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쇼몽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61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음, 김영식 옮김 / 문예출판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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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타카와 류노스케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보면서이다. 그의 문학은 류노스케라는 사람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또 하나로 알게 된 동기는 애니메이션 기획물 중에 <푸른문학>에서 아쿠타카와 류노스케의 작품 하나인 <지옥변>을 본 것이었다. 지옥변이란 작품을 약 25분 정도의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꾸몄지만, 그 작품이 단순히 애니메이션이라 하여 우리가 그래 만만하게 볼 것은 아니다. 미치광이 화가, 그리고 그 화가가 살던 폭군들, 이 작품을 보면서 인간이 가진 미적 감각이란 반드시 기존의 미적 가치에 부여한 게 아니라 그 이상의 것들을 찾아가거나 또는 추구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소 소설과 애니메이션의 전개나 성향은 다른 것 같았으나, 나와 친한 분에 의하면 <지옥변>이란 작품은 지상예술주의적인 요소가 상당히 강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아쿠타카와 류노스케의 작품을 한 번 보게 되면, 그의 작품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인 요소를 들여보는 것보다 그 예술적인 성향으로서 작품을 이끌어가는 것이 보인다. 현실을 외면하는 비정치적인 표현의 글들, 하지만 과연 그가 그렇게 쓰는 것은 무엇인가?

문학적으로 현실에 대한 외면 내지 회피는 그 시대에 대한 거울적인 요소로서 대할 필요가 있다. 당시 일본은 근대문학을 꽃 피우던 시기고, <라쇼몽>이란 서적을 읽은 후 류노스케의 정보를 보는 순간, 그가 일본 대문호인 나츠메 소세키의 문하로서 있었다는 점이다. 나츠메 소세키의 글을 보는 것과 아쿠타카와 류노스케의 글을 보는 것, 더 나아가 다자이 오사무가 좋아한 류노스케의 글을 생각하면 조금 다른 괴리감이 나온다.

나츠메 소세키는 이른바 도쿠카와 쇼군 정치에서 메이지 시대로 이향되면서 그 시대에 보여진 희망찬 미래에 대해 그냥 보지 않았다. 오히려 메이지 시대가 이전의 시대보다 못하거나 비슷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메이지 시대가 일본의 문화적인 요소에서 상당히 개방적으로 변하여 진보적인 역사로 받아들일 수 있으나, 메이지유신의 도래는 다시 천황이란 이름에 대하여 신적인 힘을 부여하고, 군국주의적 이상을 만들어가던 시기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읽어본다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지만, 막상 주인공인 간게쓰 선생은 전혀 상관이 없다는 표정으로 달관한다. 그런 모습은 이전에 읽어본 니체의 <반사회적 고찰>에서 니체가 바라보던 독일의 모습이 흡사한 느낌이 있었다. 독일은 1871년 독불전쟁에서 프랑스에게 승리한다. 그때 도취된 독일의 모습에 많은 독일 국민들은 그 흥겨움에 빠졌다. 그러나 니체는 바로 그런 독일 사람들에 비판을 날렸다.

조금 다르게 나츠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선 간게쓰 선생은 엉뚱하고 미련하나, 그 모습은 영락없이 실존주의적인 모습이었다. 국가가 승리해도 나에게 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오히려 신문에서 전쟁에서 승리한 그들을 위로하기 위한 격려금 모금이라든지 혹은 전쟁에 참가한 장군이 군주의 죽음을 듣고 자살했다는 게 과연 자신과 무엇인가 말인가? 라는 의문을 남기는 것이다. 근대국가에서 일본은 근대사상에 입각한 게 아니라 단지 군국주의적인 요소로서 이향한 것이다.

근대국가에서 국가의 주체는 국민이고, 그 국민은 이성과 자율적인 선택에 의해 국가라는 조직을 운영해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아는 근대화란 이름에서 근대사상과 철학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근대화란 이름이 진행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차라리 근대사상에 입각한 국가적 체계는 무참히 살해된 1871년 파리의 시민, 꼬뮌들이라 볼 수 있다. 시민 내지 국민이 주인이 된다는 점은 그들의 표현과 의사전달에 대한 자율성을 부여한다. 일본의 대문호들이 나오던 시기에 그런 일본이란 국가를 보면 그들이 추구하던 문학적 모습을 보면 일본이란 국가가 추구하던 방향이란 전혀 다르다.

문학이란 것, 혹은 예술이란 것이 현실에 대한 강한 비판과 성찰을 요구해야 하던 것이 더 이상 진행할 수 없게 되었다. 나츠메 소세키의 비판적인 성찰이 이루어지는 것은 사회적인 구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사회적인 변화에 어느 개인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개인의 이야기로만 진행된다. 하지만 계속 읽는다면 그 사회에 놓인 개인의 입장에서 그 시대에 살아가던 사람들의 모습과 사회의 모습에 대해 나츠메 소세키는 분명 일본이란 사회가 더 좋아지지 않았다는 점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나츠메 소세키의 문하에 들어간 류노스케는 어떠한가? 류노스케의 작품을 읽다보면 처음과 끝에 대한 설정이 전혀 다르다. 이른바 보통 사람들이 즐겨쓰는 말인 기승전결, 문학에서 내러티브라는 것에서 그의 작품은 서사전개가 전혀 일반적이지 않다. 시작과 끝의 방향이 전혀 다르거나 또는 이야기의 진행이 긴장감을 이끌어 가는 것처럼 보이나, 결말은 너무 싱겁고, 때로는 전혀 엉뚱한 설정으로 들어간다. 혹이라면 역자의 후기처럼 <덤불 속>이란 작품처럼 가려진 공간에서 서로 다른 이야기로 인해 이야기의 본질이 흐려지는 경우도 있다.

류노스케의 대표작품인 <라쇼몽>, 처음에 내가 <라쇼몽>이란 작품을 들어본 계기는 계명대학교 영화학과 서정남 교수의 <영화서사학>이란 도서를 접하면서부터다. 이른바 몽타주 기법에 대한 연구로서 혹은 다양한 영화이론을 독학하면서 <라쇼몽>을 알게 되었다. 그런 <라쇼몽>이 일본 거장감독인 구로자와 아키라에 의해 만들었지만, 막상 류노스케의 <라쇼몽>과 구로자와 아키라의 <라쇼몽>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설정한 것을 알았다.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은 사실 류노스케의 <덤불 속>을 토대로 이야기를 구성한 것이었다. 아직까지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을 감상하지 않았으나, 적어도 류노스케의 <덤불 속>과 그 <덤불 속>이 실린 <라쇼몽>을 읽으면서 류노스케의 소설세계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라쇼몽>이란 어느 절망적인 시기에 주인에 의해 쫓겨난 하인이 어느 노파의 모습을 보고, 자신이 산적이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상대방이 다른 상대방의 것을 취한다면, 나 역시 그 상대방을 취하는 것이 문제없다는 것에서 인간의 본질적 요소를 보여준다.

그런 빼앗고 빼앗아가는 구도는 생명이란 이름이 새겨진 나생문(羅生門, 라쇼몽의 한자어)에서 인간의 윤리와 현실적 상황의 대립을 보여준다. 여기서 인간은 윤리보단 현실을 선택하나 아이러니하게도 최소한 산적이 된 하인은 노파의 목숨을 훔쳐가지 않는다. 후기 역자의 말처럼 주변에 시체들의 몸에는 옷이 입혀져 있었고, 그 중에 여자도 제법 있었기에 노파는 그 여자시체들의 옷을 입고, 그 여자의 머리를 뽑아 가발을 만들어도 되기 때문이다. 물론 하인의 도적질은 문제되나, 노파의 행동 역시 윤리적으로 용납하기 어렵다. 그러면서도 노파는 자기가 어느 여자의 머리를 뽑으면서 그 여자의 행동을 비난하는 모습이 나온다.

마치 끝도 없는 비난과 그 비난에 대한 응징의 도적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이 나온다. 아마 일본의 당시 모습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자본주의 경제구조에서 인간들은 타인의 것을 빼앗아야 자신에게 부가 증가되고, 그런다고 하여 그 남을 것을 빼앗는 게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지만 분면 다른 방식으로든 그 문제점이 있다. <라쇼몽>이 류노스케의 첫 작품이고, 나츠메 소세키 문하시절에 내놓은 것이라면 충분히 나츠메 소세키의 영향력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현실에 대해 다른 모습으로 바꾸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라쇼몽>과 다르게 다른 작품들은 초현실적인 요소로 보여주거나 혹은 인간이 현실에서 엉뚱한 착각을 하는 모습들을 다룬다. <덤불 속>은 어느 남자의 죽음에서 목격자와 가해자 그리고 다른 피해자의 진술이 모두 다른 것처럼 진실은 항상 다른 곳에서 숨어 있었다. 죽은 남자의 혼령이 무당에 의해 나올 때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전혀 다른 전개로 흘러가는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세계에 있어도 전혀 다른 이야기와 증언이 흘러가면서 우리는 현실에 대해 일관적인 비판으로 대하는 게 아니라 계속 돌고 도는 것이다.

모든 작품이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작품에는 항상 결론이 흐지부지 하거나 또는 싱겁게 끝나거나 도대체 작중 인물이 무엇을 말하고 전달하고자 하는지 제대로 전개하지 않은 것들이 많다. 이것은 곧 현실에 대하여 용린을 건들지 않겠다는 점과 같을 것이다. 현실의 이야기보단 환상과 괴이한 상황의 연출은 현실로부터 도피다. 하지만 그 도피는 암울한 시기에 살아간 지식인들의 숨이 막힌 우울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우울한 상황이 류노스케의 글이 되었던 것이다. 현실을 벗어나 전혀 다른 결말과 결론, <덤불 속>과 <라쇼몽>에 있었던 자들은 <덤불 속>과 <라쇼몽>의 등장인물들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속에는 현실에 살았던 사람들이 있었다. 단지 그들은 그 속에 나온 주인공들처럼 한 치 앞을 알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라쇼몽>의 형태는 21세기에도 진행 중이고, <덤불 속>에는 아직 우리들이 살아있다. 현실을 외면한 그의 현실에 대한 느낌이 그의 작품에서 숨 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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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 신해철 - 신해철 유고집
신해철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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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31일, 2014년 마지막 날에 내 사무실에 신해철 유고지 <마왕 신해철>이 도착했다. 퇴근시간이 다 되기 전 아주 아슬아슬하게 말이다. 신해철의 유고지가 도착하는 아침 나는 사무실로 출근하면서 버스 안에서 왠지 가슴이 아리는 노래를 들었다. 전설적인 락뮤지션, 브리티쉬 하드락에서 절대영역인 Led Zeppelin의 노래였다. 그들의 4집인 stairway to heaven이란 곡이 내 귀에 꽂힌 이어폰에서 흘러나왔다. 신해철이란 이름이 이 세상에 더 이상 실체적으로 존재하지 못한 날, 6시 배철수 음악캠프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배철수 씨는 신해철의 죽음에 아무런 말도 이어가지 못한 채, stairway to heaven이란 곡 하나로 모든 심정을 답변하였다.

 

천국으로 가는 계단, 그곳에 가는 방법은 황금이 있어야 하는가요? 하지만 천국으로 가는 계단은 영혼과 자연에 대한 그 자체라는 것이다. 천국에 가는 것은 결코 돈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곳에 갈 수 있는 영혼과 자연적인 요소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해철의 죽음은 천국으로 가는가? 지옥으로 가는가? 아직 죽지 않아 뭐라 말할 수 없다. 아니 나는 영혼의 존재를 믿을 수 있어도 종교는 없다. 단 이것만 말하고 싶다. 그가 가는 곳은 그가 어린 시절 육교 위에 만난 작은 친구 병아리 한 마리가 날고 있는 곳으로 가는 곳만은 분명하다.

 

아니라면 그가 2달 동안 집안에서 은둔하며 술로 보내게 만들었던, Mr. Trouble의 곁에서 서로 웃으며 막걸리 한 잔을 소박하게 나누어 마실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 마음이 솔직히 아팠다. 신해철과 마지막으로 같이 방송작업을 했던 진중권 교수가 신해철의 죽음을 듣고, 안타까움과 그리움의 글을 남겼다. 진중권 교수가 죽은 자를 위해 저술한 도서로 몇 권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 기억나는 것은 <레퀴엠>, <이런 바보 또 없습니다 아! 노무현>이었다. 첫 번째 책에는 진중권 교수가 군대시절에 의무병으로 근무하면서 실제 겪은 이야기를 토대로 진행된다. 죽은 병사의 사체, 그들을 보며 통곡하는 어머니, 그의 입에서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욕이 나온다.

 

<이런 바보 또 없습니다 아! 노무현>에서 2009년 5월 23일에 서거한 노무현이란 한 전직 대통령에 대한 글은 참으로 침착한 글이었다. 물론 권력이란 피를 뿌리는 잔혹한 결말에서 역사적인 인용은 아직도 “역사는 2번 반복된다. 1번은 비극으로 1번은 소극으로”라는 것처럼 노무현의 죽음은 아직도 야만적인 한국의 정치적 현실을 통감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이와 다르게 <마왕 신해철>에서 보인 진중권 교수의 글은 상당히 인간적이었다. 2007년 신해철이 갑자기 진중권 교수에게 전화 와서 해철이라 인사하고, 서로 만나 의기투합하여 새벽까지 술을 마신 것에서 두 사람은 과연 언제 친구가 되어도 어색하지 않을 사이였다.

 

그런 신해철의 죽음에서 진중권 교수의 글이 인간적 요소가 돋보이는 이유는 아마 인간 신해철이란 남자가 가진 진정한 맛이었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보다 더 아련한 맛이 그의 글에서 나왔다. 하지만 왠지 신해철의 죽음은 너무 아련했다. 신해철은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후 3년 동안 거의 폐인 비슷하게 지내다 3년이 지난 후 그의 추모앨범에서 <Goodbye, Mr. Trouble>이란 곡을 만들었다. 강헌 음악평론가가 이야기한 것처럼 이제 신해철이 <Goodbye, another Mr. Trouble>로 되어야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고 나서 2달 동안 술만 마시고, 그의 추모하는 공연에서 삭발을 하던 신해철은 카리스마를 모조리 증발한 것처럼 비참해 보였다.

 

진중권 교수의 <레퀴엠>에서 2003년 이라크 파병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싣는다. 신해철 역시 파병에 대해 비판했다. 하지만 2002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지지하고, 2009년 그의 죽음에 안타까움만 비추었다. 이제는 노무현 대통령과 신해철을 그리는 사람들에게 그 몫이 오히려 더 무겁게 다가왔다. 신해철 그는 내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들어왔던 뮤지션이고, 독설가다. 그의 방송인 고스트 스테이션, 마왕이란 별명, 넥스트 앨범과 싱글앨범 등은 어린 시절 나와 형의 추억이 담겨있다. 어른이 되어가면서 ‘도시인’이란 곡과 같이 회색으로 가득한 도시의 고독에서 내 인생을 바라본다.

 

그리고 ‘나에게 쓰는 편지’처럼 내 자신이 원한 길과 미래 그리고 지금을 바라본다. 그의 노래는 언제나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게 하고, 지금의 현실을 비판한다. 노래라는 것이 정말 시와 같은 아름다움으로 혹은 거친 폭풍처럼 다가온다. 모든 신해철의 노래와 음악을 들은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음악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말하며, 언제나 같은 것만을 강요하는 대중음악의 틀을 돌파한다. 그런 점에서 음악이란 것만큼 그 사람에 대해 잘 나오게 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인간의 감정은 시각적 효과보단 청각적 효과에 의해 더 자극된다.

 

내 귀를 자극하는 사운드에서 지금 들어도 좋은 그의 감각이 여기서 멈추어 버린 것은 나에게 큰 허탈감이다. 누구와 다른 생각과 삶 그리고 선택을 하던 신해철의 유고란 바로 독특한 한 인간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본다. 세상을 보는 것에서 진정 제대로 보는 인간들이란 그 사회 안에서 충실하게 살아가는 인간이 아니라 그 인간의 틀에서 벗어난 특이영역의 존재라고 한다. 세상의 법칙을 발견하는 자들은 대다수의 인간들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외부로 방황하는 자들이라 할 수 있다. 신해철의 음악은 방황적인 요소가 많다. 특히 넥스트 시절의 음악은 비판으로 가득한 대한민국 보고서라고 말할 수 있다.

 

부조리한 현실 모순으로 가득한 오늘, 그는 그런 것들을 노래로 표현했다. 사랑의 시작과 이별의 아픔이란 노래도 좋을 것이나, 그것만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예술이란 현실을 왜곡하는 것으로서 현실의 어긋남을 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로테스크한 모양으로 존재하지 않은 현실이라도 그것이 그로테스크한 것이란 사실은 알아야 한다. 신해철이 가진 신념은 그의 인생에서 보인다. 항상 뭔가 파장을 일으키고, 자신의 소신대로 살아가고, 그런 골 때리는 방식은 다르게 생각하면 그가 생각하는 바가 상당히 논리적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한국사회는 어느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의 원인에 대해 “왜?” 내지 “이게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닌가?”라는 말을 싫어한다.

 

모두 꿀이 아닌 쓰디쓴 가루약을 억지로 삼킨 어린아이의 표정처럼 인상이 흩어져 있다. 게다가 핏대가 올라와도 다시 넣어야 한다. 가루약이 아무리 써도 다 삼키고 조용히 입을 다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해철이 지적한 그런 내용들은 현실을 돌아보면 정말 맞는 말이다. 예전에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에서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 라는 주제에서 인간의 생존에 대해 말한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빵”이지만, 그만큼 필요한 것이 “장미”라는 것이다. 인간은 “빵”만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장미”라는 즐거움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인생의 장미는 먹고사는 것이 해결되어야 하겠지만, 그것만으로 인간은 살 수 없다.

 

언제나 같은 일만 반복되고 살아가는 것은 상당히 지루하고, 그 자체만으로 고문이란 점이다. 삶의 여유나 의미 없이 아무런 목적도 모른 채 살아가는 것은 행복하지 못하다. 단지 자신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즐기는 것은 무리일 듯하다. 노는 것도 어느 정도 체력이 있어야 하니 말이다. 인간이 사는 이유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다. 행복의 조건에서 러셀은 흥분이라 한다. 흥분의 조건은 여러 가지 조건과 동기부여가 존재하겠지만, 결론적으로 인간은 정체된 삶으로 살아갈 수 없다. 즐기는 것은 돈이 있고 없고가 아니라 단지 자기가 행복을 찾고 싶은가 아닌 것인가? 라는 점이다.

 

인간마다 주어진 행복의 조건은 다르다. 그러나 행복을 바라는 인간의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이른바 꼰대와 자잘한 관습에 얽매여있다.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하지만 여기저기 쇠사슬에 묶여 있다. 자기가 남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자도 사실은 그 사람들보다 더한 사슬에 묶인 노예이다."라고 한다. 우리는 바로 그런 사슬에 의해 우리를 옭아매고 있으며, 그런 사회를 바라는 꼰대들은 더 심각한 사슬로 묶여 있다. 되지도 않을 논리와 관습에 부조리는 하나의 정당성으로 지탱되며, 그것을 논하는 것은 강력한 터부로 되어 결국은 인습의 칼날이 되돌아 오는 경우도 종종 있다.

 

따라서 신해철의 발언은 기존 사회의 터부에 대하여 강력한 반발을 보여준다. 위에서 천국으로 가는 계단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나, 돈으로 살 수 있다고 말한 중세유럽 교회의 면죄부가 현대 한국의 기복신앙과 변태적으로 결합한 종교에서 재탄생되고 있다. 인간의 가치란 그저 돈과 권력에 휘말리고, 그 아래 있는 자들은 밟힌다. 그래서 그의 노래 중에 <money>가 있지 않은가? 또한 성적인 부분에 대해 크게 공감하는 바이다. 남자인 나라도 부끄럽고 혹은 여자라도 생각할 점이 있다.

 

남자들은 되는데, 여자들은 안 되는 이유에서 기존 조선시대 인조, 선조 머저리 왕들 옆에서 권력만 탐내는 사대부들의 썩은 유교정신이 아직도 이어진다. 뭐 한국은 조선의 후대이고, 나 역시 조선 사대부집안의 후손으로 본다면 기가 막힐 지경이다. 그런 나쁜 것만 계속 유지한 채 조선 이전에 자유분방한 인간상들을 모조리 폐기한 것에서 전통을 지키는 것이 과연 지키는 것인가? 그저 꼰대를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래서 어느 높은 자리에 있던 분은 여자의 몸을 만지면서 한다는 말이 딸처럼 보여서 라고 말하는 게 아닐까?

 

어째든 치졸한 한국남자만큼 또한 속 좁은 여자들에 대해 지적도 좋았다. 한국에서 여성들이 수난당하고 계속 힘든 것은 맞으나, 남자도 당하고, 그 남자들도 힘없고 가진 게 없는 남자라는 점이다. 여성들이 더 불쌍한 점은 인정한, 그런다고 힘없는 남자들이 힘들지 않았다는 식은 말하지 마란 것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에 유배 올 때, 갈밭마을 아낙네의 슬픈 비명과 눈물을 보았다. 아직 배냇물도 마르지 않은 갓난아이, 이제 해골조차 남지 않을 것 같은 시아버지의 군포세를 내지 못한 이유로 자기들의 유일한 재산인 소가 관청으로 끌려갔다. 그것도 모자라 남편은 아이를 만든 자신의 죄를 탓하며 칼로 그의 남근을 베어낸다. 소나 돼지 불알 까는 것도 불쌍타 하는데 하물며 우리 백성은 어떠랴?

 

나그네 글방에서 책을 읽는 것에서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던 다산 선생님의 마음만 생각하면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불쌍한 사람들은 자기들만 아니라 불쌍한 입장에 놓인 사람이란 점이다. 종교시설에 가서 돈을 바치고 기도할 바엔 차라리 불쌍한 사람들이 모인 고아원이나 노인정에 가서 위로해주고, 혹은 기부금을 위탁하여 그들의 생활을 좀 더 개선해주는 게 인간의 덕목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강헌 선생님이 한국의 마지막 르네상스 뮤지션이란 말이 나온 것은 그렇다. 인문소양, 우리에겐 인문학적 지식, 그 지식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지성과 감성, 더 중요한 양심이 없는 게 비극이다.

 

신해철의 독설, 물론 100% 공감할 수는 없겠지만, 그가 날린 비판은 우리 사회의 비틀림을 더 비틀어주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처가 골며, 상처를 찢어내어 고름을 짜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찢기 전에 만지는 것조차 불가하니 참 답답한 것이다. 뭔가 좋아할 수 있는 것을 주지 않은 나라, 억지로 등을 떠밀려 살아야 하는 나라, 그런 나라에서 다시 자기들이 그런 행위를 하도록 만드는 나라, 연쇄적인 꼰대의 성향은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절묘한 배합이라 말할 수 있다. 웃음소리가 자연스레 나오는 게 인간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행복함의 성적표다. 그런데 우리는 웃음소리보단 근엄한 가면을 쓰기를 바란다.

 

우리의 마음을 솔직할 수 있는가?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질문은 “음악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이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음악 없이는 무슨 재미로 사냐?”라고 생각했다. 유행 따위 이미 접은 시기가 내 나이의 반 이상 넘었고, 사람 목소리보단 기타나 드럼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일까? 2014년 가요제에서 신해철 추모하는 자리에서 넥스트 밴드들의 연주를 듣다가 갑자기 다른 가수의 노래를 들으니 허무했다. 기타리스트 김세황의 기타 리프와 중간마다 사용하는 피킹 하모닉스를 들을 때마다 보컬을 맡은 가수들이 전혀 따라오지 못한 것을 보았다.

 

라이브 반주는 MR 테이프처럼 돌아가는 게 아니라 같이 호흡하는 것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음악의 묘미란 바로 다양한 악기가 같이 어울려 한데 모여 강력한 에너지로 발산한다. 그것을 통찰하지 못하면 음악이 아니라 그저 노래만 하는 것이다. 신해철은 음악 없이는 살 수 있냐고 물었지, 노래가 없이는 못 사냐는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한 마디로 꼰대처럼 가면 쓰고 근엄한 척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보여주라는 것이다.

 

또 인상 남는 것은 신해철의 기준에 모두 맞은 것은 아니다. 그가 거론하는 것에는 그의 의도로 생각하면, 여기에 대해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당시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유도하는 것이다. 내가 그의 생각을 100% 옳다고 여길 필요 없고, 물론 그런다고 하여 그를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게 아니라 서로 생각을 모아 무엇이 문제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하는 점이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그가 느낀 한국의 꼴불견 남자에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연애의 기록이 없는 것은 아니나, 단지 이에 도달할 정도로 아직까지 내 자신이 찌질군이란 점에서 말이다. 단지 아쉬운 것은 내가 아주 좋아하는 일본만화이라면 가능할 터이나 현실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내가 찌질군에 아직 가까운 것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사회의 꼰대성에서 나는 찌질군으로 통용될 수밖에 없음에서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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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02 14: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1-02 23:21   좋아요 0 | URL
아! 감사합니다. 야무님의 행복한 나날이 계속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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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스>를 읽을 동안 나는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고 있었다. 서로 다른 방향과 주제를 다룬 서적인 이 도서에서 뭔가 모르게 큰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딥스>라는 책은 실제 미국에 딥스라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치료한 경험을 정리한 도서로 아동정신 및 심리에 대한 연구, 치료 그리고 아동학에서 큰 역할을 하는 도서다. 이번에 내가 우연히 읽을 때 2판 39쇄라는 점에서 국내에서 상당히 많이 팔린 도서고, 미국을 시작하여 세계적으로 아주 큰 영향을 준 도서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이 튀어나오는 이유를 생각하자면 엉뚱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대다수 정신적, 심리적 불안을 가진 사람들은 그 시작은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마지막의 서곡에 대한 결과는 새로운 사실과 이해 그리고 판단을 요구한다. 내가 <딥스>라는 책에서 어린 소년인 딥스를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그는 저자인 버지니아 교수에 의해 치료를 받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어린아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단지 그것뿐이다.

 

그 과정에 대한 노력과 고생을 부정하거나 비꼬고 싶을 생각은 없다. 그래도 내가 이 책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는 이유는 바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어서이다. 19세기 중후반의 내용과 20세기에 후반부 정도에 있었던 실제사건은 아무런 연계성을 없을 수가 있다. 단지 내가 조금 가십감이 드는 이유란 딥스라는 아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아이를 둘러싼 환경에 대한 부분이었다. 딥스는 어머니는 외과의사이고, 아버지는 천재적인 과학자다. 가정에 시중을 드는 관리인이 배치되어 있고, 상당히 좋은 집에 사는 아이인 것을 알 수 있다.

 

즉 미국인 중에 딥스라는 아이는 그 많은 어린아이 중에 하나이겠지만, 이 책에서는 전형적으로 아메리칸 스타일이 녹아있다. 마치 미국 영화의 히어로 장르를 보는 기분이 드는 이유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아이가 있었는데, 그는 어느 우연하지 않은 실수와 사건으로 마음을 가두고 세상과 벽을 쌓았다. 하지만 어느 계기로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고, 그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영리한 아이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 대한 시나리오는 전형적인 대중영화에 나올 것 같은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진부적인 스타일, Cliche로 가득한 현실의 이야기다. 사실에 입각한 에세이적인 내용이라고 하나, 그 딥스의 결말은 영재학교로 간 똑똑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어린아이로 된 것이다. 전형적인 아메리칸 스타일이 보여주는 이야기구조다. 발단 → 전개 → 위기 → 절정 → 해소 구조가 잘 보여주었다. 물론 딥스는 처음부터 위기의 절정이었을 뿐이나 말이다. 이 책에서 보여준 내용과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을 나두고 비교한 점을 내가 말하고 싶은 이유는 딥스라는 아이가 놓인 환경이었다.

 

어린 시절 어느 화재사건에 휘말려 문밖에 나오지 못한 것에 대한 트라우마 내지 어머니가 원하지 않은 출산에 대한 후회가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다고 하더라도 그의 집안은 충분히 부유했고, 그가 가진 마음의 상처만 없다면 아무 문제가 없는 집안이었다. 그런 집안이기에 심리치료가 가능하고, 그가 원하는 것을 얻고 가질 수 있었다. <자본>을 읽을 쯤에 나는 어린 소년이 아침 6시에 일어나 밤까지 일하고 평균 노동시간이 12~15시간(!)이란 지옥 같은 환경이었고, 공장감독관이 그들을 만나 상담할 때 이미 어느 아이는 잠을 자지 못한 채 30시간 넘게 일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어두운 방에 좁은 공간에 숨 쉬기도 어려운 조건에서 열악한 환경에서 어린 아이들은 정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죽은 게 아니라 이미 육체적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딥스>를 보는 순간, 딥스보단 <딥스>라는 책에서 보이는 환상적인 아메리칸 스타일 드림이 낯설게 느껴진 것이다. 딥스는 가정환경이 어려워가 아니라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그렇게 된 것이고, 정신치료를 담당하는 A선생님으로 통해 놀이치료로 마음의 병을 고치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가 그렇게 될 수 있던 것도 충분히 가정 내에서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딥스는 만으로 6살이 되어간다. 그리고 <자본>에 있는 가여운 아이들도 6살짜리도 있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조차 잊어버린 딥스지만, 그는 그럴 기회를 찾을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한 소년들도 있었고, 그런 점은 미국 현재에도 많을 것이다. 미국에서 자신의 언어인 영어문법조차 제대로 숙지 못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 것으로 안다. 그런 조건에서 과학자 아버지와 의사 어머니를 둔 영재인 딥스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처음 책을 펴는 순간 정해진 스토리란 점이다.

 

딥스를 치료하는 방법으로 통해 다른 아이들을 치료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는 너무 위기와 역경을 극복하는 미국인(그것도 백인) 엘리트들의 화려한 부활을 제시한 것 같다. 책 속에 저자는 그런 의도를 비추지 않았겠지만, 의도와 달리 무의식 속에 깊숙하게 박힌 책에서 그런 느낌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용은 이미 시작한 것처럼 판에 박힌 이야기다. 마음을 굳게 닫은 아이가 있는데, 그는 총명하고 상상력이 뛰어나며, 그를 이해해주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와중에 어느 구원자가 나타나 그를 재기할 수 있도록 조력해주며, 그는 결국 그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사람이 되었다는 스토리에서 무엇을 더 찾을 수 있는가?

 

물론 이해하기 쉽도록 에세이 방식으로 기록한 것은 좋겠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조건이란 그 대상자의 상황과 어느 정도 수준이 맞아야 하는 점이다. 정신적으로 불안한 소년 중에 특히 후천적인 영향에서 부모의 문제로부터 시작된 경우는 대부분이다. 그런데 그 부모가 너무 일방적인 게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들었다. 부모가 하나가 없거나 혹은 멀리 일을 하러 가야 하거나, 또는 심한 병을 앓고 있든가 하는 다양한 사례 및 케이스가 필요한 것이다. 하다못해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어린 나이에 학대를 받으면서 일하는 아이도 있을 것이란 만약의 경우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나는 이 책을 처음부터 읽으면 큰 감동을 느낄 수가 없었다. 단지 나는 딥스가 말하는 언어의 아름다움에 대해 인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6살 소년이 보는 세계란 마치 시인이 아름다운 대자연을 하나의 생명이 있는 것처럼 노래하였다. 그것도 아직 완전 치료가 되지 않은 상태이고, 이제 반 정도 되는 분량에서 딥스는 아름다운 말을 구사한다. 이게 과연 보통 6살인가? 딥스는 천재적인 판단력과 탁월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게 바로 이미 정해진 운명을 가진 내용이란 점에서 내 가슴에 들어올 수 있는 여운이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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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고독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민음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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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고독>은 아직 나에게 참 먼 책인 것 같았다. 나름 신화에 대해 관심이 있고, 신화에 대한 인류학적인 고찰 역시 관심이 많다. 그런 점에서 <백년의 고독>은 신화적인 요소를 이리저리 끌어온 작품이다. 번역자의 부연설명에서처럼 길가매쉬의 모험, 오디세우스의 귀향여행, 연금술사, 성배 찾으러 가는 기사단의 여정, 영원함을 추구하는 점이라든지 더 나아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저지르는 디오니소스적인 모습이 여기에 포함된다. 그 모든 것이 복선적인 요소로서 계속 운명이 돌고 돌지만, 한편으로 너무 갑작스레 상황이 변화된다. 그 변화의 공간에서 우리는 인간이란 계속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계속 돌고 돌아 마지막에는 파멸이란 이름으로 그 마무리를 주어진다.

 

<백년의 고독>에서는 실제 저주받은 인간의 역사는 백년이 아니라 백년이 넘어 버렸다. 아마 100년의 고독을 지닌 자는 우르술라는 여인이었을 것이다. 호세 아르끼디오 부엔디아의 아내이면서 사촌인 그녀를 말이다. 어린 시절 자신의 사촌인 부엔디아계의 근친상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그녀는 남편인 부엔디아의 강력한 힘에 이끌려 마꼰도로 온다. 오게 된 동기는 남편이 마을의 남자에게 남자구실하지 못한다는 모욕을 참지 못하고, 그 남자와 대결하기로 약속하고, 그 자리에서 그 남자를 죽인 것이다.

 

시기적으로 아직 20세기 이전이고 콜롬비아 배경인 점에서 국가적인 정치체계가 아직 정비되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었고, 콜롬비아 역시 이전에 강대국에 의해 식민지로 통치 받았을 나라일 것이다. 그들은 스페인어로 된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주변에 흑인과 백인 혼혈인, 집시들, 원주민들이 있는 점을 본다면 작가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콜롬비아가 독립을 했더라도 그 이전의 역사적인 흔적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그늘이 있을 것이라 보는 것이다. 역자의 부연에서 마꼰도라는 것은 거울로 만든 환상의 도시다. 거울이란 것은 자기 모습을 보기 위해 만든 도구다.

 

하지만 거울 너머에 비추는 자신은 분명 실존하나, 거울 그 자체에 보이는 존재는 실존하지 않은 존재이고, 그 존재는 단지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는 거울 너머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기보단 거울 그 자체로 보려 한다. 거울을 보는 것은 잘 생각해 볼 점이 있다. 거울은 어둡거나 혹은 밝거나 또는 황혼이나 새벽의 언저리에서 비추어지는 모습이 다르다. 거울이 보이는 것을 다 반사한다고 해도, 그 거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정말 그 자체로 현실인지 아닌지 분간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빛을 굴절을 직접 볼 수 없으나, 거울은 빛의 굴절을 볼 수 있게 한다.

 

굴절로 어긋난 모습이 바로 우리의 진실이 아니라 어긋난 하나의 사실일 뿐이다. 사실이란 진실처럼 바로 일어난 객관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Fact일 뿐이다. 우리의 삶이란 사실과 허구의 경계에서 모호하고, 그 경계 내에서 사실이란 것은 결국 만들어진 존재이란 것이다. 만들어진 사실과 허구, 그 교묘한 눈속임 내지 은밀함이 아마 <백년의 고독>을 오묘한 세계로 인도했을 것이다. 사실주의적인 소설이란 점에서 사실주의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나, 내가 본 <백년의 고독>은 사실주의적인 요소가 너무 달랐다.

 

과장이 넘치는 표현력, 문장의 연결성이 전혀 부드럽지 못한 배치, 게다가 초과학적인 현상들은 과연 이것이 사실주의라는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때마침 사실주의적인 만화에 대해 조금 관심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 아이러니한 맛을 느꼈다. 심지어 아트 슈피겔만의 <쥐>라는 작품은 등장인물들이 모두 동물로 표현되지만, 작품의 설정과 전개에서 보여준 나치 아래의 잔혹함에서 사실주의적인 요소를 인정받았다. 즉 만화적 표현과 묘사에서 의인화로 통해 사실적이지 못한 등장인물로 통해 당시의 사실들을 표현하였기에 사실주의라는 것을 인정받은 점이다.

 

그런데 <백년의 고독>은 사실주의적 요소, 즉 당시 시대적 배경도 어느 정도 관여는 하나 그 자체가 하나의 큰 사건으로 변화하게 되더라도, 그 자체가 사건의 중심이 아니었다. 모든 중심은 마꼰도로 시작하여 마꼰도로 마무리하고, 마꼰도 안의 부엔디아 가문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비극의 탄생은 어디로부터 시작하는가?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서도 인간의 예술은 아폴론적인 것보다 디오니소스적인 요소를 더 찬양한다. 정지된 아폴론보다는 계속 죽음과 삶을 반복하여 광적인 모습으로 변화하는 디오니소스적인 요소를 말이다.

 

<백년의 고독>에선 사치와 향락적 요소에서 포도주가 자주 거론된다. 갑자기 부자가 된 부엔디아 남자는 그들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서는 그 자체의 향략을 즐기기 위해 포도주를 욕실에 부어넣고 목욕을 한다. 디오니소스가 포도주의 신인 점을 본다면, 술은 인간을 아주 기쁘게 하나, 때로는 미치게 하여 인간의 모조리 빼앗고, 차마 용서할 수 없는 일들을 만들어낸다. 디오니소스의 향기로운 포도주야 말로 인간의 그 자체를 보여주는 하나의 마법과 같은 약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마법의 약을 마시지 않고, 이미 마법이 시작된다. 번역자가 마술적 사실주의란 말처럼 마술적인 주술효과가 이미 걸린 셈이기 때문이다.

 

초대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가 자신을 모욕한 남자를 죽이고 마꼰도로 온 것은 소설의 설정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그 죽은 남자는 분명 묘안에 묻혔는데도 부엔디아 앞에 유령처럼 등장하고, 때로는 대화도 하고, 나중에 서로 화해까지 한다. 도저히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모습이 이 작품에서 하나의 설정으로 등장한다. 초현실적인 사건이 등장하는 것에서 이것이 사실주의 작품인가? 라는 의문을 가졌지만, 그런 사실주의적 요소를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면 마꼰도라는 마을을 만들고 발전시키면서 거기가 쇠퇴하는 과정을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꼰도는 콜롬비아 영토 내라면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산 속 내지 오지의 마을이다. 그곳에 온 부엔디아 가문은 마꼰도를 발전시키고 자식을 낳고, 주민들이 올 때마다 많은 도움을 준다. 따라서 마꼰도는 부엔디아 가문만의 왕국이고 세계이며, 그리고 무덤이기도 하다. 아무도 죽지 않았던 신생마을에 죽음이란 없었고, 단지 마을은 크게 성장하고, 이윽고는 집시들이 그 마을을 오게 된다. 그러면서 호세 아르까디오의 성욕, 그리고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의 모험은 점차 평화로운 세계를 혼돈으로 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혼돈은 자신들의 내부에서 온 게 아니라 다 외부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형인 호세는 세계를 돌고, 동생인 대령은 전쟁터를 누빈다. 그들의 동기는 아주 개인적인 것이었으나 그 결과는 마을을 모조리 흔들었던 사건이 된다. 그로부터 아르까디오의 죽음, 아르까디오의 쌍둥이 아들, 미녀 레메디오스 승천, 한 여자를 두고 형제가 서로 애인으로 차지하거나, 열렬한 가톨릭 신앙자인 페르난다의 시집 등에서 부엔디아 가문은 번창과 쇠퇴의 길을 걷는다.

 

발전과 쇠퇴에서 과학적 기술이 등장하는데, 가령 아주 아름답고 천사 같은 레메디오스의 죽음에서 부엔디아 가족들은 그녀의 모습이 담긴 은사진을 가진 점, 아마란따가 사랑한 남자가 가지고 온 자동피아노, 아우렐리아노 세군도가 본 기나긴 기차, 그의 딸이 결혼한 남자는 비행기를 몰았던 사람이다. 중간에도 과학의 산물이 등장하고, 문명의 발전, 그리고 자본주의 유입, 그로 인해 바나나농장 노동자의 파업과 죽음이 비극처럼 등장한다. 단순히 부엔디아의 가문의 발전과 몰락은 마꼰도의 역사이면서 한편으로 콜롬비아 역사를 비극적으로 보여준 점이다.

 

오히려 그런 비극이 중심이 되는 게 아니라 부엔디아 가문이 겪은 일 중에 하나로 보여주는 사건이기 때문에 더 큰 인상을 남기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대령의 전쟁이 참전한 이유는 자유파와 보수파의 가치관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단지 모든 집이 하늘색으로 칠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찬성하지 않은 점이었다. 하지만 그가 벌인 전쟁은 분명 내전의 기나긴 슬픈 역사이었을 것이고, 아우렐리아노 세군도 겪은 200량이 되는 기차는 내전에 이어 노동운동의 슬픈 비극일 것이다.

 

제대로 임금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항의하자 군인들이 와서 무참히 사격한 점에서 마꼰도 마을은 이제 삶이 존재하는 장소가 아니라 죽음이 존재하는 곳으로 변한다. 디오니소스적인 세계관에서 봄이 부엔디아가 처음 올 때라면 아우랠리아노 세군도는 죽음으로 변해진 가을이고, 마지막 정점은 고모와의 근친상간으로 가문이 파멸되는 아우렐리아노의 슬픔에서 볼 수 있다. 근친상간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욕망, 외부에서 오는 이방인에 대한 배척(메메와 마우라시오 바빌로니아), 다른 여자에 대해 서로 집착하는 형제들,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이 과연 그렇게 만든 것인가?

 

그렇다면 콜롬비아의 역사에서 100년이란 시간에서 계속 이어지는 마꼰도 부엔디아 가문은 영원히 그 저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고뇌로 끝나야 하는가? 첫 단추가 틀리면 뒤에 단추도 어긋나고, 심지어 더 어긋날 수 있을 것이다. 어긋난 운명에서 다시 시작할 수 없음을 알게 된 아우렐리아노는 그 비참한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방에 혼자 있는 것으로 마무리 짓게 된다. 근친상간의 욕망에서 초대는 사촌이었으나, 끝은 고모와 아들이다. 하지만 고모는 어머니와 형제이기 때문에 어머니 같은 존재라고 볼 수 있다.

 

아마란따 우르슬라는 할아버지의 자손, 즉 고모이면서도 자신의 어머니와 형제인 이모이다. 고모와 이모인 아마란따 우르슬라는 결국 자신의 아들과 같은 아우렐리아노와 몸을 섞게 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왕>에서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를 물리친 이유로 아름다운 여왕 이오카스테와 결혼하고, 2남2여를 슬하에 두나, 자신의 아내가 어머니란 점을 알고, 두 눈을 찌르고 평생 방랑한다. 오이디푸스의 죽음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2남2여 모두 비참한 죽음과 결말을 맞이한다. 근친상간이란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비참한 운명으로 보여주는지, 또한 그런 근친상간되도록 만들어내는 배타성이 결국 인간은 계속 돌고 도는 시간지옥에 떨어뜨리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의 삶에 두고 보면, 우리는 근친상간을 하지 않는 나라라고 해도, 아니 근친 적으로 다수 촌수가 멀다면 인정하는 사회에서 가족을 구성하는 점에서 배타적인 요소는 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백년의 고독> 못지않은 사회적 갈등과 배타적 관계로 멍이 든 것은 분명하다. 그 결말은 부엔디아의 가문 몰락처럼 우리 역시 그런 배타적인 집단주의에 말려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다. 제목이 일단 <백년의 고독>이란 말처럼 인간의 수명은 현재 대략 80년 이상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100년 이상을 살은 사람도 나온다. 100년 어찌 보면 그것은 인간이 살 수 있는 수명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 이상을 살아가든지 아니라면 그 이하를 살아가든지 항상 외로운 법이다. 그 외로움은 연애적인 요소도 다분할 것이고, 아니라면 인간적 요소로도 충분히 그럴 것이다. 대령의 인생에서 그는 혼자만의 고독을 찾아 방에 은거하였으며, 많은 가족들도 어둠에서 고독을 영원한 반려로 삼았다. 외로움이 싫은 것이 인간이나, 그 외로움만이 자기에게 남은 것임을 알아낸 자들의 말로가 오히려 우리의 모습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나 역시 고독을 느낀다. 고독이야 말로 실존주의자 내지 혹은 루소가 자기의 존재성을 확인하는 시작이나, 그 고독이 지속되면 결국 자신의 존재를 망각하게 될지 모른다.

 

인간이란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기 위해 자신이 육체적으로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것만을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존재로서 통해 자신을 볼 때 알 수 있다. 사회적 관계가 바로 그런 관계적인 요소이므로 고독에게 선택된 인간들을 보자면, 그들은 영원히 사람들과 이어질 수 없는 벽으로 가려진 존재다. 하지만 고독이 사람을 선택하든, 사람이 고독을 선택하든 그 기점에는 자신의 의지보다는 원하지 않은 운명이나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불운에서 벗어나는 것은 바로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바꾸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항상 그대로라면 항상 그대로 비극은 이어진다. 잘못된 점이 있으면 분명 문제가 발생하는 법이다. 그것이 다시 비극으로 몰아넣고, 고독의 영원으로 빠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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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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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 가리 아니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읽는 순간 작가의 이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본래 로맹 가리는 유명한 문학 작가이도 하고, 연극 각본가이도 하며, 또한 뛰어난 외교관으로 활동한 우수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2차 세계대전에서는 프랑스 공군대위로서 하늘을 길동무를 삼아 전장을 누비었다. 그런 인물이 왜 굳이 에밀 아자르라는 인물로 대중에게 얼굴을 비추었는가? 나는 그의 책은 잘 알지 못했고, 실제 로맹 가리라는 인물이 있었다는 것만은 알아도, 그의 작품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우연히 로맹가리 아니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읽는 순간, 그는 로맹 가리라는 실존적인 인물이었으나, 적어도 이 책에서는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나오려는 것은 분명했다.

 

로맹 가리라는 이름으로 어떤 식으로 글을 쓰고, 어떤 내용을 다루고, 그것으로 통해 무엇을 전달하는지에 대해 생각하면 지금으로도 알 수 없다. 단지 소개 편에서 그가 러시아에서 태어나 프랑스에 온 이주민이고, 이후 평생 프랑스의 시민으로서 살아간 점이다. 시민(市民)이란 이름은 서울특별시나 혹은 부산광역시 또는 성남시에 사는 시민인 citizen이기보단 이른바 peoples라는 시민이 어울릴 것이다. 그가 살아온 업적과 그 업적에서 보이는 그의 이야기가 말이다. 하지만 내가 로맹 가리보다는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에 시민이란 peoples이 어울리는 이유는 바로 <자기 앞의 생>이란 책이 그가 바로 시민이란 점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화려한 로맹 가리는 모르겠다. 단지 나는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에서 보인 그의 작품세계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면서 생각난 영화 한 편이 있었다. 프랑스 빅토르 위고 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이다. 그 영화에서 나오는 판틴이란 아름다운 여성이 떠올랐다. 물론 <자기 앞의 생>에서 판틴이 될 만한 여자가 나오지 않는다. 차라리 판틴 같은 여자가 죽은 후 그녀에게 남은 아이 같은 소년 1명이 나온다. 단지 그 소년은 안타깝게도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을 만나지 못했을 뿐이다. 따라서 이 책은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 낭만주의 요소를 제외하여 진행한 작품인 것 같았다.

 

낭만주의 문학에서 벗어나 보이는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는 사실주의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자기 앞의 생>에서 보인 작품은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보다는 차라리 혐오스럽고 지저분하고 비천하고 한탄스러운 사연들만 쏟아져 나온다. 문학이 왜 예술로서 인정받는 것인가? 프랑스에서 9가지 예술 중에 해당하기 때문에? 아니면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예술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여신 muse의 9자매에 해당되기에? 혹은 그 이상이라도 있는 것만은 아닌가? 삶이란 것은 언제나 우리에게 기만과 속임수를 강요한다. 눈앞의 현실을 항상 다른 것으로 대체하여 회피하려 하기 때문이다.

 

<자기 앞의 생>에서 보인 인간의 삶은 10살로 알았던 모하메드 아니 모모라는 소년이 알고 보니 14살이란 깨닫는 아이러니한 현실에서 우리는 우리가 항상 피해온 이야기 내지 또는 알고 싶지 않거나 우리와 상관없는 이야기를 마주하고 있다. 인간에게 전해주는 불편한 기분과 마음속에서 움트는 어두운 기분이어야말로 우리에게 항상 새로운 것을 알게 해준다. 원래 있던 것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평범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자기 앞의 생>의 등장인물들은 그 사람들 나름대로 분명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 만큼 우리는 이 소설에서 전해주는 이야기 자체가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보여주기에 우리의 평범한 인간들의 평범한 가치관으로서 도저히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기 앞의 생>에서 보여준 작품세계에서 작가인 로맹 가리, 아니 에밀 아자르는 불평등한 세계와 부조리한 사회, 그리고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계속 그 공간속에서 살아가면서 보여주는 일상적인 부조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던져준다. 세상은 언제나 아름다운 것들로 채워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는 우리의 눈을 현실을 보지 않고 있다. 우리는 항상 화려한 영상만이 나오는 스펙타클의 사회의 열렬한 소외된 군중이기 때문이다.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인가? 내가 왜 에밀 아자르가 시민 peoples로서 보려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자신이 러시아 출신이면서도 프랑스 시민이지만, 프랑스 시민으로서 살아갈 수 없는 이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이 시작되는 배경은 1970년 전후의 프랑스다. 프랑스의 지리를 잘은 모르나 정상적인 사람들이 살기보단 범죄자, 불법이민자, 마약중독자, 위조된 신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이 소설 주인공 모모는 바로 그런 부조리하고 불평등한 세계에 살아가는 소년이다. 그의 출생은 모른다. 단지 그가 이슬람교의 교인으로 살아있다는 것이고, 그의 출생민족처럼 그는 이슬람교의 문화를 다행히 익히고 있었다. 눈이 아주 나쁘나 아마 이슬람민족의 국가에 가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하밀 할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밀 할아버지는 분명 이슬람문화를 알고 있는 사람이지만, 그는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즐겨 읽었으며, 게다가 건강이 너무 좋지 못할 때 모모를 두고 빅토르라고 말할 정도였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는 1789년 7월 프랑스대혁명이 1794년 로베스피에르의 테르미도르 반동에 의한 실각, 이후 1799년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로 인해 다시 민주주의국가에서 왕정국가로 돌아갔다. 그러면서 장발장이 살던 세계는 온갖 가난과 질병 그리고 비참함으로 들끓는 세상이 되었다. 비참한 사람들이란 <레미제라블>, 그러나 우리가 그 비참함을 다시금 생각해야 할 점은 비참함은 자신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 이어져서 자신의 아이들까지 이어지고, 또 그 아이들은 자신의 먼 미래의 아이들까지 이어진다.

 

작가 이름이 에밀 아자르라는 점에서 그가 왜 에밀이란 이름을 사용했을까? Emile이란 이름은 장 자크 루소가 1762년 만든 아동교육철학도서 <Emile>과 같은 철자다. 정말 로맹 가리가 그런 것을 생각하여 이름을 지었고, <자기 앞의 생>에서 빅토르 위고의 책을 생각했다면 그는 분명 인간의 불평등한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자기 앞의 생>은 분명 가상의 인물이기도 하겠지만, 실제 있었던 사건들과 사람들을 토대로 만든 소설일 것이다. 이슬람문화권인 모모로 통해 이런저런 프랑스의 역사적 사실을 말해주는 부분에서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프랑스가 식민지로 지배하던 알제리란 국가가 나오면서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서도 뫼르소가 살인사건을 저지른 배경조차 알제리 해변이었다. 알제리는 프랑스에 식민지로 속해 있었지만, 한편으로 독립을 위해 프랑스와 갈등을 빚은 바가 있었다. 프랑스 대표적인 지식인이던 장 폴 사르트르는 알제리가 자신의 국가를 위해 독립전쟁을 벌인 것에 대해 프랑스인(그는 나치가 프랑스를 지배할 때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다)이었으나, 알제리의 독립을 지지했다. 로맹 가리가 진실로 알제리의 독립을 지지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적어도 주인공 모모가 이슬람문화권 사람인 점에서 알제리 사람일 것이며, 혹은 알제리든 유태인이든 세네갈이든 많은 외부사람들에 <자기 앞의 생>에 다룬 것처럼 적어도 프랑스 내의 인종차별 내지 또는 부조리한 현실을 보여주려 한 것은 분명하다.

 

나치 수용소에 갇히어 평생 히틀러의 초상을 침대 아래 숨겨놓고, 자신이 나약해질 때마다 히틀러의 얼굴을 보는 로자 아주머니를 보면서 왜 그들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인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일단 에밀 아자르의 <Emile>이니, <에밀> 혹은 루소의 많은 사상중에 <사회계약론>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그 누구도 타인을 돈으로 살 수 있을 만큼 부유해서는 안 되고, 그 누구도 자신을 팔 수 있을 만큼 가난해서도 안 된다."

 

왠지 내가 적어 놓고도 무안해지고 조금 가슴 아픈 말이다. 루소는 식량이 가격이 저렴한 이유는 인간에게 가장 필요하기 때문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가격이 저렴한 것은 도시의 사람들이란 점이다. 인간만큼 가장 필요한 존재가 없기에 그들은 언제나 비참한 인간이 되어야만 했다. <자기 앞의 생>에서는 루소의 가르침이 그대로 드러나는 책이라고 생각되는 이유는 모모의 어머니는 정상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고, 그녀는 자신의 몸을 파는 창녀였던 것이다. 창녀들의 역사를 보면 고대사회로부터 시작했다.

 

하지만 적어도 고대사회에서 여성은 자연과 같이 보았기에 그녀의 다산성을 존중하고, 제임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를 보면 북유럽 고대부족 중에 신을 모시는 사당에 일하는 무녀들은 사실 창녀라는 점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몸을 팔아 신에 대한 조공을 받쳤으며, 부족국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성(性)이란 단어를 성(聖)이란 말로 장난 칠 수 있다. 아마 창녀에 대한 문화적 차이가 발생한 것은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넘어간 것에 대한 것이라고 보인다. 왜냐하면 수렵을 하던 시기에 식량이 충분하므로 여자들도 몇몇 무리지어 충분히 삶이 가능했다. 풍부한 식량과 자원에서 한정된 식량과 농경사회를 근간으로 하는 도시국가체계는 전쟁이란 필요적인 문명을 만들었다.

 

따라서 과거 성생활은 단순히 인류생명의 연장이라면 현대로 오게 되면서 노동력을 위한 재생산, 그리고 노동력이 목적이 아니라면 쾌락을 위한 목적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문제는 성행위 후 임신될 경우다. 남자는 한 번 사정하면 끝이지만, 여자는 상황이 다르게 된다. 아이를 가지게 되고, 지금과 같이 피임기술 내지 낙태기술이 발달한 것이 아니다. 아이를 낳게 되면 버리거나 혹은 자신이 키워야 한다. 문제는 그대로 빈민구제소나 고아원에 위탁하는 어머니도 많지만, 이에 다르게 아이와 다시 만나 자신만의 인생을 살기 바라는 여자들도 있었다.

 

모모의 어머니는 이미 죽었지만, 모모 주변에 있는 아이들은 어머니가 계속 창녀일을 하면서 돈을 보내오고, 그 돈으로 로자 아주머니는 보육한다. 모모가 사는 동네 경찰서장의 어머니도 그런 인물이었고, 경찰서장은 로자 아주머니로부터 자라났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법의 체계를 수호하는 사람이 알고 보니 법의 체계로부터 벗어난 사람에게 은혜를 받았고, 이제는 그 은혜를 생각하여 로자의 행위를 눈감아준다. 불법체류자에 위조증명서, 게다가 창녀들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여자로 국법에 정해져있다. 하지만 어머니들은 아이를 위해 살아가고, 그들과 같이 생활할 수 있는 미래를 꿈꾼다.

 

인간에게 주어진 꿈과 미래란 과연 지금의 고통과 현실조차 감내할 수 있는 희망의 메시지인가? 아무튼 그녀들이 보여주는 모성애에 마음이 참 안타깝게 느꼈다. 지금은 물론 다르겠지만, 당시 인간들에게 자신이 수익으로 할 수 있는 직업이 매우 한정적이고, 그러나 딱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인간의 비참함에서 경제적 빈곤은 계속 이어져 간다. 굳이 마르크스의 <자본>을 들이대지 않아도, 그것은 알 수 있다. 자유주의 철학에서도 경제적 성공은 학력이 필요한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알 수 없는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모모는 어머니가 죽은 것을 알았고, 아버지조차도 발작 증세를 가진 범죄자였다. 그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그나마 자신을 돈 때문에 맡았지만, 이제는 오직 자신의 가족으로 여기던 로자 아주머니만 남았다. 로자의 모습에서 많은 것을 생각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안락사라는 제도를 찬성한다.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게 해주는 것이 오히려 인간으로서 그가 살아가는 마지막을 주는 선물이라 생각한다. 복잡한 병동에서 고통스러운 매일매일 하루를 맞이하는 것도 모자라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산송장처럼 살아있는 것은 가혹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로자는 불법체류자고 위조된 증명서를 가지기에 병원에 가는 순간 모모는 바로 빈민구제원에 들어가야 한다.

 

프랑스의 빈민구제원이 어떤 공포의 대상인지 모르지만, 모모는 거기만큼은 가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로자를 하루 빨리 생을 마감하는 게 로자를 위한 것이라 보았다. 살아있을 희망도 없이 고통스럽게 약물에 의존하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만약 병동에 누워있는 사람이 사회적으로 모든 것을 보장해준다면 어느 정도 고려할 수 있으나, 적어도 내가 살아있는 사회에서는 환자 본인이나 가족들에게 큰 고통과 상처다. 가족 하나가 불치병이나 심한 중상에 빠지면 그 가족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큰 부담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미제라블>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책을 보면 모모의 행동이 그래 옳은 것만이 아님은 볼 수 있다. 길가에 물건을 훔치거나 로자 아주머니에게 마약을 놓게 하는 생각을 하거나 또는 뚜쟁이가 될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이런 말과 행동을 하는 모모는 그렇게 되고 싶어 된 게 아니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이 작품에서 그런 비행청소년인 모모가 오히려 다른 인간보다 더 인간처럼 나온다. 죽어가는 로자 아주머니를 지하실에 모셔두고, 죽을 때까지 아니 시체가 부패할 때까지 옆에 있었다. 자신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그래도 로자 아주머니가 있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인간은 외로운 존재다. 언제나 자신의 고독을 두려워하고, 그 고독을 도망치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그래도 고독한 존재는 인간일 수밖에 없다. 그런 만큼 <자기 앞의 생>에서 모모가 예전에 하밀 할아버지가 해준 말을 회상하는 게 인상적이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인간은 정말 혼자서는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모는 자신의 태생과 자라온 환경, 그리고 주변사람들이 받고 있는 부조리 속에 사회적 가치가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나딘 아줌마는 내게 세상을 거꾸로 돌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나는 온 마음을 다해 그렇데 되기를 바란다.”라고 말한다.

 

성우로 일하는 라딘은 재생된 화면에 목소리를 더빙한다. 그리고 그 더빙된 화면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시간이란 비가역적 존재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모는 거꾸로 가는 세상, 즉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기를 자신은 바란다. 마지막에 아르퇴르를 좋아할 사람은 없기에 모모는 그것을 걱정해야 하나, 그 아르퇴르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르퇴르는 모모가 우산으로 만든 인형으로 우스꽝스러운 모양은 하고 있다. 하지만 그 모습은 모모 자신 그 모습이며, 자신의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부자연스럽고 또한 슬픈 모습(이슬람문화에 따라 얼굴모양을 만들지 않은 것)이다. 자신의 그런 모습이라도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 남도 사랑해야 한다.

 

어느 애니메이션에 이런 말이 나온다. “타인에게 사랑받지 못한 인간은 남을 사랑할 수 없다.”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타인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결국 나부터 사랑해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내 자신이 이기심이 있다고 여긴다. 물론 자기애라는 것은 단순히 생명을 위한 동물적 본능의 자기애로서 이기심일 것이다. 그렇지만 나라는 사람에 대해 내 자신은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상당히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다소 냉소주의적인 인간형이다. 그럼에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는가라고 물어보면, Yes라고 할 수는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이성이 버티지 못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자기 앞의 생>이란 결국 사랑하는 사람, 즉 사랑이란 남녀 간의 사랑, 가족 간의 사랑, 친구 간의 사랑처럼 인간이 행복을 가질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적어도 이 작품에서 그런 주제를 던지면서도 계속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사회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유태인이든 이슬람인이든 관계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모모가 나온다. 실제 이슬람문화와 유태인문화는 충돌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이 자리에서 서로를 위해 같이 웃거나 울거나 또는 짜증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도 이 책에서는 모모의 주변사람처럼 부조리한 삶을 살아가는 인생을 보여줌으로 시대적인 상황을 보여준다. 가난과 질병 그리고 비참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이들로부터 소설이 시작했으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인다면 이 작품 번역가는 좋은 대학교와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것은 분명하나, 그분이 적은 후기에는 단지 비참한 삶을 사는 모모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고, 인생의 이야기를 하밀 할아버지의 말을 빌려 사용한다. 그러나 나는 이 작품에 대해 단순히 모모의 모습, 로자의 아우슈비츠수용소에 갇힌 창녀만 보는 것은 아니었다. 좀 더 생각하면 왜 이들이 그렇게 되었을까 라는 점이다. 처음부터 창녀는 창녀가 아니었고, 어느 청춘의 여성이 창녀로 되어만 했다. 단순히 자기 허황된 욕심이라면 몰라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레미자라블>의 판틴 같은 사람에 대해 생각해볼 점이다. 그녀들이 계속 모모와 모모 친구들을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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