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의 목소리 -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꺾이지 않는 마음, 현장의 이야기
모사브 아부 토하 외 지음, 파티마 부토 외 엮음, 이나현 옮김 / 돌베개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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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들이 처한 현실을 들려주는 소리가 여기에 있다. 들어야 한다. 그리고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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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외주 - 생각하지 않는 인간의 출현
홍진기 지음 / 어크로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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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주(外注)란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주로 경제활동에 관련되어 많이 쓰는 용어다. 자신들이 처리하지 않고 다른 곳에 맡겨 일처리는 하는 경우를 외주 준다고 하니...


이때 외주는 직접 제품을 생산하는 일을 맡기는 경우도 있지만, 일을 다른 조직의 사람에게 맡기는 것도 포함이 된다. 


현대에 와서 모든 일을 자신들이 다 처리할 수는 없기에 외주를 주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이런 외주로 인해 많은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먼저 제품을 외주로 주는 경우, 자신들이 생산할 능력이 되지 못하거나 또는 외주 주는 것이 더 비용이 싸기에 설비나 노동자들에게 투자를 하지 않는다. 이때 외주 업체가 생산하지 않겠다고 하면 큰 문제가 발생한다.


제품이 아니라 행위, 즉 일을 외주 줄 때도 문제가 발생한다. 자신들이 처리하지 않고 외부의 조직에게 일을 맡기기 때문에, 외부 조직이 일을 거부할 때 어려움에 처하기도 한다. 


이렇게 외주는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비용 면에서나 또는 효율 면에서 외부에 맡기는 것이 더 이익이라고 여길 때 발생한다. 그만큼 위험도 감수해야 하지만, 모든 것을 외주로 해결하려 했을 때 결국에는 자신들에게 손해도 돌아오기도 한다.


내부에서 기본적인 것을 처리할 수 있는 상황에서 부차적인 외주로 했을 때는 외주 업체에 문제가 생겼더라도 외주를 준 업체에는 문제가 그리 심각해지지 않지만, 핵심적인 부분까지 외주 주었을 때 외주 업체에 문제가 생기면 외주를 준 업체 역시 심대한 타격을 받는다.


이것이 외주가 지닌 문제다. 그런데, 인간이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사고(思考)-생각하는 분야를 인공지능에게 외주를 준다.


당장은 효율적일 수 있다. 그런데 외주에 의존하다 보면 본질을 잃을 수가 있다. 중심을 잃었을 때 생기는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가 없다. 이러한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책. 바로 이 책이다.


저자는 어느 날, 학생들의 보고서가 글은 좋아졌는데, 이상하게 사람이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는 많은 학생들이, 아니 대다수의 학생들이 인공지능을 통해서 보고서를 작성했다는 말이 된다.


인공지능에게 맡겨 제출한 보고서. 매끄럽고 내용도 잘 정리가 되었을 테고, 문법에 맞지 않는 문장도 거의 없을 텐데, 그런데... 정작 중요한 그 보고서를 작성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보고서가 아무리 형식이 정해져 있다고 해도 사람이 직접 작성했던 예전에는 그 나름대로의 개성이 드러났을 것이다. 자신이 고민하고 정리한 내용들이 보고서에 담겼을 것이고... 하지만 이제는 인공지능에게 질문을 하고, 그 답을 옮겨 적는 것을 넘어, 보고서까지 인공지능이 쓰게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천편일률적인 보고서가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더 이상의 고민을 하지 않는다. 고민을 하지 않는 인간들, 다른 말로 하면 생각하지 않는 인간의 출현(이 책의 작은 제목이기도 하다)이 대세가 된 것이 바로 현대다.


생각하지 않는 인간, 사고(생각)를 인공지능에게 외주를 주는 인간. 편리하고 빠르다고 인공지능에게 의존하는 인간. 처음엔 편리하고 좋을지 모르지만, 이렇게 영원히 지낼 수는 없다. 사고하지 않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계속 존재할 수 있을까?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는데, 인간의 기본 특징이 바로 생각에 있는데, 이러한 생각을 외주 주고 있다면, 결국 자신들의 생각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인간이라면 그 뒤의 삶은 어떨까?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하기 이전에 인간 스스로 통제권을 인공지능에게 넘기는 것이 아닐까. 인간을 위해서 인공지능을 이용한다고 했던 것이 인간의 능력을 없애는 결과를 낳는다는 우려. 이것이 바로 '사고외주'라고 제목을 단 이 책의 고민 아닐까.


인공지능을 없앨 수는 없는 시대가 되었으니, 그렇다면 인공지능을 더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해야 하는 시대. 인공지능에게 사고를 외주 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를 보충하는 역할로 인공지능을 사용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멈춤이 필요하다고... 빠름 속에서 쉬지 않고 달리는 것이 아니라 멈춰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경험을 통해서 실패하고 고민하는 시간들을 지녀야 한다고. 이러한 일들이 불편할 수 있지만 불편함을 감수해야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 수 있는 '판단의 장치'를 마련할 수 있다고 한다.


외주로 인해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지 심심치 않게 언론을 통해서 만나왔다. 그렇다면 이를 우리의 사고로 확장하면, 과연 우리의 사고를 외주 주는 것이 바람직할까? 외주를 주더라도 본질을 유지한 상태에서 부차적인 것으로 한정해야 한다는 것을 그동안 역사를 통해서 보아왔지 않은가.


인공지능 시대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지녀야 할 기본적인 가치들, 그것들마저 외주 주고 의존하면 안 된다.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 판단하는 능력. 그리고 관계 맺기를 통한 다양한 경험, 때때로 멈출 줄 아는 태도를 지닌 인간, 그런 인간이 현대 인공지능 시대에 인공지능을 잘 활용하는 사람일 것이다.


짧지만 저자의 고민이 잘 드러난 책이다. 그렇다고 이 책에서 모든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면 안 된다. 그런 자세 역시 사고외주일 테니... 이 책에서 제기한 문제를 중심으로, 현대 사회를 살펴보고, 자신이 어떻게 해야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저자는 직접 글을 써보라고 하는데... 저자의 권유는 어렵지 않다. 어쩌면 어렵지 않아서 가장 어려울 수도 있는데... 키보드를 치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직접 글을 써보는 것. 


'마지막으로 한 가지 부탁을 보태고 싶습니다. 이 책의 어느 페이지든, 여백이든, 책의 맨 뒤 빈자리든 좋습니다. 지금 이 순간 떠오르는 것 아무것이나 펜으로 직접 적어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키보드로 옮기지 마시고, AI에게 다듬어달라 하지 마시고, 그저 펜으로요. 글씨가 삐뚤어져도 좋고, 문장이 미완성이어도 좋고, 단어 한 개여도 좋습니다.' (149-150쪽)


손으로 무언가를 쓰는 일,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이것이 사고를 외주 주지 않는 첫걸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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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어의 발견
김미형 지음 / 사람in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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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당연한 말. 차별하는 말 쓰지 말자.


그런데, 이게 쉽지 않다. 내가 무심코 한 말이 차별하는 말이었음을 알게 될 때가 있으니... 알게 되면 사과하고 고쳐야 하는데, 어떨 때는 시기를 놓치기도 하니. 


그 말이 차별하는 말이었음을 깨달았다면 그나마 다행인데, 그게 왜 차별하는 말이야 하고 반문하고, 수긍하지 않을 때도 있으니, 너무도 당연한 차별하는 말을 하지 말자고 하는 말이 그리 쉬운 말은 아니다.


어쩌면 세상 이치가 그럴지도 모른다. 당연한 일. 그 당연한 일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때 사회가 혼란을 겪게 되지 않을까. 특히 사회에서 나름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차별하는 말을 쓴다면, 그 사회에서 차별이 없어지기는 힘들어질 테다.


차별하는 말 중에, 요즘 우리 사회에 만연한 말들이 있는데, 바로 '멸칭'이라고 하는 말들이 아닐까 싶다. 멸칭, 남을 멸시하는 말. 멸칭 자체가 차별하는 말인데... 그런 멸칭을 아무렇지도 않게 언론에 내보내는 일이 잦고 있으니...


특히 개인방송이 많아지면서 이러한 멸칭으로 부르면서 자신들의 편을 만들어가는 일이 너무도 많아지고 있음이 문제인데, 멸칭을 쓰지 말자면서 자신들이 다시 멸칭을 쓰는.


개인방송뿐이 아니라 정치권에서도 이러한 멸칭이 공공연하게 쓰이고 있으니, 국민을 대표하고 대변한다는 사람들이 아무 생각없이(아니, 이들은 분명 의도적으로 이러한 멸칭을 쓰고 있다고 생각한다) 멸칭을 함부로 쓰는 모습을 보면, 차별 없는 세상이 쉽게 만들어질 수 없겠단 생각을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뜨끔하기도 했다. 나 역시 별다른 생각 없이 차별하는 말을 쓰곤 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으니...


말을 할 때 한 번 더 생각하는 자세를 지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았구나, 혹 내가 차별하는 말을 쓰면 그 자리에서 누군가가 지적했으면 나는 고쳤을까? 아니면 기분 나빠했을까? 하는 생각도 하면서 읽은 책인데...


우리 사회 곳곳에서 쓰이고 있는 차별하는 말에 대해서 살피고, 그러한 말을 쓰지 말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책이다. 내가 쓰고 있는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책이기도 하고.


저자는 차별하는 말을 '의미성, 의도성, 맥락'이라는 세 영역을 통해서 살피고 있다. 같은 말이라도 어떤 때는 차별하는 말이 되지 않지만, 어떤 경우에는 차별하는 말이 되고, 또 차별의 의미가 담겨 있지 않던 말이 맥락에 따라서 차별하는 말이 될 수도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니 말을 할 때 내 의도는... 하고 자신의 말을 변명하려고만 해서는 안 됨을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다.


저자의 말처럼 차별하는 말은 배제하는 말이다. 상대를 용인하지 않는 말이다. 나와 같은 대등한 존재로 여기지 않는 태도다. 그러니 이러한 말이 사회에 퍼져 있다는 것은 평등한 사회가 아니라 누군가를 억압하는 사회라는 것이다.


그 억압이 말로 나타나고, 말로 나타나는 일이 잦으면 태도에 스며들어 고치기 힘들어진다. 지금 정치권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말들의 칼을 보라. 이들의 말은 상대를 대등하게 인정하는 말이 아니라 상대를 밀어내는, 상대를 찍어누르려 하는 말이다.


그런 말들이 국민을 대표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니, 다른 분야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차별하는 말, 멸시하는 말들이 넘쳐나는 사회는 결코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없다.


서로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회가 될 수 없다. 그런 사회에서는 갈등이 심해질 수밖에 없고, 오로지 나와 우리만이 중요하고, 상대는 없어져야 할 아니면 꾹꾹 눌러서 일어나지 못하게 해야 할 존재가 된다.


그것이 차별하는 말이 지닌 위험성이다. 말이 곧 행동을 낳고, 그러한 행동이 그 사회를 만들어가니 말이다.


하여 내 말이 남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해 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또한 상대를 나와 같은 존재로 인정하는, 나를 상대의 처지에 놓아보는 상상력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다름을 인정하고, 다름과 함께 살아가는 태도가 필요하다.


'차별어의 발견'은 바로 '상대를 발견'하는 일이다. 낯선 존재를 나와 같은 존재로 인식하는 일. 이 처음이 바로 내 말에 담겨 있는 차별의 의미를 발견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발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쓰지 않도록 하는 것.


말이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소통의 역할을 제대로 하게 하는 것, 그것은 바로 차별하는 말을 하지 않는 데서 시작한다.


저자가 들고 있는 많은 차별어들, 우리 사회에서 많이 쓰이고 있는 말들이고, 쓰지 않아야 한다고 하는 말들이다. 이 말들을 쓰지 않는 데서부터 소통이 잘되는 사회가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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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이 인류를 구원한다는 착각 - 실리콘밸리 억만장자들의 위험한 미래 설계
애덤 베커 지음, 박주용 옮김 / 동아시아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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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겨들어야 한다. 이 저자의 말을. 이런 주장을 단순히 러다이트 운동과 같다고 하면 안 된다. 과학기술이 발달해서 되돌릴 수 없다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시대를 거스르는 행위라고 할 수만은 없다.


영어의 원문은 이런 제목이 아닐텐데, 번역자가 내용을 완전하게 정리할 수 있는 제목을 붙였다. '기술이 인류를 구원한다는 착각'이라고. 정말 잘한 번역이라는 생각이 든다. 원제목은 'MORE EVERYTHING FOREVER'라고 하는데, '기술이 인류를 구원한다는 착각'이라고 하니, 이 책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한 눈에 들어온다. 


그렇다. 실리콘밸리의 기술주의자들은 기술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이 요즘 인공지능의 위험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속도를 늦추자고,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 역시 저자에 의하면 기술주의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안전주의자들도 역시 인공지능이 개발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다만 인간에게 위협이 되지 않도록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공지능 개발에 속도를 내자는 쪽이나 속도를 늦추고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쪽이나 모두 인공지능 시대를 전제한다는 점에서는 다를 것이 없다고 한다. 


특히 이들이 이렇게 나아가는 것이 과연 인류를 위해서일까? 저자는 아니라고 한다. 그들은 성장을 위해서, 무한한 성장, 그리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인공지능에 투자를 하고, 또 인공지능의 위험성을 이야기하는 것도 인공지능에 더 투자를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런 기술에 투자하는 것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인류에게 이익이라는, 그러한 이익을 위해서는 현재의 위험은 그다지 크지 않다고 한다. 현재의 위험? 기후위기라든지, 경제불평등, 세계적인 분쟁 등등이 중요하지 않다고?


장기론자들의 관점을 이야기하는데, 그 관점이 통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인류의 이익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먼 미래의 인간들까지 계산에 넣는다고 한다. 그래서 먼 미래의 인간까지 몇 조의 인간들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지금 해야 한다고. 


그 미래의 인간들 이익까지 고려하다 보면 지금 기후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세계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 들이는 노력보다는 기술에 투자하는 것이 더 인류를 위하는 일이라고... 나 참. 아직 오지 않은, 실현될지도 모르는 것을 계산에 넣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은 별것이 아니라고 하는 이 논리.


여기에 지구에 인간이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우주로 나아가야 한다고. 그러니 에너지 사용에 있어서 인간은 더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한다고... 이게 뭔가 했더니, 결국 성장주의다. 성장하지 않으면 침체고, 이것은 인류의 퇴보를 의미한다고.


과연 그럴까? 이 지구에서 우리가 계속 성장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는 것을 실리콘밸리의 기술주의자들도 알고 있다. 그러니 이들은 지구로 삶터를 한정하지 않고, 태양계 또 태양계 너머의 우주로까지 인간의 삶터를 확장한다.


아직 불가능하지만, 이들은 가까운 미래에 실현가능할 거라고 주장하면서, 그것이 인류의 살 길이라고, 지금 인류가 겪고 있는 문제들에 집중하는 것보다, 미래에 투자하는 것이 더 인류를 위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는 것.


화성에 인간을 보내겠다는 주장. 저자는 하나하나 근거를 들어 그것이 불가능함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무한한 성장이 가능하지 않음도. 그러니 실리콘밸리 기술주의자들의 주장이 실현될 수 없음에도 그들이 그런 주장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를 탐구한다.


저자는 그것은 바로 '기술을 통한 구원이 제시하는 초월의 약속'(346쪽)이라고, '현실 세계의 어떠한 위기도 그들 머릿속 상상의 임무보다 중요할 순 없다'(347쪽)고 하면서 '식민지주의의 약탈적 논리는 우주에서의 기술을 통한 구원의 꿈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349쪽)고 비판하고 있다.


'기술을 통한 구원에는 만물에 대한 영원한 지배의 꿈과 함께 그 지배 권력을 이용한 '모든 한계 초월하기'도 포함되어 있다'(353쪽)고 하면서 '실리콘밸리의 기술 엘리트들이 지구를 버리는 상상에 빠져드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우주 식민지화는 불로장생을 위한 섭생, 10대들로부터의 수혈, 클라우드에 두뇌 올리기, 영생 비타민 같은 환상들과 찰떡궁합이다'(361쪽)고 비판하고 있다.


이들이 이렇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인문학, 철학 등에 대한 무관심을 넘어 무시하는 태도 등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것을 '인문부정'이라고 하는데, 이 '인문부정은 기술업계의 또 다른 하나의 고질병의 원인이기도, 결과이기도 하다'(379쪽)고 주장한다.


이런 인문부정이 낳은 그들의 사고방식은 무엇일까? 바로 공학자병이라고 하는데, 이는 한 분야(주로 STEM-과학,기술, 공학, 수학)에서 전문가가 되면 다른 모든 분야에서도 전문가가 된다고 믿는 병이라고 한다. 


이들은 자신이 성공했기에 전문가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지, 믿지 않으며 오로지 자신들만이 옳다고, 따라서 인공지능 시대는 다가오고, 인류는 우주로 나아가야 하며, 영생을 곧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기술이 이룰 것이라고... 


이것을 누가 주도하나? 실리콘밸리에서 기술로 성공한 억만장자들이 투자를 통해서 이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고...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의 성장을 위해서 이런 투자를 하는 것이니, 억만장자들을 용인하지 않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그것을 가장 간단하게 하는 것이 바로 세금인데...


이는 억만장자들의 성공은 개인만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적인 것이 바탕이 되어 이루어진 것이니, 그에 대한 비용을 세금의 형식으로 지불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이는 능력주의에 대한 자연스러운 비판이고, 그렇게 거두어들인 세금으로 인류에게 필요한 다른 연구들, 정책들을 추진할 수 있을 거라고.


읽으면서 명쾌하다는 생각. 아, 그렇지 하는 감탄. 인공지능, 인공지능, 우주, 우주, 영생, 영생 하는 시대에 그런 주장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그리고 그것들이 얼마나 허상에 매달리고 있는 것인지를 구체적인 근거들을 통해 반박하고 있는 이 책.


이 책은 우리 역시 인공지능이라는 '집단 순응 사고'에 빠져 있지 않나 하고 되돌아보게 하고, 인공지능이 만능이 아님을, 우리 인류가 살아가야 할 곳은 이 지구이고, 이 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고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함을 깨닫게 해주고 있다.


현대에 꼭 읽어야 할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인공지능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또한 인공지능에 비판적인 사람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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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텅구리 - 한국 최초 신문 연재 네컷만화로 100년 전 날것의 식민지 조선을 보다
전봉관.장우리 편저, 이서준.김병준 딥러닝 기술 개발 / 더숲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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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신문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예전엔 종이 신문에 네 컷 만화와 한 컷짜리 만평이 실리곤 했는데...


네 컷 만화는 이야기가 있어서 보기가 좋았다. 한 컷짜리가 한 컷에 많은 것을 담고 있다면, 네 컷은 흐름이 있어서 이해하기가 쉬웠는데...


우리나라에서 신문이 발행된 초기부터 네 컷 만화가 실렸었나 보다. 이 책을 보니 1924년에 '멍텅구리'라는 네 컷 만화가 실리기 시작했으니.


이 만화를 통해서 당시 사회-문화를 알 수 있기도 하지만, 한계도 있다. 왜냐하면 신문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은 경제적 상황이 좋고, 지식 수준도 있는 사람일 수밖에 없기 때문.


그러기에 이 만화에 나오는 내용이 일반 서민들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여유가 있는 사람의 이야기라고 해야 한다. 기생인 옥매에게 반해 쫓아다니는 내용이 처음 시작이니... 이런 사치를 부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게다가 멍텅이는 돈을 물 쓰듯 쓰고 있으니, 당시 일제시대에 그런 경제적 호사를 누리를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해도 된다. 따라서 이 만화를 보는 사람은 낄낄거리면서 볼 수 있었겠지만, 대다수의 민중들은 이런 신문 만화를 볼 염두도 내지 못했을 것을 감안해야 한다.


그러면 소위 지식인들에게 무언가를 전달하는 내용이 만화에 실렸을 텐데, 해설에 의하면 당시 게장 금지라든지, 수입 담배 금지 등의 정책을 비꼬는 내용이 있고, 또 독립만세운동을 의식하는 일본 경찰에 대한 풍자 등이 있으니, 이나마 이 만화들이 당시 지식인들의 비판의식을 자극했다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놓고 일본을 비판할 수는 없지만, 간혹 일제의 정책을 비꼬는 내용이 실리는데, 만화 중에 1926년 1월 2일자는 설날을 양력으로 하라는 일본을 비판하는 내용이 나온다.


'우리 설을 치른 줄 아나? 우리 설은 따로 있네!'라는 대사... 우리가 지녀왔던 문화를 강압적으로 바꿀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까. 여기에 '왜갈보는 도처에 있네(1926.3.20)'라는 대사 역시 일본을 비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밖에 치고받고 싸우는 의원들을 보면서 '일본의회 모양이로군(1926.4.22)하는 장면도 있으니...


단순히 재미만이 아니라 만화를 통해서 당시 일본을 비판하는 장면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멍텅이와 옥매의 사랑이야기에, 윤바람이라는 친구가 등장하여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만화.


그러다 휴간이 되었다 다시 복간이 되었을 때, 1930년대는 편집이 완전히 달라진다. 각 컷에 붙던 설명이 없어지고, 인물들의 모습도 바뀌었는데... 화가가 바뀌었다고 보면 되는데...


처음에 그린 화가들은 노수현과 이상범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근대미술을 이끈 사람들... 하지만 1933년으로 가면 다른 이름이 나온다. 인쇄 상태가 좋지 않아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김 씨인 것은 확실하다) 많이 다르다. 게다가 이때는 옥매가 나오지도 않는다. 


물론 1930년대도 당시 사회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만화 내용으로 삼기는 했지만. 그렇게 흥미롭지는 않다.


이렇게 일제시대에 연재되었던 네 컷 만화를 영인하고 현대어로 풀이해서 책으로 엮었다. 방대한 작업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런 작업을 한 연구자들이 있기에 당시 작품을 지금 볼 수 있게 된 것.


이 만화들을 주욱 보면서 당시 맞춤법이 통일이 되지 않았고, 지금 우리가 쓰지 않는 글자들이 쓰인 것을 보게 되니, 우리글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살펴보는 것으로도 이 책은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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