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 씨
커트 보네거트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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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부를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려는 부자가 나온다. 그의 행동은 이해받지 못하고, 오히려 정신병자로 오인받을 수도 있다. 여기에 변호사가 나온다. 악덕 변호사라고 할 수 있지만, 글쎄? 변호사라고 다 선량한 사람은 아닐 터. 오히려 돈을 위해 복무하는 인간이 변호사일 수도 있으니... 돈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돈을 목적으로 변호하려는 인물을 악덕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싶다. 당연한 미덕?


신에게 축복을 받았는지 현세에서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현세에서 잘사는 것이 바로 신이 내린 축복의 증거라고 하는 종파도 있다고 하니까... 그렇다면 가난하게 사는 사람은? 죄인인가? 참.


하여간 자신의 노력도 없이 물려받은 부가 축복일까? 그것을 자신의 능력인 양 또는 축복인 양 아무런 거리낌 없이 누리는 것이 좋은 모습일까?


노블레스 오블리쥬라는 말을 귀족들에게만 써서는 안 된다. 현대판 귀족은 바로 자본가들 아닌가. 굳이 자본가가 아니어도 수십 억 연봉을 받는 사람들(수십 억? 그들에게는 부자 축에도 못 드는 돈이겠지만, 대부분 보통사람들에게는 엉청난 돈이다. 해마다 수십 억을 벌 수 있다는 것은)은 자신에게 그러한 돈이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는지, 그 돈을 어떻게 쓰는 것이 바람직한지 고민해야 한다.


그러한 고민에서 나온 것이 현대판 '노블레스 오블리쥬' 즉 '기부 문화'다. 내가 가진 것을 남과 함께하겠다는 실천, 그것이 기부다. 기부를 통해 부를 어느 정도 나누는 것, 돈이 없어서 생활을 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는 것, 그것이 가진 사람들이 지녀야 할 덕목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99개 가진 사람이 1개 가진 사람의 것마저 갖고 싶은 욕망을 지니고, 또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으니, 돈이 돈을 먹는 사회에서 그러한 기부를 실천하고 사는 사람은 보편적이지 않다.


기부하는 사람을 칭찬하는 것은 기부가 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특별한 경우로 취급되기 때문인데... 가진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이 일상의 모습이라면, 기부하는 사람을 칭찬하는 문화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부하지 않는 사람이 신문에 실리는 사회가 되겠지.


그런 사회가 유토피아일까? 내가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남과 함께하는 사회. 유토피아일 수 있다. 꿈에 있는 사회, 현실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 능력주의라는 말이 유행하는 지금, 돈은 내 능력을 보여주는 지표가 되기에, 현실에서는 더더욱 나누는 사회가 이루어지기 힘들다. 


만약 그런 사회가 이루어지려면 논쟁이 되고 있는 '기본소득'이 게으름뱅이를 양산한다는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들이 없어야 할 것이다.


이 소설, 바로 이러한 점을 다루고 있다. 엄청난 부자. 그러나 자신의 부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사람. 상류층의 문화 속에 살기 보다, 힘들게 사는 사람들 곁에서 그들과 함께하면서 그들의 고민을 듣고 적당한 돈도 주면서 사는 사람, 엘리엇 로즈워터. 그에게 신의 축복이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는데, 엘리엇의 대척점에 있는 또다른 프레드 로즈워터는, 보험판매원으로 상대방이 죽어야 보험금을 타는 생명보험을 들라고 하는 사람이다. 그에게도 신의 축복이 있기를 이라면서 죽은 사람의 가족이 말할 것이라는 장면이 있는데... 두 장면에 나오는 말은 같지만 지니고 있는 마음은 다르다.


엘리엇은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해서 감사의 말을 듣는 반면, 프레드는 사람이 죽어야 남들이 살게 도는 일을 해서 감사의 말을 듣는다. 그것이 진정 감사의 말인지는 의문이지만.


그러나 세상은 이러한 부자를 가만 놔두지 않는다. 막대한 재산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돈을 보고 꼬여드는 파리들이 있기 마련. 소설에서는 무샤리라는 젊은 변호사가 그 역할을 한다. 그리고 돈에 눈이 멀어, 사실 친족이라는 이유말고는 재산을 물려받아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프레드가 돈 욕심을 내어 변호사와 함께 소송에 참여하고 있으니... 


작가가 보여주는 세계는 '돈이란 건조시킨 유토피아라네'(187쪽)라는 또다른 변호사의 말이 통하는 사회인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런 세상을 뒤집는다. 엘리엇이라는 인물을 통해 돈은 특정 개인이 움켜쥐고 자신만을 위해 써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송에 걸린 엘리엇이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면서 소설이 끝나는데, 그 결말에 웃음지을 수밖에 없다. 하, 이런 대안을 내놓다니... 참...


돈이 있으면 행복하게 살 수 있지만, 돈만으로는 행복하게 살 수 없다는 것을, 오히려 돈은 서로 나누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데... 이 소설에서도 지금까지 읽은 보니것(이 번역에서는 보네거트란 이름으로 나온다)의 소설 속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제5도살장]에 나오는 외계인 '트랄파마도어인'들도 나오고, 환상 소설을 쓰는 작가 트라우트도 나오고, 그리고 2차세계대전 때 겪는 일들도 나오는데... 


세 권째인데... 참 많이 연결되는구나, 이 작가의 소설을 읽어가면서 또 이렇게 연결된 인물을 만나게 되려나 하는 기대도 하게 된다.


무엇보다 작가의 풍자에 감탄을 하게 되는데... 경쾌하게 진행되는 사건을 통해 소설을 읽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그러면서 무엇을 풍자하는지, 지금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논쟁 중인 사안들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이 무엇인지도 생각하게 되고.


여기 대조적인 두 주장이 있다. 비교해보자.


'태어날 때부터 이 나라의 큰 덩어리를 소유하게 하고 다른 아기한테는 땡전 한 푼 쥐여주지 않는다면, 그건 매정한 정부라고 생각해요. 한 나라의 정부라면 최소한 모든 아이에게 재물을 공평하게 나눠줄 수 있어야 해요. 안 그래도 힘든 인생인데, 돈 문제까지 고민하다 병이 나서야 되겠어요? 우리가 조금 더 나눈다면 이 나라의 모든 사람이 풍족할 거예요.'(137쪽. 엘리엇의 말)


'재산 기부는 무익하고 파괴적인 행위라는 것, 그건 가난한 사람들을 풍족하거나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응석받이로 만든다는 것! 그리고 기부자와 그의 후손들은 징징 짜는 가난뱅이와 똑같이 된다네.' (186쪽. 재산을 관리하는 법률대인인 매캘리스터의 말)


여기서 부유세 또는 누진제 세금과 기본소득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정부에게 무엇을 정책으로 만들어 실행하게 해야 하는가. 오로지 당신의 능력에 따른 결과이므로, 거기에 정부가 개입할 필요는 없다는 최소 정부를 주장하겠는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부의 분배를 추진하는 최대 정부를 주장하겠는가. 꼭 양극의 정부를 주장하지는 않더라도 그 스펙트럼 상에서 어느 쪽으로 가는지 자신의 입장을 정리할 수는 있지 않을까.


적어도 작가는, 커트 보니것은 부를 나누어야 한다는 쪽으로, 사람들은 평등하게 살아야 한다는 쪽으로 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래서 이러한 소설을 썼겠지. 늦게 만난 작가지만 그의 작품에 감탄을 하게 된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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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나이트
커트 보니것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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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나이트 'Mother Night' 낯선 말이다. 엄마와 밤이라니... 이 말을 붙이면 밤엄마가 된다. 엄마밤이라고 할 수도 있고. 엄마 밤이라고? 밤이 엄마이면 낮은 자식이다. 즉 밤은 낮을 낳은 엄마가 된다. 이를 서문에서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레스의 말에서 따왔다고 하는데, 그 말은 '나는 태초에 전부였던 암흑의 일부, 빛을 낳은 밤의 일부이다'(16쪽)이다.


그렇다면 밤을 어둠이라고 보고, 낮을 빛이라고 보면 어둠은 빛을 낳은 엄마와 같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데 빛과 어둠이 모두 있다고 볼 수 있고, 이러한 빛과 어둠 중에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보이며 살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하여 소설은 '우리는 가면을 쓴 존재라는 것, 그래서 그 가면이 벗겨지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9쪽)고 하고 있는데, 사람에게는 누구나 양면성이 있다. 이때 가면을 우리가 지켜야 할 어떤 것, 적어도 삶에서 버려서는 안 되는, 잃어서는 안 되는 무엇이라고 하면, 가면을 벗어버린 존재는 자신의 욕망만을 추구하거나, 다른 존재를 오로지 자신만의 판단으로 재단하고 행동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양면성을 지닌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을 이렇게 가면으로 표현했다고 보면.


이 양면성을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자신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지 아닌지가 결정된다고 할 수 있는데...


소설은 2차세계대전 때 나치의 편에 서서 연설을 한 미국인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그는 나치를 위해 많은 연설문, 광고, 그림들을 만들어낸다. 물론 그는 작가로 희곡을 창작하고 연극으로 무대에 펼쳐지게도 한다.


그런 그가 미군에게 포섭되어 미국의 스파이 활동을 하게 된다. 물론 자신은 그렇게 활동했다고 믿고 있고, 그는 나치에게 완전히 동조하지 않았다고 스스로도 믿고 있다.


하지만 그가 사랑하는 사람은 독일인인 헬가였고, 헬가와의 관계를 둘만의 제국을 만들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사랑하는 사람과 있을 때 이 나라냐 저 나라냐보다는 그들의 관계가 더욱 중요했다고, 삶에서 거창한 이념보다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소중함을 보여주고 있다. 헬가와 헤어졌을 때, 그에게 이 제국은 무너져내린다. 


'둘만의 제국이었다. 그리고 그 제국이 사라졌을 때 나는 지금의 나인 동시에 앞으로의 영원한 나, 즉 나라 없는 사람이 되었다.'(74쪽)고 하워드 켐벨은 말하고 있다.


그에게는 이제 독일이냐 미국이냐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나라가 중요한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삶을 왜곡하고 구속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를 소련의 스파이로 나오는 인물과 헬가의 동생 레지, 그리고 미국에서 활동하는 극단주의자들이 그런 모습을 보인다.


이들과 만나는 켐벨을 통해 그들의 모습을 풍자하고 있는데, 이는 독단적인 이념, 또는 국가적인 이념에 자신을 맡겨 자신이 어떤 일을 하는지 성찰하지 못하는 인간들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악의 평범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주어진 이념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그런 사람들이 판치는 세상이 과연 제대로 된 세상일까? 오히려 대외적으로 나치의 선전가로 알려진 켐벨이 사실은 미국의 정보원이었으며, 그가 자신이 한 일을 알고 인정하고 있으니... 그는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톱니바퀴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을 지탱해주는 톱니바퀴를 잃은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맹목적으로 행동한다. 이들의 행동에는 사유가 끼어들 틈이 없다. 왜냐하면 사유라는 톱니바퀴가 닳아없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갈려 없어진 톱니들은 단순하고 명백한 진리, 열 살짜리 아이라면 대부분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진리이다. 톱니바퀴의 톱니를 일부러 갈아버린다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정보를 일부러 무시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또한 나치 독일이 문명과 광견병 사이의 중요한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우리 시대에 보았던 미치광이 군대, 미치광이 국민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그럴듯한 나의 이론이기도 하다'(287-288쪽)


바로 이것, 우리는 사유라는 톱니를 갈아 없애버리면 안 된다는 것. 하여 소설은 오히려 나쁜 사람이라고 낙인찍힌 나치 선전가인 켐벨을 통해 그보다 더한 극단주의로 흘러가고 있는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그의 전후 삶과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사회의 그러한 극단적인 모습, 극단적인 사람들의 행위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럼에도 소설에는 어떤 긴장이 느껴지지 않는다.


가볍게, 농담을 던지듯이 사건을 서술하고 있는데, 이러한 가벼운 전개가 오히려 사회의 무거운 적대 행위들이 얼마나 가당치 않은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인물의 말을 통해 작가는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하고 있는데, 정작 하고 싶은 말이 바로 소설의 끝부분에 나온다.


'악이 어디 있는 줄 아는가? 그건 적을 무조건 증오하고, 신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신과 함께 적을 증오하고 싶어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온갖 추악함에 이끌리는 것이다. 남을 처형하고, 비방하고, 즐겁게 웃으면서 전쟁을 벌이는 것도 백치 같은 그런 마음 때문이다.'(320쪽)


보니것이 살아있다면 지금 세계의 현실을 보면서 아마도 이 말을 다시 했을 것이다. 다른 존재들을 악으로 규정하고, 신은 오직 자신의 편이라고 하는, 사람에게는 양면성이 있으며, 그 양면성을 남이 판단할 수 없음을 켐벨의 경우를 들어서 보여주고 있는 작가에게, 이런 세상은, 남을 악마화하는 이 세상은 용납할 수 없는 세상이었을 것이다.


만약 남의 어둠을, 밤을 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어둠 속에서, 밤을 통해서 빛을, 낮을 태어나게 해야 하지 않을까? 아니, 그에게도 빛과 낮이 있음을 먼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두 권째 읽은 커트 보니것의 소설. <제5도살장>에서도 이 하워드 켐벨이란 인물은 언급이 된다. 이 인물을 통해서 전후 사회의 모습을 풍자하고 있는 소설. 다음 작품도 기대하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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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집
정보라 지음 / 열림원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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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무거운 주제를 이토록 가볍게 이끌어가다니, 이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사건을 전개하는 능력, 그것을 표현하는 글재주...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사랑 아닌가 한다. 사람에 대한 사랑, 세상에 대한 사랑. 그러한 사랑이 행동으로 나서게 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작품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무겁고 우울할 수 있는 주제를 선택했다. 버려진 아이들이 아니라 납치된 아이들, 이윤을 위해 이용당하는 아이들. 그렇게 아이들을 이용하고 착취하는 어른들, 여러 단체들. 명목상으로는 참 좋은 말들을 내걸지만, 그들이 하는 일은 결국 자신들의 이익이다.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라고 하지만 돈이라면 무엇이든 된다는 사고 방식과 행동. 아이들을 생명으로 보지 않고 상품으로 보는 그러한 태도들. 이런 어른들이 있는 세상이라면 아이들은 안전하지 않다.


아이들에 대한 사랑, 아이들이 건강하게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작가에게 이런 세상은 바꿔야 할 세상이다. 사랑이 있으면 그 사랑하는 존재를 지키기 위해 나서야 한다. 침묵하면 안 된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작가의 작품을 이끌어가는 것은 사랑이다. 그 사랑이 이토록 무겁고 우울한 주제를 밝고 경쾌하게 이끌어간다. 귀신이 나오더라도 머리가 쭈뼛 서는 것이 아니라, 이 귀신을 통해서 무언가가 해결되겠구나, 귀신이 위로를 해주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고 있으니...


환상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일들이 정리되어 전개되고 있다. 귀신이 나온다고 먼 미래의 이야기라고 환상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다. 이렇게 소설의 배경은 지금 우리하고는 너무도 다른 현실을 보여주지만, 그러한 비현실을 통해 현실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


비현실을 통해 현실을 살아가게 한다고 해야 하나? 아이를 납치해 입양보내는 일, 아이들을 더 많이 수용할수록 돈을 더 많이 받는 구조, 그러한 아이들을 이용하는 어른들의 모습, 그것이 종교를 빙자해 벌어질 때, 또 과학이라는 이름을 빌어 행해질 때 얼마나 해악을 끼칠 수 있는지를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우울하지 않은 것은 이 사건들을 대처하는 인물들의 모습, 또 생기발랄한 아이들의 모습을 이 소설에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집. 아이들이 언제나 갈 수 있고, 나올 수도 있는 곳.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곳. 어른들의 보살핌을 받는 곳. 그렇다고 특정한 규정에 매어 있지 않은 곳. 한번 들어가면 정해진 시간이 아니면 나올 수 없다든가, 한번 나오면 다음 날이 되어서야 들어가야 한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없는 아이들만 보호를 받는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아이라도 자신이 원하는 때에 있을 수 있는 곳. 


그러한 곳에서 보살핌을 받는 아이들은 구김살 없이 클 수 있다. 사랑받는다는 것을 아니까. 이 소설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집에 있는 아이들은 장애가 있는 아이들이 있다. 장애, 비장애 따지지 않는 곳. 또 성적 지향을 따지지 않는 곳. 그러한 사회. 그러한 장소.


하지만 비극은 언제든 있을 수 있다. 아이의 죽음. 그리고 아이의 죽음을 살펴가면서 밝혀지는 진실.


여기에 참 이름도 고상한 단체가 등장한다. 하긴 예전 보육원들 이름이 얼마나 고상했던가를 생각하면 새삼스럽지도 않다. '어린 사람들의 행복을 지지하는 모임'이라니... 그런 이름을 가진 단체가 아이들을 돈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다는 역설. 참 가당치도 않는 짓들.


아이의 죽음과 해외에 입양된 사람들의 입양과정을 살피는 과정에서 소설은 우리 사회의 치부를 보여준다. 사람을 돈으로만 생각했던 사람들, 나약한 상태의 사람들을 이용하는 사람들. 부모의 욕망과 불안감을 부추겨 자신의 이득을 챙기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반대편에 편견 없이,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으로 다른 사람과 어울리고 보살피는 사람들이 나온다. 세상은 다 나쁜 사람들만으로도, 다 좋은 사람들만으로도 이루어져 있지 않다.


그건 환상 소설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조금 더 좋은 사람들이 많은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좋은 사람들이 인정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집'은 허구다. 그러나 이러한 아이들의 집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방향이다. 돌봄을 개인에게만 맡기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함께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 나라의 존재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은가.


거주할 수 있는 조건, 아이를 편하게 돌볼 수 있는 조건, 그리고 그것이 누군가의 의무가 아니라 시민들 모두의 보편적 의무이자 권리가 되는 사회. 소설 속 사회는 그러한 모습을 띠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무정형'이 집 관리사로 나오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이주 전과 이주 후에 집을 살펴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지 여부를 확인하는 사람. 또 이름이 무정형이다. 정해지지 않음. 그렇다. 정해지지 않음은 자신만의 편견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래서 소설은 이 무정형을 중심으로 내용이 전개된다. 이 무정형이 로봇까지도 사랑하는 모습을 보면 이 인물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세상에 귀신을 보면서도 담담하기만 하다니... 귀신이 사람을 해치기 보다 사람이 사람을 해친다는 점을 생각하다니...


이러한 무정형 때문에, 이와 비슷하다면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우리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던 공지영의 [도가니] (영화로 만들어져 더 많은 영향을 끼쳤다)가 주는 무거운 분위기를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또 그만큼 세월이 흘렀기도 했겠고, 그렇지만 여전히 사람을 돈으로 보는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 안 되게 하고 있으니, 이 소설에서 그들을 '기술과학의 발전을 지지하는 사람들'이라는 이름으로 등장시키고 있다. 이들이 특정 종교단체의 교주를 지지하는 모습은 종교과 기술과학이 잘못 결합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예상하게 한다.


뭐, 앞으로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만. 이 소설을 읽으며 소설 속 '아이들의 집'은 실제 아이들을 보호한다고 했던 시설과는 정반대로 운영이 되고 있으니, 이런 소설 속 아이들의 집이 우리나라에서 탈시설 운동을 하고 있는 장애인들에게 '아이들을 시설에 가두자는 얘기가 아닌데, 그렇게 보이면 어떡하나 걱정했다'(268쪽)는 작가의 걱정은 기우라고 해야겠다.


장애인 운동이 벌이는 탈시설이 바로 이 소설에 나오는 '아이들의 집'을 운영하는 방식과 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으니.


여러모로 재미있게 읽을 수도 있고 또 우리 사회에서 벌어졌던(또는 벌어지고 있는, 입양은 현재형이니까) 일들도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좋은 소설이라는 생각을 한다. 작가의 다음 소설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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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마,


  그릇을 굽는 도구. 실용적인 그릇부터, 예술 작품이 되는 도자기까지.


  뜨거운 가마 속에서 흙은 작품이 되어 나온다. 우리 삶에 다가오게 된다.


  가마는 그래서 미래를 품고 있는 상자다. 판도라의 상자에는 온갖 것이 들어 있다고 했는데, 그 상자에는 이미 완성된 것들이 들어 있을 뿐이다.


  물론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판도라의 상자는 인간에게 좋은 역할을 하지 못한다. 인간을 벌하기 위해서 보낸 상자니까. 그것을 열면 온갖 것들이 나오지만, 그 중에는 안 좋은 것들도 꽤 많았다고.


하지만 가마는 아니다. 가마 속에는 완성되지 않은 것들이 들어간다. 미래를 품고 있는 것들이 가마 속에서 자신들의 미래를 만들어간다. 


만들고 나면 그때서야 가마 밖으로 나온다. 완성되지 못할 것들은 가마 속에서 깨져버리거나, 나오자마자 폐기되고 만다. 판도라의 상자와는 다르다. 가마는 우리 생활에 도움을 주는 것들을 내보낸다.


이러한 가마를 우리 인생이라고 하자. 인생살이를 시로 소설로 수필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글로 표현하지 못하더라도 말로 표현을 한다. 우리의 삶이 가마라면,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흙을 가마에 넣어 무언가를 만들어내 밖으로 내보이는 것과 같다.


어떤 가마는 아주 높은 열로 빠른 시간 안에 흙을 구워 내보내지만, 어떤 가마는 약한 열로 오랫동안 흙을 구워 내보낸다. 어떤 것이 더 좋다 나쁘다 할 수 없다. 가마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의 특성에 따라, 또 어떻게 만들어내느냐에 따라 달라질 뿐.


이 시집은 시인이 삶 속에서 굽고 굽고 또 구워서 드디어 내보내는 시집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삶 속에 넣고 이리저리 만지고 또 만지고, 열을 가하고 또 가하고, 드디어 이 정도면 되었다 싶을 때 꺼내놓은 시들.


그래서 [60년의 가마를 열다]는 시인이 살아온 생애를 글로 풀어내다라고 할 수 있다. 시집의 첫시가 '60년의 가마'다.


 60년의 가마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조심스레 미루어 추측해 본다

어느 순간 이 세상의 부름을 받았고

그로부터 태동이 시작되었을 게다

세상의 시계 소리를 귀담아들으며

인간 면모를 갖추는 연습했을 거다


이것은 나와 아주 가까운 그 누구도

내게 눈치로도 알려준 적 없어

내가 여태껏 짐작해낸 것뿐이다

어떤 그릇이 될 거라는 그림도 없이

처음엔 순수한 채 투박한 토기처럼

점차 빛나는 도자기를 빚어내려 했었다


36.7 인간 세상의 가마에서

60년 시간 담금질로 구워낸 그릇들

설렘을 안고 맞선을 보이려 합니다


조이섭, 60년의 가마를 열다. 그림과 책. 2021년. 16쪽.



이 시집의 서시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된다. 이렇게 시인은 자신의 인생을 드디어 가마 속에서 꺼내어 보여주기 시작한다. 자신이 겪은 일들, 감정들을 시로 만들어 가마 속에서 꺼낸다.


시집을 통해 우리는 가마 속에서 나온 시인의 삶을, 시인의 그릇들을 만나게 된다. 차분히 하나의 인생이 가마 속에서 어떻게 빚어지고 달구어졌는지를 이 시집을 통해서 만나게 된다.


그러면서 나는 내 인생을 가마 속에서 어떻게 굽고 있는지 생각한다. 나 역시 가마 속에 삶이라는 흙을 넣고 지금 굽고 있는 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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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개와 혁명 - 2025년 제48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예소연 외 지음 / 다산책방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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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이다. 논란이 되기도 했었고. 문학사상사에서 발간하다가, 다른 출판사로 넘어가게 되었는데... 오랜 역사와 작품성을 자랑하는 문학상이 사라질 뻔한 위기를 겪다니... 문학의 위기가 이런 식으로 올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지금은 아니지만 한때 이상문학상이 발표되면 수상작품집을 꼭 사보던 때가 있었다. 어떤 작품들이 수상을 했는지, 수상이라는 이름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었기 때문인데...


이번엔 '혁명'이란 말이 들어간 소설 때문에 오랜만에 읽어보게 되었다. '그 개와 혁명'이라니. 읽어보기 전까진 전혀 내용을 알 수가 없던 소설.


읽으면서 무겁게 깔리는 혁명이라는 말 대신에 가벼움을 느끼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이제 '혁명'이라는 말이 지닌 의미도 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2024년 겨울과 2025년 봄, 계엄과 탄핵으로 사람들이 모인 광장이 그 변화를 느끼게 해주었다. 시위 현장에서 늘 불리던 민중가요뿐만 아니라 일반 가요도 불리는 그러한 광장의 모습.


무언가 결단을 해야만 하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는 중압감이 넘치는 시위 현장이 아니라, 생기발랄한, 마치 즐기는 듯한 광장의 모습. 이제 시위도 달라졌는데... '혁명'도 달라져야지.


그래서 이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에 나오는 '성식이 형'이나 아빠 태수 씨, 그리고 엄마가 꿈꾸던 혁명과 그 자식 세대인 수민, 수진의 혁명이 달라졌음을 생각하게 됐다.


NL이든 PD든 80년대 운동권들은 절박한 심정으로 혁명 운동에 나섰다. 그들은 제도를, 사회를 바꾸려고 했다. 그들이 꿈꾼 혁명은 거시적 혁명, 큰 혁명이었다. 그러한 혁명에서 개인이 차지할 자리는 없었다. 혁명을 위해 복무해야 하는 개인만이 있었을 뿐.


그러나 여기에 균열이 생긴다. 바로 태수 씨다. 태수 씨는 아이가 생기자 그러한 혁명에서 발을 뺀다. 사회 혁명도 중요하지만 소중한 사람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을 버릴 수가 없는 세상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한 세대가 지나면 어떻게 되나? 소중한 사람을 지킨다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 속 개인이 아니라, 개인을 뒷받침하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사회가 개인을 옥죈다면, 사회에 저항해야 한다. 그것이 혁명이다.


즉, 사회를 바꾸는 혁명에서, 내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내 삶의 혁명으로 '혁명' 이 바뀐다. 그래서 태수 씨의 장례식은 한 혁명에서 다른 혁명으로 넘어가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바로 개 '유자'의 등장.


그 개가 등장해서 장례식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는 것은 그 전까지 견고했던 제도에 대한 저항이다. 이제 제도가 사람을 규정하지 못한다는 것을 자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사회보다 개인. 그런 사회에서 혁명은 개념을 달리한다. 이제는 내가 춤출 수 있는 사회를 꿈꾸게 된 것이다. 제도를 무시하고, 자신의 마음을 살리는 삶을 살려는 사람들. 그러한 사람들이 있는 사회에서는 예전의 혁명은 불가능하다. 아니, 그러한 혁명을 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를 장례식장에 개를 데려온 '성식이 형'을 통해서 보여준다.


과거 혁명을 꿈꾸던 성식이 형은 이제 수민, 수진 자매의 다른 혁명에 동참한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고자 한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혁명. 그런 시대가 된 것이다.


이런 시대에 쿠테타라고? 누가 동참하겠는가? 거창하게 좌빨, 사회전복세력 운운하더라도 그 말은 먹히지 않는다. 그러한 혁명의 수사(말)는 과거로 사라졌다. 이제는 새로운 혁명, 내 욕구를 가로막는 제도를 거침없이 비웃어버리는 시대가 된 것이다.


하여 예소연의 '그 개와 혁명'을 읽으며 과거의 혁명에서 현재의 혁명으로 변한 사회를 보게 된다. 새로운 혁명을 하는 새로운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탄핵 과정에서 보여준 과장의 모습이 바로 이러한 혁명을 잘 보여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시대의 변화, 새로운 인간형들의 등장을 이 소설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대상이 이러한 작품이었다면, 이제 우수상들은 어떨까? 각자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소설들이 수상을 했는데, 대상을 받은 작품과 비슷한 새로운 인물형이라면 최민우가 쓴 '구아나'에 나오는 해영과 도윤이지 않을까 싶다. 그들 역시 제도를 거부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 하고 있으니. 가끔은 힘들어하기도 하지만 자신들이 추구하는 삶을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밀어나가고 있으니...


이밖에도 김기태의 '일렉트릭 픽션', 문지혁의 '허리케인 나이트', 서장원의 '리틀 프라이드', 정기현의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들 소설 역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기존의 수상집과 다른 점은 작품마다 인터뷰한 내용이 실려 있다는 것. 그러한 인터뷰를 통해 작품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할 기회를 준다는 점이다. 그 점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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