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 군대에서 일어난 많은 사고들이 뉴스에 나왔다.

 

동료 군인에게 총을 쏘고 탈영한 군인이야기, 스스로 목숨을 끊은 군인. 그리고 군대 내에서 구타로 사망한 군인 이야기.

 

군대가 무장한 인간들의 집합처이기 때문에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고 하지만, 같은 나라 군대에서 진한 전우애로 묶여 있어야 할 군대에서 서로를 죽이고, 자살하고, 맞아 죽는 그런 일들이 아직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군대라는 집단의 속성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군대는 본래 폭력적이고, 이 폭력이 외부로 향하지 않고, 내부로 향했을 때 많은 문제가 일어나는데...

 

이래서 내,외부를 막론하고 군대를 거부한 사람들 이야기가 있는데, 이런 때에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군대의 맨얼굴을 만나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아직도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평화주의자로 산다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이들이 잘 보여주고 있다.

 

"총을.들지 않는 사람들"

 

"칼을 쳐서 보습을" 이 책의 개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평화의 얼굴".

 

군대. 우리나라 남자라면 한 번쯤은 갔다와야 하는 곳. 우리나라는 징병의 의무가 있으니 거부할 수는 없는데...

 

최소한 거부할 수 없는 의무라면, 그 곳에서 생활하는 동안 제대로 생활할 수 있게, 오히려 사회에 있을 때보다 더 쾌적한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군대를 자신의 양심에 따라서 가지 않을 수 있는 권리도 보장하고, 이런 양심적 병역거부와는 별도로 국민의 의무를 다하겠다는 생각으로 군대를 가는 사람에겐 그가 행하는 의무만큼이나 중요하게 국가에서는 그의 생활을 보장할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는가.

 

요즘.., 군대에 관한 안 좋은 기사들이 너무 많이 나온다.

 

이 책들이 군대를 거부한 사람들 이야기지만, 이들의 이야기를 읽고 알게 됨으로써 오히려 군대가 더 좋아질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군대를 폐기하지 못하겠다면 적어도 젊은 군인들이 죽어나가지는 않는 군대가 되도록 해야하지 않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리고 있는 간송미술대전, 아마도 2부 제목이 보화각인가 하던데... 거기에 가다. 수요일 오후에...

 

봄에 열렸던 간송미술대전에도 갔었는데, 또다시 간 이유는 이번에는 신윤복의 '미인도'가 전시된다는 이야기를 듣고다.

 

간송미술관에 한 번 갔을 때 2-3시간에 걸친 줄을 기다려 들어갔다가 문화재보다는 사람 뒤통수를 더 많이 보고 온 적이 있었고, 올해 초에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했던 것에는 '미인도'가 나오지 않았다.

 

하여 그래도 간송미술관에 갔으면 '미인도'는 봐야지 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이번에 가게 된 것.

 

평일이라 사람이 적겠지 하고 갔는데 웬걸 여전히 줄을 서야 한다. 날도 더운데 아무리 실내라 하여도 냉방시설이 복도는 그다지 좋지 않아 더운데 또 기다려야 하다니...

 

다행히도 이번에는 조금만 기다리면 되었다. 한 10분 남짓 기다렸으려나.

 

참으로 미인을 만나기 힘들구나.

 

사람들을 따라 작품 하나하나를 따라가다 보니, 1부에서 본 작품들도 있지만, 새로운 작품들도 꽤 있다.

 

이런 작품을 이 때 아니면 언제 보랴 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돌다 보니 '미인도' 앞에 서게 되었다. 찬찬히 보고 또 보고, 화면으로 나오는 확대된 사진도 보고 또 보고, 머리 속에 마음 속에 담아 두고, 다른 작품들로 발걸음을 옮겼는데...

 

1부에 있었던 도자기류와 훈민정음이 여전히 전시되어 있었다는 사실.

 

간송으로 인해 우리 문화재가 이리 보존될 수 있었음을 다시 한 번 감사하면서...

 

잘 보고 온 길.

 

신윤복의 '미인도'말고도 많은 작품들이 있었다. 신윤복의 또다른 작품들과 김홍도의 작품, 장승업의 작품, 심사정의 작품, 김명국의 작품, 최북의 작품, 여기에 추사의 그림과 글씨까지...

 

아직도 우리나라 옛그림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감상도 잘 하지 못하지만, 아무렴 어떠랴. 자꾸 눈에 담고 마음에 담으면 그만인 것을...

 

유홍준의 "화인열전1,2"이 생각났다. 그림을 보는 눈이 높아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화가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있으니 말이다. 그곳에 가면 간송미술관의 작품들을 해설해 놓은 도록집인 "간송문화"도 있다. 한 번 볼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 대해서 엄청난 폭격을 하고, 이제는 지상군까지 투입했다고 한다.

 

홀로코스트라고 해서 그들이 당한 지가 이제 겨우 반세기가 넘었을 뿐인데, 그들은 자신들이 힘이 생겼다고 다른 민족에게 그와 비슷한 행위를 한다.

 

유엔 사무총장도 교황도 당장 전쟁을 멈추라고 하지만, 이스라엘은 들은 척도 안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폭격이, 침공이 정당하다고 한다. 오로지 팔레스타인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들, 이들이 전투원이면 모른다. 전쟁에서, 폭격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은 전투원보다는 비전투원, 즉 민간인이 더 많다.

 

민간인 중에서도 힘이 없는 여자와 아이들이 가장 많이 죽어간다. 그런 사실은 역사를 통해 알려져 왔고, 또 전쟁을 하고 있는 당사자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폭격을 멈추지 않는다.

 

왜?

 

폭격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한 때 재미있게 보았던 일본 만화 "원피스"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니코 로빈이 잡혔을 때 과거를 회상하고 현실로 돌아와 버스터 콜이라고 하는 해군 군함을 불러 폭격을 하는 일이 일어났을 때 로빈은 '지도상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고 절규한다.

 

지도만 보고 폭격을 결정하는 사람들에게는 지도에 존재하는 공간만이 중요하지 그 공간을 장소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그렇게 쉽게 폭격을 결정하지.

 

특히 이 책 "폭격의 역사"를 읽으면 이런 폭격이 주로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인종, 민족, 집단에게 잘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세계 최초로 원자폭탄을 맞은 일본(그렇다고 일본이 피해자로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은 가해자로서의 위상이 더 크다)과 이슬람을 믿는 이라크, 아프카니스탄, 그리고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을 보면 폭격이 주로 어디에 일어났는지 알 수 있다.

 

물론 간혹 같은 백인끼리, 서양인끼리도 일어나지만 그것은 좀 열들하다고 믿는, 또는 지도상에서 그들의 존재를 부정할 때 일어난다.

 

지도상에서 보이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그곳에 없지는 않는다. 그들은 지도에서 단지 공간으로만, 목표지점으로만 존재하는 그곳을 자신들의 삶의 거주지로 삼고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폭격이라니... 정말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도 아니고...

 

한 번에 삶의 터전을 잃는 사람들, 무엇인지도 모르고 목숨을 잃는 사람들... 그들은 결코 지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지도에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엄연히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것을 보아야 한다. 그것을 고려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다.

 

전세계의 평화를 위해 존재한다는 유엔의 사무를 총괄한다는 사무총장의 말, 교황의 말이 아니더라도 전세계 곳곳에서 평화를 염원하는 사람들의 말을 이스라엘은 들어야 한다.

 

그들이 당한 것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신은 분노의 신이기도 하겠지만, 사랑의 신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의 신을 섬기고 싶다.

 

자신들이 목숨처럼 여기는 종교를 진정으로 이 땅에서 실현시키고 싶다면 이젠 폭격을, 전쟁을 멈추어야 한다. 그래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년 중학교 입학생부터 소프트웨어 수업 의무화

 

  내년도 중학교 입학생부터 소프트웨어 교육이 의무화되는 등 초,중,고 교육과정에서 소프트웨어 교육이 대폭 강화된다. 

- 한겨레신문 2014년 7월 24일자. 20면에서.

 

뉴스에서 이 소식을 듣고, 뭐야 하는 마음이 들었는데, 신문 기사를 읽으며 과연 이것이 소프트웨어 산업을 살리는 길이 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본말이 전도된 대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어쩌면이 아니라 이것은 본말이 전도된 대책일 뿐이다.

 

어떻게 우리나라 소프트산업의 위축을 국민공통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초중고 교육과정에 책임을 떠넘길 수가 있는지.

 

하드웨어는 세계 최고를 자랑하지만, 그 하드웨어를 작동시키는, 또는 하드웨어를 더욱 쓸모있게 하는 소프트웨어는 다른 나라의 것을 쓰고 있다고, 막대한 부의 손실과 세계적인 추세에서 뒤쳐지고 있다고 호들갑들이다.

 

그래서 초등학교에서도 중학교에서도 하다못해 고등학교에서도 소프트웨어 교육을 해야 한다고 한다. 아니, 한다고 한다. 내년부터.

 

교사 충원 고민도 없이, 학교 현장의 시설에 대한 고민도 없이...

 

무엇보다도 그런 교육이 왜 국민기본공통교육과정에서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없다.

 

우리나라 소프트웨어 산업이 외국에 비해 뒤떨어진 것, 잘 생각해 보라. 우리나라가 과연 기초 과학에 투자를 하는가? 연구원들에게 투자를 하는가? 이런 것들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이 무조건 모든 국민이 소프트웨어에 대한 교육을 받으면 소프트웨어 강국이 자연스레 된다고 생각하는지.

 

오히려 소프트웨어는 창의적인 몇몇이 생계 걱정을 하지 않고 거기에 전념할 때 나올 수 좋은 프로그램이 나올 수 있는 것 아닌가?

 

전국민에게 별 관심도 없는 소프트웨어 교육을 하기보다는 이 분야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맘 놓고 연구하고 실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왜 우리나라에서 공부 잘한다는 학생들이 이공계, 특히 자연과학 또는 순수학문 분야로 나아가지 않고 의대로 진학하는지 고민을 해봤는지...

 

순수학문이 바탕이 되면 그 바탕 위애서 다양한 과학적, 기술적 성과들이 집적될 수 있을테고, 또한 연구원들이 생계 걱정을 하지 않고, 직장에서 떨어져 나갈 걱정을 하지 않고 연구 실험할 환경이 조성된다면 자연스레 소프트웨어 산업은 발전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초중고 교육과 상관이 없다. 왜 억지로 갖다 붙여서 애꿎은 초중고 학생들 학습량만 늘리려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니 학교 교육은 촘스키가 책의 제목에서 말한 대로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기껏 사회에 나가 쓰지도 않을 소프트웨어 교육에 몇 년을 허비하게 만드는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도대체 교육을 통해 어떤 성공을 할 수 있다는 건지...

 

계속되는 교육의 실패로 우리나라 학생들은 세계에서 가장 학교를 싫어하는 학생들이 되어 있고, 공부는 학교에서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배움이 평생간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하루라도 빨리 대학에 들어가기만을 고대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학생들에게 한 과목을 더 추가한다니... 누구를 위해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잘 취업하게 하기 위해서? 아님, 우리나라 국가 경쟁력을 위해서? 아님, 소프트웨어 산업을 위해서?

 

다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소프트웨어 산업을 살리기 위해서는 순수학문을 하겠다는 학생들이 늘어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야 하고, 연구원들이 마음 놓고 연구하고 실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도록 정부가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주어야 한다.

 

그게 먼저다. 그리고 그게 다다. 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또 하나의 고통을 전가하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촘스키.. 방향은 다르지만 그 역시 미국의 교육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었는데... 우리 교육, 마찬가지다.

 

어째서 이런 방안이 나왔는데, 교육 분야에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까? 무엇이 우선인지 그들은 잘 알텐데...

 

아님,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가? 

 

하지만 적어도 이런 문제는 정말로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다음에 대책을 내놓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학교 교육과정에 적용하려면. 이렇게 즉흥적이어선 안된다. 그리고 소프트웨어 산업을 진작시키는 해결방법으로 이것은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종교.

인간의 삶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상.

연약한 인간이 자신의 연약함을 위로하는 방편으로 종교를 만들었는지, 아니면 신이 인간을 위해서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종교가 존재하는지 논란은 있지만, 종교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특히 갑작스런 죽음을 경험하거나 자신의 힘으로 감당하기 힘든 일을 겪거나 할 때 우리는 종교에 귀의한다. 그리고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세상에 참으로 많은 종교가 있다.

엄청나게 많은 종교. 그런 종교로 인해서 전쟁이 일어나기도 하고.

그럼에도 사람들은 종교를 통해 평화를 얻기도 한다.

그런 종교 중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믿는 종교가 불교, 기독교, 천주교 등이다.

이 중에 불교는 우리의 역사에서 참으로 오래동안 우리와 함께 했던 종교인데.

 

세상이 그 많고 많은 교회와 성당과 절과 모스크들이 있는데 왜 세상은 평화로와지지 않을까?

세상에 악인도 많고 안 좋은 일도 많으니, 도대체 무슨 까닭인가?

이런 의문이 사라지지 않는다.

 

헌책방에서 불교 관련 책장을 둘러보다 지장경을 발견했다. 한 번은 꼭 읽겠다고 작정했던 경전.

금강경이나 법화경, 화엄경 등이 너무도 어렵다면 지장경은 그리 어렵지는 않다.

지옥에 머물면서 또는 세상을 돌면서 사람들을 구제한다고 하는 지장보살.

그가 건 서원이 바로 모든 사람들을 구제하겠다는 것이었다지.

그는 모든 사람이 구제될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고 했다지.

하여 그의 이름을 외는 순간, 그를 믿는 순간 우리는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지.

지옥에 떨어졌더라도 그가 구제해준다고 하지.

 

얼마나 마음이 편한가.

지장보살과 함께 있으면 지옥에 가지 않는다는.

이를 현실에 맞게 재구성하면 좋은 일, 착한 일, 착한 마음을 지니고 세상을 살라는 얘기가 아닐까.

지장경에는 아주 자그마한 선행을 한 사람도 그 선행에 의해서 지옥을 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니.

지장보살을 믿는 사람들은 지장보살만 믿고 멋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지장보살이 낸 서원에 따라 우리 모두가 선업을 쌓도록, 해탈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종교를 믿는 이유이기도 하다.

믿음과 실천이 함께 가는.

지장보살이 지옥을 두루 다니며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은 바로 사랑일텐데, 이를 자비라고 하기도 하니, 이 자비는 바로 우리들이 모두 지니고 있어야 할 삶의 태도 아니던가.

자비가 넘치는 사회, 그 사회가 바로 천당이고 극락이 아니겠는가.

지장보살을 다시 불러내는 사회. 그 사회는 아직도 지옥에서 헤매는 사회가 아닐까.

 

내가 지장경을 꼭 읽고 싶다고 생각했던 이유가 바로 현실이 지옥처럼 느껴질 때 그 지옥에서도 벗어날 길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지옥 속에서도 사람을 위해서 노력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 그것이 신이든, 우리 사람이든 그런 존재는 반드시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에 이 지장경을 읽고 싶었던 것이리라.

 

어려운 시대다. 정말로 앞이 꽉 막힌, 캄캄한 시대다. 그런 시대, 지장보살이 필요한 시대다.

지장보살. 마음 속에만 있는 보살이 아니다. 지장보살은 행동하는 보살이다. 직접 움직이는 보살이다.

요즘, 그립다. 그런 지장보살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