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러 문항 킬러 킬러
이기호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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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답이 없다. 

답이 있어서 그것을 찾는 것이 교육이라고 알고 지내왔던 시절이 있었다. 정답은 있다. 그것을 찾기만 하면 된다. 그것도 실수 없이. 시간 안에. 이것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교육 방식이었다.


하지만 '교육'에 답이 있을까? 있는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답을 스스로 만들어가게 하는 것, 따라서 답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일 수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 교육 아니었을까?


답이 여럿이 있다. 복수 정답? 아니다. 복수 정답이라고 해도 그것은 이미 정해진 답을 찾는 과정일 뿐이다. 복수 정답이라는 말이 아니라 정해져 있지 않은 답을 만들도록 해야 하는데, 지금 우리나라 교육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수능을 없애고 자율적으로 학생을 뽑는 대학? 상상하기 힘들다. 공정이라는 벽이 가로막고 있다. 그렇다면 서술형 출제를 하자? 이것 역시 공정이라는 벽에 막힌다. 그 채점이 공정하냐고 하면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학교에서, 초중고에서부터 대학교까지 교육은 늘 정답을 찾는 과정이었다. 답이 있다는 가정에서 비롯한 교육. 그 답을 잘 찾는 사람이 우수한 학생이 되는 현실.


이런 현실에서 교육에 관한 다른 많은 것들이 감춰지거나 억압된다. 오로지 답 찾기. 답을 잘 찾아 높은 점수 기록하기. 이것이 교육의 목표가 된 듯하다. 그러니 사교육이 기승을 부리지. 왜냐? 모두가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나만 학원에 다니지 않으면 뒤처질 것 같다는 느낌. 그래서 모두들 사교육으로 내몰린다. 단지 사교육만일까? 아니, 공교육을 한다는 학교도 마찬가지다. 성적, 성적, 대학 진학... 이것이 학교를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공통의 기준이 있고, 여기에 도달하느냐 마느냐로 학교를 평가하면, 학교의 다양성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학업이라는 면에서 이렇게 획일화를 추구하고 있는데, 교육이 성적만을 획일화할까? 아니, 학생이라는 특정 시기에 거의 모든 사람이 거쳐야 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포기하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


학생이라는 시기에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 기준이 있다는 듯이, 그 기준에 맞지 않는 것은 미뤄두거나 없는 것으로 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지 않은가.


그것이 무엇일까? 다양하다. 너무도 많다. 그 많은 것들 중에 각 소설가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소재로, 주제로 삼아서 소설을 썼다. 그리고 한 권의 소설집으로 엮어냈다.


성적도 있고, 교우관계도 있고, 사교육도 있고, 가족 간의 관계도 있고, 무어라 하나로 정리할 수 없는 수많은 교육에 관련된 일들. 그러한 일들이 이 소설집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소설집에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들이 지금도 진행 중이라는 것이 더욱 안타까운데, 얽히고 설켜 도무지 해결의 실마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우리나라 교육 문제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여전히 대학입시라는 것에 목 매다는 학생들, 여기에 특정 대학에 모든 것을 거는 입시 과정, 그러한 과정 속에서 포기해야 하는 다른 많은 것들.


관계도 관계지만 공부를 잘한다는 말을 성적이 좋다는 말과 같은 뜻으로만 여기게 되는 풍조가 사라지지 않는 것도 문제다.


짧은 소설들이 모여 있는데, 그래서 읽기에 편한데, 읽은 다음에 뒷맛이 개운하지는 않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음에... 소설 속 인물들의 고민이 지속되고 있음에...


인공지능 시대를 앞두고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교육 문제들, 이 소설집을 통해 만나보자. 그리고 그것들이 지속되지 않는 사회를 꿈꾸도록 하자.


다른 소설들도 생각을 많이 하게 하지만 서윤빈이 쓴 '소나기'가 섬뜩하게 다가왔다. 성적을 내기 위해 늘 고1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아이. 우리가 그렇게 만들고 있지 않은지... 오로지 성적이 제일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런 세상을 만들어온 것은 아닌지...


어쩌면 아이들이 다른 학년으로 진학을 해도 그들이 발전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아니라, 성적이라는 쳇바퀴 속에서 계속 같은 곳을 달리게 한 것은 아닌지. 하, 이 소설 속 윤이와 같은 아이가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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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시집을 읽는다. 소설보다 짧은 시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더 긴 시간이 있을 때에야 시집에 손이 간다.


  짧음을 짧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길게 느끼기 위해서, 드러나지 않은 것들을 찾는 시간이 있어야 하기에. 그럼에도 늘 찾기에 실패하고, 도대체 시인은 무엇을 숨겨놓았을까 생각해야 하기에.


  이번에 고른 시집은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다. 하긴 시인을 모르는데, 선택을 하려면 여러 조건을 따져야 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제목이다.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비열한 거리' 중에서. 59쪽) 라니. 이만큼 현대인의 생활을 생각하게 하는 표현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함께 산다고 하지만 현대인들은 각자 살고 있다. 그 각자가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듯하지만, 이상하게도 남을 더 의식한다. 주체로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의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면서 살아간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시인이 제목이 된 구절이 있는 시에서 '비열하게 이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 '예스'라고 말해줘야 한다-고'('비열한 거리'에서. 59쪽)고 표현한 것이 바로 이것 아닐까 했다.


자신이 아니라 남이 바라보는 자신으로 살아가려 하는 것. 현대인의 삶 아닐까. 그만큼 남을 의식하면서 산다는 것인데... 그런 삶을 '기하학적 실수'란 시에서 발견했다.


       기하학적 실수


모든 사랑의 체위는 인간이 지닌 가장 고귀한 감각이다.

그걸 알면서도

사랑을 나눌 때

나는 한 번도 내가 좋아하는 체위를 요구하지 않았다.

말없이 상대가 원하는 대로 따라가기만 했다.


그게 내 사랑의 비극이고

내 사랑이 실패한 이유였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어떤 체위도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

늘 꿈꾸어왔던 나만의 체위는

내 마음속 깊이깊이에만 간직해두고

척추를 타고 흐르는 파르르한 사랑의 경련에만

전율했다는 것.


모든 물이 다 증발하고 난 뒤에 남는 소금처럼

사랑의 체위야말로 그 사람의 유일한 진실임을

모른 체하고 모른 체했다는 것.


김상미,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문학동네. 2017년. 33쪽.


이 시를 보면 사랑을 나눌 때조차도 자신이 아니라 상대를 의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주체로 서지 못하는 사람에게 사랑은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것. 결국 '비열한 거리'에서 말하고 있듯이 이러한 관계는 '아무 관계도 아니'게 된다. 마찬가지로 '예스'만 하는 삶은 상대와 하나가 될 수 없음을 뜻하기도 하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보헤미안 광장에서'란 시에서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보헤미안 광장에서


갑자기 내리는 비

그 비를 피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펼쳐지는 우산들


그러나 우산은 지붕이 아니다

아내 있는 남자가 남편 있는 여자가

몰래 잠깐 피우는 바람 같은 것이다


갑자기 내린 비가 멎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그러니 사랑을 하려거든 

진짜 돌이킬 수 없는 사랑을 하려거든

한 지붕 아래에서 하라


갑자기 내린 비는 금방 지나가고

젖은 우산에 묻은 빗방울들은

우산을 접는 순간 다 말라버린다


김상미,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문학동네. 2017년.40쪽.


이 시에서 우산이 상대에게 맞춰주는 사랑이라면, '한 지붕 아래에서 하는 사랑'은 나를 잃지 않으면서 상대 또한 인정하는, 다르면서도 함께하는 그런 삶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한 지붕 아래서 우리는 함께 밥을 먹으며 살아가게 된다. 희노애락을 함께 겪으면서... 오로지 상대에게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또 상대를 나에게만 맞추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따로 또 같이 사는 장소로서의 한 지붕 아래, 그러한 곳에서 하는 사랑은 자신을 주체로 서게 하고, 상대 역시 주체로 서게 하는 사랑이지 않을까 한다.


이런 곳에서 먹는 밥, 그것은 우리의 사랑을 확인하게 해주는, 또는 사랑을 지속시키는 '성기'와 같지 않을까. 하여 시인이 '밥은 삶의 성기다'(밥의 힘'에서. 96쪽)라고 표현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하여 이 시들을 읽으면서 상대의 눈에 비친 나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당당하게 살 때에야 비로소 상대와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음을, 이 때 먹는 밥이, 시인이 이 시에서 말한 것과는 다르지만, 두 시와 연결지으면, 삶의 성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식구(食口)라는 말. 사랑의 지속. 그것 또한 밥심아니겠는가. 밥심은 곧 사랑이다. 주체로서의 당당한 사랑. 이런 생각을 하게 한 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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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 - 강순희 말하고 유시민 듣다
유시민.김세라 지음 / 은빛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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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최후의 보루.


독재정권에 맞선 사람들이 그나마 기대었던 곳, 법원. 하지만 그런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렸던 한국 현대 법원.


지금 법원은 삼권분립이라는 이름 아래 제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고 있을까? 행정부에 휘둘리지 않고 정의에 따라, 법에 따라 재판을 하고 있을까?


그것을 하라고 삼권분립 운운하는 것 아닌가. 당당하게 정권에 맞서 진실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고. 그런데 정의가 눈 멀면 어떻게 되는지, 사법부가 독립되지 않고 저들 권리는 주장하되, 법과 정의를 지켜야 할 의무는 소홀히 할 때 그때 일어날 수 있는 비극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보여주는 사건.


인혁당재건위 사건. 있지도 않은 당을 만들어 사건을 조작하려 했을 때 그나마 몇몇 검사들은 기소할 수 없다고 사표를 냈다고 하는 것이 1차 인혁당 사건. 그래, 1차 인혁당 사건이 조작이었고, 그 정당은 있지도 않았는데, 세상에 있지도 않는 정당을 재건한다고 하는 2차 인혁당재건위 사건이라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온갖 조작 증거에는 눈을 감고, 피해자들의 호소에는 귀를 막고, 정권의 입맛에 맞게 재판을 진행한 사법부. 


그래서 세계는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인해 그들이 희생당한 날(1975년 4월 9일)을 사법살인의 날이라 한다고, 세계에 부끄러운 이름을 새긴 한국의 사법부. 그들은 반성했을까? 과연 그럴까?


이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희생자들이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기금을 출연해서 만든 단체가 4.9통일평화재단이라고 한다. 4월 9일... 참 우리나라 4월엔 일도 많다. 3일, 16일, 19일. 어느 날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그 날들. 여기에 9일을 추가한다. 알고는 있었지만 잊고 있던 날을.


그 계기가 바로 이 책이다.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유가족인 강순희 여사의 기록. 93세가 되어 본인이 세상을 뜨기 전에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는. 자신이 살아온 역사가 바로 한국의 현대사라고... 그래서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더 늦기 전에 남기고 싶었다고. 


이런 마음으로, 유시민 작가에게 부탁해서 그 전에 했던 인터뷰 자료와 또 새로 인터뷰한 내용, 그리고 역사적 사실들을 자료로 해서 유시민 작가가 재구성한 기록이 바로 이 책이다. 그 사법살인을 생생하게 폭로하고 있는 책이라고 해도 좋다.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희생된 우홍선의 부인. 그래 이 사건으로 희생된 8명의 이름을 적어본다. 편의상 가나다 순으로 적으면 김용원, 도예종, 서도원, 송상진, 여정남, 우홍선 이수병, 하재완 이렇게 여덟 분이다. 


이 책은 이 분들 중 우홍선의 부인 강순희 여사의 말을 중심으로, 유시민 작가가 인터뷰한 형식으로 이루어졌지만, 이 사이사이에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이 나온다. 그들에 대한 간략한 설명도 이어지고 있으니...


읽으면서 독재정권, 그 숨막히는 시대에도 정의를 위해서 나섰던 사람들이 있었음을, 결코 조작사건에 모두가 넘어간 것은 아니었음을 강순희 여사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래서 광주민주화운동을 거쳐 87년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싶다.


이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 독재가 성립하기 힘든 대한민국이 만들어지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고.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강순희 여사가 펑펑 울었다는데, 기자가 왜 무죄가 되었는데 우느냐고 한 어리석은 질문. 와, 이게 기자들의 수준이었다니... 아니, 자신이 겪지 않았어도 그 사건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이라도 있었으면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 텐데...


무죄로 밝혀졌는데 이미 사형당해 돌아가신 분들. 그 분들을 생각하면 더 억울하고 분통한 일 아니겠는가. 그러니 그것은 기쁨의 눈물이 아니라 억울함의 눈물이었을 텐데... 독재정권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그 무죄 판결을 통해 함께 분노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고 언론이 (적어도 자신들이 제4부 권력이라고 여긴다면)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어야 하는데...


왜 우느냐는 질문을 하다니, 참... 이 책에 나와 있는 내용을 보자. 


유시민 : 2007년 1월 23일 재심 무죄 판결이 났어요. 어떠셨어요?

강순희 : 법정 나오면서 막 울었어. 그런데 기자들이 이겼는데 왜 우냐고, 그 따위로 묻는 거야. '이겼으니까 더 억울하지! 이렇게 죄 없는 사람을 죽였으니까!' 그랬는데, 아니 어떻게 기자들이 그렇게 뭘 몰라? (237쪽)


기가막혔을 것이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그간 꿋꿋하게 남편의 무죄를 주장해왔고, 또 조작임을 밝혔던 강순희 여사.


그들과 함께했던 많은 성직자들, 변호사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 적극적으로 나서진 못해도 마음으로 응원했던 사람들도 있었으리라. 강순희 여사의 말에 의하면 어려운 상황에서도 도와준 사람들이 꽤 있었다고 하니까.


또한 가족들 역시 꿋꿋하게 살려고 노력을 했다고 하니까. 그럼에도 국가의 사법살인. 사법부의 정의를 저버린 행동 등을 잊어서는 안 된다. 독재자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국가권력을 동원해 사건을 조작하고, 거기에 동조해 사법부가 판결을 내리는 기가 막히는 과거의 현실.


정말 부끄러워해야 한다. 당시 재판관들, 검사들, 그리고 중앙정보부원들(지금 국가정보원). 그래야 하는데, 이들이 끝까지 뉘우쳤다는 얘기를 들어보지는 못했으니, 참.


지금에 와서 늦었지만 그래도 재심을 열어 무죄로 판결한 것이, 국가가 배상을 한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하지만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강순희 여사가 자신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 국민들이 눈 감고, 귀 막고 있으면 독재가 고개를 내밀 수 있다는 것.


사법부, 제대로 독립하지 못하면 독재정권의 꼭두각시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 강순희 여사의 말에도 나오지만 언론 역시 제대로 정부를 감시하지 못하면 받아쓰기만을 하는 또 하나의 권력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강순희 여사가 기자들에게 호통을 친 내용, 당신들은 왜 이 사건에 대해서 보도를 하지 않는가. 이렇게 조작되었다는 내용이 밝혀졌는데도... 그래, 언론이 눈을 감고, 사법부가 정의의 편에 서지 않으면 독재가 눈을 떠서 활동을 시작한다. 그 점을 강순희 여사의 증언이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강순희 여사 한 사람의 일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현대사를 보여주는 책이다. 한국 현대사를 살아온 사람, 특히 독재시대를 거쳐온 사람이 후대에게 그러한 역사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보여주는 책.


귀한 책이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그리고 그 잘났다고 하는, 영감님이라는 소리를 듣는 판사님들부터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기자님들도 마찬가지고... 자신들이 제대로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정권이 어떻게 제 멋대로 하는지 강순희 여사의 책을 통해서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테니.


무어라 말해도 역시 시민들이 깨어 있어야 한다. 시민들이 깨어 있으면 법원이 눈을 감지 못하고, 언론이 침묵할 수가 없다. 그들을 눈 뜨고, 귀 열고, 입을 열게 하는 존재들, 우리 시민들이다. 그러니 시민들인 우리들이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일어났던 사법살인을 고발하는 이 책, 읽어야 한다. 알아야 막을 수 있다.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참고로... 인혁당재건위 사건 8인의 약전이라고 [다시, 봄은 왔으나]라는 책이 있다고 한다. 아직 읽어보지 못했는데, 읽어봐야겠단 생각. 그리고 소설가 김원일이 쓴 [푸른 혼]이라는 소설이 이 사건의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물론 실명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이름 석 자 가운데 한 글자만 바꿔서 썼으니... 이 소설을 읽어봐도 좋을 듯하다. 


강순희 여사의 이 책과 더불어 함께 읽으면 좋겠단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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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절(들)
클레르 마랭 지음, 류재화 옮김 / 사람in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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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어려운 이야기를 할 것 같은 제목이지만 아니다. 단절이 우리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할 수 있음을 알려주는 책이다.


사실 우리 삶은 하나로 주욱 이어지지 않았다. 여러 단절들이 모여 삶을 이룬다. 생애 주기라는 말을 쓰는 것 자체가 바로 단절들의 이어짐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저자도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단절을 경험한다. 아니 단절이 없으면 태어나지 못한다. 사실 태어나기 전에 잉태하는 과정을 봐도 그렇다. 단절 아니겠는가. 남자의 몸에서 단절되어 나온 정자가 난자와 만나 새로운 출발을 하는 것.


자궁 속에서 단절을 넘어 새로운 출발을 하지만 여기에 계속 머물러서는 안 된다. 또다시 단절해야 한다. 이번엔 자궁 밖으로 나와야 한다. 탯줄로 이어진 것을 끊어야 한다. 단절이다. 이 단절이 삶으로 이어진다. 새로운 삶.


그러므로 단절은 삶이다. 단절들이 모여 우리 삶을 이룬다. 그리고 마지막 단절은 죽음이다. 죽음은 한 개체로서의 완전한 단절이지만 이 개체의 삶은 다른 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새로운 모습으로.


죽음이라는 단절이 인간이라는 종 전체를 보면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한다.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준다. 단절이 없다면 생각하지 못했을 것을.


그래서 인간의 삶 자체는 단절들의 연속이다. 우리가 늘 보는 시계를 보라. 시간은 단절이다. 연속이 아니다. 단절들이 순서대로 이어질 뿐이다. 이 시간을 좀더 길게 끌며 단절이 되면 계절이 된다. 계절 역시 단절이다. 그렇지만 이 단절이 끝이 아니다. 다른 단절을 이끈다. 계절을 더 길게 끌자. 바로 생애 주기가 된다. 유아기, 청소년기, 청년기, 중장년기, 노년기 등등.


더 길게 늘려볼까? 바로 인간의 역사가 된다.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단지 시간만? 아니다. 공간 역시 단절들이다. 이 단절들이 모여 지구를 이루고, 우주를 이룬다. 우주 역시 처음에 단절로부터 시작했다. 나중에 팽창하다 다시 수축해서 원점으로 돌아간다면(과연 그런지는 과학자가 아니라 확신할 수는 없다) 역시 단절들의 연속이다.


저자는 바로 이러한 단절을 단지 상실이라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잃어야 얻는 것이 있다. 비워야 채울 수 있듯이.


당장은 단절이 괴롭고 힘들다. 고통스럽다. 맞이하고 싶지 않다.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것이 단절이다. 하지만 단절을 피하기만 하면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다. 바로 자신을 알 수 없기 때문. 즉 단절이 없다면 자신도 없다. 자신이 없는데 어떻게 자신과 다른 존재를 단절시킬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삶에 단절은 필수적이다. 피할 수 없는 단절. 이 단절을 통해서 성장해갈 수 있음을 저자는 여러 사례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단절을 하지 못했을 때 더욱 괴로워질 수 있음을 '불면증'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불면증은 내려놓지 못함이다. ... 잠들지 않는 의식은 과거를 무한정 늘린다. 과거가 사라지는 것을 거부한다. 불면증은 현재를 확장하고, 과거와의 단절을 거부하는 통에, 헛된 노력을 하는 줄도 모르고 지쳐간다.'(183쪽)고...


이것은 과거와 단절하지 못한 모습이다. 단절을 해야 하는데, 단절을 하지 못해 괴로움에 처한 상태를 보여준다. 그렇기에 '과거가 현재를 장악하더라도 한계를 정하고, 살아있는 순간을 과거가 침범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182쪽)고 한다. 이것이 바로 '단절'이다.


따라서 우리는 단절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저자는 아니라고 한다. 우리 삶에서 이러한 단절들이 없다면 주체적인 삶이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절은 결국 주체를 찾아가는 방법이다.


이런 극단적인 예가 폭력을 휘두르는 부모를 둔 아이다. 그 아이는 부모와 단절하지 못하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죽음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한다. 그래서 이 아이에게는 단절이 반드시 필요하다. 부모로부터의 단절. 


남과는 다른 나를 찾아가는 과정, 내 삶을 살아가는 과정, 그 과정 속에서 겪게 되는 수많은 단절들. 이 단절들을 다름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삶을 지속해가는 과정. 사람들이 다 똑같아서는 안 되니까. 똑같다면 이런 단절이 생길 일도 없겠지만, 자아라는 것도 없게 될 테니까.


읽다가 뜬금없이 [장자]에서 '혼돈'에 관한 글이 떠올랐다. 이 책과 연결될 것 같지 않은데, 그것은 단절이 아니라 같음을 이야기하는데, 결국은 같은 이야기 아닌가 하는.


혼돈에게 대접을 잘 받은 두 바다의 왕이 자신들에게는 있지만 혼돈에게는 없는 구멍을 만들어주려 한다. 하루 하루 구멍을 만들자 결국 혼돈이 죽어버렸다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혼돈은 이미 다른 바다의 왕들과 다르다. 그들과 단절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이 이런 단절을 부정하고 같아져야 한다고 한다. 즉 단절을 거부한다. 그 결과가 바로 혼돈의 죽음이다. (단절을 다름이라고 한다면)


단절은 그런 것이다. 죽음이 최후의 단절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생물이 피해갈 수 없는(불멸을 추구하는 실리콘밸리의 노력이 진행 중이지만...) 숙명이라면 죽음의 당사자는 빼고, 이 죽음으로 인한 단절을 겪는 사람들을 비롯해 살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단절들, 태어남에서부터 사춘기 때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것, 연인과 사귀다 헤어지거나 부부가 이혼하는 경우, 질병 특히 치매와 같은 질병으로 자신을 잃어가는 것 등등이 바로 단절이다.


이 중에 인생에서 겪지 않을 수도 있는 일도 있지만 겪는다고 해서 삶을 포기하거나 무너져 내려서는 안 될 단절들이다. 이 단절들 속에 나란 존재는 단일한 하나만의 존재가 아니라 여러 존재가 있음을, 하여 나 자신조차도 단절되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저자는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단절들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그러면서 결론은 참 단순하다. 각 단절의 순간들은 고통스러울지 몰라도 그 속에서조차 우리는 '기쁨'을 찾을 수 있다는 것. 아니, 기쁨을 찾아야 한다는 것. 저자는 이렇게 말하면서 책을 끝내고 있다.


'삶의 위험을 감수하는 것, 그것은 가능한 모든 기쁨을 느끼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비극적인 밤을 보낼 때조차, 자신 안에 깃든 기쁨의 작은 불꽃을 기억하는 힘을 갖기.'(195쪽) 


그렇다. 우리가 삶에서 겪는 단절들은 그것이 끝이 아니라 또다른 출발을 의미한다. 그러니 단절들 속에서도 기쁨을 찾을 수 있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기쁨을.


너무도 당연하게 들리는 말이지만 단절들을 통해 얻은 상처들이 삶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할 수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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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의 시 (표지 3종 중 랜덤) - (팔레스타인을 위한/향한)
김혜순 외 지음 / 얼굴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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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공존을 향한 시인들의 목소리. 팔레스타인을 향해 응답한 시들. 이 시들로 우리는 팔레스타인과 연결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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