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
남유하 지음 / 사계절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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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도 슬픈,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만 할, 상대를 사랑하기에 상대의 죽음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그러나 우리나라 법으로는 불법인.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죽음. 언젠가 온다. 그 언젠가를 우리는 모른다. 모르기에 행복할 수도 있지만, 모르기에 더 두렵기도 하다.


잠을 자듯이 죽음에 이르기를 꿈꾸지만 그런 사람은 만에 하나도 드문 경우. 현대 의학의 발전으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길고 긴 과정을 고통 속에서 (이 놈의 현대 의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질병이 유발하는 고통이란 놈도 의학의 발전에 비례해 증가하고 있으니)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깨끗한 죽음이라는 환상]을 읽고 우리나라에도 조력존엄사법이 생겼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저자들의 주장처럼 이 법과 더불어 호스피스법이라든지 다른 죽음의 고통을 완화할 수 있는 법이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는 생각.


아직 죽음의 고통을 완화할 수 있는 다른 여러 제도들조차 갖춰지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조력존엄사법이라니? 하는 생각도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조력존엄사법이 현대 사회에서는 꼭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으니, 이 책을 알게 된 계기는 [깨끗한 죽음이라는 환상]에서 이 책을 언급했기 때문인데... 저자의 경험이 묻어났기에, 더욱 실감이 나는 그러한 이야기.


엄마의 고통, 그것을 바라보는 딸. 이런 딸도 엄마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는데, 거의 평생을 함께 지낸 남편인 아버지는 어떨까? 딸은 나중에 아버지가 왜 조력존엄사를 반대하지 않았는지 이해하게 된다.


아내의 고통을 가까이서, 날마나 지켜봐야 했던 남편으로서 그런 고통 없는 세상으로 아내가 가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그러면서 외국에서 조력존엄사법이 통과되기까지의 과정에서 환자의 고통을 곁에서 지켜본 의사들의 역할이 컸다는 것. 환자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었던 의사들. 사람을 살리는 일이 자신들의 일이지만 살릴 수 없는데 고통만 지속되는 환자를 보면서 그들은 의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를 더 고민하지 않았을까?


여기에는 돈이 개입하지 않는다. 연민, 사랑이 개입한다. 인간에 대한 사랑. 그것은 자신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그 사람의 관점에서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무엇이 최선일까?


사람은 누구나 살려는 욕망이 있다.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 말로는 죽어야지 죽어야지 하지만 아니다. 옛말에 어른들이 빨리 죽어야지라는 말은 3대 거짓말 중에 하나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사람은 살고자 한다. 죽고자 하지 않는다.


그런데 거꾸로 죽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왜? 산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큰 고통이기 때문에.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현대 의학으로도 줄여주지 못하는 고통에 시달리기 때문. 그렇다고 고통과 함께 계속 살 수 있다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아니다. 이들은 곧 죽음에 이른다. 죽을 수밖에 없다. 그것도 1-2년 내에. 어떤 사람은 더 빨리.


이미 그들은 죽을 때를 알고 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그 때까지 견디기에는 고통이 너무도 크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고통. 그런 고통에 몸부림치는 환자를 바라보는 가족들. 이들에게 어떤 선택이 가능할까?


우리나라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환자는 고통 속에서 임종을 맞이해야 한다. 그것이 법이다. 하지만 조력존엄사법을 제정한 나라에서는 그 고통의 시간을 줄일 수가 있다.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가족의 선택이 아니다. 철저하게 자신의 의지로 또 자신의 행동으로 선택한 일이다. 그렇더라도 곁에서 지켜보는 가족에게는 견디지 못할 슬픔이다. 가슴이 찢어질 듯한 고통. 슬픔. 하지만 그러한 자신들의 고통과 슬픔보다도 환자인 당사자의 고통이 더 심하다는 것을 알기에 그 의지에 따를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외면하는 법. 하여 엄마와 딸은 스위스로 가기로 한다. 그곳에서는 외국인도 조력존엄사를 할 수 있도록 받아주는 곳이 있으니까.


막대한 비용을 들여 외국에까지 가서 죽어야 한다는 현실.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마음. 그럼에도 더는 견딜 수 없는 고통. 


엄마는 스위스에 가서 딸에게 이렇게 말한다.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 (115쪽)


죽음보다 무서운 고통, 아니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 죽음이기에 그런 고통을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엄마의 말. 딸은 가슴이 미어지지만, 어쩔 수가 없다. 그렇게 엄마와 헤어지고, 엄마와의 이별을 애도하는 시간을 갖는 딸. 그리고 남편인 아버지.


그러한 과정이 책에 잘 나타나 있다. 엄마는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존엄하게 우리나라에서 세상을 뜰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신이 스위스에 가는 과정과 죽음을 촬영하도록 허가한다. 그것이 생명을 경시해서 하는 행동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사랑하기에 하는 행위라고.


엄마의 말.

"다른 환자들이 나처럼 힘들지 않았으면, 우리나라에서도 존엄사를 할 수 있으면 좋겠어." (194쪽)


어느 행사에서 딸이 한 말. 

"조력사망을 막는 것이 오히려 생명 경시입니다." (260쪽)


엄마의 죽음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고 함께 한 딸이 한 말. 이런 죽음을 과연 생명 경시라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생명을 사랑하기에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조력 사망 아닐까?


많은 문학작품이나 영화에서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 또는 다른 존재를 위해 그들의 목숨을 끊어주는 행위가 나올 때가 있다. 이 때 사람들은 그 행위를 살인이라고 하지 않는다. 생명을 경시했다고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존재를 고통에서 구해줬기에 사랑을 실천한 고귀한 행위라고 한다.


문학이나 영화에서 그런 장면을 보면서는 그런 행위를 칭찬하거나 어쩔 수 없는 일로 보면서 어째서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은가? 영화나 문학에서보다 더 큰 고통을 겪으면서 죽음의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데...어째서 그들에겐 연민을 품지 않는지.


아직도 우리나라는 존업사법이 통과되지 않았다. 다만 이 책을 보면 의사, 변호사, 그리고 환자와 환자 가족들을 중심으로 존엄사법을 제정하기 위한 노력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 많은 사람, 단체들이 반대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 말을 다시 한번 들어보자.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 정말 무엇이 그러한 사람들을 위하는 것인지... 여기에 이 글을 쓴 딸도 분명히 말한다. 존엄사법과 완화치료 빛 다른 치료법도 함께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그러나 어느 것을 먼저 해야지만 다음 것을 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라고...


진한 슬픔이 밀려오는, 그러나 그러한 슬픔 속에서도 사랑이 흘러넘침을 느낄 수 있는 이야기.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별 이야기. 진한 여운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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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좋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첫시부터 어렵지 않다. 그야말로 직설이다. 상징이 있고, 비유가 있지만, 상징과 비유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게 하지 않고, 오히려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를 더 명확하게 하고 있다.


  이처럼 상징과 은유는 직설과 상반되는 것 같지만, 아니다. 직설을 뒷받침하는 것이 상징과 비유다. 다만, 직설을 뒷받침하는 것이 아니라 직설은 없고 오로지 상징과 은유만 있을 때 그것은 직설과 상반된다.


  즉, 길을 잃게 만든다. 길이 어디 하나뿐인가? 또 길이 어디 다 똑같던가? 아니다. 길은 다 다르다. 폭도 길이도 평평함도 높낮이도 모두 다르다. 모두 다르지만 길은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이다. 때로는 우리가 길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것도 길임에는 분명하다. 이것이 바로 상징과 은유다.


길이 직설이라면 그 길이 지니고 있는 특성들, 길에서 발견하는 많은 것들이 바로 상징과 은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직설을 뒷받침하는 상징과 은유는 직설과 상반되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직설을 하지 않고 상징과 은유만을 사용할 때다. 그냥 직설적으로 말하면 될 텐데, 일부러 에둘러 말한다. 이때 상징과 은유는 직설을 완화하거나 가리는 역할을 한다. 좀 심하게 말하면 '사기'다.


제 이익을 위해 말을 비트는 것, 직설을 감추고 상징과 은유, 또는 번드르르한 말들만 하는 것, 그것은 거의 '사기'에 가깝다. 아니, 사기꾼들의 말이 그렇지 않은가. 앞에서 듣기에는 좋은 말들이지만 결국은 피해로 돌아오게 되는 말들. 


이런 에둘러 말하기, 상징과 은유가 직설을 가리고 있는 말하기를 가장 잘하는 집단은 정치인들이다. 그들은 모두 국민을 위한다는, 국민의 뜻에 따른다는 말로 자신들의 의도를 가린다. 정작 자신들의 의도는 그것이 아닌데, 그 의도를 많은 사람들이 짐작하게 하면서도 직설을 하지 않는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식으로, 에두르고 에둘러 결국은 자신들의 말이 사람들에게 스며들었을 때 그때 비로소 직설을 한다. 이것을 하자고... 이게 국민의 뜻이라고... 참... 이런 말하기가 정치에서 판칠 때 사람들은 헷갈린다. 무엇이 진실인가? 도대체 저 정치인이 말하는 의도는 무엇인가?


마치, 시인이 시에서 사용한 은유와 상징을 이해할 수 없어 머리를 갸웃거리듯이, 정치인의 말을 직설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그냥 뒤에 어떤 의미가 숨어 있을까 생각한다. 그 저의를 의심한다.


명확한 말하기, 이것은 정치인의 장점이자 단점이 될 수도 있다. 그만큼 정치인은 자신의 속내를 숨겨야 한다고 말이 이 나라 정치판에 정설처럼 되어 있었으니,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다고 해야 하나.


자신의 의견을 명확히, 직설로 하는 정치인은 사방에서 공격을 당했으니까. 어떨 때는 세련되지 못했다고까지 비판을 받았으니까. 그러면서 자신들의 의도를 감추고 에둘러 말하기, 은유와 상징을 동원하기가 정치인의 덕목인 것처럼 말하는 정치인들이 득세를 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바꿔야 한다. 정치인은 명확하게 자기 의견을 말해야 한다. 정치인의 말하기는 직설이어야 한다. 그래야 국민들이 제대로 판단할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은유와 상징을 직설을 뒷받침하는 말로 쓰는 정치인은 직설을 하지 않았다고 하지 않는다. 고 노회찬 의원 같은 경우를 보라. 그가 사용한 은유와 상징들을 누가 직설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그러한 경우가 아니라 직설을 감추려고 하는 은유, 상징들을 사용하는 정치인, 그것이 문제다.


자기 의도를 감추고 국민의 뜻 운운하는 정치인들 말이다. 그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특히 헌법에 분명히 있는 조항조차 알지 못하는 듯한 말하기를 하는 정치인들은 참... 


최보기 시집을 읽으면서 최근 우리나라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개헌'논의가 떠올랐다. 이들에게 제발 직설하자로 하고 싶을 정도로. 헌법조차도 저들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는 그러한 정치인들에게 이 시를 들려주고 싶다.


  시여, 직설하자


그러니까 말인데

시를 쓰는 시인이


육이오 때 삼팔선에서 죽은 예수가

식은밥 한 덩어리에 운다


저리 써놓으면

뭐가 좀 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그게 무슨 말인지 시인 저도 모르더라.


그러니까 말인데

시는 은유와 상징이라는 법률이

지나치게 상징적인 바,

직설로 가슴을 울리고 뇌를 충격하자.

은유와 상징이 머리카락 꼭꼭 감추는 사이

세상은 직설이 바꾸더라.


'나라를 확 혁명하자'는 말

얼마나 쉽고 간결한가.


그러니까 말이지

시여, 직설하자.


최보기. 가타하리나 개부치 씨. 달아실. 2023년. 18-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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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시 2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8
살만 루시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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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이다. 이제 현실과 상상이 구분되기 시작한다. 아니 상상이 바로 현실에 나타난다. 지브릴의 꿈이 현실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사람들은 지브릴의 과대망상이라고 생각하지만, 지브릴은 아니다.


자신의 꿈이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현실을 통해서 참차와 다시 만나게 되고, 당시 영국에서 자행되고 있던 차별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런 차별에 항의하는 사람들, 이를 환상 속에서 불길로 응징하려는 지브릴. 그리고 그런 지브릴에게 복수를 하려고 하는 참차.


이상하다. 왜 참차는 지브릴에게 복수를 하려 하고 있는가? 자신은 영국인이 되고 싶어하지만 영국인이 될 수 없다는 것에 좌절하고 있는데, 또한 영국인 아내에게 버림받고(?) 있는데, 지브릴은 영국인이 되려는 생각도 없거니와 영국인(유대인이지만 국적인 영국인이고 또한 백인이니)과 사랑을 하고 있으니...


자신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증오를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향해 표출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참차는 자신의 복수를 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아니다.


그들이 아무리 영국인을 비판하고 또 추앙하더라도 참차와 지브릴이 지닌 차이점보다는 비슷한 점이 더 많기 때문이다. 이들은 남들에게 추앙을 받더라도 이방인이다. 


중심부에 들어갈 수 없는, 이들이 중심부에 들어가는 것은 영국이 아니라 인도(파키스탄, 방글라데시 포함, 영국의 식민지가 되기 전의 인도라고 하면 되겠다)에서 가능한 일이다.


참차가 아무리 영국인이 되려 해도 참차는 인도인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참차가 인도로 돌아오는 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한때 악마로 변했던 참차가 인간으로 돌아오는 것.


하지만 지브릴은 돌아와도 살지 못한다. 그는 환상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도에서도 지브릴은 스스로 세상을 뜬다. 스스로 자유를 얻었다고.


이런 결말로 가기까지 지브릴의 꿈을 통해서 종교 이야기가 나온다. 신념.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현대인이 지니고 있는 이성을 버리고 나아가는 사람들. 환상적인 이야기. 그들에게 속삭이는 악마의 시... 타락을 유도하는.


그러나 악마의 시는 인간의 타락을 유도하지만 결국은 인간은 자신의 신념, 생활을 회복하려고 한다. 


이런 과정. 환상적인 과정, 이것을 해설에서는 '마술적 사실주의'라고 했는데, 왜 사실주의냐면 꿈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현실에서도 분명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벌어지는 수많은 차별들.


그러한 차별을 고치려고 하는 사람들. 탄압. 폭력. 시위. 종교적 갈등이 참차를 통해서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고, 지브릴을 통해서는 환상을 통해서 벌어지고 있다. 이렇게 현실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을 작가는 참차와 지브릴을 통해서 제시하고 있는데...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명확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다만 소설을 읽어가면서 자신을 잃고 남이 되려하는 것은 악마의 유혹일지도 모른다는 것, 참차의 모습을 통해 그 점을 보여주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좀더 두고두고 곱씹어봐야 할 소설이다. 작가의 신상 문제는 차치하고, 작품 자체만을 이해하는데도 어려운 소설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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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시 1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7
살만 루시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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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만 루슈디. 오래 전에 들은 이름이다. 이슬람에서 적으로 규정한 사람. 그를 처단하라는 명령이 있었다고... 그렇게 알고 있었다. 단지 소설을 썼을 뿐인데... 그 소설이 바로 이 소설 [악마의 시]다.


어떤 소설이길래 그렇게 극단적인 탄압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 이슬람과 반대로 다른 종교에서는 그에 대해 이러한 반감을 가지지 않았는데...


문득 종교를 종교로 인정한다면, 그 종교의 특성을 인정해야 하고, 그 종교에서 꺼리는 일(표현)은 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을까라는 단순한 생각을 했는데...


종교인이라면 자기 종교를 무시하거나 비판한다는 것을 견딜 수 없으니,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자신들의 종교와 같은 대우를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살만 루슈디가 기독교 신자던가? 


현대에는 기독교와 이슬람이 서로를 배척하는 경향이 있으니, 그렇게 생각하기 쉬운데, 살만 루슈디는 인도의 봄베이(요즘은 뭄바이라고 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봄베이라고 나온다) 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면 그는 무슬림에 대해서 잘 알고 또 무시하지 않을 사람일 테다.


그런 그가 이슬람으로부터 탄압을 받는다? 도대체 이 작품의 어느 부분에서 이슬람의 분노를 샀을까? 소설을 읽을 때 그것을 중점으로 읽으면 안 되는데, 작가의 이력이 그러하니, 자연스레 그 점을 먼저 생각하면서 읽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 그런데 1권을 읽으면서 도대체 어느 부분이 이슬람의 분노를 일으켰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무슬림이 아니라서, 그 종교에 무지해서, 그 종교에서 금기시하는 부분이 어떤 부분인지를 몰라서 그러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1권을 읽으며 이슬람이 분노한 이유를 찾지는 못하겠다. 다만 선지자 무함마드를 작품 속에 등장시켰기 때문인가 하는 생각. 소설 속에서도 잠깐 나오는데 무함마드에 대한 영화를 만들더라도 그를 등장시켜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소설에서는 직접 등장하고, 그것도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 또 당시 사람들에게 악마인 '마훈드'로 불렸다는 표현이 있으니 이런 점에서 선을 넘어섰다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예언자가 되겠다고 산을 오르는 이 고독한 인물도 여기서는 중세부터 아이들을 겁주던 이름, 악마의 동의어, 즉 마훈드라고 칭한다.'(149쪽)


한 종교에서 신성하게 모시는 인물에 대해서 표현할 때 조심해야 하지만, 문학의 역사에서 신을 표현한 경우, 신을 인간처럼 여러 고뇌하는 모습으로 표현한 경우가 있지 않은가. 게다가 고뇌를 딛고 경지에 오르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에게 신성한 존재를 더욱 신성하게 여기게 하지 않나 하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굳이 이 작품에서 작가가 이슬람의 분노를 일으킨 장면을 내가 찾을 필요가 있을까, 그냥 작품을 읽으면 되지 않나 하면서 작품 전개에 중심을 두고 읽기 시작.


이야기는 두 사람과 두 장소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지브릴 파리슈타와 살라딘 참차라는 인물이 인도의 봄베이(뭄바이)와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우연히 같은 비행기를 탄 두 사람. 비행기가 폭발하고, 둘은 살아남는다. 그런데 지브릴은 천사로 변하고, 참차는 악마로 변한다. 지브릴, 가브리엘이라고 할 수 있는 대천사로 변한 그의 꿈에 무함마드도 또 이란의 이맘도 나오는데 그들에게 계시를 주는 모습으로 이야기가 펼쳐지고...


참차는 염소의 형상을 한 존재로 변하는데, 이를 악마라고 할 수 있다. 즉 참차는 악마로 변신해 사람들을 피할 수밖에 없지만 그를 보호해주는 사람들 속에서 지내게 된다. 1권까지는.


1권의 마지막에 참차는 극도의 분노를 보이고, 이 분노로 인해 본래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무서운 증오심을 터뜨린 덕분에 도로 '인간화'된 모양이었다'(452쪽)는 표현으로 참차가 인간으로 돌아온 것으로 1권은 끝나고 2권으로 이어진다.


이 1권에서 지브릴을 통해서는 종교를 통해 당시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사막의 도시에서 이슬람이 펼쳐지는 과정을 '마훈드'와 '아예샤"라는 장에서 보여주고 있다면, '엘오엔 디오엔'과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도시'에서는 현대의 모습, 즉 이민자들의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 독립하면서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와 인도로 분리가 되었는데, 그럼에도 영국인처럼 되고 싶어하는 살라딘 참차의 모습. 이런 참차가 악마로 변하는 것은 바로 영국인을 비롯한 제국주의자들의 눈에는 인도인이나 또는 아프리카계 사람들, 동양인들은 괴물과 같은, 그들과는 다른 인간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그들에게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 그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 살라딘 참차의 변신이고, 이러한 참차를 보호하고 도와주는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경찰, 또 그들에게 언제 어디서든 폭력을 휘두르는 식민주의자들이다. 그러한 두려움이 참차의 변신을 통해 잘 그려지고 있는데...


이러한 폭력에 저항하는 존재는 악마화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무함마드를 '마훈드'라는 악마로 지칭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들의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존재니까. 그들이 악마로 부르고, 또 스스로도 악마로 지칭하는 것은 그들의 인식을 뒤집어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모습일지도 모른다.


'퀴어'라는 말을 전복하여 쓰고, '이반'이라는 말을 쓰는 것처럼 이 소설에서 '악마'는 악마가 아니다. 기존의 틀을 깨는 존재다. 그러니 이러한 악마는 기존 사회에서 소외되고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존중받을 수밖에 없다. 참차의 흉측한 모습에도 그를 꺼리지 않는 인물들의 모습에서 그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하여 '종교'는 지브릴을 통해, 현대 이민자들의 삶은 참차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소설. 서구 사회에 만연한 편견과 차별을 잘 드러내고 있는 소설이다. 2권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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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 건축 - 취약성으로 연결되는 공통의 세계 짓기
데이비드 기슨 지음, 박우진 옮김, 최춘웅 감수 / 가망서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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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을 위한 건축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기 쉬운데, 장애인을 위한 건축은 주로 장애인의 접근성을 중심으로 하는 건축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저자가 말하는 장애 건축은 건축에서 장애를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 즉 접근성의 문제를 넘어선다고 말한다.


'<장애 건축>은 건축, 조경, 도시 계획이 인간의 손상 개념, 그리고 장애인의 경험과 맺는 관계들의 역사에 대한 탐구'(12쪽)라고 하면서, '궁극적으로 <장애 건축>은 우리가 장애인으로서 건축물과 도시의 역사, 이들 공간의 재설계 가능성, 그리고 미래의 건축을 만들어 나가는 일과 맺을 또 다른 관계의 방식을 제안'(13쪽)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장애인을 위한 건축에서 어떻게 하면 장애인도 소외되지 않고 건축에 접근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면, 장애 건축은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고 한다. 그것도 장애를 감추거나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형상화해야 한다는 것.


시작부분에서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이야기하는 장면에서부터 충격이었다. 아크로폴리스. 파르테논 신전, 세계적인 건축 아닌가. 이곳에 장애인도 관람할 수 있도록 엘리베이터를 설치했다고 하는데, 저자는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아크로폴리스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 최근에 파르테논 신전까지 오르는 길은 이 신전에 이르는 과정에서 신성함을 느끼도록 했다고 하는데, 걸어서 올라가면서 느낄 수 있도록 잘 설계한 길이라고, 하지만 저자는 이것으로는 놓치는 것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아크로폴리스가 안고 있는 역사, 거기에 과거에는 장애인들도 파르테논 신전까지 갈 수 있는 길이 있었다는 것. 이런 것들이 개발의 역사에서 사라지고, 지금 장애인을 위한 건축에서는 그러한 역사를 알게 하지 못한다고... 장애 건축은 바로 이러한 역사를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읽으면서 생각해보니 파르테논 신전이다. 신전의 역할이 무엇인가? 기원하러 가는 곳 아닌가. 기원을 한다? 무언가를 기원해야 하는 사람들, 약자 아닌가. 물론 이 신전에 강자들도 갔겠지만, 더 많은 약자들이 무언가를 기원하기 위해서 가지 않았을까. 여기에는 장애인들이 분명 있었을 테니..


당시에도 장애인들이 신전에 가서 빌 수 있도록 분명 길을 내었을 것이다. 그러한 길이 있었음을 저자가 보여주고 있는데, 성당도 마찬가지, 성당에도 장애인들이 분명 갔을 테고, 그러니 그들이 다닐 수 있는 길이 있었을 테니...


단지 접근성만이 아니라 그 건축의 목표에 맞는 형태로 만들어졌음을 생각하면 어찌보면 장애인이 다닐 수 있는 길이 있었음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역사 속으로 묻어버리고 말았으니.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점을 다시 생각하게 됐고.


또한 건축에서 인간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들이 바로 정상/장애의 이분법을 만들어내고 있으며,그러한 이분법에서는 장애인을 위한 접근성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한다.


저자는 이렇게 장애 건축은 장애를 숨기거나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고...'장애를 보존-보전하고 도시화하고, 형상화하고, 구축하는 노력이 결국 장애 건축 그리고 향후 장애의 실천을 촉진한다'(209쪽)고 하면서 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트리아 빈에서 일어났던 빈 정착민 운동을 예로 들고 있다.


상이군인을 비롯한 '빈의 전쟁 생존자들은 ... 자선의 대상인 불우한 국민으로 인식되기를 거부한 채 건축 공간을 생산하고 재상상하는 권리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198쪽)고, 그들이 자신들이 살 집을 스스로 짓고 공동체를 구성해 자립해가는 과정, 그리고 그것을 정부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장애 건축>의 한 예를 보여준다.


이렇게 저자는 <장애 건축>을 통해서 장애인을 '위한' 건축이 아니라 장애와 함께하는 건축임을, 이러한 <장애 건축>은 사회를 바꾸어가는 일임을 보여주고 있다.


<장애 건축>에서 쓰이는 용어가 '장애의 시좌 perspective of disability라는 말인데, 이 말에서 '시좌'는 사물과 사회를 보는 시점이라고 한다. 즉 장애로 사물과 사회를 보고 사회에 참여해야 한다는 말.


이는 정상/장애의 관점을 버리고, 오히려 장애의 시점에서 사회를 바라보고 미래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장애인의 접근성을 중심으로 하는 건축이 어쩌면 시혜로서 장애인들을 동등한 주체로 대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저자의 이런 관점에 동의하면서도 아직 장애인의 접근성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건축이 넘쳐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데, 저자 역시 장애인의 접근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는 기본으로 여기고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고 하니... 


장애인의 접근성조차 힘든 우리나라 곳곳의 건축들을 보면서, 갈 길이 너무 멀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장애 건축>은 커녕 <장애인을 위한 건축>도 제대로 못하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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