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시게마츠 기요시 지음, 이선희 옮김 / 예담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시게마츠 기요시의 <십자가>란 작품은 모두에게 공감이 가면서도 한편으로 다른 생각들을 만들게 하던 작품이었다. 책을 읽으면 난이가 높지 않으며, 일반적으로 우리가 늘 주변에서 접할 수 있는 문제다. 하지만 문제의 관건은 우리는 항상 주변에 있는 문제들이 익숙해지면 그것에 대해 제대로 인지할 수 없게 된다. 즉, 사람의 감수성이나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감능력이 저하된다는 의미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우리 일상의 문제와 모순을 제대로 바라보기 보다는 오히려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지나치려는 기만성으로 가득 차게 된다.

 

남의 일은 엄청난 사고라도 그냥 별반 의미 없이 지나가겠지만, 그 남의 남인 내가 그 상황에 닥칠 경우 자신의 이성과 판단력을 제대로 펼칠 수 없다. 이번에 읽어봤던 <십자가>란 소설 역시 그렇다. 무너진 교권이 최근 뉴스로 접하게 되었다. 학교 교사들이 예전에는 정규직이 되다가 비정규직 내지 임시직으로 되면서 반영구적으로 근무하는 게 아니라 일시적으로 근무하게 되었고, 그들은 언제라도 학부모의 클레임에 의해 자리에서 나가야 할 사태가 올 수 있다. 언제나 사회적으로 뭔가를 희생시키는 대상이 이제는 어디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도 된 것이다.

 

그런 학교 교권이 무너진 상황에서 왜 교권이 무너지게 되었는지를 생각하면, 바로 인간이 인간으로 대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기분과 상황에 따라 도구화된 것이다. <십자가>에서 처음 시작은 후지슌이라는 중학생이 자살하면서부터다. 유서에는 4명의 이름, 2명은 자신을 괴롭히던 불량청소년, 1명은 자기의 절친한 친구이고, 또 다른 1명은 그가 짝사랑하던 여학생이다. 자신을 괴롭힌 2명은 원래 불만이 있었다고 하나, 친한 친구와 좋아하던 여학생은 아무 죄도 없는데도 가슴에 크나큰 상처를 가지고 살아야 했다.

 

그들은 자살한 중학생에게 아무런 해를 가하지 않았으나, 죽은 학생의 부모, 그리고 후지슌의 남동생은 달랐다. 왜 도와주지 못했나? 왜 알아주지 못했나?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위로했었다면 이런 불상사가 일어날 리가 없지 않았는가? 라고 말이다. 솔직히 어떤 문제를 두고 그런 엄청난 일들을 중학생에게 책임여부 자체를 묻는 게 잘못된 일이고, 그런다고 그들을 방치하거나 억지로 잡아두는 것도 문제다. 결국 어느 중학생의 자살은 그 학교와 사회, 더 나아가 일본이란 나라조차 넘어선다.

 

학교란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한다. 후지슌을 괴롭히던 2인방 중에 하나가 오토바이를 타던 중에 사고로 죽었다. 살아남은 학생의 부모는 죽은 아들의 어머니에게 심한 불평과 원망을 듣는다. 얼마 전에는 자신의 아들이 그렇게 만들었는데 말이다. 자신의 아이가 저지른 죄는 생각하지 않고, 남의 아이는 문제라고 말하는 어른들의 이중성이 사회적으로 하나의 의식이 되고, 그 의식이 공동체들의 하나의 가치가 되는 순간, 그 세상은 점점 망해가는 징조인 것이다. 후지슌의 편지에 적힌 친구와 소녀에게 끊임없이 따라는 신문기자, 그는 계속 그 사건들을 잊지 않고 상기시키려 한다.

 

중학생들이 무슨 깊은 생각이 있겠는가? 그때는 오로지 무섭고 두렵고 도망치고 싶을 것이다. 인간에게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문제가 오면 현실에서 눈을 돌릴 뿐이다. 그러나 더 심한 문제가 있었다. 눈을 돌려도 그 문제는 자신이 바라보지 않았을 뿐이지 자신의 앞에 언제나 마주하고 있고, 길을 떠나 도망쳐도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것이다. 지나간 역사는 흘러간 시간이지만, 인간에게 지나간 역사와 시간은 결국 자신이란 존재를 형성하게 해준 하나의 토대다. 그 토대가 어느 한 부분이라도 부정하는 순간 그것은 자신의 현실을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든 자신의 장점이든 단점이든 안고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다.

 

소설 제목처럼 <십자가>란 자신의 등에 평생 업고 다녀야 하는 숙명의 속죄의식이다. 칼은 상처를 내고 끝나고, 찔리면 아프지만, 그것은 자신에게 피해의식이 되어 상대방에 대해 원망을 할 것인가 아니면 용서할 것인가 라는 선택지가 존재하나, 십자가란 그런 선택지는 없다. 단지 자신의 마음에 담고 살아갈지 아니면 눈을 돌리는 것이다. 눈을 돌려도 왜 다시 그것은 자신을 돌아오는 것일까? 후지슌은 매우 어린 나이에 죽었다. 어린 나이에 죽었기 때문에 옛 친구로 둔 유군의 경우 어릴 때는 몰랐다.

 

하지만 시간은 흘러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겼다. 우리 형의 말이 생각난다. 만약 결혼에 대해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다면 하지 말라는 것이다. 결혼이 단순히 연애의 의미로 둔다면 그 순간 결혼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결혼에서 가치관이 없어지는 경우 그 가치관을 유일하게 맺어주는 것은 자신의 자녀다. 결혼하면 처음에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다가, 어느 순간 눈을 돌리게 된다. 인간은 간사하게도 지루함과 한가한 심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그 집안의 모든 관심사는 아이에게 간다. 아이가 어떤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고, 자신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는지 말이다.

 

유군의 아이가 어린이집의 친구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누군가는 좋고 누군가는 싫다고 한다. 유군은 왜냐고 묻자, 유군의 아이는 그냥이라고 대답한다. 그때 유군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온다. 이때까지 마음속에서 억지로 잡아둔 눈물이 이제야 터진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왜 친구가 좋은지 물어보면 그냥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조건이나 이익의 목적이 아니라 그 자체로 친구가 생각한다는 것이다. 후지슌의 죽음에서 그가 남긴 이름에서 유군은 상처를 받고, 원망을 했지만, 그런 자신에 대한 후회와 원망이 따라오는 것이다.

 

자신의 친구조차 자신이 나온 중학교에서 교사를 하고 있다. 언젠가는 자신의 아이도 과거의 자신처럼 혹은 후지슌처럼 살아가는 날이 올 것이다. 소설은 죽은 가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게 아니라 유군의 눈을 통해 가족들을 바라본다. 관계는 있지만, 마치 관계가 없는 것처럼 살아가고 싶은 삶처럼 말이다. 유군의 모습에서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할 수 있는가? 그가 비겁할까? 아니면 너무 개인주의적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럴지도 모르나, 그는 일반적으로 우리의 얼굴과 생각을 한 인간이다.

 

너무 특별하거나 잘난 것도 아니라, 그저 그런 인간 중에 하나이다. 현실에 무력한 인간이었고, 그저 도망치는 것만 생각했다. 학교도 자신이 사는 작은 도시가 아니라 왜 도쿄로 가는 것인가? 거기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무게는 벗어날수록 그 공백 기간을 채웠다. 신문기자가 그렇게 자신들을 향하여 비난을 했지만, 사실 그 비난조차도 하나의 위로였다. 그런 비난조차 듣지 못하고 성장하면 더 심한 죄의식이 자신을 눌러버린다는 점이다. 뭐든지 처음에 맞는 매가 편하다고 한다. 처음에 맞는 매는 때리는 사람의 완력이 있기에 맞는 사람에게 불편하나, 저 뒤에서 자신의 차례가 늦어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 눈치를 보는 것보다 훨씬 속이 편할 것이다.

 

단지 속죄해야 하는 깊이가 너무 깊으면 생각을 할 수 없다. 죽음이란 단어는 너무 무겁고, 입에 내놓기가 힘들다.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해야 한다. 만약 십자가란 죄의식이 없고, 그 고통의 무게를 망각하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라 그저 숨만 쉬고 있는 움직이는 인형이다. 자신의 양심과 의지도 없이 그저 기계처럼 살아가는 존재에게 삶의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 물론 편한 게 좋다. 그러나 최근에 생각나는 게 있다. 유럽의 고전주의 시대 "Memento mori"이란 단어가 있다. 인간에게 “죽음을 기억해라!”란 의미를 담은 말이다.

 

고전주의 시대는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인간은 신에 의해 운명이 결정지어진다는 구시대적 사고방식이다. 그런 점에서 Memento mori를 구시대적인 종교관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점에서 인간의 죽음은 언제 올지 모르는 불청객이다. 그런 점에서 죽음 그 자체를 생각하고 살아가야 하는 점은 인간의 이성과 판단력을 마비하고, 절대적 신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는 수동적인 삶을 살게 만든다. 그것보단 차라리 기만하지 말자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 같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것은 단순히 삶의 마지막보단, 삶이 마지막이 도래할 때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우리 마지막 모습을 우리가 경험할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생각하면서 깊은 후회를 할 것이다. 물론 그런 후회조차 하지 않을 단순한 인간들도 많을 것이다. 마지막에 후회하는 인간과 후회하는 것조차 모르는 인간, 어느 누가 행복할까? 제일 행복한 것은 마지막에 후회할 일을 하지 않았다고 스스로 맹세할 수 있는 인간이다. 죽음에 대해 인간들은 죽음 그 자체보단 죽어가는 그 순간, 죽음 이후의 세계가 두렵다. 삶과 죽음은 분리된 게 아니라 항상 일치한다는 실존적인 관념만큼 우리 삶이 자기 자신에게 기만적인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그것을 느끼는 우리는 어떻게든 십자가를 안고 가야 한다. 십자가를 안고 고통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진정 인간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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