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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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된 소설에서 '빛'을 생각한다. 그냥 빛이 아니라 희미한 빛이다.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하나는 너무도 멀고 작아서 희미하게 보이는 빛, 또 하나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 이제는 희미해져버린 빛. 둘 다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현재 그 빛은 내게서 멀어져 버렸다는 의미로 다가오기도 한다.


최은영 소설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에 실린 일곱 편의 소설들을 하나로 관통하는 주제가 바로 이러한 '희미한 빛'이 아닌가 한다. 제목이 된 소설은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라서 빛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겠지만, '몫, 일 년, 답신, 파종, 이모에게,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에서는 이러한 빛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마지막 소설인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에서는 빛을 연상할 수도 있겠다. 빛은 사라지기도 하지만 우리 마음 속에서 사라지지도 않으니 말이다.


왜 서로 다른 매체에 발표된 단편소설들에서 공통점을 발견했을까? 그것은 이 소설들에서 '빛'이 '볕'이 되는 순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내 눈 앞에 보이는 빛이 볕이 되어 내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준 순간이 있었음을,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 모두에서 느낄 수 있었기 때문. 소설들에 나온 어떤 인물들에게서 이러한 빛을 볼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말하는 빛은 결코 화려하지 않다. 크지도 않다. 위대한 빛, 누구나를 다 비추는 그러한 빛이 아니다. 희미한 빛이다. 내게 다가온, 나를 이끌어준, 그래서 어둠에서도 내가 포기하지 않게 해준 빛이다. 나를 이끌어준 빛이라서 개인적인, 사소한 빛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우리네 삶이 그렇지 않은가. 


우리 삶은 모두 개인적이다. 개개인의 삶들이 모여 사회를 이룬다. 그렇기에 개인의 삶은 개인에게서만 그치지 않는다. 세상에 전적으로 개인적인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내가 겪는 기쁨, 고통도 다 사회와 관련이 되어 있다. 즉 나를 이끈 희미한 빛은 이 사회 속에서 온전하게 나를 살아가게 하는 존재가 된다. 이는 사회가 어두울 때 더욱 나를 이끌어준다. 어둠 속에 묻혀 좌절하지 않고 나아가게 하는 빛. 그 빛은 희미한 빛일지라도 나를 포기하게 하지 않는다. 계속 가게 한다.


그리고 그런 희미한 빛으로 인해 우리는 사회 속에서 보이지 않던 존재들을 깨닫게 된다. 보이지 않는 억압을 발견하게 되고, 그런 억압 속에서도 묵묵히 자기 길을 가는 존재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 존재들로 인해 사회가 조금씩 발전해 왔음을. 개인이 어둠 속에서도 버틸 수 있었음을.


이런 빛은 볕이다. 온기를 지니고 있는. 단지 밝음만이 아니라 온기를 지니고 있는 따스함이다. 이 따스함은 나를 감싸준다. 따스함에 감싸인 나, 남을 감쌀 수 있다. 그렇게 빛이 볕이 되는 순간, 세상은 조금 더 따스해진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댈 수 있게 된다. 기댈 수 있는 존재가 한때라도 있었다는 사실. 그것이 고통스러운 삶을 버틸 수 있게 해준다.


그 과정이 결코 녹록치 않음은 물론이지만,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따스함과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는 존재, 나를 이끌뿐만 아니라 포근하게 감싸주는 존재들이 우리 삶에 있었음을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한다.


그러면서 나는 누군가에게 희미한 빛이 되어준 적이 있었던가? 누군가에게 따스한 볕이 되어준 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을 한다. 아직까지 그러한 존재가 되어준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고... 소설을 통해 다짐을 한다.


굳이 드러낼 필요가 없다. 소설 속 인물들 중에 자신을 강하게 드러내면서 빛이 되고자 하는 존재는 없다.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남에게 곁을 내어주는 존재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존재들이 마음에 남아 계속 볕의 온기를 지속시킨다.


여전히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또 그러한 사람들에게 빛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있고, 빛이 볕이 되어 온기를 전달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곁을 내어주는 사람들이 이는 한 세상은 어둠으로만 차 있지는 않게 된다.


최은영의 소설을 읽으면서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라도 빛나는 빛들, 앞을 보게 만들어주는 빛을 생각했고, 그 빛들이 우리에게 전달에 주는 별의 온기를 생각했다.


세상은 차갑고 어두운데, 최은영의 소설은 차가움 속에 따스함을, 어두움 속에 밝음을 지니고 있다. 짧지만 이러한 빛과 볕의 역할을 잘 보여주는 소설이 '파종'이라는 소설에 나온 '삼촌' -소설 속 화자에게는 오빠-이 아닌가 한다. 곁에 있어주면서 삶의 자세를 보여준 존재. 바로 이 존재에게서 빛과 볕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다른 소설들에서도 이런 역할을 하는 존재를 만나게 되지만.


소설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에 실린 소설들을 읽으면서 이렇게 빛과 볕의 역할을 하는 인물이 누구일까 찾는 재미도 쏠쏠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지니게 되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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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향하여
존 버거 지음, 이윤기 옮김 / 해냄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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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하다. 부드럽다. 문장들이 간결하다. 물론 영어로 읽지 못하고 번역으로 읽었지만, 번역으로 읽어도 문장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고 문장의 아름다움만 두드러지지 않는다. 간결한 문장에는 길고 긴 역사가 담겨 있다. 우리가 살아온 역사가.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역사도.


결혼을 향하여... 죽음을 향해 가는 줄 알면서도 결혼하려고 하는 한 쌍이 있다. 아니, 여자가 거부해도 남자가 한사코 결혼해야 한다고 한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시간을 조금 늘려보면 이해가 된다.


어차피 우리는 죽는다. 죽음을 향해 살아간다. 그 시간이 길거나 짧을 뿐이다. 에이즈에 걸린 니농. 그렇다고 방탕한 삶을 산 것도 아니다. 우연히 걸렸을 뿐이다. 사랑의 결과라고,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가혹한 질병이다. (지금은 에이즈를 완치하지는 못해도 만성질환 정도로 여길 수 있게 치료제가 개발되었다고 한다. 다만, 이 소설은 1990년대에 발표된 소설이니, 그 당시 에이즈는 죽음으로 가는 질병이었다)


사귀던 친구 지노에게 이별을 통보하는 니농. 하지만 지노는 니농을 포기하지 않는다. 어차피 사람은 죽는다. 죽기까지 사랑을 하면 되지 않는가. 지농은 니농에게 결혼하자고 한다. 결국 니농의 허락을 받은 지노.


여기까지만 보면 그냥 청춘의 사랑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니농에게는 체코인 엄마가 있다. 체코 민주화 운동과 관련이 있는, 체코로 돌아가 오랜 시간 다시 돌아오지 못한 엄마. 여기에 철도 신호원인 아빠가 있고. 이들 역시 공산주의와 관련이 있다. 즉, 이들은 사회가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도록 노력을 했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헤어진 뒤 만나지 못한다. 니농을 아빠인 쟝이 키운다. 그리고 딸이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현대사의 비극에 개인의 비극이 중첩이 된다. 소설은 이들의 결혼식을 향해 가는 아빠인 쟝과 엄마  제나의 이야기도 펼쳐진다. 그런데, 이들 이야기를 전해주는 사람이 눈이 먼 사람이다. 눈이 먼 사람. 한때는 눈이 멀지 않았는데, 눈이 멀었다는 것은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의 사상만으로는 살 수 없지만, 그렇다고 현대에 적응하기에는 무언가 빠져 있는 듯한 느낌. 장님인 서술자가 중요한 비중으로 나오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일인칭으로 니농이 서술하기도 하니까.


니농과 지노의 결혼식을 정점으로 쟝과 제나가 각각 오게 되는 과정, 오면서 그들이 겪는 일들과 과거의 일들이 서술되면서 현대사가 개인의 삶으로 들어오게 된다. 이런 역사가 짧고 간략한 문장, 아름다운 서술로 마치 풍경처럼 펼쳐진다.


그래서 니농의 결혼식은 이들의 만남뿐만 아니라 행복의 극치를 보여준다. 분명히 다가올 비극은 현재에 자리를 비켜주어야 한다. 비극은 비극일뿐, 그것이 현재를 강제할 수 없다는 것. 지금 이러한 행복을 위해 꾸준히 오게 된 것. 이것이 존 버거의 [결혼을 향하여]라는 소설이다.


무엇보다 죽을 병에 걸렸다고 헤어짐으로 끝나는 관계가 아니어서 좋다. 몇 년이고, 몇 십 년이고 결국 만남은 이별로 끝난다. 그러니 만남과 헤어짐은 보편적인 인간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시간의 길이로 판단해서 결정하면 안 된다는 것을...


행복은 결코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는 점을... 사랑을 하는 동안의 시간은 영원임을, 그 영원이 서로의 삶을 이어주고 하나로 되게 만들었음을 이 소설은 잘 보여주고 있다.


어떤 질병에 대한 편견, 그로 인한 사람에 대한 배척,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이 소설을 읽으면 느낄 수가 있다. 에이즈에 걸린 니농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그녀를 사랑하는 지노가 얼마나 멋있는 사람인지, 그러한 둘의 사랑을 응원해주는 주변 사람들의 모습에서 인간 공동체를 생각한다.


그렇게 우리는 사랑하고 헤어지고 또 사랑하면서 세상을 살아감을, 그것이 인생임을, 이 소설을 [결혼을 향하여]를 통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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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를 생각하지 말자. 그냥 제목만 생각하자. 우리는 지금 겨울을 나고 있다. 봄을 기다리면서. 그런데 우리에게 다가올 이다음 봄은 어떤 모습일까?


  만물이 생동하는 봄답게 우리들도 생기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우리 사회에 봄이 올까? 봄이 오도록 가로막고 있는 존재들에게, 이제 겨울은 갔다고, 봄의 시대라고, 자리를 비키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렇게 '자유'롭게 말할 수 있을까? 어떤 폭력의 위협을 받지 않고. 겨울처럼 혹독한 시련을 겪지 않고, 봄답게 만물이 하나둘 언 땅을 뚫고 나올 수 있는 봄을 맞이할 수 있을까?


의문형으로 끝나는 문장이 아니라, 평서형으로 끝나는 문장을 쓰고 싶다. 우리는 봄다운 봄을 맞이한다 정도의 문장. 생기 넘치는 말들이 넘치는, 거기에 폭력은 끼어들 틈이 없는 그런 봄을.


유희경 시집을 읽다. 제목이 참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런데 시집에 실린 시들은 이해하기 어렵다. 하긴 한번에 쉽게 이해되면 시가 아니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렵다.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이런 말을 해야 한다.


시집을 읽으면서 아직도 봄이 오지 않았음을 생각한다. 봄이 와야 하는데... 제목이 된 시를 보면 더더욱 봄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봄이 아니다. 이런 봄이 아니어야 하는데... 시집을 읽으면, 제목이 된 구절이 두 번 나온다. 하나는 시로, 또 하나는 부록에서.


부록에서 시인은 '이다음 봄에 우리는, / 어떻게 되는 걸까요.'(139쪽)라고 하고 있다. 묻고 있다. 무언가 앞 구절을 보면 시인은 봄에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 봄은 닫히지 않고 열린 존재다. 열려야 한다. 그래서 시인은 '남은 일은 문을 열고 나서는 것.'(139쪽)이라고 한다.


우리에게도 봄은 이렇게 문을 열고 나서는 때가 되어야 한다. 그런 봄을 우리는 맞이해야 한다. 제목이 된 시의 끝부분에서는 '이다음 봄에 우리는 어느 무덤에서 울어야 할까요.'(65쪽)라고 하고 있지만... 해석을 할 수가 없다. 그냥 읽자.


이다음 봄에 우리는


  살해(殺害)의 꿈을 꾸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새들이 날아오르고 그들의 검은 깃털이 폭설처럼 쏟아졌습니다 그중 하나를 주머니에 감추고 돌아오는 길에는 이야기를 버렸습니다 새들이 쪼아먹기를 아무도 쫓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쫓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빌어먹을, 당신이 있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당신이 있었습니다 다음은 이어지지 않습니다 나는 이야기를 버렸으니까요 당신이 나를 꼭 안아주거나 내가 당신을 밀쳐내거나 둘이 손을 잡고 도망가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봄엔 당신이 나의 꿈을 꾸었지요 당신이 말해준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함께 계단을 따라 내려갔고 계단 끝에는 버려진 집들이 있었습니다 저녁이 되었고 우리는 숨바꼭질을 했었어요 당신이 나를 찾을 차례에 밤이 되었고 당신은 나를 너무 사랑해서


  그것도 살해입니다 당신은 말해주지 않았지만 그때에도 새들이 날아오르고 한가득 날리던 검은 깃털들 당신은 그것으로 무엇을 했습니까 당신은 이야기를 어디에 유기했던가요 차라리 분실했습니까 왜 말이 없나요 내가 버린 이야기 때문인가요


  깃털은 잠든 사람의 눈썹을 닮았습니다 하염없이 나는 그것을 만지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없는 세계에서 당신이 사랑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것입니다. 날것의 생애가 음악이 될 때 그래요 당신은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이것은 나의 살해, 꿈이니까요


  이다음 봄에 우리는 어느 무덤에서 울어야 할까요


유희경, 이다음 봄에 우리는. 아침달. 2023년 1판 5쇄. 64-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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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 2015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작품 수록
한강 외 지음 / 문예중앙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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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이다. 책을 고른 이유는 단 하나다. 한강 작품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강 작품을 거의 다 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작품이 있었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빅이슈]를 읽으면서 그곳에서 소개한 한강 작품이었기에 구해 읽게 된 것.


물론 황순원이라는 작가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작가이기도 했고, 교과서에서 그의 '소나기'와 '학'은 물론이고 '목넘이 마을의 개, 독짓는 늙은이' 또는 '움직이는 성' 등도 알았고, 읽은 적이 있으니, 황순원 작가의 이름을 단 문학상을 탄 작품이라면 하는 믿음도 있었다.


읽은 소감은 당연히 좋았다다. 그리고 수록된 작품들도 좋았고. 어느 하나 그냥 넘길 수 없는 작품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물론 단편 소설이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는 경우가 많아, 내가 그 작품을 읽었던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되지만, 읽는 순간과 읽은 뒤에 내 마음에 남아 나를 이루는 한 요소가 되어 있다고 믿고 있으니.


한강 작품은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이다. 이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은 순간일 수 있다. 사실 눈 한 송이는 금방 녹는다. 아주 짧은 시간에. 우리가 무엇을 하기도 전에 녹아버린다. 그렇지만 그 눈 한 송이가 녹는 시간이 아주 길어질 수 있다. 안 녹는다고 느낄 정도로...


제목만으로는 순간인지 영겁인지 알 수가 없다. 우리 인생을 순간이라고 보기도 하고, 아주 긴 시간이라고 보기도 하니 말이다.


소설에는 영혼이 등장한다. 이미 죽은 사람의 영혼. 그 영혼은 맑은 영혼이다. 원망을 하는 영혼이 아니라 세상을 잘살고 간 영혼이다. 그런데 세상을 잘살았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소설은 바로 '잘살다'라는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결혼을 하면 퇴직을 하게 하는 회사. 결혼을 해도 버티는 사람에게 어떻게든 나가게 만드는 회사. 그것을 바라보는 동료들. 서로 다른 관점을 지닐 수 있다. 선명한 악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아니 회사를 설립한 사람을 악인이라고 하면 되지만, 그는 그 회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직접 접촉하지 않는다.


소설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동료들이 나올 뿐이다. 동료라고 하지만 사건을 대하는 자세는 다르다. 다를 수밖에 없다. 이들에게 같은 사건이란 없다. 모두가 자신의 처지에서 다르게 판단하고 행동할 뿐이다.


여기서 과연 '잘산다'는 의미가 무엇일까?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모두를 위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그런 삶이 있을까? 그냥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적어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남을 배려하는 삶. 그러나 그 배려가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지, 또 과연 그 배려를 남이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지는 우리가 알 수가 없다. 다만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최선을 삶을 살아갈 뿐. 그것이 '잘산다'는 의미 아닐까.


하지만 이렇게 열심히 살려고 한 사람, 잘살려고 한 사람은 세상에 오래 있지 못한다. 세상은 그런 사람을 용납하기 힘들다. 사고든 질병이든 그들은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을 떠난 사람을 추모하면서 우리는 '잘살았다'는 말을 하게 된다.


자, 이들이 잘살았던 기간은 짧았는가, 아니면 길었는가?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그들은 잘살기 위해서 고민을 하는 시간을 가졌을 테고, 그 시간은 무척 긴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정을 한 다음에는 눈 한 송이가 녹는 시간은 짧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행동의 시간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는 사람들이 지니는 시간은 어떠할까? 그들을 보는 시간이 짧을수록 자신의 삶에 대해서 고민을 하지 않게 되지 않을까? 그냥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잠깐 생각하고 잊어버리지 않을까. 


반대로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는 시간이 긴 사람들은 어떨까? 그들의 삶에 대해서, 자신의 삶에 대해서, 그리고 사회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는 시간, 행동으로 나아가려는 시간, 그러는 시간 동안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은 무척 긴 시간이 될 것이다.


해결이 안 되었으므로, 아직도 진행 중이므로, 그러한 눈 한 송이가 녹는 시간 동안은 괴롭고 힘들고,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 시간. 나에게 눈 한 송이가 녹는 시간은 어떤 시간인가 생각을 한다.


다른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시간이 되면 하고, 마음 속에 남아 있는 한강의 작품을 계속 음미하련다. 이 작품도 한강의 다른 작품들처럼 마음에 남아 쉽사리 나가지 않는다. 자꾸 곱씹게 만든다. 이것이 문학의 효용성인가 하는 생각이 들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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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콜하스 창비세계문학 14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지음, 황종민 옮김 / 창비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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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소설집이다. 모르던 작가였는데, 관심도 없었고, 오에겐자부로의 소설을 읽다가 이 작가의 '미하엘 콜하스'라는 작품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민중반란... 


역시 좋은 작가는 다른 작품을 소개하고, 읽게 만드는구나 하는 생각에, 구입해 놓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은 읽고 싶은 마음이 없던 소설이었는데... 작년 겨울과 올 겨울, 유난히 춥다. 날씨가 아니라 마음이... 마음을 더욱 춥게 하는 존재들이 있고, 그런 마음을 녹여주는 존재들이 있기에 이제는 읽어야지 하고 읽기 시작.


여러 작품이 실려 있는데, 반전이 일어나는 작품도 많고, 인간의 본성을 하나로 정리할 수 없다는 내용을 주는 소설도 있지만, 제목이 된 소설 '미하엘 콜하스'가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해주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허균이 쓴 '호민론'이 생각났으니... 그냥 불만을 품고만 있으면 원민에 불과한데, 불만조차 없는 항민은 말해 무엇하랴마는, 원민이 생기면 호민이 나올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된다.


시대가 영웅을 만드느냐 영웅이 시대를 만드느냐 하는 질문에 딱 어느 것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시대 속에서 영웅이 탄생하는 것은 맞다고 생각한다. 격동하는 시대에, 그 시대를 이끌어가는 사람이 등장하는 것은 필연이니까.


콜하스 역시 마찬가지다. 영주의 터무니없는 횡포. 그러나 그는 우선 참는다. 아니 참을 수밖에 없다. 아직은 힘없는 백성 아닌가. 그들이 원하는 대로 규정대로 하려고 한다. 하지만 힘없는 백성은 규정대로 해도 당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하인이 매를 맞고 쫓겨나고, 맡겨두었던 말은 비루먹은 말이 되어 있었으니... 배상을 요청해도 끄덕없는 상태. 그 역시 속절없이 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거기서 멈출 수는 없다. 부당함. 이것을 그냥 넘어갔을 때는 더 힘든 탄압이 이루어지니까. 항의를 하려고 한다. 우선 제도에 맞는 항의를 한다. 아내가 탄원서를 가지고 가지만, 부상을 입은 아내는 죽음에 이르고 만다. 이제 인내의 한계에 도달했다.


콜하스는 더 참지 않는다. 참아서는 안 된다. 그는 무장봉기를 한다. 처음에는 소수다. 하지만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성을 점령하고 불을 지르고... 권력자들은 공포에 떨게 된다.


여기까지, 성공이라면 성공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파괴가 아니다. 정당한 대우다.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손해 배상을 하면 그는 더이상 폭력을 행사할 생각이 없다. 이것이 민중들의 정서다. 하지만 언제 힘있는 자들이 사과를 하고 잘못을 스스로 바로잡은 적이 있던가.


계속되는 갈등 속에서 그는 루터를 찾아간다. 그가 믿는 종교 지도자. 하지만 여기서 종교의 민낯이 드러난다. 루터는 오히려 콜하스를 야단친다. 그럼에도 콜하스는 루터를 통해 지배층과 타협을 하려고 한다. 자신의 정당한 요구를 들어주기만 하면 무장을 해제하고, 재판을 받겠다는 것.


그 과정에서 콜하스는 죽음을 당하게 되는데... 권력자들의 위선, 그들이 민중들을 대하는 태도 등이 소설에 잘 드러나 있다. 여기에 정의로운 민중의 대표자인 콜하스. 그를 호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가 민중들의 지지를 얻는 과정이 이를 잘 드러낸다.


소설은 콜하스의 죽음으로 끝나지만 비극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콜하스의 자손들은 잘 살게 되었으며, 권력자들의 말로가 별로 좋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소설의 결말을 통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실패한 듯이 보이는 민중봉기가 민중들의 의식을 각성시키고, 이러한 각성된 민중들을 예전과는 같이 대할 수 없음을 소설은 보여주고 있는데...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모습을 보이는 지배층들의 모습이 이 소설에도 잘 나타나 있지만, 그런 그들의 모습은 결국 민중들에 의해 폭로가 되고, 까발려진 그들의 본모습으로 인해 그들은 예전과 같은 권력을 행사할 수 없음을 소설은 보여준다.


결국 권력은 민중으로부터 나옴을, 콜하스라는 말장수를 통해 소설이 잘 보여주고 있다. 민주주의 시대는 한두 명의 호민이 아니라, 국민들이, 시민들이 모두 호민인 사회여야 하고, 그런 사회에서는 지배층이 독단적으로 군림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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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01-27 06: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에 겐자부로 때문에 이 책을 샀어요.

kinye91 2025-01-26 23:50   좋아요 1 | URL
그래요. 저랑 같군요. 좋은 작가는 줗은 작품을 이어주고 있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