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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6 - 볼라뇨 20주기 특별합본판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송병선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10월
평점 :
볼라뇨가 죽기 직전까지 썼던 소설이라고 한다. 완성작이냐 미완성작이냐는 비평가들에 따라 다르지만, 작가가 죽기 전에 5권으로 분리해서 출간했으면 했다는 말을 했다고 하니, 구성은 완성된 작품으로 봐도 될 듯하다. 왜냐하면 이 책은 단 한 권으로 출판이 되었지만 (편집자는 내용 상으로 한 권으로 출간하는 것이 더 좋다고 여겼다고 한다) 5부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5부로 구성된 내용과 다섯 권으로 나눠서 출판했으면 한다는 작가의 말이 통하기 때문에, 이 작품을 굳이 미완성작이라고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물론 작가가 구성이나 표현을 좀더 다듬었을 수는 있겠지만)
제목부터 이게 뭐지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다. 2666이라니... 숫자가 나열된 제목인데, 도대체 이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다. 해설을 참조할 수밖에 없는데, 해설 역시 딱히 이거다라는 설명을 해주지는 못한다. 그러니 그냥 미지의 숫자로 남겨두자. 다만, 볼라뇨가 쓴 다른 소설인 [부적]에 2666년의 공동묘지라는 말이 나오니, 묘지와 같은 상황이 펼쳐지는 상황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로베르토 볼라뇨, 부적, 열린책들. 김현균 옮김. 2010년. 초판. 88쪽)
그렇다면 무엇이 묘지인가? 바로 약자들의 삶이 묘지와 같다는 말이다. 이 책의 4부에는 이러한 묘지와 같은 상황이 펼쳐진다. 수많은 살인사건. 그러나 대부분 죽어가는 사람들은 여성들이다. 여성들이 죽어나가고 있지만 사건은 해결되지 않는다. 지속된다. 경찰들은 무능력하고, 고위층들은 마약밀매업자나 다른 집단들과 연결되어 있다. 이들에게 약자들의 죽음은 그냥 죽음일 뿐이다. 이런 모습을 작가는 법의학 보고서처럼 펼쳐 보여줄 뿐이다.
범인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는다. 아니 밝힐 수가 없다. 이는 특정한 범인이 아니라 사회가 살인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사회를 묘지가 아니면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는가.
공간으로 이런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산타테레사를 중심으로 삼고 있다면, 1,2,3,5부에서는 다른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소설을 전개해 나간다.
1부에서는 비평가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모두 유럽 사람들이다. 유럽, 바로 제국주의를 통해 식민지를 개척했던 나라 아닌가. 이들에게는 그들이 추종하는 작가의 행방이 중요해서 산타테레사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런 모습은 약자들의 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이들에 의해서는 묘지가 보이지 않는다. 묘지 역시 그들에게는 공원이 될 뿐이다.
그러나 묘지와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곳에서 이방인이 될 수 없다. 이방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은 그 현실을 견디기 힘들어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2부에 등장하는 아말피타노가 이런 상황이다. 그 역시 산타테레사에서는 이방인이지만 같은 라틴아메리카 출신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는 완전히 그곳에 동화될 수는 없지만 위험은 감지한다. 그의 딸인 로사에게 그곳을 떠나도록 하는 것이 그런 모습이다.
3부에 등장하는 인물은 흑인이자 미국 시민인 페이트다. 그 역시 산타테레사에서는 이방인이다. 그렇지만 흑인이라는 조건이 산타테레사에서 벌어지는 일에 무감할 수가 없다. 그 역시 어느 정도는 약자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미국 시민이다. 그곳에서 일을 해결할 수는 없다. 다만,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할 뿐이다. 이렇게 3부까지 여러 인물을 통해서 산타테레사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 다음에 4부에서 산타테레사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여준다. 끔찍한 지옥도. 그곳은 약자들에게 묘지와 같은 곳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어 묻힐지 모르는 곳. 그렇게 사람들이 묻히는 묘지라고도 할 수 있지만, 진실이 묻히는 묘지라는 의미도 지닐 수 있다. 이곳에서 진실은 결코 밝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5부에 나오는 아르킴볼디 이야기는 앞부분에 등장하는 비평가들이 산타테레사로 오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그가 왜 산타테레사로 가게 되었는지를 살필 수 있는 과정이 서술되기 때문이다.
아르킴볼디의 삶을 통해 또다른 지옥과 같은 모습이 펼쳐진다. 이번에는 라틴아메리카가 아니라 유럽에서 벌어진 지옥의 모습. 그것은 세계대전을 통해 겪는 사람들의 비참함이 아르킴볼디의 모습을 통해서 펼쳐진다. 그렇지만 그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약자들은 묘지와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과 달리 소설을 통해 벗어난다.
아르킴볼디가 겪은 일들이 라틴아메리카의 약자들이 겪는 일들과 다르게 펼쳐지는데, 이런 서술이 제국주의 중심부의 사람들의 처지가 라틴아메리카의 사람들의 처지와 다르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서 약자들이 겪고 있는 지옥도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이런 지옥도를 펼쳐보이는 것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약자들이 겪는 일들을 외면할 수 없는 작가의 책임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제대로 의미를 파악하기 힘들고 아주 방대한 소설이지만 읽을수록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