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늦은 시간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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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원작에 '여자들과 남자들의 이야기'라고 부제가 달려 있다고 하는데, 번역본에는 그 문장이 나와 있지 않다. 책표지에 있는 클레어 키건에 관한 설명에 나와 있다. 번역본에도 이 부제가 달려 있으면 소설을 좀더 잘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하는데...


세 편의 소설에 모두 남녀가 등장한다. 두 편은 여자가 서술자로 등장하고, 한 편은 남자가 서술자로 등장한다. 남자가 서술자로 등장하는 '너무 늦은 시간'을 보면 강자들은 자신들이 어떤 행위를 하는지 의식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냥 당연하다는 듯이 행동하는데, 그러한 행동이 다른 존재에게 고통을, 불만을 유발할 수 있다. 그런데 자신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또는 장난, 농담이었다는 식으로 행동과 말을 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상대의 감정을 느껴보려는 자세가 결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너무 늦은 시간'의 주인공 '카헐'이 바로 그렇다. 여성에 대해서는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만 생각한다. 자기를 편안하게 해주면 좋고, 자신을 조금이라도 귀찮게 하면 싫다. 싫은 정도에서 그치면 그나마 다행인데 이것을 비하하는 말로 표현을 한다.


그러한 언어에는 자신의 세계관이 담겨 있는데, 이는 세상은 남자라는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야지 여성이 중심이 될 수는 없다는, 여성은 남성의 편리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생각이 담겨 있다.


지금이 어느 시댄데?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니다. 여전히 불안에 시달리는 존재, 유리 천장에 갇혀 있는 존재는 남성보다는 여성이다. 여성은 그러한 위험을 늘 생각하고 있지만 남성은 그렇지 않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이 점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카헐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남동생과 함께한 장난, 과연 이것이 장난인지도 의문이지만, 그러한 장난을 웃음으로 넘기는 아버지의 모습. 여기에 여성의 자리는 없다.


자신들을 위해 음식을 차린 엄마가 앉기도 전에 식사를 하는 모습도 그런데, 엄마가 앉으려 하자 의자를 빼서 넘어뜨리다니... 그것을 야단치지 않는 아버지. 아니 그렇게 할 생각을 한 아들 둘. 이는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았던, 나중에 카헐이 그때 아버지가 다르게 했더라면 하지만, 그것은 잠시고, 그는 아버지와 같이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 있다. 


이런 그의 모습을 통해서 남자가 무의식으로 하는 말이나 행동이 여자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음을, 그리고 차별의식이 체화되어 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나는 과연 '카헐'과 얼마나 다른가 하고.


'길고 고통스런 죽음'에는 여성 서술자가 등장한다. 작가다. 우리 말로 하면 작가의 집에 들어가 창작활동을 하려 한다. 그런데 한 남성이 방문한다. 다짜고짜. 그는 마치 권리를 빼앗긴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데... 


아니, 작가가 글만 쓰고 있나? 작가의 방에 들어가는 이유는 다른 사람의 간섭 없이 자신만의 속도로 글을 쓰고자 함이 아니던가. 그런 과정에서 무엇을 하던지 그건 남이 관여할 사항이 아니다.


방 안에 틀어박혀 글만 써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작가라는 존재에 대한 고정관념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 남성이 남성 작가에게 그렇게 행동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여성 작가이기 때문에 온갖 꼬투리를 잡으려 들었을 것이다.


여기서 클레어 키건의 작품이 지닌 장점이 나타난다. 복수를 한다. 어떻게 작가답게 작품으로... 그래서 제목이 된 '길고 고통스런 죽음'은 작가의 작품에 나타나는 일이 된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남의 영역을 침범하고 함부로 말한 사람을 응징한다.


'남극'은 좀 섬뜩하다고 할 수 있는데, 소통하지 못하는 관계는 얼어붙은 남극과 같을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이 소설을 일탈 행위를 하는 여성에게 닥친 비극으로 읽을 수 없는 것이 '친절'에 대해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친절을 사랑이라고 해도 좋다. 자신은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상대에게는 지옥과도 같을 수 있음을.


친절한 남성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 친절이 문제다. 상대를 배려하는 친절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친절이다. 즉 상대를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라고 여기고, 그 존재를 자신에게 끌어오기 위한 친절일 뿐이다.


이런 친절이 여성에게 어떤 결과를 일으키는지를 소설의 후반부에서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친절이 아니라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것을, 상대에 대한 존중이 없는 친절은 친절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렇게 세 편의 소설에는 남녀가 나오지만 이 남녀는 평등하지 않다. '여자들과 남자들의 이야기'라고 하지만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는 관계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를 살펴보게 하는 소설이다.


클레어 키건의 소설에 대한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역시 클레어 키건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했지만, 전에 읽었던 소설에서는 어떤 밝음, 따스함 등을 느낄 수 있었다면, 이 소설집에서는 어긋난 관계에 누가 책임이 있는가, 그리고 그렇게 어긋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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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이후 - 혐오, 양극화, 세대론을 넘어
신진욱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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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경험했다.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서로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는 자세를 지니기도 했다. 그렇게 광장에서 연대를 통한 존중으로 혐오를 이겨낼 수 있었다.


그때의 '광장'에는 각기 다른 목표들이 있었겠지만 윤석열 탄핵이라는 한 가지 목표는 서로 공유했다. 그리고 이루었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할까? 


'광장'에서 보여줬던 모습들이 '광장'에서 끝나지 않고 정치로, 우리 삶으로 다시 이어져야 한다. 즉 그때의 '광장'은 지금 우리 삶의 '광장'으로 다시 펼쳐져야 한다. 그 '광장'에서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고 연대해야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광장'을 분석하면서 '광장'의 연대에서도 분열을 찾고, 그것을 확대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았는가? '광장'에는 특정 성별, 특정 연령 대의 사람들이 많았다고, 어떤 집단은 잘 보이지 않았다고...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일까? '광장'은 특정 성별, 특정 연령 대의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광장'은 모두의 것이었다. 이때 '모두'에는 '다름'이 포함되고, '다름'에는 '이해와 포용'이 들어가게 된다.


'광장'의 기본 조건은 '다름'이다. '다름들'이 모여 함께하는 곳이 바로 '광장'이다. 이런 '광장'은 바로 정치가 이어받아야 한다. 정치 역시 같은 존재들이 모여 자기들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들이 모여 무언가를 합의하고 실행해가는 행위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광장'은 한때의 '광장'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광장'은 우리 삶 속에서 펼쳐져야 한다. 우리는 계속 그러한 '광장'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이 '광장'에서 서로 연대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 책은 그러한 '광장 이후'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다. 네 사람이 각기 자신들의 '광장 경험'을 토대로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제목이 '광장 이후'다.


우리의 '광장 이후'는 대통령 한 사람을 바꾼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정치의 영역, 삶의 영역에서 '광장'이 계속 살아 숨쉬게 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광장'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과연 '광장'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던가. 광장을 이야기하면서 특정 집단을 배제하지 않았던가. 왜 너희들은 그래 하면서 그들을 우리와는 다른 존재로 밀어내지 않았던가.


이 책에서는 특히 2030 남성들을 대상으로 한 주장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한다. 2030 남성들이 극우화 되었다고, 보수화 되었다고 하는 말들이 많은데, 2030 남성들을 그렇게 한 집단으로 묶을 수 있는지부터 의문이고, 보수화된 남성, 극우화된 남성이 있다고, 그 세대 전체가 그렇게 변했다고 주장하는 것에도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통계를 보면 2030 남성들의 반이 넘는 사람들이 탄핵에 찬성했으며, 그때까지 잘못된 정책에 대해서 비판적이었음을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는데, 그럼에도 왜 그들을 싸잡아서 보수, 극우화 했다고 하는지, 그런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자료들을 통해 반박하고 있다.


또한 그렇게 하나로 묶어 비판하기는 쉽지만, 그들을 끌어들여 '광장'이 계속되도록 하는 노력을 과연 하고 있는지를 이 책을 통해서 의문을 제기한다. 그들이 처한 지금의 현실이 매우 불안정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불안정한 삶이 안정된 삶으로 바뀔 수 있도록 그들의 의견을 듣고, 정책을 마련해서 실행하는 노력을 해야 함에도 과연 그렇게 하고 있는지...


'광장 이후'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지만 과연 우리는 '광장 이후'의 삶을 살고 있는지, 어쩌면 다시 '광장 이전'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사람들이 '광장'에 나온 지 이제 거의 한 해가 다 되어 가는데, 우리는 '광장 이후'를 맞이하지 못하고 지금도 '광장 이전'처럼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 2030 남성들을 비판함으로써 자신들은 다르다는 안도감 속으로 도피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야 한다.


결코 다른 존재를 배제해서는 안 된다. '광장'이 보여준 모습은 배제가 아니라 포용 아니던가. "같아지자"가 아니라 "다르지만 함께할 수 있다" 아니었던가. 그런 '광장'을 우리의 삶에서 펼친다면, '광장 이전'을 주장하고 있는 존재들의 목소리는 지워질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중 이승윤의 글에 이런 말이 나온다.


'사회구조에 대한 불신이 심화되고 이슈 중심 정치참여가 확대되는 상황에서는 '누가 더 손해를 보고 있는가'를 둘러싼 경쟁, 대립, 갈등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려는 정치세력이 활성화되기 쉽다'(214쪽)


지금도 그러하지 않은가. '갈라치기'란 말이 심심치 않게 들리고 있으니... 이 '갈라치기'는 '광장'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말 아니던가. '광장'이 더하기의 정치라면 '갈라치기'는 빼기의 정치다.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빼기가 아니라 더하기'다. 


우리가 바라는 '광장 이후'는 '갈라치기'를 하는 '빼기'를 자신들의 정책으로 삼는 이런 정치세력에서 휘둘리지 않는 사람들이 정치의 주체로 등장할 때 이루어진다. '광장과 더하기의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주체가 되는 사회.


그런 점에서 아직은 '광장 이후'가 오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데, '광장'을 경험한 우리들은 다시 '광장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러니 이제는 치열하고 세밀하게 '광장 이후'를 설계하고 실행해야 한다.


이제 '광장'을 정치와 우리의 삶으로 가져와야 한다. 그것이 바로 '광장 이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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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전에 나온 시집이라 그런지 알라딘에서 찾을 수가 없다. 알라딘이 설립되기 전에 나온 책이니, 상품으로 등록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지금은 절판이 되었을 것이고... 검색해 보니 알라딘 중고에는 한 권이 있다. 판매자 중고로 뜬다. 그런데 값이!


  지금 구할 수 없는 책들, 한때 사람들에게 사용가치로 다가왔던 책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교환가치가 높아지는 경우가 있다. 책이 화폐처럼 교환가치가 우선이 되면, 책은 아무에게나 다가가지 못한다.


  이 정도로 세월이 흐른 책은 도서관에서도 퇴출이 된다. 그러면 자연스레 만나기 힘들어지니, 사용가치는 줄어들지라도 교환가치는 높아지기 마련.


자본주의 사회의 희소성 원칙이라고나 할까? 하여간, 우연히 헌책방에서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이시영이란 시인에 대한 믿음도 있었고. 이시영 시인은 짧은 시들을 쓰는 쪽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시집 역시 짧은 시들이 많다. 


그래 많지 않은 언어로 자신의 생각을 녹여내어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 표현되지 않은 언어 사이에서 사람들이 상상의 날개를 펼치도록 하는 것. 그것도 시인이 할 역할이지 않을까 싶고. 그런 역할을 잘하는 시가 내게는 사용가치가 높은 시인데...


이 시집의 제목이 된 시는 '가을 꽃'(12쪽)이란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첫행에 '진리의 길은 멀다 친구여'라고 되어 있다. 그냥 길이 먼 것이 아니라 진리의 길이 먼데, 시인은 그런 진리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시인은 어떤 사람일까? 이 시집에 시인에 관한 시는 두 편이 있다. 한 편은 한글로 '시인' 또다른 시는 한자어로 '詩人'. 그리고 '詩를 쓰려면'이란 시가 있다. 이 세 편의 시를 아우르는 것이 바로 '겨울 나무'란 시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우선 시인이란 시 두 편을 보자.


     시인


삶이 경이인 사람

언제나 새벽 바다에서 애기처럼 돌아오는 사람

돌아와 설레는 발자욱을 남기고 사라지는 사람

해지는 저녁 바다가 밀물져 오면

쓰라린 갈매기 몇 마리와 함께  

다시 시작하는 사람

넘치는 밤 파도와 맞서 싸우는 사람

밤새워 늙은 섬처럼 일하는 사람


이시영, 길은 멀다 친구여. 실천문학사. 1988년.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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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詩人


일하는 사람만이 세계의 기쁨나무를 후려쳐

쫙 벌어진 기쁨의 알밤 열매 거둘 수 있고

일하는 기쁨을 아는 사람만이

한겨울 시린 노고목(老枯木)의 밑뿌리를 도타이 감싸

이듬해 봄

그 오랜 등걸에서도 어린 새순이 자라게 한다


이시영, 길은 멀다 친구여. 실천문학사. 1988년. 31쪽


이런 사람이 시인이다. 어렵지 않은 말로 시인이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하게 하고 있는데, 그런데 시인 자신은 어떤 시를 쓰고 있나? 과연 자신이 시인이라고 정의하는 존재에 걸맞는 시를 쓰고 있나 반성하고 있다. 윤동주의 '쉽게 쓰여진 시'를 연상시키는 그런 시인데...


  詩를 쓰려면


시를 쓰려면

온몸에 저를 실어

산 같은 무게로 바위 같은 몸짓으로 활활 타오르는

넋의 푸른 숨결이 있어야 할 터인데

어느 날 만년필 끝에서 쉽게 풀어지고 씌어지는 나의 시여

너에게는 피의 냄새가 없다

말의 탐욕만이 있을 뿐

관념의 허상만이 있을 뿐

살아 있는 사람의 노여움 긴 긴 입맞춤이 없다

그 몰아치는 폭풍 속의 서늘한 눈빛이 없다


이시영, 길은 멀다 친구여. 실천문학사. 1988년. 39쪽.


윤동주는 일제시대, 그 엄혹했던 시절에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라고 자신의 의지를 다잡고 있는데... 


이시영 시인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시가 시대에 맞서지 못하고 있음을 반성하고 있다. 이 반성이 반성으로 그치지 않는다. 앞의 '시인'이란 두 시에서 말했듯이 시인은 포기하지 않는다. 그렇게 시인은 냉혹한 세상에 따스한 온기를 전달하려 한다.


아무리 춥고 힘들어도 그것을 버티고 새순을 내게 하는 일... 힘든 존재에게 따스한 손길을 내미는 것. 그런 자세를 지닌 사람. 시인이다. 지금 우리 시대에도 이런 시인들이 있음은 당연하고...


하여 이 시집에서 '겨울 나무'란 시가 바로 이 세 시를 아우르지 않나 싶다. 


 겨울 나무


나무는 

겨울 나무는 옷 모두 벗고 아랫도리 벗고

영하 12도의 아파트 광장에 서서

아직도 제게 남은 온몸의 더운 기운을 

언 땅에 주고는

밤 하늘에 저렇듯 엄연하구나


이시영, 길은 멀다 친구여. 실천문학사. 1988년. 20쪽


이런 존재가 바로 시인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존재를 작년 겨울(올 봄에)에 보았다. 꽁꽁 얼어붙은 겨울 날씨에 서로에게 온기를 나누어주던 사람들을. 아스팔트에 있던, 광장에 있던 수많은 시인들을.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바로 시였음을. 그런 시들을 통해 우리가 지금에 이르렀음을. 1988년에 발간된 시집. 1987년 민주화운동을 소환하고 있는 시들도 있는데, 그 시들과 작년(올초) 상황이 겹쳐지는데... 


일제강점기, 윤동주 시인의 온기가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듯, 87민주화운동을 거친 시대의 온기가 이싱영 시인을 통해서 전해지고, 그것이 2024년-2025년 광장의 수많은 사람들의 온기로 우리 사회를 따스하게 했다면, 그것이 지나친 억측일까?


이래저래 이 시집은 내게는 '교환가치'보다는 '사용가치'가 훨씬 높은 그런 시집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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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5-11-03 03: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랫도리 벗고 영하 12도의 날씨에 광장에 서 있다는 표현이 정말 날카로운 시인의 시선입니다.

kinye91 2025-11-03 09:15   좋아요 0 | URL
네,맞아요. 이런 시인의 시선을 만날 때 세상을 다르게 보는 법을 배우곤 합니다.
 
올해의 미숙 창비만화도서관 2
정원 지음 / 창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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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다. 한 사람의 성장기. 물론 어른이 되었다고 세상 살기가 더 쉬워졌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세상살이는 여전히 힘들다. 하지만 그 힘듦 속에서도 희망이 있다. 그래서 계속 살아가려 한다.


장미숙. 학생 때 아이들은 '미숙아'라고 부른다. 이름 뒤에 호칭을 드러내는 조사 '-아'를 붙였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아니다. '미숙아'라는 명사로 부른다. 제대로 되지 않은 아이, 부족한 아이라는 뜻이다.


예쁘지도 그렇다고 특출나게 공부를 잘하지도 않는 아이. 이름으로 놀림을 받는다는 것은 학교에서 배제된다는 뜻이다. 이렇게 한 사람을 미숙아라고 하는 아이들, 자신들은 미숙하지 않다고, 잘살고 있다고, 너와 다르다는 의미에서 '미숙아'라고 부르면서 배제를 통하여 자신들끼리 어울린다.


그런 행동을 하는 자신들이 미숙하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채. 하지만 미숙은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한다. 여기에 전학 온 친구와 가까워지지만 그 친구에게 털어놓은 자신의 가정사가 소설로 나타나자 더이상 친구 관계로 지낼 수가 없게 된다.


결국 미숙이와 가까웠던 친구는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미숙을 이용한 꼴밖에 되지 않는다. (여기서 미숙이의 부모를 생각할 수 있다. 분명 문학을 통해 만났을 남녀가 결혼을 한 다음 남자는 계속 문학활동을 하고, 여자는 그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문학을 포기하는 그런 모습이 미숙의 친구 모습에 겹쳐진다) 학교를 그만두고 독립 생활을 하는 미숙. 취직한 회사 역시 작은 회사다. 그렇게 미숙은 잘나간다고 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간다.


잘나간다고 할 수 없지만 미숙이 여전히 미숙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나? 그건 아니다. 미숙은 관심에서 멀어졌던 개를 데리고 와 보살핀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방치된 자신을 보는 듯했을 터.


방치된 개는 똥도 먹고 지저분하게 지내게 되는데, 이는 가난한 집의 환경에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에 기대에 차 온갖 관심을 받고 보살핌을 받던 존재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무시당하고 방치되는 생활.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주변 환경으로 인해 점점 더 힘들어지는 생활. 미숙의 생활도 그러했으리라. 그런데도 미숙은 이런 개에게 관심을 가져준다. 마찬가지로 미숙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도 나타난다.


있는 그대로의 사람을 사랑하는 존재. 그런 존재와의 만남은 지금까지의 삶 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된다. 그렇게 미숙은 이제는 똥을 먹지 않는 개와 산책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우리가 이 책에서 마지막으로 보는 장면이 바로 이 장면이다. 개와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미숙. 그 삶 앞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라도 미숙은 자신의 삶을 살아갈 것이라는 것을 마지막 장면이 보여주고 있다.


가난이 사람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를 미숙의 아버지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면, 그러한 가난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을 미숙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삶에 미숙할지도 모른다. 모두가 처음 살아보는 삶이니까. 그러니 우리는 모두 '미숙아'인데 이런 '미숙아'에서 조금씩 조금씩 성숙한 사람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주변의 도움으로, 또 자신의 힘으로...


우리 모두가 미숙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인식을 공유한다면, 미숙한 존재끼리 서로 의지하면서 도우면서 성숙한 삶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우리가 미숙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만화에서 미숙은 자신이 우월하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려고 할 뿐이다.


그런 미숙이 성숙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미숙의 성장기라고 할 수 있는 만화. 마음에 잔잔한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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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널로그 - 생존과 쾌락을 관장하는 놀라운 구멍, 항문 탐사기
이자벨 시몽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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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문에 얽힌 이야기들이 이렇게나 많았다니...


호사가들이나 심심풀이로 항문에 대해 탐색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 책을 읽어보면 아니다. 항문이 얼마나 중요한지.


하긴 항문이 없으면 사람이 배설을 하지 못하니, 살아가기 힘들겠지. 이 책에도 신체의 각 기관들이 서로 자기가 대장이라고 하는 장면에서 항문이 자기 문을 꼭 닫아버리자 다른 신체기관들이 맥을 못 추는 장면, 그래서 항문을 대장으로 인정하자는 이야기가 있다. 그만큼 중요한 기관이다.


하지만 우리는 항문을 감추기기에 급급한다. 세상에 누가 항문을 내놓고 지내려 하겠는가. 현대에는 더더욱. 한데 이 책을 읽어보면 항문에 관한 많은 예술작품이 있으니, 꼭 감추려고만 한 것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의학적인 정보도 제공하고, 인간이 직립보행을 하게 되면서 다른 동물들은 걸리지 않는 항문 관련 질병을 앓기도 하니, 여기에 태양왕이라고 불렸던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치루로 고생을 했다는, 그의 수술에서 불렸던 노래가 영국에서 거의 국가 취급을 받는다는 내용도 실려 있고...


항문이 우리에게 주는 쾌락도 이야기하고 있으니, 그러니 프로이트도 '항문기'라는 특정한 시기를 언급하고 있겠지만, 단지 호사가의 취미라기보다는, 그동안 우리에게 꼭 필요한 신체기관이지만 잘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을 알려주는 역할을 이 책이 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항문에 관한 다양한 지식들이 들어 있으니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고... 이 책을 읽으면서 예전에 농담 식으로 했던 퀴즈가 생각났다.


'학문과 항문의 공통점을 세 단어로 말하면?'이라는. 답은 '넓힌다. 힘쓴다. 닦는다' 넓히고 힘쓰고 닦아야 하는 학문과 항문. 이렇게 보면 항문에 대해 아는 것도 학문을 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 


아무튼 그냥 재미있게 읽어도 될 책이다. 물론 저자의 말을 다 믿고 따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은 명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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