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시대에 인공지능이 시도 쓴다. 그렇다면 시는 인간의 전유물이 아닌 것인가? 시에도 물질과 같은 구조가 있는 것인가. 아니, 시가 물질인 것인가.


  시가 물질이라면 인공지능도 당연히 시를 쓸 수 있다. 물질적인 것을 모두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우리 시대의 인공지능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단순하게 시는 물질이다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시에는 물질 이상의 것이 있기 때문이다. 시는 언어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언어의 기본적인 기능인 의사소통 말고도 자신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어떨 때는 누군가와 의사소통하는 것이 아닌, 자신과만 소통하기도 하는 그러한 기능도 있기 때문에, 시는 단순한 물질은 아니다. 그렇다고 물질이 아니라고 하기도 그렇다. 언어로 쓰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우리 눈에 물질처럼 눈에 보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게 해주는 것, 그것이 언어다. 이렇게 언어로 이루어진 시도 역시 물질이 될 수 있다. 물질의 개념을 넓게 보면 말이다. 


물질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물질이 우리 세계를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물질은 우리 생활과 뗄 수 없고, 또 우리 생활에 끊임없이 들어와 우리를 끌어들인다.


시는 그러한가? 시가 물질이라고 해도, 이 물질을 가깝게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또한 이 물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쓸 수 있는 사람도 별로 없다. 시집을 꽤 읽었다고 하는 나도 시는 아직도 미지의 세계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세계, 물질이다. 그러니, 시는 물질이라고 해도 우리의 생활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물질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면 시집의 제목이 된 '시와 물질'이란 시 마지막 구절에 이런 말이 있기 때문이다.


'한 편의 시가 / 폭발물도 독극물도 되지 못하는 세상에서 / 수많은 시가 태어나도 달라지지 않는 이 세상에서'('시와 물질' 중에서. 67쪽)


참 많은 시가 나오는데도 세상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시의 영향력이 참 적다는 시인의 한탄일 수도 있다. 물질의 폭발력에 비해 시의 파급력은 별로 크지 않다는 시인의 자조가 아닐까 하는데...


그렇지만 시의 파괴력은 물질의 폭발력처럼 순식간에 터져 나오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가 어느 순간 그 사람을 움직이게 하고, 다시 사람들을 손잡게 한다. 시는 그때까지 서두르지 않는다. 먼저 나서지 않는다. 그냥 자신의 길을 간다. 사람들 마음 속으로. 결코 서두르지 않고.


이런 시의 모습이 바로 '평화의 걸음걸이'라는 시에 나오는 구절과 통하지 않을까 한다. 시가 지향하는 것은 결국 평화다. 달라진 이 세상은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이다. 


'평화의 걸음걸이란 / 총탄의 여울을 건너는 숨죽임과도 같은 것 / 두려워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두려움과 싸우며 / 총탄의 속도와는 다른 속도나 기척으로 걸어가는 것 / 심장을 겨눈 총구를 달래고 어루만져서 거두게 하는 것 / 양쪽 산기슭의 군인들이 걸어내려와 서로 손잡게 하는 것 / 무릎으로 무릎으로 이 땅의 피먼지를 닦아내는 것' ('평화의 걸음걸이' 중에서. 89쪽)


시란 물질은 이렇게 평화의 걸음걸이와 같다. 이 세상의 속도에 맞추지 않는다. 자신의 속도로, 갈등이 아닌 화해로, 함께함으로 나아가기 위해 천천히, 끝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이겨내면서 쉬지 않고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시 아닐까? 하여 시인은 세상을 달라지게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아주 조금씩 조금씩 세상이 달라지게 하는 것이 시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하여 시를 가까이 하고 시를 즐기며 사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은 어느 순간 달라진 세상을 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이번 시집에 있는 시들이 현대 사회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그런 사회의 모습을 환기하면서 우리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으니, 그럼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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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생각 사는 핑계 매일과 영원 11
이소호 지음 / 민음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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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호 시인. 내게는 낯선 시인이다. 아니 들어본 시인이다. 예전에 쓴 글을 읽다가 이소호 시인의 시를 인용한 글을 발견했다. 햐, 내가 이 시인의 시를 읽었구나.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시집을 산 기억이 없다.


찾아본다. 시집이 없다. 역시 사지 않았군. 그렇다면 어디서 읽었을까? 분명 읽었기에 시를 인용했을 텐데... 그 시에 섬뜩한 마음이 들었던 것을 기억하는데, 우리 사회가 지닌 모습을 이리도 잘 표현할 수 있을까 하고 감탄한 적이 있는데...


검색해본다. '이소호'라는 이름을 치고, 어떤 책들을 냈는지 찾아본다. 그러다 아, 여기서 이소호 시인을 만났구나, 발견한다.


[2021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수상후보작에 이소호 시인 이름이 있다. 여기였군. 다시 펼쳐본다. 예전에 읽었을 때보다는 조금 더 이해하기 쉬워졌다. 왜냐? 바로 이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쓰는 생각 사는 핑계]


이소호 시인의 자전적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다. 자신의 생각을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으니, 시인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면 그 시가 더 친숙하게 여겨지는 것은 사실. 그러니 이 책을 읽고서 다시 읽은 이소호 시인의 시 몇 편은 내게 더 잘 다가왔다고 할 수 있다.


보통은 시집을 읽고, 그 다음에 시인의 에세이를 읽는데, 이번에는 순서가 바뀌었다. 뭐, 바뀌면 어떠랴, 내 맘에 드는 글을 읽는 즐거움을 주었는데... 시집을 읽기 전에 시 몇 편은 읽지 않았는가.


이 에세이 읽기는 즐겁다. 시인이 왜 시를 쓰냐고? 쉽게 말하면 먹고 살기 위해서다. 얼마나 진솔한가. 뮤즈가 영감을 줘서 나는 그냥 받아쓰기만 했을 뿐이라고 안 해서 다행이라고. 생활인의 모습이 잘 드러나서 더 좋다고나 할까.


시인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먹고, 자고, 싸는 사람임을, 그 역시 소비하는 인간임을 알게 되니, 소비하는 인간, 현대를 함께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우리 사회에서 자신이 느낀 점을 시로 썼다는 점을 알게 되니 시인이 한결 친숙하게 느껴진다.


나만의 느낌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렇게 솔직한 사람이 좋다. 취미가 쇼핑인 시인이라니... 생각해 보지 않았던 모습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제목에 쓰인 두 단어 '쓰는, 사는'이 두 가지 의미로 다가왔다. 우선 '쓰는'이란 말은 시인이니까 '글(시나 소설, 에세이)을 쓰는'이라는 뜻과 먹고 살아야 하는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돈을 쓰는'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러고보니 둘 다 '쓰는' 행위였구나 하는 생각. 그럼 돈을 쓰기 위해서 글을 쓸 수도 있겠구나, 시인을 우리와 다른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분야를 직업으로 가진 생활인으로 봐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했으니...


시인 역시 이 글에서 자신의 책을 팔기 위해 노력한다고 했다. 단지 읽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팔기 위해서다. 살아야 하니까. 그래서 출판사가 아닌 자신이 직접 여러 상품(굿즈라고 하는데)을 만들어 함께 주기도 한다고 한다. 쓰기 위해 쓰는 모습을 이 책에서 많이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이 어떻단 말인가.


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 그런 모습 속에서 좋은 시도 나오고 하는 것 아니겠는가. 마찬가지로 '사는'이라는 말도 '삶을 사는'이라는 뜻과 '물건을 사는'이라는 뜻을 다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핑계라는 말을 의미라는 말로 바꾸면 삶에서 의미를 찾는다면 더욱 알찬 삶을 살 수 있다고, 또 어려운 지경에 처하더라도 의미를 잃지 않으면 삶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는 빅터 프랭클의 의미 치료를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의미는 삶에서 중요하다. 그와 더불어 물건을 사더라도 의미를 부여한다면 더욱 가치가 있겠지.


이 책을 보면 정말 많은 물건을 사는데, 이 물건들을 사는데 나름의 기준이 있다. 이 기준이 바로 핑계라고 할 수 있지만,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삶에 무언가를 주기 때문에 물건을 사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게 정말 다양한 물건을 사는 모습이 이 책에 잘 표현되어 있는데, 그런 글을 읽으면서 과소비라는 생각, 낭비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마도 시인의 핑계가 내게 통했나 보다. 


무엇보다도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시인의 시집을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시인이 이 에세이를 쓴 목적이 달성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아직은 사고 싶다인데, 샀다가 되는 순간, 시인의 바람에 부응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글이 묻혀 잊히기를 바라지 않으니까. 누군가에게 계속 읽히길, 시집도 물건처럼 그 사람 곁에 머물길 바라니까.


곁에 두고 어느 순간이라도 꺼내 볼 수 있는, 때로는 잊고 있다가도 아, 이 시집이 있었지 하면서 빼어 읽을 수 있는 물질로서의 시집을 사람들이 지니길 바라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나도 시인의 기준을 한번 적용해 볼까.


좀 시간을 두고 꿈에 시집이 나오면 사는 걸로, 아니면 계속 시집 제목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으면 사는 걸로... 하하.


즐겁게 읽었다. 그러면서 시인이 자신에게 시란 무엇인지를 말한 이 글은 기억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여기에 옮겨 적는다.


'나에게 시란, 인생에서 시선을 고이 두고 오랫동안 툭 잘라 기억하고 싶은 한 장면을 뜻한다. 그것이 비극일지라도 나는 필요하다면 잘랐고, 세밀하게 관찰했고, 그 시선을 단 한 차례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내 시는 모났다. 불편했다. 그리고 가끔은 아름다웠으며, 처연했다.'(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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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전쟁 - 가장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공간에서 펼쳐진 특권, 계급, 젠더, 불평등의 정치
알렉산더 K. 데이비스 지음, 조고은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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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인간 생활에서 필수적인 요소다. 식사와 배출은 우리 인간이 생존하는데 하지 않을 수 없는 행위 아닌가. 


이런 화장실을 두고 갈등이 있었다. 지금도 있다. 어떤 화장실이냐에 따른 갈등인데, 우리나라에서도 최근에 성중립 화장실이 만들어지고 있는데, 이를 두고 갈등이 일기도 했다. 트랜스젠더들을 위한 공간 아니냐고, 아직도 케케묵은 윤리 운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성중립 화장실에 대해서 찬성하고 있다.


누구도 눈치보지 않고 화장실을 이용할 권리가 있지 않을까? 화장실을 놓고 다양한 갈등들이 있지만, 여기서는 젠더 갈등으로만 국한시켜 보자.


예전의 화장실은 남녀 구분이 없었다. 누가 힘들었을까? 여성이다. (논의의 편의를 위해 법적으로 인정하는 단 두 성만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화장실 문제 또한 제기할 수밖에 없다.


남녀 분리 화장실이 만들어진 이유는 여기에 있다. 여성의 권리를 보장한다는 의미에서 남녀 분리 화장실이 만들어졌다. 거의 같은 크기로?


다시 문제가 된다. 화장실을 이용하는 시간이나 행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지금도 심심찮게 보는 모습이 남녀 화장실 앞에 줄이 길다면 이는 십중팔구 여성화장실 앞이다. 


그래서 화장실 비율이 대두되었다. 남자 변기보다 1,5배 이상 많은 변기를 배치해야 한다는 주장. 그것이 받아들여져 여성의 화장실이 더 확장되어 편리를 증진시키고 있다. 이게 평등일까?


또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트랜스젠더와 같은 사람들은 어느 화장실을 이용해야 할까다. 그러니 이제는 성중립 화장실을 만들자는 주장이 나온다. 그렇게 만든다. 성중립 화장실을 만드는 과정이 이 책에 잘 나와 있다. 이러한 화장실을 두고 겪어온 갈등들도 잘 나와 있고.


성중립 화장실을 만드는 문제가 미국의 진보적인 대학에서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들의 진보성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였으니... 또한 그러한 대학들은 지명도만큼이나 재원을 쉽게 확보할 수 있었기에 빠르고 쉽게 성중립 화장실을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다른 계급, 계층의 문제가 발생한다.


화장실을 두고 단지 성별 갈등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특권층은 이상하게도 진보적인 문제에 쉽게 접근한다. 그리고 수용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신들의 특권을 뒷받침하는데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고 싶어도 하기 힘든 곳이 있다. 법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남녀 분리 화장실이 있는 곳에 성중립 화장실을 만들려고 하면 배관의 문제, 즉 건축의 문제가 발생한다.


쉽게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장소에 만들고 싶은데, 기존 건물이 지니고 있는 환경이 이를 용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화장실에는 역사가 개입한다. 문화와 건축이 개입한다. 또 재력, 돈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을 각 장에 걸쳐서 잘 보여주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중립 화장실은 확산되어 나갔다. 지금도 확산 중이다. 왜냐하면 성소수자만이 아니라 가족들, 장애인들,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 모두에게 이로운 화장실이기 때문이다.


즉 사회적 약자층이 쉽게 이용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은 더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니 건축, 시설의 기준을 약자에게 두어야 한다. 가장 접근하기 힘든 사람이 쉽게 접근하고 이용할 수 있게 만드는 것. 그것도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하여 이렇게 만들어진 화장실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사회적 편리가 증대한다. 여기에 많은 젠더 갈등들이 있었지만, 조금 더 어려운 사람들을 배려하는 쪽으로 화장실이 개선되어 왔음은 자명하다.


왜 화장실인가 했더니, 이 화장실에 젠더 갈등을 볼 수 있는 요소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관습과 문화 또 갈등들을 볼 수 있고, 특권층이 오히려 더 쉽게 화장실을 개선하고 있었다는 다소 의외의 모습 (그것이 바로 자본의 힘이기도 하고, 그들이 계속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이것은 약자들에겐 도움이 되는 방향이기도 했다)도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화장실은 단지 젠더 차원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장애-비장애, 부유층-빈곤층, 명문대-비명문대, 보수-진보, 관습-개혁 등등의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그래서 지금 화장실을 보면 어떻게 사회의 관습이 변해왔는지를 파악할 수가 있으니... 성중립 화장실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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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받아치기'


  먼저 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치기 위해 들어오는 상대에게 펀치를 날리는 일. 


  한 방에 역전하기. 또는 극적인 역적을 바라는 행위일 수도 있다. 당하고만 있을 수 없기에 온 힘을 실은 펀치를 날리는 일.


  적중해야만 한다. 적중하지 않는 순간, 그 다음 나는 상대의 펀치에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여 카운터펀치는 힘과 속도, 그리고 정확성이 필요하다. 공격해야 할 때와 방어할 때를 아는 것. 공격해야 할 때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 민첩성, 폭발력. 


삶에서 카운터펀치를 날릴 만큼 위기에 처하지 않아야 하는데, 어디 삶이 뜻대로 되던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를 공격하는 수많은 것들. 그것들이 나를 툭툭 건드리고 톡톡 치고 때로는 세게 때려 나를 휘청거리게 하지 않던가.


금속도 피로가 쌓이면 깨지게 되는데, 삶이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그렇다면 더이상 깨질 정도까지 당하지 않도록 카운터펀치를 날려야 한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도. 삶에서 누구나 이런 카운터펀치 한 방쯤은 지니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무력하게 당하다 쓰러지기보다는 한 방 카운터펀치를 날릴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지금처럼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 삶을 파고들어 나를 점점 줄어들게 만들고 있는 시대에, 나는 내 삶을 위해 한 방을 지녀야 한다.


다만, 그 카운터펀치는 길게 자주 써서는 안 된다. 길면 카운터펀치가 아니라 단순한 공격이고, 자주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단 한 방. 아주 짧게. 순간적으로 강한 타격. 그리고 다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카운터펀치 아니겠는가.


김명철 시집을 읽으며, 도대체 제목이 된 시가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찾는 것 그만두기로 했다. 그것 역시 시인이 지닌 카운터펀치일 테니.


그러면서 우리가 카운터펀치를 날려야 할 때를 이 시를 읽으면서 찾아야 한다고... 카운터펀치는 기회를 엿보다 날리는 단 한 방이니까. 그렇게 내 삶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들 중 쫓아내야 할 것에 날릴 수 있는 카운터펀치. 하나쯤 지니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틈


몸과 마음을 단단히 여며도

당신은 아무도 모르게 습격당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전면적이어서

낮과 밤 뼈와 살을 구분하지 않는다


하늘에서 쏟아져내리는 은행알과

육삼빌딩과 모난 돌과 핸들 꺾인 세발자전거와

지표를 뚫고 올라오는 지하철 탄 사내가 여자가 당신을 습격해온다


빈틈없는 생활

방심하지 않는다 해도

어느 틈엔가 당신에게 틈이 생기기 시작한다 틈은

서서히 세력을 확장해나가고 당신은

저항하다 마침내 붙들리고 만다


그 틈으로 당신의 절반이 슬금슬금 빠져나간다

당신은 마지막 일전을 치를 수도 투항할 수도 없다

틈은 처음에 은밀하게 찾아와서 그러나 나중에는

당신을 완벽하게 장악한다


김명철, 짧게, 카운터펀치. 창비. 2010년. 112-113쪽.


나를 완전하게 장악하기 전에 치를 수 있는 마지막 일전, 그것이 바로 카운터펀치 아니겠는가. 그러한 기회를 놓치면 '완벽하게 장악당'할 수밖에 없다.


방심하지 않아도 나를 파고드는 틈. 그러한 틈을 인식하려고 해야 한다. 내가 다 빠져나가기 전에. 적어도 그 전에 카운터펀치 한 방은 날릴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경기에 이기지는 못해도 종료 소리와 함께 골을 넣는 버저비터와 같이, 그렇게 내가 내뻗은 카운터펀치로 내 삶의 주체가 되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버저비터'-60, 61쪽- 참조. 시인의 시에서는 버저비터는 성공하지 못하고 말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본다. 시도조차 하지 못하면 더 힘든 삶이 될 테니.


그래서 나는 내게 언제든 뻗을 수 있는 한 방, 카운터펀치를 간직하는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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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미 마인 워프 시리즈 8
배리 B. 롱이어 지음, 박상준 옮김 / 허블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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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읽기 시작하자 손에서 놓기 싫어졌다. 그냥 한번에 쭉 다 읽고 만 소설. 중간에 남겨 놓기에는 너무 아쉬운 마음이 드는 소설. 그만큼 전개가 빠르고, 다음이 궁금해진다. 여기에 우주의 다른 종족이 적대 관계에서 공존의 관계로 가는 내용도 그렇고.


우주 팽창을 시도하는 지구와 드랙 행성이 전쟁을 한다. 이때 두 행성의 조종사들이 파이린 행성 4호에 불시착한다. 추락이라고 해도 좋고. 두 조종사는 처음엔 적대하지만 그 행성에 둘밖에 없다는 사실, 또한 파도의 위험 앞에서 서로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 좀더 넓은 땅으로 이동한 뒤에 동굴에 살면서 서로를 알아가고 함께하는 두 존재.


하지만 드랙인인 쉬간은 아이를 낳다가 죽는다. 아이의 이름은 자미스. 이 자미스를 키우는 지구인 데이비지. 손가락이 셋인 드랙인과 손가락이 다섯인 지구인이 함께 지낸다. 그러면서 서로의 유대를 키워가는데... 우주선을 발견하고, 그 행성에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우주선을 찾아가는데... 우주선이 지구나 드랙의 것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부상을 당한 데이비지는 자미스를 홀로 보낸다. 그리고 지구에서 살아가는 데이비지는 적응을 하지 못한다. 두 행성은 휴전을 했지만 서로에게 적대적인 감정은 어쩔 수가 없다. 데이비지는 여기서 드랙에 봉사한 인물로 취급받는다. 그러다 결국 자미스를 찾아 떠나는 데이비지. 드랙 행성에 갔지만 자미스는 없다. 지구인을 사랑한다는 죄로 갇혀 지낸다. 자미스 집안의 도움으로 자미스를 데려오고, 데이비지는 다시 파이린 행성 4호 동굴에서 살면서 자미스의 후손들을 돌본다.


내용은 참 단순하다. 그런데 미지의 행성에 불시착한 두 행성의 조종사들이 갈등을 겪다가 화해하는 장면에서 끝낼 수도 있었다. 그러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휴먼드라마가 되나? 작가는 낯선 행성에서 적대하는 둘은 쉽게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공동의 적이 있기 때문이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목표 속에서 둘이 협력하지 않으면 둘 다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이것이 '오월동주'라는 사자성어로도 남아 있지 않은가. 목표를 이룰 때까지는 협력할 수밖에 없는 관계.


그런데 이 관계가 길어지면서 변화가 생긴다. 적을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기는 것이다. 함께한 위험에서 둘은 서로를 이해하고, 그 과정에서 서로의 언어를 배운다. 물론 지구인인 데이비지는 드랙 행성의 경전인 '탈만'을 읽을 수 있게 되고.


상대의 종교를 상대의 언어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상대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렇게 함께하는 사이가 양성공유인 드랙인인 쉬간이 아이를 낳다가 죽는다. 다른 행성인을 키우게 된 데이비지. 


이제 이야기는 아이와 데이비지의 이야기가 된다. 여기는 처음부터 우호적인 관계일 수밖에 없다. 데이비지가 양육자가 되니까. 호기심 많은 자미스는 이것저것 물어본다. 아는 만큼 대답해주는 데이비지. 이때 자미스의 질문이 왜 자신은 손가락이 셋인데 데이비지는 다섯인가이다.


행성의 차이. 다윈의 말로 하면 진화의 결과이리라. 단지 진화의 결과일 뿐, 손가락의 숫자로 우열을 나누어서는 안 된다. 서로의 행성에 맞게 적응했을 뿐, 그러므로 데이비지는 자미스에게 자미스는 자신과는 다른 존재임을 알려준다. 그러면서 서로를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장면.


전쟁 중이지만 이 행성은 전쟁과는 상관없다. 자연과의 싸움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것을 극복하면서 유대감을 형성한 자미스와 데이비지. 이들이 우주선을 발견하고 찾아간 다음은 다시 전쟁 상황과 유사하다.


전쟁은 끝났지만 적대감은 여전하다. 전쟁의 상흔은 각자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증오와 분노를 남기게 된다. 여기에 상대를 인정하는 존재들은 배신자 낙인이 찍힌다.


평화로울 것 같은 세상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자꾸만 자신을 밀어내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지구는 데이비지를, 드랙 행성은 자미스를 밀어낸다. 적을 인정한다는 이유로. 


적을 인정하지 않을 이유가 있나? 이제 평화의 시대가 되었는데, 서로 교류를 하는데... 그런 교류를 하더라도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적대감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 소설의 후반부가 보여주고 있다.


다시 적대적인 환경에 놓인 두 사람은 자미스가 어린시절을 보낸 동굴로 가기로 한다. 물론 자미스의 집안도 재산을 모두 처분해 그 행성으로 오고. 여기서 평화롭게 지내는 데이비지.


그렇게 소설은 모두 행복한 생활을 하는 듯이 보인다. 그렇게 끝난 듯이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데이비지나 자미스가 지내는 장소가 지구도, 드랙 행성도 아닌 파이린 4호 행성이라는 점이다.


표면적인 적대 행위는 끝났지만 내면에서 지속되는 적대감은 쉽사리 꺼지지 않았다는 점,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다른 행성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즉, 전쟁으로 인한 상흔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소설을 읽어가면서 쉬간과 데이비지가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하는 장면, 자미스가 전적으로 데이비지를 신뢰하는 장면은 큰 감동을 준다. 이렇게 적대하는 종족 또는 존재들 사이에서도 평화와 공존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생각하면, 아직도 곳곳에서 일어나는 분쟁 속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평화와 공존의 길을 가아함을 알 수 있다.


그 길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그 쉽지 않은 길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의 뒷부분이다. 두 행성의 전쟁이 휴전을 한 다음에 데이비지가 겪는 일들. 이것은 평화와 공존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고,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음을 작가가 보여주고자 했단 생각이 든다.


드랙 행성의 경전인 '탈만'을 인용하는 많은 구절들이 나오는데, 이는 우리가 다른 경전들에서 만날 수 있는 구절들이다. 그만큼 모든 종교는 통하는 것이 있는데, 이는 평화와 공존으로 가는 길이 꼭 하나만은 아니라는 점, 그 무수한 길들을 인정하고 자신도 자신이 찾은 평화와 공존의 길을 가야함을 '탈만'이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재미와 생각을 둘 다 잡을 수 있는 소설. 왜 이 소설이 발표되자 많은 상을 받았는지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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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5-08-27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드랙이랑 말 안 통하거는 거랑 애 낳는 거까지 보고 일단 덮었거든요. 근데 재밌단 말이죠? 다시 읽으러 갑니다!!! 갑자기 너무 읽고 싶어졌어요. ㅎㅎㅎ

kinye91 2025-08-27 16:27   좋아요 1 | URL
네, 저는 재미있게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