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반시]에 수록되었던 시들을 골라 엮은 시집이다.


  1994년 봄호부터 1997년 여름호까지 [시와 반시]의 <지난 계절의 좋은 시>에서 가려 봅은 것(5쪽)이라고 한다.


  지금 보면 오래 된 시집이다. 무려 30년 전 시들이니...


  시에 유통기한이 없다고 하지만, 어떤 시들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잊혀지기도 한다.


  세월을 이겨내는 시, 그것이 좋은 시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러한 시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요즘처럼 급변하는 세상에.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세상. 까딱할 동안 너무도 변해, 그러한 변화를 따라가기 힘든 세상.


빠름, 그냥 빠름이 아니라 거의 빛의 속도와 맞먹을 정도의 빠름이다. 너무도 빠른 변화다.


그러니 과거의 시가 과연 지금도 통할지...


통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시들은 시대와 맞물려 있어 이해하기 힘든 경우도 있다. 30년, 강산이 세 번 변한다는, 예전 시간 개념으로도 그랬는데, 지금 시간 개념으로 하면 천지개벽이 일어난 정도의 변화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시는 계속 창작되고, 또 예전 시를 읽어도 요즘에도 그렇지 할 수 있는 시들이 있다.


어쩌면 시이기 때문에 꼭 그 시대에 붙어 있을 필요가 없는지도 모른다. 시는 시대를 넘어서 우리들 마음을 울릴 수 있으니까.


시들을 뽑아 한 권의 시집으로 만들어 놓은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시집에서 단순 명쾌한 시 하나. 90년대 들어 시들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는데... 그런 흐름과 다르게 쉽게 다가오는 시. 


그러면서 요즘 세태를 돌아보게 하는 시.


송유미의 '냄비의 얼굴은 반짝인다 - 설거지'라는 시다.


   냄비의 얼굴은 반짝인다

            -설거지

                                                                  송유미


산더미 같이 쌓여진 그릇을 씻기 위해 개수대 앞에 선다

밥공기들을 하나 하나 <퐁퐁>을 묻혀 닦아내다가

문득 씻지도 않고 쓰는 마음이 손바닥에 만져졌다

먹기 위해 쓰이는 그릇이나 살기 위해 먹는 마음이나

한번 쓰고 나면 씻어두어야

다음을 위해 쓸 수 있는 것이라 싶었다

그러나 물만 마시고도 씻어두는 유리컵만도 못한 내 마음은

더럽혀지고 때묻어 무엇 하나 담을 수가 없다

금이 가고 얼룩진 영혼의 슬픈 그릇이여,

깨어지고 이가 빠져 쓸 데가 없는 듯한 그릇을 골라내면서

마음도 이와 같이 가려낼 것은 가려내서

담아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누룽지가 붙어서 씻어지지 않는 솥을 씻는다

미움이 마음에 눌어 붙으면

이처럼 닦아내기 어려울까

닦으면 닦을수록 윤이 나는 주전자를 보면서

씻으면 씻을수록 반짝이는 찻잔을 보면서

영혼도 이와 같이 닦으면 닦을수록

윤이 나게 할 수는 없는 일일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릇은 한번만 써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뼈 속까지 씻으려 들면서 

세상을 수십 년을 살면서도 

마음 한번 비우지 못해

청청히 흐르는 물을 보아도

때묻은 정(情)을 씻을 수가 없구나

남의 티는 그리도 잘 보면서도

게 가슴 하나 헹구지 못하면서

오늘도 아침 저녁을 종종걸음치며

죄 없는 냄비의 얼굴만 

닦고 닦는 것이다.


강경주 외,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을 때. 시와반시. 1997년. 99-100쪽.


이 시를 읽으면서 최근에 읽은 [사고외주]라는 책이 생각났다. 자신의 생각조차도 이제는 인공지능에 맡기는 세상.


설거지, 손으로 하기보다는 식기세척기에 맡겨버리는 세상. 그렇게 자신이 하지 않고 맡겨버림으로써 생각하는 일, 닦는 일을 하지 않게 된 세상.


편리함에 몸을 맡기고 조금 불편한 것도 참지 못하게 된 세상이 아닌가 싶은데... 이런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이 바로 자신의 마음을 닦는 일.


마음 닦는 일은 쉽게 되지도 않는다. 참 어려운 일이다. 힘들다. 불편하다. 그리고 마음을 닦는다고 해서 무언가가 자신에게 돌아오지도 않는다.


어쩌면 마음을 닦는 일은 현재의 이익을 포기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세상에,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라고 현재를 즐기라는 현대인의 삶에서, 현재의 삶이 아니라 미래의 삶을 위해 불편을 감수하라고 하면... 누가?


마음 닦기도 인공지능이나 식기세척기 또는 로봇청소기처럼 다른 존재가 해주면 좋겠지만, 누가 뭐래도 마음 닦기는 자신이 할 수밖에 없다.


마음 닦아야 한다는 동기는 외부에서 올 수도 있다. 하지만 마음 닦기는 스스로, 자신이 직접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피곤하다. 힘들다. 힘드니 포기한다.


마음 닦기보다 원인을 외부에 돌리는 것이 얼마나 편한가. 나는 잘하고 있는데, 남들이 못해서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이라고...


내 눈의 들보는 보이지 않고 남 눈에 있는 티끌만 보이는 상태. 한자성어로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말이 있다.


나를 닦고 남을 다스린다. 이 말 붙어 있지만 순서가 있단 생각이 든다. 나를 닦는 것이 먼저여야 한다. 그 다음에 남을 다스릴 수 있다고.


즉 내 마음 닦기가 된 이후에야 남에게 무어라 할 수 있다는 것인데... 현재,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과연 그런가?


내 마음 닦기는 하지 않고, 내 마음에 때가 묻은 것은 내 탓이 아니고 남 탓이니, 그런 남을 다스리기만 하면 내 마음도 닦아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그렇게 느껴지는 행태들이 너무도 많은 요즘인데...


남을 다스린다는 말에는 자기 마음을 닦았다는 행위가 포함되어 있다. 그것을 명심해야 한다. 남탓을 하기 전에, 남을 비난하기 전에 자신부터 돌아보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모든 것을 외부에 돌리고 맡기는 세상에서도 맡겨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돌아보는 일. 마음을 닦는 일이다. 


그렇게 마음을 닦는 일이 무척 힘들어진 것이 요즘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 시인데... 90년대에도 이런 경향이 있었다면 지금은 더더 심해지지 않았나 싶으니...


이 시, 자신의 마음 닦기에는 소홀하면서 남에게 때를 씻으라고 큰소리치는 사람, 그런 사람들, 읽었으면 좋겠다. 나 역시 이 시를 읽으면서 과연 나는 마음 닦기를 하고 있었나 반성을 하게 됐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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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의 목소리 -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꺾이지 않는 마음, 현장의 이야기
모사브 아부 토하 외 지음, 파티마 부토 외 엮음, 이나현 옮김 / 돌베개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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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노벨 평화상은 '나바네템 나비 필라이'가 수상했다. 공교롭게도 [가자의 목소리]를 읽고 있는 중에 들은 소식. 필라이가 누구인가? 누구보다 국제법을 중시한 사람이라고 한다. 일부 힘 있는 국가에 세계가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국제법을 준수하는 세계가 되기를 바란 사람이라고.


하여 필라이는 유엔 팔레스타인 점령지 독립 국제 조사위원회의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가자지구와 관련한 인권 침해 및 국제법 위반 의혹을 조사했고, 이 조사위원회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군사작전과 관련해 집단학살에 해당한다는 결론을 발표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끄덕도 하지 않고 있고, 가자에서는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특히 어린아이들이 많은 피해를 받고 있는데, 학교는 물론이고 병원 또 가정집까지 폭격을 당하고 있는 현실이라고 한다. 여기에 음식물이나 물에 대한 통제가 심해서 가자지구 사람들이 지속적인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그러한 고통 속에서도 희망과 사랑을 잃지 않는 사람들. 진실을 알리려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소리가 이 책에 담겨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글이 가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알리려 하고 있다. 그럼에도 미국을 비롯한 힘 있는 나라들은 가자지구 사람들의 고통을 모르쇠하고 있다. 아니, 그들은 알고 있지만 무시하고 있다.


이들이 이렇게 무시할 때 가자지구의 비극에 눈 감지 않고 국제법에 의해 해결하려고 했던 사람, 바로 그가 필라이라고 할 수 있다.


필라이에게 노벨 평화상을 준 것은 세계가 몇몇 강대국에게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세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제법을 더욱 강화하고, 준수하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특히 가자지구에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세계가 당신들을 잊지 않았다는 신호라고 할 수도 있고.


이 책에서 들려주고 있는, 외치고 있는 가자의 목소리가 적어도 세계의 지각 있는 사람들에게 가 닿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겠고.


[가자의 목소리]에서 오마르 바르구티의 말인 '왜 BDS가 중요한가'라는 글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팔레스타인 하면 하마스를 떠올리고, 무장투쟁, 테러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오히려 전세계인을 대상으로 비폭력 투쟁인 'BDS'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


잘 모르고 있었는데, BDS는 보이콧, 투자철회 및 경제제재(Boycott,Devestment and Sactions) 운동의 약자라고 한다. 이스라엘을 돕는 기업, 단체들에 대해서 이러한 활동을 한다고 하는데, 이것을 미국에 적용하면, 반인권적인 또는 폭력적인 국가를 미국이 제재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다른 나라, 기업들을 경제, 정치적으로 제재하는 미국이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눈감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 BDS운동은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세계 사람들에게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을 알리고, 그것을 막기 위한 방법으로 이러한 제재를 함께 하자는 운동이다.


이런 운동도 테러라고 하는 억압을 하는 나라가 있다고 하니, 참... 그런데 이스라엘과 무기 거래를 하는 나라, 대표적인 나라가 미국이니, 그렇다면 미국부터 제재를 받아야 하지 않을까? 부끄럽게도 우리나라도 이스라엘과 무기 거래는 하고 있다는데...


무기 거래량이 얼마나 되는지는 국방 기밀이라고 공개가 안 되고 있다 하는데,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과 무기 거래를 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나라 시민단체들이 이스라엘과 무기 거래를 하지 말라고 시위를 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이 글을 읽으면서 떠올랐다. 부끄러운 일. 지금도 무기 거래를 계속 하고 있는지...


이런 식으로 묻혀 있던 가자의 진실을 알리려는 글들이 이 책에 실려 있다. 이러한 집단학살을 국제사회가 막지 못하고 있다니, 아니 막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눈 감고 있는지도 모른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면 안 된다. 국제법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강대국이 세계를 좌지우지 못하게 하기 위한, 세계 평화를 각 나라들의 협력으로 이루기 위해서가 아닌가. 그런데 이러한 국제법을 무시하는 강대국을 어찌할 수 없는 현 상황을 생각하면, 그동안 많은 전쟁과 학살을 거쳐오면서 인류가 다시는 그러한 일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목적으로 만든 국제법이 무용지물이 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올해 필라이에게 노벨 평화상을 수여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국제법의 중요성을 부각하고, 세계가 국제법을 준수하도록, 특히 몇몇 강대국의 힘의 논리에 세계가 끌려다니지 않아야 한다는 것 아니었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용어를 명확히 해야 현실을 바로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테러 진압이 아니다. 집단 학살이다. 그리고 집단학살을 자행한 인물들은 범죄자이다. 그들을 세계 법정에 세워야 한다.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 집단학살임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는 이 책. 이러한 가자의 목소리, 들어야 한다. 우선은 들어야 그 다음을 할 수 있다.


그 다음... 다음... '가자의 목소리'를 들은 다음... 바로 그 다음이 중요하다. 지금 세계는 가자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다면, 더 큰 재앙 속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을 보라... 이것은 국제법을 준수하지 않고 힘의 논리가 통하는 세계의 모습이다.


우리는 그런 세계를 바꿔야 한다. 그 출발점에 [가자의 목소리]가 있다.


이 목소리들 중 슬픈, 너무도 슬픈 이 말들과 표... 무슨 말이 필요하랴.


그들은(이스라엘 사람들) 총구를 통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보는 법을 배운다.(96쪽)

가자에서 아이들은 그 나이의 아이답게 살 수 없다. (142쪽)

가자에서 사상자들의 나이와 성별은 말 그대로 "요람에서 무덤까지"였다. (240-241쪽)


<모나 찰라비, '집단학살을 판단하는 방법', 1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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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장애사 -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장애와 그 공존의 역사
정창권 지음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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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는 분리, 배제가 아닌 통합과 공존을 이루는 사회의 역사다


우리나라가 장애/비장애로 나누고 차별하는 사회였던가? 서양의 관점에서 우리나라는 과거에 장애인을 위한 교육을 하지 못했다 하고, 근대화가 된 이후에야 비로소 장애/비장애 통합교육이 실시되었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


인권 개념이 근대에 들어 확립되었고, 근대화란 곧 서양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니, 이 틀에 의하면 장애/비장애 통합교육 역시 우리 과거 역사에서 찾기보다는 근대 교육에서 찾으려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장애인을 차별하는 문화가 역사적으로 지속되어 왔을까? 저자는 아니라고 한다.


역사 속 인물들과 자료들을 토대로 우리나라 역사는 장애/비장애의 통합교육, 통합 사회였지, 장애/비장애를 구분하고 분리, 배제하는 사회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본래 역사적으로 한반도에는 몸의 다름을 결함으로 여기면서 사회적으로 배척하려는 의식이 별로 없었을 뿐더러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한데 어울려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통합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5-6쪽)


어라, 우리나라가? 정말? 그렇다면 장애/비장애의 통합교육, 통합 사회가 서양의 문화로 우리가 뒤늦게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어? 이런 주장을 하는 근거가 무엇이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동안 인권이라는 개념은 우리나라 전통에서 찾기보다는 서양에서 도입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왜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 저자는 '장애를 전생이나 조상, 하늘의 죄와 연결시켜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담론은 개화기에 본격적으로 유행한 것이며, 그것은 기독교의 장애관이 불교적 인과응보설의 외피를 입거나 서로 결합되어 출현했던 것으로 보인다'(39쪽)고 하고 있다.


그러면서 책의 뒷부분에 가면 이러한 장애/비장애의 구분과 부정적 장애관을 확산시킨 신문이  [독립신문]이라고(288쪽) 하고 있는데...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운영한 사람들이 미국식 사고를 받아들였고, 조선의 것은 미개한 것이라는 인식을, 그래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을 신문을 통해서 했다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000과 다름 없다는 식의 비유로 장애를 언급했으니, 이런 비유를 통해서도 장애는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장애/비장애를 구분하고 분리, 배제하는 의식은 개화기를 거쳐 일제시대에 강하게 나타났다고 할 수 있으니, 장애/비장애를 구분하고 분리하는 것이 우리의 전통은 아니었다는 저자의 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는 통합교육을 했음을, 장애인이라고 해서 다른 면에서 차별을 하지 않으려 했다는 것, 그것을 정승 자리에 오른 사람 중에 장애인을 예로 들어 보여주고 있다.


특히 지체가 부자유한 사람에게는 왕도 그가 벼슬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도움을 주어서라도(내관을 통해서 부축하게 한다든지, 가마를 타고 오게 한다든지 등등) 계속 벼슬을 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장애/비장애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인품과 능력으로 사람을 판단했음을, 그래서 사람의 판단 기준에 장애/비장애가 기준이 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여기에 서당이나 서원, 성균관에서도 장애/비장애의 구분 없이 통합교육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통합교육과 더불어 장애인이 곤궁한 생활을 하지 않도록 제도로 뒷받침하려고 했다고도 하니...


이러한 역사를 안다면, 장애/비장애를 구분하고, 분리-배제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현대 사회가 오히려 과거의 우리나라보다 더 퇴보한 것이 아닌가 한다.


장애인을 위한 정책이 역차별이라고? 아니다. 가장 어려운 사람이 편하게 지낼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면 그 사회는 누구나 편안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어찌 역차별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당연한 일 아닌가. 신체의 차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게 하는 사회, 그런 사회를 지향한 것이 바로 조선을 비롯한 과거 우리나라였음을 저자는 여러 자료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저자는 인권이나 장애/비장애 통합교육은 동양엔 없었는데 근대화된 서양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인식이 잘못되었음을, 오히려 반대로 우리는 장애/비장애 통합교육을 하고 함께 살아가는 통합 사회였음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점을 일깨워주는 것이 바로 이 책이고, 저자는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 장애사는 분리-배제가 아니라 통합과 공존의 역사임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퇴계 이황 이야기가 이 책에도 나오는데, 그래, 조선 최고의 유학자 중 한 명인 퇴계의 부인이 장애인이었다는 사실. 그런 부인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배척하지 않고 함께한 사람이 퇴계임을... 


그것이 훌륭한 인품을 지닌 퇴계라는 예외적인 인물의 일만이 아님을, 다른 여러 사람들을 통해서 알려주고 있으니, 우리 역사를 통해서 장애/비장애가 분리-배제의 요인이 아니라, 그냥 다름으로, 그 다름을 안고 함께 살아가야 하는 통합-공존의 사회가 되어야 함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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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의 탄생 - 우리가 찍은 낙인의 역사
수레카 데이비스 지음, 이영아 옮김 / 현암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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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살피는 책이다. 즉, 괴물이라는 존재는 처음부터 괴물로 존재한 것이 아니다. 인간들이 어떻게 규정하고 분류했는지에 따라 괴물이 된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은 괴물의 탄생이라는 제목이 있지만, 작은 한글 제목으로 붙인 '우리가 찍은 낙인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내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낙인. 그것은 다른 존재에게 붙이는 이름이지만, 이 이름은 분류를 통해 다른 존재를 가두는 역할을 한다. 즉 우리와 다른 존재, 그래서 우리와 어울릴 수 없는 존재. 그냥 어울릴 수 없는 존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안녕을 위협하는 존재, 그래서 괴물.


이런 괴물은 함께할 수 없다. 퇴치해야 한다. 즉 괴물이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그 존재는 인류와 함께할 수 없고, 인류에게서 추방당해야 할 존재가 된다. 인류와 다른 존재를 괴물이라고 하는 것은 미지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그 존재를 피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연결이 되고, 피하고자 하는 마음이 그 존재를 배척해야만 한다는 의식으로 굳어지게 되는 것. 즉 모르는 존재는 모르기 때문에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데, 그 두려움을 안고 그 존재와 관계를 맺어가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그 존재를 배척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괴물의 역사일 것이다.


이러한 괴물에는 비인간 존재들이 있다.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인간이 잘 모르기 때문에 두려움이 있고, 그래서 우리는 인간이라는 벽을 쌓고 다른 존재들을 그 벽 너머로 보내고 가두는 역할을 한 것이 괴물이라고...


비인간 존재들을 괴물로 만든 역사를 추적하는 책이라고 제목을 보고는 생각했는데, 책장을 넘기면 곧 비인간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같은 인간을 비인간으로 취급하고, 그 결과 그러한 비인간 취급을 받는 인간들을 괴물로 이름짓고 배척하는 인간의 역사를 살피고 있는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저자는 괴물을 '괴물은 상상의 산물이다. 이 책에서 내가 사용하는 '괴물'이라는 단어는, 사람들이 '정상' 범주의 건너편이나 바깥에 있다고 여기는 인간을 정의할 대 사용하는 모든 용어 -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중립적이든 -를 포함한다.'(9쪽)고 정의하고 있다.


즉 이 책은 권력을 쥔 집단들이 다른 집단들을 판단할 때 사용하는 기준을 '정상'이라고 보고, 자신들의 '정상' 범주에서 벗어났다고 보이는 다른 인간 집단들에게 '괴물'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배척한 역사를 살피고 있다.


그렇다면 권력을 쥔 집단은 어떤 집단인가? 바로 지역으로는 유럽, 종교로는 가톨릭(기독교), 인종(인종은 없다는 말이 있지만 통상 쓰고 있으니)으로는 백인이다. 이들을 '정상'에 놓고 다른 인간들을 '비정상'으로 보는데, 이런 '비정상' 인간들 중에서도 더 멀리 간 집단을 '괴물'로 이름 붙였다는 것.


자신들이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인간들, 또 자신들과는 다른 신체적 조건을 가진 인간들, 여기에 능력 면에서도 자신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인간들도 '비정상'의 범주에 들어가고, '괴물'로 여겼다는 것.


그러니 괴물이라는 말에는 권력을 쥔 집단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서 다른 존재들을 규정짓고 배제했는지, 단순히 배제가 아니라 구경거리로 삼거나 또는 멸절시키기 위한 방법들을 사용했는지 등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같은 지구에 살면서 자신들이 정한 '정상'의 범주 바깥에 있는 존재들을 '괴물'로 규정짓는 이유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다. 그들을 이해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존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먼저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신들만이 정상이고, 자신들과 다른 존재들은 비정상이라고 하는 집단에게, 지구 밖의 존재들은 말할 것도 없다. 한때 외계 존재가 등장하는 영화들을 보면 외계 존재를 상당히 위협적인 인간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 표현하지 않았던가. 물론 인간과 교류하고 소통하는 외계 존재를 그린 영화도 있지만...


대체로 외계 존재는 인간을 위협하는 존재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그것이 문제라는 인식을 지닌 것은 지구에서 다양한 인간들을 규정짓고 범주화해서 벽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 잘못이라는 인식이 자리잡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데...


인권이 모든 인간에게 적용이 된다면,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으로까지 나아가야 하는데, 현재는 인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집단들은 모두 인간, 즉 인권을 지닌 존재로 인정하고 있으니... 여기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고...


이렇게 차별의 역사를 살피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괴물이라는 이름을 지닌 존재를 흥미 위주로 찾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괴물로 만들고 억압하고 배척했던 역사를 살핌으로써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게 될 존재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우리의 기준을 벗어난 존재, 또는 우리의 기존 관점으로는 판단하기 힘든 존재들, 경계에 속한 존재, 경계 밖의 존재들과 함께해야 하기 위해서는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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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사랑하는 '나'


  당연하지 않은가. 자신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도대체 무엇을, 누구를 사랑한다는 말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존재도 사랑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나를 지나치게 사랑하면 다른 존재들은 나로 인해 가려진다.

  

  아니, 다른 존재들은 나에게 들러붙는 방해물이 된다. 거추장스럽다고 여긴다. 


  그런 상태. 그러니 나를 사랑하는 나는, 적당히 나를 사랑해야 한다.


'나'에 집착하면 안 된다. '나'를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은 '나'에게 집착하지 않는다. 그래야 '나'를 사랑할 수 있다. 아니 다른 존재를 사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지나치면 어떻게 될까? 서효인 시를 읽으면서 나를 지나치게 사랑하는 일이 '질투'일 수도 있음을 생각한다.


누군가를 좋아해서 질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좋아해서 생기는 감정, 즉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마음, 그러한 욕망이 질투로 나타나는 것.


다른 존재가 지니고 있는 것을 인정하는 마음에 앞서, 그것을 자신이 지니지 못했다는 결핍으로 느끼는 것. 그것이 질투 아닐까.


그런 자신을 보면서, 결국 질투는 자신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싸움일 수밖에 없음을... 하여 나를 사랑하는 만큼 남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 그렇게 남을 사랑한다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는 것. 


그 보이는 것들을 다른 사람의 눈에도 보이게 하는 것. 시인... 시... 그것이 바로 시 아닐까 하는 생각.  



      로맨스


  질투는 드라마에서처럼

  누군가를 좋아해서 생기는 감정은 아니다 그것은

  제가 저를 너무나 좋아해서 생기는 습기 같은 것이라

  해수욕장의 발바닥이다 털어도 털어도 모래가 붙는다

  도넛 방석 위에 앉아 불 꺼진 모니터를 바라보면

  거기에 진짜 내가 있다 늠름한 표정으로 나는

  내가 좋아서 미치겠는 날도 많은데 남은

  나를 좋아해 미칠 수는 없겠지 오늘은

  동료가 어디 심사를 맡게 되었다고 하고 오늘은

  후배가 어디 상을 받게 되었다고 하고 오늘은 

  친구가 어디 해외에 초청되었다고 하고 오늘은

  그 녀석이 저놈이 그딴 새끼가 오늘은

  습도가 높구나 불쾌지수가 깊고 푸르고 오늘도

  멍청한 바다처럼 출렁이는 뱃살 위의 욕심에

  멀미한다 나는

  나를 사랑해서 나를 혐오하고 나는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변명하고 토하고

  책상 위에 앉아 내 이름을 검색하고

  빌어먹을 동명이인들 같은 직군들 또래들 심사위원들 수상자들 주인공들 나는 내가 좋아서 미치겠는데 남들은 괴이쩍게 평온하고

  바다처럼 넓은 마음으로 안 그런 척하는데 나는

  나 때문에 괴롭고 나는

  나를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고

  늠름한 표정으로 슬리퍼를 털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화장실 간다

  오줌을 누는데 보이는 건 불룩한 아랫배가 전부

  이런 나라도 사랑할 수 있겠니,

  대답 대신 쪼르륵

  내려가는 소리 들린다

  푸르고 깊은 몸 곳곳에 해변의 모래가 들러붙어서

  사무실에까지 왔다 질투는

  로맨스 같은 구석이 있다 오늘은

  예고편에 불과하고 내일은 동료와 친구와 선후배와 옆자리와 뒷자리와 동명이인과 같은 직군과 비슷한 또래와 노인과 젊은이와 이토록 연안에서 깊이 추잡스럽겠지만 극적이게도

  바깥은 평온하다. 그것이 나를 더 미치게 하는 줄도 모르고


서효인, 나는 나를 사랑해서 나를 혐오하고, 문학동네. 2022년. 1판 2쇄. 96-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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