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승을 부리던 더위도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듯, 인간이 만들어 놓은 그 지긋지긋하던 무더위도 이제는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에 서서히 자리를 비켜주고 있다.

 

  이렇게 여름은 가는구나. 더위와 비로 고생을 한 여름이 한때이듯이 힘들고 지치고 절망과 좌절에 빠뜨린 세월들도 한때였으면 좋으련만.

 

  자연은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있는데, 아직도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소위 배웠다고 하는, 조금은 높은 자리에 있다고 하는, 그런 사람들.

 

  제 잘못은 전혀 보지 못하고, 제 집에 구멍이 나 비가 숭숭 새고, 바람이 솔솔 들어와 찬 바람이 불면 견디지 못할 지경임에도 다른 집 낙서만 손가락질 하고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자연의 섭리를 생각해 보라고 하고 싶다. 올라가면 내려오고, 내려가면 올라갈 일이 있는 것. 아무리 화려해도 결국은 바래고 만다는 것.

 

지금 자신이 높은 곳에 있다고 해도 그 자리에 영원히 앉아 있지는 못한다는 것, 오히려 높은 자리에 있을수록 낮은 곳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

 

남에게 돋보이는 자리가 아니라 제 자리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 삶이 아름답다는 것. 어쩌면 자연에서 하찮은 것이 없듯이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이런 사람들 때문이라는 것.

 

최서림의 시집을 읽다. 집과 말이 이 시집의 주요 소재다. 집, 시간이 갈수록 낡아가는, 그러나 낡아감이 익숙함으로 변해야 하는데, 그 익숙함은 그 집에서 계속 살 때, 그 집을 아끼고 사랑하고 가꿀 때만 그럴 수 있다는 것.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늙어가지 않고 낡아간다. 낡아서 어느 한 순간 폭삭 무너져 버린다. 마찬가지다. 말도. 언어에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 사랑이 없는 말은 칼과 다름 없다. 사랑이 없는 말은 사람과 사람을 맺어주는 관계의 말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끊어버리는 절단의 말이다.

 

그런 말들이 얼마나 많은가. 국제적으로도 관계의 말이 아닌 절단의 말, 단절의 말이 난무하고 있고, 우리나라 안에서조차도 관계의 말이 아니라 절단, 단절의 말들이 난무하고 있으니...

 

말들이 이렇게 가시 돋치고, 날카로움만 지니면 말들로 인해 사람들은 상처받고 소외되기만 한다. 그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낮은 곳을 보지 못한다. 오로지 강한 것, 큰 것, 화려한 것과 같이 노력하지 않아도 보이는 것들을 숭배하게 된다.

 

그런 사회에서 이런 '오랑캐꽃'과 같은 내용은 나올 수가 없다. 아니, 반대다. 시인은 이런 사회이기 때문에 오히려 '오랑캐꽃'과 같은 시를 노래하고 있다.

 

시로써 시인은 사람들의 눈을 틔워주고 있다. 제발 눈 좀 뜨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저절로 보이는 크고, 화려한 것들만이 아니라, 우리가 의식적으로 찾아야 할 작고,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그러나 존재 자체만으로도 소중한 그러한 것들이라고.

 

시를 보자.

 

    오랑캐꽃

 

모든 꽃은 다 꽃을 피운다

바위취, 국수나무 같이

그늘 밑에 자라는 것들도

때가 되면 꽃을 피운다

평생 남의 그늘에 가려

영영 꽃이 없을 것 같은 생명들도

언젠가는 꽃을 피워 올린다

버려진 들판의 찔레꽃 냄새가

담장 안의 장미꽃 향기를 감싸 안듯,

이름이 뭣해서 불러주기 민망한 쥐똥나무

꽃냄새가 화장실 냄새를 덮어주듯,

누군가를 위해 물길처럼 낮아지고

남의 인생을 데워주기 위해

불길처럼 굽어져 본 사람, 한평생

남의 그늘에 가려 제 그늘이 없는 사람도

이른 봄 오랑캐꽃처럼 꽃을 피워

젖은 낙엽을 살짝 밀어 올릴 줄 안다

하늘을 들어 올려 순간

제 그늘을 희미하게 만들 줄 안다

 

최서림, 물금, 세계사, 2011년 초판 2쇄. 37-38쪽 

 

이런 것을 볼 수 있는 시인의 눈. 그리고 우리에게 보여주는 시인의 말. 표현. 그래서 우리는 잊고 있었던 것을 다시 찾을 수가 있다. 시인 덕에.

 

자연의 섭리처럼 사람들 사이에서도 꼭 필요한 것들,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것들이 있음을, 비록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존재들이 있음을, 그 존재들은 그런 존재 자체로 소중함을, 시인은 보여주고 있다.

 

이런 존재들에게 눈길을 줄 때 집은 익숙함으로 늙어가고, 말은 사랑이 넘치는 관계의 말로 바뀔 것이다. 이제는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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