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섭, 융합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이제는 한 분야에만 정통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리라.

 

  그만큼 사회가 복잡해졌지만, 복잡해진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여러 분야를 알고, 상황에 맞게 적용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권혁웅의 '마징가 계보학'을 읽으며 최서해(최학송)를 떠올린 것은 이런 통섭이니 융합이니 하는 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통섭과 융합이 과학과 인문학의 결합만이 아니라, 문학 쪽에서도 다양한 분야들이 서로 섞이고 얽히는 관계여야 한다고 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시인의 말에도 최서해를 떠올리는 말이 나온다.

 

"나는 오랫동안 달동네에 살았다. 내게 1980년대의 후반부가 독재와 민주화운동과 시의 시절이었다면, 그 전반부는 원죄의식과 주사(酒邪)와 첫사랑의 시절이었다. 나는 거기 살던 내내 언젠가 탈출기(脫出記)를 완성하겠다는 생각으로 살았다. 거기서 벗어난 지 십오년이 되었는데 이제는 그곳이 나를 벗어나려 한다. 그곳, 서울시 성북구 삼선동 일대가 재개발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142쪽)

 

최서해의 탈출기, 지지리 궁상인 생활에서 벗어나려 몸부림 친 지식인의 이야기. 이 시집에 등장하는 화자는 지식인이다. 분명 지식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화자가 회고조로 다른 인물들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난때문에 굴곡진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 당시 시인이 살아온 시대에서 달동네는 밀리고 밀린 사람들이 올라와 살 수밖에 없는 마을.

 

삶의 질은 계속 내려가는데 살아가야 할 곳은 점점 높아지는 현실 속에서, 그곳을 벗어나려고 애를 쓰나 벗어나는 것은 죽음에 이르렀을 때뿐이라는 것.

 

오래 전에 텔레비전에서 방영했던 '독수리 오형제'를 빗대어 쓴 시 '독수리 오형제'를 보면 세상을 구하는 독수리 오형제가 아니라 세상에서 밀려나고 밀려나 결국은 죽음에 이르는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기를 쓰고 그 마을을 벗어나도 결국은 다시 낮은 곳에서 살 수밖에 없는 사회 하층민들의 이야기. 기껏 지식인들이 나온다고 해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밀려나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 (이 시집에 실린 '광기의 역사 - 1. 호모 인텔리쿠스'에 나오는 이모 같은 경우)

 

그래서 마치 최서해의 소설을 읽는 듯한, 일제시대로 따지면 신경향파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는 시집이다. 그렇다고 그때의 소설과 같은 살인, 파괴 등으로 점철되지는 않는다. 소설에서도 죽음이나 떠남이 주를 이루지만 다른 작품들과 융합이 되어 소설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만화영화, 영화, 노래 등등 다른 많은 작품들과 바로 자신과 함께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시집에서 주를 이룬다. 이들에게서 탈출을 꿈꾸었겠지만, 이제 이들은 그곳에 없다.

 

그렇다고 이들이 사라지지도 않았다. 우리가 외면하려 해도 시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그 점을 명심하자.

 

독수리 오형제

 

 

0. 기지

 

  정복이네는 우리 집보다 해발 30미터가 더 높은 곳에 살았다 조그만 둥지에서 4남1녀가 엄마와 눈 없는 곰들과 살았다 곰들에게 눈알을 붙여주면서 바글바글 살았다 가끔 수금하러 아버지가 다녀갔다

 

1. 독수리

 

  큰형이 눈뜬 곰들을 다 잡아먹었다 혼자 대학을 나온 형은 졸업하자마자 둥지를 떠나 고시원에 들어갔다 형은 작은 집을 나와 더 작은 집에 들어갔다 그렇게 십년을 보냈다 새끼 곰들이 다 클 만한 세월이었다

 

2. 콘돌

 

  둘째 형은 이름난 싸움꾼이었다 십대 일로 싸워 이겼다는 무용담이 어깨 위에서 별처럼 반짝이곤 했다 형은 곰들이 눈을 뜨건 말건 상관하지 않았다 둘째형이 큰집에 살러 가느라 집을 비우면 작은집에서 살던 아버지가 찾아왔다

 

3. 백조

 

  누나는 자주 엄마에게 대들었다 엄마는 왜 그렇게 곰같이 살아! 나는 그렇게 안 살아! 눈알을 박아넣는 엄마 손이 가늘게 떨렸다 누나 손은 미싱을 돌리기에는 너무 우아했다 누나는 술잔을 집었다

 

4. 제비

 

  정복이는 꼬마 웨이터였다 누나와 이름 모르는 아저씨들 사이를 오가며 소식을 주워 날랐다 봄날은 오지 않고 박꽃도 피지 않았으며 곰들도 겨울잠에서 깨어날 줄 몰랐다 그냥, 정복이만 바빴다

 

5. 올빼미

 

  하루는 아버지가 작은집에서 뚱뚱한 아이를 데려왔다 인사해라, 네 셋째 형이다 새로 생긴 형은 말도 하지 않았고 학교 가지도 않았다 그저 밤중에 앉아서 눈뜬 곰들과 노는 게 전부였다 연탄가스를 마셨다고 했다

 

6. 불새

 

  우리는 정복이네보다 해발 30미터가 낮은 곳에 살았다 길이 점점 좁아졌으므로 그 집에 불이 났을 때 소방차는 우리 집 앞에서 멈추었다 그들은 불타는 곰발바닥들을 버려두고, 그렇게, 하늘로 날아올랐다

 

권혁웅, 마징가 계보학, 창비. 2007년 초판 5쇄. 52-54쪽.

 

어렸을 때 본 독수리 오형제... 그러나 시에 나오는 독수리 오형제는 달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리 이웃이었다.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 아니라 세상에 밀리고 밀려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던 우리의 이웃.

 

시에 이런 이웃들이 많이 나온다. 지금도 우리 곁에 있는 이런 이웃들이... 시인의 탈출기는 여전히 성공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02-24 09: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24 09:2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