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내 탓일까? 물론 내 탓일 수도 있지. 그렇지만 정작 내 탓이라고 해야 할 사람들은 남 탓을 하고, 자기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양 하고 있는 현실에서, 그래, 그건 내 탓이야 하면 세상이 바뀔까?


 오히려 남 탓만 하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는 꼴이 아닐까? 그것도 권력을 쥔 자들, 조금이라도 있는 자들이 남 탓을 주로 하고, 억울하다고 하는 판에, 자신을 돌아보며 부끄러움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은 더욱 힘들어지고 있는 세상 아닐까.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참... 막무가내로 큰소리를 치는 인간이 떵떵거리는 세상이 아닐까 싶다. 


  단지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자기 이익을 위해 움직이고 큰소리치고 위협하는 인간들이 더욱 권력을 쥐고 있는 현실 아닌가. 이럴 때 과연 내 탓만 하면 되겠는가.


물론 내 탓을 하긴 해야 한다. 그러나 남 탓을 할 필요도 있다. 너희들이 이렇게 만들었어. 너희 때문에 세상이 힘들어지고 있어. 이제 너희들 말 대로는 하지 않을 거야 하고 잘못을 명확히 인식하고, 책임을 묻는 자세.


그런 자세를 과연 남 탓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책임을 묻지 못하는 자세가 바로 남 탓 아닌가. 어쩔 수 없어. 해도 안 돼. 체념하는 순간 내 탓이 굳어져 더이상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그러니 우리 제대로 된 남 탓을 해야 한다. 이우성 시집 제목인'내가 이유인 것 같아서'를 보면서 든 생각인데...


이 시집을 읽으면서 하, 시 참 어렵군. 어려운 말은 없는데 시의 내용이 마음으로 들어오지 않으니, 여전히 시는 어렵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내 탓인가, 하다가 자꾸 내 탓만 하는 것이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런 엉뚱한 생각도 했다.


내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 시를 쓴 시인 탓도 있다고. 시인이 자기만족만을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면 읽는 사람 마음에 어느 정도는 들어올 시를 써야 하지 않나 하고... 시를 잘 이해하지 못 하는 사람으로서 그런 아쉬운 마음을 토로하면서 이 시집을 읽었는데. 


그러다 '새'라는 시를 읽고 이 시 재미있네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말. 새가 과연 좌우의 날개로 날까? 좌우 중심을 잡아줄 몸통이 없으면 날지 못한다. 몸통이 크냐 작냐가 중요하지 않다. 두 날개를 이어줄, 또는 붙잡아줄 몸통이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


좌우 대칭이 완전히 똑같다는 말은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데, 그러한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새는 추락할 수밖에 없다. 이를 정치에 빗대면 좌우 균형이 맞춰진 상태라면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정치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적이 없다면 정치는 제대로 된 적이 없지 않을까. 시에 나온 '이놈의 새 / 너 / 날아본 적 있냐'(97쪽)는 구절은 우리 정치를 비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피식 웃음이 나왔는데...


이 나라 정치에서 과연 좌우 균형이 잡힌 적이 있었던가. 아니 좌우가 뒤집힌 적이 더 많지 않았는가. 어쩌면 좌우 개념조차도 흐릿해진 정치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는데.


이렇게 날아본 적이 없는 정치가 과연 내 탓일까? 이거 정치인이라는 남 탓을 좀 해도 되지 않을까. 그들이 제대로 할 수 있게 우리가 몸통 역할을 하려고 해도, 무슨 날개들이 몸통을 무시하고 저들만 키우고, 상대를 고려하지 않고 제 크기만 불리려 해서 도저히 균형이 잡히지 않으니, 남 탓을 하자.


남 탓을 하다가 이들이 균형을 잡을 수 있게 압력을 넣어야 하는 내 탓도 가끔은 하자. 그래야 좌우 날개에 몸통을 갖춘 새가 되어 날 수 있을 테니까. 그때서야 비로소 새가 제대로 날 수 있게 될 테니. 이 시, 재미 있다. 


      새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왼쪽 첫번째 집은 [조선일보]를 보고

오른쪽 첫번째 집은 [한겨레]를 본다

아침마다 밖에 나오면 내 편과 네 편이 등지고 있다

나는 오른쪽 첫번째 집에 혼자 산다

왼쪽 첫번째 집 방향으로 가본 적은 없다

함정 같은 거에 발이 빠질까 봐

그렇다고 내가 이쪽 신문을 읽는 것도 아니다

한 번만 구독해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정말 한 번이야 하는 마음이었는데

몇 년째 오기로 구독한다

기울어지는 게 싫어서

그런데 왜 내가 오른쪽인가

쟤들이 왜 왼쪽이고

문제될 건 없지만 가끔 어색하게 느껴진다

뭐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돌아서면 오른쪽도 왼쪽도 뒤집혀버리긴 해

아 그렇게 쉬운 일이구나

그래도 실수로라도 몸을 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저쪽으론

작가가 이렇게 편협해도 되나

새는 양쪽의 날개로 난다며

그나저나 참 오래도 산다

이놈의 새

너 

날아본 적은 있냐


이우성, 내가 이유인 것 같아서. 문학과지성사. 2023년 초판 2쇄. 96-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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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퀘이크
커트 보니것 지음, 유정완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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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팽창한다. 계속 팽창하던 우주가 어느 순간 멈추더니 수축을 하기 시작한다. 인간의 시간이 뒤로 간다. 그런데 수축도 계속 하지 않고 딱 10년만 한다. 그리고 다시 팽창하기 시작한다.


우주가 팽창하는 것을 시간이 앞으로 가는 것으로, 수축하는 것을 시간이 뒤로 가는 것으로 상상하고, 이 수축이 빅뱅과 같이 순식간에 일어나 인간들은 인식하지 못할 순간이라고 상상한다.


[타임퀘이크]는 그러한 상상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시간이 10년 뒤로 갔다. 인간은 그 10년 동안 똑같이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과거의 삶을 재연하는 인간이 아니라 경험하지 못한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자유의지가 있는 인간으로 돌아온다.


자유의지가 있는 인간으로 돌아올 때 10년 간의 관행이 몸에 박혀 오히려 인간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뜨린다. 이 혼란 상황을 수습하는 것이 킬고어 트라우트다.


물론 그 역시 우스꽝스럽게 그 혼란을 수습하지만, 우스꽝스러우면 어떠랴? 혼란이 멈추고 인간들이 다시 자유의지로 살아가게 되면 좋은 것이지.


그럴까? 자유의지로 살아가는 인간들이라고 하지만 과연 자유의지가 제대로 작동할까? 그 자유의지에는 이미 자유라고 믿게 하는 강제가 숨어있지 않았을까?


자유의지가 있다면 인간들이 과연 지금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 타임퀘이크 때, 분명 과거이고, 자신은 과거로 돌아갔음에도 영화나 드라마에서 재연배우처럼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있었던 것을 그대로 따라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데, 그래서 보니것은 자유의지를 지니게 되었다는 타임퀘이크 이후에도 인간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실제 인생에서 사람들은 타임퀘이크 후 재연 기간처럼 변화하지도 않고, 실수를 저지르고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며, 사과하지도 않는다.'(214쪽)


아마도 보니것이 10년이라는 타임퀘이크를 상정한 것이 현재를 비판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지금-여기를 잘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신의 과거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위해서.


타임퀘이크라는 상상을 통해서 보니것은 1990년대 또는 그 이전의 미국 사회 모습을 보여준다. 다른 소설에서도 나왔던 장면들, 또 그의 또 다른 글에도 나왔던 사건들, 이야기들이 많이 실려 있다.


보통 일상에서 겪는 일들, 또 그때 자신이 생각했던 것들, 그리고 현재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재연할 수밖에 없는 시공간을 통해서 우리가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게 하고 있다.


하여 이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 속에서 보니것이 말하고 있듯이 작가를 생각하게 된다. 보니것이라는 작가가 1990년대의 미국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그 미국이라는 사회가 변해야 한다고, 그대로 가면 안 된다고 여기고 풍자를 통해서 사람들의 인식에 변화를 주려고 했던 작가를 말이다.


'어떤 예술작품이건 그건 두 사람 사이에 이뤄지는 대화의 절반을 차지해. 작품은 우리에게 말을 하는 사람에 대해 많은 걸 얘기해주거든. ... 그림이 유명해지는 건 그것의 그림다움이 아니라 인간다움 때문이야.' (222-223쪽)


소설에도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보니것의 소설이 유명해지는 것은 그의 소설이 지닌 소설다움이 아니라 보니것이라는 작가가 지닌 인간다움이 소설 속에서 펼쳐지기 때문이라는 것. 그의 인간다움이 계속 우리에게 말을 걸고 거기에 우리도 응대를 하고 있다는 것. 


(작가와 작품을 일대일로 대응시킬 수는 없지만, 작품에는 작가가 담겨 있음을 부정할 수도 없다. 작가와 작품의 관계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논쟁 중이지만 적어도 보니것의 소설에는 보니것을 빼고는 이야기하기 힘들다. 그는 작품에 직접 등장하기도 하고, 자신의 가족, 그리고 역사적인 인물까지도 수시로 등장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니것의 소설이 읽히고, 그의 신랄한 풍자가 감탄을 자아내는지도 모른다. 그를 모르면 작품 속에 들어있는 풍자를 풍자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뭐 이런 작가가 있어 하고 작품을 접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니것에 대해서 조금 알게 되니 그의 소설에 나타나는 말이 지닌 신랄함이라든지 통쾌함 등을 만나게 되고, 단편 단편적으로 나타나는 인물들이나 사건들에도 당황하지 않게 된다.


모자이크 조각들을 모아 하나의 작품을 만들듯이 또는 퀼트 작품처럼 조각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작품을 이루고 있으니... 이 [타임케이크] 또한 그렇다.


재연배우처럼 살아가는 타임퀘이크가 일어난 10년 동안의 일이나 타임퀘이크가 끝나고 반복된 삶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때의 일들이 짤막짤막하게 실려 있어서 읽는 속도가 붙는다.


또 전에 그의 작품을 읽었다면 친숙한 구절이나 인물들을 만나게 되고, 그가 하는 표현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곳곳에 풍자가 숨어 있으니 그것을 찾는 재미도 있고.


무엇보다 보니것 소설은 재미 있게 읽으면서도 무엇을 더 생각하게 해주는 힘이 있으니... 그가 사랑받는 이유이기도 하겠다.


작품을 읽으면서 작가를 생각하게 되니, 이 소설에서 나온 말을 그대로 돌려주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디지털 세계(당시는 텔레비전 시대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에 대해 물성을 지닌 책에 대한 이야기인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말이 아닌가 한다.


'교묘한 타산이 아니라 그저 우연에 의해서, 그 무게와 질감으로, 그리고 통제에 대핸 멋진 상징적 저항으로, 책은 우리의 두 손과 두 눈을, 그 다음에는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정신의 모험 속으로 이끈다.' (240쪽)


보니것의 소설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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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를 보세요
커트 보니것 지음, 이원열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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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보니것이야! 읽기가 재미있다. 반전이 있으니, 섣불리 결말을 예상하지 않게 되기도 하고. 이 소설은 어떤 결말로 끝날까 궁금증을 지니고 읽어가면 어느새 놀라운 결말이 다가온다.


그렇다고 가볍지가 않다. 서술은 가벼운데, 들어있는 내용은 무겁다고 해야 한다. 무거운 내용을 가볍게 전달하는 능력, 보니것이 지닌 재주라고 해야겠다.


첫소설 '비밀돌이'를 보면 참... 지금 우리가 인공지능 개발에 몰두하고 있는데, 그러한 인공지능이 개발이 되어 인간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이 소설을 읽다가 경기도교육청인가 어디선가 개발했다는 AI영상이 뉴스에 나온 적이 있다.


교사들이 지닌 속마음을 인공지능이 풀어준다는 발상인데, 그것이 교사를 비하하는 내용으로 흘러서 문제가 되었던... 즉 말에 드러난 속뜻을 해석해주는 영상이었는데ㅡ 그것이 상대에 대한 비하로 나타난다. 이 소설에서 그런 장면이 펼쳐지는데 참, 뉴스에서 봤던 내용을 보니것이 미리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무 문제없이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데, 그렇지 않고 안 좋은 면을 파헤치는 그런 기계. 그 기계로 이야기를 계속 듣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고, 사람을 미워하게 되는데...


그런 기계를 만들어 일확천금을 꿈꾸는 인물이지만, 그것이 어떻게 사람들을 망가뜨리는지 몸소 체험한 다음에 기계를 묻어버린다. 소설에서는 묻어버릴 수 있다. 또 보니것이 살았던 시대는 인공지능이 나오기 전이니까, 상상 속에서 그러한 위험을 간파한 인간이 위험을 피하는 방식으로 결말을 낼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은? 아니다. 인공지능이 개발되면서 그것의 위험성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많지만 누구도 포기하지 않는다. 소설에서처럼 묻어버리지 않는다. 오히려 기술로 보완할 수 있다고 믿고 더욱 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그래서 이 소설이 더 소중하다.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개발한 기계가 오히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망칠 수 있음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으니...


소설의 결말은 더욱 섬뜩하다. 땅에 묻어버리는 기계가 마지막으로 했다는 말.


"'다시 보자. 개자식아. 다시 보자고.'" ('비밀돌이'에서. 42쪽)


우린 이러한 비밀돌이를 다시 보고 있다. 인간에게 편리함과 빠름을 선물해준다는 이유로. 하긴, 이 비밀돌이처럼 '이야기할 사람! 진정으로 이해해주는 사람!'('비밀돌이'에서. 25쪽)이 필요해서 만든 기계가 과연 인간을 진정으로 이해해준다고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그냥 우리 자신의 고민을, 어려움을 피하게만 해주는 것이 아닌지... 온실 속의 화초처럼 조그마한 어려움도 견디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지... 보이는 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자세를 지니게 하는 것은 아닌지, 또 악용이 되어 안 쫗은 쪽의 말들만 계속 듣게 해서 우리의 인식을 흐리게 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봐야 한다. 


과연 이야기할 사람이 없다고 기계를 만들어 곁에 두는 것이 바람직한지, 지금 우리는 기계와 대화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기에,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시간-공간에 대한 고민,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그러한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할지 이 소설을 통해 한번 더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다.


'개미 화석'이라는 소설을 보면 헛웃음이 나온다. 스탈린 시대의 소련을 비꼬고 있는 소설인데... 독재가 일어나고 있는 나라에서 예술을 하거나 또는 창의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 또는 비판적인 의식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입을 틀어막히고, 행동에 제약을 받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개미학자를 주인공으로, 개미들의 화석을 통해 어떻게 독재가 성립하게 되는지, 또한 같은 사건(화석에 나타난 모습)을 보고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지, 정권의 구미에 맞게 해석을 할 수 있음을, 그것에 반하는 증거 또는 추론을 하는 사람의 입을 어떻게 막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때는 소련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지금은 미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소련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것이 꼭 소련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소설들, 많은 소설들이 실려 있는데, 짧고 경쾌하게 진행되지만 내용은 깊고 무겁다. 하여 소설을 읽으며 현대 우리의 생활을 살필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이 소설들과 더불어 두려움이 인간이 지니는 감정이고, 이 두려움을 통해 성장할 수 있음을, 즉 두렵다고 마냥 피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맞서 극복하려는 모습을 지녀야 함을 보여주는 소설도 있다.


'신문 배달 소년의 명예''우주의 왕과 여왕'이라는 소설이 그런데, 두려움에 갇힌 사람은 결국 자신을 망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두렵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어떻게든 이겨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명예와 또 한 단계 성장하는 자신을 선물한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다.


이 두 소설의 결정판이 바로 '에드 루비 키 클럽'이란 소설이 아닐까 하는데, 두려움을 이겨내고 진실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이 결국 승리하는 내용의 소설. 아무리 권력을 지니고 있어도, 사람들을 매수해도 결국 진실은 가릴 수 없음을 이 소설이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집 좋다. 재미있다. 그냥 읽어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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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의 기록
존 버거.장 모르 지음, 민지현 옮김 / 더퀘스트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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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글로 떠나는 과거로의 여행, 그곳에서 우리는 사람과 자연, 그리고 역사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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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천선란 지음 / 허블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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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3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지구에 감염병이 급속도로 퍼져 사람들이 좀비가 되고, 이 좀비들이 사람들을 죽이는(감염시키는) 상황. 힘 있는 자들은 우주선을 타고 제2의 지구로 탈출을 하지만... 지구에 남은 사람들은 좀비가 되거나 또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


감염되어 좀비가 된 사람들에게는 기억이 없다. 그래서 좀비는 무섭다. 자신도 자신과 함께했던 사람도 모두 알지 못한다. 좀비도 먹어야 산다고 하면, 먹기 위한 본능만 남아 있는 존재다. 이래서 좀비는 무섭다. 무섭기도 하지만 슬프다.


자신의 기억을 잃은 존재는 더이상 자신일 수 없다.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을 수 없으니까. 그래서 좀비는 슬프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그것을 삶이라고 할 수 있다면)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선란의 이 좀비 연작에서 좀비는 다르다. 사랑을 잃지 않는다.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을 좀비가 되어서 비록 말을 하지 못하더라도 잊지 않는다. 보호하려 한다. 그래서 더욱 슬프고 아름답다.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하려는 모습. 그러한 좀비를 바라보는 사람의 모습. 이들의 관계에서 좀비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이들은 상대의 상태가 변했어도 그냥 사랑하는 사람일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함께하고 싶을 뿐이고, 그렇기에 서로를 해치지 못하게 다른 좀비나 인간들로부터 보호하려 한다. 그런 과정이 세 편의 연작소설에 실려 있는데.... 세 소설에서 공통점을 찾으라고 하면 이들은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소수자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첫 번째 소설인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에서는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옥주와 묵호가 등장하고, 두 번째 소설인 '제 숨소리를 기억하십니까'에서는 식물인간이 된 엄마를 둔 딸과 자폐인을 딸로 둔 엄마가, 세 번째 소설인 '우리를 아십니까'에서는 동성 부부가 나온다.


소수자의 삶을 살아가지만 그래서 더욱 서로에게 애틋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이들은 세상이 재난에 빠진 상태에서도 서로를 챙긴다. 인간일 때도 그렇고,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좀비가 되었을 때고 그렇고. 이렇게 세 편의 소설은 좀비가 되기 전에 그들이 살아온 모습을 보여주고, 둘 중 하나 또는 둘 다 좀비가 되었을 때의 모습을 보여준다.


분명 상황이나 상태는 달라졌음에도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 서로를 챙겨주는 모습은 변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런 장면을 두 번째 소설인 '제 숨소리를 기억하십니까'에서 식물인간이 된 엄마와 행방불명이 된, 그래서 결국은 좀비가 된 아빠가 만나는 장면은 마음이 찡해진다. 이들은 서로를 잊지 않고 있음을 소설을 읽으면 그렇게 짐작할 수밖에 없게 한다.


(은미는 그것이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본다. 어둠 속의 두 실루엣은 마치 서로를 끌어안는 것만 같다.-221쪽)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들, 어려운 환경을 함께 헤쳐나왔던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들이 겪는 재난 상황은 이미 자신들이 겪었던 일에 불과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어떤 존재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좀비든 아니든, 그냥 사랑하는 사람일 뿐이다. 자신이 곁에 있어 주어야 하는, 또는 자신의 곁에 있어주어야만 하는 그런 사람.


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를 보호하려 하고 함께하려 하는데, 그 과정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다. 순탄치 않지만 이들은 헤쳐나간다. 이겨나간다. 이미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니까. 서로의 사랑으로 그 어려움들을 견뎌내고 이겨내 왔으니까.


하여 좀비 3부작이라고 하지만 사랑 3부작이라고 해도 좋겠다. 이 소설집은 사랑을 다루고 있으니까. 어떤 어려움에도 서로를 간직하는 사랑을 보여주고 있으니까. 그래서 슬프고도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들의 이토록 아픈 사랑이, 아름다운 사랑이 마음에 콕콕 박히는 소설. 천선란의 소설을 읽으면서 느꼈던 따스함을 다시 느낄 수 있었던 소설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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