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원 - 꿈꿀수록 쓰라린
시즈쿠이 슈스케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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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원>이란 소설은 상당히 개연적 요소가 강한 작품이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에는 좋은 것도 많으나, 그렇지 못한 것도 제법 많다. 어떤 사건에 내가 관련될 수 있으나, 만일 가족이 관여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딜레마에 부딪힌다. 소설 <염원>은 바로 그런 개연적 요소를 잘 보여준 작품이다. 우리는 TV나 인터넷으로 통해 범죄나 각종 사건에 대한 뉴스를 접한다. 뉴스를 접하면서 그 일들이 나하고 전혀 상관없이 무관한 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특히 남에게 일어난 불행은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기만적 태도가 우리를 지배한다.     


남의 비극은 분명 그들에겐 아픈 일이나, 그래도 나에게 닥친 일은 아니다. 그저 미디어라는 정보에 노출되어 우리의 시간 속에 흘러가는 일에 불과하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어떤 범죄에 휘말리거나 사고에 얽매인 사람들은 모두 다 이런 이야기를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날 수 있을까? 이런 것은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는데 말이죠.”라고 말이다. 물론 사건사고 피해 당사자가 본인이라면 어떻게든 혼자 감내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피해 당사자가 가족이고, 그중에서 자녀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염원>을 보면서 뜬금없이 세월호 사고에서 희생된 어린 학생들이 생각났다. <염원>에서 다다시군은 고등학생이고, 세월호 학생들도 고등학생이다. 제법 키는 성장하고 의지는 강하나 어른보다 몸과 마음이 작은 친구들이다. 하지만 꿈과 희망은 어른보다 더 웅장하고 거대하다. 그런 친구들이 세상에 발을 들이지 못한 채 이대로 꺾이고 만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지만 다다시와 세월호의 아이들은 다른 차이점이 있었다. 세월호 희생자는 완벽한 피해자이나, 소설 <염원>에서 다다시는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알 수 없었다는 점이다.     


물론 소설을 읽으면서 가즈토와 기요미, 그리고 미야비라는 세 명의 가족이 큰 아들 다다시의 실종에서 겪던 심적 변화와 주변의 환경 등은 분명 그 가족에게 큰 시련으로 다가온다. 당연한 일이나 사실 그 일들은 피해 당사자에게 당연한 일들이 아니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개인이나, 범죄에 따른 책임문제는 그 가족과 사회 일원에게 같이 분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다시의 실종과 살인사건이 보도되면서 그렇게 화목하면서도 화목하지 않았던 평범한 가정은 파탄에 이른다.     


아들이 살인을 저지르면 그 자체가 삶의 파괴로 이어지고, 아들이 살인을 당하면 그 여파로 삶이 무너진다. 하지만 2가지 갈래에서 우리는 어디에 마음을 기대어할까? 아니면 주변 환경과 조건은 어떻게 만들어져 갈까? 작품에서 다다시가 살아 있으면 좋겠지만 그러면 그 아이는 살인범이 되는 것이고, 만일 죽게 되면 살인 피해자가 되나 다다시는 남을 헤치는 사람이 아니게 된다. 가족이 만일 그런 일에 처해지면 참으로 곤란하게 될 것이다. 다다시가 정말 사람을 죽인 것도 판명되지 않았는데, 실종자가 곧 살해용의 후보자란 점에서 세간의 차가움은 피할 수 없었다.     


집 현관에 계란을 던지고, 명패에 페인트를 칠한다. 사업과 관련하여 거래처가 끊기고, 주변에 같이 사업하던 사람들의 인맥까지 사라진다. 생계와 친구까지 없어진다. 인간관계 모두가 파탄 난다. 다다시란 인물은 전형적인 남자 고등학생 같다. 친구를 좋아하고, 친구를 위해서라면 자신이 손해 봐도 참아주는 유형이다. 그래서 부모님의 간섭에도 그는 자신의 길을 간다. 또한 부모님의 기대감을 버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 절제하는 모습도 나온다. 삶의 구원에서 절망의 순간은 이렇게도 희비가 엇갈린다.     


살인범이라도 세상 앞으로 같이 살아갈 건지, 아니면 죽음으로 통해 결백을 주장하던지 말이다. 물론 아들이 살아있으면 좋겠지만, 아들의 결백 역시 해명되는 것도 중요하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 선택하기 어렵다. 만일 아들이 죽지 않았다면 가즈토의 인생은 사회적 매장당했을 것이고, 미야비는 학교에서 따돌림을 받으며 원하는 인생을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 기요미는 가즈토와 미야비만큼은 아닐 것이다. 그녀는 가사 주부로 지내며 교정 일을 맡고 하고, 그 일은 회사와 미야비만의 비공개적으로 일을 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업가 가즈토, 학생 미야비, 구원이란 형태는 최악의 상황으로 돌아왔다. 사업도 가족도 외면당한 가즈토에게 다다시의 죽음은 3 사람의 새 인생을 시작하게 해 준 원동력이었다. 이 원동력은 좋다고 해야 할까? 나쁘다고 해야 할까? 소설 <염원>은 스토리 적으로 결론은 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과정을 중시하는 소설이다. 결과론으로 모든 것을 성과로 보는 세상에서 과정의 성찰은 우리 삶에 필요한 요소이다. 내 생각에게 가즈토 가족을 괴롭히는 요소에서 주변 이웃의 집단 괴롭힘과 인간관계 단절보다는 언론이란 생각이 들었다.     


집 전화와 핸드폰이 방송국과 신문사 기자 발신으로 가득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생활을 염탐한다. 하다못해 2층 딸의 방 안에까지 카메라가 주시하고 있다. 완벽한 감시, 그리고 말꼬리를 잡아 악의적인 보도로 나간다. 개를 데리고 밖에 산책하는 모습을 방송으로 내보내 죄책감이 없는 부모로 묘사한다. 특종에 눈이 멀어 가족들을 마치 구경거리 조롱 대상으로 만든 언론을 보면서 가즈토 가족들은 더 힘든 시기를 보낸다. 그뿐만 아니라 범죄와의 문제는 단순히 조롱과 비난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징역이 얼마나 나올지도 모르고, 상대방에 대한 배상책임도 어디까지도 모른다. 그 모든 것들이 파괴되고, 남은 것은 오명과 어둠뿐이다. 하지만 이 모든 구원이 다다시의 죽음이고, 그 죽음을 바라야 하는 것이 진정한 <염원>일지 아니면 살아오는 게 <염원>일지는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이성적으로 보면 다다시의 죽음이 많은 것들을 지켜준다. 하지만 우리는 머리보단 마음 안에 숨겨진 무의식 내지 감정에 더 많이 마음이 간다. 다다시처럼 가족이 살인사건에 얽혀 들어가면 우리는 분명 직접적으로 살인과 무관하고 별 탈 없이 살아 돌아오면 좋겠지만, 현실이 그게 아니라면 어떤 것을 택하고 만족해야 하는가? 어떤 선택도 만족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한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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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31 2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31 2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겨울호랑이 2019-12-31 2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화애니비평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에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만화애니비평 2020-01-01 08:57   좋아요 1 | URL
언제 범띠가 오는 새해가 올까요?

어흥!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세트] 골든아워 1~2 세트 - 전2권 - 생과 사의 경계, 중증외상센터의 기록 2002-2018 골든아워
이국종 지음 / 흐름출판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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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작년 2017년 추운 2, 아버지는 담도암 투병 중 건강이 악화되어 급성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암은 이미 복부까지 확대하여 복수(腹水)가 차고 있었고, 종양의 세포는 소화기관이 아닌 대뇌에도 자리 잡고 있었다. 2016년 말부터 이미 나는 아버지가 더 이상 오래 사는 게 무리라고 판단했다. 20171월에 장례식장부터 미리 알아볼 정도였으니 말이다. 2월 중순, 발렌타인데이의 달콤한 초콜릿 기운이 떨어지기도 전에 아버지는 더 이상 현실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장례식장에서 3일 동안 보낸 후 화장터를 거쳐 납골당까지 안치한 후 집에 돌아와 어머니와 나는 집안에 아버지 물품들을 조금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컴퓨터를 잘 몰랐으나, 집에서 내가 컴퓨터를 하는 것을 보고, 가끔 인터넷을 하기도 했고, 어느 날에는 노트북까지 구매하여 직접 본인이 사용하고 있었다. 노트북은 대략 3번 정도 사신 것 같다. 배를 타고 먼 바다를 건너 해외를 돌 때, 남는 시간에 하랄 것 없이 있는 것보다 컴퓨터로 워드도 쳐보고, 동영상 등을 보는 등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노트북을 처분하기 위해 노트북 내 파일을 정리하고, 외장하드 디스크 내용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래저래 보는 도중에 파일명이 형과 나에게 보라는 한글작업파일이 있었다. 읽는 동안 나는 잠시 멍하게 있었다.

 

만일 밖에서 본인이 죽게 되면, 자신의 신원이 확인되면 시신을 화장하여 바다에 뿌려 달라는 것이다. 파일생성 시점은 2014년이나, 아마 오랫동안 그런 생각을 가진 것 같다. 다행히 형에게 자식이 생기자, 아버지도 그런 마음을 바꿨다고 한다. 그러면 향년 72세 동안 배를 타던 40년 이상의 시간을 그렇게 보낸 것이다. 배를 타는 사람들은 우리가 아는 세계와 전혀 다른 생활을 한다. 나는 가끔 지금의 한국을 볼 때마다, 혹은 그 과정을 볼 때마다 회의감을 느낄 때가 참 많다. 전에 와이프하고 대화 중에 내 이야기 중에 90%가 부정적인 내용이라 말했다.

 

고등학교부터 알고지낸 친한 친구가 말하길 나보고 세상을 너무 비관적으로 보고, 뭐든지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고 했다. 나도 그런 점을 알고 있다. 내가 다소 냉소주의적인 인간이란 사실을 말이다. 냉소적인 가치관이 생긴 시기는 대학교 초반까지는 아니다. 어릴 시기야 아무런 생각 없이 지내는 것이고, 중고교 시절 역시 입시로 바쁜 시기이니 많은 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흐름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아버지가 해외에서 배를 타다 심한 부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화물선 내 크레인작업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화물을 실거나 혹은 선박을 수리할 때 갑판에서 선원이 화물을 조작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선박 위에서 작업은 참 위험하다. 육지와 달리 바다는 평평하지 않으며, 파도가 몰아치면 큰 바다에서 평균 5m 내외의 파고가 형성되며, 바람의 세기도 역시 강력하다. 사람의 평형을 무너뜨리거나 또는 물체의 평형도 흔들어 버린다. 크레인작업을 하면 크레인 붐이 있고, 그 붐은 매우 무겁고 단단한 금속구조물로 이루어져 있다. 아버지는 그런 환경에서 작업하다 무릎에 크레인 붐을 맞았던 것이다.

 

아버지에게 이야기 듣기론 무릎 연골과 뼈가 모조리 산산조각이 났다고 한다. 뼈와 근육이 심하게 손상되고, 손상부위로 출혈이 시작된다. 게다가 작업환경이 쾌적하지 않아 땀이나 금속파편, 바닷물이 환부에 들어가면 심한 조직괴사가 시작된다. 매우 급한 상황이다. 2003년 정도 일어난 일로 기억난다. 헬리콥터가 날아와 공수하여 수술하고 다시 집 인근에 있는 일반종합병원에 입원했다. 몇 개월 입원 후에 퇴원했고, 후유증은 길게 남았다. 2003년 군입대를 한 나는 2004년 다음해 휴가를 받아 나왔고, 아버지는 다시 배를 타고, 집에 쉬기도 했다.

 

하지만 병원에 입원하여 집에서 휴식할 때까지 생각하면 아버지와 대화를 나눌 일은 어릴 때 많이 없었던 것 같다. 학창시절은 그저 수험준비에 충실히 하면 되나, 대학시절은 달랐다. 아버지와 대화를 해도 될 만큼 시간과 정신적 성숙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 성격이 점차 부정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이다. 아버지가 어린 시절 가난한 생활에 고생한 점, 귀가 잘 안들리는 이유도 잠수작업 중 고막이 나간 점, 손발이 모두 갈라져있었고, 발은 동상후유증이 남아있었다. 피부는 온갖 화상자국이었고, 심장까지 좋지 않았다.

 

최악이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이야기에서 부조리를 말할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부조리한 대우를 받고, 힘들게 살아가는 것이 원래 세상은 그렇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으면서 아버지가 세상을 뜨기 전까지 비참한 삶을 보고 듣던 나에게 세상은 아름다운 세계가 아닌 빌어먹을 곳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냉소주의적 인간이 되기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본인의 삶과 동시에 본인의 삶과 가치관을 형성시킨 사회적 여건, 그리고 특히 부모님의 영향이 크다. 아버지가 말한 원래 세상은 그렇다를 어느 책에서 볼 것이라고 생각조차 못했다.

 

이국종 교수의 <골든아워>, 이 책에도 그런 말이 나온다. 중증외상환자를 대하는 이국종 교수가 어느 날 한겨례 기자가 1주일간 병원의 현실을 보았다. 이국종 교수에게 도대체 세상은 왜 그렇죠?”라는 질문에 이국종 교수는 차가운 목소리로 원래 세상은 그래요라고 한 것이다.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면 간단하다. 우리 일상은 산업화시대가 이루어진 60~70년대와 큰 차이가 있다. 당시 우리는 자유롭게 생활하지 못하고, 필요한 물건이나 서비스는 정해진 시간에 이용해야 했다. 그리고 버스배차 시간조차 넉넉하지 못하기에 삶의 순환은 정해진 사이클이 어느 정도 있었다. 차량을 가진 사람도 귀했고, 차량을 운행할 수 있는 시간 역시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산업화 이후 21세기 민주주의 시대로 오면서 무엇이 바뀌는가? 전국에 자동차 대수는 전 국민 인구의 반이 도로를 달리고, 밤의 편의점은 간식을 사러오는 학생, 맥주 캔을 사러오는 젊은 친구들이 넘친다. 예전에 밤 10시만 되면 어둠으로 넘치는 도시의 전경이 이제는 전기 빛에 의해 환한 야경을 만들어낸다. 여수밤바다라는 노래 가사처럼 여수시의 자연환경이 좋아도 밤의 조명이 없이는 야경은 없는 것이다. 21세기 우리 사회는 이미 24시간의 서비스가 요구되는 시대인 것이다.

 

24시간 운영체계를 돌리기 위해 단순히 산업만 아니라 국방, 의료, 교통, 소방, 경찰, 에너지 등 다양한 국가인프라가 충원되어야 했다. 범죄는 낮보다 밤이 많고, 교통사고 역시 낮보다 밤이 심하다. 음주가 밤에 이루어지고, 밤의 시야가 좁기에 교통사고는 항상 밤에 집중되기 마련이다. 사고가 나면 소방과 경찰이 출동하고, 이후로는 의료시스템이 운영된다. 명절이 되면 많은 사람들은 연휴를 즐기지만, 의료와 소방은 응급환자의 치료를 위해 시스템을 구비한다. 결국 24시간 운영, 비상시의 응급처치, 거기에 필요한 수도와 전기 등 에너지 인프라를 구비하기 위해선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고 노동력을 투여하여야 한다.

 

문제는 24시간 인프라운영에 소요되는 인력이 근무환경이 매우 열악한 점이다. 최근 안타까운 청춘이 목숨을 잃었다. 발전소에서 전력을 생산 중 기계에 의해 사고를 당해 사망한 사고이다. 그의 죽음을 보고 나는 새삼스럽게 느끼지 않았다. 산업재해로 해마다 사망하는 노동자는 천 명을 넘고, 산업재해로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 받는 이들은 수천 내지 수만이다. 가족이 산업재해로 사망하면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 옆에 가족들은 정신적 외상에 시달리고, 친구들도 그 일로 고통 받는다. 얼마 전 윤창호라는 청춘이 음주차량에 의해 운명을 달리한 사건이 있었다. 친구들이 직접 나서서 윤창호법을 제정해달라고 요청했다.

 

멀쩡하게 걸어가는 사람이 차에 부딪히고, 건물잔해 깔리는 일이 있는데, 그보다 더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일하는 사람은 비교조차 어렵다. 최근 일어난 김용균 씨의 죽음, 그리고 펜션에서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한 고등학생 기사를 보니 참 마음이 심란하다. 201512월 내 친구가 일하던 공장 폐수처리장에서 황화수소가 새어 결국 폐와 뇌가 손상당하여 세상을 떠났다. 21조로 근무해야 하고, 근무 중 안전과 관련된 장비를 장착하여야 한다. 그러나 전혀 되지 않았다. 그것도 날 좋은 크리스마스 연휴에 봉변을 당했고, 중환자실에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친구는 얼마 참지 못하고 영원히 내 곁을 떠났다.

 

산업재해로 친구를 잃었다. 하청노동자인데, 그 하청업체에서 재하청을 준 업체가 있다. 그 업체에 대한 지원근무를 나갔고, 결국 비참한 운명을 맞이했다. 노동자의 환경에 근무하면 참 어렵다. 더럽고 위험하고 힘들고 보통사람이라면 생각조차 못할 상황이 많다. 장례식을 치룰 때는 양력으로 계산했지만, 기일은 음력으로 지낸다. 올해 기일은 크리스마스 당일이었다. 크리스마스는 와이프 생일이지만, 올해는 친구의 기일이었다. 어째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이 있는지 말이다. 이국종 교수는 잘 알았다. 언제나 자신에게 찾아오는 환자 대부분이 가난하고 못 배우고 힘든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 또는 농민, 어민 같은 사람들이란 점을 말이다.

 

특히 해군에 대한 애착이 많았다. 본인도 해군에 근무했고, 해군 내지 해병대 훈련과정에서 사고가 나면 심각하다. 공군출신인 나로서 예하비행단에서 근무하여 좋은 인프라를 누리고 있었지만, 해상에나 혹은 육지에서 먼 도서(島嶼)에 배치되면 의료지원시설이 빈약하다. 특히나 해병대 부대원이 근무하는 연평도 주변의 군사분계선 인근은 헬리콥터가 제대로 날지 못한다. 일정 고도 이상을 비행하면 북한군의 사격범주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현 정권에서 북한에 대한 친 외교정책이 불만일지 모르나, 전방에서 근무하는 장병이나 주민들에게 생명의 기로를 나누는 지점이다.

 

골든타임과 골든아워, 사실 타임(time)이란 단어를 생각하면, 이국종 교수가 그 말은 틀렸다고 한다. 계속 골든타임이라고 말하는 언론에서 사람들이 오해하는데, 내가 생각하기엔 이런 문구가 생각난다. "What time is now", 결국 현재 시각을 말하는 것이다. 일정한 시간의 분류에서 현재상황만 말하는 게 타임일 것이다. 하지만 아워(hour)는 시간의 흐름이다. 사고가 발생하여 의료진에게 도달하거나 또는 병원외상센터에 도달까지일 것이다. 외상환자들의 특징은 대부분 출혈이 많다. 온 몸의 혈액이 2L 내외이다. 혈액의 일정이상 손실되면 쇼크로 기절하고, 그 이상일 경우 사망한다.

 

외상환자들 중에서 가장 심각한 외상은 머리이겠지만, 한편으로 내장기관이다. 대장과 소장, 항문으로 이어지는 소화기관에서 분변이 노출되면 다른 내장기관을 오염시킨다. 특히 패혈증 증세는 세균이 혈액 안의 영양분을 흡수하여 부패하게 하고, 다시 빠르게 증식하여 온몸을 괴사시킨다. 분변이 간이나 신장 등 다른 장기에 오염되지 않도록 해야 하며, 장기파열이 되면 출혈을 멈추게 하고, 최저한으로 절개하는 것도 시급하다. 수술 후에도 중증외상환자는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는다. 나 역시 직접 목격했다. 아버지가 무릎이 나가자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럽고, 특히 잊을 수 없는 일은 할아버지 제삿날 친척이 모였는데, 제대로 무릎을 꿇지 못한 점, 그리고 큰절도 제대로 올릴 수 없는 것이었다.

 

큰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심한 모욕감을 말을 뱉었고, 나는 아직도 그 일을 마음에 담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아버지가 당해온 세월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온다. 밤에 불을 끄고 침구 위에 누워있으면 아버지가 생각나고, 생각날 때마다 바로 잠이 들 수 없다. 하물며 산업재해로 가족을 잃은 사람은 오죽할까? 더 일찍 발견하고 더 일찍 의료진이 도착하면 죽지 않았을 목숨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사회의 안전의식은 부족하고 안전은 돈만 축내는 것으로 여긴다.

 

공장이나 공사장에서 노동자가 사망하면 그 보상비와 합의금만으로 타격이 크다. 중소기업은 폐업을 해야 하고, 소규모 건설회사는 입찰을 할 때 벌점이 부여되면 결국 사업을 접는다. 다들 괜찮겠지? 하는 안일함으로 타인의 생명을 빼앗고, 자신들은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실패한다. 이게 한국의 현실이다. 그러나 어쩌야 하나? 사람을 살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국종 교수가 전에 동영상으로 찍힌 모습을 보았다. 무전기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 신경질 내며 바닥에 내려친 것을 말이다. 누군가 말할 것이다. 왜 무전기를 그렇게 하는지? 핸드폰으로 하면 되는 게 아닌지를 말이다.

 

참으로 한심한 이야기이다. 가령 경찰에서 무전을 사용하면 그것은 비밀로 관리된다. 경찰의 무전을 만일 범죄자들이 알면 도피하기 좋을 것이고, 오히려 경찰관을 습격할 것이다. 또한 교통사고를 났을 때 사고차량을 끌고 가는 특수차량이 경찰차 및 구급차가 오기 전에 도착했을 것이다. 최근 경찰무선을 도청하여 사고현장의 차량을 먼저 견인하려던 차주가 구속되었다. 소방과 경찰 그리고 비상무선을 누가 함부로 들어서는 안 되고, 이용해서도 안 된다. 무전기를 보급 받아 사용하는 것은 비밀의 문제이다. 군복무 중 나는 관제탑과 교신을 하여 활주로 내부로 진입한 적이 있었다.

 

부사관으로 근무할 때 핸드폰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내 핸드폰으로 관제탑과 교신한 게 아니라 TRS, 무전기를 가지고 교신했다. 게다가 수원에 위치한 아주대학교는 인근에 공군기지가 있고, 공군기지가 위치하면 공군관제타워와 교신을 해야 한다. 헬리콥터가 마음대로 이륙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소방청에서 나온 헬리콥터라도 조종사가 내가 날고 싶어도 나는 게 아니다. 관제통제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 무전기를 박살내는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나? 비상사태 통제시스템이나 응급구조 시스템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은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중증외상환자는 11초가 아까운 사람이다. 시스템의 미비로 시간이 지연되면 결국 그 사람은 운명을 달리한다. 다른 병원에서 제대로 환자를 받아주지 못해 몇 시간 동안 병원을 전전하다 아주대학교 외상센터 올쯤에 이미 사망한 사람도 제법 있었다. 죽은 자는 말은 없으나 죽은 자의 가족과 친구들은 평생 한으로 남을 것이다. 이국종 교수는 돈과 지위, 명예를 위해 싸우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명예는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 그 명예란 자신의 지위와 명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외상환자의 생명을 위해 희생하는 마음이다. 피가 온 몸을 적시고, 잠도 제대로 못자고, 눈도 실명되어 가고, 어깨도 망가졌다.

 

자신을 받쳐주던 인력도 정해진 인원의 1/3 수준이다. 그마저도 있기에 응급환자를 살릴 수 있었다. 내 아버지는 2003년 정도이니 한국에서 외상센터가 거의 걸음마 수준에 당했다. 외국 외상구조시스템이 있었기에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만일 국내 연안에 정박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특히나 인천 앞바다라면 말이다. 바다라는 공간이 진짜 그렇다. 이국종 교수가 국민적 관심으로 떠오른 것은 여러 일이 있었다. 북한귀순병사의 구조도 있었지만, 최고의 이벤트는 석해균 선장의 구출이다. 총알을 배와 다리를 관통하여 삶조차도 포기해야 하던 그 다급함, 해적의 무서움은 정말 두렵다.

 

석해균 선장납치 이후 이국종 교수가 국내로 데리고 와서 결국 회생할 때, 많은 한국인들은 감동의 도가니로 넘쳐났다. 그때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선원들이 원래 해적에게 납치가 많이 되, 배를 타는 사람이니 험하게 다루지 않은데, 저런 일이 있네. 나도 2번 납치된 적이 있었다.”라고 말이다. 그 말을 들 나는 내 방에 들어와서 혼자 몰래 울었다. 이국종 교수의 말처럼 석해균 선장이나 혹은 우리 아버지가 같은 사람이 있기에 한국이 돌아가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아무도 이들을 기억해주지 않는다. 석해균 선장이야 이명박 정권의 기획적인 요소가 많았다. 에어-앰뷸런스 대여나 의료장비 공급 등에서 정부의 도움보단 본인의 희생이 많았다.

 

죽어도 타지에서 죽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 와서 죽어야 한다고 말이다. 다행히 석해균 선장은 살아났고, 이국종 교수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정작 외상환자를 위한 정책을 멀게만 느껴져 갔다. 이국종 교수가 잘 지적하듯이 중증외상환자는 대부분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이 많다. 좋은 근무환경에 있거나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은 그런 불행을 겪지 않는다. 기껏해야 교통사고이다. 가난한자들은 병원비가 없어서 치료를 포기하다 생명을 잃어가고, 병원에 가도 병실조차 잘 열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고위공무원이나 부유한자는 전자들을 외면하던 사람에게 대환영이다. 냉소한 표정으로 기자에게 세상은 원래 그래요가 괜히 나온 말이겠는가?

 

이국종 교수는 어린 시절 가난했고, 아버지가 한국전쟁 상이용사로 무료진료를 받았을 때 많은 설움을 받았다. 병원에서 돈도 안 되는 불청객으로 취급당했다. 그러나 한 의사가 그에게 용기를 주었고, 남들에게 별 볼일 없는 인간으로 대접받던 아버지를 오히려 존경해야 할 분이라고 말해주었다. 사실 한국전쟁에서 사망하거나 다친 국군장병은 우리가 잊어서 안 될 분이다. 북한군과 대적한 민족상잔의 비극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지금을 만들어준 분이다. 서울에서 자라고 서울에서 거주하다 세상을 떠난 이국종 교수의 아버지, 이국종 교수는 자신의 아버지가 광평대군(廣平大君)의 후예라는 점을 책에 명시했다.

 

왜 그랬을까? 나라면 이해할 것 같다. 눈을 다쳐 시력을 잃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고, 가난한 생활에 본인도 힘들었을 것이다. 자신에게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알고 절망했지만 유일하게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세종대왕의 아들 중에 하나인 광평대군의 후예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 자신에게 그것 이외에 가진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가진 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분은 자신의 아들인 이국종이란 외과의사가 있었다. 돈도 없고 권력도 없지만, 가족은 있었다. 가족이 있다는 점에서 상징적으로 집안대대로 내려오는 자식을 향한 사랑이 그런 식으로 남은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돌아가신 아버지도 가난했고, 배운 것도 없이 살아왔다. 돌아가신 후 며칠 뒤 구청에서 카드 하나가 발급되었다. 청각장애인 증명카드였다. 40년 넘게 그렇게 고생했는데, 조금 더 일찍 발급받았다면 고생을 덜하지 않았을까? 배 타는 사람이라 민간보험도 가입되지 않았다. 비싼 병원비는 얼마 되지 않은 아버지의 돈, 내 월급통장의 잔액이었다. 우리집안은 대대로 양반의 후손이었다. 현대사회에 양반이 뭐가 중요하냐는 말은 하지만, 문중 자체가 다산 정약용 선생과 워낙 많이 연결되어 있었고, 다산 선생이 강진유배 중 다산초당에 기거할 적에 내 직계할아버지는 나룻배로 강진만을 건너 귤동마을의 다산초당에 갔다고 한다.

 

소설 목민심서를 읽기 전에 다산 선생의 따님은 우리 파계 할아버지 측으로 시집온 것과 목민심서를 만들어간 이야기, 베트남 상징적 인물인 호치민이 들고 다닌 짐은 오직 자신의 옷과 목민심서라고 했다. 아버지에게 남은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물론 양반 집안이라 해도 돈 없으면 상놈보다 못하다는 말을 하면서 집안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에게 해줄 이야기는 그것밖에 없었다. 가난하고 배고픈 어린 시절, 혹독한 노동만 하던 젊은 시절, 군대에서 군사정권에 어울리지 않은 후보를 찍은 이유로 구타당한 이야기, 배타면서 고생한 이야기, 들어보면 즐거운 일들은 별로 없다. 그나마 할머니와 함께 하던 시기만은 좋았던 것 같다.

 

그 외로 좋은 추억이 될 이야기는 없다. 집안 이야기를 하면서 그 내력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우리 아버지도 그것밖에 없으니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으니 말이다. 가진 것은 형과 나, 어머니, 그리고 형수님과 조카 2녀석이 다이니 말이다. 내가 결혼 전에 별세했으니 그것만이 전부였던 것이다. 이국종 교수의 아버지도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가진 게 없고, 남은 것은 오직 자신의 가족이었고, 이국종의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 그 위의 세대도 그런 마음이 이어져 간 것이라 여겼다.

 

그 때문인가? 자신의 눈이 실명되어가자, 이국종 교수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을 안으면 말 없이 눈물을 흘렸다. 시력을 잃어가는 이국종 교수의 눈 한쪽이 아버지의 실명된 눈과 같은 부위였기 때문이다. 업이란 거대한 운명의 수레는 이국종 교수를 피해갈 수 없었던 것 같다. 이국종 교수의 글을 보면 희망이란 단어가 보이지 않는다. 당장 사람이 죽어 가는데 아무런 대응이 되지 않은 현실에서 무슨 기대가 있을까? <골든아워>를 읽으면서 많은 공감과 생각을 하였다. 이국종 교수는 의사교수직이라 사회적으로 높은 쪽이나, 의료계에서 바닥을 맴돌고 있다. 중증외상환자는 바닥 중에 바닥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고 싶은 게 말로는 쉬우나 현실은 정말 어렵다. 사회적으로 인간취급을 제대로 받지 못해도 육체적으로 인간답게 살아야 최소한의 희망을 찾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알라딘이란 서적판매업체서 선정한 2018년 올해의 책 1위가 이국종 교수의 <골든아워>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국종 교수를 미디어를 통해 알았고, 그가 만든 책을 읽었을 것이라 여긴다. 하지만 이국종 교수가 직접 마주해야 하는 그들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고 있을까?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생활을 하는지 또한 그들과 같이 살아가는 가족과 친구들은 무슨 얼굴을 하고 살아가는지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가질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국종 교수의 <골든아워>는 이국종 교수의 본인의 이야기이며, 자신의 팀과 조력자의 이야기도 되나, 때로는 소외받고 가난한 많은 서민들의 이야기이도 하다. 나라는 사람도 상당히 냉소적인데, 이국종 교수의 냉소적인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그런 날이 과연 올까? 적어도 책을 보면서 오지도 않았고, 오는 것도 힘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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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30 07: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31 14: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겨울호랑이 2018-12-31 2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화애니비평님께서는 작년과 올해 많은 변화를 겪으신 것 같네요... 아버님 별세, 결혼 등 큰 일을 많이 치루신 듯 합니다. 내년에는 평안하게 원하시는 바 이루시길 기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만화애니비평 2019-01-01 11:35   좋아요 1 | URL
올해 목표는 돼지띠 아이입니다!!
호랑이님 언제 호랑이해가 올런지요..어흥~
새해 복많이 받으세용~~

카알벨루치 2019-02-01 2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명절연휴 즐겁고 행복하게 수놓고 귀환하시길 바랍니다 ^^

만화애니비평 2019-02-05 16:3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이제 집에 와서 컴을 켭네요.
인사 늦어 죄송합니다
 
임진년 난리를 당하매 - 임진왜란에 조국을 지킨 아홉 의병장 작품집 겨레고전문학선집 9
곽재우 외 8인 씀, 오희복 옮김 / 보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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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10년간 보수정권이 몰락하고, 다시 진보적 정권이 수립되었다. 물론 학문적으로 또는 서구적인 관점에서 아직도 보수정권이나, 앞전의 10년은 수구정권 내지 더 나아가 관료주의 정권이라 말하여도 다름이 없다. 정권의 차이는 있지만, 제일 많은 차이점을 생각나게 만든 것은 바로 대북관계이다. 북한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향으로 볼 것인가? 소비에트연방인 20세기 말 붕괴하고, 공산주의 이념을 찾아 사회주의국가로 세상을 호령하려던 중국이 자본주의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진짜 세상을 호령하게 되었다.

 

정치적인 관점은 사회주의, 경제적 시스템은 자본주의, 사실 자본주의가 21세기에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사실 사회주의 내지 자유주의 같은 말은 국가이데올로기를 내세우기 위한 슬로건에 불과하다. 북유럽사회 특히 덴마크나 스웨덴 같은 국가는 아직 왕가가 존재한다. 심지어 영국의 경우 여왕의 권력이 막강하다. 그러나 영국은 자유주의국가이고, 북유럽 다른 국가 역시 수정사회주의로 만들어진 사회주의적 요소가 강한 국가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좌우논쟁이 한국에서 얼마나 학문적으로 낙후되었는지 다른 국가에 비해 얼마나 잘 적용되지 않았는지 다시금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바로 국가분단의 아픔이고, 한국전쟁 이후의 우리 세포에 각인된 공포심이라 말할 수 있다. 군사정권이 통치할 때 프랑스나 독일에서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 관련서적을 읽는 것은 정상적이었다. 학문의 영향에서 프랑스의 파리대학이나 사범대학, 독일의 수많은 대학교들이 그런 책들을 읽어도 무방했고, 오히려 새로운 학문의 영역으로 발달했다. 한국에서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는 것은 국가보안법 위반이고, <공산당선언>을 읽는 것은 간첩죄로 바로 체포되어 남산 밑에 있는 건물지하에 끌려가 고문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다.

 

북한이란 존재는 그만큼 우리에게 공포와 두려움 더 나아가 증오라는 이름으로 존재해야 할 대상이다. 지금도 북한과의 정치적 관계에서 많은 희비가 엇갈린다. 그들을 우리는 어떻게 마주보고 가야 하는 것인가? 최근 통일에 대한 젊은 세대의 인식이 점차 옅어져 간다. 어릴 적 배운 동요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곡이 있다. 꿈에서도 통일이라는 그 노래, 곡을 들어보면 참으로 아름다고 순수한 곡이다. 노래와 같은 통일이 되려면 무력이 아니라 평화적으로 되어야 가능하다. 만일 전쟁을 할 경우 국토의 대부분 모두 쓸모없는 토지로 변할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국내산지에 나무가 없어서 심각한 지경이었다. 소나무를 열심히 식재하여 한국에서 소나무는 흔한 나무가 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산과 마을이 모두 엉망이 되었다.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땅이 되어버린 것이다. 최근 한국의 대통령과 북한의 최고 권력자가 만난 일이 있었다. 이때 축하공연으로 동요 <고향의 봄>을 어느 소년이 불렀다. 맑고 투명한 아름다운 선율은 모든 사람들의 넋을 잃을 정도로 큰 감동을 주었다. <고향의 봄>은 한국전쟁 이전, 한국인이 아직도 조선의 후예란 이름을 가질 때 나온 노래다. 물론 조선이라 국가적 통치자는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이었으나, 그래도 조선인이 있었다.

 

통일이 되려면 지금 상황에서 우리는 너무 서로 다른 길을 갔다. 한쪽은 한국, 한쪽은 북조선, 그러나 대한민국이란 이름은 고종이 지은 대한제국의 뿌리에서 시작되고, 북조선은 조선이란 한국 마지막 왕조국가의 이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옛날 것이라고 무시하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역사는 그저 흘러간 것이라 하지만, 중국과 일본에서 역사왜곡을 부지런히 하는 이유는 외교적 문제와 국제적 관계에서 역사의 정통성을 내세우지 않으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없다. 한국역사에 대해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만일 독도가 일본 땅이란 말을 듣고 발끈하면 그것만큼 코미디가 없다.

 

처음부터 조선의 역사가 없었다면 독도의 역사도 없다. 지리적인 조건조차 역사의 기록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것이 존재해도 그 존재성에 대한 인식론이 없다면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것이라고 인식조차 할 수 없다. 형이상학적 논리일지도 모르나, 독도란 실체를 우리 대부분 직접적으로 사물을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영상으로 보는 경우가 많으며, 독도의 위치를 정확히 특정할 수 없지만, 영상과 지도에 의해 구분되어 진다. 영상이란 허구적 이미지 속에 우리는 진실성을 부여한다. 역사성이 없다면 독도 역시 한국의 땅이란 개념을 존재하기 어렵게 만들 것이다.

 

역사의 존재가 있기에 우리는 현실을 볼 수 있고, 과거에 축척된 시간의 토대가 바로 현재라는 비가역적 속성을 만든 것이다. 역사가 있기에 북한이 우리의 적이고, 한편으로 우리의 겨레이다. 그래서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전혀 모를 타인과 싸우는 것보다 형제와 싸울 경우 그 증오와 앙심이 심하다고 한다. 같은 민족이 싸울 경우 그 피해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가끔 제주 43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가까운 친척조차 등을 돌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피로 맺어진 일가는 천륜 그 자체이나, 인간들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는 인간들을 오히려 물들여가기 때문이다.

 

북한과의 갈등은 역사적 흐름에서 시작하였기에 그 맥을 따라 올라갈 수밖에 없다. 가장 좋은 방법은 조선이란 이름을 되찾는 것이다. 조선이란 이름은 우리가 찾은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조선을 찾기 위해 몸을 던진 독립군 내지 민족 운동가부터 찾는다. 독립군 내지 민족 운동가를 찾으면 그들이 원하던 것들을 알아갈 수 있다. 국조 단군을 연구한 학자들이 대부분 독립 운동가이고, 그들은 일제에 저항했다. 단군의 역사를 잃으면 조선의 혼을 모조리 잃기 때문이다. 단군이란 역사성을 가진 것인지 아니면 신화의 존재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신화적 존재가 진정한 역사적 존재로 볼 수 있다면 그중에서 단군의 존재는 사실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고조선과 조선의 후예, 우리 한국인은 늘 외세에 의해 침범당하고, 욕을 당한 존재이다. 최근 광복절을 맞이하여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강제징용 노동자와 위안부 성 착취 피해여성들의 피눈물은 역사가 아직 우리 곁에서 숨을 쉬기에 그들의 아픔이 곧 우리의 아픔인 것을 알 수 있다. 역사를 잊으면 되풀이 된다. 일제강점기를 되돌아보면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할 것이나, 그런 일이 만일 과거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일본과의 전쟁은 특히 임진왜란이 가장 큰 요인이다. 일본에 대한 적개심은 일제강점기도 있지만, 과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7년전쟁이 가장 컸다.

 

민속 문화적으로 민화나 속어 그리고 전해 내려온 구비전승문학조차 그런 점들이 숨어있다. 중국도 그렇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서 한중일 삼국간의 역사적 딜레마는 현재도 진행 중이다. 그렇다면 막상 그 상황에 닥친 선조들은 어땠을까? 북한에서 제작한 도서를 국내에서 발간한 겨레고전문학선집으로 <임진년 난리를 당하매>를 읽어보았다. 겨레고전문학선집 중 많은 사람들의 기록과 글이 있었고, 거기에 한국의 전래동화에도 나오는 <춘향전>이나 <흥부전> 같은 이야기도 있다.

 

우리의 이야기를 우리가 지켜야 하는 이유는 서로 한 민족이었음을 알려주는 동기이다. 이산가족 상봉기사가 나오면 마음이 아프다. 부모형제자매 자식이 전쟁으로 서로 떨어져 70년 가까이 헤어지다 이제 만날 날이 다가오니 모두 백발의 머리와 주름이 깊게 페인 노인이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기약 없는 신세, 꿈에서라도 고향에서 부모님과 같이 지내는 게 그나마 위안일까? 남북과의 교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민족성과 역사성에 대한 우리의 숙제를 그나마 풀어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임진년 난리를 당하매>를 읽으면 민족 가장 큰 위기 중에 하나인 임진왜란이 나온다. 이순신 장군을 생각하면 우리도 그분의 업적을 크게 기리지만, 북한도 그렇다. 이순신 장군 외, 곽재우 장군, 정문부, 고종후, 최경회, 고경명, 이정암 등 수많은 의병들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와이프와 몇 달 전 같이 여행 겸 진주성을 방문했다. 진주박물관이 진주성 안에 있다. 진주성은 남강 옆에 있는 아름다운 성이나, 진주성의 전투로 수 만명에 이르는 병사와 성민들이 모두 도살당했다. 이때의 참혹함이라 어떻게 말하랴?

 

의병들의 봉기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와 왜군에게 큰 방해거리였다. 이들이 벼슬을 바라거나 또는 공명심에 불타서도 아니다. 조선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조선의 군왕을 위해 일어났다. 하지만 안타까우면서도 뒤에 나온 해설자의 말처럼 조선은 조선민중의 국가가 아니라 군왕의 것이었다. 유학 특히 성리학의 국가인 조선이 사대부의 가치란 공자나 맹자의 가르침보다 지배계급의 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 성리학의 이점만 내세운 것이다. 의병들은 그런 전형적인 사대부들의 감각을 보여주었다. 아니라면 곽재우처럼 다소 산신처럼 되고 싶다는 도교적 모습도 보여준다.

 

심지어 서산대사나 사명당 같은 법력이 아주 높은 고승조차 그런 감정이 역력하다. 이정암의 경우 백성의 슬픔을 잘 드러난 것 같았다. 광해군에 대한 재평가에서 임진왜란에 대한 그의 활약을 선조실록에서 잘 다루어주지 않은 것 같다. 이정암의 기록을 보니, 한양수복 후 선조를 비롯한 고관대신들이 다시 돌아오자, 다른 왕자의 집은 모조리 없어졌으나, 광해군의 집만 멀쩡했다고 한다. 민심은 천심이란 말이 있다. 천심은 그러하다. 한양의 최고의 집인 왕궁이 모조리 불에 탔으나, 서애 유성룡 선생의 집은 온전했다고 한다.

 

백성들에 대한 고통을 잘 아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납득할 것이다. 이 책에서 당시 임진왜란 이전 조선인구는 약 416만이었으나, 전쟁 이후 인구가 약 152만으로 감소했다. 7년 동안 새롭게 태어난 아이들의 수를 생각하면 약 300만 명에 가까운 생명이 전화로 사라진 것이다. 전쟁의 비참함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임진년 난리를 당하매>를 읽으면 전쟁 당시의 그들의 마음을 볼 수 있다. 죽음과 가까운 시간, 죽음을 넘어 전쟁 이후의 시간들까지 말이다. 아쉬운 일이나 대부분 자연도피나 전형적 성리학적 인간에 치중했다.

 

이 작품이 기본적으로 의병장으로 활약한 분들의 이야기인 점에서 양반중심사회의 조선인 점에서 한계가 드러난다. 하지만 임진왜란은 조선이란 국가 더 나아가 민중이 왜적을 상대로 모두 합심하여 이겨낸 전쟁이다. 승리했지만, 그 피해는 막대했다. 그 유명한 이순신 장군조차 호남이 무너지면 조선이 무너진다고 했다. 경상도에서 호남의 입구인 진주성을 목숨 걸고 싸운 조선의 민중, 그리고 호남에서 왜적에 맞서 싸운 의병과 승병들, 사실 우리는 이순신 장군이 가장 크게 이긴 전투 중에 한산도대첩, 명량대첩을 생각할 것이다. 한산도대첩은 세계4대 해전에 들어가고, 명량대첩은 10척에 불과한 전선으로 수 십 배의 적을 물리친 승리이다.

 

명량대첩으로 패배하자 왜적들은 그 복수심을 품고 해남과 강진일대 민가를 습격하여 노략질을 했다. 마을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베고 죽였다. 영광의 승첩 뒤에는 민간인들의 학살은 잊어지는 이야기뿐이다. <이충무공전서>를 읽으면서 그 당시 조선민중이 겪은 아픔과 고통을 보았다. 의병장의 이야기에는 민중이 겪은 이야기가 부족해서 안타까웠다. 유성룡 선생의 <징비록>에서 본 조선의 모습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임진년 난리를 당하매>도 역시 그런 상황에서 지은 글이고,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자면, 그 힘든 상황을 이기기 위한 글일지도 모른다.

 

임진왜란 큰 위기는 사실 중국과 일본의 관계성에서도 보인다. 일본이 미국의 우방이고, 자본주의에 의한 자유주의 국가체계이므로 한국과 우방국가 관계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한국인 중에서 일본인 개인보다 일본과 중국이란 큰 틀에서 보자면 일본이 더 싫다 말하는 경우가 많다. 항일투쟁 당시 일본에 저항하던 세력은 조선인만 아니라 중국인도 있었다. 같이 저항하던 기록과 역사적 정신이 있기에 그게 가능했다. 드라마 영화 <임진왜란 1592>을 보면서 한국과 중국이 합작한 작품이지만, 그 속에 중국이 어느 정도 임진왜란에 대한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유정이 고니시와 협상하여 시간을 벌 때, 난을 평정한 이여송의 모습이 나오는데, 이여송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억지로 무예가 뛰어난 그의 모습을 보여줬다. 평양성전투와 벽제관전투에서 이여송은 벽제관에 돌격하는 모습은 자못 영웅적으로 보여줬다. 하지만 그 뒤 이여송이 진격하지 않고 더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진린 제독은 이순신의 죽음에 대하여 깊이 슬퍼하는 모습을 매우 강조했다. 심지어 명나라황제가 이순신에게 준 9가지 보화를 일일이 화면으로 보여주는 모습도 있었다. 중국 명나라가 지원하여 나름 전략적으로 도와준 것은 사실이나 임진왜란에서 가장 큰 승리요인은 이순신 장군과 수군 그리고 의병장과 의병, 승병들이다. 조선의 민중이 있었기에 조선은 썩은 뿌리를 300년 이상 유지할 수 있었다.

 

만일 조선 조정에 서애 유성룡 선생 같은 분들이 모두 당상관 자리에 있었다면 희망이 있었지만, 현대 한국을 두고 특히 젊은 친구들이 헬-조선이라 부른다. Hell이란 지옥이 조선에 있다는 웃음이 나오는 슬픈 현실은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그래도 이 책의 의병장들은 그나마 났다. 이들은 고지식한 분들이지 적어도 꼰대는 아니다. 자신의 신념 아래 목숨조차 초개처럼 던졌으니 말이다. 어느 의병은 아버지가 왜적에게 죽자 목숨을 아까지 않고 싸웠고, 당상관까지 오르고 심지어 선조에게 술을 하사받을 정도로 인정받았으나, 역시 전투 중에 순국했다.

 

옳은 행동을 하고, 자신의 신념을 위해 그리고 조선과 조선의 민중을 위해 목숨을 버린 그들이 고지식하다고 해서 우리는 그들의 가치를 내릴 수 없다. 일제에 대항하던 많은 조선의 민중들이 그나마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순신 장군과 의병들의 활약이다. 항일투쟁정신에서 그들이 살던 1900년대 초에 그보다 300년이나 더 된 역사를 찾았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 항일전쟁을 할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런 마음을 같이 나누고 있었고, 그 마음이 아직도 이어져 간점에서 겨레라는 이름이 멀지만 한편으로 은근히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위기의 순간, 아무리 미운 상대방이라도 합심할 수밖에 없고, 그 과정이 순조롭지 못해도 합심의 순간, 서로를 위해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점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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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7년 세트 - 전7권
정찬주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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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관련 드라마를 보면 대부분 고관대신과 일반 신료를 보면 표준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역사적 사료를 보면 조정대신들이 의논이나 토론할 때 방언이 많이 섞여서 잘 알아듣지 못할 경우가 많다고 했다. 언어의 존재성에서 언어란 사회적 관계성을 내포하고 있다. 사회적 관계성이란 비단 국내적 상황이 아니라 지역적 조건에도 관련이 있다. 외지에서 살아오다 이제 조정에 와서 표준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그렇게 흔한 것은 아니다. 평생 전남지역이나 부산지역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서울에 오면 말투가 새삼 다름을 알게 된다.

 

물론 서울사람들이 지역에 내려가면 자신의 말은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지만, 그들이 말하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 그러나 일정 기간 지나면 어느 정도 대화는 성립된다. 그 지역의 특성, 그 지역의 사람들, 그 지역의 역사, 그 지역의 아픔까지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읽은 <이순신의 7>이란 소설은 그런 작품이다. 이순신과 관련된 미디어로 제일 유명한 작품은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과 영화 <명량>이 있다. 전자는 이순신의 일대기를 약간의 픽션을 잡어 넣어 어느 정도 재미를 보여준 드라마이라면 후자는 명량대첩의 이순신을 하나의 영웅주의적 관점으로 바라본 영화이다.

 

어느 것이 좋다 안 좋다 에서 생각해보면 나는 전자가 좋다고 생각했다. 이순신의 끈기와 인내심은 분명 높다. 하지만 일방적인 인물이 아니다. 그는 수하에 많은 장수를 거느린 전라좌수사 겸 수군통제사이나, 막상 회의를 진행할 때 첨사나 만호 같은 상급무관만 아니라 권관이나 주부, 하다못해 일반 수군병졸이나 격꾼까지 모아서 회의를 진행했다. 단순히 위에서 내려보내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수시로 보고를 받고 토의하여 최상의 결론에 도달하는 리더쉽이 2323승의 비결이었다.

 

그런 비결을 보자면 <명량>이란 영화에서 다소 떨어지는 감이 든다. 그나마 <불멸의 이순신>에선 사사로이 병졸 하나하나를 다독거리는 모습에서 이순신 전대의 비결이 나온다. 화살촉 하나 만드는 노인, 배에 올라 열심히 톱질을 하는 목수, 화살을 열심히 날리는 수군 궁병까지 찾아간다. 조선시대 계급사회에서 양반과 상민의 차이는 엄청난데, 거기에 수군통제사라면 당상관 중에서도 상위계급이다. 그런 높은 자리에 있는 장수가 일개 군졸에게 다가가고 그들을 이해해주면 어느 누가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을까?

 

군대생활에서 일개 사병과 대대장의 차이는 어마하다. 이순신은 지금의 직급에서 생각하면 대대장보다 높은 해군참모총장이다. 해군참모총장이 직접 전선에 올라가 총탄이 날라 오는데도 피하지 않고 사병을 독려한다면 그 선단은 최고의 용사로 거듭날 것이다. 지금의 군대를 보면 위의 참모진은 안전한 후방에서 마치 체스나 장기 두듯이 전력을 움직인다. 그들의 지휘는 곧 사병들의 목숨 1명을 버릴 것인가? 혹은 100명을 버릴 것인가? 하는 숫자 계산놀이만 하는 셈이다.

 

<이순신의 7>을 보면 이순신이 다른 모습으로 나온다. 우리가 늘 미디어에서 보던 이순신은 표준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이순신은 건천동 일원에서 어린 시절을 잠시 보내고, 청소년과 청년기는 충난 아산 외가 쪽에서 보낸다. 결혼은 보성군수 방진의 딸과 하여 전남 보성으로 내려갔기에 그가 겪은 언어적 구조는 서울 표준어보다 지방의 방언이 더욱 많이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이야 서울 부산까지 거리가 KTX2시간 반, 항공기로 1시간, 자동차 4시간 이상이면 돌파한다. 그 과거시대 걸어서 한양까지 1달이고, 말을 타고 가도 2~3일은 걸린다. 교통적 편리함은 곧 왕래할 수 있는 시간길이를 척도 할 수 있고, 그 길이에 대한 시간은 타 지역에 대한 정보와 이해도까지 이어진다.

 

높으신 양반들은 표준어, 하층민들은 방언을 사용하는 점은 언어에 담긴 사회적 권력을 의미한다. 반상관계의 엄격함에서 전쟁에서 과연 그런 단합력이 나올 수 있었는가? <이순신의 7>은 임진왜란 발발 전부터 노량해전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마지막 마무리는 <이순신의 7>에 대한 후기를 적어준 홍기삼 문학평론가의 글이다. 홍기삼 동국대학교 전 총장의 글을 보면 내가 이 책을 보던 내용과 그가 봤던 부분은 차이가 난다. 하지만 어느 정도 내 감이 맞은 것이 있었다. <이순신의 7>을 작성한 정찬주 작가의 고향은 보성이다.

 

전남지역의 해안가는 부산경남과 마찬가지로 왜구들의 침입이 잦았다. 특히 1555년 을묘왜변 당시 전남 강진 일대는 큰 위기에 봉착했고, 이순신의 조력자 중 하나인 동고 이준경 선생이 지휘하던 관군은 왜구를 무찔렀다. 을묘왜변은 보통 왜구의 숫자와 규모가 달랐다. 제법 큰 군사규모를 가진 해적군단이었다. 전남지역의 앞바다에 계속 왜구가 출현하고, 임진왜란 이전에도 계속 침입하여 많은 양민과 관군들을 피살했다. 보성 역시 해안가가 옆에 있었고, 보성 좌측으로 장흥군과 강진군, 우측으로 순천시와 여수군이 위치했다.

 

이순신이 처음 부임한 곳은 전라좌도 수군영이다. 전라우도 수군영은 해남에 있었다. 전라지역이 경상지역보다 일본 대마다보다 멀기 때문에 군사들은 경상도 수군기지에 더 많았다. 장비와 재물 그리고 지원도 그렇다. 이순신이 속한 전라좌수영은 수군기지 고을도 부족하고, 인력도 부족하고, 전선도 부족했다. 1년 동안 좌수사로 활동하면서 다른 수군기지보다 더 강한 전력을 갖춘 것은 그의 능력이었다. 하지만 거북선을 축조하고, 군량미를 만드는 것은 혼자서 불가능하다. 그것을 같이 만들어나갈 인재들이 필요하고, 그들의 마음을 잘 알아줘야 했다. <이순신 7> 앞부분을 보면, 진무를 맡은 수군집안에 사람이 죽어 이순신이 조문가는 장면이 나온다.

 

좌수사가 일개 수군 병졸을 위해 조문을 가고, 거기에 필요한 장례음식과 물품을 대주는 모습이 나온다. 전쟁 중에 아군의 병력을 지키기 위해 최대한 작전을 유리한 쪽으로 검토하며, 전투과정 중 사망한 병졸 하나하나 기록하고, 그들의 유해를 집으로 보낼 때 곡식이나 물품을 보내고 위로했다. 특히나 전몰장병을 위해 제사를 올리는 장면에서 많은 수군 장병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순신이 엄정하고 군기를 세우는 무관인 것은 분명하나, 사실 부하 장병을 아끼고, 백성을 사랑하는 모습을 그려내는 것은 어렵다.

 

TV에서 보이는 이순신은 이상화 된 인물이지만, <이순신의 7>은 이상적인 인물보단 서민과 같이 숨을 쉬는 정겨운 모습으로 나온다. 송희립이 전라도 사투리를 쓰면, 이순신은 충청도 사투리를 사용한다. 사투리는 단순히 방언으로 볼 게 아니라 문화와 역사적 공간을 이어주는 전달수단이기도 하다. 홍기삼 문학평론가가 주목한 방언의 가치, 그리고 임진왜란에서 호남이 없었다면 절대로 조선은 없었다고 하는 그 사실에 주목한다. 이 책을 읽을 때 단순히 소설 그 자체도 좋지만, 비봉출판사에서 출간한 <충무공 이순신 전서>, <이순신과 임진왜란>, <난중일기>, <징비록> 모두 같이 보면 좋다.

 

거기에 조금 추가하면 기축옥사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면 좋을 것이다. 명량대첩에서 이순신은 앞으로 나가지 않은 장수들에게 호통을 친다. 그 중에 제일 유명한 사람이 안위 장군이다. 안위는 거제현령으로 명량의 승리로 정3품 통정대부까지 이르고 후에 수사 자리에도 오른 장수이다. 그는 사실 벼슬을 받을 수 없는 처지였다. 1589년 일어난 기축옥사에서 정여립이 안위에게 5촌 당숙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사촌형제들의 아이들도 친하게 지내는데, 조선시대라면 상당히 가까운 사이다. 안위는 기축옥사 여파로 귀양 가고, 전쟁 중 풀려나 활약을 했다. 첨사 이응화 역시 기축옥사와 연루되어 귀양가다 다시 이순신의 도움으로 공을 세운 인물이다.

 

기축옥사가 중요한 이유는 기축옥사에서 가장 많은 화를 당한 곳이 호남지역이다. 정약용 선생이 강진에 유배올 적에 호남에서 명망 있는 사대부 집안은 3~4곳 정도라고 했다. 많은 동인 계열 선비들이 유배나 죽임을 당했고, 거북선 돌격대장 이언량은 광산이씨인데, 광산이씨 중에 이발과 이길 가족과 친지들은 선조와 정철에 의해 가장 많은 화를 당한다. 임진왜란 시기에도 동인(북인과 남인)과 서인, 관군과 의병대의 체계가 달랐고, 특히나 북인 위주의 의병, 남인위주의 관군은 전쟁 중에 많은 희생을 받았다.

 

전쟁이 종료될 때 가장 많은 피해를 당한 세력은 남인이었다. 이순신이 서거한 날, 서애 류성룡 선생은 파직되었다. 그가 파직된 이유는 탐욕이 많고 시기심이 넘치고, 군왕을 속이고 조정을 어지럽힌 이유이다. 전쟁 중 도체찰사의 업무와 내정, 외교에서 류성룡 선생이 없었다면 이 모든 게 거품이었다. 이순신의 목숨이 선조에게 위협받을 때 정탁에게 도움을 받았는데, 정탁과 류성룡은 모두 퇴계 이황 선생 문하생이었다. 전장에서 장병들은 죽음과 배고픔에 힘겨워 하는데, 중앙관료와 선조는 권력을 유지하고 누리기 위해 고민하는 모습만 나온다.

 

홍기삼 문학평론가는 선조를 두고 암군 중에 암군(暗君)이라 한다. 선조를 두고 조선왕조실록에서 억지로 나쁘게 평가하지 않는다. 기축옥사와 인조반정의 특성은 동인의 제거이다. 동인을 제거한 서인의 관점에서 기축옥사는 당연한 일이고, 인조반정에서 동인이 만든 자리를 처리하는 게 제일 급선무였다. 안위 장군이 업적이 있어도, 정묘호란 때 그를 기용하지 않았다. 안위의 동인제거의 기회를 준 정여립의 5촌 조카이다. 광해군과 동인의 후예 북인을 제거한 서인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광해군의 가치를 깎으려면 선조의 입지를 올릴 수밖에 없다. 소설에서 원균의 모습을 잘 볼 수 있다. 아주 고약하고 나쁜 모습이다. 같은 조선인까지 잡아 죽여 머리모양을 왜군처럼 만들어 행재소로 보낸 공으로 치부하던 그 모습은 사악한 인간 중에 인간이었다. 이순신의 자리를 자기가 차지할 때 그가 한 말은 질투에 미친 어리석은 인간이었다. 수군 장병을 수장시키고, 수많은 전선을 침몰시키며, 조선의 백성들이 왜적에게 도륙당할 때, 그를 기용하고 치켜 세운 선조와 윤두수의 행적은 대한민국 역사가 끝나는 그날까지 잊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선조는 이순신과 원균의 공적으로 동급으로 취급했고, 원균의 집안에 계속 곡식을 하사하여 그의 공을 치하했다. 선조는 이순신의 업적을 끝까지 인정하기 싫어했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그는 원균의 집안에게 내려준 곡식을 금지했고,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인조와 서인들은 원균의 집안에게 곡식을 다시 내어주기 시작했다. 이순신과 임진왜란을 바라보는 시점은 조선시대 후기까지 이어진다. 이순신의 사당을 명나라 장수들이 선조에게 요청했지만, 선조는 끝내 설치해주지 않았다. 홍기삼 문학평론가가 <징비록>의 글을 인용했다. 이순신의 유해가 고향 아산으로 돌아갈 때 많은 백성들이 나와 통곡하고 슬퍼했다고 말이다.

 

그 내용은 비단 백성들만 아니다. 류성룡 선생도 자신이 느낀 슬픔을 백성의 모습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때까지 우리는 이순신의 영웅주의 관점에서 칭송했지만, 인간 이순신에 대한 모습을 잘 몰랐다. <이순신의 7>에서 이순신은 아들과 조카를 똑같이 대해주고, 요절한 두 형님을 대신하여 조카의 생계와 교육, 그리고 결혼까지 챙겨준다. 남솔(濫率)이란 죄가 있다. 부임한 사또가 너무 많은 가족을 임지로 데리고 가면 그들의 부양으로 많은 백성들에게 고통이 온다. 이순신이 남솔에 대해 주변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자, 눈을 흘리면서 답변하길 돌봐줄 사람도 없는 저 어린 것들을 어떻게 내버려두고 갈 수 있냐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며 이순신의 덕을 인정했다. 그 덕분에 이순신의 조카들은 모두 임진왜란에 활약했고, 노량에서 이순신을 대신하여 군함을 지휘했다. 사람을 감동을 시키면 그 감동을 준 자가 죽어도 그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는다. 명예와 체통을 중시하던 조선시대지만, 그 명예에 대한 의미를 조금 더 생각하면 현대사회에서도 본 받은 점은 있다. <이순신의 7>에서 이순은 눈앞에 바다를 두고 왜적만 싸운 것이 아니다. 눈앞의 바다보다 더 깊고 거친 마음의 바다 건너편에 있는 권력자들은 이순신의 목을 언제라도 물어뜯을 기세를 보여주었다.

 

드라마에서 원균이 사망하고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될 때 비장미를 보여주지만, 책에서는 비장함을 보여주기보단 공허감으로 보여주었다. 그래도 그가 칼을 잡고 배 위에서 싸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신의 주변에 몰려든 조선의 백성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임명사령장을 받지 않고, 그대로 병을 핑계대고 물러났다면 조선의 백성들은 모조리 도륙 났을 것이다. 조선이 망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조선의 백성이 몰살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이순신이 임진왜란 중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백성들에게 희망이 있는 것이고, 삶의 목적을 부여했다. 이순신은 백성들의 삶과 희망을 주고 그렇게 세상을 떠나 우리의 바다를 지키는 바다의 신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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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5-23 2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주는 의미는 단순히 의사소통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5월 23일이 고 노무현 대통령 기일이라서일까요. 충무공의 모습 속에서 노 대통령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네요.

만화애니비평 2018-05-23 21:58   좋아요 1 | URL
안그래도 노짱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예전에 봉하마을에 가서 제초도 하고 그랬는데, 4~6년 전 봉하마을에서 제초기 돌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노무현대통령에 대한 평이 아직 좋지 않았으나, 이제 재평가 받으니 마음이 참 착찹하네요...
 
어우야담 - 보유편
이월영 역주 / 한국문화사 / 2001년 7월
평점 :
절판


조선의 역사를 한국에서 언제부터 민중이란 존재가 서적에서 오고가고 했을까? 한국의 문학에 대한 연구에서 설화(舌禍)를 중심으로 이어져갔다. 그 의미는 기록이 아닌 구술적 체계로 통해 전해진 것이다. 한국의 설화문화는 신화나 민담 등과 이야기로 흘러간다. 그러므로 구설의 가치는 지금이야 이야기의 소재이지만, 과거에는 민중에서 흘러가는 이야기일 뿐이다. 말로 구전되므로 이야기 내용에서 인물과 장소, 사건과 흐름조차 계속 변해간다. 문자로 기록되지 않으면 자세한 전후를 알기 힘든 부분도 많다. 그런 점에서 조선의 역사에서 기록문화를 담당한 사대부 중에 제대로 백성의 삶에도 관심을 가진 자가 있다.

 

유학(儒學)의 가치에서 백성을 다스리기 위한 기록이 아닌 그냥 사람 사는 이야기를 적은 학자가 있었다. 우리는 흔히 어우야담(於于野談)이란 말을 얼핏 들었을 것이다. 어우(於于)라는 것은 어우당(於于堂) 유몽인이 저술한 책이며, 야담이란 말처럼 정사만이 아니라 야사나 혹은 전설이나 민담조차 넣는 경우도 있었다. 유명한 역사적 기록에도 재미난 내용도 나온다. 유몽인을 임진왜란 당시 중국 명나라 외교를 진행하고, 분조와 무군사를 이끈 왕세자 광해군을 보필했다. 선조 말년과 광해군 집권 시기에도 유몽인은 계속 활동을 했다.

 

전쟁을 겪고, 어지러운 조선 중후기를 보냈기에 어우야담은 온갖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전설의 고향이나 혹은 조선의 야사를 다룬 드라마에 나올 법한 이야기 소재가 <어우야담>에 나온다. 명종 시기 을사사화로 인해 대윤 윤임 일파는 숙청을 당한다. 대윤의 일파 중에 유인숙, 유관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그 시체마저 부관참시를 당하는 화를 당한다. 여기 유관의 하녀인지 혹은 유인숙의 하녀인지 조금 다르게 전개되는 바가 있으나, 어우야담에서 유인숙의 하녀는 주인을 죽게 만든 정순봉의 집에 들어가게 된다.

 

처음 다른 종들은 모두 슬퍼하고 있으나, 얼굴이 고운 이 하녀만 오히려 생기 있는 표정으로 주인을 섬기고, 주인 가족 모두 그 하녀를 아꼈다. 하지만 어느 날 주인 정순봉이 계속 병을 앓다가 죽고 말았다. 가족들은 가장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었고, 무당을 불러 점을 친 결과 주인이 사용하는 베개 안에 해골이 있었다고 한다. 인간의 해골이 베개에 있으니, 그 당시로는 저주, 지금으로는 전염병에 걸려 죽은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죽은 사람의 시신을 욕되게 하는 짓은 최악의 행위이다. 그러나 시체의 유골을 가져올 수 있는 이유는 해골의 주인이 병으로 죽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정순봉은 자신이 꾸민 계략에 결국 복수를 당한 셈이다. 문초과정에서 주인 가족에게 스스로 죄를 밟히고 그녀는 정순봉의 빈소 옆에서 맞아 죽었다고 한다. 이후 대윤 일파의 무고가 풀리고 명예를 회복하자, 그녀의 시신을 주인의 묘지 옆에 묻혔다. 지금도 문화유씨 일족은 그 무덤을 소중히 여기고 제사를 지내준다고 하니 600년 전의 일이지만, 인간의 도리는 그 자신이 생명이 다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정신이 살아있는 한 영원한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정순봉에게 아들이 있었지만, 부친이 저지른 죄악에 괴로워하며 평생 벼슬을 나가지 않고, 은거하여 살았다는 점이다.

 

어우야담은 전반적으로 이야기의 전개는 길게 가나, 결론 부는 너무 담백하다. 그가 보여준 글의 깊이는 그 간략성과 결과에서 보이는 삶의 자세이다. 인간은 글에서 자신의 생각과 인품을 보여준다. 한글이 아닌 지식인 계급인 사대부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유몽인의 글은 억지로 자신을 내세우려 하기보단 그저 주변 이야기를 듣고 촌평을 날리는 형태이다. 그가 보여준 글의 정신은 인간의 삶은 순탄치 않은 점, 그리고 과거와 권력에 대한 풍자, 전쟁이 안겨준 고통과 슬픔이다. 임진왜란을 겪으며 직접 수습했던 이로써 안타까운 사연도 많다.

 

사연의 주인공은 비단 양반 사대부일까? 전쟁 이후로 도적이 늘었다. 하지만 도적은 사람의 목숨을 노리는 게 아니라 배고픈 배를 해결하는 게 목적이다. 강도짓을 해도 살인을 하지 않은 이유는 대부분 그들이 양민이었지만, 현실의 빈곤과 어려움이 그렇게 만들었다. 유몽인은 다른 사대부와 달리 시문놀이에 젖은 정치가가 아니라 현실을 제대로 보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광해군 시절 임진왜란과 명나라 청나라 교체라는 최악의 시기였다. 어려운 시기였으나 어우야담에는 운명론적인 내용과 점복(占卜)에 대한 글이 많다.

 

점복으로 운명을 치는 사람은 양반보단 중과 천민 갖가지 사람이 많다. 또한 전쟁이란 큰 위기를 맞이했으나 귀신이야기도 나온다. 광해군 시대를 검토하면 유일하게 이때 외적의 침입이 없었다. 북으로 청나라에 대해 기미술을 사용하고, 왜국과는 외교와 통상을 재개했다. 북쪽의 평양감사로 박엽이란 인물이 있었다. 박엽이 북쪽에서 지키고 있을 때 청나라는 함부로 조선을 넘보지 못했다. 박엽이 지휘하는 조총부대는 아시아 최고의 사격부대였다. 물론 인조반정 이후 이괄의 난에서 이들은 모조리 박살났다.

 

그런 박엽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박엽은 성격이 호탕한데, 그가 전쟁 전후로 밤길을 가다 아름다운 여성이 자신의 옷깃을 일부러 스쳐가자, 그녀에게 말을 건 후 그녀의 집에 간다. 그녀의 집에 가니 가족들은 잠들어 있고, 그녀는 박엽에게 술을 접대하고 밤을 그렇게 보냈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녀는 사람이 아니고 차가운 시신이었다. 제대로 식사하지 못해 굶주림과 병으로 그녀와 그녀의 가족은 모두 죽어 있었다. 옆집에 가서 갖바치에게 사정을 알아보니, 그 집은 사대부 집안이었으나 전쟁 중 굶주림으로 집안 식구가 모두 죽었다는 것을 알자, 박엽은 관을 가지고 와서 그 집 식구 모두 장례절차를 수행하였다.

 

귀신이 단순히 나쁜 존재로 본 게 아니라 귀신조차 현명한 존재로 그려낸 셈이다. 인간의 운명이 죽음을 당할지라도 그 본분을 잊지 않았고, 하물며 유관의 어린 하녀는 자신의 주인을 위하여 복수를 했다. 민중이라도 신분적으로 하잘 것 없어 보이는 종복들도 인간의 도리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그런 유몽인이기에 그의 최후 역시 뭔가 모르게 마음이 아프다. 유몽인은 본래 동인이었고, 동인이 남북으로 갈렸을 때 북인으로 전향한다(그래서인지 동인에서 북인의 영수로 활동한 이산해의 이름이 자주 거론된다).

 

임진왜란 당시 남인 서애 유성룡이 북인의 탄핵을 받고 물러나자, 북인 이산해와 그 중심세력이 등장하고, 이때 광해군은 어려운 시기를 보낸다. 광해군은 의병과 같이 활동한 세력이므로 북인 내에서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으로 나누어지고, 선조가 죽자 소북 영수 유영경은 광해군 세력인 이이첨에 의해 귀양 후 사약을 받고 죽는다. 유몽인은 북인에서 중북이었고, 권력에 지향하기보단 그저 업무에 충실히 이행하고, 글을 봐도 권력을 향하기보단 인간의 운명과 도리에 관심을 가진다.

 

말년은 권력의 중심보다 조용히 자연과 함께 살고자 했던 그의 꿈은 박살난다. 1623년 인조반정에서 유몽인은 직접적으로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나, 자신의 아들과 주변인물들이 광해군지지 세력이었고, 인조반정에 대한 반정을 계획하다 발각되어 연좌되어 죽게 된다.

 

유몽인은 세상물정에 밝은 사람이다. 그의 글을 봐도 세상의 풍파가 얼마나 심한지 더구나 기묘사화의 조광조, 을사사화 윤임, 기축옥사 최영경을 거론한 자체로도 당쟁과 정치권력의 문제를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인간의 도리를 알았다. 아들이 인조반정에 반발할 때 유몽인이 말리려다 참은 이유는 많은 사료에 나온 것으로 유몽인의 시 <상부탄(孀婦歎)>을 아들이 매우 좋아했기 때문이다.

 

일흔 된 늙은 과부, 안방을 지키며 홀로 사는데(七十老孀婦, 單居守空壺)

이웃이 개가를 권하며 무궁화 같은 얼굴의 선남이라네(傍人勸之嫁, 善男顔如槿.)

여사(궁중에서 글을 맡은 여관女官)의 시를 많이 읽고 태임(太姙)과 태사(太姒, 각각 문왕과 무왕의 어머니로 덕 있는 부인을 상징한다)의 가르침도 익히 아니(慣讀女史詩, 頗知妊姒訓)

흰 머리에 화려하게 단장하면 고운 화장이 어찌 부끄럽지 않으랴(白首作春容, 寧不愧脂粉.)

 

인조가 왕이 되어도 자신은 광해군에 대한 마음을 버리지 않았다. 유몽인이 이미 세자시강원에게 광해군에게 학문을 가르쳤고, 그와 더불어 임진왜란을 수습했기에 누구보다 광해군에 대한 마음이 아련했을 것이다. 북인의 특징, 박엽에 대한 글이 있는 점에서 그가 바라본 정치적 상황은 어림잡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우야담에서 어떻게든 발버둥치려 해도 운명의 길을 접어드는 이야기가 많다. 가령 점술사가 무덤에서 벌이 나오면 나를 죽일 것이라 했는데, 바로 그렇게 되는 이야기나, 아니면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이란 예언조차 그렇다.

 

이산해와 관련된 내용에서 아계 이산해의 스승은 토정비결을 저술한 이지함이다. 이지함은 이산해의 작은아버지였던 것이다. 인간의 운명은 바뀔 수 없는 것인가?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준경이 천거한 인물 중에 구수담이란 학자가 있다. 그는 명종 때 억울하게 죽었다, 그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여자에게 빠져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했다. 이준경이 그에게 큰 호통을 친 후 다시 공부하여 벼슬에 올랐다. 구수담의 아들 구영준이 손톱 하나가 빠져서 이준경이 왜 그런지 물어보니, 아버지 구수담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자 구영준은 너무 슬퍼서 땅에 손을 계속 움켜쥐었다가 그래 된 것이다.

 

인간의 천성을 고칠 수 있지만, 단지 이준경 같은 희대의 명재상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운명의 행운일지 모른다. 하지만 한편으로 구수담이 죽은 이유도 이준경의 천거로 조정에 나갔기 때문일 수 있다. 인간의 운명은 알다가 모르고, 일이 끝난 것을 보면 그게 어찌할 도리가 없이 되었다는 것도 볼 수 있다. 어우야담은 그가 직접 보거나 누구에게 들은 이야기를 기록했기에 일정한 소재가 아닌 다양한 내용을 등장한다. 하지만 책을 보면서 참 불행 중 다행이라 여겼다. 광해군 시기 한국의 국문학은 새로운 길을 열어간다.

 

한국 국문학에서 한글로 시조를 읊은 고산 윤선도가 광해군 시절 이이첨을 비판하다 귀양가고, 한국 국문학 소설에서 홍길동전이 허균에 의해 만들어진다. 조선의 야사 중에 하나인 어유야담 역시 광해군 시절 나온다. 허균은 능지처참으로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기에 그의 서적은 모두 소실될 뻔했다. 다행히 그의 후손이 소중히 보관하여 400년 후 우리나라에서 소중한 소설이 되어주었다. 유몽인 역시 그런 위기에 겨우 벗어난 인물이다. 시대의 아픔에서 저자들은 힘든 여정과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들의 글은 우리에게 영원한 감동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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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3-15 08: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의「어유야담」은 중국의 「요재지이」와 같은 성격의 민담설화집인 것 같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8-03-15 09:23   좋아요 1 | URL
민담과 설화를 문자로 남겼으니 그가 해낸 업적은 가히 높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