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기원
토니 모리슨 지음, 이다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랑하는 인간이, 배제하는 존재를 만들고, 그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현실. 그것도 힘이 있는 자들이 그 힘을 인정받으려 다른 존재를 상정하는 행위. 이것이 타인이라는 말에 들어 있는 의미다. 그냥 단순히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일컫기보다는.


나와 다른 존재, 타인. 우리와 다른 존재, 이방인. 이는 곧 배제를 해야 한다는 말로도 들리는데, 타인이나 이방인이라는 말에는 단순한 다름이 아닌 다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다르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에게 없는 것을 배울 수 있고, 보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르기 때문에 몰아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강자가 아니라 약자다. 물론 이때 약자는 현실에서의 약자가 아니다. 약자가 강자를 배제한다고 한들 강자에게 어떤 어려움을 줄 수 있겠는가.


강자가 약자를 배제하면 약자는 생존의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는데, 그러므로 이때 쓰는 약자는 스스로 서지 못하고 자신이 홀로 서지 못하고 상대를 통해서 존재 의의를 찾는 존재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백인들이 흑인을 노예로 부릴 때 자신들의 생활에 필요한 많은 것들을 노예에게 의지했음에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상대를 인간 이하의 존재로 취급하는 모습들, 그런 모습들이 바로 백인에 의한 흑인의 타자화라고 할 수 있다.


인종 문제, 현대에서는, 특히 인권이 강조되는, 다른 나라의 인권 문제까지 걸고 넘어가는 미국에서,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문제같지만, 아니다. 미국에서는 여전히 인종 문제가 심각하다. 오죽했으면 몇 년 전에, 불과 몇 년 전이다. 흑인 대통령을 (뭐 이 책에도 나오지만 한 방울의 피가 섞여도 흑인은 흑인이라고 했던 때가 있었으니) 배출했음에도 흑인들은 여전히 경찰에 의해서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는 구호가 지금도 유용하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토니 모리슨이 쓴 이 책은 그러한 인종 차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젠더나 경제적 차별도 있지만 흑인들이 생활에서 겪는 인종 차별. 문학에 나타난 인종 차별을 이야기하면서, 백인들에 의해 흑인이 어떻게 타인이 되었는지를 살피고 있다.


우선 모리슨은 '인간은 우리 부족 사람과 그 밖의 사람을 구분지은 뒤 상대를 적으로, 즉 취약하고 결핍이 있으며 통제가 필요한 대상으로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다(26쪽)'고 한다.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을 결집하기 위해 타인을 설정하고, 그들을 자신들이 통제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고 행동한다는 것, 이는 '자기 집단의 신념을 강화하기 위해 타자를 만들어 세움으로써 비슷한 방식으로 타 집단을 통렬히 비난해왔다'(29쪽)는 말로 표현된다.


이런 역사가 있으니 타인을 배제하는 마음이나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강자들에게는 더더욱. 이들은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약자들을 타인으로 규정하고 배제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오면서 자연스레 그러한 모습들을 보고 자랐기 때문이다.


모리슨은 '타자화는 강의나 교육을 통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남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 배우게 된다'(30쪽)고 한다. 이는 생활에서 자연스레 몸에 배게 되는 것이다. 한번 몸에 밴 습관을 바꾸기가 얼마나 힘든지는 우리나라 속담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에 잘 나와 있으니...


이렇게 보고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면 그들이 보고 배울 수 있는 것 하나하나에 신경써야 한다. 이것이 얼마나 힘든지는 단어 하나, 몸짓 하나가 상대에게 얼마나 상처를 주는지를 고려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된다.


'서로 무해하게 접근하기 위해, 고작해야 푸른 공기일 뿐인 우리 사이의 거리를 뛰어넘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자원은 적지만 강력하다. 언어와 이미지, 그리고 경험이다'(71쪽)고 모리슨이 말하고 있는데, 언어와 이미지, 경험을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문학을 비롯한 예술이다. 예술이 간접경험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고, 토니 모리슨이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표현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허구적 서사는 타자, 즉 이방인이 되거나 혹은 이방인이 되어갈 수 있는 기회를 주는 통제된 야생 상태를 제공한다. 이곳에서 동정심과 명료한 눈을 가져볼 수 있고 자기 성찰의 위험을 감수할 기회도 얻는다'(143쪽)고 모리슨은 주장하고 있으니... 


문학(예술)이 왜 우리에게 필요한지, 그리고 문학(예술)에 왜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를 이보다 명료하게 표현할 수는 없다고 본다.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서 타인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적어도 이런 노력을 해야 만물의 영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토니 모리슨이 주장하듯이 '언어와 이미지, 경험'이 중요한 자원이라고 하면 이것들을 동시에 만날 수 있는 것이 문학(예술)이니, 문학(예술)에 대한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 토니 모리슨은 문학에 나타난 인종차별에 대해서 따끔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타인을 만들어내고 있으니까, 이런 작품은 비판을 받아야 하고, 그러한 작품을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는 눈을 길러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더불어 이 책을 읽으면서 토니 모리슨이 쓴 작품 중에 아직 읽지 못한 작품을 읽고 싶단 생각도 했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도 이 책에 나와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자고로 좋은 책은 다른 책으로 독자를 인도하는 책이기도 했으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자책] 오즈의 마법사 13 : 오즈의 마법 - 완역본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 13
L. 프랭크 바움 지음, 존 R. 닐 그림, 최인자 옮김 / 문학세계사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번엔 외부의 위협이 아니다. 오즈에서 교류가 없는 곳에 살고 있는 존재들이 등장한다. 하긴 우리나라같이 그리 크다고 할 수 없는 나라에서도 알려지지 않는 곳이 있을 수 있으니, 환상의 나라인 오즈야 말해 무엇하랴.


알려지지 않은 존재들은 각자 자신들의 삶을 살고 있다. 이들 나름대로의 삶. 여기에 마법을 부리는 존재가 없을 수가 없으니... 다만 오즈마의 명령으로 오즈에서는 마법을 쓸 수 없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자신들이 알고 있는 마법을 한꺼번에 모두 폐기할 수는 없는 노릇.


여기에 특별한 마법이 있다면 더더욱 그렇지 않겠는가. 마법 자체는 누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좋을 수도 좋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번에는 아버지가 꼭꼭 숨겨 놓고 자신만 알고 있던 변신 마법을 알아낸 키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변신 마법을 알아내어 좋은 쪽에 쓰면 좋으련만 힘을 가진 자들이 항상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인정받으려 하는 경향이 있으니, 여기에 부추기는 존재가 있다면 더더욱 그런 쪽으로 가게 된다. 부추기는 존재로 오즈의 마법사에 종종 등장하는 악당 전 놈왕 루게도가 등장한다.


오즈를 정복하고 자신들이 왕이 되자는 허황된 꿈, 그것도 키키와 루게도는 서로를 이용하고 나중에는 배신할 생각을 지니고 함께한다. 악당들에게 신의가 없음을 이번 편에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해야 할까.


동물들을 이용해 오즈를 정복하려 하지만, 자신들의 마법에 오히려 걸려들고... 오즈에서는 오즈마의 생일을 맞아 생일 선물을 준비하느라 다양한 모험이 펼쳐지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도로시와 키키가 맞닥뜨리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오즈마의 생일 선물을 마련한 일행은 성대한 잔치를 벌이고, 키키와 루게도에게 망각의 샘물을 마시게 해 그들이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한다.


마법의 대결, 흥미진진하지 않은가. 그렇지만 이 오즈의 마법에서는 마법 대결이라기보다는 강력한 변신 마법을 누가 이용하느냐가 관건이 된다.


나쁜 쪽으로 쓰는 사람과 위기에 빠진 동료(트라트와 빌 선장)를 구하는 쪽으로 쓰는 마법. 그리고 마법의 주문. 


몇 년 전에 유행한 해리포터 시리즈에 유명한 주문이 있지 않은가. '아브라카타브라' 이것 말고도 많은 주문이 나오지만,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인 이번 편에서는 단 하나의 마법 주문이 나온다.


'피르쯔쿡스글' 하, 발음하기 힘들다. 이 편에서도 이 주문은 정확한 발음이 중요하다고 했다. 이렇게 마법의 주문이 나오면 더욱 흥미를 지니게 된다. 한번쯤 따라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제 이러한 마법 대결이 나오니 더욱 흥미로워지는데, 작품 해설에 보면 작가인 프랭크 바움이 이 편과 다음 편의 원고를 넘긴 다음 출간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떴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작품 출간을 못 보게 된 것.


그렇다면 이 이후의 이야기는 어떻게 되나? 오즈의 마법사라는 사람들에게 흥미를 준 작품이 끊기게 되는가? 아니다. 다른 작가들에 의해서 계속 창작이 되었다고 한다. 하여 오즈의 이야기는 총 40권이 되었다고 하니(228쪽)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이야기다.


자, 마법 대결이야 흥미진진하고, 그것 자체로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이번 편에서 생각할 거리를 찾아내고자 한다면, 바로 음식이다.


우주로 인간이 나가려 하면서 음식 문제가 걸리는데, 이를 알약 형태로 음식을 만들어 나가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고 하는데, 오즈의 마법사에서 워글 벌레 교수가 그러한 알약 음식을 개발한다.


먹으면 영양가 많고 간단한 음식. 얼마나 편리한가? 과연 이 편리함이 인간의 먹는 즐거움을 대체할 수 있는가? 체육대학 학생들은 그 음식을 거부한다. 자신들은 진짜 음식이 주는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다(201쪽)고 하면서.


이들의 저항을 보면서 또한 오즈마 역시 '음식 대신 그 푸짐한 식사 알약을 먹기를 거부했'(202쪽)다고 하니, 음식을 먹는 행위가 어떠해야 하는지, 음식은 단지 몸에 영양분을 제공해주는 역할을 넘어서는 점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우주인들이 우주에서 그러한 식사를 계속 한다면 과연 그들은 행복해 할까? 알약이 아닌 우리가 먹는 약간은 번거롭다고 할 수 있는 음식들은 단지 먹는 행위를 넘어서 함께한다는 관계를 인식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지 않나.


식사공동체, 우리가 식구(食口)라고 하는 그런 의미로 음식을 생각한다면, 아마도 작가는 갈수록 간단해지는 음식 문화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는 의미를 전달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국은 1900년대에 들어서면 패스트푸드 문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을 테니까. 검색을 해보니 1921년에 패스트푸드 체인점이 시작되었다고 하니, 그 전에 그러한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점을 생각해 볼 수 있게 해주는 이번 편인데... 굳이 그런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현실에서 가끔 마법이 일어났으면 하는 순간들이 있는데, 그러한 마법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알 수 있으니...


이제 프랭크 바움이 쓴 마지막 권만 남았다. 어떻게 전개될지 기대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재즈
토니 모리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토니 모리슨.  [빌러비드]. [술라]를 읽었다. 번역으로 읽었으니, 영어 원문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번역문으로도 참 변화무쌍한 문장을 구사하고, 작품의 구조가 특정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정확하게 이것이다라고 말을 할 수가 없지만, 읽고 나서 마음에 묵직하게 무언가를 남기는 작품이었다. 미국 흑인들의 생활, 역사. (흑인이라는 말을 그냥 쓴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는 표현보다는 토니 모리슨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흑인이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었는데, 이번엔 [재즈]다. 재즈가 흑인 음악에서 출발했다고 들었는데, 딱딱한 형식에 갇히지 않고 변화무쌍하게 연주하는 음악이 바로 재즈라고 들었는데, 제목만 보고서 흑인 음악에 관련된 이야기인가 보다 착각했다.


읽어보니 재즈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브루스라는 말은 좀 나오기는 하는데, 그렇다면 왜 제목이 재즈일까?


당시 - 이 작품의 배경이 1926년 경이다- 흑인의 삶은 백인에 의해 차별받는 삶이었을 것이다. 노예 해방이 이루어졌지만, 짐 크로법이라든지 해서 흑백분리가 일어났던 시대고, 백인에 의해 흑인들이 죽임을 당하기도 하던 때였다.


그런 때 흑인들의 삶은 어땠을까? 비참함, 그것뿐이었을까? 아니다. 그들 역시 백인들과 마찬가지의 삶을 살아갔다. 즉 삶의 형태는 인종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사랑하고 갈등하고 욕망하고 좌절하고.


누군가 백인의 삶은 이것이다라고 명확하게 정의내리지 않듯이 흑인의 삶도 그렇다. 이것이 재즈와 비슷한 점이 아닐까?


삼각관계(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면)의 반복이 이루어질 것 같지만, 아니다. 변주가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를 통해 서로의 삶을 재정립해 나간다.


도카스-조-바이올렛의 관계에서 펠레스-조-바이올렛의 관계. 얼핏 같은 구조를 지닌 갈등이 나타나고, 비슷한 상황이 전개될 것 같지만, 아니다. 다른 관계가 만들어진다. 이를 작가의 말을 빌리면 '즉흥성, 독창성, 변화, 이 소설은 그러한 특징을 가지기보다는 오히려 그 특징 자체가 되고자 했다.' (358쪽. 작가의 말에서)고 할 수 있다.


하여 이 소설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서술자인 나(아마도 작가로 추정할 수 있는)가 나오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나는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재즈는 다음에 어떻게 변주될지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관계 속에서 다음이 나온다.


마찬가지도 이 소설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나'도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서 알 수가 없다. 그 인물들도 자신들의 생각이나 행동을 다른 인물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수시로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서술자 또한 수시로 바뀐다. 어떤 때는 조가, 또 다른 곳에서는 바이올렛이, 또 도카스가 그리고 펠리스, 여기에 도카스의 이모인 앨리스 역시 서술자로 등장한다. 이들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다른 인물들이 한 이야기와 중첩되기도 하고, 그 인물들의 행동을 더 잘 이해할 수도 있게 된다.


이렇게 하나가 아닌 여러 구조는 작가가 '이 소설에서는 구조가 의미와 동등할 것이다. 그 시도는 기교를 노출하거나 감추고 규칙들을 넘어서 실행하는 것이었다. 나는 단순히 음악적 배경이나 혹은 음악에 대한 수사적인 언급을 원한 것이 아니다. 나는 그 음악의 지성, 관능성, 무질서, 다시 말해 그것의 역사, 범위, 그리고 현대성이 현현될 작품을 원했다.' (359-360쪽. 작가의 말에서)고 한 말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한 사건을 둘러싼 다양한 인물들의 관점을 만나게 된다. 또한 그것들이 모여 소설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간다. 정해져 있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관계들이 모여 새로운 길을 만든다.


도시로 온 조와 바이올렛이 겪은 일들에 도카스와 같은 다른 인물이 끼어들고, 이 사건들을 이야기하기 위해 과거의 사건들이 소환되고 있다. 하여 처음에는 이미 벌어진 사건, 그리고 그것에 대한 과거 회상의 이야기일지 모른다고... 단순한 구조일 거라는 생각이 여지없이 무너지게 된다.


서술자인 '나'는 '나는 누가 다른 누구를 죽일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걸 묘사하기 위해 기다렸다. 사건이 발생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과거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 없이 홈을 따라 끊임없이 돌아야 하는, 이 세상 어떤 힘도 바늘을 붙들고 있는 대를 들어올릴 수 없는, 혹사당하는 레코드와 같다. 나는 그렇게 확신'(337쪽)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니다. 재즈는 그러한 변화없는 틀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 인생도 그렇다.


그래서 소설에 나오는 이 문장은 바로 실재하는 삶은 고정된 삶이 아닌 변화무쌍한 삶임을 깨닫게 한다.


'이제 내가 보는 그들은 미래의 오후 햇살에 윤곽선이 흐릿하게 번진 움직임 없는 묵화가 아니다. 지나간 과거와 미래의 당위 사이에 붙들린 존재가 아니다. 나에게 그들은 실재하는 존재다.' (346쪽)


이미 정해진, 바꿀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은, 인생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즉흥적으로 독창적으로 변화할 수밖에 없다. 관계 속에서... 그러한 관계가 만들어가는 삶. 그것을 1920년대 흑인들의 삶을 통해서 작가는 보여주고 있다.


오랜만에 읽은 토니 모리슨의 소설. 특정 인종의 삶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을 수밖에 없는 인생의 여러 면을 경험하게 해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소설 제목이 된 '재즈'는 소설의 내용, 구조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공지능 시대에 인공지능이 시도 쓴다. 그렇다면 시는 인간의 전유물이 아닌 것인가? 시에도 물질과 같은 구조가 있는 것인가. 아니, 시가 물질인 것인가.


  시가 물질이라면 인공지능도 당연히 시를 쓸 수 있다. 물질적인 것을 모두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우리 시대의 인공지능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단순하게 시는 물질이다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시에는 물질 이상의 것이 있기 때문이다. 시는 언어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언어의 기본적인 기능인 의사소통 말고도 자신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어떨 때는 누군가와 의사소통하는 것이 아닌, 자신과만 소통하기도 하는 그러한 기능도 있기 때문에, 시는 단순한 물질은 아니다. 그렇다고 물질이 아니라고 하기도 그렇다. 언어로 쓰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우리 눈에 물질처럼 눈에 보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게 해주는 것, 그것이 언어다. 이렇게 언어로 이루어진 시도 역시 물질이 될 수 있다. 물질의 개념을 넓게 보면 말이다. 


물질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물질이 우리 세계를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물질은 우리 생활과 뗄 수 없고, 또 우리 생활에 끊임없이 들어와 우리를 끌어들인다.


시는 그러한가? 시가 물질이라고 해도, 이 물질을 가깝게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또한 이 물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쓸 수 있는 사람도 별로 없다. 시집을 꽤 읽었다고 하는 나도 시는 아직도 미지의 세계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세계, 물질이다. 그러니, 시는 물질이라고 해도 우리의 생활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물질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면 시집의 제목이 된 '시와 물질'이란 시 마지막 구절에 이런 말이 있기 때문이다.


'한 편의 시가 / 폭발물도 독극물도 되지 못하는 세상에서 / 수많은 시가 태어나도 달라지지 않는 이 세상에서'('시와 물질' 중에서. 67쪽)


참 많은 시가 나오는데도 세상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시의 영향력이 참 적다는 시인의 한탄일 수도 있다. 물질의 폭발력에 비해 시의 파급력은 별로 크지 않다는 시인의 자조가 아닐까 하는데...


그렇지만 시의 파괴력은 물질의 폭발력처럼 순식간에 터져 나오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가 어느 순간 그 사람을 움직이게 하고, 다시 사람들을 손잡게 한다. 시는 그때까지 서두르지 않는다. 먼저 나서지 않는다. 그냥 자신의 길을 간다. 사람들 마음 속으로. 결코 서두르지 않고.


이런 시의 모습이 바로 '평화의 걸음걸이'라는 시에 나오는 구절과 통하지 않을까 한다. 시가 지향하는 것은 결국 평화다. 달라진 이 세상은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이다. 


'평화의 걸음걸이란 / 총탄의 여울을 건너는 숨죽임과도 같은 것 / 두려워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두려움과 싸우며 / 총탄의 속도와는 다른 속도나 기척으로 걸어가는 것 / 심장을 겨눈 총구를 달래고 어루만져서 거두게 하는 것 / 양쪽 산기슭의 군인들이 걸어내려와 서로 손잡게 하는 것 / 무릎으로 무릎으로 이 땅의 피먼지를 닦아내는 것' ('평화의 걸음걸이' 중에서. 89쪽)


시란 물질은 이렇게 평화의 걸음걸이와 같다. 이 세상의 속도에 맞추지 않는다. 자신의 속도로, 갈등이 아닌 화해로, 함께함으로 나아가기 위해 천천히, 끝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이겨내면서 쉬지 않고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시 아닐까? 하여 시인은 세상을 달라지게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아주 조금씩 조금씩 세상이 달라지게 하는 것이 시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하여 시를 가까이 하고 시를 즐기며 사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은 어느 순간 달라진 세상을 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이번 시집에 있는 시들이 현대 사회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그런 사회의 모습을 환기하면서 우리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으니, 그럼 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쓰는 생각 사는 핑계 매일과 영원 11
이소호 지음 / 민음사 / 202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소호 시인. 내게는 낯선 시인이다. 아니 들어본 시인이다. 예전에 쓴 글을 읽다가 이소호 시인의 시를 인용한 글을 발견했다. 햐, 내가 이 시인의 시를 읽었구나.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시집을 산 기억이 없다.


찾아본다. 시집이 없다. 역시 사지 않았군. 그렇다면 어디서 읽었을까? 분명 읽었기에 시를 인용했을 텐데... 그 시에 섬뜩한 마음이 들었던 것을 기억하는데, 우리 사회가 지닌 모습을 이리도 잘 표현할 수 있을까 하고 감탄한 적이 있는데...


검색해본다. '이소호'라는 이름을 치고, 어떤 책들을 냈는지 찾아본다. 그러다 아, 여기서 이소호 시인을 만났구나, 발견한다.


[2021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수상후보작에 이소호 시인 이름이 있다. 여기였군. 다시 펼쳐본다. 예전에 읽었을 때보다는 조금 더 이해하기 쉬워졌다. 왜냐? 바로 이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쓰는 생각 사는 핑계]


이소호 시인의 자전적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다. 자신의 생각을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으니, 시인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면 그 시가 더 친숙하게 여겨지는 것은 사실. 그러니 이 책을 읽고서 다시 읽은 이소호 시인의 시 몇 편은 내게 더 잘 다가왔다고 할 수 있다.


보통은 시집을 읽고, 그 다음에 시인의 에세이를 읽는데, 이번에는 순서가 바뀌었다. 뭐, 바뀌면 어떠랴, 내 맘에 드는 글을 읽는 즐거움을 주었는데... 시집을 읽기 전에 시 몇 편은 읽지 않았는가.


이 에세이 읽기는 즐겁다. 시인이 왜 시를 쓰냐고? 쉽게 말하면 먹고 살기 위해서다. 얼마나 진솔한가. 뮤즈가 영감을 줘서 나는 그냥 받아쓰기만 했을 뿐이라고 안 해서 다행이라고. 생활인의 모습이 잘 드러나서 더 좋다고나 할까.


시인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먹고, 자고, 싸는 사람임을, 그 역시 소비하는 인간임을 알게 되니, 소비하는 인간, 현대를 함께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우리 사회에서 자신이 느낀 점을 시로 썼다는 점을 알게 되니 시인이 한결 친숙하게 느껴진다.


나만의 느낌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렇게 솔직한 사람이 좋다. 취미가 쇼핑인 시인이라니... 생각해 보지 않았던 모습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제목에 쓰인 두 단어 '쓰는, 사는'이 두 가지 의미로 다가왔다. 우선 '쓰는'이란 말은 시인이니까 '글(시나 소설, 에세이)을 쓰는'이라는 뜻과 먹고 살아야 하는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돈을 쓰는'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러고보니 둘 다 '쓰는' 행위였구나 하는 생각. 그럼 돈을 쓰기 위해서 글을 쓸 수도 있겠구나, 시인을 우리와 다른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분야를 직업으로 가진 생활인으로 봐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했으니...


시인 역시 이 글에서 자신의 책을 팔기 위해 노력한다고 했다. 단지 읽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팔기 위해서다. 살아야 하니까. 그래서 출판사가 아닌 자신이 직접 여러 상품(굿즈라고 하는데)을 만들어 함께 주기도 한다고 한다. 쓰기 위해 쓰는 모습을 이 책에서 많이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이 어떻단 말인가.


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 그런 모습 속에서 좋은 시도 나오고 하는 것 아니겠는가. 마찬가지로 '사는'이라는 말도 '삶을 사는'이라는 뜻과 '물건을 사는'이라는 뜻을 다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핑계라는 말을 의미라는 말로 바꾸면 삶에서 의미를 찾는다면 더욱 알찬 삶을 살 수 있다고, 또 어려운 지경에 처하더라도 의미를 잃지 않으면 삶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는 빅터 프랭클의 의미 치료를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의미는 삶에서 중요하다. 그와 더불어 물건을 사더라도 의미를 부여한다면 더욱 가치가 있겠지.


이 책을 보면 정말 많은 물건을 사는데, 이 물건들을 사는데 나름의 기준이 있다. 이 기준이 바로 핑계라고 할 수 있지만,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삶에 무언가를 주기 때문에 물건을 사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게 정말 다양한 물건을 사는 모습이 이 책에 잘 표현되어 있는데, 그런 글을 읽으면서 과소비라는 생각, 낭비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마도 시인의 핑계가 내게 통했나 보다. 


무엇보다도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시인의 시집을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시인이 이 에세이를 쓴 목적이 달성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아직은 사고 싶다인데, 샀다가 되는 순간, 시인의 바람에 부응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글이 묻혀 잊히기를 바라지 않으니까. 누군가에게 계속 읽히길, 시집도 물건처럼 그 사람 곁에 머물길 바라니까.


곁에 두고 어느 순간이라도 꺼내 볼 수 있는, 때로는 잊고 있다가도 아, 이 시집이 있었지 하면서 빼어 읽을 수 있는 물질로서의 시집을 사람들이 지니길 바라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나도 시인의 기준을 한번 적용해 볼까.


좀 시간을 두고 꿈에 시집이 나오면 사는 걸로, 아니면 계속 시집 제목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으면 사는 걸로... 하하.


즐겁게 읽었다. 그러면서 시인이 자신에게 시란 무엇인지를 말한 이 글은 기억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여기에 옮겨 적는다.


'나에게 시란, 인생에서 시선을 고이 두고 오랫동안 툭 잘라 기억하고 싶은 한 장면을 뜻한다. 그것이 비극일지라도 나는 필요하다면 잘랐고, 세밀하게 관찰했고, 그 시선을 단 한 차례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내 시는 모났다. 불편했다. 그리고 가끔은 아름다웠으며, 처연했다.'(13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