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엘로이즈 2 루소전집 5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 책세상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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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유럽은 루소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지식이 있는 계몽주의 청년들은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인간불평등기원론>을 들고 있었고, 여자들은 <신엘로이즈>와 <에밀>을 읽었다. 사실 프랑스공화국이 세우게 된 동기는 여러 가지 동기가 있으나 그 사상적 근본은 루소의 <사회계약론>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루소가 유명하게 된 동기는 <신엘로이즈>와 <에밀> 덕분이었다. 특히 <신엘로이즈>의 열풍은 상당한 열기를 만든다. 프랑스대혁명에서 보수나 진보진영 그리고 그 누구라도 혁명에 참가한 사람들은 루소에 대해 찬양을 보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루소의 열렬한 지지자인 로베스피에르와 생 쥐스트, 당통 같은 자코뱅당원들이 있었으나, 이에 반해 지롱드에서 활동한 롤랑 부인 역시 루소의 열렬한 팬이었다. 롤랑 부인은 귀족의 아내였고, 당시 여성이 정치적으로 배제된 상황이라고 했으나, 그녀는 프랑스혁명의 여걸이었으며, 단두대 아래 목이 잘려 나가기 전에 "자유여, 당신의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죄가 저질러졌는가!"라고 외친다. 롤랑 부인이 프랑스혁명에 참가할 때 루소의 <신엘로이즈>라는 소설에 빠져들어 루소가 살아생전에도 열렬히 루소를 사모했다.


 

루소의 <신엘로이즈>는 보면 단순히 생각하면 쥘리 데탕주와 생 프뢰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담은 연애소설로 볼 수 있겠지만, 사실 그 소설은 현실의 정치, 사회, 문화, 교육, 생활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다룬 서적이다. 겉으로 본다면 연애소설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철학적인 요소가 강하게 반영된 책이다. 게다가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과 <에밀>을 읽다보면 <신엘로이즈>는 루소 저작의 다양한 사상과 가치가 하나의 서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신엘로이즈1>을 보면 보통 연애소설처럼 사랑하던 남녀가 현실적 운명 앞에 헤어지면, 남자는 멀리 여행을 가는 결말을 자주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남자가 다시 돌아와서 재회한다면? 게다가 그 재회의 장소가 그 사랑하던 그녀가 남편과 자녀들이랑 같이 사는 집이라면? <신엘로이즈2>를 읽는 순간 운명의 장난 앞에서도 과거 사랑했던 연인이 이제는 다른 인연으로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거친 바다로 나간 생 프뢰, 그는 목숨을 몇 번의 위협에서 겨우 살아 돌아온다. 거친 바다생활에서 세계를 바라본 생 프뢰는 루소의 자연주의적인 가치관이 그대로 편지 속에서 나타난다.


 

“인간의 산업이라는 것이 개화된 사람을 그에게 부족할 것이 전혀 없는 은둔으로부터 끌어내어 새로운 욕망의 구렁텅이에 다시 빠트리기 위해 어떤 시도를 할 수 있는지를 보았습니다.”라고 보낸다. 문명화가 되지 않은 미개한 영토에 가서 그 영토와 그 영토의 주인인 원주민들을 무참하게 살해하고, 자연을 파괴하는 문명인이란 야만족들의 폭력에 생 프뢰는 깊은 아픔을 느꼈다. 루소의 자연주의적 가치관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폭력성을 한탄한다.


 

“자연은 인간이 눈에 자신의 진정한 매력을 숨기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인간은 그 매력에 너무 둔감하고 할 수 있는 한 그것을 훼손시키지요. 자연은 인간의 자주 찾아오는 곳은 피해요. 자연에 가장 감동적인 매력을 떨치는 곳은 산 정상, 깊은 숲 속, 인적이 닿지 않은 섬들이에요. 자연을 사랑하지만 그렇게 멀리 자연을 찾아갈 수 없는 사람들은 자연에 폭력을 쓰게 됩니다. 말하자면 자기들에게 와서 함께 살 것은 자연에 강요하지요. 그런 일에는 어느 정도 환상이 따르기 마련이에요.”


 

루소의 자연주의적 가치관은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는 것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자연이 파괴되면 다시 인간은 인간을 파괴하기 위해 착취하고 억압하는 것을 말한다. 쥘리의 집을 보면 분명 쥘리는 집 주인 볼마르의 아내이나, 그녀는 먹을 만큼만 먹고 남는 것은 저장하고, 주변에 어려운 사람이 있다면 도와주기를 권했다. 억지로 땅을 사서 빼앗는 게 아니라 자신의 땅을 정성스레 가꾸어 그곳에서 좋은 곡식을 나오도록 했다. 집안에 하녀와 주인의 관계는 명확하나, 그 관계의 유지는 미덕과 포용에 의해서였고, 하인들이 집안에서 일한 뒤 식사를 한다면 같이 식탁을 이용하도록 했다.


 

제 아무리 계급이나 지위가 다르더라도 쥘리는 사람은 사람이라는 그 자체로서 대해준 것이다. 루소가 말한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것에서 기본적으로 자연주의자라면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존경하는 것이 옳겠지만, 인간의 세상은 이미 사회화가 되었기 때문에 도시에 사는 사람 모두 자연으로 갈 수 없다. 루소가 말한 자연이란 인간의 본연의 모습이고, 그것은 인간의 선한 감정으로 돌아가란 뜻이다. <신엘로이즈>는 인간이 가진 이성을 우외로 두기 시작한 계몽주의 시대에 나온 소설이다. 그 자신이 계몽주의 사상가이면서 반계몽주의적인 가치관을 가진 루소는 이성보단 감정이란 것을 중요한 것이라고 여겼다.


 

가령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감정적인 것을 배제하는 볼마르의 경우, 마지막엔 쥘리의 죽음 아래 눈물을 흘렸다. 아무리 인간의 삶에서 죽음을 분리할 수 없는 존재적 운명이라고 하더라도 쥘리의 죽음에 볼마르는 감정에 복받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성과 감정의 싸움에서 최종승리는 감정이다. 하지만 그 감정에는 쥘리의 마음에 깃든 자연적인 감정 즉 미덕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신엘로이즈>는 미덕을 상당히 강조한다. 당시 프랑스 사회는 로코코시대로 탐미주의가 문화적으로 주도했다.

 

여성은 수많은 남자 애인을 두고, 남자들은 여자꽁무니 쫓아 따라 다닌다. 파리의 사교계를 보자면 바보들의 천국이라 볼 수 있다. <신엘로이즈2>에서 “파리에서 사람들은 무엇보다 사교계를 안락하고 수월하게 만드는 것을 뽐내는데 이 수월성은 다름 아닌 그 거드름에 관한 규칙에서 나온다. 상류사회에는 오직 관습과 규칙밖에 없다. 이 모든 관습은 번개처럼 생기고 사라진다. 오늘날의 관습을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단순해지는 것이다.”


 

진정한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사랑(단순히 남녀 간의 사랑만이 아니다)이 세상을 흘러가게 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허망한 욕심과 이기심들이 인간과 자연을 파괴한 것이다. 그 당시 결혼문화는 쥘리의 모습처럼 어린 여자가 나이 많은 남자들에게 시집간다. 사랑하지 않은 사람(다행히 쥘리는 남편의 인격에 사랑을 느낀다)과 살아가는 것은 결국 지옥과 같은 세상이고, 거기에 많은 파리의 남녀들은 타인의 부부를 탐하고 욕망했다. 이런 욕망과 이기심은 여기에 끝나지 않고, 자기 후손에게 이어졌다.


 

나이가 어린 아이에게 마치 천재로 생각하고, 억지로 밀어 넣은 지식 앞에 아이들은 자기의 본질적인 삶을 찾아가지 못하고, 이기심과 교만심만 늘어만 가고, 나중에 남에 도움 없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바보가 되어 버린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교육현실을 보면 루소의 선견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신엘로이즈>에서 쥘리가 말하는 교육가치관은 후에 <에밀>에 이어진다. <에밀>을 읽다보면 쥘 리가 한 대사하고 많은 유관성을 가진다. 진정한 아이의 스승은 아버지고, 그 아버지가 제대로 되지 못하면 아이 역시 제대로 될 수 없다. 아이의 교육은 바로 아이에게 시작되는 게 아니라 가족의 구성원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에밀>과 <신엘로이즈>의 유사성은 <에밀>에서 에밀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는 독신인 남성이고, 친한 친구에게 아들을 위탁받아 교육을 시킨다. 그 친구는 가난한 귀족이나, 이제 아이를 기를 수 있는 힘이 없어서 친구에게 가정교사를 부탁한다. 그런 점을 본다면 <신엘로이즈>에서 쥘리는 병으로 인해 죽고, 병으로 죽기 전에 생 프뢰에게 자신의 아들을 가르쳐주기 바란다. 원래 생 프뢰는 쥘리와 쥘리의 사촌인 클레르의 가정교사였고, 결혼 후에 자신의 아이들의 가정교사가 되어주기를 원했다.


 

<에밀>을 읽어보면 에밀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는 <신엘로이즈>의 생 프뢰라는 점은 그렇게 맞아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아이에 대한 인권을 존중하고, 아이 그 자체를 자연적 존재로 보는 <에밀>에서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 동등하다는 평등사상은 결국 루소의 자연주의적 가치관에서 비롯된다. <에밀>은 인간의 자연적 그리고 도덕적 자유를 위한 도서이다. 남들에 의해 길들어진 인간은 나약하여 자신의 의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아마 그런 완벽한 인간은 <신엘로이즈>의 쥘리였을 것이다. 열정적인 감정과 미덕으로 자연 그 자체를 살려내어주고, 인간을 사랑하는 모습에서 유럽의 여성들은 쥘리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신엘로이즈1>에서 쥘리는 생 프뢰에게 “당신은 ‘우리 서로 사랑하기 위해 살자’라고 말했는데, 그건 맞지 않은 것 같아요, 아아! 이렇게 말했어야 해요. 살시 위해 우리는 서로 사랑하자‘라고 말이에요.”라고 말한다. 그저 허례허식과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살아온 여성들, 특히 로코코 시대의 불륜적인 로맨스는 상위계층 여성들이 주로 즐겼다. 하급계급 내지 가난한 사람들은 늘 생계에 고단함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당시 18세기까지 책 1권이 매우 비싼 물건이었고, 그 가격은 보통 가정이 2주 동안 생활할 수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상위계층 또는 부르주아 계층의 여성 정도였을 것이다.

 

여성은 정치적으로 배제되고, 문자문화에 대한 접근성이 어려운 시대만큼 루소의 서적은 당시 여가생활을 책으로 찾을 수밖에 없던 여성에게 매우 큰 화제가 된 것이다. 편지에서 보여주는 사심 없이 오로지 진심으로 이루어진 문체와 아름다운 글의 흐름은 그녀들의 눈을 사로잡기가 충분했다.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 그리고 그것에 대해 뛰어넘어 보자고 했던 루소의 소설 <신엘로이즈>는 낭만주의 소설의 모태가 되었다. <신엘로이즈2>에서 번역자 김중현 교수의 해설을 읽어보면 “낭만주의자들은 루소를 ‘자연의 복음을 전파하는 예언자, 감정과 열의 원초적 힘을 재발견하고 이를 사회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킨 사상가’라고 평가하며, 바로 <신엘로이즈>가 그러한 평가의 시발점이 되었다.”

 

 

문명에 의한 자연의 파괴는 결국 인간에 대한 파괴로 이어지는 것처럼 루소의 가치관은 세상의 중심은 권력층이 아니라 일반 민중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나라의 힘을 가늠할 때 재사(才士)는 군주의 궁정과 항구, 군대, 병기고, 도시들을 보러 갑니다. 반면에 진정한 정치가는 경작지를 돌아보며 농부들의 초가집으로 갑니다. 전자는 그 나라 국민이 무엇을 해 놓았는지 보고 후자는 그 나라의 국민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봅니다.”

 

 

이게 단순히 연애소설이었다면 이런 글이 나올 수가 없다. 낭만주의소설로서 정치와 사회에 대한 루소의 사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민주주의국가를 살아가는 사람들, 특히 정치에 관련된 사람이라면 이런 문구는 평생 마음에 새기고 또 새겨야 할 글이다. 루소는 시골에 사는 농촌주민들을 자연인으로 보았다. 바로 그들이 어떤 삶을 살고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것에서 그 나라의 운명이 정해진 것이라 본 것이다.

 

 

루소의 <신엘로이즈>를 읽어보면서 이 소설은 18세기 중반에 나온 도서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는 순간 21세기 인간이 나 역시 많은 깨우침을 가져간다. 물론 종교적 가치관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겠지만, 자연과 인간 그리고 사회에 대한 그의 생각에 대해 부정할 수 없다. 물질문명에 빠져들어 인간성의 본질적 의식 대신 기계적인 의식만 주입된 이 세상에서 우리는 과연 우리 스스로 인간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신엘로이즈>에서 이런 대사가 인상 깊다.


 

“우리의 욕구 중 가장 큰 욕구이자 우리가 만족시켜줄 수 있는 유일한 욕구는 욕구를 느끼려는 욕구이며, 우리가 비참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첫걸음을 그 비참을 아는 거예요. 지혜로워지기 위해 우리는 강해질 거예요.”, “고통 없이 사는 것은 인간의 상태가 아니에요. 그렇게 사는 것은 죽어있는 거예요. 신이 아니면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비참한 인간일 거예요. 그는 욕망하는 기쁨을 박탈당할 거예요. 다른 모든 박탈이 이것보다는 더 견딜만한 거예요.” 우리 인간이 자연적 그 존재를 상실하고, 기계적 물질만능주의로 변모하여 스스로 삶의 의지조차 찾지 못한다. 물론 그것을 깨닫는 것은 인간 그 본인이다. 그 본인을 찾아가는 것이 곧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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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이, 대디, 플라이 더 좀비스 시리즈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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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y Daddy Fly>는 가네시로 카즈키의 소설로서 좀비들의 이야기 <Revolution No.3>에서 파생된 작품이다작품 세계관은 <Revolution No.3> 토대로 좀비 친구들이 2학년 여름방학에 있었던 일들을 스즈키라는 40대 후반의 남성의 하루일과로서 진행되는 이야기다소설의 분량은 불과 200페이지 정도이나그 안에 담고 있는 재미와 감동그리고 그 안에 숨어있는 날카로운 사회에 대한 작가의 분노와 일침이 숨어 있다. <Revolution No.3>에서도 좀비들은 공부를 못하는 것도 모자라 아무런 인맥이나 힘도 가진 것 없는 청춘이다.

 

가진 것이라곤 잔 머리를 굴리거나 바보 같은 일만 저지르는 친구뿐이다가진 것이 아무 없기에 오히려 더 부자인지도 모른다오히려 인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의해 쇠사슬에 의해 속박 당하기도 한다물론 가진 것이 너무 없으면 비참할지도 모른다그런다고 그런 비참한 삶에서도 몸부림치는 좀비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이번에 좀비들은 재미있는 아주 흥미로운 아저씨를 발견했다세이와여자학원 축제에서 자신들의 유전자를 품어줄 애인을 만들려는 좀비들은 안타깝게도 그 절차를 진행할 수 있는 기회조차 잡지 못했다.

 

어떻게든 좀비 바이러스를 퍼뜨리기 위해 세이와여자학원 축제에 들어가서 어느 여학생에게 연락처를 받아 연애를 해야 할 것이 아닌가그런 점에서 스즈키와 좀비들의 만남은 우연 아닌 절대적 숙명이었다사회적 멸시받는 좀비들사회적으로 가진 것도 없이 언제나 떠밀려 살아온 스즈키사실 알고 보면 좀비나 스즈키나 우리 일상에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일지 모른다회사에서 일만 하고 집에서 충실한 가장하지만 그 시계 같은 인생이라도 스즈키는 아내를 사랑했고특히 외동딸 하루카에게 언제나 좋은 아버지로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그 인생목표가 틀어졌다딸에게 폭행한 남학생이 유명한 명문학교의 화려한 운동선수라는 점이다권투시합에서 champion 3연패를 거머쥔 남학생에게 스즈키의 딸은 가혹하게 얻어맞았다그런 후 그 학교 지도교사와 교감은 아무 일도 없다는 식으로 대하고마치 스즈키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대했다그런 비굴함딸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스즈키는 새로운 인생을 목표로 한다이 소설에서 중요한 점은 단순히 스즈키의 열망과 즐거운 장면그리고 어이없는 해프닝이 아니다.

 

살아있는 인간이나 언제나 기계처럼 일만 하고상자 안의 꼭두각시로 살아온 중년남성들이 새로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힘이 없고 나약한 삶에서 오직 피하고 숙이는 것에서 일상을 지키는 그들을 말이다비굴할지 모르나 남자가 머리를 숙이며 비굴하게 웃어야 하는 것은 자신의 어깨에 자신이 아니라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가족이 있기에 용감해지고 비굴해질 수 있는 것이 남자다그러나 하루카의 모습에서 용감해질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비굴한 모습으로 가족에게 보여줄 수밖에 없는 스즈키의 삶에 심각한 간극이 생긴다.

 

스즈키의 반란은 그렇게 시작한다반란 아니 혁명의 주체는 원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힘든 훈련을 순신에게 받은 스즈키고등학생에게 맞고 욕먹고 존대조차 받지 못한 그 1달 반을 견디고마침내 원수를 외나무에서 만났다링은 좀비들이 준비하고 그는 그동안의 고생을 토해낸다하지만 단순히 이 유쾌한 반란을 하는 아저씨엉뚱한 짓만 벌이는 좀비들의 모습만 우리는 생각해선 안 된다이 좀비들이 아저씨를 응원하고 도와주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좀비들은 말 그대로 좀비살아있지만 살아있지 않을 것 같은 존재다좀비 중심인물들을 보면 대부분 이방인과 같은 존재다일본은 메이지시대로 올라가면 대동아공영정신즉 통일과 화합이란 미명아래 북해도의 아이누족을 무참하게 학살하고그들의 땅을 빼앗아 버렸고전통왕족이 있었던 오키나와마저 침공해 그들의 문화를 파괴해버렸다그리고 조선을 빼앗아 스즈키의 싸움스승인 박순신은 재일교포로 심각한 인종차별을 겪는다대부분 이민족이거나 혹은 섞이지도 못할 영원한 이방인이었다.

 

사실 어째보면 아무런 힘도 없이 오늘 하루 열심히 시계태엽처럼 돌아가는 스즈키 같은 일본국민 역시 그들 스스로 이방인이었을 것이다강자와 권력 앞에 아무런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등을 숙여야 하는 것에 말이다그런 스즈키에게 자신은 살아있음을 알리는 방법은 오로지 자신의 딸을 폭행한 녀석에게 찾아가 한 방 날려주는 것이다비록 권투선수에게 날리는 한 방이나 그 속에는 세상의 부조리와 부당한 도덕까지 날려주는 것이다세상에 나와 특히 남자는 그 누구에게 영웅이 될 필요가 없다남자가 세상에 나와 그를 영웅으로 봐야할 사람은 오직 그 남자의 자녀들일 것이다.

 

그래서 <Fly Daddy Fly>인 것이다아빠 날아라평범한 아버지는 늘 현실의 막다른 길에 부딪히지 않게 계속 힘든 삶을 살아간다물론 모든 사람들이 힘겨워 하나가족에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정신적 상실감은 그 어떤 것보다 참을 수 없을 것이다이 소설에서 가장 가슴이 뭉클한 장면은 스즈키가 집에 가는 버스를 탈 때정해진 시간 타는 손님 그리고 버스기사스즈키는 자신이 강해질 때마다 버스와 달리기 경주를 한다언제나 지는 그였지만당연한 약속처럼 싸움 전날에 버스를 달리기로서 이긴다.

 

버스기사는 스즈키를 바라보고 있었다버스기사는 모자 대신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고눈물을 흘리며 스즈키에 손짓을 한다어째보면 그들 모두 오늘 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이다스즈키의 모습에 자신들이 직접 행동하지 않더라도적어도 지금 우리는 살아있다는 표정을 보여주었다죽어있는 자는 웃지도 울지도 않는다단지 무표정한 얼굴이 공허한 눈빛으로 보이기도 혹은 보이지도 않은 것을 보고 있다. <Fly Daddy Fly> 언젠가 나도 아버지가 될지 모른다그때 나는 스즈키 같은 행동을 할 수 있을까글쎄아마 그것은 그때 가봐야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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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샤의 정원 타샤 튜더 캐주얼 에디션 2
타샤 튜더 지음, 공경희 옮김, 토바 마틴 글, 리처드 W. 브라운 사진 / 윌북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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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행복의 조건에서 21세기 자본주의 경제구조 사회에서는 아마 돈이 많은 사람들로 볼 것이다. 그리고 이에 반해 돈이 없는 사람들은 아주 불행하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문제는 돈이라는 것으로 행복 그 모든 것을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차라리 인간의 행복은 돈으로부터 많이 자유로울 수 있을 때 가능할지 모른다. 경제가 모든 인간의 불평등의 시작점이 되었을 때, 인간은 자신을 속박하는 쇠사슬을 향하여 끊임없이 달려간다. 인간의 사회가 존재하는 곳 어디든지 문명의 이기심이 그늘지고, 누군가 부유하면 누군가는 더욱 가난해져야 하는 세계가 되었다.


인간에게 문명의 진보가 과연 도움이 되었는가? 오히려 기계의 발달은 인간에게 도움이 되기보단 더더욱 착취와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그런 점에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누구냐는 질문에 우리는 그 행복한 사람의 모델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조차도 찾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일상의 반복에 의해 기계적인 존재로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성과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나, 그것은 정말 자신의 정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강요된 정신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읽어본 타샤 튜더의 삶이 녹아있는 그녀의 집과 풍경을 소개하는 <타샤의 정원>이란 책을 보며, 왜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인지 생각해보았다. 타샤 튜터가 자신이 선택하고 살아온 삶은 돈이나 세견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튜더 가문의 집안, 즉 영국 왕가의 후손으로 영국에 살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녀는 미국에 살고 있던 사람이었다. 인위적인 문명의 손길보단 19세기 미국이 이제 정착민들이 힘차게 살아가던 그 건축과 생활 도구들이 즐비했다.


후기에 나오듯이 그녀의 집은 마치 1800년대 시대의 1800년대의 사람처럼 보인 것이다. 맨발에 의상도 fast-food가 아니라 자신의 농장에서 자란 과일과 채소로 가득하다. 책에 거론된 것처럼 타샤는 20세기를 지나 21세기 초반까지 가장 자연주의자로서 살아온 인간일 것이다. 나 역시 삶의 가치는 자연주의를 추구하지만, 그녀처럼 살아갈 수 없다. 단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녀는 자연주의자이기도 하나, 그녀와 그녀의 가족 그리고 그녀의 집을 바라보는 풍경은 인상주의 화가가 그린 화폭과 같다.


현실의 사물들을 그대로 촬영했지만, 사진으로 보는 세계는 마치 꿈나라의 요정들이 사는 세계와 같았다. 꽃이 계절별로 시기별로 화려하게 피우고, 맛있는 산열매와 들열매는 인간의 몸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풍요롭게 해준다. 아무런 투쟁과 혼돈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세계, 인간에게 가장 위대한 것은 나에게 무엇이냐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자연이 만들어낸 세계라고 할 것이다. 자연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그녀에게 타샤의 책은 당연히 아름답고 희망이 가득한 것은 당연할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그녀처럼 살 수 없을 것이다. 우선 그렇게 살기 위한 여유가 없을 것이고, 그런 여유가 된다고 하더라고 그렇게 살아갈 용기도 없을 것이다. 타샤의 삶이 타샤만의 것이 된 이유는 바로 그녀가 선택한 삶이었을 것이다. 아름답고 위대한 자연이 있는 세계에 사는 인간은 모두 평화적이고, 마음이 풍요로울 수밖에 없다. 자연 앞에 인간은 그 누구라도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다. 자유와 평등이란 정의적 가치는 항상 우리 인간사회에 이상적으로 논하지만, 실재 그것이 제대로 되는 일은 없었다.


인간이 만든 문명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파괴하고, 결국 인간의 마음까지 파괴하여 인간 그 자체를 파괴한다. 경치가 좋고 전망이 좋은 곳에 사람이 모이더니 결국 가게가 생기고 도로가 생기며, 마지막엔 볼 것은 자연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가게 테이블에 놓여있는 메뉴판이 되는 아이러니로 이어진다. 자연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어야 말로 인간의 어리석은 욕심으로부터 우리의 행복을 지켜주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예전에 읽어본 서적 1권이 생각났다. 장 자크 루소의 <식물사랑>이다.


루소는 말년에 파리사람들의 비웃음과 음해를 피하기 위해 시골로 오고, 자신의 마음에 안정을 찾기 위해 산과 들로 나가 식물을 채집한다. 가지고 가는 것은 연필과 종이가 든 가방과 자신의 몸 하나를 의지할 수 있는 지팡이, 루소는 산과 들로 나가 식물들을 바라보며 그 식물의 효능이나 이용성에 치중하는 게 아니라 자연 속에 있는 식물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관찰하는 것이 인생의 낙이었다. 세심하게 그린 식물의 잎과 줄기, 그 식물에 대한 묘사와 상상력으로 가득한 글에서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축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타샤의 집 역시 그렇다. 계절과 시기가 바뀌면, 각종 식물의 색이 바뀌고, 나무에는 많은 꽃들이 만개하며, 그 꽃이 지면 풍요로운 과실이 맺는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만 먹는 게 아니라 이웃과 같이 나누어 먹고, 파티를 열어 모두 즐겁게 하루를 보낸다. 나에게 저런 삶을 찾아볼 수 없는 먼 나라의 이야기와 같았다. 그런다고 하여 자연의 아름다움을 잊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무를 좋아하는 편이다. 어느 골목길에 콘크리트 담벼락 너머로 나와 있는 목련이나 동백나무의 잎사귀와 꽃을 보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봄이 다가오는 자락에 각종 색들이 만발한 산과 들을 보는 것 역시 삶의 여유와 행복을 찾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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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엘로이즈 1 루소전집 5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 책세상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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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에서 로맨스는 존재하지만, 낭만주의적 요소는 없다. 그 이유는 연애소설에는 자유로운 공상의 세계를 동경하며 정서, 감정, 개성 등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단지 자신들만의 사랑만을 중요하게 나둔다. “우리 사랑 이대로 내버려 두세요!”를 말이다. 하지만 낭만주의 소설에서도 “우리 사랑 이대로 내버려 두세요!”에서 우리 사랑은 중요하게 여기지만, 그 사랑이란 이름 앞에 더 막대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상황들이 존재한다. 연애소설은 자신들의 연애에 대한 자유이지, 그 이상의 자유는 보이는 경우는 드물다.


특히 20세기 자본주의 정착 이후 21세기에도 그런 관점은 유효하다. 사랑이란 이름은 우리가 흔히 보는 TV 드라마나 영화, 혹은 그런 소설조차도 화려한 스펙타클로 가득하다. 사랑이란 이름은 인간의 마음 속 깊이 자리 잡은 미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본력에 의해 좌우된다. 특히 드라마 연출이나 또는 가상결혼을 소재로 한 프로그램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 이벤트성 고백이다. 그 고백의 성사는 단순히 개인의 마음이 아니라 개인이 마음이 하나의 물질적인 존재로 통해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로맨스라는 이름이 결국 이벤트의 크기, 즉 자본력의 동원으로 이루어진 셈이다.


그런 모습들은 이미지가 매개로 되는 스펙타클의 사회처럼, 우리의 일상생활을 녹아 들어가며, 남녀 간의 사랑, 하다못해 사랑 아닌 개인적 의상과 취미 내지 취향조차 거기에 맞추어간다. 우리의 마음이란 과연 어디에 있고, 무엇을 향하여 가는가? 이런 21세기 대중문화에서 18세기 문학 <신 엘로이즈>는 당연히 색다른 모습일 것이다. <신 엘로이즈>를 읽기 전에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란 소설을 읽은 적이 있었다. 괴테의 소설은 낭만주의 소설로서 베르테르가 아름다운 여인 로테를 사랑하지만, 끝내 이룰 수 없기에 권총자살로 막을 내린 비극적 소설이다.


이룰 수 없는 사랑, 그 사랑에 절망하는 베르테르, 친구에게 솔직한 마음을 고백하는 그의 슬픈 편지에서 단순히 나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낭만주의소설로서 사랑만을 논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런 것처럼 괴테의 영혼이 되어준 루소의 <신 엘로이즈> 역시 그러하다. <신 엘로이즈>는 루소가 자신을 소재로 적은 소설이고, 자신의 주변 요소를 통해 저술한 소설이다. 주인 생 프뢰는 우수하고 열정적인 청년이고, 생 프뢰가 사랑던 쥘리는 미덕이 풍부하고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러나 문제는 스위스인이던 생 프뢰는 자신의 신분은 소시민이고, 쥘리의 신분은 귀족이었다. 쥘리의 아버지는 귀족의 신분으로 높은 직위에 게다가 장교 출신이란 이유로 생 프뢰에 대해 좋지 않게 여겼다. 여기서부터 이 작품은 비극적인 두 남녀의 운명이 시작되는 점이다. 괴테의 소설에선 일방적으로 베르테르가 계속 친구에게 편지를 보낸다면, 루소의 소설은 편지를 등장인물끼리 서로 주고받는 것이 특징이다. 소설에서 보통 등장인물이 같이 그 공간에 나와 서로 말로서 대화하는 게 일반적인 흐름이나, 여기선 자신이 그날 있었던 일이나 자기가 생각한 일에 대해 계속 편지로 주고받는다.


인간은 서로 대화를 나눌 때 입으로 통해 전달하기 보단 글로 전달하는 게 더 정확하고 이성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신 엘로이즈>를 보는 순간 오히려 글은 이성으로 가득하기보단 거대한 강물이 굽이굽이 하류로 흘러가듯이 율동과 열정이 숨어있었다. 그런다고 그 열정이 너무 지나치게 강렬하게 도를 벗어나지 않은 것도 인상적이었다. 괴테의 소설은 말 하나하나가 매우 강렬했으나, 여기서는 자신의 강렬한 마음을 마치 호수에 큰 파장이 일어난 것처럼 울리게 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알 수 있는 것은 <신 엘로이즈>에 담긴 내용은 쥘리와 생 프뢰라는 젊은 남녀의 사랑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그 시대의 모순과 루소의 사상이 담겨있었다. 루소의 사상은 프랑스대혁명이 동기뿐만 아니라 프랑스 국민공회의 토대가 되었고, 삼권분립에서 입법, 행정, 사법으로 나우어진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입법권이 제일 중요하다고 했다. 만약 잘못된 법과 제도가 있다면 고칠 수 있는 것이 입법의 권한이기 때문이다. 루소가 보던 프랑스의 정치사회는 모순으로 가득했었다.


프랑스대혁명과 세계 혁명가의 복음서가 된 <사회계약론>보다 루소의 서적으로 사람에게 더 많이 읽혀진 것은 <신 엘로이즈>와 <에밀>이다. 게다가 <에밀>을 읽다보면 사람들은 루소가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여 여성으로 하여금 남성에게 복종하는 것만으로 알겠지만, 그것은 틀린 말이다. 만약 <신 엘로이즈>에 대해 조금 이해한다면 오히려 여성이야말로 남성의 존경을 받아야 하는 것이고, 그 존경을 받기 위해 여성은 정숙함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21세기 자유연애를 추구하는 사회지만, 적어도 자유연애가 보장된 지금보다 그때의 <신 엘로이즈>의 쥘리와 생 프뢰의 사랑이 더욱 위대하고 아름답게 보인다.


<신 엘로이즈> 1권을 보면서 느낀 점은 루소가 쥘리와 주변 인물하고 대화하면서 느낀 세상에 대한 관찰이다. 그는 시민의 도덕심을 강조했고, 부당한 권력과 세견에 대한 비판을 날린다. 18세기 중반 프랑스 파리의 거만한 로코코(탐미주의)문화의 특성을 부정했으며(한 여자가 다수의 애인을 거느리는 것), 그 원인이 바로 사랑의 결합이 남녀 간의 사랑으로 인한 동의가 아니라, 여자의 동의 없이 억지로 귀족이나 부호에게 가는 것이다. 사랑 없는 결합에 서로 다른 애인을 찾는 것을 부도덕하게 여기고, 특히 쥘리의 아버지가 군인으로 복무하면서 쥘리의 어머니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다른 여자를 만나다, 이제 나이가 들자 다시 집에 온 점을 본다면 과연 그 시대의 도덕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루소는 본래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도 싫어했고, 사고로 인해 몇 번 죽을 뻔했으며, 자연에 은둔하는 것을 좋아했기에 당시 파리 살롱문화를 비판했는지도 모른다. 그대로 <신 엘로이즈>를 읽으면 생 프뢰의 기행에서 발레지방에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그곳의 주인들은 손님에게 아무런 것을 바라지도 요구하지 않으며, 집안의 하인들과 식사할 때 같은 탁자 앞에 의자를 앉게 해주는 것이다. 신분의 차이로 인간이 인간으로서 받아야할 그 마음가짐을 루소는 잊지 않은 것이다. 루소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미덕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신 엘로이즈>가 단순히 쥘리와 생 프뢰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야기를 메인으로 다룬다고 해도, 그 이야기의 흐름에서 인간에 대한 사랑과 인간의 미덕은 늘 따라다닌다. 남녀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에 대한 <신 엘로이즈>는 인간의 자연성을 늘 추구하는 것이 보인다. 쥘리에 대한 생 프뢰의 존경은 쥘리가 갖고 있는 미덕이고, 그 미덕은 꾸미지 않은 쥘리의 마음이다. 쥘리의 초상화가 생 프뢰에게 올 때 그는 그 초상화가 마음에 들지 않은 이유는 화가가 쥘리의 있는 그 모습을 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얼굴 아랫부분을 정확히 달걀 모양으로 그렸습니다, 두 뺨과 턱을 분리시킴으로써 윤곽은 좀 흐트러뜨리지만, 더 귀엽게 보이게 하는 그 가벼운 굴곡을 잡아내지 못했습니다. 이에 대해 나는 아주 불만이 큽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당신이 아름다움이 아니라 오롯이 있는 그대로의 당신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도 아니더라도 참 인상적인 말이 많았다. 21세기 화려한 사랑의 미디어가 18세기 소설에서 나온 사랑보단 못한 이유는 “언제나 겸손한 진실한 사랑을 사랑의 표시를 대담하게 내보이지 않아요. 수줍게 숨기지요. 숨기기, 침묵, 거 많은 수줍음은 사랑의 달콤한 열광을 강화하고 감춰요.”라는 내용이 있었다.


미디어로 전달되는 스펙타클은 언제나 대담하게 언제나 웅장하게 언제나 화려하게 꾸미려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이 로맨틱하게 보려고 한다. 물론 지금의 시대에 18세기 소설을 토대로 판단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나, 사랑이 인스턴트로 변해버린 지금의 시대에 보면 과연 어느 쪽이 더 시대착오적인가 하고 생각할 점이 있다. 그리고 이 책은 분명 남녀만이 아니라 인간의 사랑을 담고 있다.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사랑할 수 없다. 혹은 남을 사랑하기 위해서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 것처럼, 우리는 오늘날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고 있을까?


“인간을 만드는 것이 이성이라면, 인간을 인도하는 것은 감정이니까요.” 이 말에 너무 공감한다. 우리는 감정을 너무 쉽게 드러나지만, 감정 그 자체를 가지지 않고 있다. 이성은 오직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 봉사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이런 이성과 혹은 이성으로 얻어진 지식과 권력을 올바르게 사용하기보단 자신의 이익을 위해 봉사한다. 물론 그런 일들이 용인되어버린 비극적인 세상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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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5-02-16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헛! 이 책...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보고 만지작 거리다가 그냥 놓고 왔는데...이 리뷰를 보니 후회가 밀려오네요...ㅜㅜ

만화애니비평 2015-02-16 18:08   좋아요 0 | URL
이 소설이 가치가 있는 이유는 바로 루소가 저술했기 때문이죠.
 
레벌루션 No.3 더 좀비스 시리즈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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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예전에 독서모임에 일본에서 유명한 문예작가 등단으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기리는 류노스케문학상, 그리고 나오키문학상이라 들었다. 한국에서 작가로 따지자면 <날개>를 저술한 이상이란 작가라고 할 수 있을까? 문학 쪽으로 그렇게 많이 읽지 않아 딱히 뭐라 이야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나오키문학상을 받은 가네시와 카즈키의 <Revolution No.3>를 보면서 뭔가 모르는 동질감 내지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기본적으로 Revolution이란 혁명이고, No.3은 세 번째라는 의미로 한국 영화에서 <No.3>가 있듯이 아마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채 무시당하며 살아온 별 볼일 없던 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세속이 이리하든지 혹은 세견이 저렇게 흘러가든지 No.3들도 사람이고 자신들도 살아갈 권리도 있고, 사랑을 받을 권리가 있다. 이들은 단순히 반 재미나 오락을 즐기기 위해 삐뚤어진 자들이 아니었다. 이 사회의 모순과 억압, 그리고 문제들이 만들어낸 이방인들이었다. 마지막에 왕국에 나타난 나그네가 춤을 추자 왕이 다리를 자르고, 머리로 율동을 하자 목을 베고, 이제 마무리로 눈 커플로 박자를 맞추려고 하나 인간의 목이 몸에서 분리되면 살 수 없다. 그렇게 특이한 자들 혹은 이방인들은 이 사회로부터 제거되거나 추방당한다.

왠지 이 이야기들은 낯설지 않은 이야기다. 나 역시 이방인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작품에 나온 고등학교 친구들 좀비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나 나름 사회적으로 비주류에 위치해 있고, 대중이란 문화적인 권력집단과 어울리지 못하는 부류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만화책이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사람들에 대해 오타쿠라고 한다. 아니 오덕이나 덕후라고 하며, 마치 반사회적 인간상으로 보는 경우도 있고, 현실과 괴리된 인간으로 마치 신기한 인간인양 보는 경우도 있다. 물론 그런 부당한 일을 당해본 경험이 있었다.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새겨진 거대한 베개를 가지지 않았지만, 그런 베개를 들고 다니는 어느 사람이 방송미디어의 출현으로 마녀사냥을 당하는 것이다. 물론 내가 만화나 애니메이션, 그리고 비주류적인 문화를 즐기지 않고 매이처럼 TV 연예방송 프로그램을 본다면 남들과 어제 TV를 보니 1박 2일이 이렇고, 무한도전이 저런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Revolution No.3> 작품 내에서 주인공처럼 나 역시 TV를 보지 않는 사람이다. 이미 TV를 직접적으로 보는 것을 그만 둔지가 10년이 되어간다. 드라마가 무엇이 유행하는지 가요에서 아이돌스타가 누군지 모른다.

여름방학 2부에 속하던 시기, 주인공이 스토커를 찾아내던 시기, 친구 누나의 친구가 방송국에 취직할 때, 그 누나가 주인공을 의아하게 본 것과 마찬가지다. 반드시 세상에 흐름에 따라야 하는 것이 정답은 아니지만, 세상은 강요한다. 마치 거기에 해당되지 않은 인간들은 이상한 존재로 낙인을 찍는 것처럼 말이다. 이 작품을 읽어보면 작가가 지금 일본 젊은 세대에 대한 의식에 대한 계몽이란 비판적 의식은 없다. 단지 그들에게 주어진 상황이란 것을 그들의 입장이 되어 바라보고 있다.

주인공들을 보면 참으로 다양하다. 주인공은 우수한 학생이나 중학교 2학년 시절, 꽃뱀에게 당한 것도 모자라, 아버지가 바람을 피워 이혼하고, 어머니와 단둘이 살아가나 제대로 된 밥을 먹어본지가 옛날이라고 한다. 결손가정이나 편부모 게다가 불안한 심리가 그를 우수한 중학생 영재에서 골칫거리 고등학생으로 변하게 했다. 옥상에서 담배피고, 남의 여학교에 가서 소동이나 일으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 소동은 생각하면 무엇인가 그들이 틀렸기보단 그들이 틀린 짓이 될 수밖에 없는 사회현실에 대한 씁쓸함이 가득하다.

왜냐하면 나 역시 공부를 너무 못했기 때문이다. 대학 진학이 8%까지의 학교는 아니나, 나는 내가 다닌 학교에서 성적으로 뒤에서 8%보다 높았다. 공부를 못하고, 운동도 못 하고, 성격도 활달하지 못한 시기이니 얼마나 보이지 않은 차별을 당했겠는가? 학교수업 시간에 공부 못 하는 학생들은 선생에게 그저 무시대상이고, 그것이 학생들 사이에도 이어진다. 은근히 공부 못 한다고 대 놓고 무시하지 않지만, 뭔가 언저리에 조금 불쾌감이 자리 잡은 것은 있다. 그나마 나는 나은 편이다. 작품에서 재일조선인 순신이, 그는 다른 것은 참아도 자신의 인종차별을 용서하지 못했다. 할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존경하는 그로서 일본이란 사회의 불평등을 고스란히 자신의 얼굴에 훈장처럼 새겨놓았다.

인종차별 발언에 눈 옆자리에 새겨진 상처부분이 붉게 변하는 그는, 상당히 우수한 인재고, 항상 독서를 하는 지식인이라고 볼 수 있다. 단지 입만 살고, 곡학아세로 지식 팔이 하는 게 아니라 진짜 지켜야할 선도 기준도 명확하게 아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방인인 자신에게 일본사회는 온통 적이었다. 적이 아닌 자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인물이다. 주인공처럼 파탄 난 가정, 혼혈인 아기, 오키나와 출신 히로시 같은 애들이다. 하다못해 운이 지지리도 없는 야마시타도 마찬가지다. 사회에서 소외받은 이들에게 처음부터 이 사회는 따뜻한 손길을 주지 않았다.

단지 거기에 불만만 토로조차 할 수 없던 문제아들이었다. 그나마 기억나는 것이 몰로 선생, 자신의 어머니가 히로시마 원폭 이후 자신을 출산하여 원폭피해 증세에 대한 두려움으로 결혼 이후 아이를 가지지 않는다는 말은 주인공의 가슴을 깊게 파고들어온다. 어른들의 세계에 흔히 말하여 꼰대정신, 내가 살아온 것과 동시에 세상에 대한 도덕을 논하는 자들은 기본적으로 윤리적인 요건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몰로 선생과 달리 체육선생은 그런 권위적인 의식만 가진 꼰대적인 인간상이다.

왜 문제아들이 문제아로 될 수밖에 없는지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자라온 성장배경이 다르니 생각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그러나 적어도 진짜 학생들을 생각한다면 학생에 대해 하나의 인간으로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주인공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몰로 선생에게 진심으로 깍듯이 인사를 한다. 人間이란 단어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말하는 것이다, 단순히 사람이란 존재가 하나의 자연적으로 존재한다면 그는 자연적으로 인성이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사람과 사람의 사이, 즉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여러 가지 배경적 조건이 따른다.

인간이 형성은 선천적인 불평등보단 오히려 후천적 불평등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태어날 때 다른 종족이라고 사회적인 인식과 수용성에서 열린 사회였다면 그 당사자가 흑인이든 조선인이든 여자이든 각가지 사정 따위는 이유조차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좀비스로 불리는 이 작품 주인공들은 같은 고등학생인데도 차별을 당하고 있다. 오직 사회적 규범이 정하는 공부나 또는 이 사회의 세속적 가치만 따르기를 바라는 가치관으로 그들에게 미래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점에서 몰로 선생의 가르침은 큰 충격일 것이다.

가령 열등하거나 자신들과 다른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우등한 존재나 같은 부류만 모이게 되면 그 사회란 도태된다. 과연 그렇다. 열등한 인간이라고 하여 그들이 진짜 열등한가? 그들의 열등한 선천적 조건이 아니라 후천적인 조건이다.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처럼 인간의 불평등이란 선천적 조건보단 오히려 후천적 조건으로 더 가중되는 셈이다. 그 사회의 도덕성에서 불평등은 경제적, 사회적 조건에 의해 결정지게 되며, 그 불평등이 하나의 정당성이 부여되는 사회는 정신병자들이 정상인들처럼 돌아다닌다.

마치 이노우에 누나의 친구가 시바키란 대기업 인사부장에게 스토킹 당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시바키 같은 인물, 즉 꼰대적인 발상으로 자신들의 가치관이 아직도 옳다고 우기는 부류는 우습게도 이 소설에서 제시한 것처럼 혹은 일본 현재나 우리나라 역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공감보다 단지 공동으로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이 책에 나온 것처럼 정신병자 내지 사이코들을 만들어내는 것 같았다. 이것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주인공들은 성화여고를 찾아 간다. 성화여고 축제 때 그들 학교에 침투하여 혁명을 일으키려 한다. 자신들에게 돈도 권력도 없다. 그러나 사회는 돈과 권력이 있는 남자들이 그에 맞춘 여자들과 계속 이어간다. 그렇다면 가지지 못한 남자들은 돈과 권력이 있는 여자와 맺어지는 게 정답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자신들의 열등함과 여자들의 우등함을 섞는 것이 맞을 것이다. 문제는 그게 가능하려면 마음이 통하든지 또는 호감을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기회조차 주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성화여고 축제 때 좀비들은 좀비바이러스를 퍼뜨리기 위해 침투를 시도한다. 1년차와 2년차는 실패하고, 3년차에 비로소 성공한다. 그 성공에서 성화여고의 여학생들이 그들을 인정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들은 낭만적이라고 할 것인가? 우리는 낭만적인 게 단순히 연애적인 요소만 생각하는데, 물론 연애적인 요소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위험하고 어째보면 실패의 아픔도 존재한다. 그래도 다시 도전하는 모습에 좀비들은 아주 낭만적인 녀석인 것은 분명하다. 아무도 인정하지 않은 세견에 대한 도전의식, 그리고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인 상처투성이 영웅, 최근 여자들은 머리가 단단한 꼰대인 체육선생이나 시바키 같은 꼴통 마초들을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용기를 내어 위험을 무릎 쓰고 도전하는 남자라면 봐줄 것이라 생각 든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꽃을 찾아가는 것은 나비이지 꽃이 나비로 가지 않는다. 비록 자신에게 도달하기 전에 볼품이 없고 망신창이가 되더라도 말이다. 단 조건은 아직까지 그런 낭만적인 여유가 자신에게 있다는 전제 아래서다. TV 드라마나 연예프로그램에 내가 거짓된 낭만에 회의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은 방송으로 그것을 보면서 자신이 마치 낭만적인 상황에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가상의 시나리오로 작성된 낭만이고, 자신이 만든 낭만이 아니다.

감정을 소비하는 것이 현대사회에 종종 보이는 스펙타클이다. 나라는 존재는 결국 스펙타클의 열렬한 추종세력이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만드는 게 아니라 그 세론에 빠져가는 것이다. <Revolution No.3>에서 혁명은 단순 좀비들의 반란만이 아니다. 그 좀비의 반란은 그들의 일상이 아니라 그들의 일상을 철두철미하게 침투하는 현실이다. 책에서 주인공이 말한 것처럼 작가는 아마 1960년대 말의 일본에서 베트남전쟁 반전운동이나 혹은 야스다강당 사건 것을 인지하는 모양이다.

당시 저항에 대한 의식에서 저런 일들로 인해 뭔가 고민이 있는 청춘이라면 분명 통하는 게 있었다.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서로 간의 이야기가 연결된다. 하지만 일본 사회의 경제 고도성장 이후 거품경제 붕괴는 일본 사회 경제적,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빈부격차와 더불어 핵가족화 등과 같은 문제를 일으켰다. 그런데 그 문제는 단순히 학생운동으로 하기에 뭔가 새로운 사건을 만들 수 없었다. 단지 사회에 대한 부조리나 괴리는 일상에 마주치는 사건에 의해 좌우된다. 주인공이 사건을 좋아하는 것은 뭔가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바꾸고 싶은 충동이 숨어 있다. 자기의 주변에 사건이 끊이지 않고 거기에 도전하는 것이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최근에 한국영화 중에 한국전쟁부터 시작하여 근대화와 산업화를 다룬 영화가 있다. 그 영화에서 웃기는 점은 우리가 고생했으니 미래는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생각이 오히려 지금 한국에서 더 심각한 빈부격차로 이어졌다. 전쟁이후 거의 모두가 배고픈 시기였다. 하지만 지금 사정이 좋아졌다고 하나, 배고픔에 허덕이고 있는 부류는 여전히 많고, 그들은 사라져 간다. 그런 것을 두고 사회적으로 감정소비만 하고 뉴스이슈로 사라질 뿐이다. 왜 그렇게 되는지 생각하면 아등바등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하루하루 보내는 우리 역시 그런 원인자인데도 말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Revolution No.3>의 주인공들 수준까지 비주류는 아니나 그래도 비주류로 살아왔고, 지금도 비주류적인 요소가 있다. 꼴통학교의 순신이가 <논어> 같이 보통 사람들이 읽지 않는 서적들을 보는데, 나 역시 보통 사람들이 읽지 않는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과 같은 것을 읽고 있다. 세견에 따라 몸 사리는 것엔 어쩔 수 없으나, 거기에 놀아나는 것은 결코 좋은 삶의 방식이 아니다. 차라리 특이영역을 가져 남들과 다르게 사는 것이 자신이란 실존적 영역을 찾아가는 게 바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존주의 하니 어느 영화에서 등장한 사람이름이 생각난다.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쓰러진 어느 대학생의 마지막 비명처럼 우리는 이런 말도 안 되는 꼰대들의 세상에 살아야 하는 것일까? 결과론적으로 현실의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그 모순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꼰대들은 여전히 딴청을 피운다. 이런 사회에 <Revolution No.3>은 소설로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보단 이런 문제에 대해 다르게 볼 수 있는 것을 유도한다. Revolution은 만드는 것은 자신 스스로의 사고 자체를 Revolution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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