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도살장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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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새로운 판이 나왔다. 번역자도 달라졌고. 새로운 판이 아니라 도서관에서 우연히 이 책을 만났다. 만날 책은 만나기 마련이라고 해야 하나. 읽어보고 싶다고 목록에 넣어두고, 계속 된 시간들. 그러다 커트 보니것이라는 이름으로 검색했을 때, 내가 다니던 도서관에는 이 책이 없었다.


그런데... 보니것의 다른 책을 읽어야지 하다가 책장에 가보니, 보네거트라는 이름으로 이 책이 있다. 이래서 못 찾았구나, 예전에는 보니것을 보네거트라고 번역을 했구나. 판본이 달라지면서 작가의 이름 표기도 바뀌었구나. 참.


제목은 소설의 인물인 빌리 필그림이 있었던 수용소 이름이다. 사실 제목을 보고서는 유대인을 학살했던 아우슈비츠와 같은 수용소를 생각했다. 사람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여서 도살장이라고 했구나 그것도 한두 군데가 아니고 다섯 번째 수용소라고 제5도살장이라고 했구나. 독일 나치의 만행을 고발한 소설이구나 했는데...


이런, 읽어보니 아니다. 소설 제목이 된 제5도살장은, '그들의 주소는 이랬다. "슐라흐토프-퓐프" 슐라흐토프는 도살장이라는 뜻이었다. 퓐프는 바로 그 숫자 5였다'(180쪽)고 나온다.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맨 마지막으로 간 곳이 드레스덴의 수용소인데, 그들을 수용할 공간이 없으니 당시에 도살장으로 건축된 곳에 포로들을 수용한 것이다. 그리고 우연히 지하에 있는 그곳에 있다가 폭격에서 살아남는다. 제5도살장은 학살의 현장이 아니라, 학살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목격 현장인 것이다. 이름과 달리 생존을 하게 한 장소. 또 학살의 주체가 독일 나치가 아니라 연합군이었다는 점.


이런 만큼 소설은 나치의 만행이 아니라 연합군의 드레스덴 폭격을 다루고 있다. 제목에서 먼저 떠올린 것들을 내용이 뒤바꾸고 있다. 또 읽어보면 드레스덴 폭격의 과정이나 결과가 처참하게, 비극적으로 표현되어 있지 않다.


전쟁의 참화를 사실적으로 그렸다기보다는 그러한 전쟁으로 인한 상처,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 등을 생각하게 한다. 내용의 처참함과는 다르게 소설 전개는 가볍다. 그리고 곳곳에서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다.


또 많은 죽음들에 후렴구처럼 "그렇게 가는 거지"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는데, 죽음으로 세상이, 삶이 끝나지 않고 다른 삶들은 다른 시공간에서 계속되고 있음을 시간 이동을 하는 빌리를 통해 보여준다.


드레스덴 폭격을 목격한 빌리는 어느 순간 시간 이동을 하게 된다. 그는 이 시간에서 저 시간으로 자신을 옮겨가게 된다. 그러니 이 소설은 전쟁 때였다가, 빌리가 막 자리를 잡았을 때였다가, 더 나이가 들었던 때였다가, 여기에 환상적으로 트랄파마도어인이라는 외계인까지 등장한다. 그들이 빌리를 데리고 가, 그들 행성에서 구경거리로 삼는다. 그럼에도 빌리는 이 모든 시간을 다 경험할 수 있다.


어쩌면 빌리의 이러한 시간 이동은 딸이 빌리를 판단하는 것처럼 제 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전쟁의 참화를 겪은 사람이 정신분열을 겪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으로 인해서 그 전과 같은 생활을 할 수 없는 사람의 모습.


그러한 역사에 자신이 관여할 수 없음을,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깨닫는 일, 그것을 외계인인 트랄파마도어인들의 말을 통해서 알려주고 있다. 


'과거, 현재, 미래도 빌리 필그림이 바꿀 수 없는 것에 속했다'(77쪽)고 나오는데, 이 말은 빌리의 사무실에 있던 기도문에 이어서 나오는 구절이다. 빌리의 사무실에 있던 이 기도문의 내용은 '하느님, 저에게 허락하소서 / 내가 바꾸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 평정심과 /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 용기와 / 늘 그 둘을 분별할 수 있는 / 지혜를' (76-77쪽)인데, 이는 트랄파마도어인들에게 납치당한 배우 몬태나 와일트핵의 목걸이에 있는 기도문의 내용과 같다. (243쪽)


역사를 바꿀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작가는 좋은 일만 기억하자고 한다.외계인의 관점을 빌려서 알려주고 있는 것이기도 한데...


이는 불행한 역사에 대해서 우리가 아무리 이야기해도 죽은 자들은 살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얼마나 힘든 고통을 받았는지 살아남은 자는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침묵해야 한다. 이때 침묵은 잊으라는 것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우리가 할 말이 없지만 그렇다고 과연 그러한 역사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작가의 의도가 담겨 있지 않을까. 죽은 자들은 말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작가는 소설의 마지막에 "새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 마리가 빌리 필그림에게 물었다. 짹짹?"(250쪽)이라는 말로 끝내는 것.


인간들은 왜 그래? 정도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전쟁의 참화를 다루면서 이런 유머를 담은 것은 풍자다. 인간이 인간에게 초래한 비극, 그러한 비극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난감해하는 작가의 모습.


하여 소설에서는 드레스덴 폭격을 목격한 빌리인데, 그 아들인 로버트는 그린베레가 되어 베트남 전에 참전을 한다. 이런 대조적인 모습. 이것이 바로 풍자다. 작가는 전쟁의 비극을 겪었음에도 역사가 반복되고 있음을 이런 모습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작가 역시 이러한 학살에 대해서 말하기 힘들었나 보다. 시간에서 해방된 빌리 필그림을 통해 전쟁으로 인한 비극을 보여주고 있으니... 하여 '그렇게 가는 거지'라는 말이 '그렇게 가게 하면 안 되지'라는 말로 들린다면 그것은 나만의 착각인가.


아무튼 작가의 내용 전개에 감탄하면서 읽었다. 그러면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학살들을 생각하고. 기도문의 앞부분이 아니라 중간부분을 생각한다.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라는 말을.


어쩌면 우리는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여기면서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새의 물음으로 소설을 끝낼 수밖에 없던 것인지. 우리가 여전히 침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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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 앤드 엔솔러지
이서수 외 지음 / &(앤드)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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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작가의 소설이 실려 있다. 공통된 소재는 '언니'다. '언니' 한때는 윗사람을 일컫는 말이었지만, 지금은 여성이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여성을 부를 때 쓰는 호칭으로 주로 쓰인다.


그러니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라는 제목으로 여성들의 이야기를 이 소설집의 주된 내용으로 삼고 있다. 성평등이라는 말을 쉽게 하는 지금 이 시대에, 진정한 성평등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이 성평등이 단지 생물학적인 남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스펙트럼의 성을 모두 포괄하고 있는지 논의해야 하지만, 아직도 여성이 살아가기는 만만치 않는 사회가 우리 사회다.


목숨을 걸고 사랑을 해야 하는 사회가, 그런데 목숨을 걸어야 하는 존재가 주로 여성인 사회가 과연 성평등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육아에 대한 부담을 나누고 있다고 하지만, 많은 부분 육아는 여성이 책임져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회, 육아에 대한 부담 때문에 하던 일을 멈출 수밖에 없는 여성들이 존재하고 있는 사회.


한발 한발 나아가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가야 할 길이 먼데, 지금까지 온 길에도 많은 난관이 있었음을 생각해야 한다. 이 소설집은 그런 점에서 여성들이 걸어왔던 길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여성들이 등장하는, 이들보다 나이가 많은 진희 언니조차도 하던 카페를 접고 다른 일을 준비하는 모습. 이들의 관계. 서로가 마음 편히 만났지만, 나이 많은 언니를 보면서 저 나이가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떨까를 고민하는 사람들.


그래, 나이 들어서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 있다가 아니라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어라고 한다면 어떤 반응이 될지, 그런 사람을 과연 본받고 싶은지, 함께 지내면서도 그렇게 거리를 느끼게 되는 관계들. 한때는 서로 마음 편히 만났겠지만, 그런 관계가 끝나감을 보여주는 이서수의 '어느 한 시절'


엄혹했던 시절, 지방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하면서 다방에서 만난 미쓰 윤과의 일들을 그리고 있는 한정현의 '그 언니, 사랑과 야망'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싶어했던 여성, 그러나 그러한 여성이 특별한 여성이 아니라 우리가 흔히 만날 수 있는 보통의 사람임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어떠한 계기로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게 되는지, 여기서는 미쓰 윤으로 인해 고문까지 당하지만, 그것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 경험을 통해 자신의 길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회 속에서 여성이라는 조건으로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기 이전에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만의 사랑과 야망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것을 실현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아마도 이 소설은 뒷이야기가 더 나올 듯하고.


박서련이 쓴 소설 '둘 중에 하나'는 경쾌하다. 자매 이야기. 아니 사랑 이야기. 사랑의 선택 이야기. 


이주혜가 쓴 '순영, 일월 육일 어때'는 이 소설집의 제목이 된 구절이 나온다. 대학 때 만났던 여성에 대한 이야기. 페미니즘에 대해서 공부했지만, 남편을 따라간 친구이자 언니 순영에 대한 마음. 


치열하게 공부하고 꿈을 꾸었음에도 현실에서 좌절하는 모습을 순영을 통해서 보여준다면, 그러한 순영과 함께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간 수은. 이러한 수은을 통해서 '언니'라는 말이 단지 나이 많은 사람을 의미하지 않고, 해야할 일을 강제하는 어떠한 틀로 작동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수은은 '언니'라는 말을 거부하는데, 이는 사회적인 통념에 갇혀 살지 않겠다는 표현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아 밀이 쓴 '나를 다문화라 불렀다'는 다문화와 자매 간의 갈등을 다루고 있는데, 우리 사회는 이제 누가 뭐라고 해도 다문화 사회다. 이를 부정할 수 없다. 굳이 다문화 사회라는 말을 쓸 필요도 없는 것이 모든 사회는 다문화 사회 아닌가.


폐쇄된 사회에서 살 수 없기 때문에 모든 문화는 다문화다. 그럼에도 특정 국가에서 온 사람들, 그 자손들을 비하하는 의미로 다문화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데, 그것이 어떤 상처로 남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동남아 사람의 모습과 비슷한 언니가 학교에서 놀림 당하는 것을 보고 자란 한국 아빠의 모습을 많이 닮은 동생이 작가가 되어 그런 내용을 소설로 썼다고 하는데...


언니는 다문화라고 놀림을 받고, 이런 언니를 본 동생은 어떻게든 다문화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가족을 아이들에게 알리지 않는다. 그렇게 작가가 되고, 이 과정에서 언니는 동생에게도 소외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데...


자매 사이라도 다르게 학창시절을 보낼 수 있다. 그러나 대개 언니가 먼저 경험하기에, 언니를 보고 자란 동생은 언니가 겪은 어려움을 피해갈 수 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자매들의 모습.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이 지내온 삶의 모습 아니었을까? 먼저 난 여성들이 겪었던 일들이 뒤에 난 여성들이 좀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오지 않았을까?


그들을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라고 물으면, 그것은 그들에게 우리를 돌봐주세요라는 의무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대들로 인해 지금의 우리가 존재한다는 감사의 말로 이해해야 한다.


언니들, 무수한 언니들이 있었기에 성평등이 이루어지는 사회로 나아가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언니라는 말을 이 사회의 현실을 먼저 깨닫고,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말 그대로 먼저 깨어난(태어났다는 의미를 깨어났다고 할 수도 있으니... 선생이란 먼저 난 사람인데, 이때 먼저 태어났다는 말은 먼저 깨우쳤다는 뜻으로 쓸 수 있다고 읽은 기억이 있으니) 사람이라는 뜻으로 쓴다고 생각하자.


그러면 우리는 그들에게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라고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담아 '언니'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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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열렸다
정보라 지음 / 새파란상상(파란미디어)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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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귀신 그러면 공포를 느껴야 하는데, 이 소설은 공포보다는 달달한 사랑 이야기 느낌을 준다. 귀신 이야기라고 했지만 꼭 귀신은 아니다. 현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변신을 하는 것 뿐. 그러니 변신 이야기라고 해야 하나.


이런 종류의 변신 이야기는 많이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슈퍼맨이나 배트맨, 스파이더맨도 변신 이야기 아닌가. 이들 역시 인간으로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다른 존재로 바뀌게 된다. 물론 이들은 좋은 역할을 맡지만.


이 소설에는 늑대인간과 달걀귀신이 나온다. 어느 순간 늑대인간이 되어 자신을 통제할 수 없고, 기억도 할 수 없는 남자와 달걀귀신이 된 여자. 


이들은 만화가와 카페 주인으로 평범하게 살아간다. 그러다 우연히 만나게 되고... 늑대인간으로 변신한 남성(진혁)이 달걀귀신이 된 여성(연주)를 공격(?)해 - 이상하게 이 변신한 늑대인간은 기억이 없어 아무나 공격한다, 하다못해 처음 변신 때는 자신의 아버지를 공격했다고 하니 - 경찰서에 끌려가게 된다. 물론 여자는 별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렇게 시작된 인연.


여자의 전 남편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그들을 방해하고, 이 방해에는 다양한 귀신들이 나오는데, 그래서 문이 열렸다라는 제목은 다른 세계의 존재들을 만나는 문이 열린 것.


현실의 단단함이 어떤 순간 깨지는 때가 있는데 작가는 그것을 이러한 귀신 이야기를 통해서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안전하다고,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삶에도 이러한 기이한 일들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까.


귀신들이 나오지만 그렇게 괴기스럽지는 않다. 아마도 이 소설을 읽으면서 진혁과 연주의 격의 없는 티격태격이 달달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주로 어려움을 겪는 존재는 진혁이지만, 진혁이 어려움을 겪을수록 연주와의 사이는 더욱 가까워진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일을 경험한다는 공통점이 그들을 가까이 하게 했는지도 모르지만, 이때 평범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평범에서 벗어난 것은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인가. 그것은 다르다는 이유로 비난받아야 하는가. 물론 남에게 해를 끼치면 비난이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다름 자체로 비난을 해서는 안 된다.


이들은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그것을 감추고 산다. 알려지면 제대로 사회생활을 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 그것은 아버지가 진혁이에게 하는 말에서 나타난다. 결코 티내지 않는다면 남들과 같이 살 수 있으리라는.


하지만 다른 존재가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또는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일로 그 다름이 표출되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그런 다름의 표출이 그들을 사회에서 밀어내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데...


그러니 진혁이나 연주는 자신들이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서로 알고 있으니 그들의 관계는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긴장하지 않고 만날 수 있는 관계, 그것 아니겠는가.


하여 소설은 행복한 결말로 가는데... 여기에 이해해주는 사람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진혁의 동생 진경과 결혼하게 되는 사람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누군가에게 이해받는다는 것, 그것은 계속 살아갈 힘을 주고, 어려움을 벗어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한다.


뭐, 이렇게 특이한 존재의 사랑 이야기로 이 소설을 읽어도 된다. 공포보다는 사랑스러움이 더 많이 드러나고 있으니까. 또한 무섭고 힘든 상황에서도 작가 특유의 재치 있는 표현, 또는 가볍게 툭 치듯이 하는 표현들이 있어서 손에 땀을 쥐는 공포를 느낄 수는 없다.


가볍고 경쾌하고 빠르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작가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솜씨에 소설의 사건을 그냥 따라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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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날 세계에서 - 내란 사태에 맞서고 사유하는 여성들
강유정 외 지음 / 안온북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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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만날'이라는 미래형이 아닌 '만나는'이라는 현재형이 되어야 한다. 이 책은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탄핵소추를 당해 헌법재판소에서 탄핵 심판을 받는 동안에 쓰여진 책이기 때문이다.


참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섰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나서는 안 될 비상계엄이 선포되었기 때문이다. 과거 독재를 떠올리는 사람들, 그리고 비상계엄을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무시무시한 포고령 내용을 보고 놀라 거리로 나온 사람들. 비상계엄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 나온 사람들 등등.


이들이 탄핵을 찬성하는 이유는 다시는 이런 일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고, 또한 그것은 민주주의에 반하는 행위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정치인은 이 나라에서 정치를 할 자격이 없다는 것. 그럼에도 버티고 있는 사람에게는 국민의 힘으로 끌어내리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엄동설한에...


'키세스'라고 불릴 정도로 은박 담요를 둘러싸고 추위에도 포기하지 않고 거리로 나온 이유는 민주주의는 우리가 지켜야 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 또 우리 후대들이 사는 세상이 민주주의 세상이어야 하기 때문.


그런 민주주의는 미래형일 수 없다. 민주주의라는 미래의 때를 맞이하기 위해 지금 독재를 용인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바로 지금-여기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만날 세계이다.


따라서 광장에서는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해야 한다. 누구나 자신의 말을 할 권리. 자신을 존재 자체로 인정받을 권리가 지켜지는 장소, 그것이 광장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고 보듬고 도와주려는 마음. 상대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려는 마음. 물론 처음에는 자신과 다른 존재들을 밀어내려는 모습도 보였지만, 광장에 모이면서, 탄핵을 함께 외치며 우리가 만날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를 고민하면서 차이를 차별로 보지 않고 차이로 보는, 그러한 다양성이 민주주의를 더욱 풍요롭게 함을 깨닫는 모습이 잘 나타나고 있다.


글서 그들은 이미 광장에서 다시 만날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한번 경험한 세계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남아 지속시키려는 노력을 하게 한다.


광장에서 외쳤던 수많은 외침들이 이제는 실현되어야 할 단계로 접어들었다. 지금은 탄핵이 완료되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서 새로운 정치가 시작되고 있으니...


이 새로움이 그 전에 있었던 탄핵 이후를 반복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다시 만나는 세계일 테고. 한번 경험한 것을 다시 반복하지는 않을 테니, 광장에서 터져나온 다양한 목소리들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지 지켜봐야 한다.


이 책을 읽으며 그때의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추운 날씨에도 광장에 모인 사람들, 서로가 서로를 보듬던 사람들. 네것 내것 할 것 없이 상대에게 필요한 것을 주던 사람들. 지방에서 올라오던 농민들이 남태령에서 막혔을 때 지체없이 남태령으로 달려갔던 사람들. 자신과 다른 생각, 다른 정체성을 지닌 사람이 말을 할 때 그것을 받아들여주던 사람들의 모습.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하는 모습을 이미 보여준 그 광장의 모습. 그것을 잊지 않게 이 책은 그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있다. 기억은 강하다. 기억은 미래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준다. 이 책은 그래서 우리가 다시 만나는 세상이 어떤 세상이어야 할지를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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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 - 월급사실주의 2024 월급사실주의
남궁인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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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사실주의, 2024'다. 월급은 보통 사람들이 직업을 가졌을 때 생활(또는 생계)을 위해 받는 돈이니, 여기에 사실주의라는 말이 붙으면 지금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이 살기 위해 어떤 일을 하는가 또는 어떠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가를 살핀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을 표방한 소설집이다. 그러니 이 소설집은 사실주의 소설이고, 사실주의를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를 쓴다면 현실을 사실적으로 반영한 소설이니, 우리 사회의 모습을 작품을 통해서 보여주는 소설집이라고 하면 된다. 


지금 우리 사회가 처한 현실을 작가의 눈으로 보고, 작가가 창조한 인물을 통해서 우리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일, 그런 작품을 읽고 우리 사회의 모습을 파악하고 바꾸어야 하는 현실이라면 바꾸려고 하는 모습을 지니게 하는 것. '먹사니즘'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를 주제로 표현한 소설집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이 문학이 지닌 힘 아니겠는가? 단순한 비판에서 멈추지 않고 비판을 통한 연대, 연대를 통한 변화까지 갈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래서 예로부터 문학 작품 중에는 금서로 지정된 것들이 많지 않았는가.


문학이 그 자리에서 향유되고 끝나지 않고 사회 변화까지 이룰 정도로 힘을 발휘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 문학이 힘을 잃었다. 문학이 힘을 잃은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현실과 괴리되어 자신들만의 세계로 들어갈 때 사람들에게 외면받게 된다.


최근에는 과학소설 또는 SF소설이 많이 읽히고 있는데, 이런 소설들이 현실을 외면하기보다는 우리의 현실을 다른 창으로 보게 만드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는데, 이렇게 다른 창으로 보게 하는 문학도 좋고 그러한 창을 통하지 않고 맨눈으로 보게 하는 문학도 좋다는 생각을 한다.


맨눈으로 보게 하는 소설, 이를 사실주의 소설이라고 하고, 많은 국민들이 월급을 받아 생활하고 있으니, 이 월급을 노동을 통해 급여를 받는 사람만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돈을 벌어 생활하는 사람들을 포괄하는 용어로 해석한다면, 우리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겪고 있는 일들을 중심으로 소설을 썼다고 보면 된다.


그렇게 작가들이 모여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기로 했다고... 이들이 '월급사실주의'라는 이름으로 모여 작품을 썼다고...이들의 규칙은 이렇다.


① 한국사회의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는다. 비정규직 근무, 자영업 운영, 플랫폼 노동, 프리랜서 노동은 물론, 가사, 구직 , 학습도 우리 시대의 노동이다.

② 당대 현장을 다룬다. 수십 년 전이나 먼 미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를 쓴다. 발표 시점에서 오 년 이내 시간대를 배경으로 한다.

③ 발품을 팔아 사실적으로 쓴다. 판타지를 쓰지 않는다.

④ 이 동인의 멤버임을 알린다.


이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소설집에는 어떤 한국사회의 먹고사는 문제가 담겨 있을까. 그것을 소설집의 맨 앞에 정리해 주었다.



이 사진을 보면 어떤 문제를 다루고 있는지 알게 되니 더 말을 할 필요가 없겠다. 그러한 주제를 가지고 소설을 썼고, 우리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제들이다.


그런 문제들이 무겁게도 다가오지만 소설은 그럼에도 희망을 주려고 한다. 소설의 결말이 비극이어도 소설을 읽은 사람은 그 비극 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하지 않는다. 비극 속에 같이 침잠해 버리면 어떻게 문학을 통해서 변화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프리랜서 아나운서의 하루를 중심으로 한 '오늘도 활기찬 아침입니다'를 시작으로 하는데, 남들이 보기에 화려해 보이는 아나운서들, 방송일이 심리적인 긴장도 있지만 육체적으로도 매우 힘든 일임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정규직이 아닌 프리랜서, 그것도 정규직에서 잘나가다가 프리랜서로 전업한 사람들이 아니라 애초에 프리랜서로 입사한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힘듦을 소설이 보여주고 있다.

보기에 화려해 보여도 당사자는 아님을, 또 겉보기에는 초근에 지향하는 가치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가치를 이윤을 창출하는 도구로 이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소설 '식물성 관상'에서도 겉보기에만 치중해서는 우리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진짜 모습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소설집 제목이 된 '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을 보자. 소설을 읽으면 인성이 좋은 사람은 가맹점 점주다. 본사 직원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입에 발린 말을 할 뿐이다. 그런데 누가 더 잘나가는가?


본사 직원은 정규직이다. 요즘 시대에 정규직이라는 말은 자랑거리가 된다. 프랜차이즈점을 낸 사람은 어떨까? 그들은 이윤을 내지 못해도 가게를 접고 싶어도 본사와의 계약때문에 쉽게 그만두지도 못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프랜차이즈점 말고도 자영업자들은 수시로 폐업을 하지 않던가. 그렇게 살기 힘든 상황인데, 프랜차이즈점을 관리하는 본사 직원들은 어떤가. 이들의 인성이 프랜차이즈점을 운영하는 점주보다 좋은가?


인성이 좋고 나쁘고가 돈을 벌고 못 버는 것을 좌우하는가? 아니다. 인성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식물성 관상'을 읽다보면 인성이고 뭐고 이윤을 위해 사람들을 이용하는, 아니 현 시대가 추구하는 가치까지도 이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자낳괴'(솔직히 이 말을 이 소설에서 처음 만났다. 줄임말이 워낙 많아 요즘은 검색을 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너무 많은데, 이렇게 줄임말을 쓰는 것이 요즘 우리 시대의 모습이기는 하지만, 과연 이게 바람직한가. 생일파티, 이 네 글자가 생파라는 두 글자가 되면 무엇이 더 이로운지. 자낳괴는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이라고 한다)가 실재하는 현실이다.


언급하지 않은 다른 소설들도 앞 사진에 있는 주제를 중심으로 내용을 전개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들이고, 그런 문제들을 소설이라는 거울을 통해 보면서 우리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게 된다.


이 소설집을 읽었으니, 그 전에 나온 2023, 그리고 뒤에 나온 2025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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