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크엔젤 - 스탈린의 비밀노트,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4-2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4
로버트 해리스 지음, 조영학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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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아크엔젤>이란 러시아에 위치한 작은 말이다. 로버트 해리스가 <아크엔젤>이란 소설에서 이 지역을 선택한 이유는 프롤로그에 소개되고 있다.

 

1. 대천사, 구품 천사 중 한 천사로 국가 통치자의 보호와 특별한 사명을 전달한다.

2. 러시아 북구 백해에 위치한 항구도시, 스탈린의 비밀노트가 가리키는 종착점


소설이라고 하나, 기본적인 세계관은 현실적 기반을 두고 있다. <아크엔젤>은 1990년대 소비에트연방 해체 후 러시아의 사회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르는 러시아, 아마도 우리는 지난 과거의 변화 속에도 그 시대를 그리워하고 있다. <아크엔젤>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것은 인간이 가진 광기다. 광기가 돌출되는 이유는 무엇이고 아직도 유지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소비에트연방 해체 후에 옐친과 푸틴이 정권을 잡지만, 아직까지 러시아에선 스탈린과 스탈린 이후의 시대를 그리워하고 있다.


소설에서도 스탈린의 이름이 계속 언급되고, 스탈린의 초상화를 들고 다니는 사람도 많으며, 낫과 도끼가 새겨진 소비에트마크가 달린 물건들이 종종 나오고 기차에도 새겨져 있다. 게다가 모스크바와 멀리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과거의 향수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넘치고 있다. 스탈린에 대해 다시 돌아가자. 왜 사람들은 스탈린을 그리워하고, 지난날의 향수를 찾아가는가? 인간은 이성만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나기 위해서 하나의 정체성을 설정한다.


인간의 생명은 생물학적으로 살아남으려는 본능에 치우쳐 있지만, 정체성에 대한 인간의 갈망은 인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만큼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아크엔젤>에 등장하는 헥소 박사는 자신이 러시아에 방문하게 된 동기가 스탈린 연구발표하기 위해서다. 스탈린은 1936~1938년 4회의 모스크바재판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그가 죽인 사람 수는 세계대전에서 죽은 사람이나 혹은 히틀러에게 학살당한 사람보다 더 많았다.

 

시대의 사이코패스, 광기에 젖은 인간, 스탈린이란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아직까지 되살아나는 유령이다. 소비에트연방이라는 나라가 설립될 때 레닌과 볼셰비키들은 인터내셔널 가와 라 마르세예즈를 혁명 당시 계속 불렀고, 인터내셔널 가는 소비에트연방의 국가(國歌)가 되었다. 그러나 레닌 사후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스탈린 정권에서 소비에트찬가라는 곡으로 교체된다. 그 곡을 보면 Patina Lenina(Party of Lenin)이란 가사가 나오는데, 그것은 레닌의 당이란 의미다.

 

소설에서 레닌의 당, 스탈린의 당이란 가사는 없었다. 심지어 그 노래(Soviet Anthem)를 찾아 들어보면 영상편집에서 Patina Lenina 가사 부분이 나올 때 레닌과 스탈린이 나오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직까지 레닌과 스탈린에 대한 향수가 러시아에서 떨어지지 않은 것이다. 영상을 보면서 <아크엔젤>의 연결성은 소비에트연방 해체 후 러시아에선 기존 소비에트연방이 가진 정체성 그 시대의 향수에서 많은 인간들이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아크엔젤>에서 헥소 박사가 스탈린의 비밀노트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때 라파바와 수부린, 항구도시 아크엔젤의 사람들처럼 스탈린이란 유령에 아직 벗어날 수 없었다. 마만토프 같은 경우, 헥소 박사가 스탈린의 비밀노트를 찾아가는 것을 은근히 방해하면서 그것을 유도했고, 마지막 종착점에 다다를 때 헥소 박사는 자신이 이용당한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지난날 그들만의 영광과 이념을 찾아가기 위해서다. 인간이 현실을 벗어난 이념을 숭배하는 순간 그 사회는 병이 든다. <아크엔젤>은 자본주의 문화가 러시아를 강타하고, 자본주의국가와 대립한 소비에트연방의 후예들은 자신들의 현실에 고민하고 있다.


<아크엔젤>의 시기가 아직까지 늙은 노인들은 1917년 볼셰비키혁명을 기억한 자들도 있고, 1930년대 스탈린이 활발하게 활동할 때도 기억하고 있다. 스탈린에 대한 향수는 과거 자신들이 이룬 업적을 잊지 않은 것이다. 비밀노트의 주인은 스탈린이 아닌 스탈린의 저택에 들어온 젊은 여자다. 그 여자는 결국 죽었지만, 그의 어머니는 헥소 박사가 아크엔젤에 찾아가니 살아있었다. 여자의 어머니는 언제 죽을지 모를 정도로 늙었고, 혼자 외로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도 스탈린에 대한 향수와 광기는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스탈린에 의해 딸이 모스크바로 끌려가 심한 일을 당했는데, 자기 남편이 딸의 죽음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 떠나 죽었는데도 늙은 노파는 스탈린에 대해 집착한다. 스탈린은 집권을 위해서 볼셰비키 고참 당원을 모조리 숙청했고, 자신의 친구와 가족마저 잔인하게 죽도록 만들었다. 레닌이 죽고 난 후 레닌의 신격화 작업이 이루어지고, 그 후계자로 스탈린이 되는 과정은 피의 숙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왜 사람들은 스탈린이 음울하고 속이 시커먼 사람인데도 그에게 이끌릴까?


인간에겐 누구나 어둠이 있고, 그 어둠에 쌓이면 인간은 광기에 빠져버린다. 1924년 레닌사후 스탈린은 당의 인사권을 장악하고 자신의 주변 인물들을 당의 주요간부에 임명하다. 반스탈린주의자들은 모조리 파시스트로 몰아넣었고, 거기에 동조한 인물들은 출세의 가도를 달린다. 그들이 승승장구 올라가면서 스탈린과 맞먹을 정도로 권력을 가지게 되거나 또는 스탈린에 대해 잘 알게 되면 스탈린은 그들을 응징한다. 그렇다면 스탈린의 행동에 많은 사람들은 스탈린을 두려워하고 경계하여야 하지만, 반대로 두려워하나 그에게 더 이끌린다.


스탈린으로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 확립, 더 나아가 자신들이 스탈린으로 통해 성공할 수 있다는 욕망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모스크바 비밀감옥지하에서 총소리가 울릴 때마다 새로운 진급자들이 탄생한다. 이들이 총에 의해 죽어갈 때 국민들은 파시스트 첩자의 죽음,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응징이라 여긴다. 소비에트연방 해체해도 트로츠키는 아직까지 반역자의 이름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이미 각인된 러시아의 정체성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움직이기보단 그 과거에 매달리는 이유는 강력했던 지난날의 향수다.


그 시대가 정당한지 아니면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 때가 좋았고, 그때로 돌아가는 것이 목표다. 광기와 살인이 넘치는 시대에 대표적인 사이코패스를 많은 사람들이 얽매인 이유는 <아크엔젤> 소설내용이나 후기처럼 우린 비이성적이고 비정상적인 사고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힘으로 통치하는 시대에 대한 향수는 우리 스스로 억압과 폭력이란 쇠사슬로 엮이게 만든다. <아크엔젤>은 바로 그런 시대적 간극에서 벌어지는 사회상을 하나의 가설을 내세워 만든 소설이다.

 

스탈린이란 인간 그 자체는 사라져도, 스탈린의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고, 다시 계속 반복된다. 스탈린이란 인물이 죽었다 해도 그런 인간이 다시 나오지 마란 법은 없다. 하지만 더욱 소름끼치는 것은 그런 인간이 나와도 용납하는 세상이다. 역자가 말한 것처럼 우리 역시 그런 인간이 나와도 무방한 사회, 오히려 그런 인간들이 지배하는 것을 용인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음을 언급한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로 이어졌다. 소설은 가상의 세계를 구성한 이야기나, 그 이야기는 현실의 실현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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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소설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2월
평점 :
절판


가네시로 가즈키의 소설인 <Revolution No.3>를 읽으면 웃음과 흥미가 유발되는 작품이다. 좀비스라고 불리는 삼류 고등학교 불량아들이 보여주는 행동은 우리 사회의 일면의 모순을 불랙코미디적 요소를 보여준다. 진짜 옳고 그른 것은 단순히 겉이 아니라 그 안의 진실성이다. 그런 소설을 쓰는 가네시로가 반드시 유쾌한 글만 적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가슴이 시리고 아쉬움만 전해오는 글을 적는다. 우연히 아는 동생 녀석에게 소개받은 소설 <연애소설>, 내가 알던 가네시로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하지만 기본적인 그의 작품세계관의 맥락은 많이 연계되어 있었다.


가네시로의 작품이라 하여 재미를 기대한 사람이나, 그 기대와 다르게 흘러가는 것을 보고 그 흐름에 기대는 사람 모두 가네시로의 작품 근원은 변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소설 제목이 <연애소설>이니 이 책은 분명 연애에 대한 내용을 적고 있다. 나는 연애에 대해 생각하면 그다지 좋고 아름다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연애 운이 없는지 내 자신이 부족한지 모르나, 그저 씁쓸한 기분도 맛 봤을 뿐이다. 시작하기도 전에 허무하게 날라 가거나 시작하려고 할 때 뒤통수를 맞던지 또는 잘 될 것 같았는데도 불발탄으로 그친 적이 많다.


게다가 성격이나 가치관도 일반인과 많이 동 떨어져 있다. 예전에 어느 사람에게 내 자신을 두고 "Little Comedian"이라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Rialto 밴드에 정규앨범이 아니 싱글앨범이 실린 곡으로 차분한 모던 락으로 노래를 듣는 순간, 뭔가 어눌하고 답답한 기분이 전해온다. 아무런 성과 없이 그저 노력하지만, 끝에는 스스로 체념해야 하는 Little Comedian처럼 내 자신이 그렇다고 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정말 그런 일이 된 것 같기도 하다. 시도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나는 나만의 광대가 되었다.


연애, 그것은 사랑하는 행위를 말한다. 사랑에 대해 말하자면 무엇이라 이야기해야할까? 말은 하기 쉬워도 인간의 감정을 쉽게 무너뜨리고 때로는 하늘로 올라갈 것처럼 만든다. 가네시로의 <연애소설>에 나온 사랑이야기도 내가 느끼는 고독과 허무가 나온 것을 보았다. 주인공이 대학시절 옆에 동기이야기는 그야말로 끔찍한 고독과 허무다. 자신 주변에 있는 사람은 모두 죽고, 최후에 사랑하던 여자도 병으로 죽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사랑이란 감정을 준 여자를 만나 그는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다.


적어도 자신이 죽기 전까지 세상에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 이야기를 주인공 작가에게 말해주었다. <연애소설>이 일반적 연애소설과 다른 점은 죽음이란 세계를 항상 옆에 끼고 이야기한다. 첫 번째 “연애소설”에선 주인공은 언제나 주변사람의 죽음을 보았고, 두 번째인 “영원의 환”편의 주인공은 암을 선고받아 언제 죽을지 모른 사람이었다. 게다가 마지막 “꽃”에서 주인공은 뇌질환으로 언제 지금 당장 죽을지 모를 운명이고, 그 주인공과 같이 드라이브를 떠난 변호사 도리고에는 암을 선고받은 초로의 남자였다.


모두 죽음을 바라보고 죽음 앞에 있는 점에서 마지막으로 인간이 죽기 전에 무엇이 하고 싶은가? 라는 질문에서 과연 글쎄 무엇일까? 우리는 철학자가 아니라서 스피노자처럼 사과나무를 심으려 들판에 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우리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이다. 결국 그 최종은 사랑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과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인간은 1번 태어나면 죽는 것이 당연한 운명이다. 그 운명 안에서 어떻게 벗어나려 해도 답은 없다. 죽는 모습과 과정 그리고 시기는 달라도 죽고 나면 모든 인간은 평등해진다.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니깐.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내가 죽으면 누군가 나를 기억해주고, 나를 추모해주며, 그 사람들 마음에 내가 살아있다면, 육체는 죽어도 영혼은 영원할 것이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 사실 그 고통과 충격을 깊이 고민하는 것만으로 괴롭지만, 그보다 괴로운 것은 혼자 외롭게 고독과 허무 아래 사라지는 것이다. 마지막에 눈을 감는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연애소설>에선 바로 그런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랑이란 어떻게 보면 전혀 기대하지 않거나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서 찾아오거나 느낄 수가 있다.


<연애소설>에서 사랑의 시작은 정말 우연이고 뜻밖의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별의 슬픔과 죽음 역시 생각하기 어려운 선택지였다. 만약 이런 운명 앞에 우리가 그 길을 걸어야 한다면 우리는 우리 삶을 사랑해야 할 것이다. 사랑은 혼자서는 되는 게 아니라 같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우연으로 치부하면 안 될 것이다. 사랑이란 것을 어떻게 만들어가는 것 역시 중요하다. 나는 그 사람을 왜 사랑하는가? 그 질문에 해답을 내놓지 않으면 금방 사랑은 식어간다.


내가 사랑에 빠진 것만큼 중요한 게 나는 왜 사랑하고 있는가이다. 아마 그 표현은 “꽃”편에서 가장 잘 보여준 것 같다. 가네시로 작가의 특유의 재미가 잘 나오지 않은 소설이라 해도 그의 인생가치관이 “꽃”편에 잘 나와 있다. 게이코는 남편과 28년 넘게 떨어져 살아왔지만, 남편이 살인범(그는 1970년대 일본에 살고 있는 사회적 약자 - 아마도 징용된 - 조선인의 후예였다)의 변호를 맡은 과정을 계속 찾아 정리하였다. 가난하고 소탈한 남편이나, 남편집안의 이야기인 '도리고에 가의 전설‘은 몇 번이나 들려 달라 했고, 그 전설을 만들어 내었다. 남편의 할아버지는 관동대지진 때 억울하게 핍박받은 조선인과 중국인 친구를 변호하다가 얻어맞아 죽었다.


이에 반해 아내 게이코의 집안은 한국전쟁과 일본 대공업시기에 거부가 된 사람이다. 어울리지 않은 두 사람, 하지만 게이코가 남편 도리고에를 진정 사랑한 이유는 그만이 약한 자를 비웃지 않고 진정으로 위해 뛰었기 때문이다. 바로 신념이 있었고, 그것을 위해 살았던 것이다. 만남은 계단에서 떨어진 게이코를 보고 다정하게 감싸준 것처럼 게이코가 바라본 도리에고의 모습은 바로 다정함이다. 그 다정함은 게이코만이 아니라 ‘도리고에 가의 전설’처럼 새롭게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내 자신의 이기심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거나(“연애소설”편), 아니라면 그 사람을 위해 누군가를 죽일 각오가 있는지(“영원의 환”편) 아니라면 죽음만이 유일한 화해(“꽃”편) 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을까? “꽃”편에 게이코는 남편과 죽은 아들의 묘비에 남긴 꽃은 물망초다. 물망초의 말뜻은 나를 기억해주세요! 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기억해주고 내가 그 사람을 기억해주어 서로 마음이 아픈 일이 많더라도, 그것조차 넘을 수 있다면 멋진 사랑이 아닐까 싶다. 물론 나는 그런 기억이 없는 게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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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 유시민의 30년 베스트셀러 영업기밀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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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을 읽으면서 유시민이란 사람을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생각해보았다. 내가 처음 그를 알게 된 것은 참여정부시절 장관을 한 것에서 알았다. 그것도 제법 참여정부가 들어선지 몇 년 지난 상태였다. 그리고 그를 제대로 알게 된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었다. 정치적으로 아무 지식이 없던 나에게 그의 죽음은 큰 변화를 일으켰다. 지식을 얻기 위한 독서와 지혜를 찾아가는 독서의 시작은 그 변화와 더불어 내 자신도 글에 대한 도전하면서부터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서전 중에 <여보 나 좀 도와줘>가 있고, 그 후 그의 죽음 이후 또 다른 자서전 <운명이다>가 발간되었다.


<여보 나 좀 도와줘>는 노무현 본인이 직접 작성한 책이고, <운명이다>는 노무현 죽음 이후 그의 자필기록과 주변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만들어진 자서전이다. <운명이다>의 저자는 노무현이겠지만, 엮은이는 유시민이란 작가였다. 글을 읽으면서 노무현이란 인물을 찾아가지만, 한편으로 유시민의 마음 역시 알아갈 수 있었다. 어렵지 않은 문체와 매우 정적인 감정을 실은 <운명이다>는 나중에 가서 어느 청년의 죽음에 큰 파장을 주었다. 글이란 것이 정보와 지식만이 아니라 인간에게 큰 감동 또는 슬픔을 줄 수 있다는 그때 나는 절실하게 느꼈다.


그래서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을 잡고 읽는 순간, 나에게 글이란 것은 무엇인가? 라고 다시 반문해본다면 과연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유시민의 경우 인생에서 투쟁과 생존을 위한 몸부림에서 시작했다면, 나는 내가 느끼는 갈증과 불안 그리고 마음 속 깊이 잠들어 있는 불만이 기반이라 할 것이다. 내가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나만의 세계이나,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내 감정만으로 해결되지 않았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 왜 그런지를 알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나만의 세계에 탐구해야 했다.


탐구에서 무턱대고 고민하고 상상해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내가 찾을 수 있는 것은 더 답답함이다. 물론 지금도 책을 읽고 글을 써도 뭔가 풀리지 않은 현실에서 답답한 마음이 오겠지만, 적어도 그 감정을 어느 정도 정리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발전인 것 같다. 나에게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것은 내가 바라보는 세상을 나만의 방식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세상을 보는 것에서 나만의 입장과 생각으론 타인과 대화가 성립될 수 없다. 때로는 남들과 동등한 지식이 필요하고, 논쟁을 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지식과 판단력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나에게 글쓰기란 결국 세상에 대한 나의 투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 투쟁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 그 대상만 집중하는 게 아니다. 그 대상에 대하여 전후적인 관계를 따져 이것이 어떤 경위로 이렇게 되었는지, 그 후에 어떻게 될 것인지를 생각하는 점이다. 내가 보는 대상이 책, 영화. 만화 또는 세상의 어떤 일이어도 그것들은 자발적으로 생기지 않는다. 관계적인 요소에 의해 만들어지고 다시 만들어갈 뿐이다.


글이란 그 관계적 요소를 들여다보고 하나의 구조로서 재조립할 수 있는 방법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글을 잘 적어도 그 의미와 내용이 상대방에게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좋은 글이 되지 못한다. 내가 주장하고 의미하는 바를 상대방에게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으면 그것은 의미 없는 소모에 불과할지 모른다. 모든 글은 그렇지 않겠지만, 적어도 대다수 사람들에게 전달하고픈 글이라면 그럴 것이다. 왜 유시민은 <운명이다>를 저술할 때 사람들이 읽히기 좋은 글을 적었을까? 상대방에게 노무현이란 인물이 살아온 삶과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글을 적을 때 그 주제에 대한 전후관계를 잘 전달하기 위해선 글을 잘 적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조금 아쉬운 점은 글을 쓰는 주제란 반드시 대중들만이 아니라 어느 특정 대상을 지정하는 내용이 많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란 사람은 사회생활을 조금이라도 하거나 또는 뉴스나 미디어를 조금이라도 접촉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이에 반해 우리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근하기 힘든 분야가 많다. 예술, 문학, 철학, 과학 등등 수많은 학문과 문화적인 대상들은 우리가 있는 것조차도 모른다. 그런 글쓰기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제일 중요한 것은 정보의 전달하게 해주는 글 쓰는 방법과 상대방에게 그 내용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전후관계가 가장 중요할 것이다. 이런 글쓰기를 도달하기 위해서는 많은 독서와 스스로 글을 적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은 돈이 많고 적음에 자신의 삶마저 흔들리는 운명에 놓여있지만, 적어도 글 쓰는 세계에 모두가 자유로이 경험할 수 있는 기회는 있다. 도서관은 모두에게 열려있고, 14일 안에 어떤 책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는 자유로운 사고와 토론이 이루어지는 사회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수용하기를 바라고 있다.


누군가 윗사람에게 이의와 의문을 제기하면 그 사람은 나쁜 쪽으로 찍히는 경우가 많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는 합리적인 선택을 하기 위해서다. 입지가 더 높은 사람에게 모든 발언만 넘겨준다면 그 사회는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기란 어렵다. 그래서일까? 한국 사람들이 글 쓰는 것이란 상대방과 교류보단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한 방법이 높은 것 같다. 물론 그런 방식은 나도 과거에 많이 이용한 적이 있었다. 어떤 글을 쓰기 위해서는 더 높은 수준의 지식이 요구된다. 적어도 그 글이 논문이나 비평 수준이 아닌 이상 너무 어렵게 들어갈 이유는 없다.


물론 토론과 글 쓰는 대상이 제법 난해하고 어려운 주제라면 그 난이도에 맞추어 적을 필요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전문영역이란 일반 대중에게 특별한 만남이 없을 것이다. 설사 관심이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 사회의 다양성과 문화적 가치를 올리기 위해선 글을 나만이 아닌 타인의 시선을 고려하는 것은 바르다. 어려운 단어보단 쉬운 단어로, 이국적이고 어색한 수식어보단 잘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이 바람직하다. 대신 사투리 같은 경우 우리의 정통언어이니 글에서 제외될 수 없을 것이다. 지나친 민족의식보단 어느 글 소재가 그 사투리 사용이 적당하면 쓰는 것이 좋은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약간 조심스러운 것은 표준어는 모두에게 통용되나 사투리나 고유어는 그러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두 이해해야 한다는 이유로 사투리와 고유어가 사라지는 현실이 다소 아쉽다. 글의 주제가 그런 영역에서 많이 나오면 다행이나, 그럴 기회는 많지 않다.


지금 리뷰를 적으면서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에서 제시된 예시처럼 적기가 쉽지 않다. 글을 쉽게 적는 것 자체가 정말 어려운 방법인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단어 선택은 쉽게, 문장의 길이를 길지 않게 하는 것이다. 글이란 그 사람의 성향과 기질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처음부터 당장 고쳐지는 것은 어렵겠지만, 글 역시 사람이 스스로 수련하면 그 성과는 분명히 본인에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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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5-04-07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꼼꼼히 읽어 볼께요.^^

만화애니비평 2015-04-07 22:59   좋아요 0 | URL
아이고 감사해요

뒷북소녀 2015-04-08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쵸? 저도 그랬어요. 이 모든 걸 염두에 두고 리뷰를 쓰자니, 더 안 써지더라구요.^^

만화애니비평 2015-04-09 08:25   좋아요 0 | URL
뭔가 말하고 싶고, 뭔가 생가할 것은 많은데 쉽게 적을 수 없었던 리뷰였습니다.

yureka01 2015-04-08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이 책은 뭔가 유시민의 까기가 은근히 녹아 들었습니다.
아마 맺힌 게 많았을 겁니다.
결국 글 쓰기 위해서는 책 많이 읽어라 더군요. 문제는 책을 읽으라 이말의 반대는 왜 책을 않읽어서 이지경이냐..라는 뜻이 언듯 스치더군요...
순전히 추측이긴 했습니다만 그런 뜻도 일부나마 담겻지 않을까 싶었습니다.이건 작가에게 물어 봐야 겟지만 아마 귓속말로 유시민이 고개 꺼덕 할 것만 같은...
언제 만나게 된다면 꼭 여 쭤 보고 싶어요.ㅎㅎㅎ

만화애니비평 2015-04-09 08:26   좋아요 0 | URL
제가 제일 기억나는 것은 역시 Context 전후맥락이란 점이죠.
글쓰기에 쉽게 적고 표현방법을 잘 고려한 이유는 바로 전후맥락인데
전후맥락을 제대로 찾기 위해서는 결국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이해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점이죠.
이해되지 않으면 그냥 그대로 대충 의미를 가지고 쓸 수밖에 없으니깐요.

뒷북소녀 2015-05-11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만화애니비평 2015-05-11 18:0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당

스닐 2015-05-25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해되기 쉽게, 읽기쉽게 참고하겠습니다. 감사!!

만화애니비평 2015-05-25 13:07   좋아요 0 | URL
덧글 감사합니다
 
무진기행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9
김승옥 지음 / 민음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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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일본 근대문학작가인 나츠메 소세키, 아쿠타카와 류노스케, 다자이 오사무가 생각난다. 왜냐하면 기존 사회관이 붕괴하여 새로운 체계가 도래해도 인간들은 거기에 적응하기보단 오히려 낯선 이방인처럼 표류하기 때문이다. 김승옥의 <무진기행> 역시 불안한 사회인들의 심리가 반영되어 있어서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흔들리는 인간들을 볼 수 있다. 아마도 나쓰메 소세키처럼 메이지 시대로 넘어간다고 해도 아직까지 도쿠가와 막부의 잔재가 남아있었고, 아쿠타카와 류노스케처럼 변화한 세상이 와도 그 불안함을 견딜 수가 없었고, 다자이 오사무처럼 그 불안한 심리를 가지고 끊임없이 표류하는 인간상을 그린다.


 

<무진기행>은 김승옥 작품 중에 <무진기행> 외에도 단편 내지 중편소설이 같이 실려 있으며, 대표적인 작품이 <무진기행>으로 되어 있을 뿐이다. 작품을 읽어보면 불안한 인간, 성적인 망상과 환상, 비겁한 인간과 전쟁의 비극까지 담고 있다. 아마 작품은 작가 본인이 느끼는 시대상과 주변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읽은 내내 여성들이 보기가 지나친 내용이 있었다. 아마 1960년대의 한국은 이제 막 공업이 활성화되고, 자본주의 경제사회가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 안에서 인간들은 격리된 인간들, 기존 세계와의 단절이 중요한 세계관을 이룬다. 한국전쟁으로 함경도에서 내려온 피난민, 남쪽에 살지만 전쟁으로 대피하던 사람들 이 모든 사람들이 이제 자기가 찾아갈 장소를 찾아가려 하나, 막상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이 공허한 밤하늘만 보일 뿐이다. 전쟁으로 인해 인간이 가져야할 절대적 도덕관과 윤리의식은 이미 붕괴되기 시작했고, 단지 그 세류에 휘말려 외로운 인간의 고독과 어둠을 그려내고 있다. 타이틀인 <무진기행>처럼 무진으로 내려간 주인공은 서울이란 속물의 공간에서 벗어나려 했고, 거기서 만난 음악선생과 낭만적인 애정도피를 꿈을 꾸기도 하나, 결국 아내의 전보에 의해 서울로 돌아가야 했다.


 

게다가 그는 한국전쟁에서 주변 남자들은 전쟁에 참가하여 사망하는 것을 듣지만, 혼자 집안 다락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한다. 비참하게 살아남은 것에 대한 후회, 재혼한 아내와 그 아내의 아버지가 가진 권력은 주인공으로 하여금 속물과 이상의 가운데 흔들린다. 속물적인 예전 친구를 보며 그런 모습에 염증을 느끼지만, 결국 그도 속물적 사회에 길들여져 버린 약자였다. 하지만 우리가 본다면 그를 욕할지도 모르나, 사실 그는 우리들의 모습이었던 사람이다. 기존 사회가 붕괴되면서 인간의 가치는 자본이란 틀로 가게 되었다.


 

인간 사이에 진실한 감정과 가치는 없었고, 옆에 술친구는 되어줄 망정 그들의 지속적인 친구는 될 수 없었다. 늘 손에는 담배 하나와 소주 한잔만이 아지랑이처럼 그들의 눈에서 흔들거린다. 도무지 만족할 수 없는 현실, 사랑조차 믿을 수가 없었다. 여자들의 성적 자유는 과거에 비해 숨을 쉴 수 있었으나, 오히려 그것은 자본주의에 의한 도구로 더 쉽게 전략해 버렸다. 거기에 진실한 사랑이란 없고, 단지 서로 즐기기 위해 아니라면 돈을 위해 출세를 위해로 변한다. 차라리 <야행>에서 낯선 남자 손에 의해 억지로 여관에 끌려간 여주인공이 자신의 욕구와 본능에 충실한 것 같다.


 

비틀러진 여성들의 성적 욕구, 그리고 남자들의 허무한 성욕, 어찌 보면 젊은 남녀들에게 삶에 대한 의지와 목적이 탈락한 것처럼 보였다. 왜 여자가 비뚤어진 성욕을 가졌는가? 그녀의 애인은 그녀와 2년 가까이 사귀지만, 정식으로 부부가 아니라 그 연애 관계조차 사내에서 숨긴다. 회사에서 연애하면 여자가 회사를 그만두어야 한다는 그 시절에 여자의 욕구불만이 터진다. 단지 그 불만은 성적인 요소가 아니라 일탈로 통한 기존 사회가치에 대한 반항이다. 솔직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 그녀가 길가를 걷다보면 낯선 남자가 커피 한 잔 하자 하나, 그녀의 반응이 없으면 모두 떠나 버린다. 차라리 욕망에 충실한 그 남자, 그 남자는 그녀의 손을 잡고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여관에 가는 것처럼 자신의 마음을 드러낼 수 없는 사회에 모두가 숨이 막혀간다.


 

모두가 서울이 희망과 기회의 도시라고 하나, 그 공간은 낯설 자들이 모여 서로 낯설게 만드는 공간이고, 일정하지 못한 공간이라도 일상한 곳에서 일정한 틀을 강요한다. 그래서 남자들이 자신의 남근을 끊임없이 여자에게 들이대는 이유는 자신이 가진 불안한 심리, 억압된 현 사회를 지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고독과 허무라는 깊은 슬픔일 것이다. 낯선 공간에서 그나마 사람냄새를 맡는 것은 포장마차에서 술을 홀로 마시다가 옆에 남자에게 형씨라고 부르거나 또는 Beer Bar에 가서 5명의 미자를 찾아 근처 여관에서 살을 섞는다. 대부분의 남자는 혼자 살거나 모든 이들과 단절되어 있다.


 

전쟁 이후 가족의 단절, 혹은 자본주의 가속화로 시골을 떠나 도시로 온 남자들은 일에는 적응하나, 일 이외에는 적응하지 못한 것이다. 사람들에게 자신보다 강한 것은 <역사>처럼 높은 담을 뛰어넘어 무거운 돌을 가볍게 던지는 장사가 아니라 <염소는 힘이 세다>에서 나오는 주변 아저씨들일 것이다. 그 속에서 젊은 남자들은 진짜 아버지가 아니라 이 사회라는 아버지에 의해 억압을 당하고 그들만의 세계에 젊은 남자들은 따라야 하는 것이다. <염소는 힘이 세다>에서 주인공 꼬마는 자기 누나에게 무참히 자기 가게에 찾아오는 아저씨에게 강간당한 것을 보고도 아무 것도 하지 못했고, 더 나아가 누나는 그 남자의 제의(버스운행 보조직)에 수락하고 자장면까지 먹은 것을 보고, 이 사회의 권력은 성인남성보단 자본의 힘이란 점이다.


 

혹은 어느 절대적인 힘을 가진 대다수의 무리들이 시키는 것이 정당한 것으로 보고 자란다. <건(乾)>에서 주인공은 동네에 예쁜 여고생누나와 사이좋게 지내지만, 그 누나를 본 꼬마의 형과 친구들은 동생을 이용하여 그 여고생을 집단강간하려 한다. 어둡고 무지한 사람들이 결국 욕심 많고 이기적인 대다수 사람에 의해 무참하게 밟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 젊은 자들은 자기보다 어른에 의해 억압당하고, 억압으로 망가진 가슴을 그렇게 여자들에게 이어간다. 물론 여자들도 자기 나름대로 삶의 규칙을 가지고 있다.


 

연예인이 몸을 팔아 자신의 몸값을 올리거나, 반 순진한 남자는 그런 여자와의 결혼 후 고급술집에서 아내를 만나, 이혼을 하면서 누가 더 나쁜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서울은 욕망과 폭력 그리고 슬픔과 고독으로 1960년대를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 후의 한국은 불안한 심리와 군사정권의 검열로 인해 삶은 단절 속에서 이루어졌다. 모두가 스스로 길들여가야 하나 그 이면에 쌓인 무의식적인 탈출욕구는 일그러진 모습으로 보여준다. 죽을 줄 뻔히 알면서 죽게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고, 여관방에 가짜 이름과 직장을 올리는 우리 근대의 모습은 사람이 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람의 이름과 형태만 빌린 괴물과 괴물의 먹이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모습은 그때로만 끝난 것들이 아니다. 지금도 우리사회는 늘 어지러운 일들로 가득하고, 곤란한 사회관이 정립되어 있다. 오직 타락하고 몰락하는 것만은 자유롭게 되어있지만 인간이 본연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은 없다. 자신을 드러내지 못한 채 어두운 공간에 일탈을 꿈꾸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을지도 모른다. 이 책을 보는 나도 내 마음 어디에 숨겨진 깊은 어둠과 고독, 절망, 허무가 있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우리의 원래 출발하고 싶은 마음에 <무진기행>처럼 무진으로 갈지도 모르나, 거긴 아무 것도 없고, 설사 찾으려 해도 다시 현실의 무기력함에 되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인생 그 자체가 하나의 <무진기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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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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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를 한자 사자성어로 말하자면 인생이란 바로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허삼관이 살아온 인생이란 연속적인 희망과 좌절, 아픔과 기쁨, 산으로 올라가다 바다 아래까지 들어가는 다양한 굴곡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허삼관 매혈기>를 단순히 허삼관이란 가상의 인물에 대해 적은 글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말한 것처럼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란 말처럼, 이 소설은 시(소설)처럼 당시 평범한 한 남자의 이야기요, 그것은 더 나아가 우리 같은 보통 남자의 이야기다.


물론 허삼관만 주인공이라 하여 허삼관만 중요인물만 아니다. 그의 아내 허옥란, 세 명의 아들, 허소용, 임분방, 혈두, 같이 피를 팔아 돈을 받은 사람들 모두 우리의 모습이고 이웃이다. 허삼관은 그렇게 위대한 역사적인 인물이 아니지만, 누구보다 위대한 아버지와 남편이었다. 그의 행동을 보자면 소심하고, 때로는 잘 삐치고, 어찌 보면 너무 바보 같은 남자였다. 때로는 과감하기도 하고, 넓은 마음으로 포용하기도 하고, 상상 이상으로 현명하기도 했다. 모든 인간이 언제나 같은 모습과 같은 얼굴을 하는 게 아니다.


그 상황에 따라 인격과 감정이 실시간으로 변한다. 그렇지만 적어도 모든 것이 변해도 그가 인간적인 사실만은 변하지 않았다. 너무 인간적이라 감정에 말려 들어가는 그는 때로는 충동적이기도 했다. <허삼관 매혈기(許三觀 賣血記)>는 제목을 보면 성이 許씨로 허락하거나 들어주는 것이고, 삼관은 3가지를 보는 것이다. 그의 이름처럼 그가 3가지를 보는 것은 바로 3아들이 아닐까 싶다. 그의 이름은 남편과 아버지로 살아가고, 일락이와 이락이 그리고 삼락이라는 즐거움을 주는 3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살아온 인생은 결국 피를 팔아 가족을 만들고(결혼), 가족을 지키며(대기근), 가족을 살렸다(일락이의 간염).


한 남자가 자신의 피를 팔아 가족 안에서 보인 행동은 인생굴곡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피를 팔아보면서 단 1번도 자신을 위해 돈을 쓰지 않았다. 단지 허옥란과의 결혼은 자신을 위한 것이겠지만, 가족의 탄생은 어느 한 개인의 영역이 아니라 가족과 가족이 새로운 가족을 탄생시키는 것과 같다. 허삼관의 아버지는 잘생긴 남자고, 어머니는 상당한 미녀이나, 아버지 죽은 이후에 어느 대령과 눈이 맞아 야반도주한다. 가족이 없던 허삼관에게 가족을 만드는 것이란 자신이 유일하게 머물 수 있는 장소를 만드는 것이다.


어린 시절 혼자 외로이 걷다가 작은 아버지의 구조 아래 겨우 청년이 된 허삼관은 작은 아버지 넓은 등에 업혀온 기억을 절대 잊지 않는다. 일락이가 비록 자신의 친자식이 아니지만, 일락이의 모습과 행동에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공허감과 일락이에 대한 사랑은 어린 시절 자신의 작은 아버지가 한 것처럼 일락이에게도 보여준다. 낳아주신 아버지 이상으로 길러주는 아버지로 살아가는 것이다. 허삼관은 그래서 그 어디서나 보일 수 있는 아버지, 보통 사람이 가족이란 공동체로 어떤 삶을 사는지 보여준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배고픔으로부터 가족을 지키기 위해 피를 팔고, 자신의 생일에 아이들에게 고기를 아내에게 붕어찜을 해주는 그의 모습은 참 애처롭다. 자신의 아내가 창녀라고 모함당해 인민재판을 당할 때, 그 장소가 집으로 옮겨지자, 아들들은 어머니 허옥란 대신 인간 허옥란에 대한 비판을 한다. 그때 어머니의 과거 부정을 모두 지적하자, 허삼관은 자신이 예전에 임분방이란 여자와 정을 통한 것을 아들들에게 고백하여 아내의 허물을 자신의 허물로 덮어준다. 물론 사리로 따지자면 아내의 부정은 아내가 원한 게 아니라 허소용에게 억지로 강간당한 것이다. 그렇게 태어난 게 일락이었다.


일락의 정체성을 알게 되면서 화가 난 허삼관은 젊은 시절 허옥란과 임분방 사이에 고민한 것을 기억하고, 임분방과 홧김에 정을 통한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직접 아이들에게 하고, 아내를 자식들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준 모습에서 그의 가족사랑은 처음에 거부와 배타로 시작하나 마지막엔 포용으로 이어진다. 너무 감정적으로 화를 내는 그였지만, 때로는 인간의 감정 아래 연민의 손길을 가족에게 건네준다.


그런다고 하여 <허삼관 매혈기>는 단순히 허삼관란 남자의 이야기 그리고 그 가족과 주변만 적는 게 아니다. 문화대혁명 시기와 모택동의 정치적 행위가 시골에 미치는 모습에서 당시 시대적 모순도 보여준다. 집안에 있는 모든 살림기구와 식량을 정부에서 강제로 징발하여 어느 일정한 장소에서 배급하는 점이나, 대기근시절 정부에서 아무런 조치 없이 주민들에게 알아서 해결하라는 점, 일락과 이락이 정부운영에 따라 일손으로 차출될 때 정부 관료의 부패한 모습은 허삼관의 피를 팔게 만들었다.


허삼관이 피를 판 것은 분명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지만, 때로는 피를 국민들에게 훔쳐내는 부조리한 세계도 한 몫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허삼관의 피는 가족의 존속, 국가의 약탈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생명이었다. 그러나 치아가 빠지고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린 허삼관의 피는 더 이상 팔아넘기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피를 팔지 못한 것에 대해 더 이상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눈물을 흘린다. 허삼관의 모습을 본 동네사람들은 그의 아내와 아들들에게 이 소식을 알려주자, 허삼관에게 찾아간 가족들은 그를 달랜 후 허옥란은 허삼관을 데리고 남편이 피를 판 후에 자주 가던 승리반점에 같이 간다. 그리고 허옥란은 남편이 좋아하는 돼지간볶음과 황주를 시켜주자, 허삼관은 이때까지 이렇게 맛있는 돼지간볶음은 처음이라 한다.


이때까지 여기서 먹은 것은 자신이 아닌 가족을 위해 먹었던 돼지간볶음이 이제는 자신을 위해 먹는 돼지간볶음이다. 힘들고 고된 시간을 보내고, 가족을 지키고, 아들들은 모두 가정을 꾸려 행복하게 잘 살아간다. 그런 허삼관에게 자신의 삶은 행복했는지 아닌지는 직접 말하지 않으나, 적어도 마지막 그가 한 말을 다르게 생각하면 그것이 인생이 아니겠는가? 라고 말해주고 있다. 우리 인생도 허삼관처럼 굴곡으로 이루어져 있고, 남에게 말해주는 방식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우리 역시 근엄한 얼굴로 언젠가 그게 인생이 아니겠냐고 떳떳하게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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