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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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는 중간에 읽다가 잊어버린 듯하나,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라는 서적에서 나온 문구를 존이 말한 것 같다. 일단 <멋진 신세계>를 읽으면서 세계3대 디스토피아 중 예전에 읽은 조지 오웰의 <1984년>이 생각이 났다. 조지 오웰의 소설 풍은 전형적인 전체주의라는 파시스트 정치체계를 비판했다. 특히 관료주의적인 권력자들의 이익이 중시되는 독재정치를 비판하였다. <1984년>은 정치적으로 자유가 없고, 언론의 정신이 상실되었으며, 모든 언어와 지식은 통제되어 일정한 단어 외에는 나올 수가 없었다. 이른바 오세아니아의 언어만이 모든 빅 브라더의 지배 아래 들어간다.

 

빅 브라더! 그 모든 것을 아우르고 모든 것을 통제하는 마치 신의 눈처럼 오세아니아의 대륙을 마치 최고의 유토피아인 것처럼 포장한다. 텔레스크린 너머 모든 것을 감시하고, 모든 것을 감청하는 세계에 진정한 자유란 없다. 어떻게 보면 <1984년>이나 <멋진 신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는 자유다. 자유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고, 그 자유는 철학부터 시작하여 각종 사회과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사회에서 흔히 사용되는 말이다.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처럼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게 태어났다. 하지만 도처의 사슬에 묶여 있다.”와 같이 항상 인간은 자유가 무엇이고 그것을 위해 목숨도 버릴 수 있다.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는 것은 언제나 세상이란 거대한 세계다. 그 세계 안의 인간은 그저 작고 나약하며 거대한 무리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 그런 대다수의 사람들 속에 자신의 존재는 그야말로 소소한 것이며,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그 자신과 더불어 그 대다수의 군중 역시 하나의 개인이기도 하다. 개인은 대다수의 군중이기도 하고 군중은 또 다시 개인 그 자체의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인간의 자유에 대한 의지는 언제나 사슬에 묶인 노예처럼 방황할 수밖에 없다. 자유를 위해서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낭만주의적 정신은 물질의 만능과 기술의 발전에 따라 약해진 것은 사실이나 그러나 자유 그 자체에 대한 매력은 여전히 버릴 수 없다.

 

인간의 자유가 성립해야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인간은 이미 사회에 나온 이상 자기 자신만의 자유는 존재할 수 없다. 끊임없이 속박당해야 하고,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에 존재해야 하며, 더구나 자신의 원하는 길이 타인의 욕망에 의해 자신의 욕망을 사회에 보여주고, 그 욕망으로 대체함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세울 수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행의 시대>처럼 계속 새로운 것에 대한 갈증과 더불어 그것을 접함에 따른 고독이 서로 대립되어 새로운 유행의 물결에 휘말려간다. 자신의 존재는 사라지는 이상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보고 듣고 판단해야 하는 것인가?

 

인간의 판단이 중요한 이유는 판단력이란 것은 결국 인간이 가진 이성으로서 사물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행동으로 움직일 수 있다. 나는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기에 나라는 존재가 현실에 존재하고, 그것이 없다면 실존적인 자신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서 자유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에 대해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의지로서 표현되는 인간의 행동이다. 그런데 그 행동이 정말 자신의 의지인지 아니면 억지로 주입되어 그것이 하나의 억압인데도 불구하고 자유롭다고 여기는 노예정신인지는 그 자신조차도 깨닫기도 어려울지도 모른다.

 

노예를 부리고 있다고 여기는 고용주조차 자신의 이기심에 의해 본인의 영혼과 정신을 파괴하여 정신적 자유를 망각하고 있다. 로베스피에르가 제 아무리 공포정치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을 바스티유 광장에 설치된 단두대 아래로 보내어도 기본적으로 자유라는 것은 나만이 자유를 가지는 것으로 자유가 되지 않고, 모두에게 자유가 가야지 내 자신이 자유롭다고 한다. 자유로운 공간이 조성되지 않으면 그 자유가 없는 곳에선 자유를 파괴하기 위해 무력을 동원하기 때문이다.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가 만들어진 시기는 프랑스대혁명 이후 외국군대가 프랑스로 침입하면서 거기에 대항하던 의용군들이 모이게 되어 만들게 되었다.

 

자유는 자기 자신이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이 자신의 의지로서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자유인 것을 보여준 사례다. 물론 그 자유로 인해 자신의 생명이 사라지어도 그들이 자신의 의지로서 그 누구의 노예가 아닌 자신의 주인으로 행동하기에 진정한 자유를 찾은 것이다. 나의 자유로운 의지로서 타인의 자유를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의지로서 자유를 찾는 것은 내가 나로서 행동하고, 그것이 단순히 타인과의 교류를 단절하는 고립이 아니라 그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자아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멋진 신세계>에서는 그런 자아를 가질 수 있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태어나기 전부터 정자와 난자로서 알파, 베타, 감마, 델타, 하등하고 열등한 엡실론이 나누어져 있다. 그것도 각각의 수정체에서도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존재하고 있다. 이미 인간은 태어나기 전부터 그 사람의 운명은 정해져 있고, 그 운명을 위해서라면 생명에 대해 무슨 짓이라도 해도 상관없는 그 냉혹함에 <멋진 신세계>는 생명윤리에 대한 어긋난 현실을 지적하고 있다. 당시 작가는 어떠한 사고를 가지고, 어떤 과학적인 사건을 토대로 작성한지는 모르나, 적어도 과학의 발달로 통해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판단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물질의 문명과 과학기술의 운영에 모든 것을 의탁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노동력을 바탕으로 세계를 만들어가기보단 그 자신이 하나의 기계처럼 되어 완벽한 사회계급체계를 만든 셈이다. 가장 끔찍한 것은 신이란 존재가 없다는 것이다. 신이란 존재가 정말 현실적으로 보이고 존재하여 모든 사람들이 그것이 정말 있다고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않더라도, 신이란 존재는 자신의 관념 안에서 정신적인 환상에 있다는 것조차도 없다. 그 신이란 이름 대신에 포드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다. 포드는 말 그대로 자동차의 황제라도 불리는 포드다. 자동차 상표이름을 만든 거부 포드는 결국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입에 빠진 인간이 결국 자신들의 이기심으로 인간 자체를 기계로 만들어 버리고, 인간이 기계가 되어 이루어진 세계가 바로 <멋진 신세계>다.

 

자본주의는 단순히 자본의 운동과 흐름에 따라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상품을 제작하여 팔아야 하며, 그 생산과정과 판매과정으로 통해 이윤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나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상품 이전의 물체가 스스로 변화하지 못하듯이, 상품의 등장은 결국 인간의 노동력에 따라 나올 수밖에 없다. 인간의 노동은 결국 물질을 하나의 상품으로 만드나, 인간은 스스로 노동할 수 있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고, 그 시간적 한계를 만드는 것은 인간의 육체적 피로와 더불어 정신적인 스트레스다. 그렇다면 그런 소모품이 아닌 인간이 노동만 하는 소모품으로 처음부터 만들고, 그 소모품들이 여러 공정과 업무를 나누어 계속 유지하게 한다면 그 노동력을 바탕으로 여가생활을 영위하는 자들은 상당히 편할 것이다.

 

그런 편한 생활에 빠진 자들은 알파계급, 그 아래 일정지식이 갖춘 자들이 베타계급이다. 알파계급은 다른 계급에 비해 무척 똑똑하고 지성적이며, 상시 자극을 주어 자신 안의 충동을 다른 쪽으로 유도해야 한다. 그래야지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던 것이다. 프로이트의 이론을 나름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인간이 가진 리비도(libido)를 자극해서인지 모르나, 적어도 판단할 수 있는 사무적인 것과 모두가 평화롭기만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곧 유토피아고 멋진 신세계가 새롭게 열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보일 뿐이다. 감마, 델타, 엡실론은 수 십 명, 아니 수 백 명이 모두 같은 얼굴로 떼를 몰려다니며, 누가 누구인지 전혀 모를 만큼 각자가 보이는 행동도 같다. 같은 유전자로 나온 아기들조차 계속 파블로프의 개처럼 끊임없이 조건실험을 시행하여 그 사회의 톱니바퀴에 어울리는 도구로 만들어낸다. 그들은 늘 세뇌된 상태이기 때문에 그 세뇌당한 가치관과 사고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없으며, 사고할 수 있는 영역이 겨우 어린아이 수준이기 때문에 이성이란 없다. 생명력도 짧기에 그들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언제든지 충당할 수 있다.

 

루소가 <에밀>에서 거론한 것처럼 곡식이 가장 싼 것은 인간들이 가장 필요하기 때문이고, 도시에서 가장 싼 것은 인간의 생명이라 한다. 공장 안에 부품처럼 정확하게 단체로 움직이는 하등계급 인간들은 가장 저렴한 존재다. 누가 죽어도 다른 누군가 눈썹 하나 흔들리지 않으며, 오히려 죽음이란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당연하기에 죽음의 고뇌조차 초월해 버렸다. 인간은 나이가 먹어도 외모는 전혀 바뀌지 아니하며, 오히려 외모가 바뀌는 일조차도 없다. 그런 세계를 처음 방문은 존의 눈에는 이 완전하게 만들어 버린 곳이야 말로 <멋진 신세계>라고 말할 뿐이다.

 

인간에게 자유의 영혼은 없고, 단지 알파의 리비도의 방임적인 태도, 여성이나 남성이나 모두 자유로운 섹스를 하여 리비도를 분출한다. 인간의 리비도를 계속 충족하는 것은 인간이 자극적인 쾌락에 빠지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게다가 소마라고 불리는 가로와 세로 그리고 높이 1㎜짜리 알약은 1g을 0.5g으로 나누어 1개 내지 다수를 복용하면 아주 기분이 좋아지고 스트레스가 사라진다. 현대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갱단이나 혹은 권태감에 사로잡힌 자들이 섹스와 약물에 빠져 사는 것과 같다. 그런데 섹스와 약물에 찌든 사람은 금방 몸이 망가지나, <멋진 신세계>에서는 그것조차도 권유하기에 문제없이 돌아간다.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하고, 항상 완벽해야 하는 <멋진 신세계>는 세상 그 어떤 곳보다 지옥이었다. 존은 자신에게 영혼을 밝혀주는 책이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들은 그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었고, 그는 자신의 영혼이 타락하는 것을 거부했다. 문명의 이기심에 빠져들기보단 스스로 쟁기를 잡고 농사하기를 바랐으며, 인간이란 존재가 죄가 있다는 것으로 보고 자신의 등에 채찍을 강하게 내려친다. 그의 행동은 전형적인 성악설에 의거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인간은 자연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인간은 그 누구도 닮은 게 아니라 자신의 영역이 있어야 하고, 약물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생각해야 하는 점이다. <멋진 신세계>에서 존은 모두의 두려움이기도 하고 신기한 하나의 자극제이기도 했다. 처음 존의 행동에 모두들 놀라움과 충격에 벗어날 수 없었고, 심지어 존이 혼자 살아가려 할 때조차 그의 폭력적인 행동에 두려워했다. 이제는 여러 사람들이 몰려와 그의 행동이 마치 즐거운 쇼로 보였으며, 그가 행동 하나하나 <멋진 신세계>의 재미였다. 심지어 그가 스스로 벌을 주는 고통의 시간마저 촉감영화 소재로 만드니 이것보다 더한 스펙타클의 사회는 없다.

 

존의 사고와 의지가 아니라 그의 행동이 하나의 영상매체로서 강한 자극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존도 처음 촉감영화를 볼 때 입술에 강한 느낌을 받았다. 손에 타고 오는 전기적 신호가 인간의 뇌신경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극적인 쾌락과 미디어로 모든 사람들은 길들여져 갔다. 그런 이들과 유일하게 다르고, 이 상황을 알고, 그것을 유지하는 사람은 세계총통이다. 모든 사람들이 평등한 이유는 그 평등한 자 위에 누군가 군림하는 노모스 같은 존재였다. 그도 셰익스피어와 여러 고전을 알고 있었다. 그만이 위험서적을 보유하고 그 지식을 알았지만, 누구에게나 공개하지 않은 이유는 그런 게 위험하다고 판단할 수 있는 기회조차 주지 않은 것이다.

 

곧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란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은 세계, 아니 그런 단어는 처음부터 실제 존재하더라도 언어적으로 관념적으로 존재하지 않은 세계다. 인간은 모두 포드님에 의해 포드님을 위해 존재할 뿐이었다. 하느님이란 신 대신 포드님이 들어간 모습을 보고 참 쓴 웃음을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계문명을 만든 인간이 신이 되어버린 세계는 결국 문명의 이기심만 남았다. 모든 자연적인 문화는 소멸되고, 그런 문화가 있는 곳은 야만의 세계가 되어야 했다. 야만과 문명의 사회, 그 차이점은 무엇인가?

 

단순히 과학 기술력이 발달한 문명의 혜택이 돌아가는 곳인가? 아니라면 문명인과 야만인의 차이는 야만인은 인간을 억압하고 폭력적으로 대하는 게 더 맞을 것이다. 존이 야만인이라고 부르는 기술문명국가가 오히려 더 야만의 세계였다. 하지만 야만의 세계는 자신들의 야만성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 그 야만성조차가 하나의 합리성으로 둔갑해 버렸기 때문이다. <멋진 신세계>에선 오로지 효율성과 합리성이다. 논리만 존재하고 윤리는 사라졌다. 사회질서는 논리적인 것만 추구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의 논리를 지적하며, 인간이 논리적으로 될 수 있는 것은 그 논리 속에 윤리가 선행되어야 하는 점이다.

 

<멋진 신세계>는 윤리는 없다. 인권도 그렇고, 성윤리의식(여성의 성적 억압을 벗어난 것으로 볼 수 있겠지만, 자궁이란 생명의 공간을 필요 없는 것으로 보기에 여성성 그 자체도 의미가 없고 단지 성행위를 하기 위한 생체조직으로 되었다)도 그렇다. 과학기술의 효율성이란 사슬에 묶인 인간은 결국 노예가 되어버린 채 자신의 인생을 기만하고 있었다. 물론 인간은 무병장수하고, 편한 인생을 원한다. 세계총통은 어느 섬에 20,000명의 인간을 보내 살게 했더니 모두 서로 싸우면 결국 반 이상이 죽고, 추후에 지배를 요구했다고 한다.

 

그 실험이 된 인간들은 알파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편리만 추구했지, 상대방에 대한 윤리적 의식은 배제되었다. 따라서 처음부터 윤리의식이 없이 이성적 능력이 알파 플러스를 그 이상을 보내도 역시 그렇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일반의지라는 것은 공공의 이익으로 통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음으로서 자신의 이익을 침해받지 못하는 기능이 있다. 하지만 그 실험에는 일반의지 대신 전체의지만 남을 뿐이다. 전체의지는 많은 인간들이 자신 내지 그 자신과 부합되는 사람들의 이익에 추구했기에 생긴 의지다.

 

그건 우리 현실에서 타인의 고통과 부당함에 대해 개선하는 것이 오히려 그 사회를 좋게 바꾸고 그것이 자신에게 좋은 삶을 돌아온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 대신 자신의 부동산 이익이나 차액만 노리고, 일획천금을 노리거나 어떻게든 남들을 밟으면서 올라가는 게 목적인 야만의 세계다. <멋진 신세계>에서 충돌을 피하고, 모든 것은 경직된 것을 추구하나, 사실 진정한 자유와 민주주의가 있는 곳은 충돌과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사회가 완벽하지 않은 점과 그 완벽함을 추구하기보단 그렇게 하기 위한 노력만 있을 뿐이다.

 

유토피아라는 환상은 폭력과 통제, 억압이 조건이 되어야 하며, 그 거짓된 혜택은 일부 누군가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는 귀결성이 따른다. 그런 세계에 모두가 자신이란 존재 대신 만인은 만인을 위해 존재한다는 게 홉스의 이론(본래 만인은 만인에 투쟁한다)에 비틀어 버린다면 그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인간은 자아라는 것은 이성과 더불어 자신의 욕망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이 되지 않은 세계는 그저 광기조차도 존재하지 않은 무미건조한 세계이다. 존의 마지막 모습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없다면, 적어도 자신이 인간이라면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있었다는 것으로 마감해야 했다. 물론 이 책을 보며 우리는 그렇게까지 심각한 지경까지 이르지 않았지만, 적어도 이런 <멋진 신세계>가 판을 치는 것을 볼 수 있다.

 

인간의 자신의 의지와 판단으로서 세상과 사회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新파블로프의 개처럼 길들여져 마치 <1984년> 마지막에 2+2=5라고 대답하는 스미스로 되는 게 아닐까 싶다. 물론 스미스는 과도한 폭력과 고문으로 정신적인 히스테리로 된 것이지만, 처음부터 우리는 스미스로 되어야 하는 세계가 아닌가 싶다. 미디어와 언론이 과연 우리의 눈을 제대로 기능하도록 하는가? 마치 촉감영화처럼 자극적인 것만 보여주고, 아무런 사고를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존이 소마를 마구 버릴 때 델타계급은 모두 동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델타계급 같은 외형적 인간은 없으나 델타계급 인간의 정신은 여기저기 보인다.

 

노예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다면 투쟁하지 못할지라도 그것을 알고 분노하고 어떻게든 머릿속으로 기억하여 자신의 현재를 알고 괴로워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인간처럼 보인다. <멋진 신세계>는 단순히 올더스 헉슬리 세계만이 아니다. 현실에도 존재한다. <멋진 신세계>에서 마르크스, 엥겔스, 트로츠키, 바쿠닌 등과 같은 혁명가 이름이 나온다. 그들조차 세계를 바꾸지 못하고 죽어갔다. 그들의 이름은 단지 문제를 일으키는 인간 내지 불완전한 인간으로 나온다. <멋진 신세계>에선 과거에 투쟁하던 이들의 이름을 올리면서도 바꾸지 못한 세상을 말한다.

 

우리는 <멋진 신세계>를 보면서 SF적인 요건에 전혀 현실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두려워하며 읽을지도 모른다. 사실 무서운 재해 수준이 일어나는 자연현상을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예술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아주 두렵고 무서우며 모든 것을 앗아가는 재앙이다. 그 재앙을 공상소설로 만들어냈다고 하여 그게 단지 스쳐가는 이야기로 흘러가겠지만, 그의 소설은 분명히 경고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런 경고를 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잊으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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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여인의 키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7
마누엘 푸익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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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여인의 키스>의 표지를 처음 보았을 때, 어느 검은 머리색을 가진 백인여성이 뭔가 은밀한 느낌을 전해주는 미소가 보였다. 그리고 그 미소 앞에는 거미줄이 쳐져 있는 것으로 보아 비밀을 가진 여자가 주인공이라 생각했다. 그 전에 들은 바로는 동성애와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고 하였으나, 책의 표지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처음 나오는 장면은 교도소에 수감된 몰리나와 발렌틴이 서로 시간을 죽이기 위해 몰리나가 예전에 밖에서 보았던 영화이야기를 계속 이어간다. 영화를 이야기하면서 이런저런 작품에 대한 스토리가 나오고, 거기에 대한 발렌틴의 평이 들어가고, 또한 밑에 주석에 달린 채 프로이트를 비롯한 각종 정신분석학자의 이론 내지 실험의 연구내용이 들어간다.

 

<거미여인의 키스>에서 이 작품에서 여인은 작품 내에 직접 나오지 않는다. 단지 거미여인으로 되어야 하는 몰리나가 대신할 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여 몰리나가 거미여인이 되어 발렌틴과 키스를 나누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단순히 이 작품에서 동성애적인 요소로 이어가는 것만은 아니다. 왜 그렇게 되어 가는가에서 후반부에서 나름 의아한 느낌이 나온다. 가령 이 작품에서 발렌틴이 1972년에 파업을 주도하다가 임시재판을 기다린 후 1974년부터 수감되었다는 점이다.

 

당시 남미에서는 격동의 시기였다.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가 혁명운동을 위해 게릴라활동을 한 직후였고, 쿠바에 피델 카스트로가 집권하고, 칠레에서는 살바도르 아옌데가 대통령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1973년 아옌데 대통령은 피노체트의 쿠데타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고, 결국 피노체트의 집권이 시작되었다. 발렌틴의 수감과 감옥생활은 단순히 역사적 흐름을 찾아보면 아옌데 대통령의 죽음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있는 것이다. 아옌데 대통령은 본래 마르크스주의자였고, 최초로 칠레에 투표로 인해 선발된 국민대통령이다. 하지만 그가 대통령이 되면서 국민의 빈곤을 해결하기보단 국민의 빈곤으로 이익을 보려고 하는 자들에 의해 어려운 정치생활을 겪었다.

 

게다가 전투기까지 동원되어 대통령 관저까지 공격하는 쿠데타의 과격함에서 피노체트 같은 인물은 단순히 아옌데 같은 인물만이 아니라 그와 같은 사상에 동조하는 사람들까지 숙청한다. 가령 발렌틴의 수감과 관련하여 교도소 소장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그 전화송신자는 권력의 핵심부에 있는 사람이고, 그들은 발렌틴이 어서 혁명조직을 자백하기를 바란 것이다. 수단은 매우 잔혹했다. 발렌틴이 있는 감옥 방에 식사를 보낼 때 옥수수죽에 뭔가 약을 타서 보낸 것이었다. 옥수수죽을 먹은 발렌틴은 심한 복통에 시달려야 했으며, 며칠 동안 기력을 찾지 못한 정도로 심한 고통을 당해야 했다.

 

발렌틴이 옥수수죽을 먹으면서 몰리나까지 먹어야 했는데, 복통과 설사로 인해 두 사람은 심한 고통에 시달린다. 그러나 발렌틴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의무실에 가지 않으려고 했다. 의무실에 가면 치료라는 이유로 주사를 투여하나, 그 주사는 바로 마약을 넣은 것으로 발렌틴으로 하여금 자백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칠레의 아옌데 대통령이 마르크스주의자인 것처럼 발렌틴 역시 마르크스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 발렌틴은 이제 독립되어 새로운 공화국으로 가려고 했던 칠레의 노동운동가였다.

 

대부분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마르크스의 사상이 기반 되었기 때문에, 아옌데와 그의 정부요직은 무력으로 빼앗은 칠레에서는 어떻게든 노동운동그룹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제거하려고 했다. 발렌틴은 자신이 의무실에도 가지 않으며, 전에 정치범인 비센테 아파리시오가 고문으로 인해 죽자, 거기에 항의하여 단식투쟁하기도 했다. 고문으로 죽은 비센테는 바로 정치범이란 점이고, 그가 정치범이 되어야 했던 점은 아옌데 정권과 관련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옌데가 관련이 있든지 없던지 마르크스주의자인 발렌틴을 고문한다고 해서 정보가 바로 오지 않았기에 다른 방법으로 발렌틴을 노렸던 것이다.

 

만약 발렌틴이 정보를 알려주지 않은 채 죽는다면 감옥소와 정부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바로 약물을 옥수수죽에 투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감옥에서 같이 있던 몰리나의 경우 발렌틴처럼 정치사상이나 노동문제로 구속된 사람이 아니라 그는 순수하게 자신의 욕망에 의해 체포된 사람이다. 발렌틴의 경우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활동하다가 체포된 이성적인 존재라면, 몰리나는 자신이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여성이라고 말하는 동성연애자였다. 그와 동성애를 나눈 사람은 일반 성인남성이 아니라 미성년자였다. 미성년자에 대한 동성애행각으로 그는 7년을 언도받았으나, 소장이 몰리나에게 발렌틴을 감시하고 정보를 검색해주길 은밀히 지시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서로 계속 대화를 나누지만, 오히려 발렌틴은 단지 몰리나를 인간적인 존재로 받아들이지만 그의 동료들에 대한 정보는 단 하나도 알 수 없었다. 발렌틴에게 온 편지조차 사실 암호로 된 편지로 발렌틴이 아니면 그 누구도 알 수 없었으며, 오히려 그런 정보로는 소장과 간수에게 엉뚱한 정보만 줄 뿐이다. 그래서 소장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발렌틴의 정보를 캐려고 했는데, 그런 최후 수단 중에 하나가 몰리나의 출감이었다. 문제는 처음에 몰리나는 자신과 교도소장의 거래로서 발렌틴을 대하려고 했으나, 어느 순간 바뀌게 되었다. 몰리나는 자신을 여자라고 한다. 그런 만큼 발렌틴은 몰리나를 남자가 아닌 여자로 대해주었다.

 

즉 동성애를 위해 발렌틴은 몰리나의 항문에 자신의 성기를 삽입한 것이다. 이런 동성애적인 요소에서 사람들은 많이 이상하게 볼 것이다. 하지만 동성애에 관련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으나, 인간의 DNA 자체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정신분석학에서는 어렸을 때 인간이 우연한 계기일 수도 있다고 한다. 호르몬의 강약에서 오히려 동성애자조차 정상적인 호르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물론 상대방의 호르몬을 투여하면 여성 같은 경우 수염이 나오고, 남성들은 가슴이 부푸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동성애는 단순히 호르몬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으며, 차라리 인간의 무의식적으로 새겨진 자국에 의해 발동하거나 또는 그리스처럼 그 시대적 문화가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칠레의 당국에서 동성애자인 몰리나를 감옥에 장기수옥을 시킬 정도로 관대하지 않았다. 결국 몰리나는 자신의 정체성을 남자이면서 여자라고 생각하게 되어 결국 발렌틴에게 여자로서 인정받는다. 그리고 자신은 거미여인이 되고, 섹스만 하고 키스를 하지 못한 발렌틴으로부터 거미여인이란 칭호를 받는다. <거미여인의 키스>에서 거미여인은 바로 몰리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동성애자인 몰리나가 교도소에서 발렌틴만을 만나는 소설로만 생각하기에 조금 문제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누엘 푸익이 저술한 <거미여인의 키스>는 시대적으로 배척받은 동성연애자와 노동운동가의 만남이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으나 모두 사회로부터 감시와 처벌을 받은 사람이다. 서로 대립된 가치관과 방향성에서 어느 시점에서 승화한(동성 섹스) 시점에서 배척된 자들의 화합이 일어난다. 하지만 그 순간도 잠시다. 몰리나는 처음에는 출옥을 원했지만, 발렌틴과의 승화로 인해 오히려 나가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발렌틴에게 이야기한다.

 

감옥에 나오는 순간 몰리나는 영원히 발렌틴을 만나지 않게 되며, 자신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죽음이라고 한다. 몰리나는 사랑하는 늙은 어머니가 있지만, 어머니는 어머니의 인생이 있으나, 자신은 자신의 인생에서 발렌틴의 만남을 소중하게 여긴다. 발렌틴은 몰리나가 나가기 전에 뭔가 이야기하고, 몰리나는 뭔가 이야기를 듣고 출옥한다. 출옥한 몰리나는 매일 실시간으로 첩보감시단이 달라붙으며, 몰리나가 전화하면 감청하여 듣고, 누군가를 만나거나 이름이 나오면 그 인물이 누군지 찾아본다. 심지어 그 주변까지 모두 조사되어 불법적 감시를 하는 것이다.

 

어떻게든 몰리나로 통해 발렌틴의 측근세력을 모두 섬멸하려 하나, 어느 날 공원에서 몰리나는 누군가의 총에 의해 살해당한다. 살해를 주도한 사람들은 분명 교도소장과 정부기관의 행동이 아니다. 그렇다면 발렌틴의 일행일 가능성이 높다. 그의 죽음은 발렌틴의 이야기로 통해 죽기 위한 암살인가? 어째든 몰리나가 죽은 후 발렌티는 심한 고문을 당하고, 고문의 고통을 줄이면서 효과적으로 자백하기 위해 교도소에서 마약을 투여한다. 하지만 발렌틴의 입에서는 아무 정보도 얻을 수가 없고, 거미여인이 정글에 가면 맛있는 음식이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발렌틴의 입에서는 마르타의 이야기가 나오고, 몰리나가 했던 영화이야기가 자신의 입에서 이래저래 섞여 나온다.

 

그러면서 소설은 끝이 난다. 번역자의 후기를 보면 분명 위에 덧붙일 수 있는 내용은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내 서평은 번역자의 글을 참고적으로 할 뿐이지 그 자체로 인용하지 않기로 했다. 심지어 수잔 손택이란 저명한 학자의 글을 인용했는데도 말이다. 번역자의 글에서는 단순히 몰리나와 발렌틴의 관계로서 영화이야기를 활용했지, 칠레의 아옌데를 거론하지 않았다. 몰리나가 마지막으로 살해당하기 전에 몰리나는 신변정리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30분 동안 공원에 아무런 행동도 없이 있다면, 체포하라는 당국의 지시에서 시대적인 배경은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피노체트의 잔혹한 탄압을 말이다. 번역자의 도움을 받아 그나마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역시 번역자의 생각으로 적은 것이 아니다.

 

단지 영화이야기를 나누는 감옥소의 두 죄수가, 영화이야기가 단순히 심심풀이로 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시대적인 흐름을 보여주는 것이다. 처음에 스릴러 미스터리가 연애로 인해 벌여지다가 나치시대의 이야기, 그리고 착취당하는 원주민, 그리고 흉악하게 얼굴이 바뀐 미남과 태어날 때부터 못난 여자의 사랑은 발렌틴과 몰리나를 메타적으로 배치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배치로서 서로에 대한 감정과 자세가 변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쟁에 가서 심하게 다친 청년은 발렌틴, 못생긴 하녀로 나오는 처녀는 몰리나라는 것은 두 사람 모두 소외된 자이기 때문에 진심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 있었다는 의미다. 발렌틴은 몰리나의 가치를 인정했기에 그와 섹스를 하였고, 몰리나는 발렌틴의 가치를 인정했기에 암살을 당한다. <거미여인의 키스>의 표지에 거미여인이 나온 것처럼 거미줄이 쳐져있는 여인의 모습에서 죽음의 미소가 떠오른다. 하지만 죽음은 고통보단 영원성을 찾기 위한 유미주의적인 요소를 반영한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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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하위문화는 우리가 잘 알지도 못하고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일본의 하위문화에 어느 순간 알게 모르게 접하고 만다. 대부분 한국에서 방영하고 드라마 중에서 일본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원작을 토대로 제작된 작품들이 몇몇 존재한다. 하위문화라는 설정에 우리는 이른바 오타쿠문화, 즉 오덕 내지 덕후로서 경멸하나 사실 일반 대중조차도 그 오타쿠 문화에 어느 순간 휩말려 자신조차 오타쿠 문화 일부에 신세지고 있는 것조차 감지하지 못한 채 대중문화의 대다수로서 우위를 점하려고 한다. 이런 부분에서 무지한 자들의 박식함이란 칭호를 부여하고 싶다.

 

특히 대중들은 이른바 문학에 대해 자주 감수성을 느끼려고 한다. 베스트셀러나 유명한 작가의 작품들이 원고를 찍으면 거기에 열광하여 마치 자신이 문화교양인 것처럼 책을 사서 본다. 하지만 정작 그 책에 적혀있는 의미하는 바를 생각하지 않고, 작품 내의 주인공에게 몰입한다. 물론 즐기는 것에 대해 아무런 제기를 하지 않을 것이나, 적어도 자신이 뭔가 있다는 생각을 버렸으면 좋을지도 모르겠다. 어째 보면 이런 대중문화현상을 두고 지적하고 비판하는 나 역시 그런 우월감에 젖어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이유는 많은 대중들은 근본의 진실과 원인을 찾아가기 보다는 그저 겉 테두리에 묻어진 빛나는 상표를 치중하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나보다 더 잘 알고 잘 깊이 들어가는 사람도 충분히 많을 것이다. 단지 얼마나 깊이 접근하고 이해하고 관심 있게 보는가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그런 차이가 그래도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그 사람의 본질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나 더 본다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을 하나 더 본 후에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정하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삶이 아닐까?

 

<선생님의 가방>에서 이런 거창한 문장을 주절거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선생님의 가방>에는 쓰키코(아마 한자로 월자, 月子인듯)라는 여자가 바로 일본 특유의 하위문화의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작가 본인이 하위문화에 접했는지 아니면 그런 것에 관심이 있는지 모른다. 하위문화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 사회의 대중들이 바라보는 시선 중에 하나인 경멸, 모멸, 우스운, 또는 즐거움 혹은 새로운 경험 등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하위문화는 단순히 대중문화 아래에 있는 별다른 세계의 문화가 아니라 대중문화라는 상부구조가 존재하기 위해 하위문화라는 하부구조가 존재할 뿐이다. 인간이 평소 드러나지 못한 영역이 하위문화 콘텐츠에서 엄청난 폭풍과 쓰나미를 일으킨다.

 

폭풍과 쓰나미 같이 강한 힘도 있지만 때로는 산들바람이나 밀물처럼 물러가는 경우도 있다. 바로 <선생님의 가방>이 그렇다. 중년남성에 대해 소녀가 가지는 연정, 혹은 중년여성이 가지는 노년남성에 대한 연정, 이것이 조금 새로워 보인다고 생각하면 착각일 것이다. 이런 작품들은 문학이 아니라 이미 만화책이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선생님의 가방> 역시 만화책 상하권으로 출판된 것은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미 일본 만화 및 애니메이션인 <토끼드롭스>를 보면 알겠지만, 주인공 남자는 자신의 할아버지의 딸과 같이 사는 모습이 나온다.

 

문제는 할아버지는 죽을 때 그 따님은 초등학교 정도 소녀라는 점이다. 자신의 어머니와 같은 형제이면서도 나이는 그 남자주인공보다 어리다. 그 소녀의 어머니는 남자주인공 연배와 비슷하다. 그러면서 그 소녀의 어머니는 주인공 남자에게 조금 더 나이 들면 자신이 사랑하던 그 노인과 비슷해 보이겠다고 한다. 물론 여기만 아니다. 일본 만화책으로 나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고, 최근에 일본 내에서 실사영화판으로 제작된 <해파리 공주>에서도 여자 오타쿠들이 모인 여관장에 미중년 내니 미노년을 좋아하는 여성도 있었다. 다른 여자 오타쿠들은 삼국지에 아주 빠져 있거나 히로인 본인은 해파리에 빠져있다.

 

이런 상황을 토대로 만든 작품에서 <선생님의 가방>에서 보이는 쓰키코와 선생님의 사랑 이야기는 그렇게 낯설지 않다. 단지 위 작품과 다른 점은 전자는 로맨틱한 분위기보단 개그요소로 반영하거나 혹은 가족 간의 사랑으로써 관계를 보여준다. <선생님의 가방>처럼 다정하게 손을 잡고 같이 데이트하는 모습은 없다. 물론 전자나 후자 역시 모두 소박한 일상을 토대로 만든 작품이다. 현실적으로 전혀 낯설지 않을 모습이란 점이다. 국내 TV에서 우연히 본 다큐멘터리가 생각난다. 어느 택시기사의 아내가 여고생이었다. 택시기사는 거의 40에 가까운 아저씨, 그러나 2사람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충격적인 현실이기도 하고, 때로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도 든다. 어느 정도 현실적 기반을 둔 리얼리즘을 배제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선생님의 가방>을 읽어보며 생각하던 바는, 소설 제목이 바로 <선생님의 가방>이듯이 그 가방이란 존재란 무엇인가 대해 생각해본다. 가방이란 무엇을 담아둘 수 있어 급할 때 보관하여 꺼내어 사용할 수 있다. 쓰키코가 처음에는 선생님인 마쓰모토 하루쓰나라는 인물에 대해 단지 고교 시절에 국어선생이란 점만 기억한다. 그러나 2사람은 계속 선술집에서 만나 이야기하고 잔을 나누며, 2년 동안 계속 만남을 유지하고, 2년이 다 된 시점에 정식교제를 한다. 선생님과 쓰키코는 행복한 애인으로서 시간을 보내지만, 시간의 흐름이란 그 어떤 인간을 비켜나가지 못한다.

 

책 제목처럼 <선생님의 가방>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1가지는 선생님이 사용했던 물건이라는 물질적인 조건 ①, 다른 1가지는 선생님이 그 가방을 계속 들고 다니면서 선생님이 운명한 후 그 가방이 쓰키코가 보관한다는 것은 가방이 곧 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상징적인 조건 ②, 마지막으로 정신분석적으로 가방이란 것은 모자나 구두와 같이 여성의 성기를 의미하는 성적인 요소 ③이다. 선생님이 들고 다닌 가방은 선생님의 것이나, 이제는 쓰키코의 것이 되고, 쓰키코의 것이 되었기에 쓰키코는 2사람의 시간을 그 가방으로서 되새길 것이다.

 

하지만 <선생님의 가방>에서 가방이 쓰키코의 것이 되었지만, 다르게 본다면 쓰키코 자체가 선생님의 가방이 되어주었다. 과거의 스승과 제자, 하지만 어느 순간 서로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에서 가방의 주인이 누가 되었는가? 이 작품에서 의미심장한 것은 쓰키코의 심정이다. 2사람은 여행을 가고, 오랫동안 성관계를 하지 않은 쓰키코, 그보다 더 오랫동안 성관계를 하지 않았던 선생님, 그 섬의 여행은 아주 특별했다. 쓰키코는 집에 가면 아버지가 안 계시고, 늙은 어머니만 계시며, 오빠는 결혼하여 조카까지 두고 있다. 쓰키코는 예전에 사귀던 애인이 있었으나 뭔가 맞지 않아 헤어진다.

 

쓰키코라는 여자, 아니 여성작가로 통해 보는 인간의 욕망은 어머니를 근친상간하고픈 오이디푸스의 욕망이 있다면, 반대로 아버지에 대한 욕망을 두고 엘렉트라 콤플렉스적인 요소가 보였다. 아버지 없는 중년에 가까운 여성, 그러나 그녀는 자기의 있을 곳을 찾지 못한 채 정신적으로 방황하나, 오직 선생님만이 자신의 구심점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처음 성욕을 느낀 것은 츠키코였다. 자신의 가슴을 만지면 부드럽지도 아니 딱딱하지도 않은 그 어중간한 상태, 복부를 지나 아래를 더 내려가니 자신의 손으로 만지기가 어색한 그녀에게 선생님의 손길이 필요했다.

 

처음 선생님은 그녀를 육체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정식교제에서는 그것을 오히려 나누어야지 사랑하는 사이라고 한다. 사랑의 조건은 정신이 우선이고 육체는 따라온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젊은 남성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선생님은 젊은 남성이 아니 노년의 남성이다. 아마 그런 세월의 연륜에서 비롯되었을까? 적어도 그 힘든 고비를 맞은 이유는 선생님을 떠나간 사모님이 묻힌 섬을 찾아서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는 인간의 가장 깊숙이 자리 잡은 트라우마 내지 상처, 그리고 과거의 흔적이다. 그것과 마주하고 부딪히지 않은 이상 벗어날 수 없다.

 

자신의 과거의 흔적들과 앞으로 맞이해야할 앞 현실의 상황이 서로 부딪히는 변증법적인 관계에서 새로운 결론이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쓰키코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계속 약간 특이한 말과 행동을 하던 선생님, 하지만 선생님은 쓰키코를 배려하여 아주 섬세하게 그녀의 주변을 받아준다. 쓰키코를 예전에 좋아했다던 남자동창, 그는 분명 멋진 남성일 것이나, 선생님보다 못했다. 육체적으로 남자동창의 어깨가 넓었을 것이나, 정신적으로 선생님의 어깨를 무한의 세계이니 말이다.

 

왠지 누군가에게 귀여움을 받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응석을 받아달라고 원하는 것인지 쓰키코의 행동은 분명히 응석을 당장 부르지 않아도 어느 순간 응석을 부린다. 그런 응석을 받아주는 선생님의 행동은 여태까지 엉뚱했다. 그런 만큼 여유와 침착함, 당당함이 있었다. 책 안에 다쇼라는 말이 있다. 다생(多生)이란 말에서 많은 삶을 사는 것이란 말도 있지만, 불교적인 철학에서 윤회로 통해 그 이전의 삶까지 포함되어 있다. 지금은 이렇게 스승과 제자지만, 그 이전에 있었는지 혹은 없었는지 몰라도 다른 형태로 서로를 만났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인연이란 운명에서 쓰키코의 과거의 남자친구는 쓰키코의 친한 친구와 만나 결혼한다. 그것도 헤어진 지 6개월 만에 말이다. 이때 결혼식장에서 친구와 옛날 애인의 결혼은 마치 운명이라고 나온 말이 쓰키코에게 운명이란 그저 어디에 갖다 붙이면 그대로 되는 편한 이름인지 모른다. 그렇지만 운명은 갑자기 번개처럼 오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운명처럼 되어버린 하나의 자연스러움이었다. 그리고 그 자연스러웠던 사랑하던 이는 자연의 진리처럼 자연으로 보내버렸다. 그래도 쓰키코는 선생님을 자연의 영원한 품에 보내도 마음은 보내지 아니했다. 가방 안의 어두운 빈 공간을 보며 다시 쓰키코는 되새긴다.

 

[“선생님, 하고 부르면 천장 근처에서 가끔 쓰키코 상,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일이 있다. 유도후에는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 대구랑 쑥갓을 넣게 되었어요. 선생님, 언젠가 또 만납시다. 내가 말하면 천장의 선생님도 언젠가 꼭 만납시다. 하고 대답한다.” 그런 밤이면 선생님의 가방을 열어 안을 들여다본다. 가방 안에는 텅 빈, 아무 것도 없는 공간이 펼쳐져 있다. 그저 망망한 공간만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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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찬기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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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라는 인물은 독일 근대문학의 거두를 지나 독일 그 자체를 나타내어주는 대문호이다. 또한 기본적으로 독일이란 국가는 프랑스를 비롯한 다른 국가에 비해 언어적 표현력이 떨어지는 국가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테의 언어는 마치 산 위에서 흐르는 강물이 계곡을 따라 굽이쳐 흐르는 모습을 보여주며, 그 강물은 거대한 하천이 되어 바다와 마주하는 연안과 같은 느낌이다. 거대한 물결이 강물을 타고 밑으로 내려오고, 그 강물을 받은 바다는 그 모든 것을 포용하는 듯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거대한 파도가 반대로 올라가 주변에 있는 모든 땅을 삼킬 것 같은 기복이 찾아온다.

 

괴테라는 대문호의 글이 이렇게 아름답고 가슴이 뛰며, 그의 글을 정체되어 있지만, 그의 글을 읽는 나의 머릿속에는 큰 영상이 올라온다. 일단 출판사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괴테는 Strum und Drang라는 질풍노도 문학운동의 중심지였다. 그의 글은 낭만주의이었고, 계몽사상과는 전혀 다른 글이었다. 괴테가 논하길 볼테르로서 한 시대는 끝이 나고, 루소로서 새로운 세대를 맞이한 것처럼, 괴테는 자신의 손에는 셰익스피어를 그리고 영혼 속에서는 루소가 있었다. 낭만주의 운동이 시작되던 19세기의 유럽에서 루소의 사상이 문학적으로 움을 튼 것이었다.

 

그런 낭만주의적인 글이었는지, 또는 괴테가 루소를 무척이나 동경했는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는 순간 루소가 생각났다. 처음 베르테르가 주무관 집에 방문하였는데, 그 집안은 어머니가 병으로 죽어서 제일 큰 딸이 어머니를 대신하여 동생들을 돌보고 있었다. 동생의 수는 여덟 혹은 아홉 정도 보였다. 그 귀엽고 천사 같은 아이들은 무척이나 다정하고 사랑스러우며 아름다운 로테 옆에 앉아 평화롭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것은 리오 담로시의 <인간불평등발견자 루소>에서 루소가 우드토 백작부인에게 열광하여 그것에 대한 사랑과 좌절로 인해 <신 엘로이즈>를 만든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왜냐하면 이 아름다운 마음과 열정적인 감정과 그리고 숭고한 이상을 가진 베르테르는 안타깝게도 로테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사모했고 존경했기 때문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란 작품은 괴테가 아마 2번의 사랑에 실패한 이력이 있기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베르테르가 가장 처음 사랑한 여인은 자신보다 나이가 조금 많았으나, 병으로 일찍 죽게 되었는데, 그것은 괴테가 처음 약혼한 여성과 약혼이 파혼되어서 그런 감정을 어쩔 수 없이 베르테르가 땅 속 깊이 사랑하던 여인의 관을 묻은 것 같은 것이다.

 

로테와의 사랑은 해설서에 나온 것처럼 2번째로 사랑하게 된 여인이 자신과 알고 지낸 남자의 약혼녀라는 점이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에게 슬픔과 절망 그리고 죽음을 이르게 할 수밖에 없었던 로테, 사실 괴테가 2번째로 사랑한 여인의 이름은 샤를 로테 부프라는 점에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히로인의 이름은 곧 괴테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는 자신의 슬픔으로 인해 자살을 택한 것이고, 괴테는 마음을 죽인 것이다. 서양사상에서 기본적으로 인간의 육체와 영혼은 분리된 것이란 이분법적인 관념에서 벗어나 인간의 육체나 영혼이나 서로 다름없다는 점에서 육체적 베르테르의 죽음은 정신적 괴테의 죽음을 승화시킨 것이었다.

 

낭만주의 문학으로서 괴테가 선보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삶과 죽음에 대해 살펴보자면, 사랑을 위해서라면 또는 자신의 소중한 것을 위해서라면 목숨조차 바칠 수 있는 열정과 도취가 숨을 쉬고 있던 것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는 1774년에 출시된 점을 보면, 아직까지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전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계몽주의라는 이성적 인간과 그에 반대되는 반계몽주의 또는 낭만주의는 인간이란 존재는 이성과 감정 앞에서 무엇이 우선인가를 생각할 수 있는 작품이다.

 

괴테의 작품의 낭만주의는 루소의 <에밀>에서 표현한 것처럼, 베르테르가 로테가 살고 있는 지역에 이사를 오면서부터다. 베르테르는 로테의 아이들을 보면서 그들의 순수함과 솔직한 모습을 두고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로테가 정말 아름다운 이유는 바로 그 순수하고 선한 아이들이 로테의 손에서 자애롭게 성장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형제들과 서로 장난치고 떠들어대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베르테르는 매우 기쁜 표정을 짓는다. 어린 아이는 어린 아이로서 보여주는 것이 자연적이고 당연하다는 것이다.

 

베르테르는 매우 열정적이고 감정이 풍부한 청년이다. 그는 자연에 대한 아름다움을 흠뻑 취하기도 하고, 마을에 처음에 올 때 마을 어린아이에게 매우 다정하게 대해주었다. 베르테르는 높은 귀족집안의 아들은 아니지만, 집안 자체가 일반 농민보다 신분이 높았기에 베르테르를 처음 본 아이들은 두려워하거나 경계했다. 하지만 베르테르의 진심을 알자, 어린 아이들은 모두 베르테르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또한 베르테르는 마을 우물가에 어떤 처녀가 물을 기르러 오는 것을 보고, 그녀가 물통을 들고 갈 수 있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 마을처녀는 베르테르가 자신보다 높은 계급이란 점을 알고 있었으나, 베르테르는 관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마을처녀는 베르테르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베르테르의 그 자연적인 감정이란 바로 단순히 괴테가 베르테르로 통해 위험하고 허무하며, 애타는 사랑만 적은 것이 아니었다. 소설 내에서는 순간적으로 베르테르로 보는 당시 사회상을 비판하고 있었다. 베르테르가 사랑하던 로테는 사실 이미 알베르트라는 혼약자가 있었고, 베르테르는 로테를 너무 사랑하기에 잠시 그 마을에서 잠시 떠난다. 그리고 베르테르는 공사의 밑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우연히 백작을 알게 된다. 그 백작은 자신보다 지위가 높으나 아주 쾌활한 사람이고, 베르테르와 마음이 맞았다. 또한 베르테르는 그곳에서 어떤 아름다운 여인 B를 만났는데, 그 B양은 마치 로테와 같이 아름다운 외모와 몸매 그리고 우아한 마음까지 가졌기에 베르테르는 B양과 친구가 되었다.

 

어느 날 베르테르는 자신과 친한 공작과 같이 무도회에 갔으나, B양은 베르테를 보고도 안절부절 못한 채 떨고 있었고, 백작도 난처한 표정을 지은 후에 베르테르에게 미안하다면 무도장에서 집으로 가길 부탁했다. 그 이유는 당시 공작이 살던 사회는 귀족들의 상류계급 문화가 존재했고, 베르테르는 그곳에 합당하지 못하여 배척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베르테르는 거기서 나온 것이 홀가분했고, 그런 사람들이랑 있는 것보다 자연의 아름다움이 좋았다. 하지만 B양의 불친절함에는 마음이 아팠다. 그 이유는 B양은 원래 귀족집안의 후예고, B양과 같이 사는 숙모는 그런 베르테르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했다.

 

결국 베르테르로 보는 귀족사회에 대해 그들이 무능하거나 재력이 없거나 또는 교양이 없어도 단지 귀족의 이름을 달고 있으면 그것에 안주하여 교만 방자한 인간이 된다는 뜻이다. 인간 간의 평등이 되지 않았지만, 평등해지지 않을 수 있겠지만, 베르테르는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바로 인간의 평등을 말이다. 베르테르는 로테를 사랑하고, 로테의 약혼자인 알베르트 역시 좋은 사람인 것을 알고 좋은 친구로 여긴다. 하지만 알베르트는 무척이나 이성적인 인물이고, 베르테르는 이성적 지성과 판단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는 이성보다 자연적인 인간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어떻게 보자면 알베르트는 기존 계몽주의 사상가인 볼테르나 디드로 같은 인물이고, 베르테르는 루소와 같은 인물이었을 것이다. 볼테르는 프랑스대혁명에서 중요한 인물이지만, 그는 사실 민중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왕정만 비판할 뿐 그 외의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단순히 프랑스 정치권력에 대한 문제점을 말하지, 그 이상의 문제를 고민하거나 대안을 내놓지 않은 것이다. 이성적인 지배에서 권력은 지식을 동반하고 지식은 권력을 생산하므로 지식이 없는 평민들에게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알베르트와 베르테르의 말싸움에서 베르테르는 인간의 감정에 의한 극단성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베르테르의 말에서 “절도는 물론 죄악입니다. 그러나 굶어 죽으려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남의 물건을 훔쳤다면 우리는 그를 동정해야 하나요, 벌을 주어야 하나요? 놀아낸 아내와 그 원수 같은 유혹자를 격분한 나머지 죽인 한 남편에게 누가 맨 처음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사랑에 도취한 나머지 이성을 잃고 몸을 맡긴 처녀에게 누가 맨 먼저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냉혹하기 짝이 없는 법률이라는 이름의 계측기일지라도 필시 감동되어 그에 대한 형벌을 보류할 것입니다.”라고 한다.

 

인간이 순간적으로 저지른 죄악이 단순히 자신의 욕심보단 정열에 의해 몸을 던지 인간을 나쁘다고 볼 수 있는가 이었다. 하지만 알베르트는 그런 사람을 두고 미쳤거나 제정신이 아니라고 한다. 게다가 자살에 대해서는 위대한 행위에 비교한다는 것을 부정하고, 오히려 나약한 인간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베르테르는 지지 않고 대답한다. “당신은 그걸 나약함이라고 말하는 거요? 표면만을 보고 현혹되지 않기를 바라오. 폭군의 압제에 신음하던 백성들이 드디어 궐기하여 그 사슬을 끊어버릴 경우, 당신은 그들을 감히 약자라고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집에 불이 났을 때 평소에는 엄두도 내지 못한 무거운 짐짝을 척척 운반하는 사람이나, 남에게 모욕을 당하여 분통이 터지 나머지 여섯 명이나 상대해서 보기 좋게 때려 눕히는 사람을 약자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이봐요 인간의 노력이 힘이라면 어찌하여 이러한 극도의 긴장이 그 반대가 되어야 한다는 거요?”

 

베르테르는 인간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의 물결에 움직인다고 보았다. 인간은 이성이 아닌 감정으로 움직이기에 자신을 위해 혹은 남을 위해 싸우고, 특히나 폭군에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백성들의 궐기에서 루소의 사회계약론 맨 첫 장에 나오는 문구가 생각난다. "사람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하지만 여기저기 쇠사슬에 묶여 있다. 자기가 남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자도 사실은 그 사람들보다 더한 사슬에 묶인 노예이다."

 

괴테의 마음 즉 영혼에 루소가 숨 쉬는 이유는 바로 저런 계몽주의와 반계몽주의적 성향이 다 갖추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르테르는 열정적인 사나이고, 자연을 사랑하고 찬양하던 시인이다. 그런 시인인 베르테르가 친구 빌헬름에게 보내는 편지는 강렬하고 아름답고, 보는 내내 마음이 여기저기 움직이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낭만주의 문학에서 나오는 문체는 아직까지 우리의 가슴을 적신다. 하지만 현대에서 말하는 낭만과 낭만주의의 낭만은 다르다. 그 시대의 낭만은 자신의 진실을 몸과 마음으로 다 드러내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굳은 결심이다. 그러나 지금의 낭만은 자본의 크기에 비례한다. TV 드라마에서 남자주인공이 여자를 위해 비싼 차를 끌고 와서 성대한 이벤트는 그의 노력이 아니라 그의 자본력에 의해 움직인 것이다.

 

진정한 낭만주의는 베르테르처럼 자연을 찬양하고, 시를 열정적으로 부를 수 있으며, 거짓 없는 눈물을 흘려야 한다. 우리는 진정 베르테르처럼 한 여자를 사랑하고, 혹은 여자가 아닌 많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가? 베르테르의 죽음은 이미 예고된 것이고, 그의 죽음이 애절한 것은 베르테르의 하인이 보여주던 행동이었다. 주인인 베르테르는 죽기 전에 모든 것을 정리한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듯이 그저 여행을 가기 위한 나그네처럼 말이다. 하지만 베르테르는 로테와의 추억이 있는 곳에 발길을 옮기고, 자신에게 소중한 장소에도 찾아가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그리고 12시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권총을 자신의 머리에 갖다 댄다.

 

아침에 일어난 하인은 죽어가는 베르테르를 보자 부둥켜 않고, 알베르트와 로테의 집에 찾아가 통곡을 하면서 말도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다. 베르테르는 하인과 사용인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준 것을 소설 내에서 알 수 있으며, 자기가 죽기 전에 가난한 사람에게 얼마의 돈을 주기도 했다. 베르테르는 알베르트와 달리 이성적이지 않지만, 인간을 사랑하던 낭만적인 인물이다. 그런 베르테르이기에 로테라는 여성에 대해 열정적으로 사랑한 것이다. 이 시대에 보면 베르테르는 미래인에게 가까운 유형이었다. 계급과 지위에 상관없이 모든 인간과 서로 친분을 나누고, 비록 약혼했지만, 로테가 진심으로 베르테르를 사랑했었고, 용기가 더 있다면 알베르트의 약혼을 파기하고 베르테르와 같이 사랑할 선택점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단순히 나는 광기에 젖은 베르테르가 사랑해서는 안 될 여인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은 세상에 살았던 것이다. 물론 그의 슬픔은 겉으로 보자면 로테와의 관계였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격렬한 키스를 나누려했지만, 그마저 무산되어 다시는 로테의 눈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란 슬픈 각오에서 베르테르는 시대적 벽에 갇혀 절망한 것이다. 베르테르는 현실에서는 이루어지지 않겠지만, 자신의 어머니와 로테의 어머니는 베르테르의 진심을 알아줄 것이고, 자신은 죽음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로테와의 재회를 기대한다. 그리고 기꺼이 그는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격발한다.

 

아름다운 낭만주의 소설은 누구나 보면 마음이 두근두근하고 설레겠지만, 누구나 그것을 실천할 각오는 없다. 그래서 낭만주의 문학과 미술, 그리고 그 낭만주의적 이상을 향하던 사람은 아름답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엄청난 고통과 눈물이 있었기에 위대한 것이었다. 알베르트에게 격정적인 감정으로 인한 죽음, 그것은 결코 나약한 것이 아니었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란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다. 낭만주의 화풍이 강력한 이 그림에선 민중이 봉기하여 자유와 평등을 향하여 전진한다.

 

하지만 그들이 지나가는 자리에는 이미 죽은 사람들이 바닥에 누워있다. 하지만 그들의 열정적인 외침은 보는 내내 내 귀에 들린다. 그 그림에서 여신의 뒤에서 권총을 들고 있는 소년이 보인다. 베르테르가 선택한 것은 자연적인 인간이고, 알베르트가 선택한 것은 이성적 인간이다. 인간의 본연의 자리를 찾지 못해 죽음을 선택한 베르테르, 그의 죽음이 비극적이기에 낭만적이고 더 아름다워 보인다. 왜냐하면 베르테르의 사랑이란 자연적인 인간으로서 인간을 사랑하기 원하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 서평을 적고 있을 때 영화 <레미제라블>의 Do You Hear The People Sings를 들어서인지 마음에서 격동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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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시 다키지 선집 1 고바야시 다키지 선집 1
고바야시 다키지 지음, 황봉모.박진수 옮김 / 이론과실천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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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바야시 다키지의 <게공선>을 읽는 순간, 너무 끔찍한 일들이 있었다는 것에 조금 충격을 받았다고 할까? 그의 저서엔 <게공선>은 1930년 실제 게잡이 공선의 일을 토대로 계속 연구하고 조사하여 만든 소설이다. 그 안에서 누구의 이름은 없다. 오로지 아사카와라는 감독이란 이름만 나온다. 몽둥이를 들고 혹은 권총을 들고 무력으로 선원들을 잡아대는 무법자, 그런 무법자는 자신에게 밀어준 권력에 빌붙어 마치 자신이 제왕으로서 군림한다. 그는 제왕보다는 그저 독재자고, 폭력만 추구하는 불한당이다.

 

하지만 현실이란 세계에선 이런 불한당이 하나의 정당성이 부여된다. 여러 곳에 글을 적을 때마다 하는 말이나 나는 개인적으로 정의라는 말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정의실현, 정의를 위해라는 슬로건만큼 쓰레기 같은 것은 없다. 정의라는 말은 모든 것을 다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나 모든 것을 다 외면하고 박대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정의라는 것은 그저 자신이 편할 때 얼마든지 우려먹을 수 있는 좋은 단어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수재들에게 정치철학을 가르치는 존 롤즈의 <정의론>을 읽는 순간 정의에 대한 절대적인 가치보다는 정의는 오히려 상대적인 가치에서 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대적인 가치란 즉 상대편의 입장과 상황을 고려하고, 거기에 대한 합리적인 대안을 넘어 합당한 가치를 부여하기에 비로소 가능하다. 코바야시 다키지의 <게공선>을 읽는 순간, 그런 인간적인 가치가 무너지는 세계를 바라볼 수 있었다. 보통 나는 베스트셀러라는 도서를 좋아하지 않는다. 누구나 아무나 읽고, 소장하여 그 책의 본심과 의미를 찾지 못하거나 또는 찾을 수도 없는 책에 얽매이는 부류에 대하여 그냥 냉소적으로 바라볼 뿐이다. 그러나 이 책 <게공선>은 그럴 가치가 있었다. 일본에서 150만부가 팔린 이 도서, 처음 나오던 때도 3만 이상 팔린 이 도서가 베스트셀러로서 가치가 있다는 사실에 나는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그것은 이 책이 그만큼 잘 만든 것이기도 하고, 한편으로 이 책에 보이는 색깔은 전혀 밝은 빛도 없는 최악의 상황이다. 그런 비참한 분노를 보여주는 코바야시 다키지의 <게공선> 이외에 그의 다른 서적이 읽고 싶어졌다. 그의 책에는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는 전혀 없으며, 있는 것이라곤 분노에 찬 작가의 본인이었다. 후기를 읽어봐서 더욱 심한 인상이었지만, 그가 자신과 친하게 지낸 동료들이 경찰서에 가서 무척이나 심한 고문과 학대를 받고, 그 후유증으로 죽거나 심한 고통을 받은 자가 있다고 한다. <게공선>이 <게잡이공선>으로 나온 <코바야시 다키지 선집> 제1권은 그야말로 악의가 가득한 인간의 눈빛이 보인다.

 

<방설림>이란 작품을 보면 모든 것을 잃은 겐키치의 분노도 선하고, <1928년 3월 15일>에는 고문취조실에서 고통스러운 노동운동가들의 비명소리도 들린다. <게잡이공선>은 순수하게 게를 잡아 가공하는 배에 있는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면, <방설림>은 삿포르에 떠난 연인에 대한 원망과 자신의 아버지가 일꾼 땅을 빼앗긴 것에 분노하는 겐키치의 분노가 보였다. <1928년 3월 15일>에는 일본에서 군군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다나카가 총리로 선출되면서부터 자신들에게 반대되던 일본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억압하는 모습이 나온다.

 

안 그래도 오늘 이 책의 서평을 적으면서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내가 좋아하는 일본 성우에 대한 기사를 찾아보았다. 유키노 사츠키라고, 40대의 여자성우가 있다. 한국에서 흔히 <이누야사>라는 작품의 카고메나 <풀메탈패닉>의 치도리의 목소리로 유명하다. 그 성우가 일본의 유사법제라는 것이 2003년에 일본 국회에서 통과할 때 치안유지법에서 국가총동원법이 다시 살아나오는 것을 우려했다. 이에 대한 글을 찾으면서 국가총동원법은 일본이 1938년에 만든 법으로 일본에서 가장 부끄럽고 더러운 역사인 위안부 및 강제징용의 근거가 되는 법이었다.

 

일본에서도 그런 암울한 과거가 있었다는 사실에 너무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으며, 그 시대에 대한 반민주적 반평화적 반자유적인 생각을 하는 것에 대해 많은 일본인들이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놀라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이른바 국가보안법이 발목을 잡고 있지만, 일본 역시 그런 문제가 되는 법에 대한 심각성을 잘 각인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름 새로운 기분이었다. 바로 그러한 것이 <1928년 3월 15일>이란 작품에서 저런 내용이 생각나는 문구가 있었다. 노동당을 결성하고 노동운동을 하던 류키치가 순사에 의해 잡혀갔을 때 하던 이야기가 인상 깊다.

 

‘류키치는 흥분해 있었다. “그런데, 보라구 헌법에는 이렇게 되어 있어, 헌법에 말이다. - 일본 신민은, 법률에 의하지 않고서는 체포, 감금, 심문, 처벌을 받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말이야. 한 번이라도 제대로 정신 법률 수속을 밟아 체포, 감금, 심문을 받은 적이 있나? - 이 속임수와 순 거짓말!”

 

실제 사람들이 고문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 너무 사실적이라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고문 기술자나 또는 고문을 하는 기술이 마치 독립군을 고문하던 일본 순사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 잔인함과 비인간적인 얼굴표정이 마치 내 눈앞에서 둥둥 떠내려 오는 기분이었다. 고문에 대한 이야기에서 얼마나 심하게 구타했으면, 정신상태가 망가지는 경우가 있었고, 고문을 할 때 사람의 목을 졸라 정신을 잃게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일제의 군국주의는 비단 우리만 아니라 일본의 자국민까지 이어지고, 특히 힘없고 가난한 사람에게 이어진 것이다.

 

코바야시 다키지의 책을 보는 순간 그들과 왠지 모를 공감이 형성되었다. 암울한 근대화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비참함에 시달렸나? 우리나라에서 산업화의 일꾼이라고 하던 자들은 공장에서 가혹한 노동시간과 끔찍한 근무환경에 병들었다. 잠도 못자고 일하다 재봉틀 바늘이 손가락에 찔린 여공, 프레스기계에 손가락이 잘린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에 왠지 모르게 송곳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여기서도 안타까운 내용이 소설에 나온다. 작가가 괜히 아픈 신음소리를 내며 만든 소설이 아닌 이유는 롤링에 2사람이 끼여 배출구에 나온 사람들은 아주 얇은 쥐포처럼 나온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 정말 답답하고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은 꾸며낸 이야기라고 볼 수 있는 소설이라고 하나, 그 소설 자체는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대체했을 뿐이다. 정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처럼 시는 인간에게 철학이란 말은 여기서 바로 나오는 것 같았다. 일본의 1920~30년대의 모습은 마치 우리의 1960~70년대를 보는 기분이었다. 우리나라에 대해 외국의 문물을 본 사람들에게 들어보면 일본의 30년 후의 모습을 우리가 밟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깐 지금 우리는 1980년대의 일본이라고 할까나?

 

부동산 투기와 버블경제로 인해 침체된 서민경제, 그리고 국가는 부유하나 국민은 가난하며, 여전히 권력은 못사는 사람을 위해가 아니라 못사는 사람을 쥐어짜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방설림>에서 겐키치의 연인이던 오요시의 죽음은 참으로 비극적이었다. 그녀는 삿포르에 일하러갔으나 처음에 일을 하려고 했으나 어느 부자 아들의 애인이 되었다가, 어느 순간 임신하자 버림받았다. 집에 와서도 제대로 인간취급도 받지 못하고, 만삭의 배로 추운 겨울 창고에서 잠을 청하다 산통이 오자 이내 목을 매고 자살했다.

 

그녀가 남긴 유언의 편지는 참으로 안타까웠다. 겐키치를 떠나온 그녀는 삿포르 도시에서 부자 아들에게 있는 그대로 다 버림받은 것도 한이 맺히나 자신이 사랑하던 겐키치와 결혼하지 못한 것이 더 한이었다는 점이다. 삿포르를 원해서 간 것도 아니고, 자신의 입을 챙길 수 있는 가정형편이 못 된 것이었다. 훗카이도의 무서운 추위를 이기고 개척하러 간 농민들이었으나, 그 농민이 만든 땅을 모두 지주가 채가고, 그들의 지주의 농노로 전락했으며, 이제 그 소작조차 못하게 될 상황이었다. 심지어 강가의 연어조차 모두 독차지한 장면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무엇을 하든 어떻게 그 상황에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푸성귀에 된장을 넣고 끓인 국은 먹다가 토할 것 같고, 쌀은커녕 감자와 호박만으로 끼니를 때우는 그들의 식단, 그러나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해지는 그 시간까지 일만 하는 농민들의 얼굴을 까맣게 타들어가고, 손은 소나무 껍질보다 더 거칠었다. 가지지 못한 자에게 어디에 가서 호소할 수 없는 것만큼 더 서러운 것은 없었다. <게공선>도 그렇고 <방설림>도 그렇다. 선원과 농민이 있는 힘을 다해 일해도 돌아오는 것은 비참한 생활일 뿐 더 나은 미래는 없었다. 단지 일하고 일해 오직 해방되는 순간은 죽음이란 말처럼 너무 끔찍했다.

 

<1928년 3월 15일>에서 개미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강가에 빠져죽을지 알면서도 향한다고 한다. 그 미래를 위해 자신이 희생되어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렇게 희생하고도 아무런 성과가 없다면 얼마나 한이 맺힐까? 코바야시 다키지 선집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암울한 상황과 거기에 대한 저항의식이었다. 아무리 고문해도 태도를 바꾸지 않는 노동운동가들은 실제 일본에서 보여준 민주주의 역사였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가진 나무는 인간의 피를 빨아먹고 자란다. 인간의 피로부터 시작하여 인간의 피로 끝난다.

 

물론 그 당시보단 어느 정도 개선되었지만, 결론적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일본에서도 비정규직으로 인해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서 하루에 아르바이트를 2개 내지 3개를 하는 바이트족도 생겼다. 열심히 노력해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는 부분도 있겠지만, 그것은 극히 일부이며, 그렇게 일하는 자리도 서로 경쟁자가 몰리는 상황이다.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게공선>이나 <방설림>에서 그런 무서운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가 바로 그 가혹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전국각지에서 젊은 사람들이 흘러온다는 사실이다.

 

당장에는 국가적으로 부를 축척하고, 기업가들에겐 큰 이익은 되겠지만, 장기적으로 본다면 그 나라에는 미래와 희망을 죽이고, 스스로 살을 깎는 일로 되는 것이다. 단지 살이 깎는 것을 폭력으로 해결하는가? 아니면 덜 폭력적으로 해결하는가이다. 물론 비폭력적이라고 해도 그 상황에서 처한 약자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상황일 것이다. 국가에서 국민은 헌법 위에 있어야 하나 헌법이든 인간이든 모두 돈이 위에 있다는 점에서 그저 답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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