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는 어디서 태어나는가
신시어 밀러 이드리스 지음, 조인석 옮김 / 동아시아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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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적으로 극우가 세력을 얻고 있다. 보통 좌와 우로 나눌 때, 좌는 과거나 현재가 만족스럽지 않기에 미래에는 과거-현재가 아닌 다른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 또는 집단이라 하고, 우는 과거-현재가 만족스럽기에 과거-현재를 유지하려고 하는 사람 또는 집단을 말한다.


그런데 극우라고 하면 문제가 좀 달라진다. 물론 극좌도 마찬가지다. 극단으로 치우치면 문제가 생기는데, 사람이라는 존재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허점이 있고, 이 허점들이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사회를 이룬다.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면서 생활을 해 나가는 것이 인간인데, 그런데 극단으로 치우치면 나는 허점이 없는 존재가 되고, 상대는 허점이 많은 존재가 되니,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사이가 된다. 즉, 나에게 방해가 되는 존재로 상대를 규정하게 되는 것이다.


누가 말했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사회에는 좌도 있고 우도 있다. 이런 좌우가 서로 공존하면서 사회를 이루고 살아왔다. 그렇게 인간은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치지 않았는데, 이는 서로가 살 만하다고 느꼈을 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살기 힘들다고 할 때 원인을 찾기 시작한다.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남에게서. 그러면서 남을 배척하기 시작한다. 저들만 없었다면, 또는 없으면 내 삶이 더 나아질 텐데. 단순히 생각에만 그치지 않는다. 상대를 몰아내려 한다. 몰아내기 전에 먼저 그들에게 위협을 가한다. 혐오, 증오 표현. 그리고 폭력까지.


이렇게 되면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이제 상대는 나와 어울릴 수 없는 존재, 배척해야만 하는 존재가 된다. 이들이 있는 한 내 삶은 더욱 힘들어진다. 이제 내 삶에서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함께하기 시작한다. 개인에서 집단으로. 


집단이 되면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자신은 이미 그 집단에 빠져 나오기 힘들어진다. 혐오감정은 더욱 거세지고, 폭력으로 나아가기는 더욱 쉬워진다. 결국 폭력으로 폭발한다. 이렇게 세계 곳곳에서 증오 폭력이 발생하고 있다.


이 중 많은 폭력이 '극우'에게서 나오고 있는데, 극우는 과거의 삶을 회상하면서 지금 이렇게 된 데에는 상대에게 책임이 있다고, 그들을 몰아내고 과거의 우리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는 쪽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극우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의 영광을 현재에 구현하고자 한다. 남을 배척하면서. 이렇게 민주주의는 무너진다. 민주주의는 포용과 타협, 다양성의 조화 아니던가. 그런데 '극우'는 이러한 다양성을 부정한다. 오로지 순수성, 단일성을 주장한다.


이런 순수성-단일성을 위해서 상대는 배척해야만 한다. 그러면서 온갖 논리를 끌어온다. 과학까지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재단한다. 사실을 왜곡한다. 책임을 상대에게 떠넘긴다. 그러면서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유머로 위장한다.


혐오 표현을 하면서도 남들이 문제 삼으면 농담이었어요라고 한다. 그런 장치들을 마련하고 있다. 이는 우리도 많이 겪은 일 아닌가? 단지 재미로요 라는 말들을 얼마나 많이 하는가. 하지만 이는 재미가 아니다. 알고 있다. 이들도. 혐오라는 것을. 다만 빠져나가기 위해서 이중으로 해석할 수 있는 표현을 하는 것이다. 남들은 다 혐오 표현이라는 것을 알지만, 이중의 뜻이 담겨 있기에 넘어갈 수 있다는 듯이.


이런 '극우'가 갈수록 힘이 세지고 있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다. 미국에서는 더 심한가 보다. 이 책을 보니, 미국의 극우는 정도를 넘어섰다. 하긴 그들 나라는 총기를 자유롭게 소지할 수 있는 나라지. 미국 극우들 중에는 백인들만의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이런 극우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 책은 그 지점을 추적한다. 극우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극우들이 활동하는 공간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특정한 공간에서만 극우들이 활동한다면 해결은 간단하다. 그 공간에 집중하면 된다.


한데, 이 책을 보니, 아니다. 극우들은 자신들의 이념을 사람들에게 주입하기 위해 일상으로 이미 들어왔다. 그것도 세련된 외양을 하고서. 이는 극우들이 의류 산업에까지 진출해서, 의류를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홍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음식 쪽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여기에 스포츠 특히 격투기 분야에 극우들의 진출이, 또 청소년(청년)들을 극우로 끌어들이고 있다고 한다. 남성성을 강조하면서, 신체의 강인함을 키워야 한다면서, 그러면서 그것이 멋있는 남성이라고 하면서. 단지 신체의 강인함을 키우는 것이라면 문제가 안 되겠지만, 그 과정 속에서 극우 이념을 퍼뜨린다고 하니...


게임도 마찬가지고, 온라인 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단체들은 이미 우리 사회에서도 문제가 되니 언급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을 테고...


더욱 심각한 것은 학교, 대학교를 극우들이 공격한다는 것이다. 진보적인 교수, 학생들을 위협하거나 또는 자신들의 주장을 홍보하는 장소로 삼고, 대학가가 분열되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인식하게 함으로써 지식을 신뢰할 수 없게 하고, 지식의 권위를 떨어뜨리려 한다고 한다.


또한 자신들의 주장을 펼칠 수 있는 전문가(?이들에게 과연 전문가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지 의문인데, 교수나 또는 박사, 석사 등의 자격증을 지닌 인간들이라고 해야 하나?)들을 양성해 자신들의 논리를 공론장으로 끌고 온다고 한다.


극우 논리를 지식의 공론장으로 끌고 온 것, 우리나라도 그렇지 않은가. 이렇게 되면 소수의 주장이었던 또는 드러나지 않았던 극우 논리가 공개적으로 표명된다고 한다. 주류 언론이라고 할 수 있는 방송을 통해서도 극우의 주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면 자연스레 정치계로 넘어간다.


즉 주류 정치계에 극우가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극우는 자신들의 영역을 조금씩 조금씩 넓혀간다고 한다.


읽으면서 이거 무섭네. 이렇게 해서 세계에서 또 우리나라에서도 극우가 자신들의 입지를 넓혀왔구나 하는 생각. 이런 극우들이 더 힘을 얻게 해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는데...


그런데도 해결책은 조금 아쉽다. 물론 이렇게밖에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노력할 수밖에 없다는 것.


독일의 한 정치인이 했다는 말.


"모든 사람이 자신이 사는 나라에서 편안함으로 느끼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288쪽)


그것은 민주주의가 강화되어야 한다. 아니 민주주의가 정착이 되어야 한다. 하여 저자는 '극단주의 예방과 민주주의 보호가 본질적으로 맞물려 있다는 인식에서 찾아야 한다. ... 모든 개인이 자신의 일상적인 공간과 삶의 현장에서 포용성을 증진하고,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하며, 인종차별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이에 맞서 싸워야 할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자각하도록 해야 한다.'(311-312쪽)고 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또 가정에서 해야 할 일들이 많다. 그것이 가능하도록 제도를 정비해야 하고... 저자는 책의 끝부분에서 독일의 사례를 들고 있는데, 참조할 부분이 많지만, 과연 우리나라에서 가능할까 하는 지점도 있다. 


무엇보다도 먹고 살 수 있다는 안정감, 미래에도 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삶의 예측가능성이 확보되어야 하지 않을까? 자신의 현재가 만족스럽지 못하고, 미래가 불안하면 그 책임을 다른 이에게 전가하기 쉬우니 말이다. 그러니 우선 우리들의 생활을 살펴야 한다.


생활이 안정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누군가의 부유함이 누군가의 궁핍으로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했다. 생활이 안정되고, 미래가 예측 가능하면 '극단'이 설 자리는 자연스레 없어진다.


이렇게 서로가 살 수 있는 사회로 가기 위한 방편, 그것이 민주주의 아니었던가. 남을 딛고 서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서는 것. 그러니 '극우'에 대해 생각할 때는 '민주주의'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 민주주의가 위태로울 때 '극단'이 준동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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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스하다. 시집을 읽으면서 봄의 따스함을 느끼게 된다. 화려하지는 않아도 시들 한편 한편이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마치 시집 제목이 된 시 '아침은 생각한다'처럼, 자신만이 아니라 누군가를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 그런 마음들이 이 시집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자연스레 읽으면서 그러한 마음에 동화가 된다. 많은 말이 필요없다. 그만큼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짧다. 짧지만 오래 간다.


  그 중 만난 시. 제비. 봄이 오면 우리나라를 찾아오는 새. 예전엔 처마 밑에 집을 짓고 우리와 함께 살던 새.


  우연히 원주에 있는 '빙하미술관'에 갔다가 그곳에 집을 짓고 사는 제비들을 만나게 되었다. 반갑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제비와 제비들이구나. 새끼들에게 부지런히 먹이를 날라주는 어미-아비 제비들.


집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먹이를 보채는 새끼 제비들. 그런 제비들을 본 행복. 문태준의 시집에서 '제비1, 제비2'를 만나고 그곳에서 본 제비들이 생각났다. 


지금쯤 새끼들은 자라서 스스로 날개짓을 하며 먹이를 찾아다니겠지. 그러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제비집을 두고 다시 떠나가겠지. 그렇게 그들의 삶이 반복되겠지.


제비 1


  제비를 뒤쫓아 날아가리 광평빌라 제일 아래층 모서리에 지은 제비집으로 날아가리 콘크리트 벽 모서리에 지은 당신의 집으로 날아가리 당신의 진흙집으로 날아가리 달무리 같은 집으로 날아가리 날아가 엄마, 하고 불러보리 둥지에서 부리를 족족 벌리고 먹이를 기다리던 딸 넷과 아들 하나를 기른 내 엄마 


문태준, 아침은 생각한다. 창비. 2022년. 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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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 2


  제비 가족을 보러 광평빌라에 갔다 제비집에 제비들이 없었다 내부가 대낮처럼 텅 비었다. 사랑의 둘레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 세계 곳곳은 진흙을 쌓아 지은 제비집 아닌가 우리에게 사랑이 없다면야 제비집에 어떻게 오목하게 환하게 상공(上空)이 담기겠는가 제비집을 떠나 제비들은 흰 빛과 치렁치렁한 빗속과 엉긴 안개와 무너지는 노을 아래를 날아가고 있을 것이다 제비야, 내 언젠가 맑은 물과 꿈 위에 띄워놓은 꽃 같은 제비야


문태준, 아침은 생각한다. 창비. 2022년. 41쪽




<원주 빙하미술관에 자리잡은 제비 가족과 제비집. 2026년 6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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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 없는 단어는 없다 - 읽기만 해도 어휘력이 늘고 말과 글에 깊이가 더해지는 책
장인용 지음 / 그래도봄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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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은 책상이다]라는 소설을 생각한다. 제 멋대로 단어의 뜻을 바꿔 쓰는 사람 이야기. 그는 왜 그 단어를 이렇게 써야 하지? 란 생각을 했다. 내 맘대로 그 단어를 쓰면 어떨까 하면서 자기가 만든 의미로 단어들을 쓴다.


그에게 그 단어들은 사연이 있지만, 문제는 이미 그 단어가 지니고 있던 사연을 무시하고 다른 사연을 덧붙인 데 있다.


남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단어. 그러면 소통이 되지 않는다. 고립될 수밖에 없다. 자기 세계에 갇혀 나오지 못한다. 언어는 자기 세계와 다른 세계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데, 그 이음을 끊어버리는 것이 바로 자신만의 언어를 쓰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단어를 쓸 때 그냥 막 쓰는 것이 아니다. 이미 남들과 의미를 공유하는 말들을 쓴다. 소통하기 위해서. 남들과 의미를 공유하기 힘든 말을 쓰는 작가들이 있지만, 공유하기 힘든 것이지 공유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여러 장치를 통해서 단어에 새로운 의미를 넣고 있기 때문인데, 특히 시인들이 그렇다. 따라서 시를 읽을 때 우리는 보통 알고 있는 그 단어의 의미를 넘어서 어떤 의미를 품고 있을까를 고민한다.


이렇게 시인의 경우는 [책상은 책상이다]에 나온 사람과는 다르다. 그는 아예 언어의 연결을 끊어버렸다면, 시인은 연결을 유지하되, 그 연결을 찾으라고 한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우리가 처음부터 단어를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학습을 통해서, 또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통해서 그 단어의 의미를 익히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그 단어들을 사용하게 된다. 그 단어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생각하지 않으면서. 단어가 세상에 나오고 사람들에게 쓰인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 단어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잊힌다. 단어의 유래를 알지 못하게 된다.


다른 말로 어원(語源)을 잊어버린다. 더 시간이 흐르면 어원을 모르는 말들이 더 많아진다. 물론 어원을 몰라도 그 말을 쓸 수 있다. 어원을 모른다고 단어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어원을 알면 그 단어에 실린 사연을 알기에 그 단어를 좀더 잘 알게 될 수 있다. 또한 그 단어의 유래를 통해서 비슷한 어원을 지닌 말들을 만나기도 하고.


따라서 어원에 관한 책을 읽으면 재미 있다. 맞는 어원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간혹 이런 어원. 오징어. 한자어로 오적어(烏賊魚)였다고. 까마귀를 유인해 잡아먹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는데, 오적어가 오징어가 된 것이라고.


하, 과연 까마귀가 바다에 떠 있는 오징어를 먹으려고 하다 도리어 잡혀먹히는 일이 생길까마는 이런 오징어란 말의 유래에 대해 정약전이 쓴 [자산어보]에도 나온다고 하니(116쪽), 그런가 하면서 읽는 재미도 있다.


이 책에서는 오징어에 관해서 또 다른 사실.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그야말로 재미와 지식이 함께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인데... 우리가 지금 오징어라고 하는 것은 옛날에는 '피둥어꼴뚜기, 곧 꼴뚜기의 한 종류'(116쪽)라고 한다. 


처음 알게 된 사실. 예전에 오징어는 지금 우리가 '갑오징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고 하니, 참...


이와 비슷한 말이 '오이와 참외'다. 


'원래 '외'였던 참외가 줄기와 잎이 비슷한 오이에게 이름을 빼앗기고 '참외'가 되었다. ... 실제로 참외는 삼국 시대부터 있었고, 오이는 그보다 천 년 뒤인 1500년 즈음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참외를 지금은 과일로 여기지만 사실 장아찌를 담가 반찬으로 먹기도 했다.'(141-142쪽)


'참외' 이름에서 '외'가 오이의 줄임말일 것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참외가 오이에게 밀려 제 본래 이름 앞에 '참'자를 붙이게 되었다니... 


동네 이름으로 가면 더 재미있는 말들이 있다. 많은 곳에 있는 '가좌동'이라는 동네. 이름이 같은 동네가 많은데, '가좌'가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이 책에서 저자가 '가좌'는 '가재'를 한자어로 쓴 것이라고 알려주고 있다.


즉 '가좌동'은 '가재동'인 것이다. 물이 맑아 가재가 살고 있던 마을들 이름이 가좌동이었던 것.  이런 식으로 이 책에는 우리가 자주 쓰는 단어들에 실린 유래, 사연을 알려주고 있다. 그래서 읽는 재미가 있다. 또 읽으면서 우리말에 대한 지식을 넓힐 수도 있고.


앞에 든 몇몇 단어들 말고도 참 많은 단어들이 그 사연을 지고 이 책에 나온다. 한번 읽어보면 우리말에 깃든 사연들, 또 그 단어들이 어떻게 자리잡고 변해왔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천천히 내가 쓰고 있는 말이 어떤 사연을 담고 있는지 궁금하다면 이 책을 한번 들춰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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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제17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채원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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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어왔다. 무슨 의무 같은 것은 아니고, 그냥 최근에 발표되는 소설들을 읽어야지 하는 생각에.


이번 작품집에 실린 작품들은 다 다르다. 그만큼 작품 하나하나가 저만의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현재 우리 사회나 우리 삶을 표현하는데 작가의 주제가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이 중에 제일 선명하게 다가온 작품은 길란이 쓴 '추도'다. 자본이 지배하는 시대, 남의 생활을 엿보는 것에서 만족을 느끼는 사회. 한 가정에 닥친 비극이 아니라, 그러한 비극 속에서도 그들의 삶에 대한 동경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는 다양한 SNS를 통해서 남의 생활을 만나는 우리의 모습, 그런 남의 모습 속에서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생활을 보고 동경하는 모습. 그래서 이런 책 제목도 있지 않은가.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는.


여기에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니까. 또 그러한 자본의 힘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면 되니까. 하지만 자신이 자본을 이용했다고, 또는 자본을 지닌 사람을 이용했다고 생각하지만 진실은 자본에게 또 자본을 쥔 자들에게 이용당함을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소설들도 여러 생각을 하게 하는데, 이번 소설집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이들 소설이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


무언가 분명하게 말을 하지 않고 부연 안개 속을 헤치며 나아가는 느낌이 들게 한다는 것. 가령 서장원이 쓴 '히데오'를 보더라도, 일본에서 조선인이라고 차별받던 히데오가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차별을 극복한다기보다는 다른 정체성을 만들어 그 속에서 또다른 자신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데...


일본인 아버지를 두었다는 공공연한 비밀을, 나중에는 스스로 떠벌리고 (밝히고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히데오는 아버지가 일본인이라는 점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자신이 살아가는 발판으로 삼으니, 떠벌린다고 하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다니는데,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에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를 바라보는 화자는 분명하게 말하지 못한다. 겉돌고 있다는 느낌. 이러한 겉돌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주는 소설이 위수정이 쓴 '귀신이 없는 집'이다. 


귀신이 없는 집은 좋은 아닌가? 그런데, 소설을 읽다보면 귀신이 없어서 망해버린 마을 이야기가 나온다. 귀신이 있을 때와 없을 때 사람들의 삶이 달라지는데, 그렇다면 귀신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긴장하게 하는 존재, 즉 자신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게 하는 존재가 아닐까. 여기에 '크로스드레서'인 재원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그의 또다른 삶이라고 할 수 있는 크로스드레서의 삶.


하지만 그것은 남 앞에 쉽게 드러낼 수 없는 자신의 비밀. 이런 비밀을 아는 아내 상미. 상미도 없는 집, 적막만이 있는 집. 그런 재원에게 귀신은 무엇일까? 왜 그는 귀신이 없다고 했을까를 생각하는데...


어쩌면 귀신은 자신의 또다른 성향을 인정하는 존재 아닐까? 그런 존재가 없는 집에는 적막만이 있을 뿐이지 않을까 하는데...


그렇다고 명확하게 무엇이 귀신이다 말할 수가 없다. 마치 믿음과 광신을 구분하기 힘들듯이. 이렇게 이분법으로 저것은 광신이야, 이것은 믿음이야라고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믿음과 광신은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믿음이 누군가에게는 광신이 될 수도 있음을 함윤이가 쓴 '우리의 적들이 산을 오를 때'에서 만나게 된다.


이렇게 무어라 명확하게 정리할 수 없는 소설들. 그런 소설들이 이번 수상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세상을 이것이다 저것이다고 딱 정리할 수 없음을, 그렇게 분명한 목표를 보지 못하더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현대의 삶이라는 것을 이번 수상작품집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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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태양 아래서
가산 카나파니 지음, 윤희환 옮김 / 열림원(도서출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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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사람은 듣고 싶은 소리만 듣는다더니, 아니 강대국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책만 펼친다고 해야 할까?


'팔레스타인, 가자', 여전히 고통 받고 있는 땅. 이토록 집요하게 괴롭힐 수 있을까? 괴롭힘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절멸을 노리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는데... 자신들도 '디아스포라'를 겪었으면서, 그런 이산의 고통을 겪었으면서도 팔레스타인에서 박해자로, 이산을 강제하는 존재로 군림하는 이스라엘을 보면...


아무렇지도 않게 상대는 테러범이기 때문에 처단해야 한다고, 가자에 있는 민간 시설을 폭격하고, 자신들에게 저항한다는 이유로 표적 살인을 저지르는 그들에게, 세계는 침묵하고 있다.


비판을 하는 나라도 있겠지. 그런데 잠시 뿐이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가자를 폭격한다. 봉쇄한다. 자신의 땅에서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하는 사람들. 가족들끼리도 왕래하기 힘든 사람들. 가자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비극, 우리나라에도 이젠 제법 그들의 작품이 번역되어 있다. 우리 곁에 팔레스타인 문학이 다가오고 있는 것. 


이 소설집, 가산 카나파니의 소설에 나오는 내용,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그렇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라는 작품의 마지막 장면.


"왜 당신들은 물탱크의 측면을 노크하지 않았지? 왜 물탱크의 옆구리를 쾅쾅 치지 않았던 거야? 왜? 왜? 왜?"(124쪽)


쿠웨이트로 밀입국을 하기 위해 트럭 물탱크에 들어간 세 사람. 지금 우리나라도 푹푹 찌는 날씨인데, 사막에서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밀폐된 물탱크. 그야말로 비유적 의미로 찜통이 아니라 사실적 의미로 찜통이었을 것이다.


밀입국을 시켜주는 브로커도 그 점을 알고 있다. 그 역시 팔레스타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성불능이 된 사람. 하여 그는 7분만 참으라고 한다. 그 정도면 죽지는 않을 거라고. 두 번의 검문. 


한 번은 7분만에 통과한다. 찜통 속 사람들은 기진맥진한다. 밀입국. 살기 위해서 다른 나라로 가는 것. 지구에는 국경이 없지만 나라끼리는 임의적으로 국경을 만들어낸다. 자유롭게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갈 수가 없다. 특히 약한 나라 없는 사람들은 더더욱.


그러니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이런 방법밖에 없다. 그동안 브로커들에게 사기를 당하기도 했을 테고... 이들을 물탱크(물은 없다. 그러니 그 물통 안이 얼마나 덥고 산소가 없을지는 상상할 수 있다)에 들어가라고 하는 '아불 카이주란'을 미심쩍어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게다가 첫 번째는 성공했지 않은가.


두 번째 관문. 변수가 생긴다. 이리저리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관리가 나온다. 시간은 흘러간다. 아불 카이주란은 초조해진다. 빨리 해결하려 하지만 뜻대로 안 된다. 7분이 지나고 또 지나고, 또 7분이 지난다. 


이들이 견딜 수 있는 시간의 세 배가 흘러간다. 황급히 차를 몰고 물탱크를 열어보는 카이주란. 아, 결국 그들은 살아남지 못한다. 살기 위해서 밀입국을 하려 했으나 그들은 죽어서 밀입국을 하게 된다. 이런 밀입국자들, 뉴스에서 많이 보아왔다. 


세계는 가자뿐이 아니라 도처에서 이런 비극이 발생하고 있다. 그런데도 세계는 침묵하고 있다. 충분히 함께 살 수 있는 나라들임에도, 자신들의 몫에서 조금만 떼어도 되는데, 안 한다. 모르쇠로 일관한다.


오히려 그들이 밀입국을 하려고 하면 기를 쓰고 막는다. 어쩌다 성공한 사람이 있어도 다시 추방하기도 한다. 그러니 밀입국을 하려는 사람들, 목숨을 걸 수밖에 없다. 또한 밀입국을 하지 않고 자리를 잡고 사는 사람이라도 카이주란처럼 불임의 존재가 된다.


그들은 세대를 영속시킬 수 없다. 강제로 세대를 단절당했음을 이 카이주란이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이 소설집 첫소설은 가자의 비극을 밀입국을 하려는 세 사람과 이들을 밀입국시키려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보여준다. (여기서 브로커 역할을 하는 카이주란은 동포애보다는 돈이 더 목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그에게도 팔레스타인 사람이라는 동포애는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소설에서는 왜 쾅쾅 치지 않았느냐고 절규하지만, 아니다. 이들은 쾅쾅 치고,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다. 그런 소리들이 밖으로 나가지 않게 방음벽을 치고, 귀를 닫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들이다.


오랜 시간 방음벽을 치고, 귀를 닫고 있었기에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다. 반복되고 있는데도 여전히 귀를 닫고 있다. 그들은 계속 소리치고 있는데도. 하여 소설의 결말을 다시 읽어야 한다.


"왜 그들이 그렇게 외치고, 쾅 쾅 치고 있는데도, 할 수 있는 사람들, 할 수 있는 나라들은 듣지 않고 침묵하고 있는가? 왜 대답하지 않는가? 왜 이토록 오래 모른 체하고 있는가?"라고.


첫소설말고도 가자의 비극을 보여주는 소설로는 '슬픈 오렌지의 땅, 움 사아드, 가자에서 온 편지'가 있다.


'가자에서 온 편지'에서 주인공은 미국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자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마치 작가의 인생을 보여주는 듯한 구절인데.


"나는 이곳에 머물면서 결코 떠나지 않을 거야.(210쪽) ...... 내 친구여, 돌아오게나! 우리 모두는 자네를 기다리고 있다네.(219쪽)"


이때 자네는 새로운 삶을 위해 떠난 팔레스타인 사람들만이 아니다. 팔레스타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사람들이다. 그렇다. 이들은 결코 소리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소리치고 있다. 그 소리를 단지 우리가 듣지 않고 있었을 뿐.


이제는 세계가 그러한 외침에 응답해야 한다. 그래, 우리 그 소리 들었다고. 당신들의 닫힌 문 열어주겠다고.


최근에 읽은 [팔레스타인 번역가의 이중생활]만큼 울림을 주는 소설이다. 아마 그 책을 읽고 이 소설을 읽으면 더 마음에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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