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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 - 강순희 말하고 유시민 듣다
유시민.김세라 지음 / 은빛 / 2026년 3월
평점 :
정의. 최후의 보루.
독재정권에 맞선 사람들이 그나마 기대었던 곳, 법원. 하지만 그런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렸던 한국 현대 법원.
지금 법원은 삼권분립이라는 이름 아래 제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고 있을까? 행정부에 휘둘리지 않고 정의에 따라, 법에 따라 재판을 하고 있을까?
그것을 하라고 삼권분립 운운하는 것 아닌가. 당당하게 정권에 맞서 진실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고. 그런데 정의가 눈 멀면 어떻게 되는지, 사법부가 독립되지 않고 저들 권리는 주장하되, 법과 정의를 지켜야 할 의무는 소홀히 할 때 그때 일어날 수 있는 비극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보여주는 사건.
인혁당재건위 사건. 있지도 않은 당을 만들어 사건을 조작하려 했을 때 그나마 몇몇 검사들은 기소할 수 없다고 사표를 냈다고 하는 것이 1차 인혁당 사건. 그래, 1차 인혁당 사건이 조작이었고, 그 정당은 있지도 않았는데, 세상에 있지도 않는 정당을 재건한다고 하는 2차 인혁당재건위 사건이라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온갖 조작 증거에는 눈을 감고, 피해자들의 호소에는 귀를 막고, 정권의 입맛에 맞게 재판을 진행한 사법부.
그래서 세계는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인해 그들이 희생당한 날(1975년 4월 9일)을 사법살인의 날이라 한다고, 세계에 부끄러운 이름을 새긴 한국의 사법부. 그들은 반성했을까? 과연 그럴까?
이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희생자들이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기금을 출연해서 만든 단체가 4.9통일평화재단이라고 한다. 4월 9일... 참 우리나라 4월엔 일도 많다. 3일, 16일, 19일. 어느 날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그 날들. 여기에 9일을 추가한다. 알고는 있었지만 잊고 있던 날을.
그 계기가 바로 이 책이다.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유가족인 강순희 여사의 기록. 93세가 되어 본인이 세상을 뜨기 전에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는. 자신이 살아온 역사가 바로 한국의 현대사라고... 그래서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더 늦기 전에 남기고 싶었다고.
이런 마음으로, 유시민 작가에게 부탁해서 그 전에 했던 인터뷰 자료와 또 새로 인터뷰한 내용, 그리고 역사적 사실들을 자료로 해서 유시민 작가가 재구성한 기록이 바로 이 책이다. 그 사법살인을 생생하게 폭로하고 있는 책이라고 해도 좋다.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희생된 우홍선의 부인. 그래 이 사건으로 희생된 8명의 이름을 적어본다. 편의상 가나다 순으로 적으면 김용원, 도예종, 서도원, 송상진, 여정남, 우홍선 이수병, 하재완 이렇게 여덟 분이다.
이 책은 이 분들 중 우홍선의 부인 강순희 여사의 말을 중심으로, 유시민 작가가 인터뷰한 형식으로 이루어졌지만, 이 사이사이에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이 나온다. 그들에 대한 간략한 설명도 이어지고 있으니...
읽으면서 독재정권, 그 숨막히는 시대에도 정의를 위해서 나섰던 사람들이 있었음을, 결코 조작사건에 모두가 넘어간 것은 아니었음을 강순희 여사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래서 광주민주화운동을 거쳐 87년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싶다.
이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 독재가 성립하기 힘든 대한민국이 만들어지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고.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강순희 여사가 펑펑 울었다는데, 기자가 왜 무죄가 되었는데 우느냐고 한 어리석은 질문. 와, 이게 기자들의 수준이었다니... 아니, 자신이 겪지 않았어도 그 사건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이라도 있었으면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 텐데...
무죄로 밝혀졌는데 이미 사형당해 돌아가신 분들. 그 분들을 생각하면 더 억울하고 분통한 일 아니겠는가. 그러니 그것은 기쁨의 눈물이 아니라 억울함의 눈물이었을 텐데... 독재정권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그 무죄 판결을 통해 함께 분노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고 언론이 (적어도 자신들이 제4부 권력이라고 여긴다면)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어야 하는데...
왜 우느냐는 질문을 하다니, 참... 이 책에 나와 있는 내용을 보자.
유시민 : 2007년 1월 23일 재심 무죄 판결이 났어요. 어떠셨어요?
강순희 : 법정 나오면서 막 울었어. 그런데 기자들이 이겼는데 왜 우냐고, 그 따위로 묻는 거야. '이겼으니까 더 억울하지! 이렇게 죄 없는 사람을 죽였으니까!' 그랬는데, 아니 어떻게 기자들이 그렇게 뭘 몰라? (237쪽)
기가막혔을 것이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그간 꿋꿋하게 남편의 무죄를 주장해왔고, 또 조작임을 밝혔던 강순희 여사.
그들과 함께했던 많은 성직자들, 변호사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 적극적으로 나서진 못해도 마음으로 응원했던 사람들도 있었으리라. 강순희 여사의 말에 의하면 어려운 상황에서도 도와준 사람들이 꽤 있었다고 하니까.
또한 가족들 역시 꿋꿋하게 살려고 노력을 했다고 하니까. 그럼에도 국가의 사법살인. 사법부의 정의를 저버린 행동 등을 잊어서는 안 된다. 독재자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국가권력을 동원해 사건을 조작하고, 거기에 동조해 사법부가 판결을 내리는 기가 막히는 과거의 현실.
정말 부끄러워해야 한다. 당시 재판관들, 검사들, 그리고 중앙정보부원들(지금 국가정보원). 그래야 하는데, 이들이 끝까지 뉘우쳤다는 얘기를 들어보지는 못했으니, 참.
지금에 와서 늦었지만 그래도 재심을 열어 무죄로 판결한 것이, 국가가 배상을 한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하지만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강순희 여사가 자신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 국민들이 눈 감고, 귀 막고 있으면 독재가 고개를 내밀 수 있다는 것.
사법부, 제대로 독립하지 못하면 독재정권의 꼭두각시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 강순희 여사의 말에도 나오지만 언론 역시 제대로 정부를 감시하지 못하면 받아쓰기만을 하는 또 하나의 권력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강순희 여사가 기자들에게 호통을 친 내용, 당신들은 왜 이 사건에 대해서 보도를 하지 않는가. 이렇게 조작되었다는 내용이 밝혀졌는데도... 그래, 언론이 눈을 감고, 사법부가 정의의 편에 서지 않으면 독재가 눈을 떠서 활동을 시작한다. 그 점을 강순희 여사의 증언이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강순희 여사 한 사람의 일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현대사를 보여주는 책이다. 한국 현대사를 살아온 사람, 특히 독재시대를 거쳐온 사람이 후대에게 그러한 역사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보여주는 책.
귀한 책이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그리고 그 잘났다고 하는, 영감님이라는 소리를 듣는 판사님들부터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기자님들도 마찬가지고... 자신들이 제대로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정권이 어떻게 제 멋대로 하는지 강순희 여사의 책을 통해서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테니.
무어라 말해도 역시 시민들이 깨어 있어야 한다. 시민들이 깨어 있으면 법원이 눈을 감지 못하고, 언론이 침묵할 수가 없다. 그들을 눈 뜨고, 귀 열고, 입을 열게 하는 존재들, 우리 시민들이다. 그러니 시민들인 우리들이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일어났던 사법살인을 고발하는 이 책, 읽어야 한다. 알아야 막을 수 있다.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참고로... 인혁당재건위 사건 8인의 약전이라고 [다시, 봄은 왔으나]라는 책이 있다고 한다. 아직 읽어보지 못했는데, 읽어봐야겠단 생각. 그리고 소설가 김원일이 쓴 [푸른 혼]이라는 소설이 이 사건의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물론 실명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이름 석 자 가운데 한 글자만 바꿔서 썼으니... 이 소설을 읽어봐도 좋을 듯하다.
강순희 여사의 이 책과 더불어 함께 읽으면 좋겠단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