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날 세계에서 - 내란 사태에 맞서고 사유하는 여성들
강유정 외 지음 / 안온북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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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만날'이라는 미래형이 아닌 '만나는'이라는 현재형이 되어야 한다. 이 책은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탄핵소추를 당해 헌법재판소에서 탄핵 심판을 받는 동안에 쓰여진 책이기 때문이다.


참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섰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나서는 안 될 비상계엄이 선포되었기 때문이다. 과거 독재를 떠올리는 사람들, 그리고 비상계엄을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무시무시한 포고령 내용을 보고 놀라 거리로 나온 사람들. 비상계엄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 나온 사람들 등등.


이들이 탄핵을 찬성하는 이유는 다시는 이런 일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고, 또한 그것은 민주주의에 반하는 행위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정치인은 이 나라에서 정치를 할 자격이 없다는 것. 그럼에도 버티고 있는 사람에게는 국민의 힘으로 끌어내리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엄동설한에...


'키세스'라고 불릴 정도로 은박 담요를 둘러싸고 추위에도 포기하지 않고 거리로 나온 이유는 민주주의는 우리가 지켜야 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 또 우리 후대들이 사는 세상이 민주주의 세상이어야 하기 때문.


그런 민주주의는 미래형일 수 없다. 민주주의라는 미래의 때를 맞이하기 위해 지금 독재를 용인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바로 지금-여기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만날 세계이다.


따라서 광장에서는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해야 한다. 누구나 자신의 말을 할 권리. 자신을 존재 자체로 인정받을 권리가 지켜지는 장소, 그것이 광장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고 보듬고 도와주려는 마음. 상대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려는 마음. 물론 처음에는 자신과 다른 존재들을 밀어내려는 모습도 보였지만, 광장에 모이면서, 탄핵을 함께 외치며 우리가 만날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를 고민하면서 차이를 차별로 보지 않고 차이로 보는, 그러한 다양성이 민주주의를 더욱 풍요롭게 함을 깨닫는 모습이 잘 나타나고 있다.


글서 그들은 이미 광장에서 다시 만날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한번 경험한 세계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남아 지속시키려는 노력을 하게 한다.


광장에서 외쳤던 수많은 외침들이 이제는 실현되어야 할 단계로 접어들었다. 지금은 탄핵이 완료되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서 새로운 정치가 시작되고 있으니...


이 새로움이 그 전에 있었던 탄핵 이후를 반복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다시 만나는 세계일 테고. 한번 경험한 것을 다시 반복하지는 않을 테니, 광장에서 터져나온 다양한 목소리들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지 지켜봐야 한다.


이 책을 읽으며 그때의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추운 날씨에도 광장에 모인 사람들, 서로가 서로를 보듬던 사람들. 네것 내것 할 것 없이 상대에게 필요한 것을 주던 사람들. 지방에서 올라오던 농민들이 남태령에서 막혔을 때 지체없이 남태령으로 달려갔던 사람들. 자신과 다른 생각, 다른 정체성을 지닌 사람이 말을 할 때 그것을 받아들여주던 사람들의 모습.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하는 모습을 이미 보여준 그 광장의 모습. 그것을 잊지 않게 이 책은 그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있다. 기억은 강하다. 기억은 미래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준다. 이 책은 그래서 우리가 다시 만나는 세상이 어떤 세상이어야 할지를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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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 - 월급사실주의 2024 월급사실주의
남궁인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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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사실주의, 2024'다. 월급은 보통 사람들이 직업을 가졌을 때 생활(또는 생계)을 위해 받는 돈이니, 여기에 사실주의라는 말이 붙으면 지금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이 살기 위해 어떤 일을 하는가 또는 어떠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가를 살핀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을 표방한 소설집이다. 그러니 이 소설집은 사실주의 소설이고, 사실주의를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를 쓴다면 현실을 사실적으로 반영한 소설이니, 우리 사회의 모습을 작품을 통해서 보여주는 소설집이라고 하면 된다. 


지금 우리 사회가 처한 현실을 작가의 눈으로 보고, 작가가 창조한 인물을 통해서 우리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일, 그런 작품을 읽고 우리 사회의 모습을 파악하고 바꾸어야 하는 현실이라면 바꾸려고 하는 모습을 지니게 하는 것. '먹사니즘'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를 주제로 표현한 소설집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이 문학이 지닌 힘 아니겠는가? 단순한 비판에서 멈추지 않고 비판을 통한 연대, 연대를 통한 변화까지 갈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래서 예로부터 문학 작품 중에는 금서로 지정된 것들이 많지 않았는가.


문학이 그 자리에서 향유되고 끝나지 않고 사회 변화까지 이룰 정도로 힘을 발휘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 문학이 힘을 잃었다. 문학이 힘을 잃은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현실과 괴리되어 자신들만의 세계로 들어갈 때 사람들에게 외면받게 된다.


최근에는 과학소설 또는 SF소설이 많이 읽히고 있는데, 이런 소설들이 현실을 외면하기보다는 우리의 현실을 다른 창으로 보게 만드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는데, 이렇게 다른 창으로 보게 하는 문학도 좋고 그러한 창을 통하지 않고 맨눈으로 보게 하는 문학도 좋다는 생각을 한다.


맨눈으로 보게 하는 소설, 이를 사실주의 소설이라고 하고, 많은 국민들이 월급을 받아 생활하고 있으니, 이 월급을 노동을 통해 급여를 받는 사람만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돈을 벌어 생활하는 사람들을 포괄하는 용어로 해석한다면, 우리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겪고 있는 일들을 중심으로 소설을 썼다고 보면 된다.


그렇게 작가들이 모여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기로 했다고... 이들이 '월급사실주의'라는 이름으로 모여 작품을 썼다고...이들의 규칙은 이렇다.


① 한국사회의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는다. 비정규직 근무, 자영업 운영, 플랫폼 노동, 프리랜서 노동은 물론, 가사, 구직 , 학습도 우리 시대의 노동이다.

② 당대 현장을 다룬다. 수십 년 전이나 먼 미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를 쓴다. 발표 시점에서 오 년 이내 시간대를 배경으로 한다.

③ 발품을 팔아 사실적으로 쓴다. 판타지를 쓰지 않는다.

④ 이 동인의 멤버임을 알린다.


이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소설집에는 어떤 한국사회의 먹고사는 문제가 담겨 있을까. 그것을 소설집의 맨 앞에 정리해 주었다.



이 사진을 보면 어떤 문제를 다루고 있는지 알게 되니 더 말을 할 필요가 없겠다. 그러한 주제를 가지고 소설을 썼고, 우리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제들이다.


그런 문제들이 무겁게도 다가오지만 소설은 그럼에도 희망을 주려고 한다. 소설의 결말이 비극이어도 소설을 읽은 사람은 그 비극 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하지 않는다. 비극 속에 같이 침잠해 버리면 어떻게 문학을 통해서 변화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프리랜서 아나운서의 하루를 중심으로 한 '오늘도 활기찬 아침입니다'를 시작으로 하는데, 남들이 보기에 화려해 보이는 아나운서들, 방송일이 심리적인 긴장도 있지만 육체적으로도 매우 힘든 일임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정규직이 아닌 프리랜서, 그것도 정규직에서 잘나가다가 프리랜서로 전업한 사람들이 아니라 애초에 프리랜서로 입사한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힘듦을 소설이 보여주고 있다.

보기에 화려해 보여도 당사자는 아님을, 또 겉보기에는 초근에 지향하는 가치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가치를 이윤을 창출하는 도구로 이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소설 '식물성 관상'에서도 겉보기에만 치중해서는 우리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진짜 모습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소설집 제목이 된 '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을 보자. 소설을 읽으면 인성이 좋은 사람은 가맹점 점주다. 본사 직원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입에 발린 말을 할 뿐이다. 그런데 누가 더 잘나가는가?


본사 직원은 정규직이다. 요즘 시대에 정규직이라는 말은 자랑거리가 된다. 프랜차이즈점을 낸 사람은 어떨까? 그들은 이윤을 내지 못해도 가게를 접고 싶어도 본사와의 계약때문에 쉽게 그만두지도 못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프랜차이즈점 말고도 자영업자들은 수시로 폐업을 하지 않던가. 그렇게 살기 힘든 상황인데, 프랜차이즈점을 관리하는 본사 직원들은 어떤가. 이들의 인성이 프랜차이즈점을 운영하는 점주보다 좋은가?


인성이 좋고 나쁘고가 돈을 벌고 못 버는 것을 좌우하는가? 아니다. 인성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식물성 관상'을 읽다보면 인성이고 뭐고 이윤을 위해 사람들을 이용하는, 아니 현 시대가 추구하는 가치까지도 이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자낳괴'(솔직히 이 말을 이 소설에서 처음 만났다. 줄임말이 워낙 많아 요즘은 검색을 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너무 많은데, 이렇게 줄임말을 쓰는 것이 요즘 우리 시대의 모습이기는 하지만, 과연 이게 바람직한가. 생일파티, 이 네 글자가 생파라는 두 글자가 되면 무엇이 더 이로운지. 자낳괴는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이라고 한다)가 실재하는 현실이다.


언급하지 않은 다른 소설들도 앞 사진에 있는 주제를 중심으로 내용을 전개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들이고, 그런 문제들을 소설이라는 거울을 통해 보면서 우리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게 된다.


이 소설집을 읽었으니, 그 전에 나온 2023, 그리고 뒤에 나온 2025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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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


  특히 들을 귀, 듣는 귀. 정말 중요하다. 말하기보다 듣기가 우리 생활에서 많지 않은가.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는 말들, 소리들, 또 듣고 싶은데 들리지 않는 말들, 소리들.


  귀가 막혔나라는 말은 남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쓰는 말. 귀를 열어라는 말은 남의 말을 잘 들으라는 말, 남의 말을 잘 들으라는 말은 곧 남을 잘 이해하라는 말.


  이해하라는 말은 포용하라는 말. 그와 같아지라는 말이 아니라 밀어내려 하지 말고 함께 존재해야 한다는 말.


이렇게 중요한 귀. 하지만 평소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던 귀. 이대흠의 시집 [귀가 서럽다]는 이러한 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준다. 이 시집 제목이 된 시이기도 하지만... 제목이 된 이 시 말고, 귀에 대해서 참 잘 표현했다고 생각하는 시가 '어머니의 손바닥엔 천 개의 귀가 있다'라는 시다.


손바닥에 귀가 있을 리가! 하지만 이런 경험을 해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집에서 키우던 화초가 시들어 죽어갈 때 그것을 어머니에게 맡기면 이상하게도 그 화초가 싱싱하게 살아난 경험. 어떤 식물을 갖다 주어도, 그 집에 볕이, 빛이 잘 들어오지 않더라도 화초는 싱싱하게 살아난다.


왜 그럴까? 식물을 키우는 재주가 있어서라고 생각하기엔 무언가가 이상했는데... 이 시를 읽으며 그래 어머니의 손에 귀가 있었구나, 식물들의 말을 들어줄 귀가 있었기에, 식물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기에 다시 생생하게 살아날 수 있었구나.


이렇게 누군가가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다면 죽음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생명의 전화'를 통해서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어머니의 손에 귀가 있다는 말은, 식물들이나 다른 존재들의 말을, 마음을 들어주고 있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엄마 손은 약손, 할머니 손은 약손'이라는 말도 자신의 아픔을 들어주고 받아들여 주는 그런 마음을, 그렇게 아픔을 토해내고 나니 조금은 마음도 몸도 편해진 상태를 달리 말해주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


'이상하게도 내 집에서는 죽어가던 풀 나무 들이 / 어머니의 손에 닿으면 금방 싱싱해졌다/ ...... /어머니의 손에는 내 손에 없는 귀가 수백 개 / 수천 개 열려 있는 것이었다 / ...... / 검은 손바닥 그 한 많은 귀에 대고 / 제 말들을 마음껏 하면 / 그 말을 들은 천 개의 귀가 / 그것들의 아픔에 / 가만 가만히'('어머니의 손바닥엔 천 개의 귀가 있다' 중에서/ 44쪽)


이 시 구절에서 그러한 마음이 다 표현되고 있으니, 하지만 한 가지, 어머니의 손이 깨끗한 흰 손이 아니라 검은 손이다. 그것은 '바닥'이란 시를 보면 왜 검은 손이라고 하는지 알 수 있다.


'외가가 있는 강진 미산마을 사람들은 / 바다와 뻘을 바닥이라고 한다 / ...... / 바닥에서 태어난 어머니 시집올 때 / 질기고 끈끈한 그 바닥을 끄집고 왔다 / ...... / 저 낮은 곳에서 온갖 것 다 받아들였으니'('바닥' 중에서. 40쪽)


바다와 뻘(갯벌), 온갖 것을 배척하지 않고 다 받아들여 그것들을 다른 존재들이 살아갈 수 있게 바꾸어주지 않는가. 여기에 해설에서 한 말처럼, 바닥을 바다와 뻘과 더불어 인생의 바닥이라고 쓰듯이, 어려운 삶을 살아온 과정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은가.


어려움을 겪은 사람이 어려움을 겪는 존재의 고통을 이해하듯이, 그렇게 어머니는 다른 존재들의 아픔을 듣고 이해하고 어루만져주는 역할을 했던 것. 그것을 하는 것이 바로 '귀'였던 것.


그러면 '귀'는 세상에서 꼭 필요한 존재다. (청각장애인은 듣지 못한다고 하지 말자. 그들의 귀는 눈이다. 눈으로 그들은 듣는다. 그러니 신체의 특정한 기관을 귀라고 한다면, 이 시에서 어머니의 손바닥에 있는 수많은 귀들을 알지 못하는 것이 된다)


듣는다는 행위가 이토록 중요한데, 듣지는 않고 자기 말만 하는 존재들은 얼마나 위험한 존재들인가. 그들은 다른 사람을 껴안지 않고 오히려 밀어낸다. 자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듯이.


이렇게 '귀'가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왜 시인은 귀가 서럽다고 했을까? 자신에게 들려오던 소리들이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을 둘러싸고, 자신에게 위안을 주던, 자신이 듣고자 노력했던 소리들이 하나둘 사라져 가는 것. 그러니 귀가 서러울 수밖에 없지 않을까.


제목이 된 시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 이것은 그리운 소리들이 하나둘 사라져 간다는 것. 그래서 더 작은 소리, 들리지 않을 것 같은 소리에도 집중해야 한다는 것. 


  귀가 서럽다


강물은 이미 지나온 곳으로 가지 않나니

또 한 해가 갈 것 같은 시월쯤이면

문득 나는 눈시울이 붉어지네

사랑했던가 아팠던가

목숨을 걸고 고백했던 시절도 지나고

지금은 다만

세상으로 내가 아픈 시절

저녁은 빨리 오고

슬픔을 아는 자는 황혼을 보네

울혈 든 데 많은 하늘에서

가는 실 같은 바람이 불어오느니

국화꽃 그림자가 창에 어리고

향기는 번져 노을이 스네

꽃 같은 잎 같은 뿌리 같은

인연들을 생각하거니


귀가 서럽네


이대흠, 귀가 서럽다. 창비. 2010년. 초판 2쇄. 67쪽.


이밖에도 마음을 울리는 시들이 꽤 있다. 읽으면서 찡한 감동을 받게 되는 시. 전라도 사투리가 시에 고스란히 나오기도 하고... 그래서 더 정감이 가는 시들도 있지만, 그 내용 자체가 마음을 울리는 시들이다.


몇몇 시 제목을 보면 '오래된 편지, 동낭치 부자, 아름다운 거짓말, 아름다운 위반' 등이 특히 마음을 울렸다. 찾아서 읽어보면 좋을 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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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25-09-06 16: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대흠의 시 중에 어머니는 말을 둥글게 하는 버릇이 있다 라고 시작하는 동그라미 라는 시를 좋아하는데요 ㅎ 옹가강가 남한테 해꼬지 한 번 안 하고 살았다는 어머니 처럼 참 동글동글하게 순하게 귀를 열고 살고 싶기도 합니다 ^^ 일생을 흙 속에서 산, ​ ㅇ 을 떠받친 어머니...

kinye91 2025-09-06 16:15   좋아요 0 | URL
네, 마음을 순하게 하는 시들이 많아서 좋았어요. 다른 것은 몰라도 남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지니려고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을 이번 시집을 읽으면서 했어요. icaru님의 글을 보고 ‘동그라미‘를 비롯해, 이대흠 시인의 다른 시들도 읽어야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방치된 믿음 - 무속은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생존해 왔는가?
이성원.손영하.이서현 지음 / 바다출판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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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처럼 무속이 우리 사회에서 큰 관심을 끈 적이 있었을까? 물론 무속은 우리 사회 전반에 존재해 왔다. 지금도 거리에 나가 보면 많은 곳에 점집 표시가 있다. 또 현수막에도 신내림을 받았다고 광고하는 것들도 있고.


일이 잘 안 풀리면 점을 보러 가야 하나 하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고, 타로점이 유행하기도 했다. 그만큼 무속은 우리 곁에 있는데... 


점집에 깃발이 달려 있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백기는 점을, 적기는 굿을, 둘 다 걸려 있으면 점과 굿을 모두 한다는 의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평소에 점에 관심이 없었으니, 점집의 표시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


이렇게 표시를 하는 점집도 있지만 서울 논현동에 있는 점집들은 대부분 점집 표시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임대인이 꺼리기도 하고, 또 지역 특성도 있다고... 여기에 요즘은 유튜브와 같은 방송으로도 무속에 관해 홍보를 하고 있다고 하니...


사회적 관심을 끌기 전에도 무속은 늘 우리 곁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사회적 관심을 끈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합리성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기존 상식에 반하는 것을 했을 때 사회적으로 관심을 끌게 된다.


특히 무속이나 특정 종교와 관련이 없어야 할 사람이 관계를 맺었음이, 그것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음이 드러날 때는 사회적 관심은 증폭된다. 이때 사회적 관심이 긍정적인 쪽이 아니라 부정적인 쪽으로 폭발하고.


이것은 결국 무속인들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무속인 개개인이 벌였던 범죄 행위나 또 다른 행위들을 넘어서 이는 무속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줄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무속에 대해서, 사실은 무속인에 대해서 심층 취재를 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기자 셋이 우리 사회에서 무속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 등을 살펴보고 있는데, 먼저 무속인들의 일탈 행위(범죄라고 하고 싶지만,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경우도 꽤 있으니)를 취재하고, 무속인들을 인터뷰해서 그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무속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논의의 마무리로 삼고 있다.


무속인들이 범죄를 저지르면 당연히 처벌해야 한다. 그것은 어떤 종교인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범죄라고 판결을 할 수 있는 기준이 무속의 경우엔 명확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 무속인들에 의해서 일탈행위가 자주 일어나고 있는 것인데...


'법원은 피해자가 위안을 받았다면 사기로 볼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53쪽)라고 하는데, 이는 피해자를 중심에 놓은 것이 아니라 가해자를 중심에 놓은 판결이 아닌가 한다. 이런 판결을 하는 기저에는 무속을 종교로 보는 관점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데...


종교로 본다면 종교가 지녀야 할 기본적인 윤리를 지키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데도 마음의 위안을 주었다는 이유로 처벌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까.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 진정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자 하는 무속인들이 피해를 보게 된다. 그런 일을 막기 위해서도 명확한 판결이 있어야 하겠는데...


무속에 사람들이 빠져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완전히 빠지지 않고 재미 삼아 보는 사람도 있지만, 자신의 상태에 따라 무속에 심취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은 대개 '공통적으로 낮은 자존감과 높은 의존성, 수동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174쪽)다고 하는데, 이는 기존의 종교에 대한 믿음이 줄어들고, 또 사회가 안정적이지 않을 때 더 강하게 나타난다.


이렇게 나약해졌을 때 강하게 끌어주는 무속인들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무속을 개인의 문제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무속을 공론화하고 어디까지 사회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지, 또 무속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공통의 기준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 점에 대해서 무속이 사회적 관심사가 된 지금 다양한 방면으로 공론화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냥 개인의 문제로 남겨두지 말고.


무속에 대하여 다방면으로 취재했는데, 이들이 말하고 있듯이 무속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의 수나 그들의 수입 등등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것들이 명확해져야 무속이 '방치된 믿음'으로 남겨지지 않을까 한다.


또한 적어도 공적인 자리에 무속을 끌어들이는 일은 하지 않게 될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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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어의 눈 - 포식자에서 먹이로의 전락
발 플럼우드 지음, 김지은 옮김 / yeondoo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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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통해서 다른 책을 만나게 된다. 책은 책을 이어줄 때 의미가 있다. 그 책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책은 다른 책과 이어져야 더 의미를 지니게 된다. 세상에 이어지지 않은 존재가 없다고 해야 하는데...

책이 책을 잇듯이, 생명은 생명을 잇는다. 자신의 생명으로 다른 생명을 이어주는 순환. 이 순환이 끊겼을 때 문제가 생긴다. 그런데 지구에서 이러한 생명의 순환을 끊을 수 있는 존재는 누구인가? 

사나운 맹수들도 생명의 순환을 끊지는 못한다. 그들 역시 순환 속으로 들어간다. 돌고 도는 생명들의 원. 하여 그러한 생명들의 총합은 늘 같다. 형태만 변할 뿐이다. 그런데, 인간은?

인간은 이 생명의 순환을 끊을 수 있다. 지금 끊고 있다. 최상위 포식자로서, 자신들은 생명의 순환에 즉 먹이사슬에 포함되지 않게 행동하고 있다. 하여 인간들로 인해 지구에 있는 생명들의 총합이 변하고 있다. 

'제로섬'이어야 할 생명 순환이 엔트로피가 계속 증가하듯이 인간들로 인해 생명의 총합이 증가하고 있다. 왜? 인간이 생명의 순환 고리를 끊어버렸으니까. 하여 인간은 다른 생명의 생명으로 변하지 못하고, 그냥 인간으로, 한때 소멸하거나 가루가 되어 또는 탄소(다이아몬드)와 같은 형태로 변해서 계속 존재하고 있으니까.

이런 생명의 순환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주는 책을 만났다. 발 플럼우드가 쓴 [악어의 눈]이다. 작은 제목이 눈에 띈다. '포식자에서 먹이로의 전락'

번역자는 '전락'이라는 말을 썼지만 '전락'보다는 '전환'이라든지 또는 '깨달음' 정도의 말로 번역을 했으면 이 책의 취지에 더 잘 맞지 않았을까 한다.

저자인 발 플럼우드는 모든 생명체는 친족이라고, 이들은 생명의 순환 고리에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고 하기 때문에.

하여 포식자와 먹이는 다른 존재가 아니라, 언제든지 포식자에서 먹이로, 먹이에서 포식자로 전환될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최상위 포식자인 인간 역시 죽으면 다른 동물의 고기가 되거나 미생물을 비롯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먹이가 되니, 먹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 튼튼한 관과 돌로 다른 생명들의 침입을 막는 것을 발 플럼우드는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행위 자체가 생명 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이고, 인간은 절대로 먹이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의 발현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그렇게 생명을 바라보는 관점을 다룬 글들과 자신이 다른 생명과 함께 살던 모습을 쓴 글, 그리고 우리가 자연과 문화를 이분법적으로 보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함을 주장하는 글들이 실려 있다.

어렵지 않고 또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글들인데, 우리 역시 먹이가 될 수 있다는 생각, 그 점에 대해서 더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는 먹이이고 동시에 먹이 그 이상입니다.'(53쪽)라는 주장과 '우리는 인간의 멋진 삶에서 우리가 먹이로 만드는 이들과의 친족관계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먹이를 얻어야 합니다. 이 방식은 우리가 먹이 그 이상이라는 점을 망각하지 않으면서 우리 자신을 다른 존재의 먹이로서 상호적으로 위치시킵니다.'(210쪽) 라고 하면서 '먹이 활동은 자연과 문화가 완전히 혼합된 활동입니다'(222쪽)고 자연과 문화를 가르는 이분법을 부정하고 있다.

인간도 생태계의 일부이고, 생명 순환의 고리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그래서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다른 생명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생명이 생명을 잇는 모습인 것이다.

'생명을 순환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우리의 죽음을 다른 생명을 위한 기회로 이해한다면 특권적, 기술적 지배와 초월성으로 영원한 젊음을 움켜쥐려 하는 인간의 탐욕과 배은망덕을 저지할 수 있습니다. 죽음은 개체 수준에서 생명의 찰나성을 확정하지만, 생태적 수준에서는 지속적이고 탄력적인 순환 또는 과정을 보여줍니다.'(249쪽)

악어에게 죽임을 당할 뻔한 경험을 통해서 자연과 문화가 분리되어서는 안 됨을, 또한 인간 역시 다른 생명의 먹이로 존재함을 깨닫게 되었다는 발 플럼우드. 그의 글을 읽으면서 인간 역시 생명의 순환 고리 속에 있음을, 그것을 깨어서는 결국 인간 자신의 생명이 위험해짐을 생각하게 됐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나희덕 시집 [시와 물질]을 읽고서다. 그 시집에 '누군가의 이빨 앞에서'라는 시가 있는데, 그 시에 발 플럼우드의 이야기가 나온다. 부분만 인용하면 이렇다.

 

발 플럼우드는 세 번이나 악어에게 잡아먹힐 뻔했다고 해요

 

우기의 강을 거슬러 가던 그녀는

카누를 타고 혼자서 너무 멀리 가버렸어요

악어의 눈을 마주하고 나서야 그녀는 깨달았지요

 

자신의 몸이 육즙 가득한 고기라는 사실을

 

눈꺼풀 속에서 빛나는 금색 눈동자,

악어의 눈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어요

악어는 그녀의 몸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자만과 환영까지 덮쳐버렸지요

 

악어에게 세 번이나 물어뜯긴 대가로 플럼우드는

먹이 그 이상의 존재가 되었어요

먹이로서의 인간에 대해 깨닫게 되었으니까요

 

- 나희덕, '누군가의 이빨 앞에서' 부분


이 책을 알게 해준 나희덕 시인에게 감사를 표한다. 시인을 통해서 다른 책과 이어지게 되었으니...


그리고 악어는 사냥할 때 탈진시키거나 익사시키기 위해 먹이를 입에 물고 물속으로 들어가 수차례 회전하는 것을 'death roll'이라고 하며, 국내에서는 '죽음의 소용돌이'로 번역한다고 한다. (9쪽, 옮긴이 주)


발 플럼우드는 악어에게 세 번의 소용돌이를 당했다고 하는데... 그 이후 바로 인간도 먹이가 될 수 있음을, 생명들은 모두 포식자도 먹이도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저자의 경험을 통해서 생태계에 자리한 인간의 위치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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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25-09-03 18: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kinye91님, 잘 읽었습니다. 저도 이 책을 여러 책에서 만났습니다. 방금 읽은 책에서도 이 책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희덕 시에 나왔는지는 덕분에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저기 책장에서 제게 눈길을 보내지만 애써 외면하고 있습니다. 언제쯤 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kinye91 2025-09-04 06:45   좋아요 0 | URL
서로 이어져 있는 책들, 반갑고 또 고맙더라고요. 그리고 언제가 되든 읽게 되더군요. 에로이카 님께도 이 책을 읽어야지 하는 때가 올 거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