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전체에서 노동의 냄새가 난다. 아버지를 대상으로 한 노동. 열심히 일했지만, 그것이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한.

 

  시집에서는 터널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산을 이쪽과 저쪽으로 뚫어 길을 내는 터널. 그 터널을 뚫는 노동자, 아버지.

 

  그러나 터널은 노동자의 것이 아니다. 노동자는 터널 속에서 어디가 출구고 어디가 입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냥 일만 한다. 그러다 터널이 뚫리면 그들은 일자리를 잃는다.

 

  일을 계속해서 해야 하는 숙명, 노동자의 모습이다. 그런 시들이 이 시집에 꽤 많은데, 그 중에 '스위치'라는 시에서 '시지포스'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다.

 

스위치

 

그는 왼쪽에서도 휘두르고 오른쪽에서도 휘두른다.

양손을 자유자재로 부릴 줄 아는 거다.

타석을 바꿔가며 타율을 조금이라도 높이려는

스위치 타자, 그야말로 생계형 투잡족이랄까.

습성을 바꾸면서까지 방망이질하는 그에게

쉬는 날은 거의 없지만 그 또한 왼쪽과

오른쪽 중 한 곳은 버려야 하는 것은 매한가지.

이를테면 이런 거다, 평생 오른손으로만 일한

내 아버지가 팔을 굽히지 못하게 되었을 때,

멀쩡한 반쪽으로 일을 다시 시작하였다.

용접봉 대신 야구배트에 불꽃을 일으켰다면

아버지는 팬들에게 큰 박수를 받았을 것이다.

오른팔의 스위치를 내려도 노동을 하다니!

허나 가족들은 캄캄하게 암전된 팔을 그리워했다.

원래 좌우란 힘찬 스윙같이 훅훅, 슬픈 거다.

어느 쪽 타석을 선택해도 순식간에 날아오는

야구공을 향해 방망이를 돌려야 한다.

양어깨의 근육을 공평하게 부풀리는 그를 볼때마다

그의 방망이가 허탕 치길 기대하는 건

생존에 대한 반동이랄까, 회색분자에 대한 질투랄까.

집 안의 스위치를 내리면 아버지는 어둑해지고

이젠 내가 깜빡일 차례, 몸통을 좌우로 돌려 풀면서

한쪽으로 자빠진 타석을 이어받는다. 이 순간은

몸과 마음이 엇박자로 노는 때라서 방향을 쉽게 잃는다.

아버지에게 핸들을 좌우로 비틀며 자전거를 배우듯,

좌우를 가리지 않고 내가 방망이 들고 들어서야 할 곳은

아버지의 숨통이 아닌가. 노장이 떠난 그라운드에

딸깍딸깍 벼락같이 스파크가 일고 있다.

 

백상웅, 거인을 보았다. 창비. 2012년 초판 1쇄. 44-45쪽.

 

스위치.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좌우를 가리지 않고 치는 타자와 불을 들어오게 하기도 꺼지게 하기도 하는 것.

 

그 어느 하나도 한쪽은 버려야 한다. 한쪽을 버려야지만 무언가를 할 수 있다. 노동자들은 둘을 쥐지 못한다. 그들은 어떻게든 살기 위해서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이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상관없다.

 

한쪽이 고장나면 다른쪽으로 일을 해야 한다. 일, 그러나 그 일은 야구에서 타자들이 아무리 잘쳐도 4할을 치지 못하는 것과 같이, 잘치는 타자들을 삼할 타자라고 하듯이, 30%의 성공률밖에는 지니지 못한다.

 

죽어라 일을 하지만 생활은 언제나 제 자리. 왼쪽 오른쪽 가리지 않고 열심히 방망이를 휘두르지만 자신이 설 자리를 점점 잃어간다.

 

이때 스위치는 꺼짐 쪽으로 작동한다. 켜짐이 아니라 꺼짐, 이 꺼짐 속에서 다시 교대로 아들이 등장한다. 아들 역시 아버지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시지포스의 노동. 그러게 깜빡깜빡 스위치에 불을 켜며 생을 이어간다. 노동자 가족들의 모습이다.

 

이제는 노동자들이 스위치의 꺼짐을 걱정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재벌들이 잘 살 수 있는 이유는 노동자들의 노동이 있어서가 아니겠는가. 제헌헌법에 노동자의 이익균점권이 있었다던데, 이제는 그것에 대해서, 그래서 기본소득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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