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헬름 텔.간계와 사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7
프리드리히 실러 지음, 홍성광 옮김 / 민음사 / 201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8세기 유럽의 중심은 프랑스였다면, 19세기는 독일이라고 과언이 아니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19세기를 풍미하고, 철학자 중에 헤겔과 니체, 사회경제학자로는 카를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등장했다. 물론 프랑스에서는 토크빌이 등장하고, 영국에서는 존 스튜어트 밀과 벤담이 존재했다. 그러나 문학, 철학, 경제학 전반의 인문학에서 19세기는 분명 독일이 강력했다. 이때 독일의 문화사조는 다소 프랑스보다 늦게 시작한 감이 들지만, 그 효과를 충분히 보여주었다. 이번에 읽은 도서는 괴테와 더불어 19세기 낭만주의 문학에서 큰 활약을 보여준 프리드리히 실러의 작품 <빌헬름 텔, 간계와 사랑>이다.

 

실러라는 이름은 솔직히 처음 들으면 낯설다. 실러라는 이름은 미학 관련 도서를 볼 때 종종 본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의 저서는 사실 이번에 처음 봤다. 하지만 실러의 작품은 낯설지 않고 우리 일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작품이다. 영화 <빌헬름 텔>은 매우 유명한 작품이며, 빌헬름 텔이 자신의 아들인 발터와 보여준 장면은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빌헬름 텔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영주가 벌인 악독한 함정에 빠진다. 광장에 걸린 영주의 모자에 인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경죄에 걸린 셈이다. 한국이라면 예전에 오후 5시가 되면 음악이 나오면 모든 사람이 길에서 멈추어 차렷 자체를 취해야 했던 것과 같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처벌을 받던지 혹은 비난을 받아야 했던 불이익이 있었다. 그런 불이익은 빌헬름에게도 닥친 것이다. 영주는 자신에게 반항적인 빌헬름을 함정에 빠지도록 했으며, 그의 아들 머리 위에 사과를 올려 만약 빌헬름이 사과를 맞추지 못할 경우 부자 모두가 죽임을 당하고, 만약 성공 하면 풀어준다는 것이다. 거리는 100걸음 정도 떨어진 곳이니, 얼마나 놀라운가? 그런 장면은 수 없이 패러디와 페스티쉬 되어 광고나 엔터테인먼트에서 종종 보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이 작품을 읽으면 희곡으로 만들어진 작품이고, 연극과 영화로 만들기 좋은 작품이다.

 

작품에 대한 감상에서 권력에 집착하는 영주와 예전에 거기를 다스리는 영주의 차이점을 보여준다. 괴테와 더불어 실러가 루소의 낭만주의 문학관을 이어받은 것을 잘 보여주는데, 루소는 <에밀>로 통해 인간은 도시로 가면 타락하게 되고 비참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도시의 타락에서 현대사회의 도시는 환경오염과 경제적 갈등, 공적 인프라(교통, 상하수도, 병원, 교육시설 등) 분배에서 님비현상과 핌비현상이 오고간다. 인간이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고 주변의 영향에 의해 중심을 잡지 못한 채 계속 표류하는 삶으로 이어지고 있다. <에밀>은 바로 인간 그 자신에 대한 자연성을 찾으라는 것이다.

 

루소는 분명 (볼테르가 비아냥거린 것처럼) 인간은 숲에서 곰과 같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자연성을 찾아가는 것이다. 즉 자신의 인생관에서 자신의 선택지점으로 가는 것이 옳은 것이다.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교육과 사회적 기능을 담당하는 것은 인간에게 지식의 전수와 사회적 인간이기보단 그 시스템에 종속되는 인간으로 만들어버린다. <빌헬름 텔>에서 마을주민들은 그런 수동적 삶이 아니라 능동적 삶을 추구한다. 자신의 왕을 믿고 따르는 것은 자신들이 자유민으로서 명예와 자유를 보장해주기 때문이고, 자신들과 자신들의 왕이 위험에 빠지면 언제라도 무기를 들고 적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나 혼자의 자유가 아니라 모두의 자유를 지키는 것부터 가능했다. 빌헬름은 그런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사나이로 등장한다. 처음 장면부터 부패한 권력자는 남의 아내를 강제로 추행하려 했고, 그 아내의 남편은 성폭행 미수범을 도끼로 내려찍어 두개골을 부수어 버린다. 그러나 정당방위라고 할지라도, 계급의 차이는 도덕과 제도의 타당성을 훼손한다. 왕의 명령이라면 군주의 의무를 대리 수행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군주라는 입장에서 정치적 통치는 자유민을 보호하고, 그들로 하여금 생업에 종사하게 하여 국가를 이어갈 수 있게 하는 후손을 남기고, 그들이 바치는 세금으로 국정을 운행하는 것이 옳다.

 

이 점에서 빌헬름 텔은 낭만주의적인 가치관이 반영되어 있고, 브루노라는 처녀가 말하듯이 민중이란 자유민들과 함께 해야 올바른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권력에 의지하고 않고, 오로지 합당한 가치관으로 쇠사슬을 풀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루소와 달리 실러의 서적은 낭만주의라고 해도 군주정치에 대하여 부정하지 않았다. 군주는 분명 올바른 정치를 하려고 했기에 자신들은 군주를 믿는 점이고, 군주를 대신한 영주의 문제점과 그의 죽음이 단순히 폭력이 아니라 군주의 자유민으로 존재하기 위해 행동한 것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국가가 아닌 다른 국가에 충성할 수 없다는 점에서 민족성을 중시한 낭만주의 문학인 점이다. 괴테는 루소가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루소는 자신이 플라톤주의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플라톤주의에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물길을 열어놓은 인물이다. 사실 루소도 애국심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단지 그 애국심의 조건은 얼마나 나라가 올바르게 움직이는가이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참주가 통치하면 시민들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대할 수 있는지를 다룬다면 플라톤의 <국가론>은 참주가 통치하면 나라가 어떻게 망해 가는가를 보여준다.

 

플라톤과 루소의 차이는 국가라는 대상이 플라톤에게 형이상학적 미를 갖춘 철인군주라면, 루소는 일반 민중에 대해 시선을 돌린 셈이다. 실러의 작품을 보면 플라톤의 <국가>에서 보여주는 국가적 의미에 루소가 제시하는 자유민들의 의지를 묘하게 줄 달리기를 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 줄 달리기는 <간계와 사랑>에서 보여준다. 실러의 소개를 보니 그는 루소 이전의 대문호, 셰익스피어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간계와 사랑>은 정치적 갈등과 연애갈등이 묘하게 섞인 작품이다. 영주의 아들 소령은 악사 밀러의 딸을 사랑했다. 하지만 밀러는 평민의 집안이고, 자신은 귀족의 집안이다.

 

아버지는 시종장과 사이가 좋으며, 밀포드 부인에게 자신의 아들을 장가보내어 더 좋은 권력을 잡으려 했다. 사랑과 권력의 이중 모순에서 소령은 간계에 스스로 걸려 마지막에 모든 것이 파멸된다는 비극으로 이어진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대치할 만한 것으로 <로미오와 줄리엣>이 좋을 것이다. 단지 <로미오와 줄리엣>은 귀족의 아들과 딸이 서로 적대하는 집안인 점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소령과 밀러의 딸에게 적용했고, 그 사랑을 방해하는 것이 집안의 원한이 아닌 권력과 계급인 점에서 낭만주의적인 요소도 반영했다.

 

계급과 권력을 틀에서 벗어나 사랑을 원하는 소령에게 자신의 아버지와 주변인물은 아무 의미가 되지 못한 것이다. 작품의 시대적인 배경과 문화적 요소를 본다면 아직까지 로코코양식이 반영된 것 같았다. 밀포드 부인의 의상을 보면 가슴이 다소 강조된다는 점에서 로코코의상에서 여성의상이 가슴을 강조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슴 윗부분의 형태가 드레스 사이로 드러나게 보이는 것은 전형적인 로코코시대의 귀족부인 의상이다. 또한 결혼한 부부가 서로 다른 애인을 찾아 즐긴다는 점도 그렇다. 루소의 <신 엘로이즈>를 보면 파리에서 많은 귀부인들은 젊은 남자들의 애정을 받고 있었고, 파리의 사교계에서 귀부인을 통하지 않으면 남자들은 출세하기 어렵다고 말할 정도다.

 

로코코시대 말기에 보여준 고전주의 작가 셰익스피어의 비극이야기가 더해지고, 소령과 밀러의 딸이 사랑과 배신에게 파괴되어가는 모습에서 귀족사회의 모순을 보여준다. 실러의 2작품을 보면서 실러는 낭만주의적인 요소를 사회 그 자체를 바꾸자는 것(프랑스대혁명)이 아니라 그 사회에 있는 모순과 부조리를 개선하자는 수정주의적인 요소가 보인다. 사회의 모순은 인간의 이성과 의지로 충분히 바꿀 수 있는 점에서 낭만주의적인 문학관이 보인다. 그러나 사실 그런 모순과 부조리는 현명한 군주가 존재하지 않으면 실행이 어렵다.

 

책에서는 인과응보의 관계를 잘 배치했지만, 실제 현실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은 어렵다. 실러의 작품을 본다면 확실한 길을 찾아가는 것보단 은근슬쩍 비켜간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추후에 등장하는 사실주의 희극작가 뷔히너가 저술한 <당통의 죽음>은 사실주의 미학으로 보여준다. 프랑스 영화 <당통>의 원래 작품이던 <당통의 죽음>은 프랑스대혁명의 지도자 로베스피에르와 생 쥐스트에 대한 당통의 비극적 관계를 보여준다. 자신의 친구이며 동지인 당통을 단두대로 보내야 했던 로베스피에르의 비극과 모순, 부르봉왕가에 대한 절대주의를 부정하던 그가 오히려 그런 절대적인 존재가 되어야 했던 현실에서 <당통의 죽음>에서 보여준 사실주의적인 허무는 보는 이로 하여금 역사에 대한 교훈을 남기게 된다.

 

Strum und Drang이라는 독일의 질풍노도의 문학은 괴테와 실러에게 큰 바람을 불어준다. 그래서 실러의 작품을 읽게 되면 등장인물의 대사가 부드럽지 못하다. 상당히 딱딱하게 끊어지고, 열정적인 대사를 퍼붓는다. 때로는 사랑의 노예가 된 자가 간계로 속아 배신의 충격 때문에 자신의 연인을 독약으로 죽게 만든다. 이 모든 게 간계라는 사실을 알고서는 자신의 칼을 뽑아 이승이 아닌 무덤 속에서 영원의 사랑으로 이어지게 만든다. 삶이 아닌 죽음이란 새로운 세계에서 찾을 수 있다는 부분은 분명히 낭만주의적이라고 볼 수 있다.

 

낭만주의 문학은 현실에 살아가는 인간 군상에서 찾기 어려울 것 같으나 은근히 현실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현실에 도래하지 않은 자신만의 이상적 세계, 사실 프랑스혁명처럼 모든 것을 뒤집는 것만이 아니라 현실의 모순만 제거하는 것에도 좋은 가치관이 될 수 있지만, 실러가 은근히 비켜가면서도 거기에 동조하는 쇠사슬이란 단어처럼, 쇠사슬로 타인이 묶고자하는 이는 오히려 더 강한 쇠사슬에 묶여 그 자신조차 망각하게 된다. 실러의 쇠사슬은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 자체가 쇠사슬에 묶였다는 것보다 단지 일정하게 어디에만 쇠사슬이 묶여 있다고 믿고 싶었던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