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여지도 - 고산자의 꿈
임나경 지음 / 황금소나무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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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 때 남자끼리 영화를 본 안쓰러운 기억이 든다유치원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까지 이어온 옛날 친구와 극장가를 찾아가니 보고 싶은 작품이 매진이 되었다그래서 아쉬운 마음으로 다른 영화를 찾아보니 차승원 배우가 출현한 <고산자대동여지도>를 보았다영화를 보면서 느낀 것은 한국이란 내가 살고 있는 곳의 자연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사실과 영화촬영 당시 많은 고생을 했을 것이란 점이다영화촬영 시 무대 세트 외에 현장 로케이션에서 촬영하려면 우선 바다 위에서는 배를 타야 한다만일 진짜 나무로 만든 배를 타고 촬영했다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우리나라의 해양 특성상 서해가 아닌 남해 측의 대한해협 그리고 독도가 있는 동해는 수심이 깊고수심이 깊기에 파도의 높이가 매우 높다.

 

그런 곳에서 촬영했다면 많은 배우와 스텝 분들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그러나 영화는 영상미도 중요하나영상서사에 드러나는 스토리텔링즉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가는 것이 중요하다영화 <고산자대동여지도>는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이 다소 지겨운 감이 없지 않았다김정호 선생이 고생하여 전국을 돌고권력자에 의해 고난을 당하고당시 안동김씨 세도정치에 많은 백성이 신음하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의해 천주교 박해가 극에 달했다시대적 흐름에 대해 잘 반영한 것은 알겠지만김정호란 인물이 영화에서 권력자들의 입김에 움직이는 모습이 너무 심했고영화초반 차승원이 보여준 다소 개그적인 요소에 치중한 느낌이었다.

 

영화초반부터 재미를 주려다 후반에 갈수록 진지한 고통이 다가올수록 영화내용이 약간 관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주지 못한 것 같았다김정호를 다룬 영화가 있다면 소설도 있을 것이다영화와 소설을 다르게 바라보면서 영화에서 김정호의 가족은 어린 딸 하나이고소설에서 가족은 망나니 아들 하나와 늙을 때까지 옆에서 보필해주던 딸이 있었다영화의 딸은 천주교 박해 때 고문으로 죽었지만소설은 그저 늙어가는 모습만 보여준다어느 모습이 김정호에 더 가까운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김정호의 기록은 여전히 미상이고그의 행적 역시 뚜렷하지 못하다단지 그의 기록만은 기록물로 우리나라 문화재에 큰 빛을 안겨주었다.

 

영화에서 김정호는 외적인 모습에 치중한 것 같았지만이에 반해 소설 <고산자의 꿈대동여지도>는 외적인 모습보다 그의 내적 심경주변사람들을 통해 보여준다소년 김정호는 어느 날 빛을 본다지도에 새겨진 많은 지리적 정보양반출신이 아닌 김정호가 한자를 안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다한자를 안다는 것그것은 책을 읽고 책을 쓸 수 있으며책으로 통해 지식을 얻을 수 있다당시 민란이 발생하고 정국은 어지러워도 그래도 민란을 막을 수 있는 이유는 지식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글을 알아야 병법을 알고전략과 책략을 짤 수 있다또한 지리적 정보를 담은 지도를 안다는 것은 전술에서 매우 중요하다글을 안다면 또한 조선의 정치통치술인 유교를 알 수 있다조선의 유학은 공자와 맹자보단 오히려 주자의 성리학에 가까웠다다산 정약용 선생이 어느 한 사람의 말만 보고 잘못된 생각을 고칠 의지가 없는 당대 현실을 비판했다글자 하나를 다르게 해석하면 사문난적으로 몰려 귀양을 가거나 죽임을 당하던 조선이었다문자를 안다는 것문자를 해석하는 것은 권력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소년 김정호는 한자를 보통 사대부양반보다 더 잘 알지만그의 신분이 한계였다조선의 후기는 그야말로 위기였고세도정치가 판을 치는 조선은 민중의 비명과 신음으로 넘치는 세상이다소년 김정호의 아버지는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 한양으로 이사 온다그의 아버지는 얼음을 지고가면 목적지에 도착하면 돈 대신 매를 받는다얼음을 이미 다 녹아 소용없게 되었기 때문이다만일 정확히 길만 제대로 보고 간다면아무런 고생이 없는데 말이다.

 

인간은 태어나면 자신이 태어난 지리적 환경에서 벗어날 수 없다나는 인간이 공간의 구조에 의해 지배받는다고 생각한다공간은 한편으로 문화적사회적정치적경제적 분리가 이루어진 최초의 영역이라 본다. <고산자의 꿈대동여지도>의 작가 임나경 소설 중에 <곡마>에서 북촌과 남촌이란 단어가 나온다북촌은 부유한 양반이 사는 곳이고남촌은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곡마>의 남자주인공 종사관은 가난한 무관이라면세도가들은 북촌의 권력자들이다.

 

지금 서울에 북촌 한옥마을이 있다고 한다공간적인 영역에서 과거에 그들은 어떤 사람들의 피를 이어가고 있을까과거의 죄를 후손이 책임지는 것은 부당하나그 죄에 의해 혜택을 받는다면 그것은 죄가 된다공간이란 영역은 인간에게 벗어날 수 없는 주박을 걸어준 것이다주박은 과학적으로도 얽혀있지만오히려 비과학적인 논리에 얽매여 있다김정호가 지도에 목숨 거는 이유그것은 지도를 보고 살아야 할 인간들이 너무 고생한다는 점이다보부상들이나 상인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이다추운 겨울 산에서 길을 잃으면 추위와 배고픔에 죽거나맹수와 산적에 의해 습격 받는다.

 

만일 제대로 된 길순라군이나 혹은 포졸들이 돌아다니는 길이 표시된 지도가 있다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김정호가 원한 지도란 바로 저런 것이다언제라도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지도그것은 그 누구의 것이 아니라 만 백성의 손에 있어야 하는 점이다인간이 자신에게 재능이 있어도 본인의 이익이 아닌 타인의 이익을 위해 살아간다면 많은 희생과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김정호의 인생은 자세히 모른다영화나 소설은 실제 인물은 허구의 이야기로 또 다른 영역으로 풀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소설에 많은 공감이 가는 이유는 소설에서 김정호의 슬픔은 김정호만의 것이 아니었다옆에 신분을 초월한 오랜 친구도 있었고그를 알아주는 학자들도 있었다사랑하는 여자존경스러운 청백리 상관오랫동안 정리해온 지도와 판본 등이 무참히 잘려나갈 때 김정호는 담담하게 받아낸 게 아니다밤하늘의 아름다운 별빛을 바라보며 눈물을 머문다김정호란 인물이 한국인 선조에서 위대한 인물이나소설에서 만난 김정호는 위대한 인간보단 미련하나 인간적이고 같이 있으면 좋을 것 같은 옆집 아저씨 같았다.

 

옆집에서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과자 하나 주면서 친구하고 사이좋게 지내라고 말할 것 같은 그런 사람이었다하지만 마음이 아프게도 그렇게 마음만 착해빠진 사람은 항상 손해보고 고통을 받는다역사에서 그때의 패자는 먼 미래에서 승자라고 한다김정호란 이름이 지금 우리 현대인에게 계속 되새기는 점에서 그는 역시 역사의 승자이다승자의 이름이 짙을수록 우리는 그에게 가해진 시대의 슬픔을 알아야 한다소설에서 청일전쟁이 등장한다정말 청일전쟁에서 대동여지도가 사용되었는지 아닌지는 모르나적어도 일본의 지리학자는 지도의 진면목을 알았다단지 그게 조선의 민중이 아니라 조선의 민중을 탄압했다는 게 슬플 뿐이다.

 

조선시대 후기 정조시대는 그야말로 르네상스였다정약용 선생이 관직에 오를 때 우리에게 찬란한 문화가 이어질 듯하다정조대왕 서거 이후 신해사옥과 황사영백서는 피로 얼룩진 비극을 만들었다유학은 본래 만민 즉 백성을 위한 학문이다공자가 유학을 만든 이유는 유학자란 백성이 자신의 생활에 아무런 걱정 없이 지내기 위해 존재하라는 의미이다유학자는 항상 열린 사고로 토론과 대화를 주고받으며윗사람은 오히려 아랫사람에게 모범이 되어 포용해야 한다공자의 유학 중 논어를 다룬 도서를 보니 그러하다.

 

하다못해 성리학의 시초인 주자가 만든 소학에서도 군자가 되기 위해서는 작은 것부터 실천해야 했다그런 점에서 소설의 실수는 성리학과 공자의 유학을 조금 잘못 배치한 것이 아닐까 하다민족의 스승인 다산 정약용 선생께서는 성리학의 병폐를 항상 지적하고공자의 유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실학이 왜 필요한가에서 백성에게 잘 살아가는 방법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공자는 사실 논어에서 농민에게 농사짓는 방법을 알려주는 게 아니라 했지만정약용의 사상은 농민에게 농사를 잘 짓는 방법이나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는 정보를 연구했다.

 

양반출신의 정약용양민 출신인 김정호신분은 분명 차이는 있지만그들이 보고자 하는 미래와 그들이 손을 내밀어주고 싶은 사람은 같았다그들의 의지가 높은 이유는 그들이 원대한 꿈을 꾸는 게 아니라그 꿈에서 헤엄치는 이들이 조선의 백성이었기 때문이었다조선후기 양반이 아닌 자가 공명첩으로 양반이 되던 시대가 왔다신분이 양반이고행실도 양반이던 자들은 세도가들에게 미움을 받아 자리에서 쫓겨나고한적한 지붕 아래 책만 읽어야 했다김정호란 인물이 조선시대 사람이라 하여 반드시 그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소설작가 역시 현대인이고그분이 바라보는 조선시대라 해도 현재 살아가는 인간인 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집안문중 어르신들 중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나오기 150년 전 동국여지지도를 제작한 분이 계신다당파싸움에 밀려 한적한 시골에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있었으나그분이 바라본 것은 중앙정부의 권력이 아니라 주변에 널린 것들에 대한 탐구였다하지만 주변을 바라보고 공부하고 연구해도 그것이 제대로 백성의 삶으로 녹아들기 위해선 행정적인 요소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분의 형제와 친구들은 당쟁에 휘말려 죽임을 당하고그 비참한 모습을 본 후 병으로 죽었다그분과 그분의 친구에 의해 한국 실학자 성호 이익에게 유지가 넘어갔으나성호 이익 선생 역시 백발의 선비로 인생을 마감한다이런 분들이 빛을 밝히게 된 건 한국인 역사에서 다행일지 모르나그 사실을 알면 알수록 아쉬운 마음만 가득하다권력 앞에 남을 희생시키는 세상돈 앞에서 양심을 파는 사회김정호 선생은 조선의 산과 강은 나라의 것이 아닌 백성들의 것이라 했다.

 

비록 군왕이 존재하던 시대라도 군왕은 군주로서 백성을 위해 정치를 펼치는 게 목적이어야 하는 도학을 추구해야 했다군주제가 존재한 조선이면 민주제가 존재하는 대한민국은 오죽할까대한민국이란 나라는 정부의 것이 아니라 국민의 것이다시련과 실패의 통한에도 길을 찾아간 김정호 선생이나형제들의 목이 참수되고 귀양살이에서 빛을 보여준 정약용 선생 역시 만백성을 위해 살아갔다그들의 위대한 업적이라 하나그들이 살아온 인생의 맛은 너무나도 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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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마
임나경 지음 / 황금소나무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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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소설 <곡마>를 읽게 된 동기는 약간 사소한 이유가 있지만, 소설 <곡마> 발매 이전에 재미있는 그림을 보았다. 조선시대 무과시험을 보는 장면을 그려놓은 그림인데, 그 모습이 참으로 특이했기 때문이다. 말 위에 있는 사람이 온갖 이상한 자세로 말을 타고 가는데, 마지막 장면에 말 2마리 위에 서서 가는 것이 아닌가? 현대로 보자면 말 위에서 현란한 묘기를 부리는 서커스단의 모습이 생각난다. 아니라 서커스단보다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 이들이 말위에서 보여주는 호기는 단순히 재미만이 아니라 무관이 전장에서 펼칠 전투에서 생존이 달린 문제이기도 하다.

 

한국에 위대한 성인 중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있다. 그가 무관시험 도중 말 위에서 낙마하여 낙방한 사례가 있다. 어릴 적에 단순히 승마를 하다 떨어진 것이라면 장군이 실수를 했다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무과시험을 본 순간 낙마할 정도로 고난이도 기술이란 점을 알았다. 소설 <곡마>는 여해와 월하선이 무관 지기택 종사관을 두고 서로 기 싸움을 하는 것이 간단한 소설의 이야기 내용이다. 하지만 내가 이 소설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무관이 수행하는 마상재 행사라는 점이다.

 

마상재 행사를 조선의 무관이 모여 훈련하는 훈련원에서 주관한다. 훈련원과 관련하여 내 직계 할아버지 중 1분이 훈련원에서 훈련봉사(訓鍊奉事) 업무를 수행했다. 훈련봉사는 조선시대 군사 시재(試才)와 무예 훈련 및 병서 습독을 관장하는 무관이었다. 그 할아버지의 아들은 어모장군(禦侮將軍)이었고, 그 할아버지의 손자 되는 분은 훈련원 사정(司正)을 맡았다. 기록을 찾아보니 무과시험에서 갑2위로 차석을 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면 도대체 어느 정도 무예능력이 뛰어나기에 그런 마술(馬術)을 부릴 수 있는 것일까?

 

할아버지들의 형제나 사촌들을 보면 만호(萬戶)직을 맡은 분도 많았고, 임진왜란 당시 약간 촌수가 먼 친척들이 전장의 장수나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순국하신 분들도 많았다. 조선시대 사대부 양반하면 대부분 글만 읽고 상황이 닥치면 도망치는 거드름을 피우는 부류가 많았지만, 임진왜란 전후의 무관은 참으로 큰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한명기 교수의 <병자호란>이란 도서를 보면 인조와 반정공신들은 무관의 반란이 두려워 결국 훈련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게 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조선은 완전히 청나라의 말굽에 밝혔고, 조선은 아무런 힘조차 내지 못하는 약소국이 되어 일제의 침략에 의해 멸망한다.

 

<곡마>의 소설은 보면 조선의 악운이 시작되던 찰나의 배경인 것 같았다. 시대적으로 조선이란 점은 나오지만, 그 시대가 언제라고 말하지 않는다. 내 생각으로 여해의 어머니 기련은 지아비를 잃은 청산과부이다. 한국의 여성에 대한 억압이 심각해지던 시절은 병자호란을 거친 후이다. 병자호란 이전까지 사대부 양반들의 무능함과 부패함이 극을 이루었고, 인조반정 이전 광해군이 만든 중립외교가 붕괴되면서 명·청 교체시기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였다.

 

병자호란에서 인조가 항복 후 많은 조선인들이 청나라에 끌려갔는데, 그중에 여인들이 참 많았다. 몸값을 주고 풀려나거나 아니면 그냥 운이 좋이 조선에 왔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집에 오니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청나라 오랑캐에게 몸을 판 더러운 여자라고 욕하고, 친가에 가니 가족들은 여자가 시집이 가면 그 곳의 귀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오도 가도 못하는 여성들은 죽음을 선택해야 했다. 이런 여자를 환향여(還鄕女)라고 하나, 우리는 속된 말로 화냥년이라고 한다. 물론 이런 비극은 여자만이 아니라 남자들도 당한다. 전쟁 중에 성질이 포악한 군대가 마을을 접수하면 우선 남자들은 모조리 죽인다.

 

여자는 겁탈하고, 아이들은 노예로 삼는다. 집에 남편이 죽게 되면 조선시대 여성은 재혼을 하지 못한다. 그대로 청산과부가 되어 생을 마감한다. 조선초기에는 재혼이 가능했지만, 사회적 모순은 이렇게 억울한 사람만 만들어낸다. 남편이 죽으면 시댁에서 며느리에게 강요하는 게 있다. 그것은 열녀문을 가문에 세우는 것이다. 여해의 어머니 기련(성이 기씨인지 모르나)은 그런 시대의 조류에 태어난 여자인 것 같았다. 병자호란 이후 열녀문에 대한 집착,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 담바고(담배의 옛말)가 유입되는 처음에 장죽(긴 대나무)에서 곰방대가 들어올 정도라면 17세기 후반 내지 18세기 초반으로 보이며, 더 중요한 점은 조선통신사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과 수교가 단절되다 광해군이 일본과 다시 수교를 놓았으며, 인조 역시 청나라와 명나라 관계에서 일본에 대한 외교 전략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궁궐의 당상관들이 흥청만청 주색을 밝힌 점을 본다면 숙종 정도가 적당한 것 같다. 효종과 현종은 평소 검소하고 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기에 신하들의 관계에서 마찰이 심했다. 개혁의 의지를 가진 2사람은 실세관료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이익을 빼앗는 자이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 빼앗는 게 아니라 농민의 세금을 줄이거나, 사대부들의 특권을 다소 제한하는 이유가 그런 것이다.

 

구중궁궐 높으신 관료가 주색에 빠지려면 많은 재물이 필요하고, 그 재물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가? 생각하면 간단한 문제다. 왜구의 침입도 문제지만, 주색과 재물에 미친 탐관오리들은 더욱 문제이다. <곡마>는 이런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시대가 처해진 시대적 맥락과 상황은 반영된 점을 알 수 있다. 소설을 보면서 생각한 점은 소설을 그다지 많이 읽지 않은 입장이나, 작가가 여성과 남성이냐에 따라 글의 느낌이 상당히 다르다는 점이다. 물론 작가 모두가 자기만의 세계관이나 혹은 이야기풀이 방식이 다르겠지만, 인물의 심리를 묘사하는 점에서 뭔가 색다른 점이다.

 

전에 정유정 작가 소설을 읽으면서 이야기 구조는 크게 다를 바가 없어도 섬세한 내면을 작은 표정과 행동을 묘사한 점에서 매우 독특한 점을 느낄 수 있었다. <곡마>에선 조선통신사 행렬에서 마상재를 펼치는 건 양반출신의 무관이다. 시대적 조건에 종사관이 우위에 있지만, 소설은 여해와 월하선의 라이벌로 나오는 애정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편으로 양반과 천민, 승려와 역죄인의 등장에서 시대적 한계와 그 한계를 넘고자 하는 낭만주의적 관점도 보인다.

 

승려 명단과 사대부 청산과부 기련은 절대 맺어줄 수 없는 운명이다. <곡마>에선 주요 인물관계 속에서 복선과 암시를 많이 넣는다. 그래서 충분히 독자가 중간에 그 장치를 읽어내면 주인공들의 운명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 확인하고, 심지어 박수무당이 중간마다 날리는 말문에서 이미 운명이 정해져도 그들은 벗어날 수 없는 비극인 점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소설이 계속 이야기를 나가자고 한 것은 그 시대 사람들이 살아간 흔적이 결코 헛된 게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었다.

 

월하선이 아무리 못된 계략을 꾸미고, 주색으로 고위관료를 유혹해도 그녀 역시 순수한 사랑을 원했고, 여해 역시 순수한 사랑을 원했다. 한쪽은 권력을 이용하여 몸을 빼앗으려 했고, 한쪽은 마음으로 다가가 서로를 알아가길 원했다. 제 아무리 조선시대가 성리학의 좋지 못한 것만 유지하여 폐단이 심각했지만, 적어도 그 안에서도 자신이 살아있다고 말하고 싶은 사람이 많았다. 작가가 여성이기에 여성의 관점에서 많이 서술한 점이 많았다. 여해의 친구 장포가 전지수로 활약하자 많은 아낙네들이 장포를 두고 군침을 흘린 점에서 단순히 사랑이나 성욕을 남성만이 소유물이 아니라 여성들도 가지고 있고, 사랑을 위해서라면 여성 자체가 능동적으로 활약했다는 점이다.

 

시대적 벽을 알고 있다. 그런다고 마음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여우로 소문난 형조판서의 아내나, 기방의 명기 월하선, 군마장의 구경꾼 여해조차 자신의 마음이나 욕망을 숨기지 않았다. 단지 그 방법의 차이일 뿐이다. 형조판서 아내는 자신이 권력을 가졌고, 월하선은 주색으로 권력을 움직였다. 여해는 오로지 달리는 말을 통해 종사관으로 다가간다. 앞의 2여자와 달리 인간의 본능이나 혹은 집착에 매달리지 않는다. 마상이란 재주에 감동하여 거기에 마음을 다해 움직이는 것이다.

 

인간의 정성은 하늘도 감동시킨다고 했는가? 종사관 옆의 판관 이두홍도 처음에 여해를 두고 놀리거나 혹은 위협했지만, 극적인 상황에 이를 때 여해를 믿어주었다. 인간에게 믿을 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쉽고도 간단하다. 사소한 철사 하나들이 계속 이어져 단단한 커다란 철근이 되는 것이다. 단지 철근을 놓을 수 있는 자리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곡마>는 사실 마상재를 보여주기 위한 소설보단 마상재를 통해 인간의 관계성을 보여준다. 인간은 관계에 의해 살아가는 존재이다.

 

인간은 서로가 원하는 사람이 있어주면 행복해한다. 하지만 만일 서로 같이 있어주지 못하더라도 그 상대방이 계속 세상 어딘가에서 살아주는 것만으로도 행복은 아니나 안심은 된다. 소설 <곡마>에서 이미 단추가 시작되는 지점부터 운명의 뒤틀림은 시작된다. 그래도 적어도 세상 어딘가 내가 살아있고, 나의 정인이 살아있다. 그리고 그들이 같이 있었다는 사실은 시간이 흘러도 그 기억만큼은 살아있다는 게 삶의 흔적이다. <곡마>는 그런 삶을 살았을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이다. 그들이 지금보다 먼 과거라도 지금 우리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공감이나 감정이 없을 리가 없다. 단지 전해주는 방법만 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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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글씨 일신 베스트북스 16
나다니엘 호손 지음 / 일신서적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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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 글씨>란 책 제목은 항상 많이 들었다. 내용을 잘은 모르나, 제목 자체가 <주홍 글씨>이기에 그것은 분명히 낙인이란 이름을 말하는 것이란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번에 읽은 <주홍 글씨>, 역시 낙인이 찍힌 여성의 이야기이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왠지 무서운 기억이 떠올랐다. 영국에서 왜 미국으로 많은 이주민들을 보내야 했는가? 청교도적인 가치관이 어째 검소함과 더불어 미국의 탐욕적인 식민지개발과 이어졌는가?

 

예전에 마녀사냥을 연구하던 실비아 페데리치의 <캘리번과 마녀>가 있다, 그 책에서 영국의 인클로저 현상을 다루고 있다. 영국에서 16세기부터 공유지를 귀족과 왕족들이 사유화했다. 공유지 사유화는 공유지를 이용하던 농민 입장에서 치명적인 타격이고, 심지어 공유지 주변에 있던 농민의 농지까지 귀족들은 빼앗아간다. 농지가 없는 농노는 부랑자가 되든지 도시의 노동자가 되든지 혹은 도적이 되어야 했다. 경제적 흐름에 따라 영국에서 잉여적인 인구가 늘어가고 있었고, 이들을 처리하기 좋은 방법은 바로 다른 곳으로 보내는 것이다.

 

식민지 시대의 이민정책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주홍 글씨>에서는 직접적으로 이런 현상을 말하지 않으나. 나사니엘 호손의 일가의 역사가 나올 때 대략 그 의미를 확신할 수 있었다. 호손의 직계조상은 17세 말에 마녀사냥을 집행하던 관료였던 것이다. <주홍 글씨>의 배경이던 뉴잉글랜드는 그 지명의 이름처럼 새로운 잉글랜드를 말한다. 결국 영국사회에서 격리된 자들이 영국에 대한 향수로 젖어 생긴 식민지 사회인 것이다.

 

식민지사회의 열악한 요소는 잘 보여주듯이 주인공 비운의 여인 헤스터가 살던 마을에 의사와 목사가 매우 귀했다. 원래 헤스터의 남편이던 칠링워드, 헤스터의 딸 펄의 아버지며 그녀가 진정 사랑하던 목사 딤즈데일은 뉴잉글랜드에서 귀한 인재였다. 칠링워드는 실력이 좋은 의사였고, 딤즈데일은 영국 본토 명문대학에서 공부를 한 목사였다. 기독교 사회에서 목사의 권위란 이루어 말할 수 없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추모하는 점에서 왕권은 교회와 밀접한 관계성을 유지하고 있다.

 

여왕의 시대로부터 격리되어 있지만, 뉴잉글랜드 사회는 아직도 영국의 향수병으로 젖은 매우 수구적인 시대였던 것이다. 이런 사회에는 종교가 하나의 사회적 법률로 통용되고, 법률이 교회의 권력에 의해 움직이므로, 종교적 가치관이 문화적으로 큰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 여주인공 헤스터는 어두운 감옥에서 나왔으며, 그녀의 가슴에 새겨진 A자 주홍색 자수가 따가운 햇빛과 군중의 눈빛에 의해 반사되었다.

 

그녀의 죄는 남편이 있어도 다른 남자와 간음하여 아이를 낳은 죄였다. 문제는 남편은 정확히 누군지 알 수 없었으며, 사람들은 헤스터에게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 이야기하라고 말한다. 이미 나는 이 작품 초반에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성난 군중과 무서운 보초병의 눈빛이 그녀를 질타할 때, 오로지 마음 약한 목사가 그녀의 입장보단 그녀의 존재성을 인정해주었다. 그게 바로 딤즈데일이었다. 왜 헤스터가 젊은 목사에게 도취했는지에 대해서 작품 안에서 설명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알 수 있는 것은 호손의 작품성은 기존 사회의 답답한 관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간상을 찾는 것을 원했다. 본래 헤스터는 명문집안 출신 여성이란 점도 알 수 있었고, 그녀가 당시 사회로썬 용납되기 어려운 죄를 지었다고 하나, 그녀의 인품은 고고하고 아름다웠다. 오직 딸 펄을 위해 헌신하는 어머니였지만, 때로는 불우한 이웃을 위해 자선을 마다하지 않았던 용기 높은 여성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가슴에 A자는 평생 그녀에게 지워진 짐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짐조차 승화시켰다.

 

A가 어떤 의미인지 잘은 모르겠다. 나쁜 의미 내지 정상적이지 못한 것이라면 Abnormal 정도일까? 하지만 그녀의 AAble, Angel까지 변해간다. 도덕을 위반한 그녀가 오히려 인간의 정신이 되어야할 가능성과 천사라는 칭호까지 받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오로지 사회적 관습에 의해 매여져 있었다. 낭만주의 소설이라 하니 장 자크 루소의 사상을 다소 영향 받을지도 모른다. 소설 중간에 나온 쇠사슬이란 단어는 <사회계약론>에서 항상 나오는 말이고, 쇠사슬이란 의미는 물리적인 의미로써 사슬이 아니라 인간사회에서 인간 스스로 억압하고 있는 굴레라는 점이다.

 

헤스터는 처음에 남편을 밝히지 않았고, 그동안 죄수의 낙인 A를 가슴에 새기며 다녔다. 그녀는 치욕적인 일을 저질러도, 그 죄에 대한 처벌과 자숙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가슴 위에 A를 새기지 못한 남자는 어떤 심정일까?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도덕적 입장에서 딤즈데일은 오히려 큰 쇠사슬이 되었다. 그리고 질투에 젖은 칠링워드는 아내의 부정과 딤즈데일에 대한 복수심으로 살아간다.

 

그가 처음 뉴잉글랜드에 왔을 때 인상 좋은 노학자이나, 7년이 지나자 그의 얼굴은 험악하고 악의로 가득했다. 헤스터는 이런 2사람 사이에서 죄를 지은 인간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죄를 받아들였고, 그 모습을 바라본 딤즈데일은 스스로 자신을 해방하기로 한다. 그 결실은 딸인 펄의 존재다. 진주와 같은 펄은 사랑과 죄악의 결정체였다. 부정에 의해 태어난 존재, 하지만 사람들은 펄의 행동과 모습에서 천사의 재림처럼 느껴졌다.

 

펄의 존재가 모순되고 역설적으로 보이는 점에서 우리는 죄와 사랑이 같은 뿌리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고, 거기서 태어난 사랑과 증오가 순식간에 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딤즈데일을 병들게 하여 마지막에 그의 부정을 밝혀 비참한 죽음을 유도하려 했지만, 딤즈데일이 죽은 후 그 역시 딤즈데일에게 간다. 칠링워드가 이런 모습을 보여준 이유는 그에겐 학식과 재산이 있어도 생명의 연결고리가 없었다. 불구자인 그는 자신의 아내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에 삶의 의미가 바뀐 것이다.

 

딤즈데일의 죽음에서 칠링워드는 그동안 자신을 속박하던 쇠사슬에 해방된다. 그것을 인정하는지 미국과 영국에 남아있는 재산 모두를 헤스터의 딸 펄에게 유산으로 남긴다. 죄의 결정체에게 그의 마지막은 사랑의 결정체로 승화된다. 현실에서 만일 이런 일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만일 21세기 자유주의국가라면 이미 불구자인 칠링워드 옆의 헤스터는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나가며, 딤즈데일은 헤스터를 다시 아내로 받아들여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사회는 교회의 권력이 우선되는 시기고, 딤즈데일 목사는 나이가 어려도 마을에서 나이가 최고령 신자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고, 뉴잉글랜드의 최고 통치자인 총독에게도 존중받는 자이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최고의 지위에 있은 자가 딤즈데일이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위치에서 숭고한지, 아니면 자신을 내던져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여 모든 것을 고백하는 인간이 더 숭고한지는 시대에 따라 다르다. 적어도 딤즈데일의 마지막은 인간에게 주어진 죄가 많은 이들에게 드러나지 않은 것보다 평생 자신만 안고 가는 게 더 고통스러운 것이다.

 

소설은 낭만주의이지만, 나름 서구의 철학이 반영되어 있다. 한국과 같은 동양은 인간의 사고방식이 인간의 관계성에 시작된다. 하지만 서구는 인간의 사고방식은 신과 인간의 관계이다. 신 앞에서 인간은 과연 자유롭고 진실한 존재인가라는 의문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목사는 모든 죄와 거룩한 자리를 초월하여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삶을 마감한다. 그리고 뉴잉글랜드를 떠난 후 다시 돌아온 헤스터는 A가 달린 드레스를 입은 후 평생 타인의 위해 살아간다. 마지막장면에서 헤스터는 천명을 다하여 딤즈데일이 묻힌 곳의 옆으로 집을 옮긴다.

 

무덤은 어둠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으나 희미한 한 점의 빛은 A란 글이 보였다. 살아서는 같이 할 수 없었으나 죽어서는 영원히 A를 나눈 두 사람에서 낭만주의 문학성의 백미를 보여준다. 현실에서 인정되지 않기에 새로운 세상에서 이상을 펼칠 수 있다는 신념을 말이다. 헤스터는 단지 그런 이상을 자신만의 환상이 아니라 늘 봉사하는 삶으로 보여준다. 왜냐하면` 무덤에 들어가는 사람은 비문을 만들 수 없고, 무덤사이에 A란 글자를 만들 수 없다. 딤즈데일과 헤스터의 관계는 그들이 살아생전에 용납할 수 없었지만, 그걸 용납받을 수 있었던 것은 헤스터의 용기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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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6-08-28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통, 간음을 뜻하는 adultery의 A라고 하던데요? 성인과 간음이 어원적으로 연관 있는게 재밌지요.

만화애니비평 2016-08-28 23:25   좋아요 0 | URL
그건 몰랐네요. 영어에 약히다보니 감사합니다.

syo 2016-08-28 23:26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좋은 글 읽을수 있어서 제가 감사합니다. ㅎ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6-08-29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켈러번과 마녀, 요거 읽을까 말까 생각 중인데 어떻습니까. 재미있쓔?

만화애니비평 2016-08-29 10:30   좋아요 0 | URL
마녀사냥 연구도서로 최고의 서적이죵. 재미보단 깨우침으로 ㅎㅎ
 
A케어
구사카베 요 지음, 현정수 옮김 / 민음사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현대사회는 조선시대의 농경사회처럼 마을공동체 사회가 아니다. 조선시대 내 선조들이 살던 곳은 농사를 짓고, 소를 키우며, 산과 강이 흐르고 바다가 앞에 있어 낚시를 하던 곳이었다. 그런 문화적 유산은 20세기 말까지 남아있었다. 나의 할아버지는 서울에 있는 큰아버지 집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장례식은 시골에 있는 마을회관이었고, 지금처럼 병원 장례식장이 아니다. 과거에 노인의 죽음은 마치 당연한 자연의 순리였다. 죽는 것은 두려운 일이고, 죽은 자는 죽어가는 순간 가족에 대한 애정(물론 사이가 좋다면)과 유족들은 가족의 죽음 앞에 비통에 젖는다.

 

집에 족보를 보면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탄생년도와 별세한 날을 계산해보았다. 나의 증조부는 80세 이상을 살았고, 고조부는 30세 전후로 돌아가셨다. 친할아버지는 70대 중반에 돌아가시고, 할아버지의 제일 큰형이신 큰할아버지는 36세 돌아가셨다. 한국사회가 근대화로 접어들면서 근대화의 영역은 산업과 경제만이 아니라 의료와 공중보건에 미쳤다. 근대화에 따라 인간의 생명이 마을공동체나 대가족 아래 관리되는 게 아니라 정부 보건정책에 따라 움직이게 된 것이다. 인간의 수명을 생각하면, 조선시대 때 60세 이상만 되어도 큰 경사였고, 100세 이상 노인이 있으면 그 집안이 양반이 아니면 양반신분과 더불어 큰 벼슬을 임금이 내렸다고 한다.

 

인간의 생명이 길지 않고, 온갖 전쟁과 사화(士禍), 옥사(獄死) 등은 지배계층부터 피지배계층까지 모두 가혹한 일들이 발생했다. 흉년과 재해까지 몇 년마다 있으니 살아있는 것이 기적인 일도 많을 것이다. 인간의 죽음에서 노인들이 장수하기란 어렵다. 내가 어릴 적에도 60세에서 70세 정도 되는 어른들은 다들 돌아가는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은 60세도 젊다고 말할 수 있고, 70세 역시 아직 더 움직일 수 있다. 80세부터는 조금 말이 다르다. 인간의 삶이 긴 것인가? 짧은 것인가?

 

철학적 질문에서 보자면, 나로서는 괴로움은 길고, 즐거움은 짧다고 말하고 싶다. 시간이 느끼는 인간의 오감은 지루하고 괴로운 시간은 잘 가지 않을 터니 말이다. 인구 수명이 증강되어 그것이 축복일까? 불행인가? 나는 그것이 축복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인구가 증가하고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눈속임에 불과하다. 한국에 인구비율에서 노년층이 대다수를 차지하기 시작하고, 젊고 어린 계층의 비율은 줄고 있다. 미래에 우리 일상은 어떨까?

 

한국만이 아니라 일본도 심각하다. <에이케어>에 나온 일본 노인의료 현실은 우리나라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이 책의 저자인 우루시하라 다다스 의사, 그리고 그 의사와 같이 뜻을 펼치려 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한 채 우루시하라의 유고를 정리하여 책으로 발간한 야구라 슌타로, 이 책을 읽는 순간, 여러 가지로 내 머리 안을 스치고 간 것들이 많다. 노인문제와 인구문제, 앞으로 한국 사회도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세대교체에 따른 큰 변화를 맞이할 것이다.

 

한국전쟁 전후에 태어난 사람들이 급격한 산업화시대에 노동력을 크게 발휘했으나, 이제 그들은 현재 노인층이 되었다. 전쟁 후에 급격히 출산율이 올라가는 양산이 보이는데, 이제 그들이 출산한 아이들은 한 집안에 1~3명 내외로 이루었다. 그리고 그 뒤의 세대들은 보통 아이를 1~2명이고, 이제는 거의 1명 정도 출산하려 한다. <에이케어>에서 지적한 문제로 다른 것은 둘째치더라도, 우루시하라 의사는 사회적 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재생산의 문제를 알았던 것이다.

 

경제적인 활동이 성립되기 위해서 우리는 생산이라는 행위를 거치어야 한다. 하지만 생산에는 어느 1가지의 조건이 달려있다. 그것은 바로 재생산이다. 재생산이 되지 않으면 생산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재생산에서 서비스산업이나 혹은 그 외의 기본적인 산업체계에서도 그 수요와 공급을 위한 일정 인구가 수반되지 않으면 큰 문제가 된다. 과잉인구였던 한국이 갑자기 어느 순간 과소인구로 치닫는 운명에 놓인 것이다. 제일 큰 문제는 노인계층이 늘어나면 제일 필요한 것은 재원과 인력이다. 재원은 이들에게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재정이다.

 

재정을 거둘 수 있는 것은 노동으로 이루어진 생산력이다. 그리고 그 재정을 운용할 수 있는 인력이다. 의사, 간호사, 물리치료사 기타 수많은 의료인 재원에 거기에 운전사, 요리사, 상담사 등 다양한 직렬이 있어야 가능하다. <에이케어> 멀지도 않은 미래 일본사회는 1.5인의 젊음이가 1인의 노인을 부양(잘못 봤다면 1인이 젊은이가 1.5인의 노인일지도)해야 한다고 적혀 있다. 인구곡선은 정해진 것이다. 인구통계와 현재 상황여건에 따라 필요악적인 형태로 되어버린 것이다.

 

노인문제에서 심각한 것은 그들은 육체적으로 매우 불편하고, 정신적으로 불안정하며, 심리적으로 매우 위축된 것이다. 집에 계신 부모님과 이야기하면서 느끼는 점은 자식들에게 자신으로 인해 앞길이 막히거나 혹은 고생할까 하는 우려감을 읽어낼 수 있다. 노인들은 기본적으로 척추관련 질환, 소화기 관련 질환, 관절 약화 등을 달고 있다. 나이가 들면 신체가 병이 나고, 일상생활이 어려워져 남의 도움 없이 움직일 수 없는 노인들이 많다. 제일 심각한 문제는 뇌척수의 손상이다.

 

뇌척수의 손상으로 치매현상이 우선 문제고, 그 다음으로 사지의 마비다. 폐용신이란 단어가 나온다. 즉 사용하지 못하는 몸이다. 신경이 마비되고 움직일 수 없어도 혈액은 계속 공급되고 있다. 신체가 움직일 때 컨트롤이 되지 않아 상당히 불편하고, 인간의 대부분 혈액이 뇌로 공급되어야 하나, 필요 없는 신체기관에 혈액이 가는 것은 여러모로 효율적이지 못한 상황이다. 또한 사용하지 못한 신체가 늘어나는 것은 인간의 인식감각에서 매우 불안한 요소로 작용한다. 대부분 폐용신 노인들은 불편한 신체 때문에 강박관념을 가지게 되며, 불안한 심리는 자신을 힘들게 만든다. 그것을 넘어설 경우 가족에게 행패부리고, 옆에 간호하는 간호사들까지 큰 피해를 준다.

 

노인 호스피스 간호가 최근 늘어나고, 나하고 친분이 깊은 내 모교 출신 의무실 선생님에게 이래저래 노인 간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다.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완치가 아니라 편안 마음을 가지게 하여 눈 감는 날까지 힘들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노인 간호는 쉽지 않음은 그들이 늙고 병들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들에게 완치될 가망성도 없고 신체기능 감퇴로 의욕이 상실한다는 점이다. 특히 말기 암 환자들은 더 이상 살아갈 날이 얼마나 남지 않았다. 그들은 죽음의 고통보단 통증의 아픔이 더 괴롭다.

 

이런 고통을 두고 어떻게 해결하나? 대학교 때 접했던 문제로 자살이 아닌 자살, 안락사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인도적인가? 비인도적인가? 의료계와 법조계에서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나 나는 찬성한다(왜냐하면 유산문제에 고의적인 죽음은 편한 수단이 되니 말이다).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병든 자이다. 그런 사람들이 아프면 주변 가족들은 모두가 고생한다. 그 고생은 병수발과 개인적인 일상이 파괴되겠지만, 나중에 병원에서 청구되는 계산서는 이미 한도를 초과한다. 가족의 병으로 인해 가정이 파탄 나는 경우가 허다한 경우다.

 

의료법 때문인지 몰라도 마지막까지 생물학적인 죽음을 확인되지 않은 이상 의료행위는 멈출 수가 없고, 그것이 고스란히 계산서로 반영된다. 경제적으로 능력이 없고, 경제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노인들이 병에 걸리면 그 영향은 막강하다. 노년빈곤에 가장 큰 적은 병마이다. 한 달에 얼마 되지 않은 지원금으로 병원에 가면 남는 게 없다. 물론 노인의 증가는 의료재정 소요증가로 세금부담까지 이어진다. 그런 현실에서 빈곤계층으로 떨어진 그들에게 억지로 병원에서 제공하는 의료서비스는 인도적이란 이름 아래 가려진 파탄은 더욱 심각한 과제로 남아있다.

 

무조건 폐용신 혹은 안락사만이 답이거나 옳은 것은 아니나, 언젠가는 우리는 이런 현실에 더 깊은 딜레마에 빠질 것이란 점이다. 하지만 현실이란 냉정하고도 냉소적이다. 우루시하라라는 인간은 빛과 어둠이 너무 강한 인간이다. 기본적으로 그는 이분법적인 시선이 강했다. 좋은 인간이란 평판과 더불어 너무 기계적이고 냉혹한 인간이란 부분도 있었다. 폐용신의 신체일부를 포르말린 액을 넣어 보관한 것을 보면 과연 제대로 된 인간일까? 라는 생각도 하지만, 적어도 그는 자신이 하고자 했던 일에 책임을 다했던 의사이다.

 

눈앞에 사람을 두고 수수방관만 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이제 새로운 가십거리가 탄생하여 썩은 고기에 무수히 달려드는 구더기들에 비해 우루시하라 의사의 행동이 더 인간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를 계속 몰아넣었고, 결국 철길에 자신의 머리를 폐용신으로 취급했고, 아내 역시 그의 뒤를 따라 갔다.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고 하나, 인간의 진정한 죽음이란 생물학적인 죽음이 아니라 그의 이름이 사람들 속에서 사라지는 순간이다. <에이케어>에 만들어진 인물 의사 우루시하라로 통해 우리는 어떤 미래를 마주쳐야 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루시하라가 하고자 했던 행동들에서 그 과정에 이르기까지 현실적 상황과 미래에 대한 걱정은 우리도 1번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 인간은 현재의 조건에 따라 움직이고, 눈앞의 이익과 재미에 의해 운명 앞에 조롱당한다. 미래는 과거의 기록을 통해 당시 인간들을 평가하고 자신들의 상황을 생각한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가 계속 대화하는 것이고, 대화는 인류가 망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이 소설을 보고 짜증나는 것은 있다. 고통 받는 사람에 대해 아무런 도움이나 대안을 제시할 생각도 없이 가십거리 만들기에 집착하는 미디어이다. 비록 소설이라 하지만, 그 행태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미디어들이 하는 짓거리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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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03 14: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04 1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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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영화에서 우리는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서사라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자면 문학과 영화는 문자서사인지 혹은 영상서사인지의 차이점이지, 안의 이야기를 제시하는 것은 같을 것이다. 단지 영상서사인 영화보다 문자서사인 문학이 조금 더 가치 있는 이유는 영상서사는 수용자의 시선을 향하여 정보만 주고, 그 이상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부족하다. 물론 제작하는 이들의 노력에서 보자면 충분히 그 능력을 발휘하나, 수용자의 입장에서 영상이란 스쳐지나가는 잔상으로 지나간다.

 

문자서사인 문학은 이와 다르게 글자를 접하기 때문에 독자로 하여금 항상 머릿속에 어떤 상황인지를 끊임없이 떠올려야 한다. 문학은 영화와 다르게 친절하지 않다. 친절함 영상미와 달리 문학은 내가 직접 보면서 어떤 것인지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 물론 문학이 소설의 형태로 나오면서 소설 모든 것이 영화보다 우월한 것은 아니나, 페이지를 넘기는 것에 대한 시간적 투쟁은 독자로 하여금 인내심을 요구한다. 인내심을 발휘하는 것은 나에 대한 또 다른 수련일 수 있고, 하나의 성찰의 길을 안내할 수 있다.

 

이번에 읽은 <스토너>는 아마 이런 문학소설에서 많은 인내심을 요구하는 책이다. 그렇게 분량이 길지도 짧지도 않으면서, 책 내용을 봐도 뭔가 격정적이고 파행으로 가는 것도 아니다. 물론 스토너가 살던 시절은 20세기 미국이다. 그는 19세기 말에 태어났으나, 그의 인생이 시작되는 것은 20세기 미국이다. 미국이라고 한다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19세기 남북전쟁이 일어나고, 전쟁에서 북부의 연합팀이 승리한다. 하지만 전쟁이란 단순히 사람만을 전장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전쟁이 발발하면 그 열화와 같은 공간에 스며들며, 자신도 모르게 그 안에서 허무한 아지랑이처럼 사라진다. 스토너가 대학에 오면서 그 상황에 처해진 것을 볼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수많은 나라의 젊은이들이 전쟁터를 향하여 움직였고, 많은 청춘들이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바람처럼 흩어졌다. 스토너가 대학에 오면서 친구 2명이 있었지만, 하나는 참전한지 반년도 못되어 죽는다. 그리고 고든은 돌아오고, 자신이 있는 학교의 권력자가 된다. 스토너의 인생은 그렇게 열정적이지 못하다.

 

미국을 떠오르면 아메리카 드림을 말하나, 그에겐 그런 것보단 오랜 시간을 참고 기다리는 인고의 삶을 지켰다. 스토너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밤까지 계속 힘든 농장 일을 하고, 돼지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 몇 리나 떨어진 축사까지 걸어간다. 공부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에게 공부할 기회를 준 것은 인생의 대역전이다. 하지만 스토너는 그런 전환조차 하나의 기회보단 그저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스토너의 인생은 처음에 수동적인 자세로 보였다.

 

그러나 아니었다. 스토너는 오히려 수동적인 인간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 같은 인생노선을 걷지 않을 뿐이다. 그것은 대학에서 스토너의 모습이다. 대학에 있는 사람들은 시대적 조류에 너무 충실했다. 아니 그것을 따르는 편이 자신의 삶을 제대로 빛을 내는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스토너는 그런 인생을 추구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만의 세계를 추구하고자 했다. 농학을 전공하여 농장 일을 제대로 계획하려다 오히려 영문학으로 발을 옮긴 스토너, 인생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나도 가끔 느낀다.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도 계시나, 부모님만큼이나 자신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는 분들도 많다. 슬론 교수는 스토너에게 제일 많은 영향을 준 것 같다. 단지 대학에 오고, 우연히 강의를 받던 스토너, 그는 슬론 교수에게 학자의 길을 걸을 것을 권유받고 교수가 되기로 한다. 그런 과정에서 소설은 격정적으로 보여주기보단 스토너에 대한 묘사에서 매우 아름다운 표현을 구사한다. 슬론이 말한 것처럼 고대 그리스문학에서 논리학과 수사가 중요한 게 아니나 어찌 보면 문법이 중요하다고 했다.

 

인간의 이성이 존재해도 그 이성에 자극을 주는 것은 글 안에 담겨있는 생생한 감정이라는 것이다. 왜 20세기 인간들은 아니라면 내가 살아있는 21세기 인간들은 영국 대문호인 셰익스피어의 글에 빠져드는가? 인간 스스로가 느낄 수 없는 감동과 삶의 의미를 문학은 연결해주고 있다. 인간은 생이 다른 동물에 비하여 길지만, 그렇다고 목숨 그 자체가 긴 것은 아니다. 옛날에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했다. 예술의 세계에 빠지는 것은 자신의 삶에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서다. 하지만 새로움이란 주변에 보이는 사물들의 변화가 아니다. 새로운 것이란 내가 추구하는 길에 보이는 이때까지 접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깨달음이다.

 

진리의 길을 추구하는 것이 문학과 예술이라면, 그 세계가 어떤 식을 가는지에 따라 다른 모습을 전해준다. 생각하면 문학의 매체로 소설 <스토너>에서 스토너는 느린 것에 대한 미학, 자신 안의 세계에서 넓은 우주로 가는 구도자 같다면, 스토너의 아내인 이다스는 순간적인 변화 쾌락적인 감각을 추구한다. 그녀는 잠시라도 가만히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늘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고, 지루함을 견디지 못했다. 이다스가 결혼 후 결혼생활에 만족하지 못하다 나중에 그녀의 아버지가 죽자, 얼마간 집에서 나가있었다.

 

돌아온 그녀는 머리를 짧게 자르고, 예전보다 화장을 도발적으로 했으며, 연극 팀을 도와주거나 조각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지겨워지고, 그녀는 자신이 만든 최고의 예술인 딸 그레이스에게 집착한다. 그레이스를 대하는 모습에서 이다스는 집착이 지나치다 못해 정신병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스토너가 그레이스의 어린 시절을 돌봐주었으나, 그레이스는 그런 스토너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은 채 아버지와 딸의 관계를 절단시켰다. 스토너는 집에서 보면 항상 단절된 존재였고, 그 단절감은 가족의 시간에서 보였고, 심지어 공간적으로 차별되었다. 인간의 공간, 즉 공간은 인간의 사유와 사상이 그대로 반영된다.

 

스토너에게 머물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 오로지 그가 머문 공간은 자신 안의 세계, 학자의 길이다. 우연히 그가 진정했던 사랑했던 대학원 출신의 시간강사 그녀만은 달랐다. 사랑을 깨닫는 것은 이다스를 처음 본 그날의 느낌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정확하게 알아주고,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반응해주는 것이다. 마음이 통하는 여성을 만나 서로 정신적으로 교감을 나누고, 육체적인 교감을 나누는 것은 행복이다. 그러나 스토너에게 그녀의 등장은 너무 늦었고, 스토너의 행동은 모두가 알았다.

 

스토너가 시대적 조류에 쓸려가지 않기에, 언제나 그 모든 세계에서 중심은 자신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그런 길을 걷기에 항상 스토너는 사방이 막힌 벽에만 갇힌 채 인내의 시간을 요구했다. 다른 교수가 추천한 워커 학생을 심사하던 중에 스토너는 그 학생이 기발하고 창의적인 것은 알지만, 학자로 성장하기에 너무 부족하고 기본적인 학업이 안 된 것을 알았다, 그리고 박사진학과정에서 워커를 인정하지 않으려다 영문학과 학과장에게 미움을 받아 노장 교수는 시간강사들이 관리하는 1학년의 수업을 맡게 되고, 시간표도 오전 아침과 오후 저녁에 배정받았으며, 강의실조차 엉망이었다.

 

스토너는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나머지 시간을 자신이 원하는 연구와 자신이 추구하는 세계에 향했다. 스토너의 모습을 보면 우리들은 모두 이럴 것이다. “왜 그렇게 힘든 길을 선택하지? 왜 그렇게 남의 말을 안 듣지, 적당히만 하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인데 말이지.” 실상 우리 인생은 스토너의 모습을 나나 혹은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자신의 길을 생각하고 스스로 간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은 충실히 자신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반증한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인생은 자신의 것이야 하나, 인간이 속한 사회는 개인 혼자가 아니라 개인들로 구성된 하나의 집단이다.

 

집단에서 언제나 정치적 갈등과 이권의 분쟁이 일어난다. 스토너는 바로 그 학교 내 정치적 갈등에서 권력을 따르지 않았고, 이권을 추구하지 않았다. 현대사회의 인간이라면 소소한 이익을 위해서라면 거짓말도 할 수 있고, 비겁한 일도 충분히 할 수 있다. 스토너는 그런 삶을 살아가지 않았던 자다. 어린 시절 농사를 보면서 손에 박힌 흙의 자국, 대학을 다니면서 친척집 일을 도와주던 스토너는 남들처럼 좋은 옷도 없었고, 언제나 같은 옷으로 학교를 돌아다녀야 했다. 지독한 가난과 무기력하게 지나가는 인생의 길에서 스토너는 불행한 삶을 살았는가?

 

다르게 생각하자면 나는 스토너가 불행한 인간이라 보는 자들이 더 불행할 줄 모른다. 스토너는 결혼생활이 불운했고, 학교교직생활이 불편했다. 심지어 딸은 처음에 아내인 이다스와 다른 길을 갈 줄 알았지만, 이다스의 인생처럼 되어버렸다. 그레이스는 남편을 사랑하지 않았으나, 술김에 잠을 자서 임신하고, 그길로 결혼한다. 하지만 그레이스 남편은 죄책감으로 견디지 못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사망했고, 그레이스는 혼자 아들을 낳는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어떤 삶인가? 위스키가 없으면 버티지 못했다.

 

이다스나 그레이스나 자신의 삶을 자기가 아닌 주변에 의해 조작되면서 모든 것이 불편해졌다. 스토너는 그런 삶과 다르게 담담히 자기만의 길을 걸었다. 집에서 외면 받고, 학교에서 무시당해도 말이다. 그러나 스토너는 마지막 모습을 보면 너무 침착하고 담담했다. 죽음의 심사를 의사로부터 들어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업무를 정리하고 집에서 조용히 눈을 감는다. 비주류의 인생이 살아갔지만, 후회 없는 삶이라 말할 수 있다. 고통에 대한 인고의 세월은 길어도 그 결실은 고통의 시간처럼 보답하지 않는다. 그래도 그런 길을 걷는 이유는 자신의 삶 자체가 예술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소설 <스토너>에선 예술적이라고 강요하지 않지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굴곡은 뭐든지 화려하지 않다. 때로는 불행과 악운도 존재한다. 마지막 장신이 모든 것의 승리가 아니다. 그렇지 못한 삶이라도 얼마나 자신 스스로를 잃지 않고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게 구도자의 길일 것이다. 소설내용을 보자면 우리 삶과 너무 익숙하거나 친숙하게 보일 것이다. 일상세계에 머무는 인간은 이야기에서는 비일상의 세계를 원한다. <스토너>는 비일상이 아닌 완벽한 현실을 반영한 소설이다. 바로 불편한 삶을 보여주는 책이다. 이런 불편한 삶을 관찰한 우리가 느낄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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