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각박해지고 있다. 치안 만큼은 그다지 걱정하지 않고 있었는데... 미국에서 수없이 벌어지고 있는 총기난사 사건을 보면서, 우리는 아직 저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우리 사회는 그래도 무차별 살인이 많이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는데...


  대낮에 거리에서 백화점에서 학교에서 상해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죽거나 다치거나. 불특정 다수를 향한 분노의 표출일 수도 있고, 특정한 개인에 대한 앙심 때문에 벌인 일일 수도 있지만...


  이런 사건이 일어나면 일어날수록 사람과 사람 사이는 멀어진다. 그 멀어진 사이로 법이 강화되어 들어온다.


  관계 맺기의 어려움을 법이라는 틀로 강제하게 된다. 그냥 법, 법 하는 사회로 변해가는데... 


어지러운 시대일수록 법이 각광을 받는다. 어지러운 사회일수록 제자백가 중 법가(法家)들이 판을 장악하게 된다. 법은 점점 강화되고, 그만큼 사람과 사람 사이는 멀어진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한 개인이 한 개인을 어떻게 할 권리는 없다. 내가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도 소중하다. 내가 소중한 만큼 다른 존재도 소중하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인데... 그런 마음을 지녀야 하는데... 법을 작동시키기 전에. 법으로 사람 관계를 만들어 가기 전에.


조태일 시집을 읽었다. 작은 것들에 대한 사랑이 시에서 잔뜩 묻어난다. 그 중에 산 속에 홀로 피어 있는 꽃. 개복숭아꽃. 우리가 먹는 탐스러운 복숭아보다는 못하다고, 야생 상태의, 질이 떨어지는 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접두사 '개-'가 붙은 꽃. 이 시집 제목이 된 구절이 바로 이 개복숭아꽃이 '혼자 타오르고 있었네('연등' 1연에서)다.


'연등'이라는 시다. 연등이 무엇인가? 희망을 담은 등 아닌가, 희망을 함께 느끼는 등 아닌가? 절에 가면 많이 걸려 있는 소망들. 그런 바람들.                                                     


하지만 이 시에서는 '저 혼자 타오르고 있었네'라고 한다. 홀로, 마치 김소월이 쓴 '산유화'에서 '저만치'를 연상시키듯이.


하지만 혼자 타오르고 있었다고 해서 희망이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희망을 잃은 시대에 희망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희망을 피어올리고 있다고 해야 한다.


마지막까지 지니고 있어야 할 것이 바로 희망 아니던가. 조태일의 시 '연등'은 그런 생각을 하게 한다.


    연 등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산 속

개복숭아꽃 저 혼자 타오르고 있었네.


연분홍꽃

점, 점, 점, 점점이 불 밝혀

화르르 화르르 몸 섞고 있었네.


사월 초파일날 켠 연등보다

더 환했네. 더 고왔네.


오래도록 내 숨결

내 스스로 가빴네

내 스스로 황홀했네.


조태일, 혼자 타오르고 있었네. 창작과비평사. 1999년 2쇄. 32쪽.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또 저만치 있더라도, 홀로 있더라도 희망은 희망이다. 희망을 잃지 않는 삶, 사람과 사람 사이를 법으로 메꾸기보다는 배려와 존중, 서로 인정하고 도와주는 마음으로 채우는 그런 시대에 대한 희망,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전히 희망은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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