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기순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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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많은 사람들이 시청했던 드라마에서 남자 인물이 여자 인물에게 한 말이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적이 있었다. 


"얼마면 돼? 얼마면 되겠어?"라는 대사.


사랑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소설[위대한 개츠비]에서도 돈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나. 떠난 사랑을 돈으로 잡을 수 있을까?


돈으로 환산한다면 얼마면 될까? 그렇다면 비싼 가격을 부르는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을까? 그런 세상이 과연 행복한 세상일까?


아닐테다. [위대한 개츠비] 역시 행복한 결말을 맺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돈으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한때 사랑을, 아니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지위를 얻을 수 있는 시대가 있었다.


예전 드라마나 영화, 소설에서 흔히 다루어지던 사법고시에 붙은 가난한 사람 이야기. 사법고시에 합격하면 소위 마담뚜들이 달라붙는다고 했다. 돈은 있으나 사회적 지위가 그다지 좋지 않다고 여겼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사법고시에 합격한 가난한 사람에게 재산을 미끼로 결혼을 하자고 한다.


(농담 식으로 판-검사, 의사와 같은 '사'자들과 결혼을 하려면 열쇠가 세 개는 필요하다는 -집, 사무실, 차- 말들이 있었으니, 이런 사고방식이야말로 돈이면 다 된다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을 돈으로 산다고 할 수 있지만, 이는 사랑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를 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러한 방법이 많이 있었다고 해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는 돈이 우리 삶에 너무도 깊숙이 들어왔다. 대부분이 금전으로 환산이 된다. 돈이 있으면 편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이러한 편리를 돈으로 사는 세상, '얼마면 돼?'라는 질문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다고 말하지 않고, '그래 얼마만 줘'가 되는 세상이다.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미국 사회를 뒤쫓아가는 경우가 많은데, 돈이 사회를 잠식하는 모습도 미국을 따라간다고 볼 수 있다. 아주 씁쓸한 현실이지만.


샌델은 이 책에서 돈이 얼마나 많은 분야를 잠식해 들어왔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사회가 결코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우선 '새치기'라는 제목으로 1장을 시작한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움직일 것 같지만, 아니다. 새치기라는 말에는 도덕적인 비난이 들어 있지만, 우대권이라는 말에는 그런 비난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우대권. 무엇으로 우대를 받는가? 돈이다. 이것이 보통은 새치기인데, 이들은 표나지 않게 움직인다. 이미 보이지 않는 곳에서 대가를 지불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비행기 탑승을 생각해 보라. 이제는 대부분의 항공사에서 실시하고 있는데, 돈을 더 많이 지불하면 대기하는 시간이 줄어든다. 아예 없어지기도 한다. 남들이 서는 줄에 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비행기 탑승만 이러면 문제가 안 되는데... 의료 문제로 가면 심각해진다. 누구가 평등하게 진료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비대면진료가 활성화되면, 또 의료민영화가 이루어지면 돈에 따라 진료의 차별이 발생한다.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한 사람이 빠르게, 편리하게 진료를 받게 된다. 이를 샌델은 새치기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 '인센티브'라는 장에서는 이 인센티브가 결국 돈으로 사회를 왜곡하는 현상일 뿐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인센티브는 잘못에 대한 벌금을 지불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개념을 돈으로 그것을 덮을 수 있는 요금이라는 생각으로 이끈다고 한다.


지각자에게 벌금을 부과하면 지각이 줄까?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돈으로 지각을 대체했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조차도 없어진다고 한다. 성적이 좋은 학생에게 인센티브를 돈으로 지급하는 방법 역시 마찬가지라고 한다.


이렇게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있는 문제에서 시작해서 우리들 삶 곳곳에 침투하고 있는 돈으로 바뀌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선물을 주는 문제... 선물을 현금으로 주면 쉽게 해결될 듯한데, 왜 사람들은 굳이 선물을 주려고 할까? 이것은 바로 돈으로만 환산되지 않는 '선물의 경제'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함께 사는 사회에서는 돈으로만 계량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이 점을 깨닫지 않으면 사람과 사람 사이는 점점 멀어진다. 과학문명의 발달로 사람과 사람이 접촉하는 시간과 빈도가 점점 줄고 있는데, 기껏 만나더라도 돈이 개입을 한다면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는 벽이 존재하게 된다.


심하게는 죽음(보험)까지도 돈으로 생각하는 사업이 생겨났다고 하니, 이거야 원, 마지막 장에 '명명권'이라는 이름으로 광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광고야말로 돈으로 모든 것을 환산하는 (공익광고는 예외다)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아주 많은 사례들을 들어 돈으로 환산되는 사회가 왜 위험한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것은 경제학으로만 설명해서는 안 된다는 샌델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샌델은 경제학이야말로 도덕, 철학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고, 돈으로 환산되는 눈에 보이는 수치화된 이익만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요소들이 오히려 사람들의 삶에 더 필요함을 이 책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자. 내 삶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는 무엇이 있는가? 나는 그런 것들을 얼마큼 지니고 있는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많이 지니고 있으면 있을수록 내 삶이 더 행복한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을 하는 삶을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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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1-29 09: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중학생, 초등학생 아이들하고 토론했어요.^^

kinye91 2024-01-29 11:35   좋아요 1 | URL
토론이 아이들에게 좋은 경험이었을 것 같아요. 그런 토론하는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단 생각을 해요.
 
4·3이 나에게 건넨 말
한상희 지음 / 다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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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에 대해서 이제는 어느 정도 자유롭게 말하는 세상이 되었다. 적어도 4.3에 대해 말한다고 끌려가 고문을 받지는 않으니까.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4.3에 관한 소설을 썼다고 체포되어 온갖 고문을 받았던 현기영 작가도 있으니, 지금은 그때와는 다른 세상이라고 해도 좋겠다.


하지만 과연 4.3이 완전히 우리들 마음에 자리잡았는가? 4.3은 4.19를, 5.18을, 6.10을 이끌어내지 않았던가.


한때의 사건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이루는 토대로 늘 작용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과연 완성되었는가? 아니다. 그래서 4.3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4.3을 통해 인류의 자유와 평등과 연대를 추구할 수 있어야 하고, 4.3을 통해 회복적 정의를 구현해야 하는데, 자꾸만 뒷걸음질 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4.3을 통해서 또는 다른 수많은 민주화투쟁을 비롯한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다름을 인정하고, 다름과 함께 공존하는 방법을 배워왔다고 생각했는데, 다르다는 이유로 아예 배척해 버려야 한다는 생각, 또는 그러한 행동들이 여전히 나오고 있으니... 4.3으로 인해 확립해야 할 회복적 정의는 아직도 우리에게 오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가족들이 4.3을 겪은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가 왜 4.3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관심을 지니게 된 고1 때부터 이야기는 시작한다.





그리고 4.3의 역사적 사실과 예술(영화 '지슬', 소설 '순이 삼촌, 돌담에 속삭이는')을 통해서 4.3을 좀더 구체적으로 보여주며, 그런 학살의 과정에서도 용기를 발휘한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다.


지옥 속에서도 천국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음을, 그런 사람들이 모여 '선의 시민성'을 발휘한다면 '악의 평범성'이 자리잡지 못하게 됨을 이야기해준다.


그렇다. 4.3은 단지 과거의 사건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4.3은 우리의 현재이고 미래여야 한다. 4.3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자세를 지니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다. 특히 청소년들이 읽기 쉽게 쓴 책이니, 교과서 밖에서 이렇게 4.3을 만나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이렇게 책을 읽으면 제주도에 갔을 때 눈에 보이는 풍광과 더불어 그동안 관심을 두지 않고 지나쳤던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풍광 속에 가려져 있던 제주도의 역사까지... 그 역사를 통해 민주주의의 미래로 나아가야 함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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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러블과 함께하기 - 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
도나 해러웨이 지음, 최유미 옮김 / 마농지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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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을 확 바꿔주는 책이다. 인간 중심주의를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지구 환경이 파괴되고, 다른 생물체들의 생존에도 위협이 되는 시기라서, 이를 인류세라고 하자는 주장이 있었다. 어느 정도 타당하다. 환경 파괴, 지구 파괴가 자본주의가 초래한 일이라서 자본세라고 하자는 주장도 있다. 역시 타당하다.


그런데, 인류세나 자본세에는 현상을 분석하고, 원인을 찾아내는 데는 유용하지만, 그것을 극복하는데는 별로 힘을 쓰지 못한다. 너무도 거대한 체제와 맞서야 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인류는 성장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우리가 늘 언론에서 접하는 성장률에 관한 기사들을 보라. 성장이 안 되는 인류가 망하는 것처럼 서술된 기사들이 얼마나 많은가.


여기에 인구 감소가 심각한 문제라고 주장하는 글들이 얼마나 많은가? 인구도 계속 늘어나야만 한다고 하는 발상은 성장주의 발상이고, 인류중심주의 발상이다. 이런 관점이 바뀌지 않는 한, 인류세, 자본세를 아무리 이야기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들이 말하는 인류세, 자본세의 틀 안에서 생활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 끝부분에 실린 카밀 이야기를 읽어보라. 해러웨이는 인류가 계속 늘면 그것은 공멸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카밀 5세에 가서 인류 인구를 30억으로 만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좀더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이때 해러웨이는 '쏠루세'를 주장한다.


'사람들이 그것의 일부이고, 그 속에서 지속성이 위기에 처한, 역동적이고 지속적인 공-지하적symchthonic 힘과 권력을 위한 이름. 어쩌면, 단지 어쩌면, 다른 지구인들과 함께하는 진지한 헌신과 협동적인 일과 놀이가 동반돼야만, 사람들을 포함한 풍부한 복수종 무리를 위한 번성이 이루어질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과거, 현재, 그리고 다가올 것으로서) 쏠루세 Chthulucene라고 부르겠다.' (173-174쪽)


즉 시 쏠루세에는 일방이 없다. 무조건적인 조화도 없다. 트러블이 있다. 갈등이 없을 수가 없다.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죽음은 삶과 떨어져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생성과 파괴도 함께해야 한다. 생성을 위해서 파괴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쏠루세라는 말을 가장 잘 드러내는 비유가 바로 퇴비다. 퇴비는 죽은 것들과 산 것들이 공존하는 세계다. 이 공존을 통해 새로운 것으로 나아간다. 바로 쏠루세가 그렇다.


이런 쏠루세를 받아들이면 지금 원인 분석에 머무르지 않는다. 어려움과 함께하기 때문에, 실천이 늘 동반된다. 그것도 어느 한 종의 우세로서의 실천이 아니라 여러 종들이 함께하는 실천.


해러웨이의 이 책을 읽다보면 인구 문제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고, 솔닛이 [야만의 꿈들]에서 말했던 원주민들이 불을 질러 나무들을 불태우는 일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삶과 죽음에 대해서도.


다른 종들과 함께 살아가는 일, 그것이 가능할까? 가능하다고 본다. 즉, 얽히고 얽혀서 새로운 매듭을 만들어 내는 실뜨기처럼 우리들의 삶도 그래야 한다고 한다.


이렇게 다양한 종과 어울려 살다보면 자연스레 자식이 아닌 친척을 만들게 된다. 즉,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생물학적 자손만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모든 종들과 함께 살아가게 된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쏠루세'라는 개념에 들어있는 실천이고, 해러웨이가 말하는 트러블과 함께하기다. 바로 퇴비의 삶이기도 하고.


다양한 종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생각이 터무니 없는가? 아니다. 우리는 예전에 다양한 종들과 함께 살아왔다. 하다못해 귀신, 정령들과도 함께 살아오지 않았던가. 즉, 삶과 죽음이 함께하고, 다양한 종들이 함께 했었다.


어린 시절 이야기들을 보면 이를 확실히 알 수 있다. [나니아 나라 이야기]를 봐도 말하는 동물들이 나오고, 나니아에서는 모든 생물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또 [샬롯의 거미줄]을 보라. 어린 시절 동물들과 대화를 할 수 있던 시절이 있다. 그것을 스스로 삭제하고 살아온 것이 현대인들의 삶, 즉 인류세와 자본세를 살아온 인간들의 모습인 것이다.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구라는 장소가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살기 힘든 장소가 될 테니... 해러웨이의 글들 읽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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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꿈들 - 장소, 풍경, 자연과 우리의 관계에 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양미래 옮김 / 반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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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닛의 글들은 여러 생각할거리를 준다. 단지 생각할거리가 아니라 실천해야만 하는 문제들을 제기한다. 그는 걷는다. 그냥 걷는 것이 아니다. 걸으면서 문제를 만나고, 문제에 대응을 한다. 걷기는 개인적인 행위이기도 하지만 공동체의 행위이기도 하다.


이 책은 네바다 사막과 요세미티 공원을 장소로 하고 있다. 물론 솔닛은 이 장소에 머물지 않는다. 이 장소들을 걷는다.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서.


솔닛에게 걷기는 '문제를 향해 걷는 행위는 책임을 지는 행위, 되돌리는 행위, 기억하는 행위다. 걷기 운동가들은 과거의 짐을 자신의 어깨에 짊어진 채 핵폭탄 수백 개의 낙진이 있는 고국으로 걸어간다.(492쪽)'고 하듯이, 문제를 알고 해결하려는 행위다.


네바다 사막을 장소로 택한 이유는 간단하다. 네바다 사막은 미국이 핵실험을 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핵실험을 하기 전에 이곳에는 사람이 없었을까? 아니다. 단지 모래만이 펼쳐진 자연이 아니라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던 장소였다.


하지만 정부는 네바다에서 사람들을 소거했다. 그곳은 사막이어야 했다. 먼저 살고 있던 사람들이 없는 그런 사막. 그래야만 핵실험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방사성의 위험을 알릴 필요도 없이. 하지만 아무리 넓은 사막이라도 방사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방사능이 한 곳에만 머무를까? 그렇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솔닛은 네바다로 간다. 네바다를 자유롭게 걷고자 한다.


핵실험장으로 다른 사람들이 들어올 수 없게 울타리 처놓은 곳으로 솔닛은 간다. 울타리를 넘는다. 체포된다. 또다시 걷는다. 체포된다. 그곳은 사람들이 걸을 수 없는 곳이 아니다. 사람들이 살지 않던 곳이 아니다.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던 장소였다. 그런 장소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 솔닛은 걷는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요세미티 공원도 마찬가지다. 풍경으로만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 그곳에는 오래 전부터 살아오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을 원주민이라고 불러도 좋다. 미국 정부가 그들의 존재를 부인하려고 해도 존재했던 사람들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러니 또 솔닛은 걷는다. 이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라도.


이렇게 한 장소는 불모의 사막이라고 할 수 있고, 또 한 곳은 자연이 살아 있는 공원이기는 하지만, 솔닛은 이 두 장소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사라지게 되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아니 사람들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들이 없는 것처럼 두 공간을 인식하도록 했는지를...


따라서 솔닛과 다른 사람들이 그 공간을 걷는 행위는 그 공간에서 사람들을 인식하는 행위이다. 공간을 장소로 만드는 일이다. 그렇기에 솔닛의 글을 읽으며 우리는 네바다와 요세미티에서 사람들을 볼 수 있게 된다.


이렇게 걷기는 문제와 대면하는 행위라고 했다. 솔닛의 이런 걷기가 끝났으면 좋겠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다. 걷기는 지속되고 있다. 우리나라만 봐도 그렇다. 


삼보일배, 오체투지... 그냥 걷는 것이 아니다. 온몸을 던지면서 걷는다. 왜? 그냥 걸으면 봐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온몸을 던져야 겨우 그제서야 아, 사람들이 있구나! 사람들이 걷고 있구나! 무슨 문제가 있구나! 한다.


솔닛이 걷고 또 걸었지만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았듯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온몸을 던지면서 걸어도 문제를 없는 것처럼 나 몰라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홀로 걷지 않고 함께 걷는다면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다.


문제가 보이지 않을 수가 없다. 문제가 보이면 해결책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렇게 걷기는 문제를 우리 앞에 가져다 놓는다. 


솔닛이 말하듯이 걷기는 바로 책임을 지는 행위, 기억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현대를 이끌어간다고 하는 과학자들, 기술자들 역시 걷기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솔닛이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걷기의 장점이 현대 과학자들에게도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 시대의 유럽 물리학자는 고전 교육을 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과학은 물론 정치, 시, 음악에도 일가견을 가진 엄청난 교양인이었다. 그들의 산책은 풍경 감상, 낭만주의적이고 괴테적인 전통에 따른 자연 숭배, 허물 없고 위계적이지 않은 소크라테스적 전통에 따른 걷기, 사무실이나 교실에서가 아니라 길 위에서 걸으며 나눈 대화 등에 대한 취향을 분명히 보여주기도 했다.'(180쪽)   

   

단지 과학 분야만 그럴까?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들, 걷기를 통해서 공간과 시간, 인간이 합쳐진 장소를 발견하게 된다. 그 점을 솔닛의 글이 다시금 깨우쳐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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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1-16 09: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공간은 걷는 행위는 그 공간에서 사람들을 인식하는 행위이다. 공간을 장소로 만드는 일이다˝
이 문장에 꽂혀서 장바구니에 넣었습니다.

kinye91 2024-01-16 1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솔닛의 글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해요. 특히 ‘걷기‘에 대해서는 더더욱요.
 
녹색평론 2023년 겨울호 - 통권 184호
녹색평론 편집부 지음 / 녹색평론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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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호를 읽으면서 왜 영화 [서울의 봄]이 생각났을까?


  오지 않은 서울의 봄... 이런 생각을 하다가 레이첼 카슨이 쓴 [침묵의 봄]도 생각났고.


  막을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보다는 막을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하고 싶은 '서울의 봄', 아니 그해 겨울. 


  어떻게 하면 막을 수 있었을까? 여러 방법이 제시되었다. 분명 실현 가능했던 방법들이었고, 그 방법들 중에 몇 가지만, 아니 한 가지만 실현이 되었어도 반란은 성공하지 못했겠지.


  방법은 있었고 실행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못했다. 못했다고 하기보다는 안 했다고 보아야 하나? 안 한 이유는 너무도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 즉 '지피지기 백전불패(知彼知己 百戰不敗)'라고 했는데, 적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데서 실패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

         

<이미지 출처 : 서울의 봄 - 검색 이미지 (bing.com)


 세상에 반란군이 목숨을 걸고 진격하고 있는데, 평화협정이라니... 또 막을 수 있는 상황인데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돌아서다니, 거기다 제 자리를 지켜야 하는데 자리를 비우고 떠나다니,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의견을 묵살하다니...


그래서 '서울의 봄'은 오지 않았고, '침묵의 봄'이 지속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지. 왜, 이번 호를 읽으며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생각해보니, [녹색평론]이 늘 해오던 일이 바로 이것이었다. 기후 재앙이 아닌 생태 재앙으로부터 우리가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것.


우리 삶이 이대로 지속된다면 결국 공멸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 계속해서 이러면 안 된다고, 바꿔야 한다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그렇게 주장을 했는데도, [녹색평론]에서 한 주장들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


지금 우리가 몸으로 겪고 있지 않나. 80년대 독재를 겪었듯이, 지금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기후 변화로 고통을 받고 있지 않나. 아주 다양한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오래 전부터 제시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는 기후 변화, 생태 위기를 온몸으로 겪고 있으니.


그러니 최근에 봄 영화인 '서울의 봄'이 생각날 수밖에. 녹색평론이 영화 속에서 쿠테타를 막으려고 애쓰는 인물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영화는, 역사는 순간의 패배로 10년 넘게 그들의 천하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정권을 잡은 것이 10년 조금 넘었다면, 다행히도(?)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고 더 지속되지 않았지만, 기후, 생태 위기는 그렇지 않다.


십 년이 아니라 수십 년, 아니 어쩌면 우리의 미래를 암담하게 만들 수도 있다.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녹색평론]은 계속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영화와 이번 호를 연결지으면서도 절망에 빠지지 않는 이유는 두 편의 글 때문이다. 정성헌/이문재의 대담을 실은 글인 '중심이되 중심이 되지 말라'는 글에서 정성헌의 구체적 실천 지침이 몇 개 실려 있다. 그 중에 이런 것... 결코 포기하지 않는...


'상유십년(尙有十年)! 우리에게는 아직 10년의 시간이 있다. 3년간 해보고 1년 조정기를 거쳐 다시 3년씩 두 번 더 해보면 세상이 바뀔 것이다' (177쪽)


이 말이 희망을 준다. 이번 호 앞부분에 실린 '윤석열 정부 농정 나침반은 어디로 향하나, 뉴미디 시대의 언론과 정치 권력'을 읽으면서 현실의 답답함을 이런 지침을 읽으며 희망이 있음으로 바꿀 수 있다. 


그리고 서평으로 실린 '마음과 행위로 숲 만들기<씨앗부터 키워서 천이숲 만들기>'라는 글... 난지도를 공원으로 만드는 과정을 쓴 책에 대한 서평인데... 지금은 하늘공원, 노을공원이 시민들이 많이 찾는 숲이 살아 있는 공간이 되었지만... 처음에는 쓰레기산이었을 뿐.


2012년에 1만 그루의 묘목을 심지만 단 한 그루를 남기곤 모두 죽었다고(254쪽) 한다. 절망적인 상황이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는다. 12년간 3만 6,258명의 봉사자와 141종의 나무 13만 3,708그루를 심고 돌봤다고 한다.(255쪽)


앞에 언급한 정성헌의 말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 아직도 우리에겐 10년의 시간이 있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여기서 다시 정성헌의 구체적 실천 지침으로 간다.


'시민을 넘어 천지인민. 국민 5% 즉 250만 명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177쪽)


난지도라는 장소를 사람들이 찾는, 숲(자연-동식물)과 인간이 공존하는 장소로 만드는데 오랜 시간, 또 운동가 몇몇이 아닌 함께 하는 여러 사람들의 참여가 있었다. 그렇다면 난지도보다 큰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는데는 더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


정치인 몇, 시민단체 몇이 아니다. 시민이 아닌 천지인민이라고 한 것은 보통 사람들의 참여, 국민 5%의 참여가 있다면 사회가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은가? 아니다. 2016년을 생각해 보라. 우리나라에서 사상 최초로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국민의 힘이었다. 그때 모인 국민들 5%가 넘지 않았을까? 그러니 바꿀 수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짧게 보지 말고 길게, 나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한다면 바꿀 수 있다.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그냥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 나라 정치 상황뿐만 아니라 지구 차원의 환경(생태) 문제에 관련해서도.


그래서 영화 '서울의 봄'과 달리 [녹색평론] 이번 호에서는 희망을 본다. 


이번 호에는 최근에 벌어진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지상군 투입 등에 대한 글도 있다. 읽으면서 생각할거리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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