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집에 실린 시들이 대체로 쉬운 언어로 쓰였는데, 그럼에도 무슨 말인지 쉽게 와 닿지 않는 시가 있다. 자꾸 읽어보게 되는데, 그래도 모르겠다.


  그 중 한 시가 바로 '옷 벗는 나무'다. 나무가 옷을 벗는다? 긍정적일까, 부정적일까? 


  이 시집에 실린 다른 시들을 찾아보니 어느 쪽으로도 가능하다. 뭐지 이게?


한 그루 나무를 그린다. 이롭겠지만 / 마침내 혼자 살기로 결심한 나무./ ... / 요즈음에는 내 나이 또래의 나무에게/ 관심이 많이 간다. / 큰 가지가 잘려도 / 오랫동안 느끼지 못하고 / 잠시 눈을 주는 산간의 바람도 / 지나간 후에야 가슴이 서늘해온다. / 인연의 나뭇잎 모두 날리고 난 후 / 반백색 그 높은 가지 끝으로 / 소리치며 소리치며 가리키는 것은 무엇인가('그림 그리기4'에서. 12쪽)

                                            

그리던 나무를 아무래도 지워야겠다. // 혼자서 멀리 떠나야만 / 길고 편한 잠 이룰 수 있는 것 알면서 / 땅에 떨어지기 싫어하는 / 낙엽이 있다면 어쩌겠냐. ('그림 그리기 5'에서. 44쪽)


벌판에서 혼자 떨던 나무도 / 저 멀리 다음해까지 / 옷 벗어던지고 혼절해버렸구나. / 내가 아는 하느님은 편안하구나. ('겨울 기도 2'에서.62-63쪽)    


눈을 뜨고 꿈꾸는 나무가 되고 싶었다. /열매를 거두는 일은 어차피 내 몫이 아닌 다음에야 / 여름이 가기 전에 꽃잎을 눈부시게 다 뿌리고 / 세상의 자초지종에 태연하고 싶었다.('영희네 집'에서 97쪽.)


그러나 서울 가로수는 냉혈 식물인가, / 해마다 눈부신 장식으로 봄을 빛내다가 / 때가 되면 주저없이 입던 옷도 벗는다. / 두 눈 부릅뜨고 우리를 보는 / 늙고 지혜로운 선각자처럼.('서울 가로수'에서. 98쪽)                             


그럼 그냥 감으로 시를 읽어야 한다. 나무가 옷을 벗는다? 이는 계절적으로 보면 가을이란 말이고,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지점이란 성숙의 과정을 거쳐 결실을 맺은 때라는 말이다.


또 나무가 옷을 벗는다는 말은 가리지 않고 모두 보여준다는 말일 수도 있다. 나무가 숲을 이루는 경우를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 숲 속에 들어가면 너무도 울창한 나무로 인해 하늘을 볼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니 한쪽으로 해석하자. 이번에는 나무가 옷을 벗는다는 말을 가리는 것을 치운다로 보자. 그래도 이 시가 잘 이해 안 되기는 마찬가지지만.  


옷 벗는 나무


왕이여,

당신의 슬픔은 遺傳이다.

사방에서 눈치보며 숨죽이는

당신의 아까운 겨레들,

숨죽이고 몸 흔드는 겨레의 눈들,

아무리 타일러도 옷 벗고 나서는 나무들.


왕이여,

높은 산 주위에는

낮은 나무들 허리 굽혀 살고

낮은 산 둔덕에서

크고 곧은 나무가 허리 펴고 산다.

당신의 슬픔은 유전이다.

천천히 넘어지는 무리의 나무들.

아무리 가지쳐서 불태워도

한세월의 어두운 王道의 하늘.


마종기, 그 나라 하늘빛, 문학과지성사.1996년 재판 2쇄. 16쪽.     


'왕이여 당신의 슬픔은 유전이다'가 1연과 2연에 반복되고 있다. 슬픔이 유전이라는 말과 '어두운 왕도의 하늘'이라는 말을 생각하면 하늘이 맑지 않다.


즉 왕도가 실현되지 않고 있다. 왕도를 정치로 바꾸면 제대로 된 정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사방에서 숨죽이며 눈치볼 수밖에 없다. 왕도가 아닌 패도(覇道)의 시대는 그렇다. 그러니 나무들이 옷을 벗을 수밖에 없다. 보라고, 하늘을 보라고, 지금 이 하늘이 과연 왕도의 하늘이냐고?


정치가 잘 될 때는 굳이 옷을 벗을 필요가 없다. 하늘이 잘 보이므로. 하지만 패도 정치가 이루어질 때는 옷을 벗어야 한다. 누가? 바로 주변에서 나름대로 힘을 지니고 있는 존재들이. 충언을 할 수 있는 존재들이.


이 나무들이 옷을 벗는 이유는 하늘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현실을 직시하게 하기 위해서. 그런데 하늘을 보지 않고 나무를 베어낸다. 나무를 쓰러뜨린다. 잘 자란 아름드리 나무들을. 


보이지 않게 한다고, 막는다고 어두운 하늘임을 모를까? 


옷 벗는 나무들, 하늘을 보여주려 하는 나무들. 그 나무들을 찍어내기만 하면 결국 슬픔은 유전될 수밖에 없다. 지속될 수밖에 없다.


나름대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읽는데, 여전히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많다. 이 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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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의 저택 폴라 데이 앤 나이트 Polar Day & Night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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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연대기]를 재미있게 읽었다. 한 작품을 재미있게 읽으면 다음 작품도 찾아 읽게 된다. 브래드버리의 이 작품 역시 [화성연대기]를 읽었기에 읽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핼로윈 데이라고 온갖 귀신들, 유령들 차림을 하고 즐기는 서양 축제. 우리나라에서도 이제는 핼러윈 축제를 즐기기 시작했는데...


이 소설은 그런 핼러윈 축제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시월의 저택에 핼러윈을 맞이하여 친족들이 모인다. 그런데 친족들의 구성이 특별하다. 인간 가족이 아니다. 유령 가족이다. 여기에 인간인 아이 티모시가 있다.


고양이도, 생쥐도 거미도 있고, 온갖 유령들이 시월의 저택에 모인다. 미라도 있는데, 이들에 대한 이야기 한편한편이 재미있다. 짧은 소설들이 실려 있는데, 각자 독자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서로 연결이 된다.


일종의 연작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읽으면서 가족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문학에 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학은 현실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특히 어린아이들에게는 상상의 이야기들이 현실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이야기가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면 문학은 자리를 잡을 수가 없게 된다. "에이, 그거 소설이잖아!" "소설 쓰고 있네!" 하는 소리는 사실이 아닌 허무맹랑한 소리, 들으나마나한 소리라는 의미로 쓰인다.


이런 반응이 주류가 되면 문학은 설 자리를 잃는다. 이 소설집에서 '오리엔트 북행 특급'이란 소설은 특히 이런 점을 생각하게 해준다. 창백한 남자, 그를 간호하는 여자. 하지만 남자는 합리주의 앞에서 죽어가고 있다. 이 남자의 병이 무엇인지 알게 된 여자는 남자를 합리주의에서 보호해주려 한다.


이때 남자가 생기를 얻게 되는 사건이 생기는데, 그것은 바로 아이들에게 유령이야기를 해주는 것이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에게서 남자는 생기를 얻게 된다. 이것이 바로 문학이다.


하지만 소설집의 끝부분에 가면 이 저택은 파괴되고 만다. 문학이 저 멀리 밀려난 시대를 상징하듯이.  


독자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키면서 작가 역시 생기를 얻는 것. 아마도 문학이 쇠퇴하는 시기에 그러에도 불구하고 문학은 우리와 함께 존재해야 한다고 브래드버리가 말하는 듯하다. 


또한 문학에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이 시월의 저택에 온갖 종류의 존재들이 함께 하면서 다양한 사건을 만들어 가듯이.


이렇게 문학에 대한 은유로 이 소설집을 읽어도 괜찮겠단 생각을 했는데, 이 점 말고도 이 소설을 읽으면서 만화나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면 참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미국에서 발간되었을 때는 삽화도 있었을텐데, 그 삽화까지 같이 실렸으면 참 좋았겠단 생각. 그리고 이 작품을 토대로 애니메이션을 만들면 참 재미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이미 만들었는지는 확인해보지 않았다. 다만 유령을 다룬 애니메이션은 꽤 있으니...)  


이런 점에서 이 소설집은 아이들(청소년들)이 읽으면 좋은 소설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것은 소설 속에서 다양한 삶들에 대한 이해와 삶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원히 존재하는 유령들에게 입양되어 자라는 티모시에게 천 번 고조할머니(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의 ... 하면서 천 번을 거슬러 올라가는 할머니)가 넌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다. 이때 티모시는 "아뇨. 여러분처럼 되고 싶지 않아요." (221쪽)라고 하면서 "...제가 어떻게 태어났는지를 깨달으려면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삶을요...."(221쪽)고 한다.


즉 죽음이 있기에 삶이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소중한 삶을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함을 천 번 고조할머니의 말을 통해서 독자에게 전해주고 있다.


결국 유령이야기는 삶의 이야기다. 무한한 삶을 사는 존재들을 통해 유한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인간들에게 삶을 돌아보라고 하는 것이다. 티모시라는 아이가 온갖 유령들과 함께 살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문학의 이야기이자 삶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소설을 통해서 상상 속에서 우리는 현실을 바라보는 거울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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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 (반양장) 창비청소년문학 107
천선란 지음 / 창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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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끝에 실린 작가의 말로 이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뒤틀린 어른이 뒤틀린 아이를 만들고,그 아이가 자라 뒤틀린 어른이 되어 다시 뒤틀린 아이를 만드는 세상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렇게 온전한 어른이 사라진 세상이 되기 전에, 상처와 슬픔이 무기가 되어 또 다른 출혈을 일으키는 세상으로 향하지 않도록, 그런 마음으로 썼다.' (389쪽)


불모지의 땅을 산 사람이 있다. 그 땅에 화원을 만들겠단다. 미친 소리로 치부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화원엔 식물들이 자란다. 나인은 그런 화원에서 자란 아이다.


어느 날 나인은 실종된 아들을 찾는다는 전단지를 발견하고, 그 아이가 사실은 죽었음을 알게 된다. 가출이 아니라 죽음. 죽음에 관련된 아이. 그리고 그를 은폐하는 어른들. 나인 역시 모른 체 하면 그만이다. 누구도 알려고 하지 않는 일이기에.


하지만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을 나인은 외면하지 못하다. 그러다 그 즈음 자신이 지구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외계인.


그렇다. 우리는 자신과 다른 사람을 외계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렇게 외계인이라고 부르면서 그를 인정하면 얼마나 다행일까 싶지만, 외계인이라 언급하는 순간, 다름이 차별이 될 가능성이 많아진다.


외계인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박원우는 그래서 친구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한다. 물론 그의 가정형편도 거기에 한몫 보탰겠지만.


원우는 미친 놈 소리를 듣지만 그것으로 죽음에까지 이르러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권도현이라는 친구에게 밀려 죽게 된다. 그렇다면 권도현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연히 원우를 살리려 해야 했지만, 그의 부모는 원우의 죽음을 무마하려 한다. 없던 일로, 원우는 그냥 가출한 학생이 되어야 했다.


전후 사정을 숲으로부터 전해들은 나인. 나인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친구들과 힘을 합친다. 물론 여기에는 친구들만이 아니라 어른들의 도움도 받게 되고. 원우의 문제는 해결된다.


다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나인과 어울리는 친구들과의 관계, 이들은 나인을 무조건 믿어주고 함께 행동했다. 외계인이든 아니든 친구라는 관계가 달라지지는 않으니까. 


그렇지만 문제가 해결된 후 이들은 각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나인 또한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하고. 


그렇게 사람들은 함께 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따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나인 역시 마찬가지다. 이렇게 보면 이 소설은 나인의 성장을 다룬 소설이 된다. 나인은 여러 일을 겪으면서 성장한다. 외계인이든 아니든 자신이 나고 자란 이 땅에서 살아가기를 선택한.                                        

이렇게 소설은 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이 지구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 어떠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식물성을 띤 외계인 나인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유가 그것이다.


나인이 지구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지구에 뿌리를 내렸다는 말, 이는 바로 지구에서 함께 고통받으면서도 그것을 이겨내려는 삶을 선택했다는 말이다.


힘들다고 그냥 떠나버릴 수는 없음을. 그 힘듦 속에서도 삶을 찾아야 함을, 나인의 성장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소설에서 도현이나 주변 친구들이 원우를 대하는 태도는 다름을 차별로 인식하고 행동하는 경우다. 


작가가 '타인을 이해하지 못할 때, 타인에게 이해받지 못할 때 우리가 종족이 다른 외계인이라고 생각하며 언제나 마음이 편안해졌다.'(389쪽)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다름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아닐까 한다.


그런데, 과연 이런 자세를 지닌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인의 친구인 현재나 미래처럼 무조건 믿어주는, 그래서 다름은 그냥 다름일 뿐인 그런 자세를 지닌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오히려 세상엔 도현이처럼 친구였다가도 그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해 배제하고 차별하는 태도를 지닌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그들이 행하는 행동이 소설처럼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겠지만, 죽음과 비슷한 상태로 몰아가지는 않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도현이 주변 사람들이 원우를 배척하듯이. 다름이 바로 차별이 되어 배제하듯이.


그런 사회가 잘못된 사회고, 그런 어른들이 많은 사회가 바로 뒤틀린 어른들 사회라면, 바로 이 뒤틀린 어른들 사회를 바로잡으려고 하는 나인과 같은 아이가 있어야 한다. 그런 아이들이 외계인 취급을 받는 경우가 많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공연히 튀는 아이들이라고. 하지만 이런 아이들로 인해 뒤틀린 어른 사회가 재생산을 멈춘다. 이런 외계인 같은 아이들이 있어야만 뒤틀린 사회가 바로잡힐 수 있다.


소설이 흥미로우면서도 무언가를 계속 생각하게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뒤틀리지 않은 외계인 같은 존재들을 우리가 찾으려고만 하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으므로.


그러므로 이 소설을 읽고는 주변을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 역시 뒤틀린 어른들이 아닌지 하고. 이런 뒤틀림을 보여줄 외계인 같은 존재들이 주변에 있는지를... 그리고 주변에 있다면 감사해야 한다. 그들의 존재에 대해서.


그들을 경원하고 몰아내려고 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뒤틀림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외계인을 주인공으로 했지만, 굳이 외계인이라고 하지 않아도 좋다.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 그래서 생명을 죽이는 일에 분노하는 사람.


나인은 분명 외계인인 누브 족으로 나오지만, 이렇게 나인과 닮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사회에는 이런 외계인들이 많으니, 그들을 찾아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다. 찾으려는 마음을 먹는 순간부터 마음이 따스해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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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이 각박해지고 있다. 치안 만큼은 그다지 걱정하지 않고 있었는데... 미국에서 수없이 벌어지고 있는 총기난사 사건을 보면서, 우리는 아직 저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우리 사회는 그래도 무차별 살인이 많이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는데...


  대낮에 거리에서 백화점에서 학교에서 상해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죽거나 다치거나. 불특정 다수를 향한 분노의 표출일 수도 있고, 특정한 개인에 대한 앙심 때문에 벌인 일일 수도 있지만...


  이런 사건이 일어나면 일어날수록 사람과 사람 사이는 멀어진다. 그 멀어진 사이로 법이 강화되어 들어온다.


  관계 맺기의 어려움을 법이라는 틀로 강제하게 된다. 그냥 법, 법 하는 사회로 변해가는데... 


어지러운 시대일수록 법이 각광을 받는다. 어지러운 사회일수록 제자백가 중 법가(法家)들이 판을 장악하게 된다. 법은 점점 강화되고, 그만큼 사람과 사람 사이는 멀어진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한 개인이 한 개인을 어떻게 할 권리는 없다. 내가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도 소중하다. 내가 소중한 만큼 다른 존재도 소중하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인데... 그런 마음을 지녀야 하는데... 법을 작동시키기 전에. 법으로 사람 관계를 만들어 가기 전에.


조태일 시집을 읽었다. 작은 것들에 대한 사랑이 시에서 잔뜩 묻어난다. 그 중에 산 속에 홀로 피어 있는 꽃. 개복숭아꽃. 우리가 먹는 탐스러운 복숭아보다는 못하다고, 야생 상태의, 질이 떨어지는 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접두사 '개-'가 붙은 꽃. 이 시집 제목이 된 구절이 바로 이 개복숭아꽃이 '혼자 타오르고 있었네('연등' 1연에서)다.


'연등'이라는 시다. 연등이 무엇인가? 희망을 담은 등 아닌가, 희망을 함께 느끼는 등 아닌가? 절에 가면 많이 걸려 있는 소망들. 그런 바람들.                                                     


하지만 이 시에서는 '저 혼자 타오르고 있었네'라고 한다. 홀로, 마치 김소월이 쓴 '산유화'에서 '저만치'를 연상시키듯이.


하지만 혼자 타오르고 있었다고 해서 희망이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희망을 잃은 시대에 희망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희망을 피어올리고 있다고 해야 한다.


마지막까지 지니고 있어야 할 것이 바로 희망 아니던가. 조태일의 시 '연등'은 그런 생각을 하게 한다.


    연 등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산 속

개복숭아꽃 저 혼자 타오르고 있었네.


연분홍꽃

점, 점, 점, 점점이 불 밝혀

화르르 화르르 몸 섞고 있었네.


사월 초파일날 켠 연등보다

더 환했네. 더 고왔네.


오래도록 내 숨결

내 스스로 가빴네

내 스스로 황홀했네.


조태일, 혼자 타오르고 있었네. 창작과비평사. 1999년 2쇄. 32쪽.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또 저만치 있더라도, 홀로 있더라도 희망은 희망이다. 희망을 잃지 않는 삶, 사람과 사람 사이를 법으로 메꾸기보다는 배려와 존중, 서로 인정하고 도와주는 마음으로 채우는 그런 시대에 대한 희망,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전히 희망은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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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차일드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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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 기발하다는 표현을 하면, 누구나 생각할 수 없고, 특별한 사람만이 생각할 수 있다는 쪽으로 여겨질 수 있다.


특히 작가들의 상상력에 대해서는 작가라서 지닌 상상력이라는 생각을 하기 쉽다. 그렇기에 이런 상상력은 작가에게 맡기고 우리는 현실에 충실하자는 쪽으로 가기도 한다.


그런가? 상상력이 작가에게만 필요한가?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상상력을 지니고 있다. 자기만의 상상에 빠져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것을 글로 옮겨 남에게 읽히는 사람이 작가일 뿐이다.


옥타비아 버틀러 소설을 몇 권 읽었다. [킨]을 비롯하여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 재미있게 읽었다.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하기도 하면서.


이번 작품은 단편소설집이다. 일곱 편의 소설이 실렸다. 모두 다른 내용이지만,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단지 가상의 세계라고만 생각하지 않고 우리가 바라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또는 우리가 겪지 않았으면 하는 세계가 그려져 있기도 하고.


첫작품인 '블러드 차일드'부터 그렇다. 테란이 틀릭의 숙주가 된다. 숙주가 되어 아이를 낳게 된다. 그것도 여성은 인간의 아이를 낳아야 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남성이 숙주가 되어 다른 생명체의 아이를 낳아야 한다.


이런 세상. 보호자가 필요한 세상이고, 수술을 통해서 아이를 낳을 수밖에 없는 현실임에도 누군가는 해야한다는, 그래야 테란이 보호를 받고 종족을 유지할 수가 있다. 즉 누군가의 희생으로 종족이 유지되는 세상이다.


테란을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틀릭을 외계 생명체로 바꾼다면, 외계 생명체가 인간을 보호하면서 자신들의 종족을 재생산하는 대상으로 인간을 이용하는 세상? 어쩌면 외계 생명체에 대한 두려움을 일으키는 일들이기도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음을, 이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외계 생명체와 인간의 갈등과 공생을 다룬 소설이 하나 더 있는데, '특사'라는 소설이다. 외계 생명체가 지구에 온다면 침공일까? 그들과 공생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처음에는 서로 소통이 되지 않아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겠지만, 소통하려는 노력 속에서 서로가 타협할 수는 없을까?


'특사'라는 소설은 외계 생명체와 공생하는 인간의 존재를 보여준다. 앞으로 우주 시대라면 그렇게 살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최근에 감염병이 창궐하는데, 감염병으로 인류가 글을 읽는 능력을 잃거나 말을 하는 능력을 잃은 사회를 그리고 있는 '말과 소리'라는 소설은 섬뜩하다.


인간이 소통할 수 있는 도구인 말과 글을 잃는다면 어떻게 될까?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넘어갈까? 그렇게 될 가능성도 있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다 그럴 수는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되고 인류는 혼란에 빠지게 되겠지만.


그럼에도 누군가는 말과 글을 기억할 수 있다. 기억한다는 것이 질투를 유발할 수도 있긴 하지만 그들로 인해서 희망은 남아 있게 된다. 이 소설은 디스토피아에서 유토피아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 소설로 읽힌다.


이 소설집에서 무엇보다도 소설의 역할이 무엇인지,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 '마사의 책'이다. 신이 마사에게 인류를 구원할 능력을 주고 한 가지를 하라고 한다. 마사는 무엇을 선택할까? 그리고 마사는 자신의 선택을 기억하기를 원할까?


어쩌면 작가는 인류를 위해서 무언가 한 가지를 하는 사람이다. 작가의 책이 바로 그렇다. 인간에게 꿈을 주는 역할을 작품이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작가와 작품에 대한 이야기, 또 작품이 인간에게 주는 의미를 이야기하는 소설로 읽을 수가 있다.


소설 외에 두 편의 수필이 실려 있는데, 한 편은 버틀러가 작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짤막하게 쓴 글이다. 비록 짧지만 버틀러의 삶을 엿볼 수 있어서 좋은 글이고, 한 편은 글을 쓰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재능이나 영감을 잊으라는 말, 오로지 습관에 기대라고 하는 말. 그렇다. 버틀러의 말대로 '습관은 실제로 나타나는 집요함이다'(279쪽)


이런 습관이 버틀러를 유명한 작가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버틀러를 흔히 SF작가로 분류한다. SF작가든 아니든, SF소설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의문을 품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버틀러의 말로 대답을 대신한다.


'과거, 미래, 현재에 대한 SF의 사고가 무슨 쓸모가 있을까? 대안적인 사고와 행동을 경고하거나 고려하는 SF의 경향은 무슨 쓸모가 있을까? 과학과 기술, 혹은 사회 조직과 정치 방향이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한 SF의 탐구는 무슨 쓸모가 있을까? 기껏해야 SF는 상상력과 창조력을 자극할 뿐이다. SF는 독자와 작가를 다져진 길 밖으로, '모두'가 말하고 행하고 생각하는 좁고 좁은 오솔길 밖으로 끌어낸다. 지금 그 '모두'가 누구든 간에 말이다.' (274쪽)


이게 어디인가? 버틀러의 소설이 바로 이렇게 '좁고 좁은 오솔길 밖'으로 우리를 끌어내고 있으니... 주어진 길에서 벗어나는 즐거움. 새로운 길을 걷는 즐거움. 버틀러 소설에서 느낄 수 있다. 그것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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