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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화 예찬 - 정치미학을 위한 10개의 노트
조르조 아감벤 지음, 김상운 옮김 / 난장 / 2010년 11월
평점 :
조르조 아감벤의 세속화 예찬이란 책을 보면서 제일 처음 내가 느낀 것은 세속화라는 것은 “전통적 사회에서의 초월적인 가치나 지배구조가 근대 자본주의의 생성에 따라 쇠퇴하여 보다 합리적인 가치나 규범으로 바뀌는 것으로, 신성화(神聖化)의 대립개념이다.”라고 한다. 어떻게 본다면 세속화라는 것은 신성화의 반대개념이라는 점에서 근대 자본주의로 들어서면서 자본주의적인 가치관이 합리적인 것을 추구한다면 세속화는 합리적 그 자체를 받아들이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새롭게 변화하는 것을 말하는 듯했다.
세속화(世俗化)라는 단어 자체가 그렇게 친숙한 단어도 아닐 뿐만 아니라 세속화를 예찬하고 있다던 책을 보는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역시 세속화에 대한 나의 입장은 친숙하지 못하게 느낀다. 그러나 단지 말하고픈 것은 이 책에서 느낀 부분은 바로 인간의 욕망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전에부터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개인적인 사고방식이 홀로 어떤 논제를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런 의견이나 사고가 과거에 어느 누군가에게 있었구나? 라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로 나왔다. 가령 나는 인간의 욕망은 상상세계에 있는 것으로 우리는 상상의 세계에 대해 볼 수 있다. 물론 그 상상의 세계는 우리의 눈으로 보여주기 보다는 가상의 이미지처럼 우리 머릿속에서 그려진다.
그렇지만 그런 욕망의 세계는 글로서 혹은 말로서 적어가기 보다는 내 마음 속에 있는 이미지로 통해 보는 것이 훨씬 욕망을 잘 잡아내는 것이다. 그런 욕망을 하나의 덩어리로 되어 가슴 속에 묻혀야 하는가?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분출해야 하는가? 그런 점에서 회화나 조각 등과 같은 시각적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이 나오면서 인간의 표상으로 감지할 수 있는 존재가 등장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시각적인 부분이 너무 흔하고 흔하다면 어떻게 될까나? 인간의 관념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관념 속에 있는 이미지와 존재론적인 부분에서 서로 대립하게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하나의 구심점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것이 아마 신성화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신성화는 모든 것을 다 배제하고 어느 특정 대상을 기념하게 한다.
따라서 신성화는 각각의 사고방식을 지닌 인간에게 하나의 권위와 통제력을 갖출 수 있을 만큼의 힘을 가진다. 그래서인지 우리에게 대중사회에서 나타나는 미디어 그리고 미디어 이전에 존재하던 정치적·종교적인 이데올로기 이 모두가 대중들을 통제하기 좋은 방법이다. 특히나 인간이 문자를 사용하고 문자보다는 영상이미지로 더욱 친숙하게 다가오면 올수록 거기에 대한 대중들의 통제는 신성화라는 이른바 제의 같은 행위에 스펙타클(Spectacle)이 가속화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그런 대중들을 통제하고 대중들에게 미디어가 신성한 하나의 가치관으로 들어서는 것 자체가 대중들이 거기서 얽매이게 하여 대중들을 한 무리의 구경꾼으로 전략하게 하는 스펙타클의 사회처럼 조르조 아감벤은 그런 미디어에 대한 신성함을 비웃으려고 하지 않았는가 싶다. 그런 비웃음에 대한 내용인지 아닌지 모르나 작품 9화에 나온 포르노그래피는 잊을 수 없는 장면이다.
프랑스 사진작가 클로에 데 뤼세의 사진작품은 매우 독특한 연출을 보여주었다. 문제는 이 작가는 직접 포르노에 출연했다는 것도 중요하고, 그런 포르노에 출연한 것도 모자라 그 포르노를 가지고 성적인 희롱을 넣어 예술작품으로 승화했다는 점이다. 어느 30대 포르노 배우가 남성과 성행위를 하는데, 상당히 관음적인 요소를 갖추었다.
물론 나체의 모습은 남성의 모습과 카메라 앵글에 따라 감추었지만, 그 감추어진 속에 훔쳐보기가 존재하는 포르노의 새로운 미적 감각을 보였다. 의상은 검정색 스타킹에 가터벨트를 찬 것에서 일반 포르노 여배우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 배우의 얼굴표정이라는 점이다. 보통 포르노 내지 혹은 성적인 부분을 상품매체로 넘기는 것(여자가수, 배우, 아이돌들도 분명 가진다)에서 화면 아래로 훔쳐보는 관객들이 몰래 본다는 관음적인 요소에 흥분하고 만족한다.
그런데 이 이미지에서 성행위를 하는 여성이 성적인 쾌락 내지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개를 돌려(여성의 자세는 사람이 말흉내를 내듯이 무릎과 손바닥을 지면에 고정), 당신들이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경하는 당신을 구경하고 있다”라는 것이다. 보통 Sex라는 것도 정치적인 부분에서 많이 이용된다. 파시즘이 만연한 곳에는 성적으로 억압되어 있고, 가장 억압된 사회가 가장 음탕한 사회라고 한다.
그런 성적인 부분에서 정치사회적인 것과 연계되어 하나의 억압을 정당화하기 보다는 그 정당화를 오히려 전복하려는 요소를 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라면 10장 "영화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6분“에서 재밌는 흑백사진이 나온다. 어느 영화의 시나리오에서 산초판사는 어느 시골 마을 영화관에 들어가 돈키호테를 찾고 있는데, 돈키호테가 영화를 보고 있다면 어떨까?
그런데 그 돈키호테가 고전소설을 원본으로 한 돈키호테 영화를 보고 있다면 어떨까? 내가 나온 것을 내가 보고 놀라고 있다면 말이다. 어떻게 본다면 세속화 예찬은 대중들이 하나의 구경꾼처럼 몰려드는 세상이 아니라 그 구경꾼들을 오히려 역으로 구경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추구하는 것이 아닐까?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Society of the spectacle)에서는 현대사회는 이미지가 매개로 되어 대중들을 수동적으로 만들어 버린다고 한다.
그런 수동적인 관객을 만들려면 하나의 상징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상징을 지배받음에 따라 대중들이 스펙타클화하는데, 그것에 대해 전복시킨다면 정말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화라는 것을 이용해 정치적인 신성화를 오히려 세속화하여 대중들 스스로가 보는 것에서 보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라는 것은 하나의 코미디로 되는 기분이다. 이 책을 읽으면 초반과 중반에서 조금 어렵다. 물론 막바지에 가더라도 어렵지 않다는 것은 아니나, 그런 역설적인 영화연출과 여자 포르노 배우의 표정을 본다면 기대감으로 가득한 우리는 뭐라 할 수 없는 기분에 젖게 된다.
사실 현대사회는 욕망을 하는 것을 자신이 욕망하기 보다는 타인들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여 더욱 사회적인 존재로 되는 듯하다. 따라서 타인들의 기준에 맞추어 그것이 하나의 종교적인 신성화로 되어 교조적인 현상이 일어난다. 하지만 그것은 신성하기 보다는 신성하다고 믿어버리게 한다는 것이 바를 것이다. 아마 그래서 아방가르드 즉 전위예술가들은 그런 신성화된 가치를 전복하기 위해 별로 가치 없는 것들도 가치 있음으로, 혹은 가치 없음을 가치 없음을 나타내었으나 결국 그것이 가치 있음으로 만들어 버려 현대사회에 숨겨져 있는 정치미학을 비웃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끝으로 이 책에서는 주석이 달려 있는데, 재미있는 내용과 자료가 많다. 그곳에 있는 도서도 그러나 영화 역시 새롭고 흥미로운 것들이 많다. 정치적 도구인 영화에서 영화의 도구인 정치라는 풍자성이 보이는 것이 있다. 내가 추천해줄 장면은 영화 “자유의 환영”에서 변기통 위에 앉는 장면인데, 사실 화장실이 거실이란다. 그리고 이 영화의 시퀀스는 이어지지 않고 서로 분리되어 있어 정해진 서사구조를 파괴한다. 영화라는 것도 이른바 정치사회적인 이데올로기가 담겨진 하나의 도구라고 생각하고 본다면야 무슨 의미인지 알듯 싶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