 다산학이 중요한 연구대상이고, 21세기 다산 선생은 세계적 위인이 되었다. 영원히 묻혀버릴 것은 같은 그 어둠의 시간에서 이제야 그 아련한 시간들을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평을 적은 후 조만간 나는 집안 일로 강진군에 위치한 항촌마을에 들릴 일이 있을 것이다. 어릴 적 시골에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항촌마을에서 뛰어 놀던 기억이 있다.

 

항촌마을은 전형적인 농촌이다. 다산의 친구인 윤서유가 살던 집은 윤서유의 일가 후손이 살고 있다. 다산 선생이 친구이자 사돈인 윤서유의 집에 놀러가고, 같이 농막에서 술을 마시며 유배지의 설움을 달랜 곳이다. 항촌마을 건너에 다산의 따님과 사위, 그리고 외손자 윤정기 선생이 잠든 묘가 위치하고 있다. 다산 선생의 슬픔과 기쁨이 숨 쉬고 있는 그 마을들이 점점 갈수록 인적 드문 곳으로 변할 때마다 아쉽기도 하다. 그래도 다행인건 항촌마을과 귤동마을의 윤씨들은 아직도 다산 선생이 남긴 발자취를 계속 지켜나가고 있는 것이다.

 

다산 선생은 힘없고 가난한 백성을 사랑했다. 또한 주변의 친구와 제자, 홍임 모녀 역시 사랑했다. 우리는 늘 다산 선생이란 존재는 거대한 민족의 태양처럼 여기지만, 그 이면에도 초가집 처마 같이 아담하고 다정한 모습도 있었다. 위에서 적었지만, 2018년은 다산 선생이 해배된 지 200년이 된 해이다. 다산 선생과 그 주변에서 보여준 여러 이야기는 시간이 흘러도 귀담을 만한 사연이 넘친다. 다산 선생이 서거하기 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제자 황상의 모습을 보고 원한 한 가지를 풀었다. 얼마 후 황상이 강진가는 길에 스승의 부음을 듣고 다시 여유당으로 돌아가서 장례식장을 지키고, 다시 강진에 내려와 스승의 죽음을 마치 부모의 죽음처럼 여기는 모습에서 인간의 도리는 말로 하기 쉬우나 실천하기란 정말 어렵다. 세상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향해 걸어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후회로 가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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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수 허목 - 청빈한 대쪽 선비
허찬무 지음 / 진한엠앤비(진한M&B)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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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을 이용하여 이래저래 시간을 보내기 전에 제대로 시청하지 못한 드라마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 드라마는 <불멸의 이순신>이었다. 이순신을 다룬 작품인지라 우리 민족이 겪은 최대 위기인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7년의 고통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던 이순신 장군이라 강직하고 지혜가 넘치는 명장으로 기억된다. 어린 시절 이순신에 대한 위인전을 읽으면 가난한 사대부집안에서 태어나 무관시험 도중 말에서 떨어져 낙방하여, 이후 다시 합격 후 수군 장수가 되어 왜군을 물리치고, 노량해전을 마무리하여 서거한 것으로 정리된다.

 

그러나 막상 이순신 장군의 일기를 재구축한 <불멸의 이순신>을 보는 순간, 그 생각은 달라진다. 20세기 이순신과 21세기 이순신은 다르다. 2세기 모두 이순신은 성웅이고 명장이며,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조인 것은 분명하다. 전자는 영웅주의에 대한 모습만 강조했다면, 후자는 고뇌하는 인간, 그리고 성찰하는 인간, 모두와 뜻을 나누는 인간 이순신을 다루었다. 이순신 장군은 신은 아니나, 우리 민족이 망하는 그날까지 바다의 신이 되어 줄 것이다.

 

이순신의 죽음을 보면서, 그의 죽음은 교전 중에 잃은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 때를 맞추어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이순신의 심장을 멈추게 한 것은 왜군의 조총이나, 이순신이 심장을 멈추고자 결심하게 만든 것은 조정의 권력다툼이었다. 이순신은 이미 조선의 영웅이었고, 당시 군왕인 선조보다 더 높은 존재였다. 선조는 그가 자신보다 우월하고 뛰어난 영웅임을 알고 있었고, 그가 조선에서 가장 필요한 인재라는 사실도 알았다. 또한 선조는 이순신이 자신에게 가장 필요 없고, 지금 당장 제거해야할 역적으로 삼았다.

 

이순신의 친구 서애 유성룡은 말한다. 진실로 말했는지 모르겠으나, <징비록>을 저술하면서 끊임없이 조선의 백성을 걱정한 그의 태도를 보자면 충분하다. 드라마에서 선조에게 이르길 나는 군왕을 섬기지 않으며, 내가 섬기는 것은 백성을 하늘처럼 여기는 군왕을 섬기고 싶다고 말한다. 드라마에서 가장 미화(美化)될 수 있는 인물은 광해군이다. 그러나 그가 한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일 수 있다. 선조 내지 조정대신과 같이 회의석상에서 그가 전하는 말이 실록 내지 사료에서 충분히 기재될 수 있으며, 심지어 <난중일기>에도 이순신 장군이 광해군을 걱정했다고 하니 말이다. 광해군은 민심은 천심이고, 백성을 무시하는 자신이 용서할 수 없다고 한다.

 

자신을 질투하는 아버지 선조 앞에서도 이순신 장군이 수군지휘관 선발에 대해서도 의견을 피력하는 장면도 그렇다. 조선시대 반상의 차이로 과거는 사대부만 할 수 있으나, 일개 군졸이 지휘관으로 삼으려 하는 이순신의 정책은 선조나 조정대신에게 큰 반발심을 일으켰다. 모두 반대할 때 광해군은 세종대왕 때 장영실을 당상관을 임명할 사례를 말하며, 이순신의 정책을 지지한다. 반상의 양천에 얽매이지 않고, 백성 그 자체로 사랑하자는 것이다. 광해군이 얼마나 백성을 사랑했는지 몰라도, 적어도 선조나 인조 이상으로 사랑했을 것이다.

 

태조와 태종을 제외한 나머지 군왕과 달리 직접 전쟁을 수행했으며, 전쟁에서 함께 뜻을 나눈 자와 관련하여 태조와 태종은 장병과 소통했다면, 광해군은 백성과 소통했다. 광해군이 모든 것을 잘 한 것은 아니나, 그가 백성을 사랑한 임금이란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권력과 백성의 관계는 다르다. 권력을 사랑하는 자는 백성을 사랑하지 않고, 백성을 사랑하는 자는 언제나 권력으로부터 소외받기 때문이다. 힘을 가져야 백성을 사랑할 수 있다고 여긴 선조도 결국 백성보단 권력을 선택했다.

 

이순신의 죽음과 유성룡의 파직, 그리고 수많은 의병장의 몰락은 그 증거이다. 조선시대 역사에서 권력의 패자들은 정말 많다. 말도 안 되게 파직, 장형, 유배, 사사, 참수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피의 역사로 기록되기 때문이다. 조선이 대한제국을 걸쳐 대한민국이 되었다. 대한민국이 민주주의이고, 왕조시대는 아니나, 대한민국이란 이름은 대한제국의 한 글자의 차이다. 대한의 나라는 주인이 왕에서 국민이 되었을 뿐이다. 조선이란 역사와 문화가 대한민국의 모습을 갖추게 한 원동력이다.

 

조선의 역사에서 좋은 일도 있지만, 나쁜 일은 정말 많았다. 권력의 패자는 비참하게 운명을 맞이했다. 권력의 승자와 후예들은 일제강점기 시대를 넘어 현대사회에 와서도 부와 권력을 유지하는 모습을 종종 본다. 하지만 이들은 언제까지나 자랑스럽다고 말할 수 없다. 돈으로 사람을 살 수 있어도, 민심 그 자체를 움직이는 것은 무리이다. 역사의 기록에서 권력의 패자가 이제는 영원한 승자가 되었다. 이번에 읽은 서적이면서 그 인물인 <미수 허목> 역시 그렇다. 가난한 선비고, 늙은 나이에 벼슬에 올랐지만, 조선 역사에서 위대한 정승으로 이름을 남겼다.

 

물론 그는 숙종 시기 경신환국으로 벼슬을 잃었다. 자신과 같은 당인 남인은 사사 내지 유배, 장형을 당해 죽거나 몸을 상했다. 정조에 이르러, 정조에게 깊은 존경심을 받은 인물이 되었고, 정약용 선생에게도 큰 감명을 주기도 했다. 가난하지만 대쪽 같은 선비, 조선은 유학 성리학을 토대로 국가가 돌아가는 세상이다. 성리학으로 시작한 조선이 성리학으로 망한 이유는 성리학의 기본적 학문이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철학이 부족했고, 그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성리학이 보수보다 더 보수적인 수구형태로 될 수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진보적 성향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도를 말하고자 하는 점에서 민주주의에서 말하는 기본 진리와 별반 차이가 없다. 책에 하늘이 보는 것은 우리 백성으로부터 하며, 하늘이 듣는 것도 우리 백성으로부터 한다.” 지금은 국민이나 그 당시에는 백성이다. 백성은 군왕의 하늘이어야 존재이고, 민심을 뒤로 하는 군왕은 폭군(暴君) 내지 혼군(昏君) 같은 어리석은 임금이다. 백성이 삶에 힘들어 곤충을 말하는데, 나라님에 대한 원망이 없을 수 없다. 만일 그 원망을 듣고 깨닫는 바가 있으면 성군이 되나, 그 말을 듣고 증오하여 칼을 휘두르면 수 천 년의 역사가 그를 손가락질 한다.

 

서양의 근대 민주주의를 성립하게 만든 장 자크 루소의 사상과 마찬가지로 미수가 말하는 국가관은 다스려진 나라는 백성을 부유하게 하고, 쇠퇴한 나라는 대부를 부유하게 하고, 망하는 나라는 정부를 부유하게 한다.” 루소 역시 민주정, 과두정, 군주정에 대한 정치제도를 <사회계약론>을 통해 설명했으며, 참주정과 과두정에 대한 문제를 잘 설명했다. 폭군은 참주가 아니나 참주는 언제나 폭군임을 말하듯이 말이다. 왕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신하들끼리 당파싸움을 통해 서로 피를 물들게 하고, 자신의 권력의지와 신하들의 권력의지가 일치하면 동조하기도 했다.

 

고관대신들은 사대부들이다. 미수 허목은 사대부라는 선비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 이유는 천하에서 선비를 귀하게 여기는 까닭은 다른 사람의 걱정거리를 덜어주고 재앙을 없애주며 다툼을 풀어주고도 보상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보상을 받는다면 이것은 장사꾼의 행위이다.” 하지만 자칭 선비라는 사대부들은 걱정거리와 다툼을 풀어주어 보상받는다면 다행이다. 아무 것도 하지도 않고 보상을 바라니 참으로 가혹한 처사가 아닐 수가 없다. 이미 황구첨정과 백골징포는 시작되고 있었다. 배냇물도 마르지 않은 아이가 군적에 오르고, 시아버지 죽은지가 몇 해가 지나도 군포를 내고 있다.

 

세금을 내지 못해 이웃에 세금을 내게 하거나 그들의 친척에게 물리도록 하여, 어떤 마을은 아예 사람조차 살지 않는다. 모두 가렴주구라는 관리들의 횡포에 참지 못해 고향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진다. 병으로 죽고, 굶어 죽고, 매에 맞아 죽는 이 원통한 비극에서 선비들이 해야 할 임무는 그들을 마을에 다시 모여들게 하여 생업에 힘쓰도록 하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을 겁박하니 참으로 한심하지 않을 수 없다. 허목이 가난하게 살고, 직접 몸소 근검하여 절약하는 이유는 권력자가 하나를 더 가지면 누군가는 하나를 내어주어야 하고, 가난함을 직접 체험하지 않으면 버림받은 백성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비들이 부에 집착하면 농민의 농지를 빼앗고, 백성의 딸과 아내를 빼앗아 간다. 백성은 글을 모르며 고을사또가 있는 관아의 담장은 높고 문 앞의 포졸은 성난 이리와 같다. 하소연하지 못하고 그저 신음하며 세상을 원망하니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하겠는가?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권력을 잡고 이권을 챙기는 자들과 대적해야 한다. 허목이 반대당인 노론에게 상당히 좋지 못한 자로 낙인이 찍힌 이유는 바로 그러하다. 권력의 패자로 될 수밖에 없었지만, 죽어서 칭송받는 이유는 바로 그런 연유이다.

 

허목은 세종 때 황희, 선조와 광해군 시절의 오리 이원익과 더불어 임금에게 직접 집을 하사받은 정승이다. 게다가 허목은 오리 이원익의 손자사위였다. 이원익은 이 글의 초반부 이순신 장군을 위해 목숨을 걸고 선조에게 충언을 드린 인물이다. 백성을 사랑하고, 언제나 검소하며, 백성과 나라를 위해서는 목숨과 벼슬자리가 박탈되어도 소신을 전하는 사람이다. 이원익은 가난하지만 영민한 허목을 아껴 제자를 삼고, 그에게 손녀를 주었다.

 

그들은 청백리로 인정받고자 선비의 정신을 보여준 게 아니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선비로 살아온 것이다. 20세기를 넘어 21세기로 오면서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은 양반이 되었다. 그 성씨가 원래 반가의 집안도 있지만, 너나 나나 연애는 서로 간 자유이다. 여자가 반가의 후손이든, 남자가 반가의 후손이든 모두 반가의 후손이다. 하지만 선비의 정신을 그대로 가진 자는 얼마 없다. 고리타분한 시대착오적 발상만 하는 인물이 아니라 그 시대의 문제를 이해하고, 거기에 대해 조금이라도 개선하고자 하는 인물이 선비이다.

 

허목은 예라는 것을 무척이나 중요하게 여겼다. 효종과 헌종 시대에 예송(禮訟) 논쟁은 조선 성리학의 큰 당쟁 중 하나였다. 예송에서 상복의 착용기간이 얼마나 중요 하겠는가 라고 말하지만, 군왕을 사대부와 동일하게 보는지 아니면 그 이상으로 보는지에 따라 왕권과 신권의 권력관계가 성립된다. 허목은 왕권을 추구했다. 왕의 권력을 높이고자 할 때 개혁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 서로 간의 당파적 이익도 있으나, 당론의 채택되지 않으면 정책의 실현이 어렵다. 남인의 반대세력인 노론 역시 대동법을 두고 산당(山黨)과 한당(漢黨)으로 나누어 대립했다.

 

대동법이 도입된 이유는 정치 권력가와 상인들의 농간을 막기 위해서이다. 백성에게 요구되는 진상품을 상인에게 억지로 사게금 만들고, 그 상품의 가격을 너무 높이게 되면, 백성에게 따르는 생활고는 당연히 힘들어진다. 그래서 일정한 세금납부 방법을 정하여 세금을 부과한다면 백성에겐 그 고통이 사라질 것이다. 거기에 두고 노론 내부에도 서로 갈등이 있었던 것이다. 같은 당 내에서 당론이 대립되니, 다른 당끼리의 당론은 더 심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당론을 두고 조정과 군왕, 조선의 종조를 논하는 자들은 권력을 탐하는 자들이며, 당론을 두고 백성의 기근과 고충을 걱정하면 충신이다.

 

그러나 권력을 가진 자는 언제나 권력을 원한다. 조선 백성이 당해온 그 억압의 시간이 사라질 수 없는 것은 결국 시스템의 문제였던 것이다. 미수 허목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치적 대안이 필요했고, 남인의 영수로 활약한 것이다. 물론 제일 중요한 시작은 인사이고, 인사의 시작은 과거이다. 과거에서 이루어진 부정부패는 광해군 시절보다 심하다고 한다. 물론 광해군 이전인 명종시대의 부정 과거는 더욱 심각했다. 조선은 척신과 권신들의 농간을 피하지 못해 망했다. 권력자는 자신의 권력을 위해 자신의 기반이 되는 자들을 뽑아 올려준다.

 

그들의 능력과 성품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의 권력에 얼마나 충성할 수 있는지에 따라 성과가 달라진다. 이런 자들이 올라오니 백성들의 원망이 하늘에서 사라질 수 있겠는가? 모든 사람이 허물이 없을 수만은 없을 것이나, 적어도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고, 현실이 가진 문제의 본질을 안다면 그 역시 충분히 활용할 수 있을 것이나. 그조차 반성하지 못하고 부와 권력을 탐닉하고 스스로 붕괴하는 권력가의 마지막을 종종 본다. 미수 허목은 그런 본질을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의 소신에 따라 살아왔다. 허목은 인자한 늙은이의 눈썹처럼 미수(眉叟)의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나 미수(米壽)의 인생으로 살아갔다. 그의 길고 긴 하얀 눈썹이 그려진 초상화는 국가의 보물이 되어 우리 삶에 새로운 감동으로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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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10-11 0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플라톤의 「국가」에서 말한 철인정치가 잘 구현된 시대가 조선시대였다고 누군가 했던 말이 생각나네요...‘주리론‘의 한계를 넘지못한 철학자들이 집권한 시대에, 서양에서는 과학문명이 융기했다는 점이 한국 근대사의 비극이라 생각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7-10-11 09:04   좋아요 1 | URL
국가라는 책을 보면 단순히 군주제보단 정치력과 무력을 동시에 가진 철인군주이나, 조선의 왕은 철인군주로 될 만한 임금은 얼마 없었지요. 정말 권력을 위해서라면 피를 피로 씻는 당파싸움까지 이용하니 철인에서 철이 哲이 아니라 鐵이라 생각 듭니다. 성리학에서 공자의 기본철칙을 생각했다면 저래 되지 않았겠죠
 
광해군 - 하
이기담 지음 / 창작시대 / 2002년 7월
평점 :
품절


광해군을 소재로 하던 소설에서 <대왕 광해군>은 광해군 이혼보다 어느 서얼이던 동명이인 이혼을 중심으로 내려간다. 물론 한자로 이름은 다르더라도 이혼이라는 맥락일치는 그들이 무엇을 위해 목표로 하는지 비슷하면서도 다른 길을 보여준다. 이와 달리 이번에 읽은 그냥 <광해군>이란 소설은 주인공 자체는 광해군으로 둔다. 우리가 아는 광해군이란 조선임금 중에서 연산군과 더불어 종조를 붙이지 못한 사람이다. 우리가 대부분 아는 것은 광해군이 명나라가 지고 청나라가 오를 때, 중립외교를 했다는 점, 그리고 영창대군과 임해군을 죽인 것, 인목대비를 폐서인으로 하여 불효를 했다는 점이다.

 

하늘의 도를 내세워 광해군을 비판하면 어느 모순이 생긴다. 태종 이방은 형제와 사촌을 죽이고, 세조는 단종을 죽였으며, 인조는 소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다. 그뿐인가?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 안에서 죽도록 만든다. 그냥 편하게 독약을 내리는 사사(賜死)가 좋다. 반란이 있거나 예상되는 인물 그리고 정치적 숙적들은 항상 죽음을 당한다. 왕가의 친척들은 든든한 아군이기도 하나 절실한 적이기도 하다. 모든 일이란 전후맥락이 존재하고, 원인에 대한 결과에서 그 원인에 대한 근원이 있다.

 

광해군을 본다면 정말 난해한 인물이다. 혼군(昏君)이라 하나, 조선시대에서 내려온 유산 중 그가 만든 업적은 탁월하다. 궁을 복위하고, 전쟁으로 사라진 도서를 재편찬하고, 지금 한국의 의술 한의학을 정립한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편찬하게 만든 인물이다. 동의보감의 가치는 현대의학에서 그대로 인정받고 있으며, 그 외의 서적도 역시 한국의 중요한 유산이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모두 소실된 서적을 복원하고, 실록도 1곳에 보관한 것을 4곳으로 늘려 보관하게 한 것도 광해군의 업적이다. 실록을 현대 한국에서 국가의 보물로 삼았고,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되었다. 400년 전 그가 하던 일들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던져주었는가?

 

E.H Carr<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는 과거에 있던 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현재 사회와 끊임없이 대화를 하고 있다고 한다. 광해군 시대는 북인과 서인이 공존하고, 서인이 열세하자 인조반정으로 북인이 몰락한다. 서인이 주도로 작성한 광해군일기나 서인에서 노론이 중심이 되던 조선의 정치사에서 광해군의 존재는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소설 <광해군>에서 어느 정도 실화이고 어느 정도 가정인지 모르나, 적어도 실록의 기록을 많이 차용하고 있다. 광해군의 말이나 강홍립의 의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적어도 강홍립이 없었다면 병자호란 이전 정묘호란에서 큰 화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임진왜란을 거치며 전쟁영웅이 모두 제거되는데, 그 대부분은 선조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이다. 임진왜란 의병장 김덕령이나 영원한 해군제독인 이순신 장군을 봐도 그 죽음이 부당하기 짝이 없다. 전쟁에서 주요활동인물은 동인세력이 주축이 되는데, 동인도 남인과 북인이 나누어져 남인 유성룡 세력이 퇴각이 북인이 급성장한다. 북인이 다시 소북과 대북으로 갈리고, 대북은 다시 또 분당한다.

 

광해군은 붕당정치가 시작될 때 그 당쟁의 희생자였고, 폐위와 그 이후의 삶 역시 당쟁의 희생자였다. 당쟁의 문제는 유학이 백성을 도학으로 치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당론의 이익을 따라 모두 따른다는 점이다. 당쟁의 문제는 전쟁의 대응력까지 문제되고, 임진왜란 당시 순국지사 학봉 김성일은 분명 훌륭한 유학자이나, 일본 왜국 방문 시 서인과 반대되는 당론을 추구하다 전쟁의 화를 만들었다. 전쟁이 나면 가장 문제인 건 전투보단 국민, 백성의 안위다. 선조는 혼자 살기 위해 도망치고, 그 아들인 광해군을 남겨 분조를 이끌게 했다.

 

<광해군>에서 광해군은 분조를 기회로 보나, 최근 개봉한 영화 <대립군>에서 광해군의 모습은 그저 힘없이 내몰린 희생양이었다. 선조가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할 의지가 없다가 전쟁이 나자 신성군을 마음에서 버리고 광해군을 선택한다. 전쟁을 지휘하라 하나, 막상 전쟁터에서 언제 참극을 피할지 모른다. 우리가 아는 광해군은 임금시절만 보나, 사실 광해군의 탁월함은 전쟁이었다. 분조를 이끌며 의병을 독려하고, 전쟁을 지휘했으며, 한양을 되찾은 후 남쪽으로 내려가 다시 백성들은 다독거렸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저잣거리에서 형편없는 밥상을 백성과 같이 먹어주던 임금은 오로지 광해군이었다. 인조는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올라가 도망치기만 바빴다. 결국 체면과 생존에서 체면을 버리고 삶을 택했다. 대신 백성 수십만명이 청국으로 끌려가 죽음을 당하거나 평생 돌아오지 못했다. 설사 돌아와도 수많은 돈이 지출되고, 아녀자들은 환향녀가 화냥년으로 바뀌어 창녀 취급을 받았다. 어찌 슬프지 않을 수가 있을까? 광해군이 중립외교를 추구한 것이 드러나는 것은 곧 지배계층이 어리석다는 것은 반증하고, 임진왜란 당시 명의 황제가 칙서를 선조가 아닌 광해군으로 내린 것은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여 조선을 흔드려 했다.

 

소설에서 광해군은 선조에게 명군을 파견하지 말 것을 청하는데, 유성룡도 그런 말을 한 것을 보면 그 고증이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단지 명이 오는 이상 조선은 그 이상의 대가를 줘야할 것이고,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오면 큰 빗으로 쓸고 간다면, 명나라는 참빗이 쓸고 가는 형국이라 했다. 가는 길마다 강간, 살인, 약탈이 끊이지 않으니 천군이란 명성은 그저 강도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선조가 재조지은을 내세우고, 대신들도 광해군에 이르러 그 뒤에도 재조지은을 말하는 이유는 지배계층의 어리석음을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사실 임진왜란은 명군의 도움은 초반에 없었고, 전쟁의 승리가 눈에 보이자 공을 내세우기 위해 움직인다. 후에 명군을 분명히 왜군을 소탕하였지만, 임진왜란의 승리는 이순신을 비롯한 조선의 장수와 의병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선조와 인조반정 세력은 그것을 인정하기 싫었다. 광해군이 분조를 지휘한 것은 만 백성이 알고, 거기에 의병이 나와 왜군을 격퇴한 것은 타국도 알았다. 영화 <광해>에서 광해군의 가슴에 흉터가 있는데, 그것은 전쟁 중 활에 맞은 상처이다. 가슴이 활에 공격당했다면 죽을 공비를 넘겼다. 일국의 왕자가 죽음을 당할 뻔 했는데도, 그는 도쿠가와 막부와 외교를 맺었다.

 

전쟁을 다시 일어나면 안 된다는 뜻이다. 소설 <광해군>은 오로지 백성의 편을 생각하는 군주로 묘사된다. 실제 한명기 교수의 연구도서를 보면 광해군이 폐위될 때 백성들은 모두 놀라워하고 두려워했다. 이때 오리영감 이원익이 한성부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진정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무리수는 내부 권력의 다툼이었고, 백성들은 궁궐의 권력암투는 일상화가 되었기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광해군이 토목공사로 재정을 많이 낭비했지만, 명나라에 군을 파견하여 여진족에게 몰살당하는 것보다 났다. 만 명 중 7000여명이 살아왔다면 오히려 그게 더 큰 이익이다.

 

궁궐 토목공사 자체를 긍정적이지 않으나(물론 현대 한국인들은 이런 것이 있기에 즐겁게 한양나들이를 돌아보는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많은 장정을 잃는 게 국력의 훼손이 크다. 광해군은 역대 임금 중 태조와 태종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전쟁을 수행한 군주이다. 그는 직접 백성들 상대하고, 그들의 원한을 들었다. 아니 들을 수밖에 없다. 자신이 백성을 지켜주지 않으면 전쟁에서 광해군은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탐관오리에 의해 배를 굶고, 포악한 사대부에게 딸을 빼앗기며, 그 원통한 사연은 어디 가서 호소조차 못한다.

 

파주현감 조명식이 실존했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없다. 그리고 대동법 초안이 임진왜란 당시 백성을 만나 그 의미를 찾았는지 알 수 없다. 단지 대동법이 김육이 제안했다고 하나, 사실 남인영상 이원익이 시작했고, 이원익은 광해군 북인시대에 초라한 남인세력이다. 그는 성격이 워낙 온순하고, 백성들에게 친절한 청백리였으며, 전주이씨 후손으로 종실이었기에 그만큼 추종을 받았다. 하지만 권력과 무관한 인물이었기에 단순히 이원익이 주장한다고 하여 그 세에 따라 대동법 시행이 되었다면 논리가 서지 않는다.

 

당시 양반들은 농지지주가 되어 많은 이익을 차지했고, 김육이 대동법을 주장할 때 산당의 서인들이 모두 반대했다. 광해군이 폭군으로 등록이 된 이유는 겉으로 폐모론과 골육상잔이겠지만, 그 뒤에는 자신의 이익을 원하는 자들의 물밑작업이다. 소설은 그런 광해군의 고뇌가 잘 드러난다. 광해군이 물러나자 정묘호란이 일어날 때 여진족 군사는 협약을 맺지 않을 경우, 남하할 때마다 백성들의 집을 모조리 없애고, 살아있는 모든 것을 도륙한다고 했다. 여진족이 명나라를 공격할 때 그들은 항복하지 않으면 모조리 밟아버렸다.

 

전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단 일말의 자비를 내리지 않는 것이다. 전쟁을 몸소 겪은 광해군의 입장에서 전쟁은 무조건 막아야 한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병사로 차출되어 비명을 질렀는지, 하얀 옷을 입은 백성들의 시체가 너무 많아 흰 무덤을 보았다는 말이 나올 때 전쟁의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우리도 한국전쟁을 겪으면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지만, 더 슬픈 것은 민간인에 대한 학살이다. 상대진영에 조금이라도 협력하면 모조리 길가에 끌고 와서 총살시키던 그 사진은 너무 끔찍했다.

 

전쟁은 그런 것이다. 현재 북핵문제로 한국은 전쟁의 딜레마에 빠져있다. 미국에서 연구한 결과, 한국이 전쟁이 날 가능성은 50%이고, 하루 민간인 사망자는 2만명이라 하는데, 사실 2만명은 최소이다. 장기전이 되면 전쟁의 폭격이나 화생방 상황만 아니라 식수와 식량문제, 전염병 각종 범죄로 더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한다. 21세기 전쟁은 16세기 임진왜란처럼 활과 조총, 그리고 칼과 창이 아니다. 20세기 한국전쟁처럼 총과 대포, 프로펠러 전투기도 아니다. 제트전투기가 폭격하고, 지대공 내지 지대지 미사일이 수백 내지 수천를 강타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또 다시 역사의 반복이란 시련에 빠져든다. 광해군이라면 현대의 한국을 어떻게 할까? 외교적으로 어떻게 하고, 전략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군대는 대부분 활로 사격을 했으나, 왜군의 조총에 밀렸다. 조선에도 화약제조에 관심을 가진 것과 조총 정예부대를 만들어 전쟁의 불화를 번지지 않게 한 것도 대단한 혜안이다. 국방력은 그 나라의 운명은 좌우하고, 외교에 대한 정보처리는 일각을 좌우한다. 소설 <광해군>은 그런 심정에서 광해군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흘러간다.

 

분명 정치적으로 실정이 있었고, 그가 실수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다. 대북 이이첨은 처음에 광해군을 도왔지만, 후반부에는 광해군은 그를 멀리하려 했고, 중국과의 외교문제에서 이견을 보였다. 광해군을 지지하는 것은 노론의 입장에서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재조지은의 명나라를 올리지 않은 점은 임진왜란 당시 명군을 파병시킨 자신들의 입지가 무너지게 하는 것이다. 명군을 그렇게 올린 이유는 임진왜란의 문제가 정치적 무능함을 상기시키고, 왜란의 해결사가 조선의 백성이라면 사회적 모순에 대한 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해결사가 명군이고, 그것이 선조와 권력층이고, 의병의 활동이 들러리라면 기존의 정치체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 명나라가 존재하기에 그 명분을 들먹일 수 있는 것이고, 명나라가 망하면 자신들의 입지 역시 좁아지는 것이다. 조선 개국 이후 을묘왜변 같은 큰 전쟁이 있지만, 한양이 함락된 사례가 없었기에 섞은 물은 그대로 고여만 갔다. 소설에서 광해군의 말년이 나온다. 늘 우울하고 비참하며 슬픔에 젖은 그는 어느 조정의 신하가 올린 장계처럼 비참함 그 자체였다. 하지만 광해군의 비참함 이상으로 조선의 백성은 더욱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대신에게 내 나라 백성이 소중하고, 그깟 사대가 무엇이 중요하냐? 식으로 이야기한다.

 

남한산성에 몰려 척화파와 주화론자들이 분열할 때 조정은 아직도 권력 또는 명분에 집착했다. 명분이 있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나, 그 명분은 자신의 입장만 생각하지 백성의 입장은 전혀 없었다. 임진왜란 이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재미있는 사실 1가지를 생각했다. 임진왜란 당시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고 근왕병이 일어났다. 그러나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시기 의병과 근왕병이 거의 없었다. 백성들은 왜란에 따른 후유증이 너무 큰 것도 있지만, 그래도 의병이 전국적으로 창궐하지 않은 것은 의아한 일이다. 왜 그럴까? 광해군 분조시기에 의병이 전국적으로 넘쳤다. 광해군의 평가는 모두 긍정적일 수 없다.

 

그러나 민심에 의해 움직이는 의병활동은 생각해볼만하다. 그 이후의 의병은 기존 왕조에 동조하여 일어난 의병보단 항일운동 및 동학운동과 같은 민중봉기가 더 많이 발생된다. 조선이 망하자 조선독립을 위한 의병활동이 있었지만, 조선의 군주보단 조선의 백성을 위한 의병이 더 많이 나온 점을 생각하면 광해군이 보여준 분조활동, 그리고 거기에 얻은 경험을 정치로 활용하는 점에서 그가 혼군이라는 평은 너무 지나치다. 그는 혼군이 되어야 했던 군주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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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신명
이용두 지음 / 책과나무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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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눌 때이다. 아버지는 집안에 기묘사화를 당한 분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할아버지를 알아보니 기묘사화 때 죽임을 당한 조광조 선생의 문하로서 한양태학(漢陽太學), 성균관에서 학문을 수행하는 진사였다. 집안의 족보를 찾아보니 과연 조정암(趙靜庵) 종유(從遊)라는 글이 있었다. 족보에서 같이 딸려 나온 묘비명이나 기타 사료를 찾아보니 그분의 묘비명이 있었다. 어려운 한자어를 한글로 번역(그래도 명사는 한자이다)한 문장을 읽었다. 본래 진사로 성균관에 학문을 수행하다 기묘사화 때 스승을 잃고, 그분 역시 화를 당했다고 한다.

 

이때 화를 당한 사람 중에 그분의 재종조부(할아버지 사촌동생), 탄수 이연경 등 다양한 학자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화를 당한 것과 조정암 선생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고향으로 낙향했다. 고형에서 학문을 전파하고, 가까운 문우들과 학문을 논하면 말년을 보냈다. 그때 같이 학문을 논하던 인물 중에 탄수 이연경 선생이 있었다. 이연경 선생은 연산군 시절 갑자사화로 화를 당하신 분이다. 그분의 할아버지가 연산군의 생모 폐비윤씨의 사약을 내리려 간 집행참관자로 간 게 화의 근원이었다.

 

연산군은 이연경 선생의 할아버지 이세좌를 사약을 내리게 한 후 시체를 갈기갈기 찢는 것도 모자라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하게 했다. 게다가 이세좌의 아들들, 이연경 선생의 아버지와 그의 형제 모두 참수형을 당하여 그 머리를 효수하도록 해다. 집안이 화를 당해 풍비박산이 난 것이다. 이연경 선생의 비극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 자신도 제주도로 유배로 가야했다. 조선의 유배에서 한양에서 가까운 거리면 죄가 가볍겠지만, 멀리 남으로 진도, 기장, 해남과 북으로 함경도로 떠나면 그 죄가 엄중한 것이다. 가까운 것이라도 강화도 역시 죄가 무거운 죄인이 간다.

 

인조반정 광해군이 제주로 유배가는 이유 역시 그 죄가 깊다. 유배형은 사형 다음으로 높은 형이고, 유배지에 있는 죄인은 언제 금부도사가 찾아와 사약을 내릴지 모르는 형국이다. 이연경이 운이 좋은 건 금부도사가 제주도로 가서 형을 집행해야 하는데, 파도가 너무 심해 배를 띄울 수 없는 상황에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중종반정으로 이연경 선생은 다시 고향 충주로 가고, 그리고 이연경 선생의 사촌형제 역시 다시 고향으로 해배되었다. 이연경 선생의 사촌동생 중 이준경이란 인물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 역시 갑자사화로 처형되고, 이준경과 그 형 이윤경 역시 어린 나이에 유배 살이를 해야 했다. 조선의 형은 참으로 무섭다. 조선이 문장과 예의의 나라라고 하나, 백성들은 늘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렸고, 사대부들 중 권력을 잡지 못하거나 혹은 백성의 편에서 권력에 항거하면 그 화가 온 가족을 도륙 내었다. 이준경은 그저 폐비윤씨의 사형집행을 한 할아버지의 과거 일로 어린나이부터 힘든 삶을 사니 얼마나 힘들 것인가? 죄인이 되는 가족에서 남자들은 너무 어리면 유배를 보낸 후 일정 나이가 되면 사약을 보내거나 혹은 다시 압송하여 참형에 처한다. 여자들은 관가의 노비가 되어 손발이 퉁퉁 부을 때까지 일을 한다.

 

이준경의 어머니 역시 그렇다. 이준경이란 인물은 이렇게 갑자사화에서 화를 보다, 다시 기묘사화에서 화를 당한다. 그 본인은 당하지 않으나, 이준경의 사촌형인 이연경은 조광조 선생과 엄청 친한 사이고, 이준경 역시 조광조 선생에게 큰 가르침을 받는다. 이준경은 당대의 학자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하고 친한 학우였다. 그러나 2사람 모두 조정암 선생과 비교하여 더 높지 않다고 여겼다. 이런 이준경에게 내가 눈이 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기묘사화 시 화를 당한 나의 할아버지가 시골에서 살고 있을 때 이준경이 나의 할아버지의 재주를 너무 아까워하여 무관직 어모장군에 천거했다.

 

몇 년 전 시골에 내려가 파() 시조의 제사를 준비하던 작은아버지가 신위를 만들고 있었다. 그때 참봉공, 통정공, 부사공, 만호공, 어모장군공, 훈련원정공 등등이 보였다. 어모장군에 임관된 할아버지가 바로 성균관 진사로 학문을 수행한 분이다. 문과 대과에서 진사로 계신 분이 무관직을 맡은 것은 의외이다. 문무를 모두 겸비했다고 하나, 문예로 출사한 분이 무예로 임관했다. 이준경이 그때 천거한 인물을 보니 족보에 구수담이란 인물이 있었다. 구수담은 당시 권력자를 비판한 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눈을 감았다.

 

기묘사화를 당한 분이 다시 기용되어도 기묘사화를 일으킨 자들은 무덤에 있지만, 기묘사하와 같은 참극을 일으킬 수 있는 권력자들을 여전했다. 이준경이란 인물은 바로 그런 탐관오리와 권력자 사이에서 국가의 업무를 돌보던 실천적 사대부였다. 이준경이란 인물이 또 다시 집안 족보에 나온 것은 본 적이 있는데,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분의 작은아버지는 본래 만호(萬戶)라는 무관을 지낸 분이 있다. 1555년 왜적이 을묘왜변을 일으켜 전남 해남, 영암, 강진 등을 약탈하며 전주성까지 위협한 큰 전쟁이었다.

 

선조시기 임진왜란을 대다수 사람들은 생각하나, 사실 임진왜란의 전초는 을묘왜변이었다. 을묘왜변 이준경과 그의 형 이윤경은 전주성과 영암성을 지키며 왜적을 소탕했다. 이때 집안 족보를 보니 만호를 지냈던 분은 이준경에게 을묘왜변 시 도움을 주었고, 이준경과 매우 친한 사이였다. 그래서 나는 이준경이란 인물에게 관심을 두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번에 읽은 <청풍신명>은 이준경의 삶을 소설로 만든 책이다. 내용을 읽으면 다소 도교적 발상이 함유되어 있고, 조광조의 학문을 이은 이준경에게 유학의 기본이 중시되겠지만, 소설의 감인지 아니면 당대 사료를 보고 그렇게 했는지 알 수 없다.

 

단지 알 수 있는 것은 이준경이 해오던 일들이 엄청났고, 파란의 중심에 있었다. 이준경은 갑자사화, 기묘사화를 직접 겪었고, 명종 때 을사사화로 조카를 잃었다. 권력에 저항하기보단 권력을 지닌 자를 어떤 계기로 통해 물리쳐서 위기를 넘어섰다. 이준경의 실수는 아니나 이준경이 가장 잘한 일이 엉뚱하게 된 것은 명종의 임종 시기였다. 명종은 후사가 없고, 그의 아내 인현황후는 선조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이때 척신 이양이 계속 압력을 넣자, 이준경은 이양에게 직접 내의관에 가서 환약을 가져오라 하고, 이때 왕에게 후사를 정하라 하자 왕은 왕비에게 눈빛을 보낸다.

 

왕비는 그 입으로 선조를 호명하자, 이준경은 큰소리로 따라 부르고, 승정원의 관리에서 기 이름을 기록하게 한다. 어려운 시기를 위기에서 기회로 만들고, 주변에 인물이 있으면 거론하여 그를 기용하거나 추천한다. 이준경이 추천인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오리영감 이원익이다. 조선 정승 중에서 가장 오래한 사람 중에 황희와 더불어 올라간 사람이 이원익이다. 전주이씨 출신인 이원익은 왕가의 후예지만, 왕보다 백성을 더 사랑했다. 이원익이 알아본 인물로 충무공 이순신이 있다.

 

소설을 보면 방진이란 보성군수가 나오는데, 활을 명수였다. 방진에게 외동딸이 있는데, 그딸을 이순신과 부부의 연을 맺으라고 했다. 이순신 장군은 문장력이 뛰어났지만, 매우 가난한 선비였다. 만약 방진 군수와 그 딸을 맞이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일본에게 조선을 내어주었을지도 모른다. <청풍신명>은 그런 이준경을 삶을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그린 책이다. 우리 선조들 중에 위대한 인물은 모두 어려운 시절을 겪어도 거기서 좌절하지 않은 것은 보편적인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은 후 느낀 바는 진정 백성을 사랑하던 관리들은 백성의 삶에 녹아들어 그들과 어울리는 것이다. 이준경이 지방의 목민관이 되었을 때 가난과 재난에 지친 백성을 위해 구휼활동을 하는데, 다른 지역의 목민관이 자신의 딸에게 병자를 위해 간호하게 하거나, 물을 길어 백성들을 돌보게 한 점이다. 이준경 역시 자신의 아들에게 명을 내려 그 여성을 돕게 하도록 하고, 나중에 혼인도 올린다. 이준경의 사무처리는 뭐든지 딱 잘라버리는 게 아니다. 나도 성격이 조금 급하고 섣부른 판단을 잘하는 편이라 잘 느낀다.

 

변방의 오랑캐가 계속 조선군민을 괴롭히자, 이준경은 그들을 토벌하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 오히려 인정을 베풀어 조선의 백성과 계속 사이좋게 지낼 수 있도록 유도한 것이다. 칼로 계속 그들을 베면, 그들은 복수심에 사로잡혀 계속 국경을 침범하고 마을을 약탈할 것이다. 이준경의 재치는 바로 뭐든 그때 상황이 아니라 장기적인 안목으로 사무를 처리한 점이다. 한국의 정치인이 배워야 할 인물 중에 황희, 이원익, 채제공, 정약용 같은 인물도 있지만, 이준경의 활약 역시 그러하다. 문관이라도 체술을 배워 전략과 전술, 전투까지 이어가는 것은 참 중요하다.

 

사람에게 항상 필요한 점은 선견지명인 것 같았다. 지금 당장의 이익보다 앞으로 다가올 세대를 위한 주춧돌을 놓아 후손들이 계속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미래를 위한 현재를 다시 재정비하는 일이란 어렵다. 사람은 이익을 위해서라면 인간의 도리까지 저버리는 게 현실이다. 인간의 도리를 잃는 순간 모든 것은 허물어진다. 이준경은 인간의 도리와 더불어 명분을 중시했다. 그가 실용적 정치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당장의 문제만 생각하면 화를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재미난 것은 당대의 인물들이 이준경과 만난 것이다.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은 그렇다고 하도, 토함 이지함(토정비결), 화재 이언적, 조선 최고의 기생 황진이도 등장한다. 임꺽정을 토벌한 남치근 등도 나온다. 중종반정 이후 중종과 명종은 기존 조선의 왕권이 신권으로 넘어가는 시기이다. 왕의 무능함이 결국 신권이 우위로 가고, 선조는 신권을 이용하여 왕권을 지키기 옥사까지 일으킨다. 이준경은 그런 것을 원하지 않으나, 결국 그렇게 되었다. 앞날을 보려면 현재를 보고, 신중하게 행동해야 하나, 사람들은 그렇게 하기보단 그저 감정과 사당의 이익으로 움직였다.

 

책을 보고, 사료를 보면, 이준경이란 인물은 매우 신중했다. 이준경의 삶을 따라보면 당시 당대의 학자 이황과 조식, 기대승도 나오나, 율곡 이이도 나온다. 율곡은 학문은 깊으나 성격이 너무 급하여 경솔한 행동을 했다. 이준경이 죽기 붕당의 투쟁을 걱정했고, 율곡의 행동이 붕당정쟁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 했는데, 과연 붕당의 폐해는 심각했고, 기축옥사의 참혹함이란 말할 수 없었다. 이준경의 삶을 보면 언제나 고난의 연속이나, 그 고난 속에서 다른 사대부들처럼 권력을 누리거나 혹은 처사로 숨어있기보단 그 앞으로 나와 해결하려 했다. 세상이 더럽다고 피해도 그 더러움이 물러나지 않는다. 청풍신명이란 책제목처럼 맑은 바람, 올바른 마음의 형태가 신의 명령, 즉 우리의 사명이란 말처럼 이준경의 삶은 그렇게 살다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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