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 민음사 모던 클래식 10
재닛 윈터슨 지음, 김은정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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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제목만으로는 내용을 예측하기 힘들다. 그런데도 제목에서 보면 하나만을 강요하는 것이 잘못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과일은 오렌지말고도 여러가지가 있으니까.


소설의 각 장들은 성경에서 따왔는데, 창세기부터 룻기로 끝난다. 시작에서 방랑으로 끝난다고 봐야 하는지...


독실한 기독교 집안으로 입양된 아이가 그 신앙으로 키워진다. 그런데 어디 부모의 뜻대로 성장하겠는가. 아이는 학교에서도 계속 성경과 관련된 이야기만 해 교사들의 걱정을 받지만, 엄마는 막무가내다. 그것을 오히려 더 바람직해 한다.


성경대로 살아가는 아이를 바라는 부모. 그런데 아이는 성장하면서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 동성애 성향을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엄마에게는 재앙이다. 사탄이 아이의 몸으로 들어간 것처럼 여긴다. 목사 역시 마찬가지고.


이것을 견디지 못한 아이는 집을 나오지만, 그렇다고 부모와 연결된 끈이 아주 끊어진 것은 아니지만 아이는 부모와는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된다. 


작가의 성장담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인데... 여기서 과연 종교는 어떠해야 하는가, 부모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종교가 사람을 획일적으로 만든다면 그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종교가 아니라 그 종교를 전파하는 사람들의 말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가. 그들의 말이 과연 성경과 또는 신과 합치하는가. 그들의 말에 의문을 제기하면 이단이라고, 사탄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과연 종교인가?


하나만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견뎌낼 수가 없다. 그것은 광신도들을 양산할 뿐이다. 그러한 광신도들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다. 다름은 곧 잘못이고, 잘못은 신과 반대되는 사탄의 행위일 뿐이다. 그것은 배제되어야 한다.


그런 주장이 소설 속에서 이런 대사로 나타난다.


"오렌지야말로 유일한 과일이지." 어머니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56쪽)


그 많은 과일 중에 오렌지만이 과일이라고 하는 것은 다름을,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오로지 자신들의 신만이 유일하다는 주장. 그 신을 대변하는 사람들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잘못된 행위라는 것. 그러니 여기서 다른 행위를 하는 또는 다른 성향을 지닌 사람은 자신들의 신념을 받아들이거나 또는 떠나야 한다.


하지만 나중에 어머니는 또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이것이 앞의 말과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는 철학적으로 말했다.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니까." (285쪽)


이 말에 다른 과일을 모두 인정한다는 마음이 들어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은 아니다. 오렌지에서 다른 과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냥 자신들이 과일이라고 하는 대상이 바뀌었을 뿐, 다름을 받아들이는 자세로 바뀐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 소설은 획일성을 강요하는 분위기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아이의 이야기다. 자신의 특성을 알게되고, 그것을 실현하려는 아이의 모습. 


소설을 읽으면서 과연 종교는, 부모는 어찌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신들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남들도 그대로 따르게 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나와 우리와 다른 생각, 다른 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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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기 안내서 - 더 멀리 나아가려는 당신을 위한 지도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반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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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여행을 하라고 한다. 낯선 곳으로 가서 낯익은 자신과 결별하는 경험을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이 몰랐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고.


늘 가던 장소만 가지 말고 다른 장소에 가보는 일. 자신을 고정된 삶에서 변화 있는 삶으로 바꿔가는 일. 습관적으로 한다는 말이 아니라 하기 전에 생각을 하게 되는 일이다. 여행은 그러한 경험을 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솔닛의 이 책은 여행에 관한 책이 아니다. 그렇지만 여행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솔닛이 가보았던 낯선 장소에서 자신이 어떤 경험을 했는지, 그런 경험을 통해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길 잃기 안내서]는 '길 찾기 안내서'다. 우리는 길을 잃었을 때야 비로소 자신이 가고 있던 길을 다르게 본다. 그때서야 의식한다. 의식을 하면 되돌아보게 되고, 앞을 살피고 좌우를 살피게 된다. 또한 빠르게에서 느리게로 바뀌게 된다. 살펴야 하니까.


길을 잃는 일은 길을 찾는 일의 시작이다. 그러니 길을 잃지 않으면 길을 찾을 수가 없다. 여기서 잃는다는 것의 의미를 솔닛의 말을 빌려 정의하고자 한다.


'잃는다는 것에는 사실 전혀 다른 두 의미가 있다. 사물을 잃는 것은 낯익은 것들이 차츰 사라지는 일이지만, 길을 잃는 것은 낯선 것들이 새로 나타나는 일이다. ... 길을 잃을 때는 다르다. 그때는 세상이 우리가 알던 것보다 더 커진 셈이다.' (42쪽)


자, 여기서 잃는다는 것은 상실이 아니다. 찾음이다. 그것도 이전에 있는 것에 무언가를 더 보태는 일. 그것이 바로 '길을 잃는다'가 지니는 의미다.


인생에서 길을 잃는다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실수와 실패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 인생에서 실수와 실패가 없을 수 있는가? 우리는 누구나 실수와 실패를 한다. 그런데 그때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따라서 다음 인생이 달라진다.


길을 잃었다고 주저앉으면 더 나아갈 수가 없다. 그곳이 자신의 마지막 장소가 된다. 하지만 길을 잃었기에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면 그곳은 마지막 장소가 아니라 시작하는 장소가 된다. 새로운 시작, 그것을 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어디 그런가?


실수와 실패가 마지막 장소가 되는 사회라는 생각이 들면 누구나 실수나 실패를 하지 않기 위해서 새로운 길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남들이 이미 닦아놓은 길로 가려고 한다. 그냥 그렇게...


여기에서 솔닛의 말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실수를 두려워하는 태도는 그 자체 크나큰 실수일 수 있다.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실수일 수 있다. 삶은 늘 위험한 법이니, 조금이라도 덜 위험한 삶은 이미 무언가를 상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154쪽)


이런 점에서 솔닛의 이 책은 의미가 있다. 우리에게 길을 잃으라고, 실수를 해보아야 한다고, 실패도 겪어보아야 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말은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실수와 실패가 용인이 되고 또다른 시도를 할 수 있는 사회가 기반이 되어야 한다.


하여 솔닛의 이런 주장은 개인에게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사회를 변화시키야 한다고, 그런 일들은 이미 길을 잃어본 사람들이 먼저 해야 한다는 주장이 된다. 이런 주장을 솔닛은 글쓰기를 통해서 하고 있다.


'글쓰기는 즉각적인 대답이나 상응하는 대답이 영원히 묵묵부답일 수도 있는 대화, 아니면 긴 시간이 흘러서 글쓴이가 사라진 뒤에야 진행될 수도 있는 대화를 먼저 시작하는 일이다.' (186쪽)


이렇게 먼저 대화를 시작한 솔닛. 우리는 그 대화를 이어받아 계속 대화를 해야 한다. 우리가 길을 잃는 경험을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니까. 그래서 길 잃기가 여행이 되도록 해야 한다. 길 잃기가 나를 주저앉히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 무언가를 더 보태어서 돌아오게 하는 여행. 그것이 바로 솔닛이 말한 길 잃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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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 권여선 장편소설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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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고생이 두부 손상으로 죽었다.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소설은 이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세 명의 서술자가 등장한다. 죽은 여고생의 동생인 다언, 다언과 같은 동아리 소속이자 죽은 여고생과 같은 반이었던 상희, 그리고 역시 같은 반이었던 태림.


서술자는' 다언-상희-다언-태림-다언-태림-상희-다언' 순으로 나온다. 사건의 전모는 태림이 서술자로 나와 상담사에게 전하는 말을 통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상희가 서술자로 나오는 부분에서 다언의 모습은 달라져 있는데, 한번은 아직도 상처에서 허덕이고 있는 모습이고, 한번은 어떤 식이든 상처에서 나온 모습이다. 그러니, 상희의 서술을 통해서 다언이 자기 나름대로의 해법을 실행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다언이 서술자로 나오는 부분은? 언니의 죽음을 충격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할 수렁 속에서 헤매던 다언이 서서히 복수를 다짐한다. 언제까지 그냥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고. 그때 다언은 계란 노른자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노란 천사의 복수가 시작되었다. 레몬,이라고 나는 의미 없이 중얼거렸다. 복수의 주문처럼 레몬, 레몬, 레몬이라고.' (97쪽)


언니가 마지막으로 입었던 옷은 노란색, 계란 노른자도 노란색, 그리고 레몬 역시 노란색. 노란색이라는 것이 서로를 연상시키고 있다. 언니가 입었던 노란색 옷은 죽음의 옷이고, 잊고 싶은 색깔이었다면, 달걀 노른자의 노란색은 그 사건을 상기시키면서 이젠 행동해야 할 때라는 것을, 자신을 추스리고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리는 색깔이라면 레몬의 노란색은 무엇인가. 


레몬의 신맛, 인생의 신맛. 이런 것을 생각하게 하는가. 자, 나는 이제껏 인생의 힘듦을 겪었다. 이젠 너희 차례다. 이런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아니면 신맛으로 인해 긴장을 잃지 않고 자신을 행동으로 이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하여간 레몬이 주문처럼 등장하고...


이제 서술자들의 서술을 통해서 또다른 사건을 짐작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다언의 복수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여기에 매개가 되는 인물이 한만우라는 인물이다. 한만우라는 이름 때문에 붙은 별명이 소설의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민요의 '한 많은 이 세상'을 하안만우우'(11쪽)이라고 부른다는 서술이 그렇다.


평온한 세상이 아니라 한 많은 세상인데, 그런 세상살이를 하는 인물이 바로 한만우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간다. 자신의 처지에서 최선을 다해서. 그것이 바로 인생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하여 다언은 이런 생각을 한다.


'혹시라도 살아 있다는 것, 희열과 공포가 교차하고 평온과 위험이 뒤섞이는 생명 속에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의미일 수는 없을까.'(198쪽)

'찰나에 불과한 그 순간순간들이 삶의 의미일 수는 없을까'(199쪽)


결국 세상은 평온하지 않지만, 그것이 바로 인생이고 삶의 의미라는 생각. 자신에게 닥친 일을 직접 대면하겠다는 의지이지 않나 싶다.


명확하게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지는 않고, 또다른 사건도 묻힌 듯이 보이지만 두 사건 사이에는 연관성이 있다. 읽으면서 그 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작가가 서술하고 있는데...


이런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는 삶에 드리운 어둠의 그림자들 역시 우리 삶이라는 생각. 그리고 그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고 있다. 좋은 면을 보여주지 않고 뜻하지 않게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들이닥친 문제들이 우리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다언의 서술에 나타난 한만우 가족의 삶을 통해서 다시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하고 있다.


지금 이렇게 소설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이 순간이 바로 삶의 의미일 수도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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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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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가 불현듯, 어라 이 소설집에 '안녕 주정뱅이'라는 소설은 없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제목은 '안녕 주정뱅이'지만 그러한 제목을 가진 소설은 없다. 그렇다면 이런 제목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야 한다. 


분명 공통점이 있으니 이런 제목을 붙였겠지. 주정뱅이라는 말부터 생각한다.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면 '주정쟁이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다. 하긴 '-뱅이'라는 말에 높임의 뜻은 없을테니, 그렇다고 '-쟁이'라는 말에도 높임의 뜻은 없을텐데, 주정쟁이는 '주정을 부리는 버릇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니 그냥 그러한 속성을 지닌 사람을 일컫는 말이라고 보면 된다.


제목에 '주정뱅이'라는 말이 있으니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술과 관련된 일들을 겪은 사람들이리라. 이런 생각을 하면서 생각을 해보니, 인물들 모두 술을 마시고 그로 인해 어떠한 일들을 겪게 된다. 


우리 인생에서 술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는 하지만 소설집에 실린 소설 모두가 술과 관련이 있다니... 그렇게 생각하면서 읽다보니, 술로 인해 우리는 뜻하지 않은 일들을 겪기도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어디 우리 인생에서 뜻하지 않는 일이 술로만 일어나는가. 인생 자체가 뜻하지 않은 일들의 연속 아니던가. 그러한 우연들이 겹쳐 인생을 이루고 있으니.


술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소설은 연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연작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술과 비슷하게 뜻하지 않게 벌어지는 일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래서 '안녕'이라는 제목이 들어갔나 보다.


'안녕' 우리가 인사할 때 주로 쓰는 말 아닌가. 이는 주정뱅이를 외면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인생에서 뜻하지 않게 겪게 되는 일들을 외면하고 회피하지 않고 그것들을 마주보겠다는 말로 해석된다.


"그게...... 내 탓은 아니잖아요? 그렇잖아요?" ('층'에서, 230쪽)


당연히 내 탓이 아니다. 그렇지만 내게 다가온 일이다. 이미 내 일이 되었다. 그렇다면 내 탓은 아니잖아요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을 마주해야 한다. '안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받아들이면서 내 삶을 지속해야 한다.


그러한 받아들임, 소설집의 첫소설인 '봄밤'에서 아프게 다가온다. 지독하리만큼 힘든 상황임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분자를 키워가려고 한다. 분모가 어려움, 안 좋음이라면 분자는 할 수 있음, 좋음이라고 한다.


분자와 분모가 같으면 1이 되겠지만, 우리 인생은 불확실한 분모 쪽이 클 가능성이 높다. 또한 분모 쪽은 우리의 노력으로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다. 어느 순간 뜻하지 않게 훅 치고 들어오는 불행들, 사건들... 불확실한 분모를 어찌할 수 없다면 인생에서 우리가 중점을 두어야 할 부분은 어디인가? 바로 분자 쪽 아니던가. 우리가 할 수 있는 한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 상대에게 즐거움과 편안함을 주려고 하는 것. 그것은 극한의 상황에서도 어느 정도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 부분을 하는 일. '안녕 주정뱅이'하고 술을 맞이하는 일이다.


'봄밤'에서 영경이 하는 말.


'분자에 그 사람의 좋은 점을 놓고 분모에 그 사람의 나쁜 점을 놓으면 그 사람의 값이 나오는 식이지. 아무리 장점이 많아도 단점이 더 많으면 그 값은 1보다 작고 그 역이면 1보다 크고.'('봄밤'에서, 25쪽)


수환이 하는 말.


'분모야 어쩔 수 없다 쳐도 분자라도 늘려야지.' ('봄밤'에서, 32쪽)


이런 장면 아니겠는가. 이것을 꼭 상대방과의 관계에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에서도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안녕 주정뱅이'라고 하는 순간이, 내게 찾아오는 온갖 불행들, 내 책임이 아닌 것 같은 수많은 일들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면서, 그것이 내 탓이 아니잖아요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찌할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두고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일로 바꾸는 때가 된다.


그렇다고 우리 모두가 분자를 늘리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에서도 마찬가지다. 분자를 늘리는 인물들만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다. 또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인생은 그렇지 않으니까. 다만 작가는 분모에 들어갈 수 있는 일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카메라, 층'은 이런 점을 너무도 잘 보여준다. 자, 이런 것이 바로 우리 인생이라고. 그것은 어찌할 수 없다고. 어찌할 수 없으니 그냥 포기할 것이냐고. 아니라고. 아닐 수도 있다고. 


하여 '봄밤, 이모'에서는 어찌할 수 없음에도 분자를 늘리는 사람의 모습이 펼쳐진다. 나머지 소설들에서는 분모에 해당하는 일들과 그것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하여 분모에 해당하는 삶이든, 분자에 해당하는 삶이든 모두 우리 삶의 일부임을, 그것들이 우리 삶을 만들어가고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술을 마시는 경우가 기분이 좋아서, 또는 기분이 좋지 않아서 등등 다양한데, 술이 외부에서 내게 들어오는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일들과 같다. 그 일들이 때로는 나를 좋게도, 나를 좋지 않게도 하지만 한번 마신 술이 다시 나가려면 시간이 필요하듯이 그러한 일들도 시간이 필요함을. 


그 시간 동안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대면할 수 있는 자세를 지녀야 함을. 그것이 바로 우리 인생에서 분모와 분자를 인식하고 살아가는 모습임을 이 소설집은 생각하게 한다. 


그렇지. 나도 내 삶에서 어찌할 수 없는 분모에 모든 힘을 쏟아붓기보다는 분자를 어떻게 키울지에 힘을 써야겠다. 이것이 소설의 힘, 문학의 힘이기도 하겠구나 하는 생각. 그래서 문학을 만나는 일은 분자를 키우는 일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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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6 - 볼라뇨 20주기 특별합본판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송병선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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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라뇨가 죽기 직전까지 썼던 소설이라고 한다. 완성작이냐 미완성작이냐는 비평가들에 따라 다르지만, 작가가 죽기 전에 5권으로 분리해서 출간했으면 했다는 말을 했다고 하니, 구성은 완성된 작품으로 봐도 될 듯하다. 왜냐하면 이 책은 단 한 권으로 출판이 되었지만 (편집자는 내용 상으로 한 권으로 출간하는 것이 더 좋다고 여겼다고 한다) 5부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5부로 구성된 내용과 다섯 권으로 나눠서 출판했으면 한다는 작가의 말이 통하기 때문에, 이 작품을 굳이 미완성작이라고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물론 작가가 구성이나 표현을 좀더 다듬었을 수는 있겠지만)


제목부터 이게 뭐지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다. 2666이라니... 숫자가 나열된 제목인데, 도대체 이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다. 해설을 참조할 수밖에 없는데, 해설 역시 딱히 이거다라는 설명을 해주지는 못한다. 그러니 그냥 미지의 숫자로 남겨두자. 다만, 볼라뇨가 쓴 다른 소설인 [부적]에 2666년의 공동묘지라는 말이 나오니, 묘지와 같은 상황이 펼쳐지는 상황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로베르토 볼라뇨, 부적, 열린책들. 김현균 옮김. 2010년. 초판. 88쪽)


그렇다면 무엇이 묘지인가? 바로 약자들의 삶이 묘지와 같다는 말이다. 이 책의 4부에는 이러한 묘지와 같은 상황이 펼쳐진다. 수많은 살인사건. 그러나 대부분 죽어가는 사람들은 여성들이다. 여성들이 죽어나가고 있지만 사건은 해결되지 않는다. 지속된다. 경찰들은 무능력하고, 고위층들은 마약밀매업자나 다른 집단들과 연결되어 있다. 이들에게 약자들의 죽음은 그냥 죽음일 뿐이다. 이런 모습을 작가는 법의학 보고서처럼 펼쳐 보여줄 뿐이다.


범인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는다. 아니 밝힐 수가 없다. 이는 특정한 범인이 아니라 사회가 살인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사회를 묘지가 아니면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는가.


공간으로 이런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산타테레사를 중심으로 삼고 있다면, 1,2,3,5부에서는 다른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소설을 전개해 나간다.


1부에서는 비평가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모두 유럽 사람들이다. 유럽, 바로 제국주의를 통해 식민지를 개척했던 나라 아닌가. 이들에게는 그들이 추종하는 작가의 행방이 중요해서 산타테레사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런 모습은 약자들의 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이들에 의해서는 묘지가 보이지 않는다. 묘지 역시 그들에게는 공원이 될 뿐이다.


그러나 묘지와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곳에서 이방인이 될 수 없다. 이방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은 그 현실을 견디기 힘들어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2부에 등장하는 아말피타노가 이런 상황이다. 그 역시 산타테레사에서는 이방인이지만 같은 라틴아메리카 출신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는 완전히 그곳에 동화될 수는 없지만 위험은 감지한다. 그의 딸인 로사에게 그곳을 떠나도록 하는 것이 그런 모습이다.


3부에 등장하는 인물은 흑인이자 미국 시민인 페이트다. 그 역시 산타테레사에서는 이방인이다. 그렇지만 흑인이라는 조건이 산타테레사에서 벌어지는 일에 무감할 수가 없다. 그 역시 어느 정도는 약자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미국 시민이다. 그곳에서 일을 해결할 수는 없다. 다만,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할 뿐이다. 이렇게 3부까지 여러 인물을 통해서 산타테레사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 다음에 4부에서 산타테레사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여준다. 끔찍한 지옥도. 그곳은 약자들에게 묘지와 같은 곳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어 묻힐지 모르는 곳. 그렇게 사람들이 묻히는 묘지라고도 할 수 있지만, 진실이 묻히는 묘지라는 의미도 지닐 수 있다. 이곳에서 진실은 결코 밝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5부에 나오는 아르킴볼디 이야기는 앞부분에 등장하는 비평가들이 산타테레사로 오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그가 왜 산타테레사로 가게 되었는지를 살필 수 있는 과정이 서술되기 때문이다.


아르킴볼디의 삶을 통해 또다른 지옥과 같은 모습이 펼쳐진다. 이번에는 라틴아메리카가 아니라 유럽에서 벌어진 지옥의 모습. 그것은 세계대전을 통해 겪는 사람들의 비참함이 아르킴볼디의 모습을 통해서 펼쳐진다. 그렇지만 그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약자들은 묘지와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과 달리 소설을 통해 벗어난다. 


아르킴볼디가 겪은 일들이 라틴아메리카의 약자들이 겪는 일들과 다르게 펼쳐지는데, 이런 서술이 제국주의 중심부의 사람들의 처지가 라틴아메리카의 사람들의 처지와 다르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서 약자들이 겪고 있는 지옥도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이런 지옥도를 펼쳐보이는 것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약자들이 겪는 일들을 외면할 수 없는 작가의 책임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제대로 의미를 파악하기 힘들고 아주 방대한 소설이지만 읽을수록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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