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시대에 인공지능이 시도 쓴다. 그렇다면 시는 인간의 전유물이 아닌 것인가? 시에도 물질과 같은 구조가 있는 것인가. 아니, 시가 물질인 것인가.
시가 물질이라면 인공지능도 당연히 시를 쓸 수 있다. 물질적인 것을 모두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우리 시대의 인공지능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단순하게 시는 물질이다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시에는 물질 이상의 것이 있기 때문이다. 시는 언어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언어의 기본적인 기능인 의사소통 말고도 자신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어떨 때는 누군가와 의사소통하는 것이 아닌, 자신과만 소통하기도 하는 그러한 기능도 있기 때문에, 시는 단순한 물질은 아니다. 그렇다고 물질이 아니라고 하기도 그렇다. 언어로 쓰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우리 눈에 물질처럼 눈에 보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게 해주는 것, 그것이 언어다. 이렇게 언어로 이루어진 시도 역시 물질이 될 수 있다. 물질의 개념을 넓게 보면 말이다.
물질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물질이 우리 세계를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물질은 우리 생활과 뗄 수 없고, 또 우리 생활에 끊임없이 들어와 우리를 끌어들인다.
시는 그러한가? 시가 물질이라고 해도, 이 물질을 가깝게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또한 이 물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쓸 수 있는 사람도 별로 없다. 시집을 꽤 읽었다고 하는 나도 시는 아직도 미지의 세계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세계, 물질이다. 그러니, 시는 물질이라고 해도 우리의 생활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물질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면 시집의 제목이 된 '시와 물질'이란 시 마지막 구절에 이런 말이 있기 때문이다.
'한 편의 시가 / 폭발물도 독극물도 되지 못하는 세상에서 / 수많은 시가 태어나도 달라지지 않는 이 세상에서'('시와 물질' 중에서. 67쪽)
참 많은 시가 나오는데도 세상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시의 영향력이 참 적다는 시인의 한탄일 수도 있다. 물질의 폭발력에 비해 시의 파급력은 별로 크지 않다는 시인의 자조가 아닐까 하는데...
그렇지만 시의 파괴력은 물질의 폭발력처럼 순식간에 터져 나오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가 어느 순간 그 사람을 움직이게 하고, 다시 사람들을 손잡게 한다. 시는 그때까지 서두르지 않는다. 먼저 나서지 않는다. 그냥 자신의 길을 간다. 사람들 마음 속으로. 결코 서두르지 않고.
이런 시의 모습이 바로 '평화의 걸음걸이'라는 시에 나오는 구절과 통하지 않을까 한다. 시가 지향하는 것은 결국 평화다. 달라진 이 세상은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이다.
'평화의 걸음걸이란 / 총탄의 여울을 건너는 숨죽임과도 같은 것 / 두려워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두려움과 싸우며 / 총탄의 속도와는 다른 속도나 기척으로 걸어가는 것 / 심장을 겨눈 총구를 달래고 어루만져서 거두게 하는 것 / 양쪽 산기슭의 군인들이 걸어내려와 서로 손잡게 하는 것 / 무릎으로 무릎으로 이 땅의 피먼지를 닦아내는 것' ('평화의 걸음걸이' 중에서. 89쪽)
시란 물질은 이렇게 평화의 걸음걸이와 같다. 이 세상의 속도에 맞추지 않는다. 자신의 속도로, 갈등이 아닌 화해로, 함께함으로 나아가기 위해 천천히, 끝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이겨내면서 쉬지 않고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시 아닐까? 하여 시인은 세상을 달라지게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아주 조금씩 조금씩 세상이 달라지게 하는 것이 시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하여 시를 가까이 하고 시를 즐기며 사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은 어느 순간 달라진 세상을 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이번 시집에 있는 시들이 현대 사회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그런 사회의 모습을 환기하면서 우리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으니, 그럼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