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 더클래식 세계문학 컬렉션 (한글판) 42
앙드레 지드 지음, 조정훈 옮김 / 더클래식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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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나 혹은 예술 관련 전공자가 아닌 나로서 문학서적을 읽는다는 것은 조금 다른 도전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살아가는 일상에서 볼 수 있는 현대소설과 달리 고전 소설들은 그 시대적 특성과 작품세계가 다소 어렵다는 점이다. 우리 시대상과 전혀 다른 그 시대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가치관이나 생활의식이 너무나 다르다. 그 시대만의 흐름 속에 살아가는 작가가 자신의 시대상과 자신의 인생관 그리고 자신의 인생관을 펼치지 못한 그 작가만의 현실을 새롭게 바라보는 내용이 문학소설에 담겨있다. 이야기의 결과론적으로 그 시대의 흐름에 부합되거나 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 작가의 의도는 그 시대에 부합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번에 읽은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에서 작가는 19세기와 20세기를 스쳐가는 흐름에서 이 소설을 발표했다. 소설 발표 시기는 1909년 아직 세계 제1차 대전이 발발하기 이전이다. 소설의 내용을 본다면 프랑스와 유럽에서 인상파 화가가 떠오른다. 비토리오 마테오 코르코스라는 화가는 이탈리아 초상화가로 그가 그린 작품에 많은 젊은 여성이 등장한다.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에서 제롬이 사랑했던 알리사에게 아름다운 어머니 뤼실 뷔콜랭이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경건하고 엄숙한 청교도 집안의 여자가 아니라 자유롭고 분방함을 추구했던 여성이었다.

 

제롬의 시각에서 바라본 외숙모 뤼실은 마치 비토리오 마테오 코르코스의 그림에서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등장하는 여자와 같았다. 왜냐하면 이와 대비한 모습으로 제롬의 아버지가 젊은 나이게 죽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죽음은 어머니로 하여금 상복을 입도록 했으며, 엄숙한 집안의 분위기에서 추가되어진 상복은 인간의 생기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딱딱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마치 죽음의 정적과 삶의 동력이 반대되어 움직이는 것처럼 <좁은 문>에서 보이는 경건함이란 마치 위대하고 성스러움을 추구하기보단 인간에게 무단한 슬픔만을 강조하는 굴레와 같았다.

 

작품을 번역한 번역자의 후기에도 그렇지만, <좁은 문>은 인간에게 죄의식이란 과연 어디까지 통용되어야 하는지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알리사는 어머니가 다른 젊은 남자와 눈이 맞아 가족을 버린 점, 나중에 자신이 소파에 누워 잠시 쉬고 있을 때, 아버지가 알리사에게 어머니 뤼실과 닮았다는 말을 듣게 된다. 소설 초반에서도 알리사와 뤼실은 처음에 몰랐지만, 동공의 색만 다르지 외모는 상당히 닮았다고 말한다. 어머니를 닮은 큰 딸, 그 딸은 어머니의 부정적인 모습으로 인해 평생을 죄의식을 갖고 산다.

 

자신의 죄가 아닌 어머니의 죄를 가족 사이에서 평생 지고 산 것이다. 그녀의 죄의식은 옳은 것인가? 아닌 것인가? 청교도적 윤리관을 어떻게 제시하고 무엇을 추구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종교관에 대해 무교(無敎)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그런다고 신은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니나, 신은 그저 우리를 방관한다고 여긴다. 만약 신이 정말 있어서 우리에게 기적을 보여준다면 세상의 모든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인과응보를 베풀어 주실 게 당연한 것이 아닌가? 세상은 합리적인 이성보단 비합리적이고 오만한 힘에 의해 돌아간다. 의미를 찾아가는 신앙생활은 삶을 윤택하게 하겠지만, 의미를 찾지 않고 맹목적인 신앙생활은 폭력과 오만을 합리적으로 만든다.

 

<좁은 문>에서 후자에 속하는 부류가 아마 알리사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인생, 그녀의 행복, 그녀의 주변 이 모두가 뤼실에 의한 비극이다. 비극의 운명은 자신만 파멸로 이끌지 않는다. 비극의 운명을 가진 주인공들은 주변을 말려들게 만든다. 비극이란 당사자만을 선택하지 않는다. 당사자 주변 모두를 운명을 비틀게 만든다. 알리사의 현세적 행복과 신앙적 의지는 자신의 사촌 제롬에 대한 비극적 사랑을 잉태한다. 알리사 역시 제롬이 좋으나, 자기 자신에게 부여한 죄의식이 그를 떠밀게 만들었다.

 

쥘리에트라는 여동생이 제롬을 사랑한 것을 알기에 여동생에게 그 사랑을 양보했으나, 제롬이 받아들일 리가 없다. 제롬의 친구 아벨은 쥘리에트를 좋아했으나 그것 역시 뜻대로 되지 않았다. 조금 읽다가 생각한 점은 <좁은 문>에서 처음 뤼실의 모습은 인상파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었지만, 책을 읽으면 낭만주의를 볼 수 있다. 중간에 12세기 수도원의 수도사와 수녀의 비극적 사랑을 다룬,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를 이 소설에서 차용했다. 그런데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시대에 계몽주의자이면서도 반(反)계몽주의자로 등장한 장 자크 루소의 <신 엘로이즈>란 소설이 있다.

 

<신 엘로이즈>에서 주인공은 남자는 생 프뢰, 여자는 쥘리였다. 쥘리에트와 쥘리, 아벨라르와 아벨, 소설에서 보면 연극 중에 <신 아벨라르>라는 작품이 있다. 이름의 차용과 등장하는 소설 이름은 루소의 것이 나온 것은 아니나, 루소가 기획한 의도한 게 제법 등장한다. 루소의 소설에서 특이한 점은 모든 이야기의 진행을 편지로 한다는 점이다. 물론 <좁은 문>에서는 편지로 대화하는 것만은 아니다, 제법 편지로 대화하는 편이 많이 나온다. 특히 알리사의 편지는 작품에서 수많은 페이지를 할애할 정도로 의미가 깊다.

 

작품에서도 독일작가 괴테의 작품을 인용한 점에서 낭만주의와 인상주의적 요소를 작품에 반영하여, 종교적 가치관을 두고 고민을 한다. 사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본다면 로테에 대한 베르테르의 슬픈 사랑은 현실적 도덕관에서 용납되지 않았던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루소의 <신 엘로이즈>나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현실적인 조건에 의해 좌절된 사랑이다. 남성은 여성보다 약간 위치가 아래에 있었고, 그 여성은 주인공 남성을 사랑하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다른 남성과 결혼한다. 결혼 후에도 남성은 그 여성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기 위해 멀리가거나 아니면 고뇌에 빠진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부에 어느 누구 하나의 죽음으로 비극적 사랑은 막이 내린다. <좁은 문>은 루소와 괴테의 소설과는 달리 현실적 벽이 아니라 그 현실에 살아가는 인간 내면에서 벽을 만든다. 알리사가 만들어내는 벽은 자기 자신조차 아이러니함을 느낀다. 보고 싶은 제롬이나, 막상 만나도 어떻게 받아 들이야 할지 난감해하는 알리사만이 나온다. 이야기의 결론부에도 역시 비극적 사랑으로 끝이 난다. 알리사가 병으로 죽는다. <신 엘로이즈>에서 쥘리 역시 병으로 죽는다. 병으로 죽은 히로인을 두고 남자주인공은 사랑하는 여자를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해 독신의 길로 걸어간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정답인가? 라고 물어본다면 어디가 옳다고 말하기란 어렵다. 단지 그 시대적인 상황에서 어느 길만이 정답이라 말하는 것은 해답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간은 지난 과거의 축척에 의해 존재되는 생명이며, 과거의 축척은 기억에 의해 남는다. 지난 과거를 부정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나, 그 과거에 얽매이는 것은 앞으로 살아갈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알리사가 보여준 삶과 알리사 죽음 이후 보여준 제롬의 삶은 책 제목처럼 <좁은 문>이란 선택을 한다. 남들이 선택하지 않은 그 길을 걸어간다. 하지만 그 <좁은 문>은 진실적인 삶을 찾기보단 그저 자신을 속박하는 삶을 억지로 붙들어대는 망령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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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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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나는 업무적으로 해결할 일이 있어서 회사 우리 부서장을 모시고, 타 지방으로 외근을 나갔다. 외근을 나간 이유는 용역기술자들을 모아 회의를 하는 자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사는 지역이 지방이고, 다른 회사에서 온 분들은 수도권 쪽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 1분은 다른 장소에서 회의마치고 잠시 본 적이 있었다. 다른 기술이사와 더불어 내려올 때 내가 기차역까지 배웅해드린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회의를 마친 후 마침 저녁을 먹어야 할 시간이었다. 고속버스터미널 인근에서 식당을 찾다가 우연히 식육식당이 있어서 간단히 전골세트를 시키면서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옆에 계신 우리 회사 부서장과 상대회사 기술이사와 대화를 나눈 것을 들으면서 조금 놀라운 부분을 발견했다.

 

2사람은 원래 어느 정도 안면이 있었다는 점이다. 상대회사는 아마 서울권 출신 공대생이고, 우리 부서장은 내가 사는 지역의 공립대학교 출신이다. 공부로서 엘리트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 공부를 했었다. 그런 2사람은 같은 회사에 들어갔다. 단지 1사람은 서울 쪽에 다른 1사람은 지방에 있었다. 회사의 지점이 서울은 분점이고, 지방 쪽이 오히려 본사였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2사람이 예전에 기사, 대리 시절에 잘 나가던 회사가 갑자기 부도가 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정도 된 것 같다. 서울 쪽은 부도가 나서 월급을 제대로 못 받고, 지방 쪽은 그나마 남은 용역과 과업을 정리하여 월급을 거의 다 받고, 직원이 나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서울은 회사가 부도나도 어떻게 된지도 모르고, 자신의 월급에서 어느 정도 받은 것도 모른 채 그저 회사에서 나왔고, 다른 회사에 갔다. 서로 먼 곳에서 과거 저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안 노련한 기술자들이 다시 다른 장소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이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이번에 읽은 소설 장강명 씨의 <한국이 싫어서>란 책을 읽을 때가 딱 이런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장편소설이라 하여 제법 읽는데 시간이 걸린 줄 알았지만, 막상 읽으니 1시간 정도에서 끝이 났다. 주인공 계나라는 여성이 한국을 떠나 호주에 가서 좌충우돌하는 이야기다.

 

소설이라고 해도 너무 리얼리티가 넘쳐난다. 사실 소설은 현실적인 요소와 밀접하게 연결되면서도 한편으로 환성적인 요소 혹은 비일상적 요소가 들어가기도 한다. 현실적인 요소에서 사건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점이 하나의 비일상적 요소일 줄 모른다. 다양한 경험을 1사람이 겪을 수 있지만, 그런 풍파를 마치 줄줄이 비엔나처럼 엮어갈 수 있는 확률은 그리 높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최근 뉴스에서 4년제 초봉을 받는 신입사원이 월290만원을 받는다는 기사를 접했다. 그런데 그런 확률은 매우 희박하며, 정규직의 길로 가기도 어렵다. 얼마 전 서울에 가서 한 직장남성을 잠시 차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자기가 다니는 회사에 인턴을 뽑았는데, 처음에 많이 정규직으로 전환할 것으로 이야기했지만 20명 넘는 직원에서 3명만 되고, 나머지는 탈락되었다고 한다. 그나마 20명도 수많은 경쟁을 뚫고 온 자고, 어느 기업은 인턴의 인턴을 뽑는다고 했다. 인턴에서 정규직 전환도 라이언 일병 구하기 수준인데, 인턴의 인턴에서 정규직은 무슨 코미디를 하는 것도 아니고, 참으로 씁쓸한 기분이었다. 나보고 물어보면 해마다 계약서를 쓰고 하지만, 사실상 그것은 통례 일뿐이지 정규직에 가깝다. 물론 어느 순간 부서에 쓸데없이 인간이 넘치면 운이 없으면 나갈 수 있겠지만, 아직 그것도 언제 일어날지도 모르고, 나와도 기사자격증이 있어서 적당히 넣으면 구할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공대출신이란 공돌이는 자격증이 먹여살려준다. 문제는 크게 먹여주지 못하는 점과 그래 만족할 수 없을 정도로 금전적인 혜택은 없다. 사업자가 되려고 해도 이미 엔지니어 바닥은 새롭게 나가기 어려운 구조가 되어버렸다. 그나마 도시계획이 정비되고, 환경과 법적인 절차가 계속 요구되니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짜증이 나는 것은 분명히 있다. 나라에서 고시로 정한 대가기준이 있어도 우리는 그 기준의 반에 가져가지 못하고, 때로는 1할 수준에 일을 처리한다. 나라에서 국가기술경쟁력 도모와 성장, 기술자들의 능력을 운운거리나 현실에서는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에서 제시한 엑셀로 짠 설계예산서를 보고 있자면 웃음만 난다.

 

그런 웃음이 나는 예산에서 일을 하는 현실은 웃기고, 그런 일을 1인당 프로젝트 소수가 아니라 몇 개씩 잡고 있는 것도 웃기다. 지방과 서울의 중소기업이나 메이저나 상황은 같다. 아니 메이저 쪽은 평일에 제시간 퇴근이란 단어는 없고, 주말에 나와 PC 앞에서 좀비처럼 눈이 퍼렇게 들어가는 것도 다반사다. 계나라는 주인공이 소설에서 호주에서 가서 가장 인상 깊은 점은 차도를 건널 때의 모습이다. 물론 알고 있지만, 우리는 차 앞에 갑자기 사람이 놀라 짜빠지면 운전하는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욕하거나 화를 낸다. 그런데 호주에서는 어느 늙은 신사분이 쓰러진 계나에게 괜찮은지 묻는다.

 

잠시라도 멈추면 화가 나서 화산이 터지는 상황이다. 요새 많이 등장하는 신문기사로 난폭운전과 보복운전이 있다. 조금 나도 해 본 일이 있는 듯하다. 심각하지 않으나, 1차선으로 유턴을 하려고 천천히 진입하는데, 2차선에서 갑자기 차 한 대가 방향지시등도 켜지 않고 올 때, 그때 친구와 나는 그 차를 보고 욕을 하고, 경적을 울렸다. 문제는 그 상대편도 같이 시비에 말려들어 운전 내내 인상을 찡그리면서 간 것이다. 가끔 운전할 때 창문으로 내 얼굴을 본 사람들이 창문을 다시 올리고 가는 일이 많기에 별로 운전하다 그런 일은 없지만, 가끔은 있다.

 

그렇게까지 독하게 굴 것까지는 없고, 설사 그렇다고 해도 양해를 구하고 오면 되는 문제다. 그것조차 바라지 않고 바로 표출한다. 그만큼 한국사회에 여유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빡빡한 일상과 현실은 여과 없이 닥친다. 아침 출근길은 지옥철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고 다닐 때 가끔 이상한 기분을 느낀다. 왜 내 팔은 위에 손잡이 잡지 않지만, 지하철의 진동에 내 몸은 쓰러지지 않고 가만히 서 있을까라는 점이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기대어 만든 한자가 人이라 한다. 한자로 보면 하천을 의미하는 川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대신 짐을 선반에 올리지 못해 2팔이 괴로웠지만 말이다.

 

형이 서울에 살면서 지하철을 타고 교통정체 없이 가느니, 차라리 차가 막혀도 내 차로 간다라고 나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과연 그 이유가 왜 그런지를 난 알게 되었다. 보이는 것은 답답한 벽이고, 나에게 다가오는 것은 바쁜 업무와 골치들이다. 이런 세계에서 과연 청춘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사랑이란 단어에 연애조차 간단하지 않은 것을 안다. 연애는 남자와 여자의 문제지만, 결혼은 가정과 가정의 연결이다. 가정에 부모님과 형제자매만 있는 게 아니다. 그 부모님의 형제자매와 주변 사람도 같이 엮여가는 순간 일은 점점 더 복잡해진다. 최근 핵가족 체계로 되어 그 정도지, 참견하기 좋아하는 한국 어른들의 문화에서 각종 꼰대들이 개입한다.

 

계나가 탈출하는 이유는 사랑도 직업도 꿈도 없고, 집에선 좁아터진 방에 3자매가 서로 엉켜 살아간다. 18평 집에서 재개발로 24평에 간다고 해도 1억원이 이상 소요된다고 한다. 소설의 시점에서 계나가 26살 정도에 호주에 갔고, 6년 정도 있다가 다시 한국에 온 점을 본다면, 유학을 간 시점은 대략 2010년 이전으로 볼 수 있다. 그때가 1억이니 지금은 대략 2억은 넘을 것이다. 주택재개발사업에서 예전 집과 새롭게 지어질 집의 가격은 같지 않다. 지대만이 아니라 건축물까지 가격을 정하면 계나의 집은 이사 가지 않은 편이 좋고, 재개발이 오지 않은 편이 좋다.

 

계나의 집에 쥐가 나오고, 어린 시절 아는 친구가 연탄가스에 일산화탄소에 의한 중독사를 당할 정도라면 어느 것이 희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계나는 꿈은 단순했다. 크고 좋은 집에 훌륭한 차를 몰고 다니는 게 아니라 그저 다리 2쪽을 펴고 잘 수 있는 집에서 소박하게 살고, 가끔 1달에 1번은 외식을 하고 공연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정말 쉽지 않은 것이다. 외식이나 공연을 할 여유나 시간이 없다. 그런다고 호주 역시 간단하지 않다. 오자말자 호텔비보다 비싼 숙소에서 불편한 잠을 자야했고, 엉뚱한 인간들로 사고에 말려 전 재산을 탕진하고, 심지어는 교도소에 수감되어야 하는 비극까지 겪었다.

 

어째보면 상황의 극적인 불운은 호주가 더 강한 것 같은데, 계나는 호주를 선택하고 영주권까지 받아낸다. 그리고 옆에 재인이란 1살 어린 남자도 나름 자신의 길을 찾아간다. 뭘 해도 안 되고, 뭔가 하려면 뒤가 받쳐주어야 한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겉으로는 노력하면 되잖아 하면서 뒤에서는 해보았자 그게 그것이지 하는 이중성이 숨겨진 점에서 이 소설을 보는 내내 계나와 같은 사람이 늘어나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이야기였다. 마지막으로 생각하면서 의무와 선택에서 모두 중요한 것들이다. 하지만 선택하는 지점에서 의무적인 요소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그 의무를 하기 위한 기본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다. “중이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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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 6일 전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조너선 래티머 지음, 이수현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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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 6일 전>을 읽으면서 예전에 에르네스트 만델의 <즐거운 살인>이란 서적이 생각났다. 이 도서가 생각난 이유는 미국의 소설에서 유독 범죄소설이 1930년대 전후로 급격히 증가했다는 점이다. 이런 일들을 제공해준 원인들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세계의 자본주의화의 급격한 변동에 의해서라고 볼 수 있다. 우선적으로 종이의 보급화가 중요한 시점이다. 18세기 후반 책 1권 가격이라면 보통 프랑스 가족이 2주 정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한 가정이 2주 정도 생활이 가능하다면 그 가치는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사치품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책은 귀한 것이다.

 

19세기에 넘어오면서 인쇄술이 발달하고, 특히 신문의 보급이 활성화되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으로 진입하면서 아직까지 사진기나 영상기기의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가지는 전형적인 문자문화가 형성되었다.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19세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많이 없었지만, 19세기부터는 급격히 늘어난다. 그 이유는 18세기에 자본주의 산업체계가 들어와도 근본적 산업구조는 농경사회이기 때문이다.

 

농경산업이 중심일 때는 화폐의 가치나 상업적 교역이 개개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의 능력으로 충분히 땅을 정리하면 식량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15세기부터 영국에서 양모 산업으로 인해 인클로저 현상이 발발하고, 많은 농민들이 농촌에서 벗어나 도시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도시로 이주하는 농민이 많을수록 도시는 빈곤문제에 큰 골칫거리를 만든다. 게다가 기존 빈민과 거지와 합세하여 도적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산업사회가 점차 진행되어 도시가 대규모로 조성되면 될수록 농촌에서 유입되는 인구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그런 인구를 내포하기 시작하면서 서구국가들은 많은 경제적 성장을 거두었다. 도시에 많은 인구가 모이면 공장의 규모가 커지고, 대량생산이 된 상품이 다시 또 대량소비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재화는 늘 필요하고, 소비되며, 자본의 이윤을 거기에 따라 올라갔다. 에르네스트 만델의 <즐거운 살인>을 조금 생각하면 내가 이런 문장들을 쓰는 이유가 나온다. 농경산업 중심 때는 범죄의 유형이 생계적인 부분보다는 국가적인 형태(전쟁, 폭동, 권력다툼)나 또는 그 사회의 본질적 문제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면, 자본주의와 산업화 시대는 개인의 생계에 의해 범죄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점이다.

 

도시로 유입된 빈민들이 당장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가진 돈과 식량이 떨어진 순간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향은 도둑이나 강도, 혹은 굶어죽거나 또는 경찰에 붙잡혀 모진 감옥살이를 할 뿐이다. 일할 수 있는 직장이나 혹은 벌 수 있는 금액은 한정적이고, 거기서 미국과 같이 원래 원주민들이 세운 국가가 아닌 유럽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에게는 많은 이민족들이 자신들의 조상들처럼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미 기존에 넘어온 세력들이 토대를 잡아 경제적 이권을 지니고 있었고, 많은 하층민들이 매일매일 힘든 노동에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흔히 마피아라고 하면, 이탈리아인들이 생각난다. 마피아들은 스스로를 칭할 때 마피아라는 것보다 파밀리아라는 칭호를 사용한다. 파밀리아는 패밀리, 즉 가족이란 단어이다. 집단적으로 미국으로 넘어온 이들에게 미국은 기회의 땅이기도 했지만, 그 기회는 정당한 방법이 아니라 부당한 방법으로 기회를 잡아야 했다. 그들이 하는 업무는 매춘, 도박, 마약, 밀주 등 범죄와 언제나 연결고리가 묶여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1930년대는 매우 심각한 고비를 넘기던 시대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세계열강의 그 세력판도에 큰 변화가 있었다. 전쟁에서 러시아가 차르 황제와 무능한 정부로 인해 수백만에 이르는 러시아군인들을 전쟁터에서 죽게 만들었다.

 

식량과 옷감 그밖에 많은 생활용품의 부족, 세금의 부적절한 운영, 무너지는 산업체계는 러시아에서 2번의 혁명으로 이어진다. 러시아혁명이 일어날 때,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어가고 있었다. 패전국들은 엄청난 빚을 지고, 승전국조차도 자신들이 투자한 군자금, 그리고 전쟁터 내보낸 군인들의 전사자 명부로 큰 혼란을 빚던 시저이다. 예전에 유명한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 <위대한 개츠비>는 그런 시대를 지내온 미국의 모습을 보여준다. 군대를 입대하여 참전 후 상이용사는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길거기에 누비지만, 그들의 모습은 처량하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전쟁 중에 다리나 혹은 팔을 잃어 온전한 신체적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훈장달린 군복을 입은 채로 돌아다녀도 알아주지 않았던 시대, 미국에서 그런 사람들은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처형 6일 전>은 그 암울한 시대를 배경으로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추리소설이다. 국내에서 몇 번 번역되어 최근 20156월에 개정본이 발간되었고, 원본은 1935년에 나왔다. 에르네스트 만델의 <즐거운 살인>에서 제시한 것처럼 미국은 자본주의가 우세한 국가이기도 했지만, 그 체계로 인해 범죄는 어떤 사회적 문제로 인한 우발적인 사건보다는 고의적으로 이익을 노리기 위한 지능성 범죄가 늘어가고 있음을 알려준다.

 

1929년 미국에서 대공황이 일어나고, 경제적으로 큰 침체를 맞이한다. 주인공인 웨스틀랜드는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지만, 그가 범죄의 음모에 노출된 것은 그런 시대적 배경과 함께 한다. 주인공 중에서 탐정이나 동료들을 보면, 흔히 대령이라 불리는 남자가 있듯이 전쟁에서 한 번 크게 굴러본 인간들이고, 암울한 미국 경제에서 화려한 도시의 거리는 이율배반적인 현실을 보여준다. 인간의 욕망이 살아있는 곳, 거기에서 한 청년은 전기의자에 앉기를 기다리는 입장이 된다.

 

전기의자에 죽는다는 것은 아주 차가운 의자에 따가운 전력이 온 몸을 감싸, 신경이 타서 아주 고통스럽게 죽는 것이다. 고통의 처형에서 인간은 처음에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그 운명의 순간이 점차 눈앞에 다가오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웨스틀랜드는 자신이 억울한 누명을 쓴 것도 모자라 죽어야 한다는 것에 매우 부당한 일이다. 그때부터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탐정을 고용하고, 그들을 통해 일을 처리한다. 당시 사회는 매우 엇갈려 있었고, 도덕성은 추락했다. 만 달러의 돈은 지금도 제법 비싼 돈이다. 하지만 1930년대라면 더 말할 것도 없이 큰 금액이다.

 

자신의 무죄를 위해 탐정을 고용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조력을 받기 위해서는 교도소의 소장과의 커넥션이 필요했다. 억울한 일이 있든 없든 단지 죄가 그에게 지정되어 있다면 그에게 변호할 권리조차 주지 않고 죽을 수 있던 시대인 것이다. 이 소설은 부조리한 세상에서 부조리한 일을 당한 인물로부터 시작한다. 추리소설에서 피해자는 기본적으로 억울한 일을 당하고, 최악의 상황에 놓여있다. 그리고 해결사는 많은 위기와 고난을 넘어 사건을 해결한다. 단 여기에 등장하는 위기는 마피아나 깡패와 같은 악당보다는 오히려 주변인물이란 점이다. 이 소설을 볼 때부터 범죄를 구상한 자는 처음부터 있었던 셈이다.

 

웨스틀랜드가 무죄라고 편지를 보낸 자가 살해되는 순간, 비밀을 누가 내보낸 것이다. 에르네스트 만델의 <즐거운 살인>처럼 돈에 대한 탐욕이 범죄를 일으킨다. 그리고 항상 피해자 주변에 흥청망청 대는 가까운 친척이 있고, 그가 마치 꾸미는 것처럼 보이나, 범죄자는 의외라고 보이면서도 아니다. <즐거운 살인>에서 말한 것처럼 그저 그런 추리소설, 범죄소설에 가까운 형태다. 이런 소설이 발전한 동기는 물론 재미다. 신문이 보급되고 도서가 시장경제에 활성화되자, 많은 작가들은 범죄소설을 아주 싼 가격에 시중에 내놓았다.

 

범죄소설을 읽는 것은 재미를 위한 하나의 오락거리이다. 읽을 때마다 내용의 깊이나 전해주고자하는 의미는 없다. 보는 내낸 배신과 음모, 그리고 기묘한 발상을 이용한 증거 찾기를 어떻게 보여주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거기서도 은근히 여성의 관능미를 찾는다. 웨스트랜드의 아내는 어떤 사람인지 잘은 모르나, 소설에서 보이는 용의자 여성과 탐문대상이 되는 여성은 다들 허리가 날렵하고, 엉덩이라인은 마치 산처럼 퍼져 성적인 매력을 계속 강조한다. 다리라인이나 가터벨트의 색, 그리고 가운 속에 속옷, 브래지어 위로 보이는 가슴골 등이다.

 

사건의 마무리는 물론 웨스틀랜드의 무죄석방이다. 처음부터 그 주제는 던져 있었고, 그가 아내를 죽이지 않았다고 스스로 다짐하는 점에서 서사의 순번은 정해진 패턴이다. 그러나 웨스틀랜드의 무죄, 그에게 함정을 파던 주변 사람들에 대한 부분만이 전부는 아니다. 탐정은 마지막에 엄청나게 섹시한 여인과 사랑의 여행으로 보상받으려 한다. 돈에 대한 탐욕으로 일어난 범죄가 이제는 성적인 매력이란 탐욕으로 보상받는다. 물론 우리 사회 역시 그런 탐욕의 세계이다. 탐욕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고 한다면, 그 탐욕 중 어느 것에 비중을 주는 것이 더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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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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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 작가의 <투명인간>, 만수를 둘러싼 주변인물들이 자신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진행한다. 모든 이야기가 만수만 나오는 것은 아니나, 분명 만수의 행동과 만수와의 대화가 <투명인간>의 중요한 흐름을 가지고 있다. 독서모임에서 이 투명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어느 분은 만수라는 인물이 자신의 세대와 비슷한 것 같다고 했다. 나이가 50대 중반 분들은 만수가 학교를 다닐 시절 이야기가 바로 자신의 이야기고, 그가 격은 시대적 흐름과 많이 공감대가 형성되어 마치 소설이기보단 하나의 역사적 기록을 실어놓은 이야기 같다는 점이다. 소설에서 어느 시대적 배경과 흐름을 두고 하나의 결과가 필요하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거나 또는 환상의 이야기로 말이다.

 

작품에서 환상의 세계는 만수가 투명인간이란 점밖에 없다. 단지 그가 마지막에 자동차에 박혀 교량 아래로 추락하는 것에서 그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혈흔조차 보이지 않는다. 아니 정말 처음부터 만수라는 인물은 존재했는가? <투명인간>이란 존재는 아마도 만수로 통해 보는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상황과 모습을 다시 회고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만수의 가계를 보면 조부는 원래 양반후예로 나름 사회적 지식인이었으나, 일제 강점기 불온사상으로 인해 고문을 당하고, 게다가 큰 아들마저 죽게 되자, 작은 아들을 데리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산지 화전민 마을로 유입된다.

 

거기서 만수의 아버지는 화전민의 딸과 결혼하여 6남매를 낳고, 중간아들 만수가 태어난다. 다른 형제와 비교 해봐도 얼굴이 크고 못난 만수, 그런데 만수를 보면 집안의 일을 가장 많이 돕고, 여러모로 학교나 직장 그리고 군대까지도 사람들과 가장 잘 지낸다. 만수라는 인물은 세상의 풍파 속에서 어디에도 부딪히지 않고, 어디에도 거슬리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50대 남성 주변으로 형제들 이야기가 나오면 만수 같은 인물이 있고, 그들은 항상 가족을 위해 고군분투를 한다고 들었다.

 

심지어 어린 시절 연탄가스는 인상적이다. 2명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딜레마, <투명인간>에서 큰 누나를 선택하고, 작은 누나는 뇌가 손상되어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간다. 곁에 계신 분도 중학교시절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옆에 자던 할머니와 동생이 다시는 눈을 뜨지 못했다고 한다. 학교 이야기도 그렇다. 학교에 등교할 때 책가방 대신 보자기를 싸고 다녔는데, 모임에 계신 분들도 그런 상황을 이야기했다. <투명인간>은 말 그대로 현실에서 살아오던 사람들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고, 그때 어떤 일이 있는지 보여주는 이야기다.

 

이 책을 읽고 감상들을 대화할 때, 이 책은 전근대 사회와 근대사회에서 정체성을 잃은 한국사회 이야기를 다룬 것이라고 했다. 특히 그 주체는 남성이란 점이다. 만수의 할아버지는 전통사회에서 농민공동체가 존재하던 마을에서 선비의 후손, 거기에 지식인이었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 전쟁을 거쳐 근대의 어둠까지 본 것이다. 당장 오늘 하루 먹고 살아가는 것이 걱정인 시절, 몸이 약한 할아버지는 아들 하나를 두고, 계속 그 마을에 약사와 정신적인 지주로 지켜왔다.

 

그러나 배고픈 것과 정신적인 것은 참으로 모순적이었다. 어릴 때부터 매일 나무하러 가고, 풀을 뜯고, 소와 돼지를 치는 일에 자란 아이들은 학교조차 가는 것도 높은 장벽이었다. 그나마 백수는 할아버지를 닮아 영특하고 상당한 재주를 가졌다. 몸이 약한 것만 아니었다면, 그리고 대학교에서 가난과 외로움만 아니었다면 불운한 인물이 아닐 것이다. 만수의 모든 가족들은 오직 백수 하나만 바라보고 움직인다. 백수의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그 모든 비용이 만수의 가족에 의해 만들어진다. 백수를 보면 그가 마치 당연한 가족의 희생을 받아야 한다고 여기지 않는다. 자기 나름대로 고민하고 가족의 기대에 억지로 자신을 내몬다. 그 마지막이 월남전이다. DDT라는 약품은 제초제로서 상당히 위험한 독극물이다. 다이옥신은 중금속보다 더 위험하고, 소량이 첨부되어 코끼리에게 투여해도 죽을 정도다.

 

다이옥신에 중독된 백수, 그 이후로 만수의 가족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가족의 정체성에서 백수의 상실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인생의 목적을 빼앗아 가버린다. 백수가 죽고, 만수와 석수의 실랑이에서 불씨가 집으로 번져 모조리 태운다. 그리고 그들은 시골을 떠나 서울로 올라온다. 서울에 올라오면 희망이 있을 것이라 보지만, 사실은 돈에 의해 울고 웃는 비정한 시간이 왔다. 만수는 학교를 마치고 공장에서 일을 하여 나중에 전경으로 들어간다. 전경이 되어 교통경찰 업무를 보조하며 이른바 뒷돈을 모아 집안을 부양한다.

 

어느 날 석수가 총을 탈취하여 탈영할 때 석수는 만수를 못 알아보고 발포하고, 자신은 죽는다. 석수는 그렇게 행방불명 처리로 되어 남자는 만수만 남았다. 아버지와 불화로 큰 누나의 결혼도 엉망이 되고, 공장에 일하던 만수가 처음에 흥하려 하다가 어느 순간 회사사장이 업체를 일부로 도산시키고 도주한다. 직장을 지킨 만수와 일행은 거기에 불만을 느껴, 저항하나 결국 남은 건 빚이다. 그래도 만수는 그 모든 것을 안고 가고, 마지막에 빚도 갚으나 계속 불운한 일만 터진다.

 

가족을 위해 일만 하고, 자신에게 이때까지 제대로 된 즐거움을 찾지 않은 채 반 세기를 살아온 만수, 20세기문턱에서 IMF 여파에 남은 것이란 빚이고, 가족들은 다들 좋은 길보단 불운한 현실에 좌절한다. 그런다고 시대적 흐름에 바르지 않은 조류를 거꾸로 거슬려 가려한 이들도 절망하여 도박에 미친다.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었고, 아무 것도 가질 수가 없었던 우리 지난 세대들은 마침내 최후에는 투명인간이 되어버린다. 자기 자신은 어디에 존재하는지 전혀 알 수 없고, 단지 그 존재적 정체성을 자아의 관찰이 아니라 타인의 눈에서 비추어진다. 타인의 눈은 자아의 눈에 비해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지만, 자아의 눈으로 보는 것보다 세세하게 볼 수 없다.

 

자신을 알기 위해서 자아의 탐구와 타인의 관점을 동시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만수에게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의 의지로 삶을 살아간 점이 있었을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어린 시절, 학교를 다닌 것까지도 포함하여 공장과 그 후에 어른이 될 때의 가족관계, 만수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 억지로 떠밀린 책임을 마치 자신이 선택한 것처럼 행동한다. 늦게까지 일만 하여 결혼도 거의 미루다시피 생활했고, 결혼해도 신혼의 축복도 없다.

 

그야말로 가족을 위해서 회사를 위해서 아니라면 국가라는 시스템 안에서 충실하게 살아온 만수다. 그 모든 것들을 위해 살아왔으니 이제 자신을 위해 무엇이 옳은지 모른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한국 남성들은 만수와 같은 인생을 살았는지 모른다. 대략 40대부터도 그 생활을 충분히 느낄 수 있으며, 30대조차도 그런 영향을 조금 받는다. 왜냐하면 내가 어린 적에도 연탄가스로 중독된 사람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형이 어린 시절 어머니하고 같이 잠을 자다가 연탄가스 중독을 피하기 위해 겨울밤 창문을 열고 자다가 형이 감기에 걸려 폐렴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아버지가 말하기를 그때 형이 감기 걸린 후 폐렴에 걸렸을 때 병원비가 없어서 어머니가 무척이나 서럽게 울고 있었다고 한다. 가난이 결국 우리사회의 에너지가 되면서도 발목을 잡던 딜레마인 점에서 <투명인간>에서 보인 우리 사회의 모습이란 우리는 과연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가를 되묻는다. 처음부터 있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대상을 존재했다고 믿을 수 있었을까? 아니면 존재하고 존재했다고 인식하더라도 그를 인간적 가치로 존재했다고 볼 수 있었을까? 아니라면 단지 자기 편하게 지내려고 하려고 만수란 인물을 대했을까?

 

어느 쪽이든 만수를 위해 그나마 옆에서 위해주던 사람은 중학교 시절 친구와 공장에서 밥을 하고 나중에 결혼한 여자 정도일까? 모두 만수에게 다가오고 했지만, 진심으로 와준 것이 아니라 필요성에 의해 상황적 여건에 따라서이다. 가족조차 마찬가지다. 만수에게 많은 돈은 없지만, 돈을 착실히 모아 여유자금이 있다는 것을 안다. 만수는 결국 이용하기에 좋은 일꾼이고 자금줄이었을 뿐이다. 만수는 그런 자신에 대해 불만보단 오히려 당연한 것처럼 생각했다. 만수 주변사람에게 만수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투명인간>에 대해 다시 생각하면 독서모임에서 대표적인 투명인간은 만수지만, 비단 만수만이 아니다. 만수를 처음 만날 화자가 맨 마지막에 만수를 찾지 못할 때조차 이어질 때, 그 자신도 투명인간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얼굴과 온몸을 가리며 자전거를 타는 그는 외형적인 모습을 보면 누군지 알 수 없다. 진짜 투명인간이 겉옷만 두르고 다니는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아니라면 거대한 국가와 사회에서 살아가는 소시민들은 모두 다 투명인간처럼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배고픈 시절을 지나 막상 살만하니 다른 문제들이 나온다.

 

거기서도 자기의 주관이나 의지도 없이 사회적 흐름에 따라 물결이 요동친다. 요동치는 세계는 단지 강요하는 삶을 보여줄 뿐이다. 만수가 수업시간에 담임이 왔는데, 자신이 대위출신이고 정직한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학교 내 나무 하나가 누군가의 장난으로 훼손되자 그 장난을 친 사람이 자기반 학생이라 여기고 나오라고 한다. 사실 자기 반인지 아닌지 알 수도 없고, 그런 일에 굳이 방과 후에 종례시간을 억지로 묶여둘 필요가 없다. 다들 괴로워하자 만수가 자진으로 나오자 선생은 만수를 진짜 개 패듯이 팬다.

 

그도 학생도 만수가 아닌 것을 안다. 단지 그는 본보기가 필요했을 뿐이다. 말을 잘 듣지 않으면 상당히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말이다. 만수는 이빨이 깨지고 심하게 다쳐도 선생은 사과나 보상 따위 하지 않는다. 투명인간은 색이 없어야 한다. 그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무조건 색을 맞춰야 한다. 카멜레온이 어느 순간 색을 너무 바꾸다보니 본래의 색이 뭔지 모르고 계속 변색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 현실의 우리조차도 투명인간처럼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나마 우리는 만수에 비하여 책임의식이 약하다.

 

만수는 자기의 능력으로 누군가를 부양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무리인 세대가 왔다. 우리는 투명인간처럼 살아가기 어려운 세상이 되어서이다. 옆에 계신 분이 이런 말을 했다. 우리사회는 현재 표백사회로 인해 표백인간이 되었다고 말이다. <투명인간>은 빛에 반사하지 않고 투과하므로 있어도 없어도 느낄 수 없다. 하얗게 모두 변색된 표백인간은 어느 색 한 가지로 칠하면 그렇게 된다. 현실에 적응조차 어려운 세상이 온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이 잃어버리고 박탈당하는 세상,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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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사랑을 그리다
유광수 지음 / 한언출판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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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대학교 은사님이 저술한 <고전, 대중을 엿보다>란 책을 읽었다. 고전이란 타이틀이 내걸 듯이 주로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은 조선시대였고, 조선시대가 아니라면 고려시대 정도가 적당할 정도다. 고전의 이야기에서 문헌이나 혹은 구술로 전해오는 과거의 인간들에서 우리들은 오랜 시간과 흐름이 서로 간의 벽이 올라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막상 이야기를 들어다보고, 이야기의 주석을 따라 흘러가면 그들도 우리랑 많이 차이나지 않은 인간임을 알게 된다. 단지 그 시대가 지금과 다르고, 왕이 있다는 점, 계급사회로서 양반과 그렇지 못한 자들로 이루어질 뿐이다.

 

단지 그런 시대적 흐름이 더더욱 이야기의 플롯을 강조하는 느낌이다. 물론 현재도 우리 사회에서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은 장벽은 존재한다. 예전에는 그 장벽이 엄격하고 당연하기에 그저 불복할 수 없을 것 같으나, 지금은 그 장벽 자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나 은밀하게 혹은 의외의 반응으로 우리를 배신하기도 한다. 인생이란 누구나 알 듯 혹은 전혀 모르고 갈 듯 난해한 것이기에 그렇다. 고전에서 보이는 인간 역시 그렇다. 인간은 누구나 그런 것 같기도 하나 때로는 아니다.

 

우리 인간은 뭐라 딱 하고 단정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 그런다고 어떤 때에는 어느 대상에 대해 정확한 관철과 표현되어 그 이상 혹은 그 이하의 것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아이러니도 발생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 인간에게 가장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어렵고, 논리적으로 계산하기 어려운 것이 무엇인가? 바로 사랑이 아닌가 싶다. 사랑이란 단어를 보면 참 말로는 쉬워 보인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너 사랑해”라는 대사는 일상에서 가끔 볼 수 있고, TV 드라마에서 늘 십중팔구는 나오는 말이다.

 

하지만 그 사랑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면 어떻게 그 개념을 정립해야 할지 난감하다. 사랑하던 남녀가 갑자기 마음이 돌변하여 마치 원수를 만난 것처럼 으르렁댄다. 하다못해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지난날의 모습조차 부정한다. 사랑이란 감정은 이성적으로 따라가기 어렵고, 감정적으로 조절이 되지 않으며, 무의식적 성적본능으로만 따를 수가 없다. 진짜 사랑만큼 이성과 감정 그리고 무의식적 요소가 골고루 반죽되어야 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생각해보자면 인간에 대한 사랑, 즉 인류애는 이성적인 윤리적 가치관만 존재하면 충분히 가능하다.

 

길가다가 어려운 사람을 보고 돕거나, 매달 자선단체에 기부하거나, 갑자기 구호를 보고 헌혈 정도 해주는 것도 이성적 판단에 의해서다. 물론 그 기반에는 감정이란 것이 숨어 있다. 인간의 이성에서 판단할 수 있는 논리가 있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감각적 요소는 감정이 있기에 그렇다. 눈으로 보는 비참함, 귀로 듣는 신음소리가 인간적인 감정이 있는 자라면 누구나 그에게 선의의 행동을 하도록 만든다. 칸트의 정언명령이나 가언명령에서 정언명령은 가식 없이 윤리적 이성과 감정적 충동에 의해 일어난다.

 

상대방에게 베푸는 것에서 자신의 마음을 한 번 돌이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녀의 사랑은 조금 다르다. 무조건 사랑하는 대상에게 마음을 보여주거나 혹은 감정의 기폭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평소 그렇게 연애경험이 많지 않은 내가 사랑이 이래저래 말하기는 우습다. 그런다고 그게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내가 좋아하던 뮤지션인 故 김현식의 “사랑 사랑 사랑”이란 가사를 들여다보면 사랑을 많이 하든 적게 하든 사랑에 웃고 사랑에 우는 것도 모두 사랑이라 한다. 그래서 사랑이란 단어는 꺼내기에 쉽고도 정의하기는 어렵다.

 

그런 점에서 사랑에 대해 현대적인 관점을 보면 사랑이란 단어는 너무 가벼워진 게 아닐까 싶다. 이런 말을 하면 내가 다소 보수적인 사람이 아닌가 하겠지만, 나는 나름 진보적이다. 사랑에 진보와 보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긴다. 단지 조금 진지하게 생각하는지 아니면 가볍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예전부터 생각한 게 우연히 이 책에서 나왔다. <고전 사랑을 그리다>의 저자분이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입장에 대해 적은 게 있다. 단순히 그 글은 남녀관계로서만 다룬 게 아니라, 그보다 더 확장하여 우리의 인식과 역사적 자세를 보여주었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일제 강점기 때 강제로 일본군에 의해 끌려가서 성적인 학대와 폭행 그리고 목숨까지 잃어야 했던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내용이다. 보통 사람들이 왜 이 문제에 그렇게 깊이 여기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나는 한 번 해본 적이 있다. 그녀들은 모두 꽃다운 18세 전후에 강제로 차출되어 갔다. 일본에서 그녀의 도장을 받았다고 하나, 글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계약서 내용이 명시가 제대로 되지 않은 점에서 모순점은 명백하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일본도 산업화나 우리나라의 산업화에서 시골에 막 올라온 아가씨가 취업알선센터에 가서 일자리 소개해준다고 말을 듣고 따라갔다. 그러나 알고 보니 윤락을 강요하던 업소였고, 그 아가씨는 미성년자였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단지 그들의 강요와 폭행, 의지할 곳 없는 자신의 처지에 그 일을 맡았다. 그러면 피해자와 가해자는 누구인가? 위안부에 끌려간 그분들이 꼭 전쟁이 아니더라도 아무 것도 모른 채 끌려오고, 그것도 강제로 폭력적인 남자로부터 집단 성행위를 당하는 것에서 잦은 폭력과 협박에 시달린 것이라면 이게 정당한 일인가?

 

모든 여자가 그런 부당한 계기로 선택한 것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분명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 보이는 여성에 대한 편향적 관점이 이런 사태로 이어진 게 아닐까 싶다. 어느 날 기가 차는 뉴스를 들었다. 남자인 나라도 지나가는 여자 중에서 매력이 넘치면 성적욕망이 올라올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그런 감정을 느끼고, 내 자신이 그것을 원하는 것을 알기에 오히려 그것을 인지하여 내 자신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보통 성범죄와 관련되거나 혹은 그런 잘못된 관점을 가진 남성은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하는지도 혹은 그것이 틀린 것인지도 모르는 게 많다.

 

뉴스에서 왜 충격을 받았냐? 자신의 어린 여자조카를 10년 넘게 성폭행한 가족이 겨우 징역 4년이란 것이다. 나라면 최소 20년 이상을 살게 해야 한다고 본다. 물론 성인여성에 대한 성폭행도 나쁘지만, 어린이나 청소년 게다가 친척이라면 인간의 얼굴이 가진 자라도 말할 수 없다. 그런데 벌의 강도가 낮고, 성폭행 사건에 대해 너무 안이한 대응이 아닐까 싶다. 어느 정치인은 골프를 치다가 보조원에게 자신의 손녀 같다면 가슴을 만졌다. 위안부 할머니 문제가 일본의 사과만큼 중요한 게 한국 내의 인식이다. 결국 저분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것은 일본의 망언이나, 그 망언이 나오는 이유는 한국사회의 문제도 있다.

 

사랑에서 욕정과 욕망은 중요하다. 인간에 대해 성현들은 신과 짐승의 중간에 있다고 한다. 완전하지 못하나 그런다고 짐승처럼 사는 것도 아니다. 사랑에서 짐승은 본능에 가까운 행동으로 이루어진다. 인간은 본능으로 사랑하지는 않는다. 사랑에 본능만 있다면 단지 기계적인 성행위만 있을 것이다. 감정으로 상대방과 소통하고 이성으로 상대방과 대화를 나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참 인상이 깊다. 여성이 남성의 말을 믿을 때는 성행위 중이 아니라 그게 끝나고 나서이다. 그리고 서로간의 매력이 외모와 육체도 무시하지 못하겠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연속성이다.

 

나는 이런 가치관에 매우 크게 공감한다. 단지 나라는 인간이 특이한 사고방식과 개성이 있기에 많은 곤란함을 겪고 있다. 인간은 자신을 알아주는 인간에게 끌리는 법이다. 내 자신의 지나친 것을 너무 내세우는 것은 좋지 않겠지만, 그것을 부정하는 내 자신을 부정하게 되는 모순도 겪는다. 인간이 서로 만날 때 모두 자신의 좋은 모습, 포장된 자신만 보여준다. 그러나 그 이면에 가려진 본심 내지 본질은 숨기고, 어느 순간 그것이 드러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때는 당신이 그런 사람인지 몰랐는데, 또는 내가 왜 이런 사람을 만났을까! 라고 말이다. 어느 인간의 성질은 장점과 동시에 단점이 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아무 죄 없는 사람에게 욕하거나 시비 거는 것은 장점에 해당되지 않겠지만, 어느 사람의 개성과 매력이 반드시 좋은 법만은 아니다. 어느 한 쪽만 보고는 인간을 판단할 수 없으나, 인간이 사랑에 의해 상대방에 빠지면 그것을 놓치게 되고, 뒤 늦은 후회와 충돌이 일어난다. 사랑에 대해 이유는 필요한가에서 나는 있어야 한다고 여긴다. 저자가 제시한 것처럼 사랑이 처음에 불 같이 붙다가 단지 그 불에만 집중하면 불이 모두 꺼지면 어떻게 되는지는 이미 나온 답이 아닌가?

 

사랑한다는 말은 쉽고 사랑한다는 일은 어렵다. 이상과 현실은 뭐든지 벽과 틈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서로를 좀 더 봐주고, 알아가고, 진행형이란 말은 무척 공감한다. 사랑은 만들어가는 것이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단지 필요한 것은 사랑이 시작은 나를 알아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짝이 정해진 이상, 새로운 사랑이 생겨 날아갈 수 있다고 쳐도, 그 전의 사람과 쌓아온 신뢰와 시간을 배신하는 것이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앞에 만난 사람을 배신하여 새로운 사람에게 가버리면, 언젠가 그 새로운 사람마저 배신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고전 사랑을 그리다>를 보면 저자는 언제나 극단적인 자세를 피하고, 상황적 전황과 조건적 요소를 붙인다. 인간이 하는 일이란 뭐든지 자신의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 온갖 변수가 튀어 오르며,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생긴다. 최대한 시대적 상황적 배경적 요소를 참고하여 사랑의 대상을 보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일이 되지 않으면 무척 무관심하게 대한다. 자신의 일이 아니기에 누가 어떤 일들을 당해도 무관계다. 그러나 그 일이 자신이 되면 앞과 뒤를 보지 못하고 날 뛰게 된다.

 

내가 다른 사람의 사건을 보고 그 사람을 향하여 조롱과 비웃음을 날린다고 해도 그 비수의 칼날이 내 등 뒤로 꽂히지 않으란 법 누가 알겠는가? 그래서 인간은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공감대 형성능력이 중요한 것을 알아야 한다. 인생은 목적을 물어보면 모두 처음에 출세를 바란다. 돈과 권력을 향하여 아귀의 수라장처럼 몰려든다. 그러면 막상 그게 되면 무엇을 할 건인가? 인생은 즐기려고 한다.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 인간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거나 하게 된다. 그런데 그것을 혼자서 한다면? 인간이 사랑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은 혼자서 즐거움을 찾기 어려운 것이다. 골프 27홀을 혼자 빌려 며칠이나 친다면 지겨워서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물론 혼자서 견딜 수 있는 부류는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 부분에 대해 저자분이 설명한 것이 있으나, 조금 이 부분은 맥락을 약간 놓친 게 아닐까 싶다. 히키코모리가 개인적인 문제도 있지만, 그에게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조건이 있다는 점이다. 가상의 대상과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 현실을 외면한다고 하지만, 그들이 왜 외면하게 되었는지는 저자분이 조금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왜냐하면 이 글을 적는 독자 역시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고 캐릭터를 좋아한다.

 

물론 그렇게 필요이상으로 집착하지 않지만, 그런 기분이 드는 이유는 현실에서 뭔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 부족해지는 것이다. 오늘날은 과거처럼 대가족이 이루는 시대가 아니라 핵가족에 어릴 때부터 모두 같이 지내는 공동체적인 삶이 아니라 타인을 경쟁상대가 되는 적으로 만드는 삶으로 만들었다. 그런 삶에서 비상구가 되는 의지가 옆에 있는 인간이 되지 못하는 것은 충분히 있다. 사랑은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세상도 되기도 한다. 조금 그 부분만 잘 착안해주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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