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점, 버스나 전철, 기차의 끝. 그러나 그 끝은 멈춤이 아니다. 시작이다.
우리는 종점에 내리더라도 다시 걸어야 한다. 종점은 지금까지 지내온 길의 한 부분이 끝나는 지점이지만, 다른 길이 시작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런 종점에서 다시 출발을 생각한다면, 그렇다. 우리네 인생은 언제나 출발일 것이다.
영원한 멈춤, 그것은 죽음일진대, 죽음 역시 다른 존재로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아무도 모르는 존재로의 시작.
그렇다면 우리에게 영원한 종점은 없다. 더이상 움직일 수 없는 그런 종점은 없다. 끝이라고 생각했을 때, 그곳이 바로 시작점임을 생각하는 자세.
세상이 뒤숭숭하다. 세계 정세부터 시작하여 남북한 관계, 청년들의 실업, 노년들의 생활난, 여기에 이제는 언제 터질지도 모르는 지진까지. 하지만 이것은 끝이 아니다. 우리를 더 나아아게 하는 부분이다. 여기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한다. 주저앉으면 안 된다.
모든 일이 그렇다. 종점은 다른 출발점이니까.
정대구의 시집을 헌책방에서 구했다. 헌책방에 가면 사실 자꾸 눈에 익은 시인의 시집만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사게 된다. 낯선 시인들의 시집도 사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익숙한 것, 이것이 일종의 종점일진대, 그런데도 거기서 한 발 나아가지 않는다. 우선 종점에 주저앉고 본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다. 다시 출발해야 한다.
익숙한 시인에게서부터 시작하여 낯선 시인들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런 내용, 멈추지 않고 가야하는 길.
다른 의미로 이야기하고 있겠지만, 정대구의 '종점에서'를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언제든 우리는 출발해야 한다는 것. 결코 멈춤은 없다는 것.
절망은 곧 희망의 출발점이라는 사실. 종점은 시점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
종점에서
- 신기료 장수에게
종점에서 우리는 또 걸어야 한다.
돌부리를 걷어차고
진흙벌을 짓이기면서
우리는 또 걸어야 한다.
종점에서 해지고
망가진 신을 다시 깁는다
신기료장수는 새 신은 받지 않고
헌 신은 결코 버리지 않는다.
너덜너덜한 헌 신만을 받아서
새 것보다 더 튼튼한 신으로
고쳐 놓는다.
그의 할망구는 벌써 죽었지만
헌 마누라를 얻어서
새 마누라처럼 길들여 살 듯이
그는 너덜너덜한 헌 신만을 받아서
우선 무릎 위에 올려 놓고
정성스레 어루만진다.
먼지를 솔질해 털고
대담하게 도려내기도 하고
세심하게 꿰매기도 하고
마지막으로 왁스를 찍어 바르고
후후 입김을 불어 가며
광까지 낸다.
보람까지 불어 넣는다.
이렇게 해서 몇 푼씩 모은 돈으로
그는 그의 두 아들에게
새 신을 신겨 대학까지 보냈다.
나는 그가 기워 준 신을 신고
발을 굴러 본다
땅이 울리고 흙덩이가 부서지면 부서졌지
구두는 튼튼하다.
이 튼튼한 정신을 딛고
우리는 종점에서 또 일어나야 한다
쓰러지지 않고 새로 시작해야 한다
그의 곧은 바늘과
질긴 실을 생각하며
창조주 같은 그의 따뜻한 손길을 생각하며
그의 대담한 칼질을 생각하며.
정대구, 무지리 사람들, 문학과지성사. 1987년 2쇄. 68-70쪽.
끝에 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이 시 한 번 보기를... 끝이라고 생각했던 곳에도 다시 시작할 힘을 주는 사람이 있음을. 그로 인해 우리는 다시 출발할 수 있음을.
우리 인생에서 끝은 없음을. 우리는 계속해서 자기 길을 가고 있을 뿐. 잠시 멈춰 쉼은 길을 가기 위해 숨을 고르는 과정일 뿐임을.
이 시를 읽으며 이런 위안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