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전에 시학(詩學)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詩)는 역사(歷史)보다 더 철학(哲學)적이다” 그것은 역사는 이미 지나간 다른 개인의 이야기를 다룬다면 시는 이제 시작될 개인의 역사를 다루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그 말은 아직 당신에게 도달하지 않거나 혹은 이제 막 도달한 운명(運命)이란 장난에서 어떤 가혹한 일들이 기다리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은 과연 그렇다. 그런 만큼 마이클 샌델 교수의 불후의 명저 “정의는 무엇인가”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한 시학의 명언과 가장 부합할 수 있는 범주를 나타냈다. 물론 책 안의 많은 이야기들은 이미 지나간 개인의 역사적인 순간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언제라도 당신에게 일어날 수 있다.

그 일들은 당신에게 보이고 있는 이 지루한 후기를 적는 필자에게도 일어나는 개연성 내지 필연성이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처음 들었을 때 무척이나 어렵고 충격적인 서적으로 들었다. 하지만 막상 책 내부를 보았을 때는 그렇게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차라리 이런 것이 철학적으로 생각하게 유도하도록 하는 것이 맞았다.

나는 철학이란 학문을 뭐라 딱하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을 말한다는 것은 인간 그 자체와 더불어 이 세상과 모든 존재를 모두 논할 수 있는 초인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초인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저자 니체가 추구하는 인간관이겠으나, 적어도 그런 인간관을 도달하기란 만만치 않을 크나큰 모험이다.

전에 본인은 이런 책을 보았다. “철학 - 가장 오래된 질문들에 대한 가장 최근의 대답들”이라고 말이다. 나는 그 책에서 어느 정도 철학적인 안건과 주제에 대해 각종 윤리적·논리적·합리적인 사고로 통해 풀어가는 과정이라 생각했으나 이것이 무엇인가? 오히려 그런 생각을 기대한 내가 어리석게 되었다. 철학 관련 도서를 읽으면서 나는 오히려 내 자신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형이상학적인 부분 즉 자기 존재적·윤리적·인식론 등의 내용을 보았다. 그 내용은 답을 주기보다는 답을 오히려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마이클 샌델의 “정의는 무엇인가”란 서적을 보고 사람들이 충격적이다 말하는 것은 정말 충격적인 이야기보다는 자신들이 그동안 사고의 한계점에 부딪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물론 본인이라고 하여 그런 벽에 부딪히지 말라는 법은 없다. 오히려 늘 부딪히고 또 부딪힌다.

단지 그 부딪히는 것을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는지 아니면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렸는가의 차이다. 우선 이 책에서는 정답을 절대로 주지 않는다. 정답을 주기 보다는 정답의 원인부터 찾아 이럴 경우와 저럴 경우 그리고 다른 인자와 속성, 상황들을 보여준다. 단순히 획일화된 사고로 접근하는 자체를 거부한다. 게다가 2원화적인 대립구도에서 점차 사상적인 혹은 이념적인 부분으로 통해 그 이상의 대립관계도 등장한다.

사실 이 책에서는 마이클 샌델은 정답을 "콕“하고 찍어 주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담론들을 찾아 과거로 가고 다시 그 과거의 논제를 현대적인 상황에 맞추어 재구성한다. 일단 서구철학의 기본이 되었으면 윤리학과 정치학의 대가인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경우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으로 통해 인간의 가치를 적절히 실현할 수 있어 그 것이 사회적으로 이익이 되는 합목적성이 이루어야 정의라 한다. 그러나 웃기게도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제를 옹호하고 여성의 정치참여를 반대했다.

지금 시대라면 분명 그의 사고는 틀렸으나, 그래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정치학은 계속 읽히고 연구된다. 그 후에 데이비드 흄, 존 로크, 루소와 같은 사람에 거쳐 벤담의 공리주의에 이르고, 초반 공리주의는 모든 사람에게 이익을 돌아가나 그 이익이 너무 수단화되었다는 점에서 인간 그 자체의 존엄적인 부분이 모자랐다. 물론 여기에 자유론을 저술한 존 스튜어트 밀의 윤리적인 부분을 추구한 공리주의가 등장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모자라는지 혹은 더 인간은 인간다워야 하는지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윤리형이상학정초(이 책에서는 윤리는 도덕으로 됨)”, “실천이성비판”에 대한 내용을 거론하면서 인간은 수단이 아닌 그 목적에 의의를 두어야 했다. 물론 이런 면은 미국의 위대한 철학자 중 하나인 존 롤즈의 “정의론”까지 이어온다.

하지만 그렇게 많고 많은 철학자의 서적과 사상을 인용해도 여전히 난관이다. 왜냐하면 역사는 계속 흐르고 세상은 변하고 인간 역시 변했다. 인간이 변하고 변해 복잡 다양한 사회구조에서 정의를 찾는 것은 1가지 관점으로 보는 것 자체가 무리고 위험한 일이었다. 얼마나 위험한지 그런 사례들을 이 책에서 수없이 풀어 놓았다.

개인의 권리, 타인의 권리, 사회구조와 정치적 상황, 그리고 많은 여파들 그 모든 것을 이제는 단순하게 여기는 자체가 어리석게 되었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답을 주기 보다는 문제를 던져주고 답이 아닌 답을 내어주어 오히려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다. 그동안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은 부분에서 시작해서 자신이 지지하는 의견에 반박되는 내용까지 포함하여 말이다.

그런 이질적이고 상반되고, 자신과 타인의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이익이 오고가는 치열함에 정의는 무엇에 따라 움직일까? 사실 윤리적인 부분을 추구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모든 것의 평가로 이어질 수 없다. 그렇지만 모든 철학에서 제1의 철학이 윤리학이라고 한 레비나스의 말처럼 정의는 무엇일까? 나 자신만을 위해 타인을 못 본채 해야 할까? 아니면 내 자신을 포기하면서 타인을 희생해야 할까? 아니라면 이 모두를 못 본채 도망쳐야 할까?

어느 길이든 혹은 벽이든 선택의 기로에서 우리는 던져진 채 끝없는 고민과 혼선을 맞이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정의에서 중도적인 종착점을 찾기가 어렵다. 나는 오히려 자신이 중도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위험한 듯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말 중립적인 가치를 소지한 게 아니라, 중간이라 애매한 부분에서 지탄과 고민을 피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 나는 나의 정의는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한다. 분명 나도 내 자신의 인권과 재산이 소중하다. 그리고 그것만큼 타인의 인권과 재산도 소중하다. 또한 거기에 지나 인간이 인간다움을 지닐 수 있는 것도 중요하다. 나는 내가 얼마나 잘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기 보다는 어떻게 잘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 하지만 그것은 어려운 고민이다. 나 역시 논리적으로 내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논리와 타인에 대한 배려와 미덕, 어느 것을 선택하기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나만이 아니라 타인도 돌려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작고 미력한 존재는 국가와 지역사회에는 보잘 것도 없는 미미한 인간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인간들은 나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존재하고 그 수 역시 만만치 않다. 그런 존재들이 단독적인 부분이 아니라 거대한 부류에 속한다. 단지 서로 볼 수 없음에 인지하지 못함이다. 사회구조는 이런 서로 볼 수 없는 사람들의 위기로 통해 사회문제를 보여준다. 그런 문제는 결국 언제가 큰 사회적 문제가 대두되고, 정치적인 난관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 나는 이 책에서 이 말이 생각난다. 어떤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보면 2부류의 사람들이 불편하다는 것이다. 전 부류를 이들의 고통을 보고 가엾다는 생각에 동정심이 유발하여 마음이 불편하고, 다른 하나는 이들의 고통을 보고 - 대부분 그들은 가난하고 허약하고 외형적인 외모가 훨씬 부족하므로 - 시각적인 미에서 불쾌감을 느낄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런 불편한 마음을 덜기 위해 혹은 이런 일이 아닌 다른 문제를 위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 분명 말하지만 이 책에서 답을 찾지 마라! 답은 책을 읽고 있으면서 생각해야할 당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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