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을 만드는 일 - 윌리엄 모리스 산문선
윌리엄 모리스 지음, 정소영 옮김 / 온다프레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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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모리스.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사람. 삶에서 아름다움이 없다면 그 삶은 너무나 공허하다고 한 사람.


남들은 중세를 암흑기라고 하지만 모리스는 중세야말로 아름다움을 살았던 시대라고... 그때 사람들은 삶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왜냐? 이유는 간단하다. 삶과 예술이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장식예술을 중요하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쓰는 많은 도구들을 그냥 실용적인 목적으로, 그 쓰임새만을 위해 만들지 않고, 쓰임새와 더불어 아름다움을 생각해서 만들고 썼다는 것.


건축도 마찬가지다. 겉모습의 웅장함만이 아니라 그곳에서 살면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건축이 좋은 건축이라고.


깊게 생각할 것도 없이 우리가 집에서 사용하는 물건들을 보면 모리스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다. 단지 쓰임새만 생각하고 사지 않는다. 디자인을 본다. 아름다움을 본다. 그래서 우리가 쓰는 물건들에는 쓰임새와 더불어 아름다움도 함께하고 있다. 이런 것들을 우리 삶 전반에 걸쳐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모리스의 주장이다.


이렇게 인간은 생활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정치적으로는 민주화가 이루어져야 하며, 경제적으로도 평등해져야 한다. 먹고살기 위해서 억지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해서 일을 하는 사회. 그러한 사회를 만들어야 아름다움이 삶 속에서 실현된다고 모리스는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사회주의자라고 주장한다. 사회가 변해야 한다고... 가난한 사람, 자신의 노동을 남을 위해서만 하는 사람들이 없는 사회. 그러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바로 아름다움을 생활에서 추구하는 것과 방향이 같다고 한다.


그는 '제가 뜻하는 사회주의는 ~ 모두가 동등한 조건에서 살고, 낭비 없이 만사를 꾸려가고, 어느 누구에게 해가 되면 곧 모두에게 해가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의식하는 그런 사회적 조건이지요. 마침내 공화(共和)라는 단어의 본래 의미가 구현되는 사회라 할 수 있어요'(165-166쪽)라고 한다.


이런 사회는 삶 속에서 아름다움이 자연스레 구현되는 사회이고, 이런 사회에서는 쓰임새만이 아니라 아름다움도 함께 물건에 요구하고 실현하는 사회가 된다.


그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물건에 즐거움을 입히는 일, 그것이 바로 장식이 수행하는 하나의 위대한 역할입니다. 사람들이 만드는 물건에 즐거움을 부여하는 일, 그것이 또 다른 역할입니다.'(104쪽)고 장식예술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즐거움은 곧 아름다움과 통한다는 것.


이러한 아름다움이 즐거움이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면 곧 '자연에 조응하며 도움이 되면 아름다운 것이고, 반대로 자연에 어긋나며 방해가 되면 추한 것입니다.'(103쪽)고 하고 있으니, 이런 상태에서의 아름다움은 즐거움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아름다움이 넘치는 사회는 사람들이 살 만한 사회라 할 수 있는데, '현대의 삶이 살 만한 것이 되려면 두 가지 미덕이 꼭 필요합니다. 만드는 사람과 사용하는 사람 모두에게 행복이 되는, 민중에 의해 민중을 위해 만들어지는 예술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정직함과 소박한 삶'(54쪽)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지나침, 낭비가 없는 사회. 어느 곳에서는 넘쳐나서 버리고 있지만 어느 곳에서는 없어서 고통을 받는 그런 사회가 아닌, 정직함과 소박한 삶이 넘치는 사회일 수밖에 없다.


모리스는 필요를 창출하지만 그 필요에 아름다움을 덧붙일 수 있는 사회, 그리고 모두가 그러한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누리는 사회를 그는 바라고 있는데, 이런 사회에서 '살 만한 삶을 위해 필요한 것들은 ... 첫째는 건강한 신체, 둘째는 과거,현재,미래와 교감하는 활달한 정신, 셋째는 건강한 신체와 활달한 정신에 적합한 직업,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주거환경'(255쪽)이라고 한다.


지금 우리 시대에도 유용한 주장 아닌가. 살 만한 삶. 아름다운 삶. 그러기 위해서는 건강, 정신, 일,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가? 이 중 하나만 없어도 우리는 살 만한 삶이라고, 아름다운 삶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모리스가 주장한 이런 살 만한 삶은 아름다운 삶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동료 인간을 두려워하는 일을 그만두고 그들을 믿고 의존하는 일, 경쟁을 없애고 협력을 쌓아가는 일, 그것이 우리가 꼭 해야 할 일'(240쪽)이라는 모리스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아름다움에 관한 모리스의 글들을 담고 있는 이 책은 단순히 미학에 관한 책이 아니다. 우리 삶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있기에 사회학, 정치학과도 연결이 된다. 그가 삶의 환경을 바꿔야 한다고, 사회를 변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름다움은 우리 삶 전반에 걸쳐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 책에서 한 가지 더 좋은 점이 있다면 모리스가 만든 아름다운 문양들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얼마나 삶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했는지, 그 문양들을 보면서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책을 추천한 박노자의 말을 보자. 이 책을 가장 잘 정리한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리스가 세운 뜻은, 쉽게 이야기하면 근대가 망까뜨리고 획일화시킨 인간에게 미(美)를 통해 다시 한번 자유와 개성을 돌려준다는 것이었다.'(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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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테
차학경 지음, 김경년 옮김 / 문학사상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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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CTEE'


낯선 말이다. 프랑스어라고 한다. '받아쓰기'라고. 받아쓰기. 지금 아이들도 학교에서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국민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저학년 때 받아쓰기 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단지 국민학교에서만이 아니라 중, 고등학교에서도 외국어를(중학교에서는 영어를, 고등학교에서는 제2외국어라 해서, 독일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중국어, 일본어 등등을 배웠다.) 배우면서 받아쓰기를 한 적이 있을 것이다.


교사가 불러주는 단어나 문장을 제대로 썼는지 확인하는 과정. 그런데 소설이라고 하는데 제목을 프랑스어로 달고 받아쓰기라고 했으니 제목부터 생각을 하게 한다.


받아쓰기라?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라는 말인가? 정답은 있다. 그 정답을 제대로 옮기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 점수가 달라지는 시험, 그것이 받아쓰기라 생각했는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러한 받아쓰기라 아니라 삶을 인식하는, 삶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받아쓰기라고 이 말을 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작 부분에 나오는 받아쓰기는 아마도 작가의 개인 체험이 들어간 것이겠지만, 개인 체험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태어나면서 받아쓰기를 한다. 그것을 글자로 적지 않더라도...


엄마의 말을 받아쓰기 하면서 언어를 익히게 된다. 단지 언어를 익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배우고, 자신을 알아가게 된다.


그런데 그러한 언어를 빼앗겼다면? 엄마로부터 자연스레 배우는 언어를 억압받는다면 어떻게 될까? 자연스런 받아쓰기 과정이 인위적인 받아쓰기 과정으로 바뀌지 않을까? 그러면서 자신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과 자신을 알아가는 방법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데...


이 소설을 쓴 차학경의 삶을 보면 이 소설이 왜 받아쓰기이고, 다양한 형식이 시험되고 있는지 대략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차학경 자신도 어린 시절에 미국으로 이민을 간 사람이다. 미국의 언어를 처음부터 배워야 하는 사람. 그러니 그에게는 이제 생활해야 하는 언어를 받아쓰기 해야 한다. 엄마로부터가 아니라 그 사회로부터. 


그러면서도 엄마로부터 익혀온 언어가 사라지지 않는다. 엄마가 들려주는 언어를 끊임없이 받아쓰기 하면서, 다른 언어도 받아쓰기를 해야 한다. 여기에 차학경은 프랑스어에도 관심이 있고, 배웠다고 하니, 이 소설에서 '프랑스어로 번역하시오'라는 부분이 있는 것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단지 언어의 번역, 받아쓰기 문제가 아니다. 바로 세계를 인식하고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해가는 과정이다.


이 받아쓰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넷이다. 유관순, 잔 다르크, 성녀 테레즈, 그리고 엄마. 유관순과 잔 다르크는 나라와 관련이 있다면, 성녀 테레즈는 종교와, 그리고 엄마는 이 모두와 연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즉 이 소설은 엄마를 중심으로, 엄마의 이야기를 받아쓰기 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는데, 이는 엄마를 통해서 우리나라의 역사, 그리고 그와 비슷한 세계 속 역사를 살피고 있으며, 자신의 신념인, (차학경은 테레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며, 그의 형제자매들도 모두 이러한 세례명을 지니고 있다), 종교에 대한 믿음에 대한 표현을 통해 자신이 바라는 세상을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단순히 엄마의 말을 받아쓰기 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형식을 통해서, 또 다양한 자료들을 통해서 역사와, 종교와 사랑을 이 소설 속에 녹여내고 있다.


하여 소설 속 문장을 인용하면 '원 속의 원, 동심원의 연속'(187쪽)이라는 표현처럼, 이 소설은 자신의 삶이라는 원에서 엄마의 삶이라는 원, 유관순 - 잔 다르크의 삶의 원, 성녀 테레즈의 삶의 원과 역사의 원이 동심원처럼 중첩되어 있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 다양한 삶들을 'DICTEE'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러므로 어떤 하나의 형식으로 소설을 전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받아쓰게 하는 존재에 따라 받아쓰기 방식이 달라질 수 있기에, 또한 받아쓰기를 하는 주체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받아들였느냐에 따라 받아쓰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으니, 하나의 형식이 아니라 다양한 형식들이 이 소설 속에 혼재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것들을 하나로 꿰기는 힘들다. 읽는 사람 역시 차학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받아쓰기'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받아쓰기'에는 백 점이란 없다. 자신의 관점에 맞게 변용해서 받아들이고, 다시-쓰기를 할 뿐,


소설에 여러 언어가 혼재되어 나타나, (책의 말미에 있는 오빠의 글에 의하면 '테레사는 한국어, 영어, 불어,그리스어를 인용해서 [딕테]를 구성했다'(211쪽)고 나와 있다) 번역자도 이 점 때문에 많은 고심을 했을 것인데, 읽기도 쉽지 않은데, 그럼에도 읽으면서 무언가 어렴풋하게 어떤 형상이 다가오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런 느낌을 좀더 구체화하고 싶으면 소설 뒤에 실린 차학경 오빠의 글과 번역자의 말, 작품 해설 두 편을 읽으면 좋을 것이다.


한 번에 읽고 끝낼 소설이 아니라는 것, 두고두고 읽으면 그때마다 받아쓰기가 달라질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 소설. 읽고 나서도 무언가가 계속 남아 있는 소설이 바로 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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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 유튜브에서 아들을 구출해 왔다 교양 100그램 8
권정민 지음 / 창비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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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 유튜브'에서 아들을 구출했다는 말. 쉽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너무도 쉽게 유튜브 영상을 통해서 다른 이들을 혐오하고 배제하는 쪽으로 기울게 되는 현실.


그럼에도 유튜브를 어떻게 할 수 없는, 너나 할 것 없이 유튜브를 하겠다고, 어떤 곳은 이들이 광장을 점령해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자신들의 재미, 흥미, 관심사를 유튜브로 만들어 보여주는 이들을 모두 비판할 수는 없다.


다만, 유튜브를 통해 혐오와 배제의 논리를 전파하고, 행동을 촉구하는 이들마저도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허용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표현의 자유는 소중하니까. 이렇게 소중한 표현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면? 그것도 표현의 자유일까?


표현의 자유를 빙자해서 혐오하고, 배제하고, 폭력을 선동하는 것이 과연 용납되어야 할까? 이들에 대한 규제가 이루어지지 않고 잇는 상황에서, 그러한 발언-선동들이 '사이다'라고 인정받는 사회에서 입시에 찌든 학생들이 쉽게 빠져들 수밖에 없다.


자신들의 감정을 분출할 수 있는 통로가 유튜브에 있으며, 이들은 표면상으로는 자신들을 지지해주고 응원해준다는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또한 에둘러 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감정을 표현하니, 시원하단 느낌이 들게 해주기도 하고...


감정이 요동치는 나이, 질풍노도의 시기에 반항하는 시기라고 하는 사춘기에 단정적인 말은 그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도 있다. 무엇보다 앞에서 하는 말과 뒤에서 하는 행동이 다르지 않다고 여길 테니까. 사실 그들의 행동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이런 극우 유튜브를 보면서 재미를 느끼고, 그것을 놀이라고 생각하는 청소년이 늘고 있다고 하는데, 단순히 놀이를 넘어서 혐오와 배제로 나아가면 극우로 빠져들게 되기 쉽다.


저자의 아들 역시 학교에서 친구들과 함께 보는 유튜브에서, 또 친구들의 말에서 극우적 표현들을 익혔다고 한다. 이런 점을 알게 된 저자가 아들과 대화를 통해 극우 논리에서 벗어나 진실을 찾는 비판적 사고를 하는 아들로 자라게 하고 있다고 하는데...


학교에서 늘 '민주시민교육'을 강조한다. 비판적 사고력을 함양하고... 하는 말들이 교육 목표로 실려 있기도 하다.


이렇게 민주시민과 비판적 사고력을 함양한다는 학교에서 극우 논리가 판치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봐야 할까?


교육만으로 이러한 현실을 바꿀 수 있을까? 학교 현장이 오히려 극우 논리가 스며들고 확산되게 하는 공간으로 작동한다면, 지금 학교 교육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왜 학교에서 가르치는 그 좋은 내용들이 학생들에게 다가가지 않고, 유튜브나 다른 매체들을 통해서 만나게 되는 극우 논리, 또는 극단적인 논리가 학생들에게 다가갈까?


답은 뻔하지 않은가? 바로 우리 사회에서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사랑과 신뢰가 있다면 극단적인 사고로 가지 않는다. 적어도 상대가 한 말이나 행동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해보게 된다.


무조건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말할까? 왜 저렇게 행동했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사랑과 신뢰가 없으면 '그럼, 그렇지.'라는 생각부터 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더 강화하게 된다.


이 책에서 저자가 이야기하는 것도 이것이다. 가족 간에도 '사랑과 신뢰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부모가 좋은 말을 그렇듯하게 하면서도 자식들에게는 학원을 강요하고, 입시에서 성공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둔다면, 과연 그 가정에서 부모와 자식 간에 사랑과 신뢰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말과 행동이 다른 존재로 부모를 인식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부모 자식 간에 대화는 힘들어진다. 부모는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고, 아이는 부모의 생각을 거부하는 모습으로 굳어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극우 유튜브를 비롯한 극단적인 성향을 띠는 매체들이 자리를 잡게 된다. 마음에 파고들게 된다.


혹해서, 와, 통쾌하네 하는 생각으로 한두 번 보다 보면 알고리즘에 의해 이와 비슷한 영상들이, 매체들을 계속 보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의 생각을 굳히게 되고, 부모와는 더더욱 멀어지게 된다. 부모를 꼰대라고 여기게 되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 또는 앞과 뒤가 다른 이중인격자로 여기게 된다.


또한 학교의 그 좋은 목표들보다 자기 자식의 성적이 더 중요한 부모가 학교에 와서 교사들을 대하는 태도들을 보면, 어떤 학생이 교사의 말을 따르겠는가? 자신의 부모조차 무시하는 교사들의 말을.


이렇게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깨진 가정과 학교에서 아이들은 어른들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을 이끌어줄 어른은 집에, 학교에 있지 않고 사이버 상에 존재한다. 그것이 유튜브든 게임에서 자신들을 이끄는 사람이든, 단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을 어른으로 착각한다.


부모, 교사가 아니라 이것이다, 이래야 한다, 저들이 나쁘다. 저들을 몰아내야 한다고 혐오와 배제의 말하기를 하는 그들을 어른으로 착각하는 순간, 극우 쪽으로 빠져들게 된다.


이렇게 극우 논리에 함몰된 자식을 구출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저자는 부단히 대화를 한다. 그것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아이가 이해하기 쉽게. 이런 일은 대부분의 부모가 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그만큼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는 일이다.


하지만 저자와 같지 않더라도 가족 간에 '사랑과 신뢰'가 있다면 짧은 시간에도 대화를 할 수 있다. 진심을 다하는 대화. 그래서 상대를 배제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나만이 아니라 상대의 말에도 경청을 하는 그런 대화를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극우 유튜브에서 아들을 구출'한 방법이다.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가까워야 할 부모-자식 간에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 부모도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 실수할 때도 있음을, 다만 그 실수를 인정하고 고치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을 자식이 느끼게 하고, 자식에게도 완벽함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실수를 통해서 배워나가는 모습을 기대한다는 것을.


남을 배제하고 혐오해서는 절대로 자신도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을, 다른 존재들과 함께 어울려 즐겁고 행복하는 사는 삶을 부모가 원한다는 것을, 그래서 극단적인 논리를 주장하는 존재들을 멀리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하는 가장 단순한 방법은 부모-자식 간에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 관계가 있어야 대화도 가능하다. 어디 이것이 부모-자식 간에만 해당하겠는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무너진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우리 사회가 극단주의에 빠지지 않게 된다. 특히 미래세대들에게는 더더욱 그런 관계 회복이 절실하다. 


그 점을 이 책에서 저자는 잘 보여주고 있다. 자신과 아들의 관계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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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번역가의 이중생활
알라 알카이시 지음, 서제인 옮김 / 글항아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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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라 말을 하기 힘들다. 내가 겪는 일은 아니지만, 우리나라도 이런 일을 겪어왔기에... 최근에 여행 간 곳에서 보게 된 소나무들의 상처.


소나무 줄기에 브이(V) 모양의 상처들이 있었다. 깊고 굵게, 그 상처를 얼핏 보면 나무가 웃는 것처럼 보이는데, 아니다. 웃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일제강점기, 연료가 부족한 일제가 소나무에서 송진을 채취해 연료로 쓰기 위해서 커다란 소나무들에 그런 상처를 남긴 것이라고... 일제강점기가 끝난 지 80년이 넘었지만 나무는 그 상처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상처를 통해 우리에게 역사를 잊지 말라고, 기억하라고 하고 있다.


그 소나무 상처. 이 책을 읽는 내내 떠올랐다. 팔레스타인을 기억해야 한다고. 특히 가자지구에서 벌어진 일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그것은 집단 학살이라고. 부정하는 자들에 맞서 그러한 학살을 기억하고 알려야 한다고.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기록해야 한다고. 이것이 바로 팔레스타인 번역가가 해야 할 일이라고.


팔레스타인, 가자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또 팔레스타인 문학들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 현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슬픔, 분노, 고통을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일은 쉽지 않다. 특히 번역하는 언어가 강한 나라일 때는 더더욱.


영어, 영국의 언어이자 미국의 언어. 지금 이스라엘은 미국과 딱 붙어 있고, 팔레스타인 비극을 초래한 나라는 영국이니, 영국이나 미국의 언어인 영어로 팔레스타인, 가자의 상황을 번역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 글의 저자는 이렇게 그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영어는 - 특히 주로 언론과 외교 성명, 그리고 '양측'을 내세우는 서사에 쓰이는 영어는 - 팔레스타인의 고통으로부터 가해의 주체를 지워버리고 대량 학살을 '충돌의 격화'로, 봉쇄를 '안보 조치'로 축소하도록 신중하게 구성되어 있다. 가자를 이 언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가자의 현실을 가리도록 고안된 바로 그 구조들에 맞서 싸우는 일이다. 이것이 팔레스타인 번역가가 처해 있는 망명 상태다. 두 세계 사이에 존재하지만 그 어느 쪽도 온전히 자기 것이라고 할 수 없는 상태'(71쪽)


이런 어려움에도 저자는 번역을 한다. 왜냐하면 '가자에서 번역을 한다는 것은 집단학살뿐만 아니라 전쟁이 지워버리고 싶어하는 삶의 평범한 순간들 역시 기록하는 작업(68쪽)'이기 때문이다.


잊지 않기 위해서 번역을 하고, 기록을 한다. 이러한 번역이나 기록은 곧 기억의 행위이고, 기억은 저항이 된다. 즉 '가자에 관해 문장 하나를 쓴다는 것은 전 세계의 무관심이라는 구조물에 맞서는 일(85쪽)'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저자는 가자가 오로지 상처로만 기억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를 보듬는 따뜻함이 있던 곳.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그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려 하는 가자 사람들의 모습도 기억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저자는 글을 쓴다고. 


결국 저자는 가자에서 살지 못하고 지금은 더블린에서 산다고 한다. 이 책에는 가자에서 나와 베를린과 더불린에서 겪는 일들도 나와 있는데, 이 곳에서도 저자는 가자를 잊지 못한다. 가자는 저자의 몸과 마음에 배어 있기에 저자는 가자에 대해 끊임없이 글을 쓴다.


이 책은 그 결과물이다. 읽으면서 가자의 눈물, 슬픔이 떠나지 않고,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음, 잊지 않고 항복하지 않으려는 의지를 느끼게 되었는데, 이는 이 책에 나온 저자의 시에 '다른 이들이 피 흘린 길을 밟는 일'('가자, 인내의 끝에서' 중. 197쪽)이라는 구절이 있듯이, 우리 역시 이 책을 읽으면서 그들이 피 흘린 길을 함께 걷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읽으면서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는데, 아직도 가자는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의 이 당부 잊어서는 안 되겠지. 그래서라도 이런 책을 읽어야겠지.


'이 책의 페이지를 넘길 때, 여기 쓰여 있는 일들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가자 사람들이 여전히 똑같은 조건 아래 살아가고 있음을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6쪽)


이 책을 읽는 순간, 한겨레신문 (2026년 6월 11일 자)에 이런 글이 실렸다. 


이스라엘로 떨어지는 이란 미사일을 가자에서 보며…


저자의 목소리와 비슷한 소리, 잊어서는 안 된다는 소리. 기사를 읽고, 또 이 책을 읽으며 전세계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지 않도록 '무관심을 거부하는 독서, 스스로에게 변화를 허락하는 독서의 경험'(8쪽)을 하라는 저자의 말을 다시 한번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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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소아와 페소아들 제안들 6
페르난두 페소아 지음, 김한민 옮김 / 워크룸프레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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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우주, 다중우주. 지구에서 살고 있는 나와 또다른 우주에서 살고 있는 나. 이것은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지구에서 살고 있는 '나'는 지구에서는 유일한 존재이고, '또 다른 나'는 지구가 아닌 다른 우주에 살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 나를 나는 만나지 못한다. 알지 못한다. 다만, 다른 내가 다른 우주에 살고 있다고 짐작하기만 할 뿐. 즉 현실이 아닌 가상이라고 생각할 뿐.


그런데, 이 지구에도 수많은 나'들'이 있다면... 평행우주가 아니라 평행지구라고 해야 할까? 지구 곳에서, 아니 지구의 어느 한 나라에도 수많은 나'들'이 있다면... 그들이 각자 다른 삶을 살아간다면?


'도플갱어'와는 다르게, 속설로는 '도플갱어'를 만나면 죽음에 이른다고, 즉 두 존재가 함께 존재하지는 못한다고 하기도 하니, 다중(평행)우주 속의 '나들'은 그런 도플갱어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럼 '해리성 정체성 장애'와는 어떻게 연결이 될까? 자신에게서 나타나는 여러 인격들, 한 인격이 한 행동을 다른 인격이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 이것은 도플갱어라는 말과도 다중(평행)우주라는 말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어렵다. 이렇게 어려운 상태. 어쩌면 인간이란 바로 이렇게 무어라 정의하기 힘든, 또는 하나 속에 여럿이 함께 있는, 그 여럿이 하나 속에 통합되어 하나로만 나타나기도 하지만, 여럿이 각자가 하나가 되어 나타나기도 하는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 아닌가.


하나의 인격만이 발현되든, 여러 인격이 발현되든 그것이 인간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고... 이것이 바로 인간의 다양한 면이 아닐까. 


그러니 인간을 어느 한쪽으로만 규정하는 일은 없어야겠는데... 이런 많은 용어들이 생각난 것은 바로 페르난두 페소아의 이 책 [페소아와 페소아들]을 읽었기 때문이다.


책 제목을 [페소아와 페소아들]이라고 붙인 것은 페소아라는 포르투칼 작가가 페소아라는 이름의 단일한 인격만으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페소아들이라는 다중 인격으로 존재했다는 것.


어떤 때는 페소아라는 인격이 또 다른 때는 페소아들에 해당하는, 이 책의 번역 용어로는 '이명(異名)'의 인격들이 나타나 작품 활동을 했다고 한다. 시, 희곡, 소설, 인터뷰 등등 다양한 페소아들이 각자 특성있는 글로 나타난다.


페소아 자신이 스스로 그러한 이명들에 대해 밝히고 있기도 한데, 어떤 인격들은 이명(異名)이 아니라 이명에 준한다는 의미로 준(準)이명이라고도 했으니...


해리성 정체성 장애와는 달리 페소아는 자신이 지닌 다른 인격들에 대해서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고, 그러한 인격들이 다양한 작품활동을 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페소아들을 만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그들 이름으로 발표한 글들을 실음으로써, 그들 나름대로 개성을 지니고, 다른 문학을 지향하고 있음을 파악하게 한다.


여기에 이명이 아니라 본명 편에서 페소아가 직접 밝힌 일들도 수록함으로써, 페소아란 작가에 대해서 더 구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하고 있다.


때로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설명하지 못할 때가 있는데, 페소아는 그런 다양한 자신을 인식하고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하여 그는 이 지구에서, 그 중에서도 포르투칼이라는 나라에서 여러 페소아들로 살아가면서 작품활동을 한 사람. 그 많은 페소아들 중에서 어느 누구로 페소아를 규정지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한 책이다.


그의 이명에 관한 말... 이 말을 통해 페소아는 다양한 페소아들로 작품활동을 했음을, 그것이 바로 그임을 알게 해준다.


'내 이명들의 정신적인 기원은, 나의 근본적이고 한결같은 탈개성화와 가장(假裝)의 성향이지. ... 어릴 적부터 난 내 주변에 가상의 세계를 창조하면서 존재하지 않았던 친구들과 지인들로 나를 둘러싸는 성향이 있었지.'(325-3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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