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정상이 아닌 여자... 안면 근육 마비에 이어 몸이 마비되는 병에 걸린 남자

 

  나무를 사랑하는 여자. 초록의 피.

 

  나무는 서로를 피해 가지를 뻗는데, 사람들은 서로 상처를 주는 쪽으로 행동을 한다고 하는...

 

  순수한 것은 오염되기 더 쉽다는 말.

 

  교수의 마당에서 다른 여자의 하이힐을 신고 마당을 절뚝거리며 걷는 여자 주인공.

 

  기형인 다리로 인해 하이힐을 신어보지 못했지만, 그것을 신고도 마당을 벋어나지 못하는 여자.

 

  발표회날 치마를 입고 오지만 그것이 사회에 적응하려는 마지막 몸부림.

 

결국 자신의 숲 속, 유리 정원으로 들어가 버리는 여자. 그에게는 숲이, 나무가 전부다. 아니 나무로 만들려는 남자도 있다.

 

초록피. 그것을 죽은 남자의 몸에 주입을 하지만, 자신의 존재이유를 찾으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눈에는 엽기적인 행각일 뿐.

 

그를 이해하려는 또 한 명 사회에서 소외된 남자. 소설가. 소설가는 현실을 허구 속에서 창조하는 사람. 그에게 작품은 또 하나의 사회.

 

그러나 그 역시 인기작가와의 싸움이 빌미가 되어 문단에서 밀려나고, 무력한 그에게 어느 날 들어온 문구.

 

여자가 살던 집에 쓰여 있던 말. 나무에서 태어났다. 초록의 피라는 말.

 

그는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러나 여자를 이해할 것 같았던 남자 역시 여자를 이해하지 못한다. 여자는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 그녀는 자신의 세계 속에 살 수밖에 없다.

 

유리정원... 여자의 삶은 남에게 보인다. 그리고 여자의 삶이 보호받기에는 유리는 너무 투명하다. 너무도 약하다. 그럼에도 여자의 삶은 계속된다. 여자는 자신의 삶을 지켜나간다.

 

숲의 아름다움. 영상미... 그리고 이상하게 긴박하지 않음에도 전혀 지루하지 않은 전개. 식물성과 동물성의 대비...

 

나무가 되어 버린 여자... 영화의 내용이 자칫하면 상당히 괴기스러워질 수 있는데,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녹혈구'라니. 인간을 만들어내려던 프랑켄슈타인이나 지킬박사처럼 인간의 신체에 무언가를 주입하여 다른 존재를 만들어내려는 것은 괴기스럽고, 엽기적인 느낌을 주는데 이 영화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만큼 과학기술이 발전한 시대를 반영하고 있기는 하겠지만, 주인공이 녹혈구를 주입하려는 이유가 인간을 좀더 강하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미 주인공은 사회에서 배제된 사람이고, 그는 그래서 자기의 자리를 다른 곳에서 찾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바로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고 해치는 공간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돕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아가고 결국 죽어갈 수밖에 없는 주인공. 이런 주인공에게 다가가려 하는 소설가. 하지만 소설은 결코 현실이 될 수 없다. 소설은 소설로 끝나야 한다. 이 소설이 현실로 다가오는 순간 파멸할 수밖에 없다.

 

소설가는 소설보다 더한 현실에 다시 뛰쳐나가고, 결국 다시 돌아오지만 너무 늦었다는 말, 그리고 나무가 되어 버렸다는 말로 끝나게 되는 영화.

 

괴기스러운 소재가 아름다운 이야기로 바뀌고, 주인공이 지내는 유리 정원 숲의 아름다움이 영화를 더욱 아름답게 해주고 있다.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보아야 더 영화의 맛을 느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그런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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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7 09: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kinye91 2017-10-27 09:52   좋아요 1 | URL
과학적 상상력과 영화적 상상력이 결합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자칫 잘못하면 괴기스러운 내용으로 가는데요, 영화의 전개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좋았어요. 동물성 체질보다는 식물성 체질이 확실히 평화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